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이후의 한국소설

막다른 곳에 다다른 그녀들
- 이혜경 『고갯마루』, 백영옥 『스타일』

박상선 | 한성여고 교사 mitch296@gmail.com


깜냥 없이 예기치 못한 글빚이 생긴 건, 1억원 고료 제4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하고 지금 장안의 지가를 높이며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는 『스타일』이란 소설의 막장을 덮고 난 오후였지요. 『스타일』은〈A〉매거진 8년차 기자 이서정이 7개월간의 섭외 기간 중 300여 통의 전화를 하며, 홍콩과 뉴욕에서 비행기로 공수한 옷 총 59벌을 벌여 두고, 경쟁지 기자의 방해공작을 뚫고서, 컴백한 영화배우 정시연의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벌이는 고군분투기입니다. '에르메스 백과 마놀로 블라닉 슈즈에 대한 욕망과 아프리카 기아 어린이들을 후원하는 착한 욕망 사이를 넘나드는' 한 캐리어우먼이 '상처받지 않고 더러운 세계를 견디면서 진정성을 지켜가는' 모습을 '쿨하게 잘 형상화'시켰다는 전형적인 대중소설입니다. '패션계의 화려한 직업의 세계 뒤에 숨은 인간의 욕망을 재기발랄하게 그린 화제작'이란 선전 문구를 두른 이 소설은 현재 한국소설 최초로 15개 이상의 업체가 판권을 따내기 위해 경쟁 중이랍니다. 일간지에는 곧 지상파 방송의 드라마 제작이 시작될 것이며, 작가 자신이 대본 집필을 맡게 될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문학상 수상을 놓고 참 말이 많았다지요. '서른 다섯의 귀여니'란 비아냥에서 드러나듯, 재미없다는 말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작가 자신이 젊은 여성에게 '읽히는' 전형적인 칙릿(chick-lit)을 목표로 작정하고 쓴 첫 장편에 주어진 지나친 감투라는 것이 못마땅해 하는 측의 변입니다. 문득 이혜경의 「고갯마루」가 뇌리에 스쳤습니다. 47회 현대문학상 수상작이지만, 순문학적 전통을 의연히 지켜가는, 발표하는 작품의 수가 비교적 적은 작가의 작품인 탓에 좀처럼 입에 오르내릴 일이 없었지요. 문학적으로 정련된 제도권 문학의 정점에 있다 할 것입니다.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 아쿠타카와상이 20세의 히토미란 작가의 작품에 수여된 적이 있었습니다. 엽기발랄한 피어싱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습니다. 영상문화에 익숙한 젊은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문학적인 성취보다는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는 신인발굴에 주력한 이벤트가 아니었냐는 비난을 들었었지요. 도서판촉을 위한 경품행사가 당연시 될 만큼 척박한 현실입니다. 어차피 팔리는 소설이 되기 위해선, 많은 생각을 요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 힘겹게 읽어내야 하는 문장보다는 마치 드라마의 대사를 듣고 있는 듯 부담 없는 글이거나, 혹은 익숙하고 평온한 삶에 파장을 가져올 어떤 심리적 불안도 주지 않는 글이어야 함이 아닐런지요.
이런 현 세태에서,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 혹은 상반된 이른바 격에 대한 논의는 애초 제 관심사가 아닙니다. 두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주인공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거대한 사회구조 속에 놓인 한 개인의 삶이, 그가 지향하는 시점(視點)에 따라 얼마나 상반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구태여 작품 속에 담긴 행간(行間)의 의미를 읽어 내는 우리의 수고로운 노력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가 제 의문의 첫머리였지요.  

『고갯마루』, 학습지 교사로서의 피폐한 삶

『고갯마루』의 주인공 강선애는 남다른 능력을 인정받아 잡지사 기자로 스카웃 되어 온 인재였습니다. 애초에 학습지로 돈을 벌기 시작한 회사가 잡지 등을 발행하며 점차 출판재벌의 모습을 갖춰 가기 시작하던 때였지요. 끝없이 확장되어갈 것만 같았던 사세는 끝내 재정위기를 겪게 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인 이른바 구조조정이란 것을 도입하게 됩니다. 능력 있는 기자이자 사원이었던 강선애는 그저 경비절감 차원에서 학습지 부서로 강제 전근됩니다. 자신의 업무와 상관없는 전보 발령은 사실상 회사를 그만두라는 무언의 압력이었지요.  
그녀가 겪은 고통은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강제퇴직의 험한 분위기로 술렁대던 직원들을 달래기 위해 회사가 내놓은 방침이란 것이 꼭 필요하지 않은 부서는 없애되, 남게 되는 부서에서는 월급을 많이 받는 사람들을 1순위로 잘라냄으로써 경비 절감 효과를 거두겠다는 것이었지요. 자연히 직장 동료들은 자신보다 많은 연봉을 받는 그녀의 퇴직을 은근히 바라게 됩니다. 참 잔인하고도 냉혹한 현실이지요. 동료라는 이름으로 같이 동고동락하던 사이에서 졸지에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 사람이 잘리거나 또는 알아서 그만 두게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도 본인이 커다란 과오를 저질렀거나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단지 나이가 많다거나 월급으로 나가는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이유에서라면 더 그러하겠지요.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10년전 IMF라는 상황에서 주인공 강선애와 똑같은 시련을 겪었지요. 하지만 이미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나이가 된 그녀는 업무의 성격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학습지 교사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새로운 직장 생활은 단순히 담당하는 업무가 바뀐 차원이 아니었지요. 아파트 앞에서 홍보 전단을 돌리면서, 그만 두겠다는 회원을 입 발린 말로 설득하면서, 무거운 가방을 메고 약속한 시간에 방문하였으나 굳게 닫혀진 문을 마주 보면서,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끝낼까 봐 감시의 끈을 늦추지 않는 엄마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회원 수 증가라는 실적을 내기 위해서 전전긍긍하면서, 그녀는 '괴사'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피를 말린다는 표현이 있지요. 자신의 일이 즐겁거나 잘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할 때 느끼는 고통이란 오직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겠지요.
어린 시절, 과부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명천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꿈은 허황되고 사업 수완은 없던 큰오빠의 잇따른 사업실패로 가산이 모두 탕진되었기 때문이었지요. 자연 다른 형제들은 큰오빠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갖게 됩니다. 일말의 죄책감조차 내보이지 않는 큰오빠를 단지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감싸고 허물을 덮어주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형제들의 반목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원치는 않았으나 가족의 화합을 위해 그녀는 기꺼이 조정자 역할을 하게 되고 그녀를 중심으로 가족 간의 모임과 유대가 유지됩니다.
어느 날 주인공 선애는 경영진의 강압에 의해 단지 연고가 있다는 이유로 지사확장을 위해 고향 명천에 내려가게 됩니다. 아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니 학습지 홍보와 회원 확보에 유리하리라는 영업상의 고려였겠지요. 문제는 큰오빠가 사업을 벌인다면서 동네사람들에게 이런저런 경제적인 피해를 입힌 후에 도망치듯 떠나온 곳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선택권도 당연히 없을 뿐 아니라, 이미 살아남기 위한 사투에 가까운 노력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선애는 가족들과의 만남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어머니의 기일에 맞춰 출장을 떠납니다. 자신의 절박한 문제로 인해 가족을 배려할 마음의 여유를 잃은 탓이겠지요. 가슴 아픈 현실에서 일단은 벗어나고 싶은 탈출욕구도 있었을 터이고요. 그리운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게 되지만 그녀는 자격지심으로 동창들에게조차 바뀐 직장을 솔직히 밝히지 못하고, 차마 학습지를 보아 달라는 말도 내놓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모임이 이루어진 동창의 노래방 개업식에서 '미친데기'란 호칭으로 불렸던, 이미 노인이 된 명재를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수십 년 전 집성촌에 찾아든 타성바지 미치광이였던 그와 정분을 나누었던 선애의 당고모는 그 사랑 때문에 얻어맞아 정신을 놓았더랬지요.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을 떠나지 않고 잡초처럼 질기게 생을 살아내는 '미친데기' 명재의 모습을 보면서, 선애는 나약하기만 했던 자신의 모습과 삶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막다른 곳에 다다른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갈등과 고통,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젊었을 때 본 '광수생각'이란 만화 한 컷이 떠오릅니다. 어려서부터 돌팔매질을 잘 하던 동생과 의경이 된 형의 이야기였지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꿈꾸며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당연한 논리를 인정받기 위한 민주화 시위현장에서 둘은 만납니다. "..동생은 어렸을 때처럼 손에 돌을 들고 있었고, 저는 반대편에 두터운 옷을 입고 서 있었습니다. 동생은 나를 향해 돌을 던지진 않습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자신의 한 쪽 눈을 자식에게 준 어머니, 대공원 입장료인 사천칠백오십원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던 소녀가장……. 그의 만화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작고 소중한 것들에 대한 맑은 시선을 느끼게 해주었고, 가슴 뭉클했던 잔잔한 감동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미덕에도 불구하고, 형제가 마주선 그 한 컷의 그림은 제게 심한 불쾌감과 모욕감을 안겨주었지요. 그 만화 속엔, 시민이 돌을 들고 거리로 나서게 된 시대적 배경도,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과 치안을 담당할 경찰로 하여금 시민을 상대로 진압봉을 휘두르게 강제한 정치세력도, 투표소가 아닌 거리에서 국민이 의사표현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제도적 억압도 보이질 않았지요. 시위대와 전경의 화해만으로 세상이 아름다워지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참혹했으며, 억울하게 희생된 순수한 우리의 형제자매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힘든 삶을 이어가도록 만든 사회적 모순이나 억압은 뒤에 숨겨져 보이지 않고 오직 개인의 부적응이나 불성실함이 원인인 것처럼 몰아가는 분위기가 불쾌했지요. 제가 느꼈던 모욕감이란 아마도, 유모차에 태운 자신의 아이에게 다른 나라 국민들은 먹지도 않는 광우병 쇠고기를 먹이고 싶지 않다는 소박한(?) 이유로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어머니가 '불순한 배후세력의 사주를 받은 반미'로 매도당했을 때의 황망한 심정과 같을 터입니다.
매년 바뀌는 수능 입시제도가 학생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듯,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제한하는 사회구조도 한 개인의 선택권의 범주 밖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어머니가 스스로 쇠고기 수입을 결정한 것이 아니듯 말이지요. 매일 매일 사무실에서 자신의 판매실적이 남보다 훨씬 낮은 막대그래프로 표시되는 것을 바라보는 영업사원의 심리적 압박감은 자신의 일에서 행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도록 만들겠지요. 두 소설의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갈등과 고통이란 사실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몸담고 있는 조직과 사회가 강요하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겪고 있거나 겪게 될 일이겠지요.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허위적 허위적 계단을 올라가 보면 문이 잠겨 있는 때도 많았다. '교실'이라고 부르는 다음 아이와의 약속 시간 때문에 더 기다릴 수 없어서 못 만난 채 떠난 다음날, 학습지를 끊겠다고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낡은 건물의 모서리를 비집고 돋아난 민들레 따위의 잡풀이 유난히 눈에 자주 들어왔다. 경쟁력은 없고 적응력이 뛰어난 식물, 잡초. 잡초는 경쟁에서 뒤떨어지고 도태된 식물이므로, 제아무리 척박한 곳에서도 살아나갈 수 있는 적응력을 키워나갔다고,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는 잡초를 규정했다. 밤이면 잡초는 다리가 퉁퉁 부었다. (『고갯마루』, 이혜경, 현대문학, 2001, 27쪽)

조금이라도 허술하게 일찍 끝낼까봐 감시의 끈을 늦추지 않는 엄마들을 대하면서, 펜을 쥐고 사람들을 만날 때와는 다른 대접을 받으면서, 나는 점점 다른 일을 하는 것에 자신이 없어졌다. 마감 때면 휴회와 신입의 숫자에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만나면 저 사람이 이 학습지를 봐줄까 어쩔까를 먼저 가늠하면서, 내 안의 괴사는 뭉텅뭉텅 나를 먹어들었다. 그런데 하필 고향 근처라니. (같은 책, 31쪽)

궁금하거나 애로사항이 있으면 뭐든 말하라는 기자 선배의 말을 믿고 금기어를 털어놓은 인턴이나 신입들은 두 달을 못 버티고 모두 나갔다. 원래 세상 모든 보스들은 '난 뒤끝 없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이 말은 '나는 대단히 뒤끝이 많다'는 말이나 다름 없다. 사회화가 덜 된 어린애들은 윗선들이 하는 말을 해석해내는 능력이 없다. 회사도 가르쳐주지 않는 냉혹한 조직의 생리란 보스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논리, 이성, 상식, 성과, 인간성 같은 아름다운 말? 이런 건 보스의 한 마디면 끝장난다. 쟤. 이상하게 맘에 안 들어! 기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들어왔겠지만 이곳과는 영영 굿바이 하는 것이다. (『스타일』, 백영옥, 위즈덤하우스, 2008. 17∼18쪽)

『고갯마루』에서, 일순 주인공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것은 학습지 교사로의 부당한 전근 명령이었습니다. 노동의 기쁨을 느끼며 자신의 존재감을 체감하던 삶의 터전에서 급작스럽게 내몰림은 사실상 퇴직의 권고였기에, 그리고 앞서 설명한대로 자신의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주인공이 알아서 회사를 떠나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사람들의 틈 속에 끼어 있었기에, 선애는 섬처럼 타인으로부터 격리된, 완벽한 소통의 부재 상황에 내몰리지요. '설마 그럴 리가' 라는 표정으로 학습지 선생인지를 묻는 친구와, 기자라고 확인해 주는 친구 사이에서, 주인공은 '거짓됨을 삼키며' 답을 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웃어넘기고 말지요. 고향 친구들 앞에서도 한없이 왜소해지는 자신을 추스르지 못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직업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많지 않던가요. 남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상황에서도 소신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요. 직업적인 자긍심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노동환경 속에서 경쟁력은커녕 적응력조차 없는 그녀가 스스로 도태되었다고 느낄 때, 민들레 같은 잡풀의 존재가 가슴으로 파고듭니다. 작고 하찮은 것들의 목소리는 마음이 낮아지는 순간 찾아드는 법이니까요.    
동물이 생존조건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임에 반해, 인간은 '노동'을 통해 환경을 능동적으로 변형시키고 재구성해 나갑니다. 삶의 터전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은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목적과 생존방식을 구체화시키게 되지요. 그래서 진정한 노동이란 임금(賃金)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그가 되어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고, 무니에의 말처럼 '노동은 사물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인간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지요. 직업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노동 형태가 한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방식을 결정한다는 말이죠. 헤어디자이너 눈에는 길 가는 이들의 머리스타일만 보이고, 구두쟁이는 사람들의 신발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을 생각하시면 이해하시기 쉽겠지요. 혹 먹고 살기 위해 뼈가 부서지도록 일해야만 하는 이들에게는 위의 정의들이 참으로 이상적이고 공염불 같은 말장난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사실 어떤 이가 원치 않는 노동을 해야만 하고, 그 유일한 이유가 단지 생존이나 소유를 위해 필요한 돈을 위해서라면, 그 시간은 기실 타인의 이익에 구속된 목표 없는 삶이 되어버리지요. 진정한 '소외'란 왕따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애씀이 본연의 자신을 위한 삶이 되지 못하는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두 소설의 주인공 모두 개인이 맞서기에 버거운, 거대한 시스템이 강요하는, 원치 않는 노동을 해야 하는 갈등을 겪게 됩니다. 한 명은 생계를 위해, 다른 한 명은 시대감각과 유행의 속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인간적 가치를 외면하는 사회가 삶을 짓누를 때 우리는 두 갈래 길을 마주하게 되지요. 맞서 싸워 시스템을 바꾸든지, 아니면 시스템에 적응하든지. 왜곡된 삶을 벗어나기 위한 그녀들의 선택은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차에 따라 상반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내몰린 그녀들의 다른 선택

코맹맹이 소리가 핸드마이크를 타고 한산한 거리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빨강과 흰색과 파랑 풍선의 아치 아래, 미니스커트에 해병의 모자 같은 걸 머리에 얹은 아가씨 둘이 핸드마이크를 들고 춤을 추면서 외치고 있었다. 이십대의 문턱을 막 넘어섰을 그들은 짧은 치마에 높은 구두 덕분에 다리가 한껏 길게 보였다. 밤이면 그들은 낯선 도시의 여관이나 밤늦게 돌아가는 차 속에서 다리를 주무르리라. 스타킹을 벗는 순간, 낮 동안에 스타킹 아래 조여졌던 살갗이 후우우, 오래 참았던 한숨을 쉴 것이다. 매끄럽게 뻗은 그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 발에서 부기가 느껴졌다. (『고갯마루』26쪽)

나를 정녕 아프게 했던 건 다리가 아니었다. 내가 이 노가다판에서 뛰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그럴 때면 모자를 더 푹 눌러 쓰게 되었다. 낯선 집의 닫힌 문 앞에 서면, 그 안에서 낯익은 얼굴이 느닷없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벨을 누르려던 손을 허공에서 지칫거리게 했다. 다들 공부만 하면 어떡하냐. 나사 돌리는 놈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같은 책. 33쪽)

제니칼은 푸른색 캡슐로 된 알약이다. 이 약은 한마디로 우리 몸이 기름을 흡수하지 못하도록 작용하는 다이어트 약이다. 제니칼은 FDA의 승인을 받으면서 그 안전성을 인정받았다. 먹는 법도 간단하다. 식사 후 한 알. 현대인에게 적합한 방식이다. 하지만 이 약에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 제니칼 때문에 우리 몸 속에서 흡수되지 못한 기름들은 다음날 아침 변기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장담컨대 보기만 해도 구토가 치밀 것이다. 더 끔찍한 부작용은 아직 말도 꺼내지 않았다! 몸이 기름을 흡수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이 약은 성능이 뛰어나다. 특히 약이 축적되면서 첫째 날보다는 둘째 날에, 둘째 날보다는 셋째 날에 더 강력한 효과를 볼 수 있다. 문제는 기름이 '변'에 섞여 나오다보니, 같은 곳에서 나오는 다른 것들도 기름이 섞여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실수로 방귀 한번 뀌었을 뿐인데 동시에 기름까지 내뿜게 된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 기름들은 팬티를 적시다 못해 바지까지 푸욱 적시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 전날 중국음식점에라도 갔다면? 말을 말자. (……) 이 미친 세상에선 뚱뚱한 남자가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여성용 생리대를 차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것이 아름답고자 하는 인간의 추한 뒷모습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이성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정상이야. 텔레비전 속 말라깽이들이 비정상이야. 라고 아무리 외쳐도 나는 내가 늘 뚱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매일 아침 스키니 진에 억지로 다리를 구겨 넣다가, 한숨을 내쉬며 내 허벅지는 너무(!) 굵고, 종아리는 정말(!) 짧다고 느낀다. (『스타일』103∼105쪽)

여성지의 표지 모델은 왜 여성일까요. 선정성을 강조하는 남성잡지가 백치미 혹은 고혹적인 여성을 표지에 내세움이 당연한 판촉행위라면, 여성이 주 독자인 잡지는 남성을 전면에 내세워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잡지는 이성에게 직접적인 호감을 표하기보다는, 이성에게 주목을 받는 동성의 외모에 주목하면서 타자(他者)의 기준에 얽매인 수동성을 강요합니다. 명동 거리를 걷다 보면 남성들이 보통 여성에게만 관심을 두는 반면 여성들은 남성은 물론 같은 여성들의 옷차림과 외모에도 늘 예민한 시선을 두지 않던가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것'과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원해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질이 다른 것입니다. 쇼핑몰을 나서는 만족스런 자신의 모습은 늘 준비되어있는 새로운 상품의 소비자로서의 페르소나(가면)일 뿐이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전에는 존재감도 없던 누군가의 외모와 닮아지기 위한, 시대와 소통하기 위한, 또 다른 가면을 원하게 됩니다. 옷이 알몸을 드러내는 부끄러움과 추위를 막아주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유행과 패션이란 이름을 걸치는 순간 욕망의 역사가 됩니다.
『스타일』의 주인공은 통속(通俗)이란 말을 즐깁니다. '세상과 통한다'는 의미에의 긍정이지요. 그 '소통'을 위해서는 스키니진을 입기 위한 굶주림이 합리화됩니다. 질병 치료 등의 생존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직 날씬해지기 위해서 스스로 굶주림을 택하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라지요. 옷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옷을 소비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는 부조리가 시작됩니다. 타인의 시선과 관심이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규정합니다. 내 삶의 주권이 타인들의 소유가 되는 것이지요. 더욱이 그러한 부조리는 쉽게 없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주인공의 갈등과 고통을 안겨줍니다. 애초 올바른 '판단'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것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올바른 결론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했을 수도 있겠지요.
자신이 놓인 구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같은 인간이기에, 『고갯마루』의 강선애도 타인으로부터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한 부끄러움과 모멸감을 느낀 것은 당연했지요. 그러나 그이는 자신의 조직에서 사용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능력 있는 도구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는 인정욕구를 거부합니다. 비굴하게 굴복하는 대신 '나사 돌리는 놈'이 되면 어떠냐고 되묻습니다. 아직 기자인 줄 알고 있는 동창들 사이에서 '거짓됨을 삼키면서', 퇴직을 종용하는 지국장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못하면서', 학습지 시장이 왜 '고등교육 받은 주부의 마지막 노가다판으로 불리는가를 절감하면서', 고통스럽게 삶의 고갯마루에 이른 선애는 질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정점에 이릅니다.
홍보도우미 여성들의 미끈하게 뻗은 다리에서 선애는 여성적인 매력 대신에 고된 노동에 뒤따르는 '부기'를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신체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고통. 타인의 존재가 나의 삶을 재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인간으로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그 연대의식 속에서 선애는 공동체가 상생할 수 있는 조건이 함께 조금 더 가난해질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 '나사 돌리는 놈'에게 다른 '대접'을 하지 않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밖에서 주어진 가혹한 일상을 내면의 대화로 바꾸어 냄으로써, 그리고 타인에 대한 애정으로 바꾸어 내면서, 늘 새로운 가면을 준비해야 했던 거짓된 삶을 거부하게 되지요. 올바른 인식과 다소 올바른 인식의 차이는 천둥과 염소울음의 차이입니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마지막 말은 빨리 돌아가세요, 라고 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궁금해졌다. 난데없이 왜 큰오빠에게 명재가 살아 있더라는 이야기 따위가 하고 싶어졌을까. 우리보다는 명천 출입이 잦은 큰오빠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보다, 큰오빠에게 명재는 그냥 고장난 시계탑이나 다름없는 사물, 미친데기에 지나지 않을 텐데. 그 옛날의 명재가 이 풍진 세상에서 그래도 살아남아, 허기지면 먹을 것을 찾고 뭇사람 앞에선 추레함을 부끄러워할 줄도 알더라고. 나는 왜 그 이야기가 꼭 하고 싶었을까.(『고갯마루』35쪽)

'이 복잡한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단선적으로 설명되는 '이즘'이나 '고민' 같은 건 실종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나는 감히 화해에 관한 성장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와의 화해, 원수라 생각했던 사람들과의 화해, 진정한 자기 자신과의 화해, 세상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다양한 스타일들과의 화해……' (『스타일』작가의 말 중에서)

싸움의 근원을 묻지 않고 화해를 말할 수 있을까

주말 촛불집회에 나갔다가 우연히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 한 학생은 어머니와 함께 왔더군요. 그만 집에 가자고 설득해도 끝까지 남겠다고 학생이 고집을 부리자 그 어머니가 제게 10시전에는 귀가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갑작스레 생긴 책무였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지요. 집회 후 촛불을 든 행렬이 한국은행 앞을 지나자마자 저는 소떼 부리듯 명동역으로 가는 골목으로 아이들을 밀어댔습니다. 행렬을 벗어나 스무 걸음이나 걸었을까요. 참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눈앞엔 세상의 모든 고뇌와 유리된 듯한, 싱그러운 젊음을 맘껏 누리는 또 다른 행렬이 있었지요. 성탄절 전야같은 느낌이었지요. 스무 척도 되지 않을 거리를 사이에 두고 제 좌우에서 이질적으로 놓인 거리풍경이 제게 반편만 옷을 걸친 당혹감을 주었습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소리쳐 외쳤던 아이들이 더 놀란 얼굴을 하고 절 쳐다보더군요. "사람은.. 뒤를 볼 수 없는 신체구조를 갖고 있잖니.. 너희들이 시선을 둘 방향을 정하고 나면 해야 할 행동은 저절로 배우게 된단다.."
촛불시위를 불러온 쇠고기 파동의 진짜 원인은 사람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를 더 우선시한 함에 있었습니다. 『고갯마루』의 강선애나 『스타일』의 이서정이 겪은 일들은 외적인 화려함보다 내적인 성숙함을, 경쟁력보다 공동체의식을, 돈보다 사람의 가치를 우선시할 수 있는 의식의 변화가 없다면 결국 우리가 감당할 일이 되고 말지요. 쇠고기 문제만 해결된다면 원하는 세상이 오리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정말 두려운 일은 좌절감을 안겨주는 왜곡된 사회구조가 결국 우리의 선택의 결과였다는 점이고, 가치관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 주인공 강선애가 되찾은 인간다운 삶의 생명력은 결코 느낄 수 없으리라는 것이지요.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을 원망하던 제 반 아이들이 훗날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우리를 억압하는 시스템은 우리의 마음과 눈길이 한때 놓였던 자리임을 잊지 말아주기를 바랬지요.  
『스타일』에서 보여주는, 서로 얻고자 하는 바가 다른 쌍방 사이에서의 '화해'란 어떤 의미인지요. 자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과 재화를 소비하는 구매력 뿐이지요. 소비하는 측면에서는 만족스런 구매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경제력일 터이고요. '이 시대의 혁명이란 몸 사이즈가 66에서 44로 줄어'드는 것이라고 믿는 화자이기에,  "'내가 일하는' 이 '거대한 욕망의 주차장'같은 삶의 터전에서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나보다 윤리학자가 더 열심히 고민할 것'이기 때문에 이제 '무엇이 윤리인지는 고민하지 않겠다'고 다짐"(『스타일』326, 327쪽)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 있습니다. 힘이 없어 굽히어 복종하는 '굴복'과 납득하여 따르는 '승복'이 다른 것이듯, 결국 그 '화해'란 시장의 크기를 쫓지 못하고 카드대금을 메우느라 허덕이는 자신의 무능력을 위로하는 넋두리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스테이크를 파는'대신 '스테이크가 지글거리는 매혹적인 냄새와 소리를 파는' 구조를 인정하는 한 힘겨운 삶은 지속될 것입니다. 애초 옳고 그름을 따져야 했었을, 싸움의 토대에 대한 올바른 질문이 없었기에 궁극적인 해답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인간적인 삶이란 나의 가치관을 오직 내 지갑 속 현금에만 관심이 있는 타인의 입맛에 맞추는 과정이 아니지요.
강선애가 세속적인 큰오빠에게 진정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고장난 시계탑이나 다름없는 사물, 미친데기에 지나지 않을' '그 옛날의 명재가 이 풍진 세상에서 그래도 살아남아, 허기지면 먹을 것을 찾고 뭇사람 앞에선 추레함도 부끄러워할 줄도 알더라'는 것이었지요. 시계탑은 고향 명천역에 찾아 든 선애가 마주쳤던, '숨을 놓은 건 두 계절도 더 전으로 보였'던, '다시는 움직이지 않겠다, 이 악물고 결의한 듯했'던 바로 그 시계탑이었습니다. 학습지를 구독해 달라는 말을 동창들에게 끝내 놓지 못하는, 슬그머니 빠져 나와 막차를 바라보면서도 쉽게 올라타지 못하는, 가족에 끼이지 못하고 서걱대는 오빠에게 차마 '빨리 돌아가세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갈등은 조금 더 뻔뻔스럽지 못하고 모질지 못하여 시대와 불화를 겪는 이웃의 모습이었습니다.
과거와 현재만 있고 미래는 없던, 그래서 고장난 시계처럼 멈추어 버렸던 그녀의 삶이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허기를 채우고 추레함을 다잡아 살아내겠다는 절실함으로 일어서겠지요. 더 성숙해지고 스스로 더 강고해졌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닿는 곳이 예의 옳고 그름의 판단을 타인에게 의지하는 굴복적인 '협상'이나 '화해'는 아닐 거라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삶의 '고갯마루'에 이를 때까지 인간의 땀내를 놓아버리지 않는 길눈과, 내면의 목소리에 기울이는 선애의 진정성이 그를 증명하지요.

남은 이야기. 문학 작품을 읽는 이유

솔직히 사람들은 문장의 숨은 뜻을 애써 찾아가며 『고갯마루』를 읽어내기 보다는『스타일』의 주인공이 체중감량제인 제니칼을 복용한 탓에 꿈에 그리던 남자와의 키스 도중 속옷에 실례를 하고 마는 에피소드에 더 흥미를 갖지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힘겹게 순수문학을 읽어야 할 의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다음의 얘기를 참고 들어주시렵니까.

해와 하늘빛이 /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 애기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미당의 시 「문둥이」 전문(全文)입니다. 부끄럼이 없는 이는 빛 속에 나아가지요. 하늘빛 같은 순결함과 맑은 그리움으로. 하지만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늘이 내린 형벌의 굴레에 얽힌 문둥이는 그를 누릴 권리가 없습니다. 보리밭은 멍석말이를 당할지언정 단 한번 안아 보고픈 초록의 왕성한 생명력으로 그를 유혹합니다. 급기야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은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 삶의 조건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새로운 죄의식과 배가된 고통으로 찾아듭니다. 꽃과 상치된 핏빛 울음은 숙명과도 같은 삶에 억눌린 슬프고도 찬란한 인간의 조건을 토해냅니다. 바로 거울 앞에 선 우리 자신이지요.
「문둥이」에 대한 해답은 없습니다. 위와 같은 해석은 그저 개인적인 독해일 뿐이지요. 한 작품은 정답이 없는 상상력의 장이며, 가슴으로 느끼는 감성의 뜨락이며, 야만과 다름없는 천박한 인간관계에 대한 해독(解毒)만으로도 정당성을 얻는 인성교육의 교구입니다. 상상력이라 해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동물을 그려낸다든지,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기발한 물건을 설계해내는 차원만 떠올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나 다른 이의 감정을 미루어 헤아리는, 타인에 대한 일상적인 작은 배려와 사려 깊은 행동들은 모두 상상력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아기의 손이 닿을 만한 곳의 위험한 물건을 미리 짐작하여 정돈할 수 있는 엄마의 판단력엔 교과서로 배울 수 없는 소중한 상상력의 활용이 있습니다.
말주변이 없다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하지만 사실 어떤 주제에 대해 남에게 자기 의견을 잘 전달하지 못할 때에는 말솜씨가 없다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능력이 없거나 그 주제에 대해 별다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어휘력이 모자라면 서로 성질이 다른 자신의 다양한 느낌을 한 두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워드문서를 프린터로 출력하는 것은 내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인간은 그와 다릅니다. 자신이 출력해내는 말을 통해,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자기의 생각을 다듬게 되며, 논리적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지요. 비유와 상징을 위해 사용된 어휘를 통해 의미를 생산해내고, 반어와 역설을 통해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실된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 시는, 문학은, 적게 말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실상 우리가 무지한 이유는 관찰한 바가 적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것을 보기 때문이며,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들을 잊은 탓이고, 굽어 살피는 대신 목을 너무 빳빳이 세운 탓이지요.
시간이 금이라는 말 속에는 자본주의의 뼈대를 이루는 핵심이 숨어 있습니다. 인간은 남이 침범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자산인 시간을 투자하여 노동을 하고 재화를 구매할 소득을 얻습니다. 자본주의가 유일한 척도인 조건 하에서라면,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의 가치는 슬프게도 그가 일궈내는 노동생산성에 달려 있습니다. 1시간의 알바를 하고 난 후 3,770원의 소득을 얻었다면, 그것은 곧 그가 소유한 시간의 가치가 금액으로 환산된 양이지요. 프로야구 선수들의 몸값의 차이는 구단에서 그를 필요로 하는 정도의 차이인 것이며, 빌 게이츠와 저의 연봉 차이는 일정 단위 시간 내에 만들어내는 유형 무형의 상업적 생산물의 양적 차이, 곧 인적자원 측면에서의 효용성의 차이라는 것이지요.
고대 이집트인들은 '영혼의 치유장'이라고 책을 표현했다지요. 시인 말라르메는 '세계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것에 이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예찬했고요. 영혼의 무게를 재려는 행동이 부질없듯, 작품을 감상하는 이의 감성은 효율성이란 울타리 안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경제실용서 대신 시를 마주한 독자는 지폐로 환전되었을 수도 있었을 값지고 소중한 시간을 굳이 타인의 삶에 공감할 마음의 준비에 놓은 셈이지요. 지난 시간 우리는 세상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로 채워지는지가 우리 삶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된다는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본디 '실용'에는 원칙이 없습니다. 오직 경쟁과 성취만이 삶의 조건이 되어버린 곳에선 가장 시대에 뒤떨어지고 둔감한 이들만이 자연의 빗소리와 인간의 울음소리를 듣지요. 후둑거리는 명징한 곡소리가 귓속을 울려 작가는 참을 수가 없게 됩니다.    
『스타일』이 거둔 성공의 이면엔 스스로 수동적인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던 수많은 대중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알리바이의 역할이 있지는 않았는지요. '폼생폼사'의 삶도 나름의 치열함과 진지함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를 부여해주는 식으로 말이지요. 사십여 쪽이 채 되지 않는 짧은 단편 『고갯마루』엔 유행의 트렌드도, 제 하고픈 말을 대신해 주는 듯한 정서적 카타르시스도, 매력적인 선남선녀들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은 뜻을 읽어내는 수고와, 함축된 의미를 힘겹게 찾아드는 탐색이 요구되지요. 알리바이는커녕 되려 자신의 자산인 시간을 투자하여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자신도 예외일 수 없는 근원적인 삶의 조건을 체험하려는 성의조차 전에 없이 소중해져만 가는 시대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란 그런 자발적인 고통의 시간 후에 오는 것이 아닐런지요. 콩나물이 저를 적신 물을 기억해서 자라는 것이 아니듯, 우리들도 정신을 일으킨 글귀들은 잊어가겠지만요.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고 답하는 대신 봄이 온다고 말한 초등학생의 말 속에는 이미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읽는 미학(美學)이 있습니다.
인간의 유일한 자유는 선택의 자유이며, 순간순간의 선택의 축적이 곧 '삶'이 되지요. 작가가 한 땀 한 땀 솔기를 누벼 지은 한 작품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만의 생각에 더 이상 갇혀있지 않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위협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헛된 조작이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점이 소중한 것이지요. 당신의 시선은 지금 어느 곳에 얹혀 있습니까. 공유할 가치가 있는 꿈을 풀어낼 준비는 되셨는지요. 혹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보다 스스로의 모습을 살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 관련 논제와 예시답안은 배남 8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