그는 제 정신인가?
- <오아시스>
감독 이창동
주연 설경구, 문소리
글 이신정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종종 "영화를 사랑하느냐?"는 다소 닭살스러운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럴 경우 나는 대개 미적거린다. 그러나 재차 삼차 질문을 받게되면 그제야 마지못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건조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속으로는 이렇게 뇌까린다. "영화야 어차피 현실의 욕구불만과 무기력에 기생하는 푸른 백일몽이 아니던가? 내가 영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마치 엑스레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들을 투사하듯, 영화가 거시적으로는 현실의 정치 사회적인 관계들, 미시적으로는 욕망의 벡터들을 과장해서 드러내기 때문일 뿐이야. 영화를 사랑하느냐고? 순진하기는..." 물론 그렇다고 내가 영화보기라는 쾌락을 무조건 거부하는 청교도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영화보기의 쾌락이 갖는 정당성이란 현실의 결여, 그 부당성이 터무니없이 막대하다는 데서 오는 반대급부일 뿐이다. 나에게 영화의 쾌락이란 가난하고 남루한 삶의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대중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으나 잠시나마 현실의 시름을 잊고 도피할 수 있는 환영적인 오아시스일 뿐이다. 나는 여태껏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창동은 제정신인가? 그는 지금 영화에 대한 애절한 사랑고백, 심지어 경건한 신앙고백을 감행하고 있다. 그것도 닳아빠진 판타지의 이름인 "오아시스"라는 제목으로. 나는 지금 그의 열정적인 고백의 진정성에, 그 통제할 수 없는 신앙의 에너지에 완전히 나자빠져 버렸다. 그는 <오아시스>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종두를 통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제 멋대로인 그는 사회부적응자이며 심지어 가족의 눈에조차 그들의 인생에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일 뿐이다. 착하기는 한 것 같은데 도무지 철이 없는, 그래서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그런 존재이다. 그런데 그가 뇌성마비 여인인 공주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사지는 뒤틀리고, 혀조차 굳어 간절한 말 한마디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그녀는 남한이라는 혹독한 공간, 뒤틀린 역사와 뻔뻔스러운 정치, 그리고 빈곤한 문화와 가혹한 자본주의가 만드는 일상에 구속된 이 시대의 대중들, 특별히 영화관객이다. 그들은 인간의 몸짓과 언어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그녀의 방 한 쪽에는 초라한 벽걸이 카페트가 걸려있다. 암시랄 것도 없이 명백히 영화 스크린을 비유하는 이 카페트에는 오아시스가 그려져 있다. 귀에 닳은 라디오 소리와 함께 공주가 하루 종일 쳐다볼 수밖에 없는 이 장식물은 창 밖의 가로수가 드리우는 나뭇가지의 그림자로 뒤덮여 있다. 그림자는 남루한 오아시스를 기괴하게 만든다. 이 그림자야말로 영화를 현실과 무관한 환영으로 묶어둔 채, 때로 사회문제의 희생양으로 손가락질하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일확천금을 챙기는 복마전쯤으로 여기는 이 시대 가졌다는 놈들, 배웠다는 놈들의 파렴치한 작태가 만드는 흙탕물이 아니겠는가? 흉흉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오아시스 그림이 공주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전락했듯, 영화는 이 시대의 대중들에게 반복 충동을 재생산하는 강박증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공주와의 관계 속에서 홍장군이 된 종두는 마술을 걸어 오아시스에 드리운 그림자를 지운다. 그러나 이는 종두와 공주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만드는 또 하나의 환영이 아니다. 그들은 함께 거리로 나가 이들을 비정상으로 틀 지우는 현실의 고정된 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단순히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청계 고가도로에서 "홍장군"이 "공주마마"를 안고 춤추는 장면은 이창동 감독이 영화에 대해 갖는 희망의 최대치를 극적으로 재현한다. 그 장면은 그가 영화를 매개로 이 시대의 관객들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 질곡의 상징인 청계 고가도로를 점령하고 그곳을 재창조를 향한 신명나는 춤판으로 만들겠다는 사자후이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 속에는 나의 분신도 있었다. 마침내 종두와 공주가 몸을 섞는 아름다운 의식을 깽판내고 그를 성폭행 현행범으로 끌고 간 형사가 그에게 묻는다. "너 변태지? 너는 그런 여자 앞에서 그게 서냐?" 그의 대사는 "사랑하느냐고? 순진하긴..."이라는 나의 뇌까림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겹쳐진다.
구약성서의 엘리야라는 예언자는 오랜 기근에 시달리는 마을에서 과부와 외아들만이 살고 있는 집에 들러, 그들의 마지막 양식인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을 자신에게 내오라고 명령한다. 가난한 신자들의 마지막 한 푼마저 긁어내려는 성직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이 에피소드의 의미를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신성을 지배자의 도구로 전유하려는 자들과 평생에 걸쳐 투쟁해 온 이 예언자의 먹거리야말로 제 언어와 몸짓을 빼앗긴 하위주체들의 고통과 절망이었던 것이다. 나는 영화가 끝나자 서둘러 일어나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켰다. 영화 속에서 번듯한 음식점에서 쫓겨난 그들이 초라한 카센타에서 자장면을 시켜 그토록 맛나고 정겹게 먹던 장면을 생각하며, 신앙인이자 영화를 공부하는 내가 무엇으로 양식을 삼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 <오아시스>
감독 이창동
주연 설경구, 문소리
글 이신정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종종 "영화를 사랑하느냐?"는 다소 닭살스러운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럴 경우 나는 대개 미적거린다. 그러나 재차 삼차 질문을 받게되면 그제야 마지못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건조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속으로는 이렇게 뇌까린다. "영화야 어차피 현실의 욕구불만과 무기력에 기생하는 푸른 백일몽이 아니던가? 내가 영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마치 엑스레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들을 투사하듯, 영화가 거시적으로는 현실의 정치 사회적인 관계들, 미시적으로는 욕망의 벡터들을 과장해서 드러내기 때문일 뿐이야. 영화를 사랑하느냐고? 순진하기는..." 물론 그렇다고 내가 영화보기라는 쾌락을 무조건 거부하는 청교도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영화보기의 쾌락이 갖는 정당성이란 현실의 결여, 그 부당성이 터무니없이 막대하다는 데서 오는 반대급부일 뿐이다. 나에게 영화의 쾌락이란 가난하고 남루한 삶의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대중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으나 잠시나마 현실의 시름을 잊고 도피할 수 있는 환영적인 오아시스일 뿐이다. 나는 여태껏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창동은 제정신인가? 그는 지금 영화에 대한 애절한 사랑고백, 심지어 경건한 신앙고백을 감행하고 있다. 그것도 닳아빠진 판타지의 이름인 "오아시스"라는 제목으로. 나는 지금 그의 열정적인 고백의 진정성에, 그 통제할 수 없는 신앙의 에너지에 완전히 나자빠져 버렸다. 그는 <오아시스>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종두를 통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제 멋대로인 그는 사회부적응자이며 심지어 가족의 눈에조차 그들의 인생에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일 뿐이다. 착하기는 한 것 같은데 도무지 철이 없는, 그래서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그런 존재이다. 그런데 그가 뇌성마비 여인인 공주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사지는 뒤틀리고, 혀조차 굳어 간절한 말 한마디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그녀는 남한이라는 혹독한 공간, 뒤틀린 역사와 뻔뻔스러운 정치, 그리고 빈곤한 문화와 가혹한 자본주의가 만드는 일상에 구속된 이 시대의 대중들, 특별히 영화관객이다. 그들은 인간의 몸짓과 언어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그녀의 방 한 쪽에는 초라한 벽걸이 카페트가 걸려있다. 암시랄 것도 없이 명백히 영화 스크린을 비유하는 이 카페트에는 오아시스가 그려져 있다. 귀에 닳은 라디오 소리와 함께 공주가 하루 종일 쳐다볼 수밖에 없는 이 장식물은 창 밖의 가로수가 드리우는 나뭇가지의 그림자로 뒤덮여 있다. 그림자는 남루한 오아시스를 기괴하게 만든다. 이 그림자야말로 영화를 현실과 무관한 환영으로 묶어둔 채, 때로 사회문제의 희생양으로 손가락질하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일확천금을 챙기는 복마전쯤으로 여기는 이 시대 가졌다는 놈들, 배웠다는 놈들의 파렴치한 작태가 만드는 흙탕물이 아니겠는가? 흉흉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오아시스 그림이 공주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전락했듯, 영화는 이 시대의 대중들에게 반복 충동을 재생산하는 강박증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공주와의 관계 속에서 홍장군이 된 종두는 마술을 걸어 오아시스에 드리운 그림자를 지운다. 그러나 이는 종두와 공주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만드는 또 하나의 환영이 아니다. 그들은 함께 거리로 나가 이들을 비정상으로 틀 지우는 현실의 고정된 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단순히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청계 고가도로에서 "홍장군"이 "공주마마"를 안고 춤추는 장면은 이창동 감독이 영화에 대해 갖는 희망의 최대치를 극적으로 재현한다. 그 장면은 그가 영화를 매개로 이 시대의 관객들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 질곡의 상징인 청계 고가도로를 점령하고 그곳을 재창조를 향한 신명나는 춤판으로 만들겠다는 사자후이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 속에는 나의 분신도 있었다. 마침내 종두와 공주가 몸을 섞는 아름다운 의식을 깽판내고 그를 성폭행 현행범으로 끌고 간 형사가 그에게 묻는다. "너 변태지? 너는 그런 여자 앞에서 그게 서냐?" 그의 대사는 "사랑하느냐고? 순진하긴..."이라는 나의 뇌까림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겹쳐진다.
구약성서의 엘리야라는 예언자는 오랜 기근에 시달리는 마을에서 과부와 외아들만이 살고 있는 집에 들러, 그들의 마지막 양식인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을 자신에게 내오라고 명령한다. 가난한 신자들의 마지막 한 푼마저 긁어내려는 성직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이 에피소드의 의미를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신성을 지배자의 도구로 전유하려는 자들과 평생에 걸쳐 투쟁해 온 이 예언자의 먹거리야말로 제 언어와 몸짓을 빼앗긴 하위주체들의 고통과 절망이었던 것이다. 나는 영화가 끝나자 서둘러 일어나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켰다. 영화 속에서 번듯한 음식점에서 쫓겨난 그들이 초라한 카센타에서 자장면을 시켜 그토록 맛나고 정겹게 먹던 장면을 생각하며, 신앙인이자 영화를 공부하는 내가 무엇으로 양식을 삼아야 할지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