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숲 에세이 1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


김진형 푸른숲 교사 jhkim912@hanmail.net


1학년 교실 첫 수학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 아이들 앞에서 커다란 (적어도 1학년 아이들의 눈에는) 선생님이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습니다. 잠시 뒤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건 하나야.’
그런 뒤 그 종이를 두 조각을 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건 둘이란다.’
이렇게 선생님께서는 계속 이 동작을 반복하시며 많은 양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며칠 뒤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물어보았습니다.
‘가장 큰 수가 얼마인가?’
아이들은…… ‘하나’라고 답했습니다.

4학년 아이들과 분수를 공부합니다. 좋은 질감과 고운 색을 가진 잘 만들어진 모양을 가진 종이 하나를 아이들에게 보여줍니다.
‘이건 1이야.’ 선생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똑같이 둘로 자릅니다.
‘이건?’
아이들은 2분의 1이라 하지 않고 ‘2이에요.’라 대답합니다. 그때 약간의 소란이 일어납니다. 조금 전의 모양과 비교하면 ‘2’라는 수로 답하는 게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기준이란 것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비교하다…….
기준을 정하여 비교하다…….
기준과 비교되는 양을 인식하다…….
기준이 되는 양과 비교되는 양이라는 두 가지 개체를 구별해내다…….

분수를 접하게 되는 시기 아이들의 눈에 비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1학년의 아이들이 가장 큰 수를 ‘1’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아니 어쩌면 필요합니다. 2500년 전 최고의 문명을 누렸던 근동지방과 에게해 주변의 지식인들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1’은 ‘수’라기 보다 ‘근원’이요, ‘모든 것의 어버이’ 그래서 ‘가장 큰 존재’였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요? 그리고 3, 4학년의 아이들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교사가 어떤 방법을 써서 잘 설명하여 유도했을까요?
아닙니다.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의식 속에 살아 있으므로 교사는 거기에 도달하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아이들이 ‘수학’을 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자극으로 훈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들의 몸속에는 ‘수학’이 살고 있고 우리는 ‘수학을 하며’ 그 세계를 밖으로 꺼내는 것입니다. ‘수’에 대한 개념은 문명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한글은 800년 전이었다면 우리나라 사람이어도 읽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림을 2000년 전 이집트인이 본다고 해도 그리 느낌이 다르지 않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수학’을 한다는 것은 인류의 문명사를 근원부터 체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학수업’이란 아이들과 함께 조심스럽고도 놀라운 이 여행을 함께 하는 것이지요. 왜 조심스러워야 하냐면 이 여행 중 아이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힘을 얻게 되고 꿈틀거리던 내면의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시기에 올바른 내용을 아이들은 경험할 권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사는 아이들이 지금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교육이 무엇인지 알려면 사람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면 될 것이다.” 내가 아무리 즐거운 일이어도 다른 이에게도 그러한지 스스로 물어야 하듯이 하물며 교육이란 커다란 명제 앞에 교사는, 내가 하는 이 수업이 진실로 아이들에게서 나온 것인지 매일 매일 고민해야 하겠지요.
‘겸손한 안내자’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늘 다짐하는 말입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이미 과거인 내가 할 역할을 다짐합니다.


아이는 성장한다, 나무처럼

다음 수업은 제가 7학년 아이들과 수업 중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어렸을 적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들려주셨던 이야기라 합니다.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어렸을 적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산 어귀에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한적한 곳이라 그 소년에게는 이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늘 익숙한 산과 풀, 동물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을 매우 사랑해주시는 부모님이 계셨으니까요. 그러나 소년은 몸이 자라고 집 앞의 울타리보다 키가 커지면서 무엇인가 답답하고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소년은 어느 날 자신이 살던 그곳을 떠나 먼 여행을 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소년의 결심을 들은 부모님은 눈앞에 있는 아이가 더 이상 예전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품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기꺼이 축복하여 주며 길 떠날 채비를 도왔습니다. 소년이 떠나는 날 새벽 아직 해가 높이 뜨지 않아 어스름한 시간, 소년의 어머니는 창가에 호롱불을 하나 켰습니다. 그리고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이 호롱불을 절대 꺼뜨리지 않을 거야. 궁금한 것을 알고 돌아오면 그때 네가 이것을 끄도록 하여라.”

길을 떠난 소년은 운이 좋으면 따뜻한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늘을 지붕 삼아 밤을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것이든 그에겐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렇게 달이 차고 또 기울기를 여러 번. 소년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날도 그런 날을 보내며 낮은 산을 오르다 중턱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새벽녘,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이 깨어 눈을 뜨던 소년은 눈앞의 장엄한 광경에 퍼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채 가시지 않은 안개 너머로 아름답게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아름드리나무들이 보였습니다. 나무들은 여태껏 소년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우람하여 두 팔을 힘껏 뻗어봐야 나무의 3분의 1도 감싸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끝은 저 먼 공간으로 향하고 있어 소년의 눈길이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뿌리가 깊고 단단하여 어느 나무도 옆으로 기울어지거나 구부러진 것 없이 굳건하게 땅 위에 서 있었습니다. 소년은 그 나무들 사이로 달려갔습니다. 그 가운데 서 있으니 문득 나무들이 자신을 감싸며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을 자신에게 불러 넣어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참을 그곳에 머물던 소년은 문득 인기척 소리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한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의 얼굴에는 세월의 무게가 잔뜩 얹혀 있었습니다. 소년은 그에게로 가 인사를 하였습니다.
“어르신. 세월만큼이나 지혜로운 분. 제가 저 나무들 사이에서 느낀 경험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노인은 자비롭게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나 역시 젊은이처럼 같은 경험을 했었다네, 아주 오래전에……. 그 숲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를 자네에게 들려줄 수 있어 행복하구나.”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노인이 어렸을 적 그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아버지는 그 아버지로부터, 또 그 아버지는 그 아버지로부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산 중턱 광장의 나무들이 그 증거입니다. 그렇게 오래전 그곳에 세상의 이치에 대해 연구하고 함께 알고자 하던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자신들이 딛고 서 있는 세상 만물들-자연과 우주와 보이지 않은 것들에까지-을 진실로 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신이 인간의 세상을 떠나며 남겨놓은 그 비밀의 언어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감사하려고 소년이 보았던 그 광장에서 신께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신탁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기념하도록 그곳에 나무를 심을 것
나무는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이 한 그루씩 심을 것
한 줄에 네 그루씩, 모두 다섯 줄을 심을 것

노인은 말을 이었습니다.
“한 줄에 네 그루씩, 다섯 줄이면 모두 스무 그루를 심으면 되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어. 왜냐면 그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열 명이었거든”
마지막 당부를 하며 노인은 소년을 축복하고 가던 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신탁을 수행하였다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현자라 부르지. 젊은이가 본 광장의 장엄한 모습이 그것이었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아침 태양의 신은 높이 떠올라 인간이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그 표상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지. 참으로 보고 싶은가? 하지만 그건 결코 우리의 눈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 오직 독수리처럼 높이 올라 저 태양의 높이 만큼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비밀스런 모습. 그렇다고 절망하지 말게. 신은 그래서 우리에게 자신들의 능력 중 한 가지를 나누어 주셨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 그러니 젊은이도 노력해보게나. 오직 이 마음에만 그 열쇠가 있다네. 자네가 찾는 것들은 그 마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야…….”
소년은 그 뒤 며칠을 그곳에 더 머물었습니다. 노인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고자……. 얼마 뒤 소년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매일 밤 그를 기다리던 그의 부모님들은 이제 호롱불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소년, 아니 청년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집에서 평화로운 잠을 청하였습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제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물론 끝 부분의 신탁내용은 오래된 퍼즐문제이지요. 7학년의 아이들은 이제 사춘기에 진입합니다. 팔다리가 갑자기 길어지지만 그것들은 몸에 덜렁거리며 붙어 있는 듯 축축 쳐져 이전의 아름답던 균형이 다 깨져 보입니다. 게다가 얼굴엔 수염이 보이기 시작하고 여러 내부의 변화로 하여 표정도 상당히 격해지지요. 그건 ‘이것 좀 봐주세요. 제가 변하고 있어요. 이제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에요. 난 어떻게 해야 하지요?’라고 세상에 몸으로 말하는 것이지요. 육체적 탄생이라는 최초의 분리에서 이제 진정으로 분리와 독립을 준비하는 나이가 되어가는 겁니다. 이 시기를 어떻게 편하게 넘어갈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격렬하게 반응하며 모든 힘을 모아 사춘기를 헤쳐나가기 시작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은 이러한 아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만들며 소재로 삼았던 것들-길을 떠나는 소년, 호롱불, 높이 자란 나무들 그리고 지혜로운 노인과 태양의 빛, 청년으로 변화함 등-은 이 시기 아이들을 생각하며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하는 중 호롱불을 켜는 장면에서는 일부러 커튼을 내려뜨려 조금은 어두운 아침 시간에 작은 초를 준비하고 교탁에서 성냥으로 불을 붙였습니다. 성냥을 켜는 순간, 탁! 하며 불붙는 소리와 황의 냄새가 숨죽인 교실에 퍼졌고 작은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그 장면을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냄새와 소리와 함께 자신들의 앞에서 여리게 타오르기 시작한 촛불이 그 시간 내내 자신들을 지켜주었다는 것을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이 혼란스러운 자신들의 의식 속에서 수학적 법칙들이 그 빛처럼 길을 보여줄 것이라는 황당한 기대도 있었습니다.
나무들이 서 있는 광장 이야기를 할 때는 칠판에 미리 그림을 그려 놓고 그 장면에서 가리개를 치워 마치 아이들이 그 광경을 직접 보는 듯 경험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차라리 보여주지 않는 것이 더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더 들더군요. 쉽게 그 퍼즐을 풀지 못할 것 같을 때는 아예 아이들에게 소년을 위해 퍼즐을 풀어주도록 유도했습니다. 집에 켜 놓은 호롱불이 꺼지기 전에 소년이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아이들은 머리를 짜냅니다. 실제 작은 초를 켜놓아 금방 다 타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 수업시간엔 아이들이 퍼즐을 풀기가 무섭게 초부터 쳐다봅니다. 물론 소년이 집에 돌아와 직접 초를 끄고 싶어 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퍼즐을 다 푼 뒤 태양의 눈에 비친 광장의 나무들을 그려 보았습니다. 모두 매우 진지하게 그립니다. 하늘에서 보이는 나무의 그림자와 빛에 따라 반짝이는 잎사귀의 움직임까지, 마치 그들이 태양이 된 듯, 독수리처럼 높이 날아오른 듯……. 이 장면에서는 특히 남학생들이 좋아합니다. 멀리 날아가고 싶어 하니까요. 등 뒤에 날개가 돋는 시기이니까요. 그런 뒤 열 사람이 나와 각각의 나무가 되어 보았습니다.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처럼 당당하게 서야 합니다. 이 시기 구부정한 아이들에게 ‘똑바로 걸어라, 고개를 앞으로 빼지 마라’라고 이야기하기 지칠 때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나무처럼 서보아라.’
‘……광장의 그 장엄한 광경을 만들어 낸 나무들처럼 너희는 건강하며 고귀한 나무야. 저 깊은 땅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운을 삐뚤어진 자세로는 받을 수 없어…….’
이쯤 되면 한 쪽 다리로 기울여 서 있던 아이들도 두 발로 꼿꼿이 서기 시작합니다. 그런 뒤 두 팔을 하늘로 향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이 수업은 봄에 이루어지므로 때마침 불어오는 봄의 향기와 바람을 느끼며 자신의 모습이 높은 곳에서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소년이 되어 그 나무 사이를 돌아다녀도 보고 주변을 맴돌기도 하며 이 도형이 가지는 여러 속성을 느꼈습니다.

변하는 것, 불변하는 것

이것이 하루의 수업입니다. 우리 학교의 수업 구성은 1년 동안 몇 과목을 한 번에 약 4주씩 매일 아침 두 시간 동안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집중수업를 합니다. 이 수업은 수학집중수업 첫 번째 주의 금요일쯤에 준비된 내용입니다. 첫 주는 그 반 아이들의 분위기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하루 변하는 산의 모습과 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러면서 늘 같은 시간에 같은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살펴봅니다. 결국 매일 변하는 산의 모습은 1년이 지나면 다시 봄이 와 닮아 가지요. 하지만 그건 이미 1년 전의 것이 아니지요.
변화와 발전, 그리고 불변하는 것들……
이것이 이 시기 수업의 주제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속의 광장에 모인 현자들이 찾던 것들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해 갑니다. (그 와중에 탈레스에 대해 공부합니다. 최초로 피라미드의 높이를 잰 철학자이며 수학자. 그가 오직 햇볕과 작은 막대기 그리고 자신을 이용하여 감히 거대한 피라미드의 높이를 잰 장면에서도 아이들은 자극받습니다. 그리곤 학교 건물의 높이라도 재겠다며 뛰쳐나갑니다.)
보통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사모이섬의 피타고라스에 대하여 시작합니다. 기원전 5세기경 아름다운 에게해의 그리스령의 섬에서 보석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이후 이집트를 여행하고 또 페르시아로 가게 되며 이러한 여행을 통해 그가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멀리 인도의 수철학과 만나고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그 뒤 고향으로 돌아오고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가 피타고라스 학파가 탄생하는 긴 여정을 함께 합니다. 이쯤 되면 아이들이 말합니다.
‘아! 선생님, 그때 그 현자들이 피타고라스 학파군요.’

이제 아이들은 수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후 남은 시간에 정수론의 많은 내용을 공부합니다. 하지만 제가 가르쳐주는 것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그리스의 수학적 추상성이 탄생하던 그 시기에 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살며 경험하며 그 순간을 실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을 넘어서며 변하지 않는 ‘법칙성’과 그것을 발견해가는 인간의 의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청년이 되어갑니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결정하고 준비해야 할 시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한 달의 수업을 통해 ‘수학의 합법칙성’을 느끼고 그 감동이 가슴속에 스며들어 아이들 깊은 곳에 꿈틀거리고 있는 힘에 방향성을 줄 수 있었다면 저는 안내자로서 임무를 다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다음은 그들의 몫이지요. 그들이 직접 해 내야 하므로 그렇게 하도록 길을 내어 주어야 하겠지요.
수업이 끝나면 늘 아쉽습니다. 마음만큼 계획만큼 되지도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늘 희망사항이지만 부족한 부분은 아이들이 채워주리라 믿으며 수업을 준비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