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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연장의 꿈, 축복인가 재앙인가?
심재봉 논술교사 | sjbong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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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정리하다 우연찮게 손에 잡힌 책을 모처럼 완독했다. 제목은 『평균수명 120세, 축복인가 재앙인가』이다. 정해진 운명을 다하고 '반드시 죽어야 할 의무'를 주장하는 생명연장반대론과 건강한 생명연장을 지지하며 '더 오래 살아야 할 권리'를 외치는 생명연장옹호론의 시각을 대변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나름의 '적극적 생명연장옹호론'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삶의 연장은 '단지 죽음이 유예된 데 불과한 것으로서의 삶'을 말하지 않는다. 개인이 영위하는 '삶의 질'이 기득권 계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삶들에게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는 데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생명연장이 아니라 개인의 자아실현이 가능한 '복지권'으로서의 삶의 권리, '삶의 질'과 '평등'의 문제가 형평성 있게 진행되는 사회구조 안에서의 생명연장을 옹호하는 것이 책의 중심 주제이다.
인간의 수명은 유럽과 미국에서는 19세기 이래, 아시아 등지에서는 20세기 초부터 점점 늘어났고, 앞으로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수명이 늘어나면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일수도 있지만 사회문화적으로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인간의 수명 한계에 대해서는 과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수명에 대해 논하는 수명한정론자들은 후손의 번식과 성장을 마친 전 세대는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전달한 후 진화 메커니즘에 따라 부과된 수명만을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다. 그러나 유전공학기술을 앞세운 일단의 과학자들은 이러한 의견을 숙명론이라고 비판하며 인간수명을 1,200세까지로 보고 있다. 세포의 수명생체시계인 '텔로미어'를 늘리는데 성공한 미국의 라이트 같은 유전공학자는 앞으로 20년 후면 수명을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수명에 관한한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죽음이라는 것을 가능한 회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수명연장이 대부분 좋은 일로 받아들여지는 문화적 토양은 유전자 조작이라는 수단도 마땅히 사용할 만한 것으로 만든다. 최근 각국에서 줄기세포 배양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생각하며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이듯이 생명과 관련한 기술의 경우, 윤리와 도덕에 대한 검토 이전에 사람들로부터 환호성을 받는 것만으로도 생명연장에 관한 사람들의 호응분위기는 감지된다. 사람들은 생명공학의 예기치 못한 우려와 생명윤리의 문제를 고민하기 전에 줄기세표가 몸속에서 자기 자리로 찾아 들어가 몇 십 년 동안 사용되어 닳아 버린 기관들을 모두 새것으로 대치한다는 장밋빛 환상에만 환호하고 있다. 몸 전체를 완전히 아주 '싱싱한' 것으로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부작용에 대한 심각성을 묵살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명연장이 마냥 환상적인 미래를 예고하는 것은 아니다. 수명연장으로 제기되는 몇 가지 사회문화적 결과는 대개 이러한 것들이다. 연금이나 사회보장비용을 둘러싼 세대간의 갈등, 아이들 없이 출산과 사망이 전체주의적으로 통제되리라는 점,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무관심, 생명에 대한 신비로운 감정 소멸과 같은 것들이다.

근대 이전까지 죽음은 삶과 함께 동거하는 것이었다. 죽음은 살아가는 동안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만큼 사람들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죽음을 가져오는 질병의 원인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이들 질병이 극복됨에 따라 죽음은 점차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변화되었다. 죽음은 이제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 쫓아버려야 할 것, 거론해서는 안 되는 것,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되었다. 이렇게 죽음이 사람들에게 공포스러운 것이 되었고 극복과 금기의 대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수명의 한계는 이 시대의 새로운 담론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크리스틴 오버롤도 기술의 힘을 긍정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위에서 제시한 '삶의 연장'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이 '삶의 질'로 극복된 조건의 형성과 함께 평균수명의 연장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초고령 사회로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고령사회를 대비한 연금과 보험, 복지 등의 문제에 대해 이 사회는 꾸준한 준비를 해오지 않았기에 노인문제가 급기야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삶의 질'로 극복된 축복의 수명을 누리자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그 '삶의 질'이라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줄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게 당면한 '초고령화 사회'. 이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축복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재앙에 가깝게 변화되고 있으며, 노령인구의 증가는 젊은이들의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다. 평균수명이 현재보다 현격히 늘더라도 살아있는 동안 고통의 나날 속에서 지내게 된다는 그것은 결코 축복이라 불릴 수 없다. 그렇다고 누구나가 짧고 굵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삶은 외부에서 지정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명연장의 가장 큰 딜레마이다.

개인의 삶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은 누구에게나 형평성을 가지고 접근해 주지 않는다. 인간 수명은 분명 증가할 것이란 기대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점을 명백히 하고 늘어난 수명 속에서 삶의 질을 고양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고민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늘어난 수명이 축복은커녕 최소한 재앙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봅시다

1. 윗글의 요지를 다섯 문장으로 정리해 봅시다.

2.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적 수단에 대한 개인적인 찬반의견을 자유롭게 토론해 봅시다.

3. 수명연장에 따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4. 미래 자신은 얼마만한 수명을 누리고 싶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발표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