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김혜진 | 해오름 대학논강 연구모임·누리하제 전임강사

연세대학교 인문·사회계열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느낌과 생각을 과연 이해할 수 있는가? 아래 제시문들을 비교 분석하여 어떤 어려움들이 있는지 설명하고, 그러한 어려움이 극복될 수 있는지 사회현실의 예를 들어 논하시오.

(가) 장자가 혜자와 함께 호수(濠水)의 징검돌 근처에서 노닐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소. 이게 물고기의 즐거움이오.” 혜자가 말했다. “당신이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오?” 장자가 말했다. “당신은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오?” 혜자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물론 당신을 알지 못하오. 당신은 물고기가 아니니까 물고기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말이오.” 장자가 말했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오?’라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서 그렇게 물은 것이오. 나도 호수(濠水)가에서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오.”
- 『장자(莊子)』, 추수(秋水)편

(나) 우리는 박쥐들이 주로 음파 반향 탐지를 통해, 즉 미묘하게 변조시킨 초음파를 보내서 대상으로부터 반사되어 오는 것을 탐지함으로써 외부세계를 지각한다고 알고 있다. 박쥐의 두뇌는 송출된 파동을 그 반향과 상관시키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가지고 박쥐는 거리, 크기, 모양, 운동, 표면 조직들을 우리가 시각을 가지고 하는 것에 비견될 만큼 정밀하게 분간해낼 수 있다. 그러나 박쥐의 음파 반향 탐지는 분명히 지각의 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감각과도 비슷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들 인간이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과도 주관적 느낌의 측면에서 유사하리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바로 이러한 점이 박쥐의 입장에서 느낀다는 것이 어떠한지를 알기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중략)
우리 상상의 기본적 재료는 우리 자신의 경험이기에 이러한 상상은 제한되어 있다. 내 팔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저녁과 새벽에 날아다니며 입으로는 벌레를 잡아먹고, 시력은 형편없이 나쁘지만 초음파 신호를 통해 주위 환경을 지각하고, 또 낮에는 다락방에 거꾸로 매달려 지낸다고 상상한들 그것은 박쥐의 느낌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이런 상상을 한다면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상상인데), 이는 단지 내가 한 마리의 박쥐처럼 행동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려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내가 알고 싶은 바는 박쥐가 박쥐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 어떠할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정신적 자원들은 제한되어 있고 그 자원들만으로는 이러한 상상을 하기 어렵다. 나는 현재의 내 경험에 무엇을 더 보태거나 빼면서 상상하거나 또는 더하고 빼고 고치기를 여러 번 반복해 보아도 박쥐의 느낌을 알 수 없다.
- 토마스 네이글, 「박쥐의 입장에서 느낀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다) 점순네 수탉(은 대강이가 크고 똑 오소리같이 실팍하게 생긴 놈)이 덩저리 적은 우리 수탉을 함부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푸드득, 하고 면두를 쪼고 물러섰다가 좀 사이를 두고 또 푸드득, 하고 모가지를 쪼았다, 이렇게 멋을 부려가며 여지없이 닦아놓는다. (중략)
이번에도 점순이가 쌈을 붙여 놨을 것이다. 바짝바짝 내 기를 올리느라고 그랬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고놈의 계집애가 요새로 들어서서 왜 나를 못 먹겠다고 고렇게 아르릉거리는지 모른다.
나흘 전 감자 쪼간만 하더라도 나는 저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다.
계집애가 나물을 캐러 가면 갔지 남 울타리 엮는데 쌩이질을 하는 것은 다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가지고 등 뒤로 살며시 와서,
“얘! 너 혼자만 일하니?”
하고 긴치 않은 수작을 하는 것이다. (중략)
잔소리를 두루 늘어놓다가 남이 들을까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그 속에서 깔깔대인다. 별로 우스울 것도 없는데 날씨가 풀리더니 이놈의 계집애가 미쳤나 하고 의심하였다. 게다가 조금 뒤에는 즈 집께를 할금할금 돌아다보더니 행주치마의 속으로 꼈던 바른손을 뽑아서 나의 턱밑으로 불쑥 내미는 것이다. 언제 구웠는지 아직도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굵은 감자 세 개가 손에 뿌듯이 쥐였다.
“느 집인 이거 없지.”
하고 생색 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은 큰일 날 테니 여기서 얼른 먹어버리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봄 감자가 맛있단다.”
“난 감자 안 먹는다, 니나 먹어라.”
나는 고개도 돌리려지 않고 일하던 손으로 그 감자를 도로 어깨 너머로 쑥 밀어버렸다.
그랬더니 그래도 가는 기색이 없고 뿐만 아니라 쌔근쌔근 하고 심상치 않게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그때에야 비로소 돌아다보니 나는 참으로 놀랬다. 우리가 이 동리에 들어온 것은 근 삼 년째 되어 오지만 여지껏 가무잡잡한 점순이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법이 없었다. 게다 눈에 독을 올리고 한참 나를 요렇게 쏘아보더니 나중에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바구니를 다시 집어 들더니 이를 꼭 악물고는 엎더질 듯 자빠질 듯 논둑으로 힝하게 달아나는 것이다.
- 김유정, 「동백꽃」

(라) 우리는 보통 다른 존재의 행동(언어적 행동까지 포함해서)을 관찰함으로써, 그 존재가 의식을 가지고 있고 생각을 하는 존재라는--즉 또 다른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판정을 내린다. 우리는 신체의 상해와 신음 소리에서 고통을 추론하고, 미소와 웃음에서 기쁨을 추론하며, 날아오는 눈덩이를 피하는 행동에서 지각이 있음을 추론한다. 그리고 환경을 복합적이고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을 보고 욕구와 의도와 믿음이 있음을 추론한다. 또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행동들과 언어 발화로부터 그 존재의 의식적 지능을 추론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추론들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면,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특정한 유형의 행동으로부터 특정한 유형의 심리 상태를 추론한다는 것은, A라는 유형의 행동과 B라는 유형의 심리 상태 사이에 일반적인 연결 관계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런 심리/행동의 일반화는 “천둥 소리가 들린다면, 근처 어딘가에서 번개가 친 것이다”와 같은 경험적 일반화와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그런 일반화는 현상들 사이의 규칙적 연결 관계에 대한 과거 경험을 통해 정당화될 것이다. (중략)
그러나 심리/행동을 일반화하는 경우,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연결 관계의 한쪽, 즉 행동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그 일반화가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만약 어떤 존재가 일정한 심리 상태에 있다고 한다면, 그 존재의 심리 상태는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직접적으로 관찰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심리 상태를 관찰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화에 필요한 경험적 증거를 모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심리/행동의 일반화를 믿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다른 존재의 행동을 보고 그가 어떤 심리 상태에 있다고 추론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을 제외한 어떠한 다른 존재에 대해서도 그 존재가 어떤 심리 상태에 있다는 믿음을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 폴 처칠랜드, 『물질과 의식』

◑논제의 취지
연세대학교에서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느낌과 생각을 과연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였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이미지, 웃음, 세월의 흘러감, 불안의 항존성과 생산성 등 우리 주변에서 항상 접하는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성찰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왔고, 이번 논제도 그러한 질문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연세대학교는 문제 설명에서 "복잡해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 사회의 외연이 확대되어가면서 우리가 예전에 '우리들' 속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타자들을 '우리들'의 울타리 안에 넣어 상호 작용해야 할 상황들이 빈번해지면서 우리는 그들을 다른 주체들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들을 주체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만,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그러한 이해의 과업이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예전부터 '우리들' 속에 포함시켰던 친밀하고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도 이야기한다.
이 논제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을 성찰하여 현대사회의 이런 상황에 주체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제시문 독해
제시문들은 타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여러 가지 각도와 층위에서 보여준다.
(가)는 『장자』의 '추수편'에 나오는 글이다. 이 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을 읽어낼 수 있다. 장자는 이 글을 통해서 '관계에 있어서의 한계'를 말한다. '나와 너'라는 존재의 분리로부터 생기는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혜자는 '당신이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요?'라고 말한다. 혜자는 개념과 감각이 다른 주체들 사이에서 온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장자는 '호수가에서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요'라고 말한다. 유한한 우리의 인식으로 무한한 것을 보려하면 당연히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지만, 장자는 직관의 대상이 되는 사물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한계를 느끼지 않는 그런 앎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이미 대상과 나를 분리시키는 그런 인식의 한계에 가두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박쥐의 입장에서 느낀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에 나온 글이다. 이 글에서는 인식이라는 것은 경험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동일한 경험을 전혀 공유하지 못할 때 그 경험을 가진 사람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다)는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으로 그 사람의 내면 심리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는 『동백꽃』의 한 부분이다. 점순이는 화자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못한 화자에게 화가 나서 심통을 부린다. 그런데 화자는 점순이의 내면이 아니라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 때문에 당황해하고, 더욱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라)는 특정한 존재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결국 논리적 추론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 추론을 정당화할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묻고 있다. 이 제시문은 『물질과 의식』의 한 부분으로서, 인식이 결국 추론에 근거한 것이라면 일반적 추론의 정당성을 검증할 수 없듯이 타인에 대한 이해도 정당하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논제 해제
논제에서 요구하는 것은 결국 '다른 존재의 느낌과 생각을 과연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기 견해를 쓰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몇 가지 구체적인 요구에 답해야 하는데, 첫째로 제시문들을 비교 분석하여 다른 존재의 느낌과 생각을 이해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며, 둘째로 그러한 어려움이 극복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극복이 가능하다면 다른 존재의 느낌과 생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고 답해도 좋을 것이며, 극복 불가능하다면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제시문에서 주장하는 다른 존재의 느낌과 생각을 이해하는 데 드는 어려움은 크게 인식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시문 (나)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경험의 공유가 없는 것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주노동자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한들, 우리가 그런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다면 이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일한 경험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합리적인 이유 없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편견 혹은 사회적 필요에 의해 제도화된 차별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바로 자신의 그런 경험에 비추어서 그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약자'의 설움은 '약자'만이 안다고 하는 말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래서 장애인이나 이주노동자들이 서로의 고통을 이해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두 번째 어려움은 인식 도구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대상을 인식할 때 그의 겉모습, 신체구조, 얼굴표정, 말과 행동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겉모습이나 행동과는 다른 심리를 가질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관찰로서 과연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정치적 언어, 광고들 속에서 우리는 인식의 혼란을 일으키고, 그래서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게다가 우리가 인식하는 도구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경험에 의해 이미 가공된 방식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러한 삶은 바로 '못사는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경제적인 수치들과 삶의 가치를 등치시킬 때, 겉모습 너머에 있는 그들의 행복과 만족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이 단선적이라고 할 때에는 당연히 이런 한계에 봉착하지만, 인간은 타인의 느낌과 생각을 이해하고자 할 때 단지 파편적인 관찰만이 아니라, 행위의 맥락을 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파편적 인식이 바로 타인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는 요소이지만, 맥락적 이해를 할 수 있을 때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세 번째 어려움이 등장한다. 그것은 인식 방법에서의 한계이다. 우리가 아무리 타인을 오래 관찰하면서 맥락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더라도 그러한 추론 방식 자체가 올바르다고 주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즉 내가 그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더라도 세밀하고 미묘한 감정과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나의 이해로 만들기 어렵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사례는 종종 발견된다. 오랜 관찰을 통해 맥락적으로 이해된 현상이라 하더라도 섬세한 고려 없이 '단정'지어 지는 순간, 그 이해는 거꾸로 이해를 방해하는 경우이다. 일본의 태도를 고찰하여 군국주의화라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나 독도 문제 등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이해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 이면에 있는 일본인들의 피해의식이나 사고의 체계를 우리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이상 '군국주의화'라는 단정은 일본을 '악'으로 단순 규정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당신은 이렇다'는 단정이 아니라, 끝없이 가설을 두고 그 속에서 계속 수정해 가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내가 관찰하는 기준을 의심하고, 내 인식의 전제들을 부정하는 힘도 갖고 있다. 경제적인 수치들로 삶의 가치들을 매기다가도 "과연 무엇을 행복이라고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도달할 수도 있고, 그럼으로써 동남아시아 사람들의 삶을 그 자체로 인정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왔고, 비록 불완전한 이해이지만 그런 노력들이 지속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는 과정인 것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지 아닌지는 학생들이 답을 내려야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가능하다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또는 그런 노력이 왜 계속 추구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데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타인의 느낌과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경험의 공유와 존재의 동질성의 확보, 그리고 경험에 의해 축적된 사람들의 행위 패턴에 대한 일반화에서 비롯된다고 믿을 때 성립하는 주장이다. 나의 인식에서 타인을 대상화하면서 관찰하고, 경험을 더듬어 추론하는 과정으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이 전제가 과연 타당할 것인가? 이것은 혜자처럼 존재들을 '물고기'와 '물고기가 아닌 것'으로 구분하여 서로 간의 관계에 만리장성을 쌓는 태도가 아닐까?
애초부터 우리가 '물고기' 혹은 '물고기가 아닌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 혹은 '장애인'으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여성' 혹은 '남성'으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그래서 분리된 존재들인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가 하나이거나 그런 분리를 넘어서는 '존재'로써 만났을 때 이해라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아마도 장자가 원하는 '존재에 대한 이해'는 바로 그러한 것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