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시대는 거(去)하고 자본의 시대가 래(來)하다
- 박민규, 「절」

안효근 | 한성여고 교사
hooan@hanmail.net

요즘 국회에서는 드라마틱한 무협 영화가 상영 중이다. 민주화 재심 법안을 상정하려던 한 여자 국회의원은 이에 반대하는 단체의 회원으로부터 필살기를 얻어맞고 병원에서 신음 중이고, 전기톱에 망치까지 등장했던 국회에는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여당과 이를 저지하려는 야당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도는 무림이 펼쳐져 있다. 미국으로 치면 맘에 안 들면 총질로 승부 보던 서부 개척 시대요, 사극으로 치면 검객들의 칼이 난무하는 비정한 난세다. 따지고 보면 모든 싸움이, 자본주의 시대니까 돈이 제일 중요하다는 쪽과 돈보다 더 소중한 게 있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달려드는 측과의 한판 승부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서민들에게 나누어야 조국의 영원한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고 외치며 60번이나 박수를 받았던 미국의 대통령과는 사뭇 다른 정치 철학을 가진 지도자가 대한민국을 현대판 무림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돈이 패러다임이 되는 사회는 모든 판단이 이를 중심으로 내려지는 게 당연하다. 이는 그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을 자본 위주로 뒤바꿔놓아 눈앞에 놓인 경제적 이익에만 열광하게 만든다. 환경 파괴고, 몰상식이고, 비윤리고, 비도덕이고 따질 필요나 이유가 사라진다. 부동산은 함께 나누어 살아야 할 삶의 공간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일 뿐이며 비난의 화살은 땅에 대한 사랑으로 비껴가면 그만이다. 민족의 통일이고 뭐고 당장 돈 드는 일은 피하는 게 상수다. 소와 인간의 감동적인 교류를 그린 영화를 보고도 경제 발전의 저력을 읽어내는 눈은 그래서 가능하다. 국민의 비판은 언론사를 독점하여 막아내고, 촛불을 켜들면 물대포로 잠재우면 그만이다. 아이들을 성적으로 줄 세워 사교육을 부추기는 일제고사에 대해, 너무나 당연한 권리인 선택권을 허용하면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 의무 위반으로 파면하면 그 뿐이다. 정작 장기적으로 보아 뇌물의 성격이 될 게 뻔한 학원업자나 현직 교장들의 기부금은 모르쇠로 일관하면 면죄부는 떼 놓은 당상이다. 나라 전체가 자본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고 이를 소유한 계층만이 살판난 오늘날은 진정 강호의 의리가 바닥을 친 난세 중의 난세다.
드라마에는 연일 백마가 아닌 폼 나는 외제 승용차를 타고 명품으로 휘감은 4명의 왕자님들이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물욕을 대리 보상한다. 10대부터 30대 주부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어떤 구조적 모순에 의해 점점 가난해지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대신 '구준표'라는 이미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이상적 아이콘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 '금잔디'라 자칭하고 있는 형국이다. 바야흐로 영웅의 시대는 가고 자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 「절」은 이러한 자본의 시대를 살아가는 마지막 무림 고수들의 이야기다.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그들은 자본의 시대가 되어 버린 지금, 늘 주변인으로 남아 있다. 일제시대가 지나가고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이 독재를 행하던 시절을 거쳐 지금까지 생존해 왔던 이들,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여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들이지만 그들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한다. 이미 세상은 능력이나 의리, 명분과는 상관없이 자본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박민규의 '절'에는 그의 출세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그러했듯 엉뚱한 것 같지만 촌철살인의 풍자가 넘쳐난다. 돈이 전부인 사회를 비틀면서 천박해져만 가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짚어내기로 작정한 이 소설은, 때문에 씁쓸한 여운을 길게 남긴다. 굳이 박민규의 소설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여운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만큼 '절'은 그의 저력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 '절'의 줄거리

싸락눈이 간간이 흩날리는 어느 겨울날, 초라한 봇짐을 든 백발의 노인 하나가 감옥에서 출소한다. 한때 권법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대천권왕 김일해다. 감옥 밖에서는 그와 천하를 다투던 청룡검제 최일우, 운무천마 선우진,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율사 정천대법 이장록이 노인을 맞는다. 노인은 올해로 꼭 이백 여든 해를 살면서 숱한 역사의 부침(浮沈)과 함께 했으나 이제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쓸쓸한 노인으로 퇴락해 가고 있다.

인걸은 간 데 없고 가난과 싸워온 반세기였다. 무학의 노인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농사와 칩거, 막노동이 전부였다. 무공을 겨룰 상대도 비급을 시전할 대상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법이 정의를 대신하고 금전이 힘을 대신하는 세상이었다. 용을 믿는 세계도, 용이 필요한 세계도 아니었다. 세계는 이미 무목(無目) 무각(無覺)으로 무리지어 이동하는 작고 소소한 개미들의 것이었다. 천하 최고수의 자리를 놓고 일합을 벌이기도, 때로 대립의 각을 세우기도 했던 四룡의 무연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로의 처지를 알면 알수록 스스로가 비참한 세월이었다. 과거의 용은 화석이 되었고, 남은 것은 네 마리의 위타(委蛇)였다. 대의와 명분이 사라진 세계에는 연명(延命)만이 남아 있었다.
 - 박민규, 「절」, 『2009년 이상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 / 2009), 217∼218쪽

권왕은 IMF로 인해 몇 달이 밀린 보호세를 핑계로 술집 주인 내외를 괴롭히던 조직 폭력배들의 횡포를 보다 못해 권왕의 입장에서는 미미하기만 한 폭력 조직 전체와의 한판 승부를 버리게 되고, 그 결과 세 명의 조직 폭력배가 죽고, 열두 명이 불구가 되어 이에 대한 대가로 감옥에 가게 된다.

인정하십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협박과 사주를 받은 주점 주인 내외가 패거리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첨부했다. 창 너머 어디선가 새들이 호드기 소리를 내었고, 해와 달이, 또 별들이 가댁질로 시간을 탕진하고는 했다. 인정하십니까? 그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패거리들에겐 유능한 변호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검찰과 끈이 닿아 있었다. 법에 의해, 법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이었다.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그는 순순히 이 세계를 인정해주었다. 한 그루 도래솔처럼 쓸 곳 없는 스스로의 권을 봉하며, 그는 끌끌한 마음으로 끄덕이고 끄덕였다. 세계는 흘러갈 터였다. 정의도 악도 윤슬 같고 는개 같아진.
 - 같은 책, 221쪽

시간은 흘러 대천권왕 김일해의 출옥일을 계기로 무림 4대 천왕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러나 무림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아파트의 평수와 격투기 대회가 시대정신이 된 시절, 천하를 호령하고 대의를 섬기던 그들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초라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시대에 발 빠르게 적응한 운무천마의 운명 역시 그리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천마는 변화에 순응하고 풍류를 아는 무신이었다. 세간의 여자를 얻어 손(孫)을 얻기도 했으며, 또 집을 떠나 정처 없는 삶을 살기도 했다. 무림의 소멸과 현대사의 질곡을 거쳐 오며, 그는 자신을 그저 그런 인물로 포장할 줄도 알았다. 장풍 축지 간판을 내걸고 조촐한 도장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어차피 배울 인간이 없다는 걸 알았으므로 그것을 사기라 여기지 아니하였다. 이런 사진 하나 걸어두면 여러모로 좋습니다, 공무원들 태도도 달라지구요. 어찌 알게 된 모리배가 귀띔을 해주면 거 나도 하나 만들어주게, 쉽게 말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그래도 따르는 관원들이 있었다. 간혹 보여준 새발의 피, 아니 벼룩의 똥만한 발경 시범, 겨우 콧바람만한 장풍 방사만으로도 입을 허벌리는 제자들이 있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사부님, 하고 사범 황일규가 말문을 열었다. 왜 그러느냐.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부님… 주변 다른 유파의 도장들에서 떠도는 소문이 있습니다. 때문에 떨어져나간 관원들도 많구요… 사부님… 사람들이… 사부님을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천마는 생각했다. 그리고 사부님… 솔직히 저 사진은… 합성한 티가 너무 납니다… 아아. 그럼 어째야 쓰겠느냐? 대여섯 사범급 제자들의 바람은 마침 열풍이 불기 시작한 실전 종합격투기대회에 출전, 장풍으로 세상을 놀라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그런 대회가 있느냐? 실낱같은 무림재현의 기대를 품고 천마는 제자들을 향해 물었다. 제대로 된 장풍을 견딜 만한 인재들이 있느냐 이 말이다. 사부님… 하고 황일규가 입을 열었다. 전국의 괴물들이 모두 출전합니다. 해외에서 오는 고수들도 있구요. 비록 외공이라 하더라도 그런 고수들이 모인다는 사실이 천마를 흥분케 했다. 종적을 감춘 권왕이나, 혹 산골로 들어간 빙해천수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마는 참가를 결심했다.
 - 같은 책, 229∼230쪽

그러나 지나치게 강한 운무천마의 내공으로 인해 격투기 현장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자신의 무공으로 승부하기에는 너무나 허약한, 상대의 목숨을 보전케 하고자 천마는 승부에서도 별다른 무공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 무렵 부산 지부를 연 제자의 부친상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제자들은 부산행 편도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고, 간만에 홀로 축지를 하던 천마는 경부 고속도로를 사선으로 넘는 순간 달려오던 엔초 페라리에 치여 온 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때문에 그의 무술 도장은 문을 닫는다.
다른 무인들이나 율사의 삶도 이와 비슷한 것이어서 장풍 한 번에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던 빙해천수 조인덕은 소백산 끝자락에 위치한 심심산천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도제 두서넛을 거느리고 미꾸라지 양식을 하며 연명하고 있고,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던 정천대법 이장록은 새 칼을 시험하느라 부채꼴로 삼 헥타르 면적의 나무를 단칼에 베어버려 불법 벌목협의로 경찰에 잡혀온 청룡검제 최일우 노인의 칼 솜씨에 반해 이들의 일원이 되기는 했으나, 사회에서는 가족도 건사하지 못하는 무능한 가장으로 찍힌 상태다.
이렇게 이제 쓸모라고는 없는 인생이 되어버린 대천권왕, 청룡검제, 운무천마, 그리고 정천대법은 빙해천수가 운영하는 미꾸라지 농장에 모여 무림의 운명이 모두 적혀 있다는 무림 최고의 금서인 <무제록>을 펼친다. 책의 말미에는 이들의 최후가 예언되어 있었고, 그날 새벽 4대 천왕은 숙의 끝에 죽은 땅을 피해 비로소 새 하늘로 날아오를 것을 결심하고 가장 최근에 합류한 율사인 이장록의 의사를 묻지만, 장록은 선뜻 결심하지 못한 채 아빠를 늘 창피해 하는 딸에게 전화를 건다.

뜨고 싶은 세상이기도 했고, 할 일이 더 많아진 세상인 듯도 했다. 부패를 못 막으면 발효라도 시켜야 할 거 아닌가. 움막에서 들었던 검제의 일언도 다시금 머릿속에 오롯이 떠올랐다. 하릴없는 마음으로 이장록은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잠결의 딸이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 목소리에, 문득 사별한 아내가 그리운 마음이었다.
민주니?
오… 뭐야 아빠, 이 시간에.
미안하구나… 급히 좀 할 말이 있어서 말이다.
글세 뭐냐니깐?
민주야… 만일 말이다… 아빠가 사라지면 너 어떻게 살래?
나 원, 별 걱정을 다 하네… 언제 아빠가 경제 책임진 적 있어?
그래, 할 말이 없구나…
그래도 민주야… 경제가 전부는 아니잖니.
몰라, 어려운 얘기 하지도 마. 난 돈이 전부야. 또 이상한 사람들하고 같이 있지?
그게 무슨 말이냐.
아, 몰라 끊어. 그리고 아빠… 제발 개량한복 좀 입지 마! 나 쪽팔려 죽겠어.
 - 같은 책, 241∼242쪽

통화를 마친 이장록은 산채(山寨)로 돌아가는 대신 '잘 살겠다'고 반복해서 다짐하며, 전화기를 손에 꼭 쥔 채 발길을 뒤돌린다. 마침 산 너머에는 등산객 하나가 마치 닭 울음 같은 '야호' 소리를 낸다.
 
* 왜 무림인가?

소설은 무인들의 비장한 최후를 그리고 있지만 이는 결코 시대에 적응 못한 그들만의 사태가 아니다. 이미 나라와 대의를 위해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들의 희생적 삶을 경제 위주의 역사 서술에 논리적 허점이 될까 두려워 역사의 뒤안길에 유폐시키려는 음모가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 사회를 끝장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경제 논리를 앞세워 그 사회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을 오로지 자기 눈앞의 이익만 아는 인간으로 변질시켜 서로 무한 경쟁을 벌이는 사회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설령 지금은 제 아무리 그럴듯해 보인다 해도 그 사회는 이미 파멸이 예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여 이 나라는… 결국 일국이 있어도 백성이 사라지니… 영리한 자는 눈치를 보고 영악한 자만이 살아남으리라. 이는 국운을 쫓고 시장(市場)을 세운 자들의 책임이나 그 기세와 외세를 이길 자가 없겠구나… 백성은 날로 어리석어지나, 이는 약해짐이 아니라 독하고 악해짐을 뜻하나니… 무릇 충효의 필요를 논할 일이 없겠구나, 밥과 지전을 던져주면… 하여 끊어진 허리를 다시 잇고… 이게 아마도 통일을 말하는 듯합니다만, 아무튼… 이는 이익과 이윤에 의한 것이니 남은 무림의 후예들은 현혹되지… 대체, 그럼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겐가?
 - 같은 책, 239∼240쪽

우리 역사에서 지배층에 복종하는 인간을 길러낸다거나 국가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기제는 항상 존재해 왔다. 그러나 지금처럼 구성원을 좌우로 나누고 혹은 계층으로 갈라서 노골적으로 차별하여 궁극적으로 사회적 결속력을 완전히 파괴하는 시스템이 도입된 경우는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도의가 땅에 떨어진 무림 못지 않게 변모한 것은 물론 침체된 세계 경제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 사회가 구성원들을 돈만 아는 저급한 인간으로 바꾸는 일에 온 힘을 모으고 있다는 데 있다. 이제 한국인들은 자신의 집안 대대로 고스란히 전해 주어야 하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행여나 다른 이들에게 빼앗기게 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더불어 오늘날 대한민국은 국민 전체를 이기와 경쟁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대의명분이나 이타적 삶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는 인간으로 바꾸어 가는 것을 개혁이라 믿는 사회이며, 어떻게 하면 그런 구태의연하고 허무맹랑한 개조 작업을 더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을 화두로 삼는 사회로 변해 버렸다.
이미 여러 계층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야 할 대중 매체는 일방통행을 일삼는 정부 정책의 홍보수단으로 전락 중이고, 독립된 지위를 누려야 할 사법부는 양심과 권력을 맞바꾸려 하고 있으며, 학원에 치인 학교는 고객인 학부모에게 선택되기 위해 '교육'을 빙자해 아이들을 점점 더 혹사시키고 있다. 그리고 누구나 똑같이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고 자기와 제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는 우리들은 이런 시스템 하에서 오로지 돈만을 추종하며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고 있는 것이다. 참된 인간을 기르는 소중한 덕목과 가치들을 확산시키는 일은 불필요한 것이 되어 버렸고, 실적과 성적만이 유일하고 전적인 가치가 되면서 우리나라는 참으로 살기 팍팍한 나라가 되었다. 지난 선거 때, 당선만 되면 순식간에 해결될 것 같던 당면 과제들은 오히려 강도를 더한 채 사방에 산적해 있으며, 이제는 경제력에 따른 서열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려는 풍조 또한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이 같은 혐의는 토목 경제만 아는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유효하다.

오로지 눈뿐인 세상이었다. 정치꾼이 된 동지도, 귀족 노조가 된 후배도, 재벌의 뒤를 닦는 변호사 선배도, 고문후유증으로 여즉 노모가 대소변을 받아야 하는 친구도, 실은 독재가 그리웠던 이웃도, 잘살면 그만인 민족도, 여전히 건재한 친일 후손도, 그보다 더 건재한 발포 책임자도, 어쩌지 않고 어쩔 생각도 없는 대다수도, 실은 있지도 않았던 이념도, 있어도 소용없는 법도, 아빠도 2번 찍지 그래? 하던 딸도, 있지도 않았던 민주와 민중도, 그래서 모두가 이미테이션처럼 느껴지는 골짜기였다.
 - 같은 책, 235∼236쪽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에서 돈에 대한 집착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과 다음 세대의 인간성까지를 파괴하는, 박민규식으로 말하면 뒤틀린 무림의 모습인 동시에 오로지 저만 아는 괴물들을 양산하는 기름진 토양이 되었다. 소설에는 이와 관련한 통렬한 풍자가 들어있다. 미꾸라지 양식을 하며 제자들을 키우던 빙해천수에게 한 도제가 이렇게 말한다.

사부님… 그리 긴 전음을 도대체 언제쯤 들을 수 있다는 겁니까? 오년 수련에 오라 가라 간단한 전음도 들을까 말까인데… 그리고 그런 말은요… 휴대폰으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예? 어허, 고얀지고. 어느 안전이라고 네놈이… 내 오늘 세 분 무신께서 모이신다 그리도 일렀거늘! 울먹이던 도제가 결국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四룡께서 모이면 뭘요… 뭘… 정부라도 엎을 겁니까? 네 분이 힘 합치면 뭐… 삼성한테 이길 수 있습니까?
 - 같은 책, 238쪽

대기업 내부에서 무려 7년간을 총수의 지시대로 온갖 불법을 행하다 가책을 느껴 결국 양심선언을 하게 된 지식인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온 비리들조차 내부 고발자에 대한 낙인찍기로 철저히 묻어버리는 이 사회는 그 자체로 악이다. 기업의 순이익 순위가 기부금 기부 순위와 일치한다는 외국의 모범 사례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이젠 제발 최소한의 기업 윤리라도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만은 간절하다. 문제가 된 재벌총수가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그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후광을 밑거름 삼아 건재를 과시하며 한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최소한의 생존권을 요구하다 화마에 희생된 용산의 억울한 영혼들은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고 있으며, 사학의 비리를 고발한 양심적인 교사들은 부도덕한 재단에 의해 파면 당해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경제, 경제뿐이다. 도대체 왜? 비정상적인 정부에 비정상적인 국민이 함께 하는 사회의 미래는 소설 속 사대천왕의 운명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왜 모르는 걸까?
바야흐로 2009년, 의로움에 목숨까지 바치던 영웅의 시대는 가고, 금전적 이익에만 눈이 벌건 자본의 시대가 기어이 도래한 것이다.

 

* 논술꺼리

박민규의 <절>에는 오로지 '경제'만이 삶의 기준으로 신봉되는 현대 한국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들어있다. 소설과 다음 글을 참고하여 '현대 한국 사회에서 경제 성장과 공동체적인 삶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에 대하여 자신의 찬·반 의견을 밝히고 그 근거를 논술하시오. <1999년 가톨릭대학교 모의논술 응용>

(가)
돌진적 산업화는 경제 성장이라는 절대적인 목표 하에 국가가 주도적으로 기업과 노동자 그리고 국민 대중을 일사불란하게 동원하고 통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일인당 GNP나 수출 증가와 같은 가시적 목표를 조기에 달성하기 위하여 국가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자원을 총동원해 가장 신속하게 그 목표를 성취하려고 전력투구하는 개발 전략을 택한다. 한국은 30년 이상 이러한 개발 전략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였다.

(나)
티베트의 고원에 위치한 라다크 공동체는 자급자족 경제에 기반해 있는데, 그곳에서는 인간적인 소규모의 조직들이 자연과의 긴밀한 유대 하에서 활발하고 참여적인 민주주의를 고양시키며, 남성과 여성의 평등한 관계와 건강한 가족을 바탕으로 튼튼하고 생명력 있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또한 라다크 공동체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낙후되어 있지만, 낭비와 오염이 없고 범죄와 빈부의 격차도 거의 없는 사회로 알려져 있다.


* 예시 답안
우리나라는 산업화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개인주의가 만연되었다. 그 결과 농촌 인구는 도시로 이동하고 남보다는 나와 나의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근대화 시기를 거치는 동안 자급자족의 농촌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변모되고 가족과 이웃 간의 유대 관계가 약화된 것도 사실이다. 마침내 공동체적 삶이 붕괴된 것이다.
한국의 근대화는 물질적인 부분에만 치중한데다 너무나 급속도로 진행되어 정신적인 면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고, 오직 경제 성장만을 최대의 목표로 세웠다. 이로 인해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 상대적 빈곤감의 증대, 노인 소외와 높은 범죄율, 환경의 오염과 파괴 등 많은 문제가 생겨났다. 이러한 문제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한층 더 심각한 양상으로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바야흐로 한국은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정보, 통신 매체의 발달은 타인들과의 직접 대면 기회를 차단할 가능성이 높고, 지금 같은 인터넷 환경에서라면 건전한 여론 형성보다는 개체화된 개인의 푸념만이 난무할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그리고 통신매체의 일상적 사용으로 인해 이 사회 구성원은 더욱 개체화되어 가고 있다. 통신매체는 함께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철저히 개별화된 도구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한국의 복지와 경제 정의 실현 노력의 미미함을 감안해보면 절대적 빈곤 계층의 증가와 동시에 중산층의 붕괴로 양극화에 따른 갈등은 폭발적으로 격화될 수 있다. 아울러 세계적인 추세에 역행하는 자연 파괴적 개발을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면, 자연과의 유대에 실패하여 심각한 환경 문제로 인해 삶의 질은 더욱 피폐해 질 것이다.
현대의 한국은 제2의 IMF 위기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힘겨운 상황이다. 이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가족과 이웃이 파멸하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다. 이와 함께 정보 통신 매체의 발달, 그리고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으로 공동체적 삶은 계속 파괴되어 갈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경제 성장을 위해 총 매진하는 일은 예전보다 더 확실하게 공동체적 삶을 파괴하기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