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를 다녀와서
사진이 시간을 추억하는 법

윤성균 본지기자 friendtolife@naver.com

떠나기 전

나는 사진기 앞에서 무력하다. 뷰파인더가 나를 포착하고, 조리개가 여닫힐 때, 셔터가 눌러지고, 만에 하나 플래시라도 터지는 순간, 나는 그만 부들부들 떨고 만다. 여유 있는 표정이나 멋있는 포즈 따윈 생각할 수도 없이, 한껏 얼은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렇게 찍은 사진 속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의 내가 있다. 그래서 내게 사진은 폭력의 증거. 좀 채 따뜻하게 뵈지 않는다.
젊은 나이에 자살한 사진가 다이안 아버스는 “사진을 찍는 행위는 어쩔 수 없이 잔인하고, 비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잔인’하고, ‘비열’하다니 그건 너무 가혹한 말이 아닌가. 그렇지만 주로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들을 피사체로 삼았던 다이안이 그렇게 말했다는 건, 아마도 일종의 고백일 수도 있다. 그의 사진이 소수자를 드러내는 방식에서 온정적이기보다 오히려 냉정했음이 떠오른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
그러니깐 이건 사진에 대해 뭇사람이 가지는 일종의 편견일 수 있다. ‘사진 공포증’이라고도 불릴 법한 이러한 감정은, 디지털카메라가 범람하는 오늘날엔 좀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디지털카메라의 보급 덕분에 이제 찍거나 찍히는 행위는 일상성마저 띠게 되었다. 일종의 놀이자 습관처럼. 하지만 시대적 조류나 유행과는 무관하게 카메라 앞에서 무력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건 옛사람들이 사진 찍힘으로써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두려워했던, 그 어떤 본능적인 감각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철학도 좀 공부하고, 글도 좀 쓰고, 어설프게나마 기자라는 직함을 갖고 나서도 사진은 좀 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찍히는 것만큼 찍는 것도 어줍고, 남의 사진을 감상하는 것도 영 어설프다. 계속 사진기와 피사체 간의 긴장적 거리감이나 폭력성 따위를 감지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잘 찍힌 한 장의 사진을 대할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동하는 걸 보면 그래도 보는 건 좀 나은 듯도 싶다. 아니, 이토록 좌절스런 감상자조차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진 미학의 본질이겠지만.
고백하자면 주말을 통해 전북 진안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순전히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그것은 거의 쓰러져가는 정미소를 개조하여 꾸민, 빨간 양철지붕이 인상적인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의 전경을 담은 사진이었다. 정미소라는 공간이 야기한 아련한 향수도 향수지만, 정미소와 박물관이라는 이질적인 공간이 어떻게 합방하게 되었는지, 그곳엔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서울 시내의 숱한 갤러리는 제쳐놓고, 나는 전북 진안 마령면 계서리에 위치한 계남정미소로 떠나게 된 것이다. 본래 목적은 그곳에서 개최 중인 사진전 <시간의 향기> 관람이었지만, 사실상 개인적인 호기심이 더 컸으리라. 그곳에 가면 사진이 달라 보일 것만 같았다.

계남 정미소, <시간의 향기>

시간은 영속적이지만 사진은 찰나적이다. 상반된 느낌이라기보단 오히려 종속적이다. 시간이 본래 무한정 흐르는 것이라면, 사진은 그 무한정한 흐름의 찰나를 1/60초나 1/125초로 포착해내는 셈이다. 순서를 따져보아도 시간이 있고 다음에 그것을 담는 사진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각 이미지에 약한 탓에 종종 그런 사실을 놓치고 만다. 사진에 박음질 된 그대로만 보는 것이다. 아니면 원래 사진이 피사체와 시간 간의 이어짐을 폭력적으로 끊어놓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진작가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이란 렌즈가 맺는 상(像)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지만, 그것이 시간을 초월한 형태와 표정과 내용의 조화에 도달한 절정의 순간”이라고 하였다. 인용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유명한 말이지만 다시 한 번 되새겨보자면, 사진은 한 사물의 절정의 순간을 찍어내는 것이라야 함이 맞다. 그렇지만 때때로 사진은 그냥 간편하게 프레임 안에 사물 자체를 가둔다. 오늘날 같은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엔 더욱 그렇다. 이전의 카메라들이 한정적인 필름 수와, 필름 와인더 젖히는 준비동작 때문에라도 사물에 대해 함부로 셔터 질을 할 수 없었다면, 디지털 카메라는 원한다면 수백 컷이라도 찍을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컷만을 남기고 삭제하는 것으로 간단히 존재를 유린해버린다. 그렇게 찍힌 사진에 사물과 시간에 대한 예의가 담겨 있을까? 아니면 그것 또한 다이안의 말처럼 어쩔 수 없는 사진의 특성인가?
계남 정미소의 <시간의 향기>는 김지연, 김판용, 박성민 사진작가의 릴레이 사진전으로서, 특히 시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계남 정미소의 대표인 김지연 사진작가는 증명사진과 신분증을 통해 사진 속에 박제화된 한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봄날은 간다>, 4.11~5.27). 사진작가이자, 교육자이며, 또 시인인 김판용은 폐교나 곧 폐교가 될 학교와 그곳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사라져가는 것들을 담아낸다(<학교>, 5.30~6.30). 마지막으로 박성용은 과거의 사진 속의 장소로 되돌아가 현재 모습을 다시 담는 작업을 펼쳤다. 변화된 공간과 변화된 모습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오래된 정원>, 7.3~8.5). 소재나 형식 면에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 작가의 작품들은 공통된 분모가 존재한다. 바로 사진이 시간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고찰이다.

 유공자증052.jpg
김지연, <봄날은 간다>

 자전거아이들049.jpg
김판용, <학교>


돌탑사진050.jpg 
박성용, <오래된 정원>


김지연, <봄날은 간다>

김지연 작가는 아마도 근대적인 공간에 매혹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작품집 『정미소(精米所)』, 『나는 이발소에 간다』, 『묏동』등을 통해 그렇게 집요하게 기억 속의 공간을 끄집어 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전북 지역을 돌아다니며 일백여 곳의 정미소를 담아낸 사진집 『정미소(精米所)』는 그런 욕망이 특히 잘 드러나 있다. 농촌 근대화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쇠퇴의 상징인 정미소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선 거의 사라졌을지언정, 거기 그곳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낡고 다 쓰러져 가는 모습이지만, 사진 속의 묘한 색채감과 함께 여전히 살아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작가의 사진은 단순히 시간이 흘러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그래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공존함을 증명하는 듯하다.
<봄날은 간다>는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며, 또 동시에 관점의 변화를 보인다. 무엇보다 관찰의 대상이 건물이나 공간에서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점.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인근 지역 노인 분들의 증명사진과 신분증을 병치하고 있다.

증명사진은, 모든 종류의 사진 중에서도 특히 카메라와 피사체 간의 긴장적 거리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증명사진은 단어 그대로 마치 무언가를 위한 증명이라도 되는 듯 피사체를 사실 그대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오히려 개인성은 소거되고 나의 얼굴은 일률적인 표정으로 판 박음되고 만다. 한편 신분증은 한 개인을 더 없이 수치화 또는 문서화시킨다. N052-91083나 271009-2XXXXXX와 같은 일련의 번호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사실도 말해주지 않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그 숫자는 강제되고 만다. 나도 누군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나의 신분이 도장 찍히고, 그제야 신분은 공증된다. 그건 그대로 일종의 폭력인 셈이다.
하지만 김지연 작가의 사진에 순전히 그런 냉정함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작가의 이전의 작품에 대해서 살펴봤듯이 작가는 사라지고 있거나 겨우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숨기는 법이 없었다. 아니, 애정이란 불가피하다. 사진을 통해 정미소와 이발소라는 공간을 의미는 소거한 채, 최대한 객관화시켜 담아냈음에도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묶여 졌을 때 오히려 감성적이라고 느껴졌던 것처럼, 한 장 한 장을 놓고 보았을 땐 그냥 증명사진임에도 불구하고 한데 묶이는 순간, 말해지지 못한 진실들이 쏟아져 나온다.

(…)
지나온 시간은 흔적도 없는데 주머니 속에 달랑 남은 주민등록증 하나.
그리고 상처로 얼룩진 또 다른 흔적 6.25 참전 용사 증… 증.
삶이 어떠했냐고 묻지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한 때 훈장처럼 여겼던, 허무한 증표,
신분증 한 장.
전주에서 군산을 가는 기차표 한 장의 의미와 크게 다를 것은 무엇인가?
…봄날은 속절없이 가고 있다.

작업노트에 적힌 작가의 이 글이 사진이 그리는 진실에 정확히 부합하는지는 알 수 없다. 작품에 대한 창작자의 공허한 부기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계남정미소를 통해 사라지고 소외된 것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자 했던 작가의 실천적 노력을 보아서도 허투루 읽어서는 안 된다. 한 명의 사진작가로서 어떻게 이보다 더 피사체에 대해 진실할 수 있단 말인가. 사진 평론가 진동선은 이렇게 말했다. “사진의 업적 가운데 가장 멋진 업적을 든다면, 그것은 윤리를 지키면서 세상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카메라에 포착된 대상은 윤리적일 때 상처가 없고, 이성적일 때 우울하지 않습니다.” 다이안이나 진동선의 말을 종합해보면 결국 사진의 폭력성은 불가피하다. 그렇지만 사진가가 어떻게 대상을 대하느냐에 따라 대상이 받는 상처는 달라진다. 오히려 상처를 보듬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를 포함하여 김지연 작가의 일련의 활동은 대상과의 소통의 연장이고, 대상의 존재를 증명해가는 과정이다. 정미소를 찍을 때만 해도 엄연히 이방인이었을 작가는, 동네 어르신의 증명사진을 찍을 때쯤엔 이미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지 않았을까? 저 증명사진의 정체가 영정사진이며, 그것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때문이라도 어르신들이라면 저어하셨을 게 분명하지만, 선뜻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사진가와의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작가는 진심으로 존경심을 담고 셔터를 눌렀을 게 분명하다.
시간은 영속적이고 사진은 찰나적이다. 피사체를 뷰파인더에 담고, 조리개를 여닫고, 셔터를 누르는 그 짧은 순간 사진은 이미 어떤 이미지로 결정되어 버리지만, 행간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지난한 소통의 과정이 있다. 소통은 곧 위안이 된다. 아마도 나를 포함한 뭇사람들이 사진 찍히기를 두려워했던 것도 사진이란 행위 속에 윤리와 소통이 부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좀 더 나를 소중하게 다뤄 줬으면 하는 바람과 같은 것. 그런 의미에서 정미소(『정미소』)와, 이발소(『나는 이발소로 간다』)와 묏동(『묏동』)과 동네 이장님(『우리동네 이장님은 출근 중』)과 어르신들(<봄날은 간다>)은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있는 그대로 마주해주는 사진작가를 만났으니 말이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나 아쉬운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려는 의도는 없다.
나는 과거의 이야기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대상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이 시간에 그 공간에 있다는 존재 증명의 제시이다.”
- 김지연, 『나는 이발소에 간다』 작가노트 중


되돌아 보다

계남 정미소를 다녀왔던 그날을 다시 떠올려 본다. 5월임에도 유난히 더운 날이었고, 초행길이었다. 서울에서 진안으로 떠나는 버스는 하루에 두 대뿐이었고, 도착한 진안엔 택시 한 대 다니지 않았다. 마령면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더니 조금은 번화했던 진압읍을 지나서는 산과 논, 밭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외지에 대한 두려움이 슬금슬금 밀려왔다. 순탄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러나 계남정미소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버스에서부터 한 시골 아주머니가 상세하게도 계남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주었고, 버스를 내린 다음엔 앞만 보고 걸으면 됐다. 물론 짧은 거리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훨씬 외진 곳이어서, 순전히 사진전을 관람하기 위해 올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이산 국립공원이나 섬진강의 발원지라는 데미샘, 드라이브에 좋은 모래재 방문을 겸하지 않는다면 그냥 나서기엔 쉬운 길은 아니었다. 일부러 마중 나오신 김지연 작가님이 아니었다면, 훨씬 고된 여행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사진 관람을 마치고 전시관을 나왔을 때, 응접실에서 책을 읽으며 조용히 기다리던 선생님은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어땠냐고 넌지시 물었고, 말주변이 없던 나는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 증명사진인데도 왠지 따뜻하게 보였노라, 용기내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 뒤로 오랜 시간 동안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진에 담긴 이야기도, 정미소를 통한 농촌생활도, 그리고 좀 더 현실적인 고민마저도……. 이렇게 개인적인 자리에서 창작자의 속내를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경이로웠지만, 기대대로 사진에 대해 섣부르게 가지고 있었던 편견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 더없이 좋았다. 그러니까 이 여행을 순전히 개인적인 사진 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한 고행길이었고, 이 글은 그 치유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떠나기 전 얼만큼은 망설였던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와서 되돌아보니 다녀오길 참 잘했다.

★ 계남정미소는 김지연 작가가 『정미소』를 작업하는 중에 인연을 맺어, 2006년 공동체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과거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장 구실을 했던 정미소 본연의 역할을 살려 주민 스스로 참여하는 생활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번 전시전 <시간의 향기>는 2009년 8월 5일까지 계속된다. 홈페이지 www.jungmis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