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과 윤리는 어떻게 다른가
- 『데미안』

고은영 | 해오름 평생교육원 전임 강사

대상: 고등학교 2~3학년
수업시간: 2차시(3시간)
함께 읽은 책: 『데미안』(헤르만 헤세 / 민음사)
참고자료: 『호모 에티쿠스』(김상봉 글 / 한길사)
『도덕교육의 파시즘』(김상봉 글 / 길)
『수레바퀴 아래서』(헤르만 헤세 / 민음사)
학습 목표
1.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하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2. 윤리를 바탕으로 주체적이고 진정한 자아실현의 길을 모색한다.

들어가며 -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 그리고 데미안

한 학기를 마치고 받는 성적표에는 시험성적과 함께 담임선생님의 간단한 논평이 적혀 있다. 누구의 눈에도 띠지 않는 평범한 아이였던 나의 성적표에는 늘 비슷한 평이 적혀 있었다.
"얌전하고 조용함", "착실하고 모범적임", "성실하게 자기 일을 알아서 함"
성적표를 받아본 엄마는 딸이 모범생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안도하곤 했지만 착하고 얌전하다는 말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나를 짓눌렀다. 때로는 아이들과 어울려 짓궂은 장난도 치고 싶고 청소 시간에 몰래 도망가고도 싶었지만 착한 모범생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하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줍고 다른 아이가 어질러 놓은 의자를 바로 놓고 복도에서는 절대로 뛰지 않으며 나는 내게 내려질 선생님의 칭찬을 기대했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던 모범생은 그러나 중학생이 되면서 혼란에 빠진다. 선생님의 칭찬도, 너 참 착하다는 친구들의 말도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그건 더 이상 내가 들을 말이 아니었다. 착하다는 평 뒤에서 이미 나는 나쁜 짓을 하는 상상을 즐겼으며 실제로 일탈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마음은 지옥이었다. 그동안 내면화해 온 도덕적 가치들을 스스로 배반하는 나 자신이 견디기 어려웠고 그런 양심의 가책 때문에 남들 앞에서는 더 착실한 아이처럼 행동하는 자기분열이 계속되었다. 내 속에서 솟아나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나만의 색깔을 온전히 드러내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렵고 두려웠을까. 무엇이 나를 그렇게 억누르고 있었을까.
보기보다 엉뚱하고 알 수 없는 아이라는 말을 듣던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데미안』을 만났다.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완전히 알 수 없었음에도 막연한 위로를 받고 무언가 모를 용기를 얻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여전한 혼돈과 갈등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불혹의 나이를 지나 나는 다시 데미안을 만났다. 몇 달 후로 다가온 대입 시험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고등학교 3학년 이이들과 함께 『데미안』을 읽기로 한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이 명작은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바쁜 일정과 공부의 부담에 지쳐버린 아이들이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으로 인도하는 데미안을 어떻게 만났을까,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펼치기

아이들은 오랜만에 읽는 진지한 책이 무척이나 버거웠던 모양이다. 수업 일정을 일주일 늦추면서까지 읽은 『데미안』이 너무 부담스러웠다는 가벼운 투덜거림이 있었다. 수업은 세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수업 과정에서 의문이 들거나 다시 읽어보고 싶은 구절들을 있으면 찾아서 함께 읽고 의미를 파악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나'를 돌아보고 '나'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시간들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점점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갔다.

● 먼저 책을 읽은 소감을 말해볼까?
- 책이 쉽지 않았어요. 주제가 너무 심오해요.
- 어려웠어요. 특히 싱클레어가 생각하는 부분들은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잘 안 됐어요.
-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철학적인 생각을 많이 해서 공감할 수 있어요.
-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 그래. 편하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 헤세라는 작가의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책이기도 하고. 헤세의 작품 읽은 것 또 있니?
- 『수레바퀴 아래서』 읽었어요.
- 그 책도 어려웠어요. 헤세 책은 다 그래요?
● 글쎄. 헤세는 삶의 의미와 인간 내면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파헤친 작품들을 많이 쓴 작가지. 오늘 이야기를 풀어가기 전에 우선 헤세의 시 한 편을 읽고 함께 이야기해보자. 참, 헤세는 소설 뿐 아니라 많은 시를 쓴 시인이기도 해.

안개 속에서
- 헤르만 헤세

안개 속을 혼자 거닐면 정말 이상하다.
덩굴과 돌은 모두 외롭고
나무들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나의 생활이 아직도 활기에 찰 때
세상은 친구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지금 안개에 휩싸이니
그 누구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것들로부터
사람을 조용히 떼어놓는
어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정녕 현명하다 할 수 없다.
안개 속을 혼자 거닐면 정말 이상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혼자인 것이다.

● 시 읽은 느낌이 어때?
- 이 사람은 참 고독하게 산 것 같아요. 저는 헤세의 외로움이 느껴져요.
-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 나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래서 혼자다, 그래서 외롭다, 그런 얘기 같아요.
-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나를 잘 모르잖아요. 혼자 있을 때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것 아닐까요? 나는 그렇던데…….
● 실제로 안개 속을 걸어본 적이 있니?
- 한라산에서 안개 속에 들어갔었는데 나무들도 이상하게 보이고 모두가 다 낯설었어요. 이상했어요. 옆에 있는 친구들도 안 보이고 나 혼자인 것 같고 무섭고.
- 그런데 저는 무섭지만 이상하게 좋았어요.
- 맞아, 저도 그런 적 있어요. 가족들과 차 타고 가다가 안개를 만났는데 갑자기 전부 말이 없어졌어요. 전부 명상했나 봐요.
● 그래, 안개 속처럼 고립된 곳에서 혼자 있으면 무섭기도 하지만 혼자 던져진 그 속에서 나를 둘러싼 일상, 내가 안주했던 것들을 낯설게 보게 되겠지. 늘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나를 잊고 살다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오늘 함께 이야기할 것도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고민해보고 자기의 생각을 깊이 들여다보자는 거야. 마치 안개 속에서 혼자 더듬더듬 자신의 길을 찾아 나가듯이 말이야. 헤세의 『데미안』은 이런 고민을 나누는데 좋은 지침이 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존재의 진실에 관한 모든 답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겠지. 그걸 함께 찾아보자는 거야. 사실, 헤르만 헤세는 조언을 구하는 독자에게 실천적 행동을 위한 명백한 길을 제시하는 것은 늘 거부해 왔다고 해. 누구나 자기의 불안을 회피하지 말고 사회의 관습적 가치 체계와 요구들을 회의하고 모든 독단적 규범에 맞서 주체적 결단을 해야 한다고 말했대. 어려운 일이지. 자 그럼 시작해보자.

1. 선과 악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곳에서는 두 개의 세계가 뒤섞였다. 밤과 낮이 두 극으로부터 나왔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세계는 협소해서 사실 그 안에는 내 부모님밖에 없었다. (중략) 그 세계의 이름은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그 세계의 이름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였다. 그 세계에 속하는 것은 온화한 광채, 맑음과 깨끗함이었다. (중략) 곧바로 미래로 이어지는 곧은 선과 길이 그 세계에 있었다. 인생이 맑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정돈되어 있으려면 그 세계를 향해 있어야만 했다. 반면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중략) 그 두 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한, 거칠고도 잔인한 그 모든 일들이 사방에, 바로 옆 골목, 바로 옆집에서 있었고 경찰 끄나풀들과 부랑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던 우리 집안에서만 빼놓고 어디서나 이 격렬한 두 번째 세계가 솟아 나오고 향기를 뿜었다.

● 싱클레어는 두 개의 세계 속에서 살았다고 하지. 두 개의 세계는 무엇일까?
-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요.
- 아버지의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요.
● 두 세계가 어떻게 나뉘어져 있지?
- 선의 세계는 너무나 편안한 윤리적 세계, 자기보다는 가족의 분위기를 따라서 사는 것을 선의 세계라고 한 것 같아요. 악의 세계는 성장하기 위한 세계인가? 잘 모르겠어요.
- 편안하고 깨끗하고 기독교적인 세계와 하녀들과 불한당들의 시끄럽고 사악한 세계가 있대요.
- 그런데 그게 왜 사악하다는 거지? 당연히 있는 건데.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잖아요.
- 두 번째 세계는 무시무시하지만 아름답대요. 무슨 뜻이지? 모르기 때문에 아름답게 느껴지나?
- 밝은 세계는 평화롭고 좋기는 하지만 억누르는 것, 의무 같은 것이 있잖아요. 얌전하게 살아야 하고 소란 피우면 안 되고. 그런데 살다보면 좀 자유롭고 싶은데, 하녀나 다른 사람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아닐까요?
● 크로머와의 만남과 일탈은 바로 그 두 번째 세계와의 조우인데 그때의 느낌은 어땠을까?
- 크로머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영원히 그 손아귀에서 못 벗어날 것 같은 두려움을 느껴요. 다시는 부모님에게 못 돌아갈 것 같아서 무섭고 아프고 토하고…….
- 지옥에 떨어진 거죠. 다시 아버지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해요.
● 그런데 데미안이 구원해주지. 그렇게 돌아온 세계는 전에 몸담았던 세계와 같을까?
- 편하고 안온해서 안도감을 느꼈을 것 같아요. 드디어 편안한 세상에 돌아왔구나, 그런 안도감.
- 반대일 것 같아요. 항상 같은 환경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크로머 같은 악당도 만나고 다른 세계도 있다는 경험을 했잖아요. 우물 안 개구리였다가 새로운 갈등도 하고 내가 알고 있던 세계말고 다른 세계도 있구나, 그런 것도 느끼고…….
- 그러면서 크는 거 아닌가요?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 같아요. 그런 걸 경험하면 '그동안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 이런 걸 몰랐었구나,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볼 것 같아요.
- 오히려 지금까지의 세계를 답답하게 생각하게 될 수도 있어요.
- 실제로 싱클레어가 아버지를 보고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잖아요. '나는 경험한 것을 아버지는 모르시는구나', '내가 이만큼 어른이 된 걸 아버지는 모르는구나' 하면서.
- 지금의 세계가 좀 가식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분명히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데 마치 그런 세계는 없다는 듯이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버지에 대해서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 내가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다는 아니라는 것은 지금 이 세계만으로는 불완전하다는 것인데 다른 세계가 없는 척하고 사는 거잖아요, 모른 척하고……. 그런데 싱클레어는 자기 몸으로 경험했잖아요. 분명히 그런 세계가 있다는 걸. 그러니까 아버지의 세계는 가식이죠. 불완전하고요.
- 돌아와서 본 세계는 전에 본 세계와는 좀 다를 것 같아요.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고. 싱클레어가 굉장히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 속에서 편하기도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하는 생각도 했을 것 같아요.

이 사건을 계기로 싱클레어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자아변화에 주목해보자. 그는 자신이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로 인해 악의 손아귀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자아 밖에서 주어진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고, 이미 존재는 하고 있었지만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인 자아의 일부였다. 자기 내면의 악한 일면에 외부의 충동이 가해짐으로써 거짓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그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자기 내면에 숨어 있던 악한 면이 가족적 환경을 지배하고 있었던 선의 세계에 억눌려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싱클레어는 악의 세계에 빠져들기 전에도 악의 세계를 은밀하게 동경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실재하지만 외면하고 살아왔던 세계에서의 충격적인 경험은 어린 싱클레어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이지만, 아버지로 대표되는 밝은 세계의 불완전함과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던 규범을 깨닫게 되는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부모의 선한 세계에서 벗어나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 한편으로는 정체 모를 우월감으로 '두 세계' 속에서 혼란스러워 하던 싱클레어는 상급자인 데미안을 만나게 된다. 데민안을 만난 이후 선과 악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2. 법과 규범을 지키는 것이 윤리적인 행동을 뜻하는가?

카인에 관한 이야기는 완전히 다르게 이해할 수 있어. 우리가 배우는 대부분의 것들은 분명 완전한 진실이고 올바른 것이지만 그것들 모두를 선생님들이 보시는 것과는 다르게 볼 수 있어.
(중략) 아주 간단해. 그건 표적이야.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을 겁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어. 사람들은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 했어. 그가 그들을 압도했던 거야. (중략) 그것은 시선에 담긴 비범한 정신과 담력이었을 거야. 그 남자에게는 힘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를 겁냈어. 그는 표적 하나를 가지고 있었어. (중략) 사람들은 그 표적을 그것의 원래 모습인 우월함에 대한 표창으로 설명하지 않고 반대로 설명한 거야. 이 표적을 가진 놈들은 무시무시하다고. 또 실제로 그들이 그렇기도 했어. 용기와 나름의 개성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늘 몹시 무시무시하거든. 겁 없고 무시무시한 족속 하나가 돌아다닌다는 것은 몹시 불편한 일이었지.

● 책에는 기존의 성서적 해석과는 다른 '카인'의 이야기가 나오지. 성경에서 카인은 살인자이지만 데미안은 카인을 강인하고 우월한 자라고 말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카인은 성서에 기록된 최초의 살인자잖아요. 살인을 하지 말라는 경고라는 게 교회의 해석인데, 카인이 우월하다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 카인에게 지성과 용기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서 겁이 났던 것 아닐까요? 그래서 고립시키는 거죠. 데미안은 그렇게 말하던데요.
- 사람들이 카인을 두려워해서 표적을 만든 거래요. 용기와 개성을 가진 자를 두려워한다는 거죠.
- 살인을 했다는 것은 세상의 규칙을 깬 거잖아요. 그게 사람들 눈에 거슬린 거죠.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을 격리하기 위해서 표적을 만들었다는 것 같아요.
- 꼭 살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살면서 다른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잖아요. 그런 일들이 겁을 먹을 일이 아니어도 우리는 겁을 먹고 무조건 안 하려고 하는데 사실 그건 규칙을 깬 것뿐이라는 거 아닐까요?
- 어떤 행위가 범죄다, 잘못이다 이건 하나의 사회적인 약속이잖아요. 그런 약속이나 규칙, 틀을 깨는 사람을 보는 눈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카인은 사람들이 만든 그런 약속도 깰 수 있는 담대하고 비범한 사람인데 사람들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흔들어버리는 그런 사람이 불편하죠. 위험하고 시키는 대로 안 하잖아요. 그래서 카인의 이야기를 만들어 그런 사람들을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어요. 그래서 데미안은 카인이 죄인이 아니라 우월하다고 해요.
- 어느 분야든 선구자들은 다 카인 같은 사람들이에요. 서태지도 처음엔 그게 음악이냐고 욕먹었어요.
● 그래 맞아. 서태지는 당대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지. 지금은 서태지 노래의 음악성이나 사회적 가치를 아무도 부인하지 않잖아. 오히려 음악의 지평을 넓힌 선구자로 기억하지. 서태지도 기존의 음악만 답습했다면 우리 대중음악의 진보는 많이 늦춰졌을 거야. 그렇게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것들을 깨는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그리고 그런 행동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 누드 미술교사. 그때 엄청 난리 났었어요.
- 맞아. 근데 그건 좀 충격이었어. 난 사진은 차마 못 보겠던데.
● 난 봤는데?
- 어땠어요?
● 놀라웠지. 처음엔 왜 꼭 이런 걸 찍어야 했나 싶고 불편했지. 사회적인 논란도 굉장했어. 나중에 보니까 사진이 수정되었는데 그게 훨씬 더 징그럽고 흉한 모습이었어. 원래 사람이 생긴 그대로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다고 해서 신체 일부를 훼손한 사진을 보는 것이 마치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서 보기 괴롭더군. 카인이 기존의 가치 체계에 대해 도전하는 사람의 의미라면 그 교사도 카인처럼 낙인찍힌 사람이지. 하지만 그 교사 때문에 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예술 활동의 규제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잖아. 우리 사회의 예술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논의의 폭을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 만일 그 교사가 사회에서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만 작업하고 활동했다면 파렴치한 변태라는 비난도 받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었겠지. 그런데 그 교사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예술의 길을 선택한 거야. 대가가 아주 컸지만 기꺼이 치르면서. 개인적으로는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스스로 선택한 길이어서 그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도둑의 이야기에 대한 데미안의 설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 이야기 말이야. 거기 언덕 위에 십자가 세 개가 나란히 성 있는 모습은 굉장하지. 하지만 우직한 도둑들에 대한 감상적인 선교 전단용 이야기야. 도둑은 처음에 수치스러운 행위를 저지른 범죄자였어. (중략) 그런데 막판에 와서 마음이 누그러져 그런 개전과 회개의 징징거리는 축제를 치르는 거야. 무덤에서 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하는 그런 회개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정말 엉터리 신부님의 설교일 뿐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야. (중략) 네가 오늘 만약 그 도둑들 중 하나를 친구로 택해야 한다면 혹은 둘 중 누구에게 더 신뢰를 줄 수 있겠는지 생각해야 한다면 그건 아주 분명히 이 징징거리는 개종자 쪽은 아닐 거야. 다른 쪽이야. 그 회개하지 않은 도둑이야말로 사나이잖아. 개성이 있고 말이야. 그는 개종 따위는 우습게 알았어. 그는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갔어. (중략) 그는 당당한 개성을 가졌어.

*예수와 두 죄수 이야기
예수와 함께 두 죄수도 못 박았는데 하나는 예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매달았다. (중략)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한 사람은 "당신이 그리스도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시오" 하며 예수를 모욕하였으나 다른 죄수는 그를 꾸짖으며 "너는 똑같이 사형선고를 받고도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아도 싸지만 이분은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였다. 그러고서 그가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자 예수는 그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 『성경』, 루가 복음 중에서

- 한 도둑은 회개하고 한 도둑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데 데미안은 회개하지 않은 도둑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해요.
- 우리가 알고 있고, 믿어왔고, 인정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성서 구절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이어서 교회에서는 싫어했을 것 같아요.
- 그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이라 굉장히 놀랐어요. 데미안은 회개하지 않은 도둑이 자신의 소신을 지키고 자신만의 의지를 지켰다고, 그런 행동이 가치 있다고 말해요. 데미안은 그 사람이 카인의 후예래요. 그 도둑이 개성 있고 소신 있고 더 우월하다고 해요. 소신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 그럼 끝까지 악하게 살아야 해? 잘못해도 회개도 하지말고? 그건 아니잖아.
- 그게 아니라 자기 주관을 지키고 살라는 거지. 그 도둑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잖아. 끝까지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는 걸 긍정적으로 보는 거 아냐?
- 그래도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게 더 옳은 거잖아요. 끝까지 악한 게 나쁜 거지.
● 데미안은 카인과 도둑을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보고 있는 거야. 죄인들을 두둔하고 우월하다고까지 말해. 싱클레어처럼 우리도 당황스럽지만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생각을 왜 못했을까, 그럼 과연 어떤 판단이 옳은 걸까' 갑자기 혼란스러워지면서 많은 생각이 일어나네.
- 저는 사회를 볼 때 다른 면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마다 가치관이 다 다른데 그걸 무시하고 하나의 가치관으로 몰아가는 걸 비판하는 것 같아요.
- 그런데 데미안처럼 다른 시각만 고집하면 사회의 질서가 무너질 것 같아요.
- 그렇다고 기존의 질서만 고집하면 사회 발전이 안 되고 개성도 없어지고 다양한 의견도 없어지고 좀 문제가 있잖아요.
- 그런데 자기가 생각하고 판단한 걸 따르는 건 자기 자신을 지키는 행위지만 어쩌면 오히려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자기가 옳다고 선택하고 행동해도 그게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전에는 위험하잖아요. 손해잖아요.
- 데미안은 그런 태도를 비판하는 거 아냐?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고 하지말고 자기의 소신대로 살라는 거 아닌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다고 받아들이는 것도 자기가 아니면 아닌 거라는 말이 있잖아요. 사회에 데미안 같은 사람들이 있어야 하잖아요. 대다수가 옳다고 말하면 의심 가는 것이 있어도 그냥 넘어가는데, 그러다 보면 잘못된 것을 바꿀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지잖아요.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바른 말을 할 용기가 있어야한다는 것 같은데요.
- 손해냐 아니냐를 따지는 기준을 자기 스스로 가지라는 것 아닌가요? 남의 인정을 바라지말고.
- 힘들더라도 자기 길을 가라는 거예요. 이런 태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난 만날 안일하게 따라가기만 했는데. 종교처럼 주입되는 가치관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거잖아요.
- 그래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언제나 묻고 언제나 의심하라고 하잖아요. 수동적인 인간이 되지 말라고.
- 데미안은 당연하게 보이는 것들을 의심하는 것이 필요하대요. 카인의 후예라는 낙인이 찍히더라도. 데미안 너무 멋져요. 기존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말하는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무척 놀랍다. 특히,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한 아이는 극심한 혼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보편적 삶의 문제로 생각해 볼 것을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성경 속에서 카인은 최초의 살인자이며 근친 살해의 씻을 수 없는 원죄를 짊어진 자이다. 그리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도둑은 스스로 구원받기를 포기한 가엾은 영혼이다. 그러나 데미안에 의하면 이것은 허구이며 일방적인 해석일 뿐이다. 카인과 회개하지 않은 도둑(데미안은 그도 카인의 후예라고 말한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대로 사악한 인물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우월하고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완전히 홀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자기 자신과 대결할 용기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인의 표적은 '과오의 표시'가 아니라 '우월의 표시'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금지된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변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데미안과의 이러한 교류는 전통적인 절대 가치들에 대한 싱클레어의 확고한 믿음을 흔들어버린다. 지금까지 의심하지 않았던 기존의 절대적 가치들은 부정되고 상대화되어 그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3. 한 사회의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할까? 나는 무엇을 따라 살아가고 있나?
● 데미안에 나오는 성서에 대한 해석은 절대적 진리에 대한 다른 해석이잖아. 그래서 싱클레어는 충격을 받았고 너희들도 혼란스러워 했지. 그럼 한 사회의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예를 들면 이렇게 사는 것이 옳다든지, 이런 행동이 좋은 것이라는 식의 가치 판단 말이야.
- 전 절대적 진리는 없는 것 같아요. 절대적 진리가 있다면 종교도 단일해야 하고 뭐든지 한 가지만 인정되는 사회가 되잖아요.
- 절대적이라는 말과 진리라는 말은 안 어울려요. 진리는 참된 이치잖아요. 그런데 그런 기준은 늘 변하는 거잖아요. 시대에 따라서 바뀌잖아요. 옛날에는 남존여비가 진리지만 지금은 남녀평등이 당연한 진리이고.
- 진리라는 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정한 것들을 그냥 믿고 따르는 것이고, 그건 사회마다 다르잖아요. 그냥 하나의 생각일 뿐인 것 같아요.
- 그렇다면 절대적 진리는 없고 모두가 사회적 약속일 뿐인가요? 절대적인 진리는 분명히 존재하잖아요?
● 예를 들면?
- 착하게 살아라. 살인하지 말라. 그런 건 절대 변하지 않는 거잖아요?
● 그럼 우리는 왜 착하게 살아야 하지?
- 뭐, 엄마도 늘 그러시고 내 생각에도 착하게 사는 게 좋을 것 같고, 학교나 교회에서도 배우잖아요. 책에서도 그렇고요. 착하게 사는 건 절대로 나쁜 게 아니잖아요.
● 그럼 착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착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같은 의미일까?
- 아…잘 모르겠어요.
- 생각해보니까 지금까지 참 많은 교육을 받았던 것 같아요. 친구 관계에서나, 가족에 대해서나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배우기는 했는데 내가 선택하고 정하고 그런 건 없었어요. 착한 게 뭔지도 잘 모르겠네. 기분이 이상해.
● 그래. 착하게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옳은지, 혹은 착한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 선택의 판단 기준이 과연 누구의 것이냐는 거야.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의 답이 내 속에 있느냐는 거지.
- 그런 생각 안 하고 정해진 것을 따르는 게 익숙하고 편하니까 그냥 따르는 것 같아요.
- 인간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런 것도 배워서 아는 것이긴 해요. 사실 생각은 안 해 봤어요.
- 무조건 부모님 말씀을 따라야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부모님 말씀에 대해서도 정말 그게 옳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우리는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주어진 대로 따를 것을 강요받아 왔다. 심지어 올바른 삶의 태도, 이상적인 가치관에 대해 정해진 하나의 답을 찾는 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답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우리는 주어진 답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데미안의 말을 들어보자.

"'금지된 것'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냐. 바뀔 수 있는 거야. 우리들 누구나 스스로 찾아내야 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 사실, 그것은 그냥 편안함의 문제거든. 지나치게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 늘 그러게 마련이듯이 그런 사람은 살기가 쉬워. 다른 사람들은 운명을 자기 속에서 스스로 느끼지. 그러니 누구나 자신의 편에 서야 해."

데미안에 따르면, 인류가 지금까지 지켜온 제도와 법과 윤리를 따르는 것은 본인이 안일하기 때문이며 기존의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된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기존의 세계에 순응하지 않고 나의 편에 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의 선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4.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일까?
- 이 말 진짜 멋있어요. 많이 들어본 말 같아요.
- 성장하려면 기존 세계의 규칙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 같아요.
-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고통이 따른다는 뜻 같아요.
- 경험하지 못하면 뭐가 옳은지 모르지만 알을 깨고 나오면 뭐가 가짜인지, 뭐가 진짜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진짜 자아를 찾으려면 깨야 된다는 것 아닐까요? 밝은 세계, 악의 세계를 다 보려면 알을 깨야 할 것 같아요.
- 자기가 직접 경험하고 스스로 찾아야 그게 진짜라는 것 같아요.
- 근데 알을 깨고 나오다 죽는 새들도 있어요. 집에서 새 기를 때 봤어요.
● 그래. 아이를 낳는 것은 극심한 고통이지만 사실 아이들도 산도를 뚫고 나오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고 해.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겠지. 알  속에 있는 '나'와 알을 깨고 나온 '나'는 어떻게 다를까?
- 자기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서 산다는 건 그 전과는 다를 거예요. 달걀과 병아리는 존재 자체가 다른 것이잖아요.
- 자기 힘으로 세상에 나오는 거니까 자기 선택이죠. 밖으로 안 나오고 그 안에서 편안하게 살다 죽을 수도 있는데. 주체적인 인간이 되는 것 같아요.
- 지금 우리가 알을 깨려고 하는 것 같아요. 주는 지식을 그냥 받아먹다가 내가 찾아서 생각하고 공부해야 하니까.
● 알을 깨는 기분이 어때?
- 머리 속이 좀 복잡하고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좋아요.
-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것 같기도 한데 겁도 나요.
- 날아가고 싶어요!
● 막연하게 좋지만 겁도 나고 훨훨 날아가고도 싶구나. 그래. 그런데 새가 날아서 찾아가는 신인 '압락사스'는 희랍의 신으로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고, 신이면서도 악마이며,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닌 그런 존재라고 해. 알에서 깨어난 새가 압락사스에게 날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세상에는 어차피 선과 악이 다 존재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압락사스는 세상 그 자체란 뜻인가?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건가요?
- 처음에 두 개의 세계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하나의 세계에서만 살면 세상을 다 알 수 없다는 것 같아요.
- 하나만 옳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다른 가치도 있다고 인정하는 게 필요해요.
- 선과 악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같아요. 전에는 밝은 세계만 보았지만 알을 깨고 나서는 다른 세계도 볼 수 있다는 거죠.

새는 싱클레어 부모 집 문장의 새인 매로써 그의 자아를 의미하고, 알과 세계는 자아를 속박하고 있던 전통적, 종교적 권위와 도덕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억압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온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며 싱클레어를 규정해 온 세계의 절대적인 가치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한편 새가 날아가는 지향점인 신 압락사스는 선과 악, 양과 음, 의식과 무의식 등 모든 대립적인 요소들을 합일시키는 상징이다. 압락사스에게로 날아간다는 것은 분리되었던 두 세계, 즉 '당위'와 '금기'의 세계를 뛰어넘어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싱클레어의 자아가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모든 대립들을 긍정하게 되면서 자신만의 윤리적 원칙을 세우면서 그의 자아도 완결되는 것이다.

5. 자아 찾기의 과정에서 '윤리'는 탄생한다
● 헤세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얘길 하지. '나는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살아보려 했다'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이 무엇일까?
- 본성 아닐까요? 자아 같은 거.
● 그런데 솟아 나오는 본성대로 사는 게 왜 어렵다는 걸까?
- 살고 싶은 대로 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있다는 뜻 같아요.
● 예를 들면?
- 싱클레어처럼 악한 세계가 궁금해도 거기 들어가면 못 빠져 나올까봐 아예 못 가는 것이요.
-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게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거면 안 해요. 해야 하는 거면 싫어도 그냥 하고.
- 규칙이나 법 같은 것. 편견 같은 것도 있어요.
- 다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인정받고 싶어서 내 맘대로 못 해요. 다 그렇지 않나요?
● 그럼 그럴 땐 기분이 어때? 나를 억누르고 외부의 규칙이나 틀에 맞춰야 할 때 기분 말이야.
- 짜증나지만 그냥 참아요.
- 속으로는 안 따르고 겉으로만 따르는 척 할 때도 많아요. 그게 편해요.
- 나중에 내가 힘이 생기면 내 맘대로 하고 살 거라고 생각해요.
● 그렇구나. 『데미안』에서 피스토리우스는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만 존재한다고 말해. 그 의무는 무엇이며 우리는 그 의무를 다하고 있나 생각해 보자.

누구에게나 하나의 직분이 있지만 그것은 그 누구도 자의로 택하고 고쳐 쓰고 그리고 마음대로 주재해도 되는 직분은 아니라는 것.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중략)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중략)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중략)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한 것에로, 어쩌면 새로운 것에로, 어쩌면 무(無)로 던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는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건가?
- 내가 어떻게 살 건지 선택하는 게 나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것 같아요.
- 자아를 찾으라는 말이에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야 자아를 찾는다는 것 같아요.
● 모든 사람이 자기 본성을 따라 살면 어떤 일이 생길까?
- 행복하겠죠.
- 근데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행할 수도 있어요. 다 자기만 생각할 테니까. 누구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면 세상이 너무 혼란스럽잖아요.
- 그런가?
● 그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원칙이 필요하겠네. 그게 무얼까?
-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것이요.
- 자기의 행동에 책임지는 태도?
- 그래서 법이나 규칙 같은 게 만들어지는 거 아닌가요? 아, 알았다. 그런데 그런 법이나 규칙이 오히려 본성대로 못 살게 한다는 거죠?
● 그래. 사실, 기존의 가치관이나 도덕, 규칙 같은 것은 나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따르고 지키도록 강제된 것이잖아. 그건 나의 선택이 아니지. 그런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이나 답습이 아니라 그것을 나의 가치로 판단하여 따르는 것만이 진정한 나의 삶이라는 말 아닐까?
- 맞아요.
- 지금까지는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 하는 것을 그대로 따랐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 같아요.
- 그게 쉽지 않아요. 내가 뭘 원하는지도 아직 잘 모르는데.
-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준비가 필요해요. 그냥 나서면 그건 방황이에요. 그런데 이건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길을 떠나야 해요. 난 내 식대로 살고 싶어요.-저도 스스로 선택해서 살아가고 싶어요. 근데 그게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 같아 두려워요. 그래서 실천 못하고 피할 것도 같아요.
- 그게 알을 깨는 건지는 알겠는데요. 알을 깨고 나오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너무 힘들어요. 중간에 죽을 수도 있고.
- 내가 나의 본성대로 선택한 것인데 남의 인정이 왜 필요해? 사회적인 인정은 필요 없잖아. 어떤 게 정말 가치 있는 삶인지는 자기만 아는 건데. 그렇죠?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우리 삶의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선택의 자유를 스스로 반납한 채 타자에 의해 구획되고 규정된 남의 세계 속에서 손님처럼, 혹은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수업은 이런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 그리고 싱클레어를 따라가는 '나에게로의 여정'은 멀고도 힘들었다. 몇 달 앞으로 다가온 입시 때문에 마음이 급한 아이들은 책을 깊이 있게 읽어오지 못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이상적인 자유와 현실적인 제약의 괴리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세 시간이 넘도록 함께 고민하고 토론한 질문들은 아이들의 조용하던 내면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모든 것에 대한 치열한 물음을 던지는 것, '카인의 표적'을 얼굴에 뚜렷이 새기면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고유한 길이며, 진정한 자아의 실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깨고 나오는 고통 속에서 홀로 자신과 맞설 때 가능하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지루하고 힘든 수업에 기꺼이 참여하여 놀라운 자기 성찰을 보여준 나의 학생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너희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기쁘고 벅찬 시간이었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