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학교 씨앗글
나는 빛나는 존재니까 소중히 대해줘야 해요

유수진 꽃피는학교 교사 mica.hodoo@gmail.com

 

꽃피는학교의 1학년 아이들에게는 세상은 온통 새로운 것들 투성입니다. 봄학기에는 세상을 모두 글자들로 보이게 하더니 여름학기부터는 내 주변의 것들을 온통 숫자들로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꽃피는학교의 1학년 아이들에게 여름학기까지 주어지는 수학적 과제는 ‘숫자들에 담긴 뜻 알기’입니다. 아이들과 나눌 때는 거창하게 ‘의미’니 ‘철학’이니 라는 말보다는 ‘우리가 숫자를 왜 배우는 것일까? 숫자와 나는, 숫자와 우리는, 숫자와 내 주변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몸소 체험해 보게 하는 것들로 풀어가지요.

 

한 시간의 흐름

지난 호에 소개한 것과 같이 우리 학교 수업은 모든 시간이 들숨과 날숨이 있습니다. 들숨으로 교실에 모여 인사를 하는데, 이때 동그랗게 모여 윤무와 함께 여는 시를 외웁니다.
 
수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세상에서
착한 마음, 맑은 생각으로
기쁘게 공부하는
소중한 우리가 되겠습니다.

 

여는 시는 주로 그 수업을 통해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지,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내용을 담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구실을 하지요. 이에 아이들은 여는 시를 외우면서 어렴풋이 이 시간에 ‘수’라는 것을 배운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여는 시를 외우며 서로 눈인사를 한 후, 다시 날숨. 여는 노래를 율동과 함께 부릅니다.
 
하나를 부르네. 하늘 문 열어라.
하늘 꽃 씨 하나를 내 마음에 심었네.
손 모아 마음 모아 기도를 드리네.
해님도 하나요, 달님도 하나요, 우리도 하나요.
우리는 일학년 우리는 일학년이지.

둘 둘을 부르네. 하늘 문 열어라.
고이고이 심은 꽃 씨 두 잎을 틔우네.
두 팔을 벌리네 양 손을 벌리네.
하늘과 땅 둘이오, 낮과 밤이 둘이오, 내 팔도 둘이오.
내 다리도 둘이오. 내 다리도 둘이지.

셋 셋을 부르네. 하늘 문 열어라.
두 개의 잎 사이로 꽃 한 송이 피웠네.
셋을 이루네, 조화를 이루네.
내 마음도 즐거워 세 박자 춤추네. 덩실덩실 춤추네.
꽃과 함께 춤추네. 꽃과 함께 춤을 추지.

 

이 노래는 학교 선생님들이 노랫말을 짓고 곡을 붙인 것입니다. 숫자 1을 배우는 날에는 ‘하나를 부르네.’만 부르고 숫자 2를 배우는 날에는 ‘둘 둘을 부르네.’까지 배우고, 숫자 3을 배우는 말에는 ‘셋 셋을 부르네.’까지 이런 식으로 한 절 한 절씩 중첩되도록 불렀습니다.
이번 학기에 우리 아이들은 6까지만 배웠는데, 여름학기라 해의 기운이 높아져 갈수록 아이들 기운도 점점 떠가고 있어서 여는 노래도 중간에 밝고 경쾌한 것으로 바꾸어야 했지요. 그래서 4부터는 조금 빠른 박자의 노래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하나를 부르지, 개암나무 열어라.
하나는 무얼까, 하나는 하늘이지 언제까지 하나.

둘, 둘을 부르지, 개암나무 열어라.
둘, 둘은 무얼까, 둘, 둘은 낮과 밤, 낮과 밤은 둘이야. 하나는 하늘이지 언제까지 하나.

셋, 셋을 부르지, 개암나무 열어라.
셋, 셋은 무얼까, 셋은 모두 좋은 일들. 둘, 둘은 낮과 밤, 낮과 밤은 둘이야. 하나는 하늘이지 언제까지 하나.

넷, 넷을 부르지, 개암나무 열어라.
넷, 넷은 무얼까, 넷, 넷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넷 넷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셋은 모두 좋은 일들. 둘 둘은 낮과 밤, 낮과 밤은 둘이야. 하나는 하늘이지 언제까지 하나.

다섯을 부르지, 개암나무 열어라.
다섯은 무얼까, 다섯 다섯은 한 손의 손가락. 넷 넷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셋은 모두 좋은
일들, 둘 둘은 낮과 밤, 낮과 밤은 둘이야. 하나는 하늘이지 언제까지 하나.

여섯을 부르지, 개암나무 열어라.
여섯은 무얼까, 여섯 여섯은 수정·눈꽃·벌집이야. 다섯 다섯은 한 손의 손가락. 넷 넷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셋은 모두 좋은 일들. 둘 둘은 낮과 밤 낮과 밤은 둘이야. 하나는 하늘이지 언제까지 하나.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난 후, 손과 발을 모두 이용하는 수 세기 놀이를 합니다. 아이들이 원을 만들고 둥그렇게 서고 교사는 원의 중앙에 들어가는 모양새입니다. 작은 공 하나를 들고 있는 교사는 아이 한 명에게 눈을 맞추고, 숫자를 외치며 공을 가슴께에 던져줍니다. 그럼 공을 받은 아이는 교사가 부른 숫자의 다음 숫자를 외치며 다시 교사에게 공을 던져줍니다. 일종의 주고받기 놀이인데, 이 놀이에 숫자 1부터 10까지 세기를 결합한 형태입니다. 처음엔 예측할 수 있는 상태로 공을 주고 받습니다. 교사가 처음 공을 주고받은 아이를 기준으로 시계방향으로 돌거나 반시계방향으로 돌면서 공을 주고받는 것이 그것이지요.
이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공을 던지고 받습니다. 교사가 언제 몸을 휙 돌려서 자신에게 공을 주게 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날숨’의 순간이지만 순간적으로 집중하는 ‘들숨’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1부터 10까지 세기 놀이를 어느 정도 익숙하게 할 때까지 공주고 받기의 방식은 다양하게 변화합니다. 처음엔 교사와 아이가 번갈아 가며, 서서 주고받기. 다음엔 앉아서 굴려 주고받기, 다음엔 아이와 아이가 번갈아 가며 서서 주고받기, 앉아서 굴려 주고받기 등등으로요.
몸놀이와 발놀이의 경우, 공을 주고받으며 수 세기가 익숙해질 때쯤 다른 놀이로 변화를 주었습니다. 전통적인 고무줄놀이를 도입한 것이죠.

 

월계 하계 수수 목단 금단 초단 일

 

이 노래에 맞추어 우선 발목 높이에 고무줄을 놓고는 평행하게 있는 고무줄을 기준으로, 양 발을 고무줄 밖에 두었다가 뛰며 고무줄 안쪽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뛰며 고무줄 밖으로 나가는 행동을 반복하는 1단. 양쪽 발 사이에 고무줄 한 줄이 놓이도록 발들을 놓았다가 평행한 다음 한 줄이 또 양쪽 발 사이에 놓이도록 뛰며 두 고무줄을 왔다 갔다 하는 2단. 왼쪽 발은 고무줄을 밟고 오른쪽 발은 고무줄을 밟지 않은 상태에서 뛰어 왼쪽 발은 고무줄을 놓고 오른쪽 발은 고무줄을 밟는 이 행동을 양쪽 번갈아 교차하는 3단. 양 발을 평행한 고무줄 밖에 두었다가 뛰면서 두 평행한 고무줄을 양 발로 밟고, 다시 뛰면서 양 발을 고무줄 밖에 두는 행동을 반복하는 4단.
이렇게 고무줄놀이를 익힌 후에 각 단의 고무줄 활동을 하며 1부터 10까지 세는 놀이를 했습니다. 고무줄놀이는 발을 정확한 위치에서 고무줄을 밟았다 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집중을 요하기도 하고 발의 감각을 깨우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한차례의 날숨의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은 숨을 고르며 다시 들숨. 이야기 듣기를 합니다. 그날 배울 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전 시간에 배운 수 이야기를 다시 재인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지요. 이 시간에 아이들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신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기도 하고 허구의 세계 속을 진짜 세계인양 유영하듯 즐기기도 합니다. 

이야기 듣기 시간이 끝이 나면, 아이들은 이야기와 관련되거나 그 날의 숫자와 관련된 실험을 하나씩 합니다. 숫자와 관련된다는 것은 그 수에 담긴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경험해 보게 하는 활동을 말합니다.
실험이나 경험 활동을 끝낸 후, 아이들은 주변에서 그 숫자와 관련된 것들을 찾아서 발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예를 들어 “둘이 꼭 한 짝처럼 붙어 다니는 것을 찾아보자.”고 하면 “두 눈, 두 손, 두 팔, 두 다리, 콧구멍, 두 귀, 엄마와 아빠, 형과 나” 등등으로 대답하는 방식이죠.
한참을 이렇게 그날 배울 수에 관한 활동들을 마치고 나면 책상을 원형의 형태로 배치하여 앉습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기다리는 칠판을 보게 되는데, 칠판 속에는 그 ‘수’를 상징하는 그림과 그 ‘수’를 표시하는 기호 ‘숫자’와 그 의미를 짧게 압축한 ‘의미 낱말이나 문장’이 들어있습니다.
한 차례의 공책 정리가 끝나면 책상을 다시 원래의 자리에 놓고 교실 한 가운데로 모입니다. 그날 배운 여는 노래를 한 번 더 불러보면서 그 ‘수’의 의미를 몸 안에 또 한 번 새깁니다. 그리고는 마침인사를 하고 한 시간을 마무리하지요.

 

온전한 하나, 일(1). 가장 소중하고 귀한 나

꽃피는학교의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1학년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숫자 세기를 처음 배우는 아이는 없습니다. 부모님께서 시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변 친척들이나 이웃들과 함께 있으면서 적어도 1부터 10까지 세는 것은 입으로든, 손가락으로든, 숫자로든 어렴풋이 익히고 들어오는 것이죠.
하지만 아이들은 각각의 숫자 기호에 담긴 수들의 비밀스런 이야기는 짐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수’로 배운 것이 아니라 ‘숫자 기호’를 노래처럼 외웠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하나’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시간은 가장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수’들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하고 의미를 찾게 하려면 첫 단추부터 잘 끼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옛날 옛날,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이 조용하고 어두컴컴하기만 하던 어느 때에!
하느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을 만드시고 땅을 만드신 후에 식물과 동물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처음에는 온갖 식물과 동물(우리 반의 경우, 이 이야기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나무, 꽃, 곤충들의 이름들을 대신 넣어주었음)들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하느님은 하느님과 똑같이 닮은 존재를 그 세상에 함께 어울리게 하고 싶어지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느님의 모습과 마음을 그대로 닮은 사람을 땅 위에 우뚝 서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땅 위에 우뚝 선 사람은, 하늘에 감사드리고 땅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후 아이들은 ‘온전함’이라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체험해 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운동장에 나가서 그 하나로 완성된 존재인 나무 옆에 서서 나무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하고 나무에 기대보기도 하고 나무를 만져보거나 냄새를 맡아보기도 합니다. 그러고는 몸으로 ‘나무’를 표현해 봅니다.
그 다음에는 내 몸만 이용해서 ‘해님’을 만들어보고 ‘씨앗’을 만들어봅니다. 씨앗을 몸으로 표현해 본 후 아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아보았습니다.

교사: 교실 앞의 꽃밭을 한 번씩만 보고 올까요, 우리? 어떤 꽃들이 보이나요?
아이들: 산국화요, 봉숭아요, 우리가 입학식 때 받은 채송화요.

 

교사: 아, 그래요. 우리 꽃밭의 꽃들은 다들 우리가 입학식 때 씨앗 주머니로 어머님께 받은 선물을 심은 것이었죠. 그런데, 꽃밭에 있는 꽃들을 잘 보세요. 꽃도 있고 또 무엇도 있죠?
아이들: 나뭇잎! 꽃잎! 열매 같은 것도 있어요.

 

교사: 어? 그래요? 그것 참 이상하다. 우리는 분명히 꽃씨 하나만 심었는데요. 어떻게 씨앗 하나만 심었는데 꽃잎, 나뭇잎, 열매 같은 것들이 생겨난 걸까요? 거 참 이상하다. 어찌된 일이죠?
아이들: 그때 채송화 씨앗이 아주 아주 아주 쬐그맸잖아요. 어떤 씨앗은 꽃잎이 되고 어떤 씨앗은 나뭇잎이 되고 어떤 씨앗은 열매가 되었나 봐요.

 

교사: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럼 꽃밭에는 어디는 열매만 잔뜩 있고 어디는 나뭇잎만 잔뜩 있고 어디는 꽃잎만 잔뜩 있겠네요. 와~ 신기하다.
아이들: 아니에요, 선생님. 꽃이랑 나뭇잎이랑 열매는 다 붙어 있어요. 음~ 이상하네. 어떻게 된 거지?

 

교사: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꽃이랑 잎이랑 열매는 하나에 다 붙어 있는 걸요? 흠… 그럼 씨앗 하나에서 다 그렇게 나온 건가?
아이들: 아~ 맞다. 맞아요, 맞아요. 씨앗 하나에서 다 나온 건가 봐요. 와~ 신기하다. 어떻게 그 쬐그만 씨앗에 꽃이랑 나뭇잎이랑 열매가 다 있었지?
 
이 정도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난 후, 아이들에게 씨앗 하나에 들어있는 온전함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의 온전함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씨앗 하나에 줄기가 될 것들과 꽃이 될 것들, 잎이 될 것들 그리고 열매가 될 것들이 다 들어있는 것처럼 여덟 살인 우리 안에도 지금 우리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모습이 다 들어 있답니다. 지금 여러분의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도 이미 여러분처럼 작은 여덟 살이었을 때 이미 지금의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어른으로 자랄 씨앗들이 다 들어 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하느님과 똑같은 모습과 마음을 지니도록 소중하게  만드셨으니까요.
여러분 안에도 이다음에 커서 여러분만 한 아들을 둘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과 손자를 둘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이미 싹으로 다 들어 있답니다.

 

이때, 한 아이가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요, 선생님. 그럼 왜 우리 옆집 아저씨처럼 못된 어른도 있는 거예요? 지난번에 우리 아빠랑 싸웠는데, 그 아저씨는 정말 못 됐어요. 욕도 막하고.”

 

우리 안에는 모두 멋지고 튼튼하게 자랄 잎과 꽃과 줄기와 열매들이 들어있는데, 우리가 그걸 잊고 살 때가 많아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소중한 것들을 선물 받은 귀한 존재라는 걸 늘 잊지 않고 가꿔줘야 하거든요. 우리가 봄에 심은 꽃씨들도 우리가 물을 주고 햇빛을 보게 해 주고 관심을 가져줘서 다 저렇게 큰 것처럼요.
여러분의 아버지들과 할아버님들도 다들 그렇게 열심히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 주고 하면서 마음속의 선물들을 소중히 키워 오셨기 때문에 지금 그렇게 훌륭하고 멋진 어른이 되어 있으신 거예요. 그 옆집 아저씨도 잊었던 마음을 다시 기억해 낸다면, 원래의 모습처럼 좋은 아저씨가 되실 수 있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맺고 나면,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기의 몸 여기저기를 조심조심 만져봅니다. 그리고는 흐트러졌던 자세를 다시 한 번 고쳐 바로 잡아보기도 하고 얼굴 표정도 환하게 바꾸어 놓지요.
“나는 하느님과 똑같이 만들어졌으니까, 소중하게 대해야해.”라고 말하면서요.

사실, ‘하나’라는 것은 그 자체로 온전함을 지닌 숫자이기에 이 정도로만 해도 아이들은 충분히 ‘하나’를 음미했고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아이들과 공책으로 정리를 하고 다시 한 번 마음으로 새기는 작업을 하지요.
 

너와 나, 둘(2)이 만나 조화로운 우리
아이들에게 ‘둘’의 의미는 어떻게 받아들이게 해야 할까요? 제가 의도한 것은 그 자체로 온전한 ‘나’와 그런 나만큼이나 온전한 ‘너’가 만나서 모두가 소중한 ‘우리’가 된다는 것을 아이들이 몸으로 느끼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는 시와 여는 노래를 마친 후, 아이들과 내 몸에서 꼭 두 개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눈, 팔, 다리, 콧구멍, 귀, 무릎, 엉덩이, 팔꿈치, 눈썹 그리고 윗니와 아랫니. 아이들이 찾아내는 것은 참으로 무궁무진했습니다.
몸에서 찾아보는 활동을 끝낸 후 우리는 운동장으로 나갔습니다. 운동장 한 가운데에는 천으로 된 끈 두 벌과 주황색 공이 놓여있었지요. 빗금을 긋고 출발선을 표시했습니다. 아이들은 형님들처럼 몸과 마음(체육)시간이 된 줄 알고 마냥 신나합니다.
둘 씩 짝을 지어 2인 3각 달리기를 해 보고, 친구와 나 사이에 공을 넣되 손이라 팔로 공을 받치지 않고 공을 잡아 나무를 반환점 삼아 돌고 오는 놀이를 합니다. 아이들은 처음엔 의욕만 앞서서 넘어지기도 하고 공을 떨어뜨리기도 하다가 점차 두 사람이 어떻게 힘을 합쳐야 서로가 다치지 않고 함께 달릴 수 있는지, 걷는 속도와 공을 받치는 배의 힘을 어떻게 조절해야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함께 걸을 수 있는지를 알아갑니다.
교실로 다시 들어오는 길. 몸놀이를 하기 위해 운동장에 나갈 때와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어깨동무를 하기도 하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이유 없이 깔깔대며 웃기도 합니다. 짧은 동작들인데도 짝지가 되었던 그 친구가 새삼 고맙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둘이 함께해야 하는 일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습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심보가 아주 아주 고약한 심술쟁이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어찌나 못 되게 굴었던지 스님들이 와서 시주를 해 달라고 하면 스님들의 바랑에 쌀 대신 똥을 넣어주기도 하고, 거지들이 와서 동냥이라도 할라치면 바가지에 모래를 잔뜩 담아주고는 볼기를 쳐서 내 보내기 일쑤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꿈에서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승사자는 할아버지에게 좋은 여행을 시켜주겠다며 ‘어둠나라’로 데려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둠’은 나쁜 곳인 줄만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으리으리한 식탁에 진수성찬이 가득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곳이면 살 만하겠구나.’ 생각하고 있던 그때, 어둠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어둠 나라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모양이 이상했습니다. 어찌나 길던지 음식을 떠서 제 입으로 가져올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아우성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어도 수저로 떠서 제 입에 넣을 수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겠지요. 할아버지는 ‘어둠나라는 맛난 음식이 있어도 저리 먹지 못하니 별로 좋은 곳은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저승사자가 다음으로 데려간 곳은 ‘밝음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밝음 나라도 어둠 나라처럼 똑같은 음식에 똑같은 수저가 놓여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밝음 나라인가? 어둠 나라와 똑같은데.’ 이렇게 생각하려는 찰나, 할아버지는 밝음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그 맛있는 음식들을 즐겁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꿈에서 깬 할아버지는 그날부터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자기가 가진 것들을 함께 나누는 착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밝음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그 음식들을 다 먹을 수 있었을까요?

 

이야기를 들려준 후, 아이들에게 실제 아이들의 팔 길이의 두 배가 되는 숟가락을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미숫가루가 담긴 그릇을 가운데 자리에 놔 주고는 친구와 마주 보고 앉아서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 이야기 해보자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고심 끝에 찾아낸 것은 맞은 편 친구에게 떠먹여 주기.
처음 활동을 할 때는 아이들은 그저 입에 넣어주기만 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건성 건성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어떻게 하면 상대방 친구의 입 주변에 묻히지 않고, 친구가 편하게 먹을 수 있게 떠 넣어줄 수 있을까 요리조리 행동해 보지요. 그러면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을 배웁니다. 미숫가루를 입으로 받는 아이 또한 상대방이 힘들이지 않고 자기에게 줄 수 있도록 몸을 이리저리 맞춰주고 상대방과 눈을 맞추곤 하니까요.
미숫가루가 꿀맛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내 앞에 함께 있는 친구도 소중하고 감사한 존재임을 그렇게 깨닫고 나면, 수업이 끝날 때 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교실 문을 나설 때 어깨동무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운 존재,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되면서 ‘우리’를 배우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온전한 사람을 만들어주셨지만, 혼자인 것이 외로웠던 사람은 간절히 기도하여 짝을 이룰 친구를 보내달라고 청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후, 아이들과 공책 정리를 합니다. 공책 정리를 하면서도 옆 친구를 한 번씩 보면서 빙긋이 웃어주기도 해요.
 

그 다음의 숫자들 이야기
하나와 둘의 의미를 배우고 난 후, 온전한 두 사람이 만나 소중한 새 생명이 탄생하는 ‘셋’을 이야기합니다. 셋이 되면서부터 모든 것이 완성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배우지요.
그 다음으로는 ‘넷’. 셋이 모여 이룬 가족 다음에 오는 우리의 이웃을 배우게 되는 ‘수’입니다.
‘나’에서 시작해서 ‘우리’, ‘가족’, ‘이웃과 같은 주변 사람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까지 나아가는 것. 이것이 꽃피는학교에서 1학년 아이들과 함께 ‘수’를 배우는 가장 큰 목적입니다. ‘나’ 하나에서 시작되는 관계의 씨앗이 점점 더 넓어지는 ‘우리’로 나아가는 과정. 거기서 내가 온전하게 바로 서고, 상대방의 온전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우리 모두가 굳건하게 설 수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아이들에게 느끼게 해 주고 싶은 바람이 이 수업에 담겨있다고 한다면, 아이들에게는 아직은 너무 큰 욕심을 내는 것일까요?
하지만, 아이들이 지금은 그것들을 자기들의 언어로 표현해내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몸으로 기억하는 ‘나’와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바른 결들로 차츰차츰 쌓여 가리라 믿어봅니다. 1부터 10까지, 1부터 100까지 기능적으로 수를 세어가는 것보다는 우리가 왜 그 숫자들을 배우는지를 한 번은 생각해 보고 가자는 것. 이것이 꽃피는학교에서의 첫 ‘수학’ 수업입니다.

기나긴 여름 방학의 중간. 이제 곧 시작될 가을 학기에 우리 반 아이들은 또 얼마나 볕에 그을려 돌아올까요. 못 본 사이에 또 한 뼘씩 커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배움 여는 날이 기다려집니다. 아이들이 있어야 교사도 ‘꽃을 피울 수 있음’을 알려주는 고마운 녀석들. 그 아이들과 또 한바탕 지지고 볶아댈 가을 학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