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나물은 사람이 가꾸지 않아도 절로 자라고
들짐승도 사람이 기르지 않아도 절로 자리니,
그 맛이 다 향기롭고 또한 맑은 것이다.
우리 사람들도 능히 세상 법도에 물들지 아니하면
그 맛이 뛰어나 별다를 것이 아닌가. <채근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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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자연에 있는 뭇생명들은 모두 스스로 커 갈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이 땅에서 살아간다.
마치 작은 도토리 안에 큰 상수리 나무로 커 갈 무엇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그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사람이건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사람만이 여러 가지 제도와 규칙과 법과 관습들을 만들어
그것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랫세대들에게 전하려고 애쓴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의 경험치에서 얻고 느낀 것을 그대로 고스란히 전하려 하고
(또는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이기에 고스란히 그것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고 하고)
선생은 학생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그저 가르쳐서 배우도록 하려고만 한다.
산나물과 들짐승은 가꾸지 않아도 절로 자라는데
어찌해서 자연의 일부에 불과한 사람은 산나물, 들짐승과 다르다고 목청 높이면서
자꾸만 가꾸려고 하는지.
사람이 아무리 용을 써 보아야 그 또한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에 지나지 아니한 것을.
어찌 사람만이 자연의 이러한 이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
절로 자라는 것이 자연 안에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의 본질인 것을.
세상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보다는
하나의 커다른 흐름으로 한 방향으로만 가려고 한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큰 것과 덩어리짐의 효율성만을 얘기한다.
그래야 돈이 되고 경쟁력이 있다면서.
아이들은 모두 성공하기 위해 공부해야 하고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직장 얻어야 한다고 어른들은 말한다.
온 나라의 아이들이 영어에 목매여야 하고 컴퓨터도 잘 해야 한다.
하지만 돌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들이 세상의 법도에 물드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본과 상업의 논리와 사회의 허황된 풍토에
이제 무엇이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이고 소중한 것인지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흐려졌다.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가치로운 것이 아니라
마치 꼭 필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가치로운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 하다 보니 사람이 본디 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그만의 향기와 맑음을
살아가면서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바대로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네 세상도 서로 자유로이 살아가면서 더 향기롭고 맑아지지 않겠는가.
400여 년 전 중국 명나라 신종 때 사람인 홍자성의 글이
지금 이때에도 여전히 '삶의 도'로 다가올 수 있는 까닭은
우리네 삶이 여전히 어지럽다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무가 한 자리에서 400년을 아무런 흔들림 없이 고요히 커 가는 동안
사람들은 400년 동안 어떤 마음을 키우며 살아왔는지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음이다.(2006. 11. 24. 쇠날 차돌)
들짐승도 사람이 기르지 않아도 절로 자리니,
그 맛이 다 향기롭고 또한 맑은 것이다.
우리 사람들도 능히 세상 법도에 물들지 아니하면
그 맛이 뛰어나 별다를 것이 아닌가. <채근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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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자연에 있는 뭇생명들은 모두 스스로 커 갈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이 땅에서 살아간다.
마치 작은 도토리 안에 큰 상수리 나무로 커 갈 무엇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그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사람이건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사람만이 여러 가지 제도와 규칙과 법과 관습들을 만들어
그것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랫세대들에게 전하려고 애쓴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의 경험치에서 얻고 느낀 것을 그대로 고스란히 전하려 하고
(또는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이기에 고스란히 그것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고 하고)
선생은 학생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그저 가르쳐서 배우도록 하려고만 한다.
산나물과 들짐승은 가꾸지 않아도 절로 자라는데
어찌해서 자연의 일부에 불과한 사람은 산나물, 들짐승과 다르다고 목청 높이면서
자꾸만 가꾸려고 하는지.
사람이 아무리 용을 써 보아야 그 또한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에 지나지 아니한 것을.
어찌 사람만이 자연의 이러한 이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
절로 자라는 것이 자연 안에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의 본질인 것을.
세상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보다는
하나의 커다른 흐름으로 한 방향으로만 가려고 한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큰 것과 덩어리짐의 효율성만을 얘기한다.
그래야 돈이 되고 경쟁력이 있다면서.
아이들은 모두 성공하기 위해 공부해야 하고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직장 얻어야 한다고 어른들은 말한다.
온 나라의 아이들이 영어에 목매여야 하고 컴퓨터도 잘 해야 한다.
하지만 돌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들이 세상의 법도에 물드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본과 상업의 논리와 사회의 허황된 풍토에
이제 무엇이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이고 소중한 것인지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흐려졌다.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가치로운 것이 아니라
마치 꼭 필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가치로운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 하다 보니 사람이 본디 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그만의 향기와 맑음을
살아가면서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바대로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네 세상도 서로 자유로이 살아가면서 더 향기롭고 맑아지지 않겠는가.
400여 년 전 중국 명나라 신종 때 사람인 홍자성의 글이
지금 이때에도 여전히 '삶의 도'로 다가올 수 있는 까닭은
우리네 삶이 여전히 어지럽다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무가 한 자리에서 400년을 아무런 흔들림 없이 고요히 커 가는 동안
사람들은 400년 동안 어떤 마음을 키우며 살아왔는지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음이다.(2006. 11. 24. 쇠날 차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