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고전 읽기

'순진한' 자본주의적 욕망의 '위대한' 패배
『위대한 개츠비』(F. 스콧 피츠제럴드)


김태빈 | 한성여고 교사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 'ou(없다)'와 'topos(장소)'를 합쳐 만든 말로서, '아무 곳에도 없는 나라'라는 뜻이다. 또한 토마스 모어의 동명소설 이후 '이상향'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꿈꿀 수 있을까. 어쩌면 존재하지 않기에 영원히 꿈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러분은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유토피아적 공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 개츠비는 첫사랑을 찾기 하기 위해 시간을 돌이키려 한다. 그러나 그의 낭만적 이상은 사회적 규범과 윤리를 파괴하는 것이기에 잘못 조준된 총과도 같다. 물론 개츠비에 대한 평가는, 1920년대 미국이라는 특수한 정황, 즉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과도하게 침범했던 상황을 고려해야 정당하게 내려질 수 있다. 그의 욕망은 실현될 수 없었기에 더 간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욕망의 대상이 된  자본주의적 허상 - 데이지 페이 - 은 결코 우리가 진지하게 내재화할 만한 가치는 아닌 듯하다. 그래서 개츠비의 욕망 충족 실패는, 어떤 의미에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20세기 가장 성숙한 인간, 체 게바라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라고 말한 바 있고, 제3세계의 식민지 투쟁을 이끌었던 제국의 신사 에드워드 로렌스는 '한낮에도 꿈을 꾸는 자들은 위험한 자들이다. 그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 꿈을 실현시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라고 적은 적이 있다. 현실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거부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것은 성숙한 인류의 오랜 꿈이자 의무였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는 실패의 비극적 정조를 띠는 낭만적 동경에 머물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사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억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총체성이 실현된 그 어떤 것이었다.  


여는 마당

아래 그림은 가장 미국적인 화가라고 알려진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입니다. 그림과 함께 제시된 글을 통해 『위대한 개츠비』가 창작된 시대적 상황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는 사람들>

대도시에서는 밤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활동하지만, 그래서 야심한 카페도 불을 밝힌 채 찻잔을 기울이는 남녀를 맞고 있지만, 아무도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심지어 나란히 앉은,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사이에서도 아무런 정서적 교감이 없다. 모두 자기의 고독만 씹고 있다. 쓸쓸하다 못해 씁쓸한 분위기다.
- 이주헌, 『미술로 보는 20세기』, 학고재


에드워드 호퍼, <뉴욕의 방>


남자는 신문을 읽는다/여자는 피아노를 친다

남자는 두 손을 바쳐 신문을 보지만/여자는 손가락 하나로 건반을 튕기며
그를, 그의 세계를 훔쳐본다/(한순간이라도 그가 온전히 나의 것인 적이 있던가?)

그들 사이에 커다란 문이 있다/그 문으로 연인들이 드나들고
생명이 태어나/아이가 울고 어린들을 웃고
한때 그들도 행복했겠지만/행복을 연출했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의 벽이/입을 벌려 그들을 가로 막는다
<후략>
- 최영미, 「서울의 방」

지도 방안
한 문학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호퍼의 그림은 매우 미국적이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은 피츠제럴드의 소설에 나오는 주변 인물들 같고, 그의 그림에 나오는 도시 풍경은 피츠제럴드 소설의 무대 같다. 좀 에로틱하고 좀 퇴폐적이고 좀 고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면적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재즈시대'라고 불리는 1920년대 미국 뉴욕 인근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인데, 학생들에게 낯선 이 시대에 대한 이해가 소설 이해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번영 속에서 소비와 유행이 활성화되었으나 상대적으로 정신적 빈곤에 빠져 있던 이 시대를 가장 미국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썼던 이가 바로 에드워드 호퍼와 스콧 피츠제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과 함께 제시된 글을 참고하여 소설의 시대적 정황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십시오.

활동 사례
  호퍼의 그림은 명료하면서도 흐릿한 느낌을 동시에 주는 것 같아. 구체적인 사물들은 무척 선명하게 표현되었는데 반해 인물들의 표정은 흐릿하게 그려졌어.
  나도 같은 생각인데, 화가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현대인들의 고독, 쓸쓸함, 소외 등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위의 두 작품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도 상대방과 소통하려는 태도나 노력을 보이고 있지 않잖아.

펴는 마당

1.『위대한 개츠비』는 곳곳에서 등장인물의 회상이나 대화를 통해 과거의 사건들이 역순행적으로 배치됩니다. 이 작품의 주요 사건들을 개츠비와 데이지를 중심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해 봅시다.




2.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 개츠비는 다양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개츠비에 대한 이해는 곧 작품에 대한 이해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개츠비에 대해 정리해 봅시다.

지도 방안
소설의 핵심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물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가 소설의 사건이 되고, 곧 그것은 갈등으로 얽힙니다. 그래서 소설 인물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는 소설과 마찬가지로『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주인공 개츠비의 비중은 크지만, 다른 소설과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개츠비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거의 평면적-전형적 인물이라고 할 만큼 단순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개츠비는 아주 다양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학생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개츠비에 대해 정리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십시오.




3.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뛰어난 문학적 보고서인 『위대한 개츠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0년대, 그리고 뉴욕이라는 소설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아래 글을 참고로 해 이 작품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 대해 정리해 봅시다.

지도 방안
학생들이 서양고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현실과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과의 괴리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위대한 개츠비』처럼 한국인에게 널리 읽히지 않은 작품일 경우에 이 괴리감은 독서를 방해하는 당혹감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아래 제시한 글을 통해 이 작품이 창작되었던 시기의 특징을 이해하고, 이 작품의 주된 배경이 되고 있는 뉴욕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십시오.

피츠제럴드가 문학을 통해서 수행했던 바 미국의 꿈에 대한 점검작업은 사실 그가 활동했던 시대의 요청이기도 했다. 남북전쟁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을 겪고 있던 미국은 1차대전의 특수(特需)로 물질적으로는 경제적인 호황을 맞게 되지만, 반면 전쟁의 경험을 통해 전통적 가치와 도덕률들에 대한 믿음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재즈시대'(Jazz Age) '떠들썩한 20년대'(Roaring Twenties) '길 잃은 세대'(Lost Generation) 등 1920년대를 지칭하는 여러 표현들에서 엿보이는 듯이 이 시대는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향락주의와 허무주의, 그리고 물질만능주의가 뒤섞여 혼돈스럽던 시대였다. 특히 산업의 발달로 거부(巨富)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가난한 이들의 박탈감은 극대화되었고,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미국의 꿈'에 대한 총체적 점검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성공의 꿈을 이룬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그러한 성공이 보장해주리라 여겼던 이상적이고 행복한 삶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꿈의 좌절을 절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중략>
피츠제럴드는 이러한 이미지들로 묘사되는 뉴욕이라는 지리적 배경을 옛날 신세계에 도착하는 선원들에게 가장 먼저 보였던 신대륙의 모습, "신선하고 푸른 가슴"으로서의 뉴욕과 병치시킴으로써 현대인의 불모성이라는 모더니즘적인 관심을 미국의 꿈이라는 주제로 통합한다. 즉, 뉴욕은 미국의 꿈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이며, 푸르렀던 미국의 꿈은 곧 잿빛의 미국의 악몽으로 변해버렸음을, 혹은 이미 그 꿈속에 악몽을 감추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 영미문학연구회, 『영미문학의 길잡이2』

1920년대
미국인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적인 이상사회 - 무계급사회와 경제적 번영의 재현, 압제가 없는 자유로운 정치 체제 - 를 이룩하려는 꿈'이다. 이러한 꿈은 1920년대 미국의 엄청난 경제적 성장을 통해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는 결코 그것을 얻은 이들의 삶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위대한 개츠비』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가난한 이들의 삶이 거의 그려져 있지 않아 논외로 하더라도, 엄청난 부는 곧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졌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개츠비, 톰, 데이지, 조던, 그 누구도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은 재화를 낭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톰은 부부관계를 부정하는 외도를 하고, 조던 또한 공공연하게 데이지의 외도를 부추긴다. 그들의 사귐은 결코 인간적인 신뢰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물질적 풍요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의 천박함은 분명 등장인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다.

뉴욕
개척 초기 아메리카 이민자들은 동부에 정착을 하고 꿈을 찾아 서부로 향했다. 그러나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되는 시기에 '아메리칸 드림'이 실현되는 공간은 다시 동부로 이동한다. 그 중에서도 뉴욕은 세계금융의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자본주의의 메카로 성장하게 된다. 대공황을 겪기 전까지의 뉴욕은 미국의 경제적 풍요의 상징이었다. 이곳만큼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도 드물다. 그곳은 물질적 부를 기반으로, 자본주의의 연료인 인간의 탐욕적 욕망을 자극하는 곳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곳만큼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으로 적절한 곳을 달리 찾을 수 없을 정도다. 돈을 매개로 한 인간관계, 인간의 끊임없는 일탈적 욕망, 그 소용돌이가 뉴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댓거리마당

4.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의 죽음을 '아메리칸 드림'의 좌절 및 변질로 이해하는데 대부분의 평론가가 동의한다고 합니다. 물질적 욕망에 의한 정신적 이상주의의 타락으로 인한 삶의 지표 상실은 그 반대의 경우 - 과도한 정신적 가치관에 따른 현실적 삶의 피폐 - 에 따른 방향 상실과도 만납니다. 개츠비의 몰락과 철호의 몰락 중 어떤 것이 더 나은 선택일까요? 친구들과 토론해 봅시다.

철호는 고개를 푹 떨구어 턱을 가슴에 묻었다. 영호는 새로 피워 문 담배를 연거푸 서너 번 들이빨았다. 그리고 또 말을 계속하였다.
"저도 형님의 그 생활 태도를 잘 알아요. 가난하더라도 깨끗이 살자는. 그렇지요, 깨끗이 사는 게 좋지요. 그런데 형님 하나 깨끗하기 위하여 치루는 식구들의 희생이 너무 어처구니없이 크고 많단 말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형님 자신만 해도 그렇죠. 밤낮 쑤시는 충치 하나 처치 못하시고 이가 쑤시면 치과에 가서 치료를 하거나 빼어버리거나 해야 할거 아니야요. 그런데 형님은 그것을 참고 있어요. 낯을 잔뜩 찌푸리고 참는단 말입니다. 물론 치료비가 없으니까 그러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 돈을 어떻게든가 구해야죠. 이가 쑤시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그걸 형님처럼, 마치 이 쑤시는 것을 참고 견디는 그것이 돈을-치료비를 버는 것이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 안 쓰는 것을 혹 버는 셈이라고는 할 수 도 있을 거야요. 그렇지만 꼭 써야 할 데 못 쓰는 것이 버는 셈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아요. 세상에는 이런 세 층의 사람들이 있다고 봅니다. 즉 돈을 모으기 위해서만으로 필요 이상의 돈을 버는 사람과, 필요하니까 그 필요하니 만치의 돈을 버는 사람과 또 하나는 이건 꼭 필요한 돈도 채 못 벌고서 그대신 생활을 졸이는 사람들. 신발에다 발들 맞추는 격으로 형님은 아마 그 맨 끝의 층에 속하겠지요. 필요한 돈도 미처 벌지 못하는 사람, 깨끗이 살자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시겠지요. 그래요. 그것은 깨끗하기는 할지 모르죠. 그렇지만 그저 그것 뿐이지요. 언제까지나 충치가 쏘아 부은 볼을 싸쥐고 울상일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야 형님! 인생이 저 골목 안에서 십 환짜리를 받고 코 흘리는 어린애들에게 보여 주는 요지경이라면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 값만치 구멍으로 들여다보고 말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어디 인생이 자기 주머니 속의 돈 액수만치만 살고 그만 두고 싶으면 그만둘 수 있는 요지경인가요 어디. 돈 만치만 말을 수 있는 그런 편리한 목구멍인가요 어디. 싫어도 살아야 하니까 문제지요. 사실이지 자살을 할만치 소중한 인생도 아니고요. 살자니까 돈이 필요하구요. 필요한 돈이니까 구해야죠. 왜 우리라고 좀더 넓은 테두리, 법률선까지 못 나가란 법이 어디 있어요. 아니 남들은 다 벗어던지구 법률선까지도 넘나들면서 사는데, 왜 우리만이 옹색한 양심의 울타리 안에서 숨이 막혀야해요. 법률이란 뭐야요. 우리들이 피차에 약속한 선이 아니야요?"
영호는 얼굴을 번쩍 들며 반쯤 끌러놓았던 넥타이를 마저 끌러서 방 구석에 픽 던졌다.
철호는 여전히 턱을 가슴에 푹 묻은 채 묵묵히 앉아 두 짝 다 엄지발가락이 몽땅 밖으로 나온 뚫어진 양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일론 양말을 한 켤레 사면 반년은 무난히 뚫어지지 않고 견딘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뻔히 알면서도 번번이 백 환짜리 무명양말을 사들고 들어오는 철호였다. 칠 백환이란 돈을 단번에 잘라낼 여유가 도저히 없는 월급이었던 것이다.
"가자!"
어머니는 또 몸을 뒤채었다.
"그건 억설이야."
철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신문지를 바른 맞은편 벽에, 쭈그리고 앉은 아내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비쳐 있었다. 꼽추처럼 꼬부리고 앉은 아내의 그림자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괴물스러웠다. 철호는 눈을 감았다. 머리마저 등 뒤 칸막이 반자에 기대었다.
철호의 감은 눈앞에 십여 년 전 아내가 흰 저고리 까만 치마를 입고 선히 나타났다. 무대의 나선 그녀는 더욱 예뻤다. E 여자대학 졸업음악회였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날 저녁 같이 거리를 거닐던 그녀는 정말 싱싱하고 예뻤었다. 그러나 지금 철호 앞에 쭈그리고 앉은 아내는 그때의 그녀가 아니었다. 무슨 둔한 동물처럼 되어버린 그녀. 이제 아무런 희망도 가져보려고 하지 않는 아내. 철호는 가만히 눈을 떴다. 그래도 아내의 속눈썹만은 전처럼 까맣고 길었다.
"가자!"
철호는 흠칠 놀라 환상에서 깨어났다.
"억설이요? 그런지도 모르죠."
한참이나 잠잠하니 앉아 까물거리는 등잔불을 바라보던 영호의 맥빠진 대답이었다.
"네 말대로 한다면 돈 있는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이란 말밖에 더 되나 어디."
"아니죠. 제가 어디 나쁘고 좋고를 가렸어요. 나쁘긴 누가 나빠요? 왜 나빠요. 아, 잘 사는 게 나빠요? 도시 나쁘고 좋고부터 따질 아무런 금도 없지요 뭐."
"그렇지만 지금 네 말로는 잘 살자면 꼭 양심이고 윤리고 뭐고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뭐야."
"천만에요. 잘못 이해하신 겁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다는 것입니다. 즉, 양심껏 살아가면서 잘 살 수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적다. 거기에 비겨서 그 시시한 것들을 벗어던지기만 하면 누구나 틀림없이 잘 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억설이란 말이다.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비틀려서 하는 억지란 말이다."
"글쎄요. 마음이 비틀렸다고요. 그건 아마 사실일는지 모르겠어요. 분명히 비틀렸어요. 그런데 그 비틀리기가 너무 늦었어요. 어머니가 저렇게 미치기 전에 비틀렸어야 했지요. 한강 철교를 폭파하기 전에 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 명숙이가 양공주가 되기 전에 비틀렸어야 했지요. 환도령이 내리기 전에 하다 못해 동대문 시장에 자리라도 한자리 비었을 때 말입니다. 그러구 이놈의 배때기에 지금도 무슨 내장이기나 한 것처럼 박혀 있는 파편이 터지기 전에 말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더 전에, 제가 뭐 무슨 애국자나처럼 남들이 다 기피하는 군대에 어머니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자원하던 그 전에 말입니다."
"……."
"……그 보다도 더 전에 썩 전에 비틀렸어야 했을지 모르죠. 나면서부터 비틀렸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죠."
영호는 푹 고개를 떨구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후르르 떨고 있었다. 철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윗목에 앉아 있던 철호의 아내가 방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손끝으로 장난처럼 문지르고 있었다. 영호도 훌쩍훌쩍 코를 들이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야. 너는 아직 사람이란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조차도 모르고 있어."
"그래요. 사람이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는 정말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이제 이 물고 뜯고 하는 마당에서 살자면, 생명만이라도 유지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는지는 알 것 같애요. 허허."
영호는 눈물이 글썽하니 고인 눈을 천장을 향해 쳐들며 자기 자신을 비웃듯이 허허 하고 웃었다.
"가자!"
또 어머니는 가자고 했다. 영호는 아랫목으로 눈을 돌렸다. 철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등잔불이 크게 흔들거렸다. 방안의 모든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집 전체가 그대로 기울거리는 것 같았다. 그것 뿐 조용했다. 밤이 꽤 깊은 모양이었다. 세상이 온통 잠들고 있었다.
- 이범선,「오발탄」
                                            
쓰는마당

아래 글에서 '교양1)'과 '교양2)'는 동일한 단어이면서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의 유한계층의 삶을 '교양1'이라고 규정할 때, 이를 '교양2'의 개념으로 비판하고 자신의 생각을 논술해 봅시다.

<가>
우리들에게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로 알려져 있으나 과시적 여가의 개념도 이에 못지 않게 현대 소비생활과 관련하여 더 많은 적절성을 보여 준다.
유한계층은 어떻게든 타인과의 경쟁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차별화하고 구별짓고자 한다. 과시적 소비는 돈만 많으면 누구나 비싼 옷을 사 입고 뽐낼 수 있는 사회적 행위이다. 하지만 시간을 비생산적인 일에 사용하는 여가활동은 많은 노력과 훈련을 요구한다.
과시적 여가는 오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유한계층의 차별화 전략이며 구별 짓기(distinction)이다. 영어와 프랑스어로 distinction은 구별과 차별이라는 뜻과 더불어 귀족이나 유명인사처럼 품위 있다는 의미도 복합되어 있다. 고상한 품격을 통한 차별화 시도는 생산적 노동에 모든 시간을 빼앗기는 하류계층으로선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예절이 사람을 만든다. 예의범절에 벗어난 사람의 행동거지는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행위자는 근본이 비천한 것으로 간주된다. 예의범절과 교양 1), 세련된 화법, 단정한 태도는 고상한 품격을 높이지만 훌륭한 예절을 갖추기에는 많은 시간과 열성은 물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노동에 뺏기는 사람들이 예절을 습득하기는 어렵다. 매너 없는 행동은 생산적 노동에 시간을 빼앗기고 돈도 없는 비천한 하류계층임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결국 매너와 예법은 유한계급의 생활 태도로 관습화되며 상징으로 굳어진다.
- 원용찬, 『유한계급론』

<나>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올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힘, 즉 교양2)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르게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싶습니다. 첫째,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곧 생각의 철저한 주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외부적인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찾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유의 주체성을 위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마음의 소질은 용기입니다. 칸트가 자주 했던 말인데, '사유의 주체성 혹은 계몽을 위해 중요한 요소가 용기'라고 말한 것을 저는 칸트의 중요한 공헌으로 봅니다. 스스로 생각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돌이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 곧 사유의 주체성만 있을 때는 잘못하면 사유의 독단성·임의성으로 전락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돌이켜 생각함, 반성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일관성에 대한 요구이면서 실질적으로는 현실정합성에 대한 요구이기도 한데요. 우리가 가진 앎 또는 지식이 편협한 독단성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돌이켜 보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넘어가서 사유가 현실과 만난다는 것은, 사실은 타인과 만난다는 겁니다. 삶의 현실은 만남의 총체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 돌이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제나 남들과 더불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교양을 더불어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의 능력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른바 대화와 소통의 능력이야말로 교양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죠. 그걸 위해 요구되는 주관적 태도·덕목은 겸손입니다.
- 서경식, 김상봉, 『만남』  
  
학생글
[A] 교양의 사전적 의미는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 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교양이 있다'는 말에서의 교양의 의미와 같다. 또한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여 얻을 수 있다는 여가 개념의 교양1의 의미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 경우, 교양은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고, 삶의 여유가 있는 상류층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국한된다. 이러한 의미의 교양은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 스스로가 만족하고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보여주기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교양1은 특정 계급만이 시간과 노력을 통해 향유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만, 사실 타인과 더불어 살려고 하는 것이 더욱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자신이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나를 위한 투자만을 하면 되지만, 다른 사람과 발맞춰 나가야 하는 것은 나와 그 이상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으로 인해 누릴 수 없는 것으로 손해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삶의 시간과 노력 대부분을 노동을 하면서 보내야 하는 사람들은 상류층이 몸에 배기를 원하는 예의와 세련된 화법을 갖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을 하는 가운데서 스스로 우리 사회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고 부당한 것에 대해 저항하고 옳은 일에 대해서는 지지를 하는 등의 더 소중한 것을 배울 수 있다.
나는 교양2에서 정의하는 올바르게 생각하는 힘이야말로 누구나 가져야 하고 누구나 누릴 자격이 있는 참된 의미의 교양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코드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소외'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렇기에 그 속에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갖추어야 할 교양일 것이다. 철학에서는 '존재'와 '실존'을 구별하는데 존재는 그냥 있는 상태고, 실존은 어떤 것이 자기규정에 맞게 참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생물학적 종으로 있는 '존재'가 아닌 인간이 인간답게 '실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돌이켜 반성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 또한 받아들일 줄 아는 교양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B] 교양1은 '더불어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의 능력'인 교양2의 개념에 있어서 '교양 없음'이다. 책 『21세기를 바꾸는 교양』의 머리말은 이 '교양 없음'을 '불량 깡패처럼 세계를 휘젓는 부시를 포함해 이 땅에서 부당한 세도를 부리는 자들의 천박한 세계관의 총칭'이라 정의했다.
크고 힘이 센 나라는 군대와 무기만으로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생각과 생활방식을 따라야만 문화인이고 교양인인 것처럼 암암리에 유포시킨다. 미국이 '한미FTA'를 통해 자신들의 제도와 생활방식을 한국에 강요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큰 나라들이 다른 나라에 자신들의 생활방식과 문화, 제도를 유포시키려는 행동은 사람이 멀쩡한 바위에 '개똥이 왔다감'이라고 새겨놓은 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것이 교양인가? 아니다. '교양 없음'이다. 이런 '교양 없음'이 유한계급에게 있어 폼 나는 일일지는 모르나 권력과 자본에 의해 손발이 꽁꽁 묶여 있는 그들에 의해 휘둘러진 '교양 없음'은 엉뚱한 희생자를 낳는다. 정말 '자신들만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의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무대뽀'가 또 있을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교양 없음'을 '교양'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유한계급의 무식한 용감함에 맞설 유식한 용감함이 필요하다. 유식한 용감함만이 '교양 없음'이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기생하는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교양은 '교양 없음'과는 달리 특정 계급의 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가져야 하는 '올바로 생각하는 힘'이다.

첨삭

학생글 [A]와 [B]는 모두 이 논제의 요구 중 '<가>의 유한계층의 삶을 '교양1'이라고 규정할 때, 이를 '교양2'의 개념으로 비판'하라는 요구에 불성실하게 답했다. 논술문으로서는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바탕으로 이 논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교양1과 교양2 중에서 어떤 것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지는 너무 뻔하다. 논제를 잘 읽어보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핵심은 <나>에서 규정한 교양의 세 가지 특징으로 교양1을 비판하는 것이다. 교양2는 '생각의 철저한 주체성', '반성의 능력', '대화와 소통의 능력'을 교양의 중요한 특징으로 들고 있다.
교양1은 유한계층의 과시적 여가에 필요한 조건으로 '많은 노력과 훈련을 요구'하는 '유한계층의 차별화 전략'이다. 그것은 특정 계급에 속한 사람들만이 취득할 수 있고 그 계급집단에서만 통용되는 일종의 규범이다. 그렇기에 '생각의 주체성'과는 거리가 멀다. 유한계층에게 필요한 교양은 주체적 사고가 아니라 남들이 떠받들어주고 부러워하는 외적 형식일 뿐이다. 이 점을 글 [A]와 [B]는 잘 지적하고 있다.
교양2의 두 번째 특징은 '반성의 능력'이다. 이는 자신의 생각이 독단적이지 않은지, 현실에 얼마나 적절한지를 스스로 묻는 능력이다. 이러한 반성의 능력은 교양1에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교양1이 물질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 배타적 계급에만 통용되는 것이기에 그것 자체로 독단적이고 전체 현실에도 적용될 수 없다. 이에 대한 언급이 [A]와 [B]에는 다소 미진하다.
세 번째 교양2의 특징인 '대화와 소통의 능력'이야말로 교양1과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과의 대화와 소통을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양1을 갖춘 유한계급이 그것을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 겸손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여성과 노예, 어린아이를 배제했던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계몽주의의 인권은 그 시대적 의미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의미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닌 것처럼, 교양1을 갖춘 유한계급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소중한 가치는 아닌 것이다. [A]와 [B]에는 아쉽게도 이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교양은 '있는 체'하는 것이 아니다. 교양은 사람의 행동과 말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것은 어색한 허례허식도 아니고 과시적인 삶의 방식도 아니다. 교양은 '올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힘'이다. 이때의 올바름은 다수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도 고아한 삶을 잃지 않았던 백석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백석 전집』과 잊혀진 독립투사, 김산의 삶을 기록한 『아리랑』,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사셨던 수많은 분들의 평전(특히 『장준하, 민족주의자 길』을 권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원하는 학생들은 다소 어렵더라도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와 강상구 선생이 쓴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을 읽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