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속으로(2)
『굶주리는 세계 : 식량에 관한 열 두 가지 신화』(프랜시스 라페 외)

김태빈 | 서울 한성여고 교사

"식사하셨습니까?"
많지 않은 나이인 내 어릴 적 인사가 이랬다. "식사하셨습니까?" 개발독재로 보릿고개를 넘었다며 환호했던 80년대 초반에도 그렇게 '밥'은 여전히 중요한 인간의 일이었다. 배 곪의 기억이 얼마나 진저리쳐졌으면 밥 먹는 일이 정신의 지문처럼 각인되어 매일 세 번씩 인사로 나누어졌을까. 나는 배고픔을 몸으로는 잘 모른다. 다만 『굶주리는 세계 : 식량에 관한 열 두 가지 신화』를 통해 머리로 이해할 뿐이다. 삶의 궁극적 목표를 다소 거창하게 인식지평의 확대라고 가정하고 여러분과 함께 배 곪의 고통과 분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Ⅰ. 『굶주리는 세계 : 식량에 관한 열 두 가지 신화』(프랜시스 라페 외 / 창비)

굶주림은 고통, 슬픔, 굴욕, 그리고 공포라는 네 가지 차원을 갖는다. 굶주림은 일차적으로 몸의 고통이며 사랑하는 가족의 고통을 지켜봐야 하는 정신적 슬픔을 의미한다. 그리고 굶주림은 굴욕적인 삶을 강요하며 굶주림의 구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거대자본이나 독재체제의 위협을 받기도 한다. 그것은 공포이다. 굶주림의 네 가지 차원은 결과적으로 무력한 상태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굶주림은 왜 생겨나는가? 이 책의 저자들은 간명하고도 단호하게 말한다. '굶주림의 근본 원인은 식량과 토지의 부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에 있다.'
약 8억 명의 사람들이 만성적인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매일 3만 4천명의 어린아이들이 오직 먹지 못해 죽어가는 이 어이없는 현실의 근본적인 원인이 민주주의의 부족이라니. 80년대 말 소련의 몰락으로 민주주의는 승리하지 않았던가. 저자들은 우리들에게 굶주림의 진짜 원인에 대해 말해 주기 전에 *굶주림에 관한 신화를 들려준다. 이 책은 바로 그 신화를 깨뜨리는 과정이다.
서구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세계의 계몽에 있었다. 계몽은 곧 세계의 '탈 신화화'를 의미했다. 신과 마법의 세계에서 인간과 이성의 세계로의 변화, 그것이 곧 근대화였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들은 우리들이 식량에 대해서 신화에 휩싸여 있다고 한다. 그 신화가 우리에게 당연하게 읽힌다면 적어도 식량에 대해서만은 우리는 전근대 사회에 살고 있는 셈이다. 50여 쪽이 넘는 참고문헌이 대변하는 저자들의 학문적 정직과 열정, 그리고 변화를 위한 그들의 담대한 실천의 결정체인 이 책을 통해 자본이라는 마술로 수 억 명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억압하는 마법의 세계에서 벗어나 보자.

* 『굶주리는 세계』에서 제시하는 열 두 가지 신화는 다음과 같다. 1) 식량이 충분치 않다. 2) 자연 탓이다. 3) 인구가 너무 많다. 4) 식량이냐 환경이냐. 5) 녹색혁명이 해결책이다. 6) 정의냐 생산이냐. 7) 자유시장이 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 8) 자유무역이 해답이다. 9) 너무 굶주려서 저항할 힘도 없다. 10) 미국의 원조가 굶주림 해결에 도움이 된다.
11) 그들이 굶주리면 우리가 이득을 본다. 12) 식량이냐 자유냐. 이 글에서는 이 열 두 가지 신화를 두 개씩 묶어 여섯 개로 정리했다.

1. 식량은 충분치 않고 인구는 너무 많다.
식량에 관해 가장 광범위하게 퍼진 신화 중 하나가 식량은 부족하고 인구는 너무 많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오늘날 전 세계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에 3500칼로리를 공급할 수 있을 만큼 곡물을 생산한다. 이는 모든 사람을 비만하게 만들고도 남을 정도이다.' 오늘날 식량은 부족하기는커녕 남아돈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물론 이러한 반론이 가능할지 모른다.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특히 아프리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식량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가. 그런데 아쉽게도, 아니 다행히도 이 반문 역시 진실이 아니다. 제 3세계는 식량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식량이 풍부한데도 굶주림이 존재할 뿐이다. 이유는 그 나라들이 자국민을 먹일 식량보다는 수출용 작물을 재배하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에서 영양실조에 걸린 5세 이하 어린이들 중 78%가 식량이 남아도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미국고등과학진흥회(AAAS)의 1997년 연구를 접하고 나면 우리는 아연실색할 뿐이다.
분명 식량이 부족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제 3세계 국가 사람들은 왜 굶주리는 것일까. 아프리카를 예로 들어 보자.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오랫동안 서구의 식민지로 수탈을 당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식민지적 토지소유가 지속되고 있다. 이는 곧 토지가 소수 권력자에게 몰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농민들은 한계토지로 내몰리고 양질의 땅에는 수출용 환금작물만이 재배된다. 또한 국가의 공공자원이 수출용 작물에만 집중되고 산업화 과정에서 저가식량정책을 실시하므로 농민들은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한다. 이 정도면 식량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부족하다는, 곧 재화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구조가 부족하다는 저자들의 말이 이해될 것이다.
그럼 지구의 한정된 자원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신화는 어떤가. 인구학자들의 미래인구예측은 계속 낮아져 대부분 100억에서 140억 사이이다. 이는 전문가 대부분이 지구가 충분히 부양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예측한 범위 안에 들어간다. '인구폭탄'이니 '인구폭발' 같은 과장된 표현과 예측은 공포탄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토지를 같이 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람들이 굶주리는가? 우리나라가 이 질문에 대한 명백한 반론을 제공한다. 한국은 방글라데시의 1인당 농지 면적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도 우리나라에서 인구과밀로 굶주림이 발생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굶주림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빈곤과 불평등이다. 인구가 너무 많아 굶주림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 때문에 인구가 증가한다. 왜냐하면 미래를 보장할 자원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가족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 '따라서 가난한 부모들이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합리적인 계산을 하는 것이다. 높은 출생률은 강요된 빈곤에 대한 방어적인 대응이다.' 또한 여성들의 교육 정도가 낮으면 출산율이 높아진다고 한다. 교육받지 못한 여성은 전근대적인 가족 관계에서 양육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 또한 인구증가의 중대한 원인인 것이다.

2. 자연재해와 환경파괴에 대한 우려로 식량 증산이 불가능하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유별나게 축구를 싫어한다고 한다. 영국이 축구의 종가이며 영국인들이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인들에 대해 거의 무조건적인 반감을 갖는 근저에는 '아일랜드 대기근(The Great Hunger)'이라는 슬픈 역사가 있다. 이 기근으로 1백만 명이 넘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150만 명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공식적인 역사에서 이 기근은 감자역병으로 인한 자연재해로 기술되고 있지만 당시 아일랜드가 식량수출국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자연재해로 식량을 수확하지 못해 굶어 죽은 것이 아니라 생산한 식량을 수출해 버렸기에 먹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오늘날 제 3세계에서 유사하게 발생하고 있다. 자연재해가 빈번해져 식량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요인들에 의해 재해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만성적인 굶주림으로 수 백 만 명이 굶어 죽는 원인은 자연재해가 아니다. 다만 자연재해는 최후의 일격을 날릴 뿐이다. 기근이 식량부족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식량에 대한 접근성에 문제가 생길 때 일어난다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쎈 교수의 연구는 이러한 상황과 원인 분석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시장에는 항상 식량이 있다. 우리에게 돈이 없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서아프리카 농민의 말은 굶주림의 원인을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다고 하겠다.
환경위기가 식량생산자원을 갉아먹으면서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화가 아니다. 연간 47억 톤의 농약 사용으로 1분마다 6명이 농약에 중독되고, 매년 22만 명이 목숨을 잃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이 파괴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식량을 확대생산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막화에 따른 토양손실과 열대우림의 무차별적인 파괴는 대부분 토지소유의 집중과 관련돼 있다. 그 결과 탄생한 대규모 농장에서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살릴 식량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선진국에 수출할 가축사료를 재배하고 있다. 이 대규모 농장 소유주들은 영구적이고 광범위하게 분배되는 혜택을 단기적으로 집중된 혜택과 맞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굶주림의 원인이다.
식량생산을 위한 석유재의 대표인 농약은 어떤가. 전세계적으로 농민들이 매년 농약에 지출하는 비용은 255억 달러에 이르고 제 3세계의 농약 중독자 수는 연간 250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농작물에 사용되는 농약의 0.1% 이하만이 실제로 목표 해충에 도달하고 나머지는 생태계로 유입되어 땅과 물과 공기를 오염시킨다고 하니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또한 미국에서 오렌지에 사용되는 농약의 60~80%, 토마토에 사용되는 농약의 40~60%는 영양성분의 개선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보기 좋게 하기 위해 쓰인다고 하니, 이 정도면 인간의 어리석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다.

3. 녹색혁명과 미국의 원조가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다.
녹색혁명은 1960년대 신품종에 의한 식량생산력의 급속한 증대를 일컫는 말이다. 녹색혁명 지지자들은 녹색혁명을 통해 굶주림을 근절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녹색혁명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수확량이 기적적으로 늘어난 현대 품종들은 통제된 관개용수와 석유화학비료의 공급, 즉 산업의 결과로 나온 기술과 물질을 투입할 때만 식량생산력이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더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오늘날 식량은 부족하지 않다. 기술에 힘입어 식량생산이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식량을 생산할 토지나 구입할 돈이 없는 사람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다. '기술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어떠한 새로운 농업기술을 부자에 유리하고 빈자에 불리한 사회체제에 도입한다면, 미국에서와 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업에서 나오는 보상이 점점 더 일부에 집중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녹색혁명으로 식량생산력을 높인 나라들 중 상당수가 아시아에 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는 여전히 전 세계 영양실조 인구의 2/3가 살고 있다.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녹색혁명의 성공으로 밀과 쌀 수확이 늘어나 인도의 곡물이 지금 넘쳐나고 있어도, 5천 명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매일 죽어가고 있다. 인도 인구 9억 명 중 1/3이 빈곤으로 쪼들리고 있다. 빈민들은 생산된 물건을 살 수 있는 여유가 없기 때문에, 정부는 수백만 톤의 식량을 쌓아두고 있다. 그 중 일부는 썩어가고 있고, 썩어가는 곡식이 공공시장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녹색혁명의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키스 그리핀은 이렇게 답한다. "녹색혁명의 목적은 정확히 말해 제도 변화의 필요성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불평등의 근간을 더욱 강조하는 녹색혁명과 같은 접근법으로는 굶주림과 빈곤의 근원을 결코 파헤칠 수 없음이 분명해 진다.
녹색혁명은 석유에 의존하는 농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비용이 많이 들기에 소수의 대규모 부농-슈퍼농장-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농경방식이다. 또한 화학비료와 농약을 무절제하게 사용하므로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은 농사법이기도 하다. 그러면 녹색혁명을 통해 최종적으로 '승리'한 사람들은 누구이겠는가? '녹색혁명의 진짜 수혜자는 농업 투입물 공급자, 농장노동 계약자, 그리고 민간 대금업자와 은행이었다.' 이들의 이윤추구를 위한 극악한 예로 다국적기업들이 개발한 신기술을 살펴보자. 대표적인 종자 및 농화학 다국적기업인 몬싼토는 '터미네이터(terminator, 종자 불임) 기술'과 '트레이터(traitor)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전자는 종자를 사서 파종한 그 해에만 수확할 수 있고 다음해에는 종자가 싹트지 않게 유전자를 조작하는 기술이고, 후자는 자사의 특정 농약이 살포되어야만 싹이 트고 성장하도록 유전자를 조작하는 기술이다. 이제 녹색혁명의 '반혁명성'이 눈에 보이는가.
이 책은 기본적으로 미국인을 위해 쓰여졌다. 그래서 미국인의 역할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저자들은 미국인들에게 냉소가 아닌 진심으로 호소하고 있다. '미국국민의 주된 책임은 미국 정부의 정책이 스스로 굶주림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의 원조가 결코 제 3세계의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함을, 아니 그것이 오히려 제 3세계의 잘못된 사회구조를 더욱 고착화하고 있음을 저자들은 강변하고 있다.
미국의 대외원조를 담당하고 있는 국제개발국(USAID)의 소식지는 미국 대외원조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미국 대외원조의 주요 수혜자는 항상 미국이었다. 대외원조 프로그램은 농산물시장 창출, 산업재 수출을 위한 새로운 시장 개척 및 미국인을 위한 일자리 창출로 미국을 도왔다.' 미국의 대외원조가 빈곤의 해결에 있지 않음은 미국의 경제원조가 몇 개 국가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1996년 미국 경제원조 상위 1위 국은 어이없게도 이스라엘이다-과 제 3세계에 일련의 구조조정정책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더 나아가 미국의 식량원조는 굶주림을 줄일 수도 있는 수혜국의 농업발전을 저해하기까지 한다. 그 예를 멀리에서 찾을 것도 없다. 우리가 사회시간에 배운 한국의 60년대 이농현상의 근본원인이 미국의 농산물원조였다. 60년대 한국은 미국 농산물원조 수혜국 2, 3위를 차지했고 그 결과는 현재의 파탄한 한국농업이다.
후진국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국가는 사람 죽이는 무기를 사느라 국민들은 굶어 죽고, 유효노동력이 징집되면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어린이들이 굶어 죽는다. 그런데 미국은 군사원조를 통해 전 세계적인 무력분쟁에 직접 기여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미국의 무기 판매액은 다른 모든 나라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세계 각 국의 군사비 지출 총액은 연간 1조 달러로 추정된다.' 사람 죽이는데 그 엄청난 돈을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외원조를 아예 하지 말 것인가. 꼭 필요한 대외원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제 3세계가 지고 있는 천문학적인 부채를 무조건 탕감하는 것이다. '실제로 제 3세계 국가들의 연간 이자상환액만도 1994년과 95년 각각 810억 달러와 85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외국 직접투자액 800억 달러, 900억 달러와 비슷하고, 선진국에서 받은 총 개발원조액 480억 달러와 640억 달러는 가볍게 뛰어넘는 금액이다.' 선진국들은 제 3세계에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수세기에 걸친 정복, 식민주의, 채광 및 기타 자연 채굴, 불평등 무역, 노동착취 및 기업 약탈 등-을 지고 있다. 선진국들의 제 3세계에 대한 부채 탕감은 그 빚의 일부를 갚는 일이 될 것이다.

4. 정의와 자유를 추구하다보면 식량 생산이 줄어든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고 우리를 독려한 바 있다. 현재의 가혹한 현실적 조건에 비관하더라도 그것을 개혁하려는 의지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비전은 포기하지 말라는 정언명령이다. 빈번히 '현실의 힘'에 압도되는 진보의 발걸음과 개혁의 몸짓을 응원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을 비관하기 앞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현실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다. 정의와 자유를 추구하다보면 식량생산이 줄어든다는 신화는 현실을 왜곡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신화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현재 생산 노하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대규모 생산자들이다. 그런데 정의를 실현한다며 토지를 분배하면 필연적으로 대규모 생산자들의 생산력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그럼 굶주림은 계속된다. 또한 굶주림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한데 그럴 경우 다수의 자유가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난다. 즉 다수의 자유는 다수의 굶주림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이 두 신화는 모두 전제가 잘못되었다. 대규모 생산자들이 성공하는 이유는 효율성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자원이 그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농들의 면적 당 산출량은 대농장들보다 네 배에서 다섯 배가량 더 높다. 또한 시민적 자유가 보호되는 사회에서 더 쉽게 굶주림을 끝낼 수 있기에 자유와 식량이 서로 충돌하는 것도 아니다.
토지가 분배되지 않고 집중되는 대규모 농업의 폐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대부분의 농민들은 대규모 농장에 소작농이나 임금노동자의 형태로 고용되는데, 그럴 경우 땅을 장기적이고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환금작물 위주의 농경 형태는 토지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전통적인 농촌공동체의 협동의 전통도 해체한다. 그리고 생산된 부는 생산지역에 재투자되지 않고 소규모 자본가에 의해 지역을 이탈하게 된다. 결국 대규모 농업은 저가 곡물을 생산하기 위한 고비용의 산업형 농업으로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반면, 토지분배를 골자로 하는 농업개혁의 결과는 이와 정반대다. 농지개혁의 영향에 대한 다양한 연구결과 농지개혁은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빈곤을 감소시켰으며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진정한 토지개혁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정치적 문제로 대다수인 빈민에게 유리하도록 권력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한 사회의 농업체제가 아무리 생산성이 높다 해도 그 속의 사람들이 굶주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와 식량이 상호 대립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누구를 위한 자유이고,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만약 자유를 '무제한적인 개인 축재의 권리'로 이해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경제력 집중에 따른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인간으로서 온전히 기능할 수 있게 해 주는 안전을 위한 토대'로 이해할 수도 있다. 오히려 후자가 자유에 대한 전통적이자 정통적인 이해였다. 크롬웰은 "자유의 토대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입법가를 선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라고 말한 바 있으며 플라톤은 자유의 본질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자유는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니다. 자유는 유한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의 자유가 확대되면 다른 사람들의 자유는 축소된다는 생각은 편견일 뿐이다. '자유는 제로섬게임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닐뿐더러, 총합이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경우도 있다.'
사회가 빈민들의 생계권을 보호하지 못하면 그들의 지적 발전, 정신적 통찰, 육체적 성취도 박탈하게 된다. 그들의 잠재력과 지도력이 무시되면 우리 모두의 최대한의 잠재력 또한 줄어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5.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이 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
최근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는 한-미 FTA는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는 힘'이 될 것인가. 신자유주의자들이 맹신하는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이 정말 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혹 그들이 말하는 인간은 자본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굶주림에 대한 신화 중 하나가 바로 자유시장/무역과 관련돼 있다. 과연 정부의 개입이 없는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이 굶주림을 끝낼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하다. 시장이 그 어떤 사회·경제 시스템보다 역동적이고 효율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장은 완전무결한 체계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시장의 결점이 빈민에게는 너무도 결정적이고 가혹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시장은 개인들의 선호 또는 필요에 반응하지 않는다. 다만 돈에만 반응한다. 또한 시장은 '생산이라는 엔진을 가동할 때 드는 사회비용 및 자원비용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다.' 마지막으로 시장은 경제권력의 집중을 가져온다. '경제권력의 집중은 굶주림의 직접적인 원인이며, 정치적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이러한 시장의 폐해를 막기 위해서 다수의 이해를 충족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정부는 규제를 통해 집중화 경향을 막고 자원을 배분해야 한다. '시장을 확대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늘려야 한다.' 구매력을 분산하는 정책은 소비자들이 실제로 원하는 일을 시장이 하도록, 즉 사람들의 필요와 선호에 반응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자유무역은 비교우위론에 근거하고 있다. 비교우위론은 쉽게 말해 자유무역 원칙에 입각해 각 나라가 가장 싸게 생산할 수 있는 것을 수출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수입하면 두 나라 모두 성장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경제에 비교우위의 논리는 들어맞지 않는다. '한 나라의 비교우위는 보통 지리적 여건에 달려 있다고 가정하는데, 토양과 기후의 상대적 질은 누가 무엇을 생산하는가 하는 것과는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저임금이 바로 제 3세계 국가들의 실질적인 비교우위이다.'
자유무역의 결과 한 토막을 살펴보자. 국민 대다수는 너무 가난해서 자국 땅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살 수조차 없게 된 마당에, 생산자원을 통제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윤이 더 큰 외국 시장으로 생산물을 수출한다. '제 3세계에서 잡히는 엄청난 양의 생선은 빈민들에게 풍부한 단백질을 제공할 유용한 식품이지만, 유럽과 북아메리카 애완동물의 사료가 되고 만다.'
세계 주류 경제학자들은 한국을 자유무역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로 든다. 과연 그런가. 내가 어렸을 때 일본제 워크맨은 외항선원으로 일하는 친척들이 몰래 사다 준 것이 다였다. 우리나라가 자유무역으로 성장했다면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성장은 사실 내부 지향적 발전을 통해 가능했다. '자유무역과 수출농업이 그 자체로 굶주림의 적은 아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권력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이 둘은 불필요한 굶주림을 양산하는 힘의 논리를 반영·양산하고 있다.'

6. 제 3세계의 빈민들은 무기력하며 그들의 굶주림은 선진국의 이득으로 이어진다
빈민들이 가난한 이유는 그들이 게으르고 무기력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지금까지 배워왔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그들의 가난과 굶주림의 근본적인 이유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것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혹시 제도와 구조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빈민들이 정말 게으르고 무기력한 것은 아닐까?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빈민들이 진짜로 수동적이라면 아마도 이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 한 예로 검은 두건을 쓰고 파이프를 문 마르꼬스 부사령관이 이끄는 멕시코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에 대해 알아보자.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NAFTA가 발효된 날인 1994년 1월 1일, 멕시코 남동쪽에 위치한 치아빠스 주의 싼 끄리스또발 데 라스 까싸스에서 봉기해 다른 중요한 도시들을 접수했다. 이후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전지구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자유무역과 구조조정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던 멕시코 내부에 심각한 토론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의 요구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다운 삶이었다. 또한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개인적인 희생도 감내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Para Todos, Todo ; Para Nosotros, Nada)'라는 그들의 구호는 이를 명백하게 증명한다.
앞에서 자유는 제로섬게임이 아니라고 했다. 복지도 마찬가지다. 우리 복지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굶주림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굶주린 사람들이 계속 궁핍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굶주림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질을 심각하게 훼손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오류거나 단견이거나, 편견이거나 아니면 셋 모두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자연적 과정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태학을 통해 배웠다. 인간의 삶 또한 예외는 아니다.
경제의 경우만 보더라도 세계는 말 그대로 전 지구로 확장된 생산 네트워크에 묶인 단일 경제가 된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더 쥐어짜야 부자들의 이익이 늘어날까. '독약의 순환'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생각이 터무니없음을 잘 보여준다. 미국의 화학기업들은 주기적으로 제 3세계 국가들에 미국에서는 금지되었거나 심한 제재를 받는 농약을 수출해 이득을 얻는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일까. 전 세계 1위의 농업 수출국인 미국조차도 수출하는 것보다 54% 더 많은 농업 생산물을 제 3세계 국가에서 수입한다. 그러면 미국 기업이 수출한 농약으로 제 3세계 농민들이 농약중독에 걸리며 재배한 농산물을 미국인들이 다시 수입해 먹게 되는 것이다.
세계화된 사회에서 우리의 복지는 다른 사람들의 복지와 많은 방식으로 엮여 있다. 우리의 복지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 부의 편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보통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사회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돕기 위한 첫 단계는 의식의 도약이다. 거짓 신화에서 벗어나는 의식의 도약 없이는 어떠한 긍정적 실천도 담보될 수 없다.

Ⅱ. 거짓 신화를 넘어 희망의 연대로

세계가 굶주리고 있다는 낯선 외침을 따라 출발했던, 굶주림에 대한 신화를 벗어나는 짧지 않은 노정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그것은 굶주림의 종식이 실현 가능하다는 인식과, 이는 민주주의의 회복으로 가능하다는 원리의 확인이 아닐까. 우리는 현실적인 독단을 넘어서 도덕적 용기를 가져야 한다. 옳은 일이기에 늘 현실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득권층의 끊임없는 위협과 회유를 견뎌내야 하는 또 하나의 의무가 주어질 뿐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 안에 있는 존재와 의식의 괴리를 좁혀야 한다. 노동자라는 존재와 그것에 걸맞은 의식은 사회 변혁의 가장 기본적인 동력이며 연대의 토대이다.
존재에 부합하는 의식, 연대……. 어렵고, 낯설고, 무섭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환경부에서 발표한 음식물 쓰레기로 인한 연간 경제적 손실액(2005년 기준)은 약 15조 원이다. 이는 1가구 당 1,133,000원에 이르는 막대한 액수이다. 그런데 <월드비전>에 따르면 월 2만원으로 1)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식수개발을 통해 아동을 수인성질환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고, 2) 예방 접종을 통해 예방 가능한 질병에 걸려 목숨을 잃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3) 영양 공급을 통해 영양 실조의 고통에서 아동들을 벗어나게 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기초교육을 통해 아동들이 빈곤의 고리를 끊을 수 있게 지원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만으로, 우리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 학교 점심 식사시간에 순간의 배고픔을 참고 평소의 반만, 아니면 2/3만 밥과 반찬을 담으면 어떨까. 식판의 공간은 어느덧 희망과 연대의 뿌듯함으로 채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