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습관적으로 신문을 사들고 전철을 타다, 문득 신문 한 부의 무게가 불편하도록 묵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신문은 자꾸만 덩치가 커져 이제는 신문값으로 동전 몇 개를 내기가 민망할 정도로 두툼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신문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저렴한 값으로,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은 어쩌면 발전이라고 볼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철을 내릴 때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묵직한 중량감이란 다만 물리적인 무게일 뿐이라는, 양과 질의 극단적인 불일치가 주는 불쾌감 속에서 신문은 이미 구겨진 휴지로 변해 있었습니다. 전철을 내리고 한참 후까지 무엇을 읽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애썼지만, 오로지 기억나는 것은 수많은 가격표와 이름과 날짜뿐이었습니다.
물론 신문에서 전문 서적과 같은 깊이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문은 단지 사실을 보도할 뿐이라는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변명은 그 육중한 무게가 어떻게 파생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두꺼워진 신문을 보며 느끼는 이 불쾌감은 곧 양과 질, 현상과 본질, 내용과 형식을 뒤섞어 버리는 태도에 대한 불쾌감입니다. 양의 증대가 곧 질의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형식의 화려함이 결코 내용의 진실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오는 불쾌감입니다.
화려한 용모와 근사한 옷차림이 더 이상 경계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물의 양과 현상과 형식이 판단의 근거가 될 때 우리는 그것이 향하는 방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방향을 잃은 사람은 우상을 광신하기 마련입니다. 이 우상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섬주섬 흘겨 넘기기에도 벅찬 신문을 들고 우리는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 무서운 지식의 양에 압도되지 않는 무엇을 과연 우리는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요?

김형준 본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