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살림 글살림

|이선희 해오름평생교육원 전임강사|

참된 세상을 추구하는 이야기(2)

다시 새벽에 길을 떠난다

제 몸을 때려 울리는 종은
스스로 소리를 듣고자 귀를 만들지 않는다

평생 나무와 함께 살아온 목수는
자기가 살기 위해 집을 짓지 않는다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서 기도하는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우리들, 한 번은 다 바치고 돌아와
새근새근 숨쉬는 상처를 품고
지금 시린 눈으로 앞을 뚫어 보지만
과거를 내세워 오늘을 살지 않는다

긴 호흡으로 흙과 뿌리를 보살피지만
스스로 꽃이 되고 과실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내일이면 모두가 웃으며 오실 길을
오늘 젖은 얼굴로 걸어갈 뿐이다

다시
새벽에 길을 떠난다
참 좋은 날이다

-박노해 산문집 『오늘은 다르게』-

태풍이 한 차례 지나갔습니다. 사람에게 태풍은 피해를 줄뿐이지만, 자연에게 태풍은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태풍은 바다 속을 헤집어 위아래를 뒤섞고, 숲 속의 노쇠한 나무들을 쓰러뜨려 새 나무들이 자랄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사람들이 일으킨 세상을 정화시킬 태풍이 한 차례씩 옵니다. 무언가 잘못된 흐름으로 세상이 나아가고 있을 때 당장은 그 잘못된 흐름이 마치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때가 되면 다시 올바른 쪽으로 흐름을 바꿔 놓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우리 역사에는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때론 혼자 힘으로, 때론 결속된 힘으로 역사의 물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오늘날 우리 세상을 만들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진실과 정의, 평화와 평등이 있어야 할 세상에 여전히 거짓과 불의가 있고, 폭력과 차별이 있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세상에 회의를 갖고 어른들에게 불신을 갖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공부만 잘 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옳은 일 앞에 용기 있게 행동하는 것은 이다음에 그 일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맡기면 된다고 합니다. 공부를 잘 해서, 좋은 성적을 얻어서, 좋은 대학을 가서, 좋은 직장을 얻어,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한 평생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꿈인 요즘 세대들에게 옳은 것, 용기 있는 것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누군가 당할 대로 당한 사람이, 누군가 못 참는 사람이 두 주먹 불끈 쥐고 나서지만 이내 무관심에 소외에 잊혀져 가는 진실 투성이들…….  
정의로운 세상을 갈구하는 아이들에게 바른 세상을 위해,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위해 일한 사람의 본을 보여주는 것은 여러 모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지금 세상은 앞으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살아갈 세상의 모태가 되고, 그때 아이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잉태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순을 알고, 그 시대가 해결해야 되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며,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사회와 개인의 관계가 무엇이며, 그 속에서 자기실현과 사회적 과제의 실천 문제가 서로 어떻게 융화되며 조화롭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지 보여줍니다.

모순의 인식
우리 사회에는 많은 모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순의 정점에는 차별이란 코드가 있습니다. 요즈음 『배워서 남주자』에 실리고 있는 다양한 인권 수업의 사례들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차별의 코드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엔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우선 얼굴 생김생김도 다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살고 있는 곳도 다르고, 관심이 있는 것도 다르고, 가진 것도 다르고, 배운 것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고……. 차별이란 이러한 차이 '다르다'를 존중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처음엔 '좋다, 싫다' 혼자 생각하지만 이내 '나와 같다, 같지 않다/내 편이다, 네 편이다'에서 나와 같으면 '옳다', 나와 다르면 '틀리다'가 되어 버리는 세상. 근대 시민혁명의 모델이 된 프랑스 혁명의 기본 이념은 자유, 평등, 박애이지만 이런 이념들이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실현되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 어느 한 곳에서는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을 극복하려고 노력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들이 정작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식의 인식입니다.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의 인식에는 큰 차이가 있겠지만 초등학생의 경우 대개는 감정적인 오류를 많이 범합니다. 장애인의 현실에 대해 공부하고선 '그래도 장애인은 무섭다'거나, 왕따 현상에 대해 공부하고선  '당할 만하니까 당하지'라거나, 가난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공부하고선 '난 절대 그런 일 없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들을 보면 사회적 인식을 갖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겐 현재의 인식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이들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참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아이들은 지금 배우는 것들을 마치 씨앗처럼 자기 안에 심어둔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수도 있고, 세상이 변하면 바뀔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이 세상을 나보다 먼저 진실 되게 산 사람의 삶을 통해 자기 삶을 이끌어줄 지혜의 가치를 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차별의 세상
이번 인물 이야기에서는 마틴 루터 킹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마틴 루터 킹은 다들 알다시피 흑백 인종 차별을 뿌리뽑기 위해 노력하다가 끝내는 암살 당한 사람입니다.
마틴 루터 킹의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미국에 흑인이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의 길』이란 책은 흑인들의 삶과 역사, 정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작가 줄리어스 레크터와 노예를 주제로 7년 동안 그림을 그려 전시한 화가가 만든 책입니다. 1518년에서 1865년까지,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북아메리카 동해안까지, 그들이 단지 아프리카 사람이란 이유로 노예가 되어 짐승처럼 부림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깜둥이(니그로)였고, 그들은 대대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이 책의 그림들은 우리가 흑인 노예들에 대해 그저 그런 식으로 알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 그들의 절망, 그들의 자유에 대한 갈구를 영혼 깊숙이 느껴보길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림9쪽)

'칠흑처럼 어두워. 아버지는 어디에 있지? 어머니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나 있을까? 왜 나를 데리러 오지 않는 거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나 할까?'

'볼 일도 누운 채로 보아야 했어. 위에서 똥오줌이 내게로 흘러내렸고, 내 똥오줌은 밑으로 흘러내렸어. 냄새가 진동했고, 그만큼 증오도 커졌어.'

'내 손목과 발목은 양쪽 사람과 쇠사슬로 묶여 있어. 일어설 수도 없고, 몸을 돌릴 수도 없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이 사람에게 이런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옭아매는 쇠사슬을 끊고 목숨을 걸고 도주했고, 자유를 위해 투쟁을 했으며, 남북 전쟁 때는 직접 최전선에 나가 싸워가며 드디어 자유를 쟁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인권적 자유는 헐값인 그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미국 사회 안에서 여전히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미국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미국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미국 인구의 비율을 보면 대략 흑인은 전체 인구의 12%를 차지하지만 인디언은 0.8%에 불과합니다. 노동력이 강한 흑인 노예들은 살아남았지만 면역력이 약한 인디언들은 백인의 학살과 전염병으로부터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참고도서: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나무심는사람)

모순을 해결하려 노력한 사람들

1. 로자 팍스
『사라, 버스를 타다』는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선구자 로자 팍스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1955년 그녀는 몽고메리 시에서 버스를 탄 뒤 자리 양보를 거부하고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흑인들이 자유를 얻었다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차별의 정책이 남아 있었습니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 이후에도 '짐 크로우'같은 흑백 분리 정책은 흑인들을 여전히 열등 인종으로 대우했습니다.
로자 팍스는 체포되고, 이때부터 '몽고메리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이 시작되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 운동을 이끌어 381일 동안 지속되었고 나중에 킹 목사는 이 일로 인해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몽고메리에서 버스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혐의로 체포된 것은 로자 팍스가 처음은 아니지만 그녀는 법에 도전함으로써 사회를 바꿔 나갔던 것입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로자 팍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나는,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지를 아주 일찍부터 배웠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지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힐지라도,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을 지켜 나가야 할 때가 인생에서 한 번은 꼭 온다고 말입니다.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들이 버스 앞자리에 앉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버스를 잘 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꼭 어디를 가야 할 때면 걷는 게 더 좋았습니다. 이등 시민으로 취급받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요.
1955년 12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버스를 탔을 때, 사람들은 저에게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거절했지요. 그런 법이야 어떻게 만들어져 왔든 나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나라에서 나를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지 않는 법에 나는 신물이 났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때부터 우리는 오랜 길을 걸어왔으며, 앞으로도 먼 길을 가야만 합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지금, 나는 우리 모두가 자유를 위한 싸움을 계속해 나아가리라는 위대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자신감을 갖고 옳은 것을 위하여 당당히 맞설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이 책을 읽으며 과거를 되새기고, 모든 이들을 위하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데 힘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림)

2. 마틴 루터 킹
마틴 루터 킹은 흑인이었지만 존경받는 목사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하지만 미국 사회에서 흑인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은 그가 가진 재력이나 학식, 명예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서히 인종 차별에 눈을 떴고 때가 되어 일어섰습니다. 그에게는 준비의 과정이 있었고, 수많은 반대와 협박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흑인이었기에 미국 사회에서 부당하게 대접받는 흑인들의 권리를 위해 나섰습니다. 그의 투쟁의 시작은 피부색에서 비롯되었지만 그의 투쟁의 마감은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바탕으로 하고있습니다.
먼저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노예의 역사, 남북전쟁, 링컨 등을 설명하면서 인종차별의 문제를 상기시켰습니다. "너 자신이 누구에게도 뒤진다는 생각을 하지 말거라. 언제나 너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어머니의 이 말은 킹에게 자신감과 더불어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대학 시절 그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에서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읽은 그는 이것이야말로 흑인 민권 운동의 원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그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간디의 비폭력 사상이었습니다. 폭력은 더 많은 미움과 폭력을 낳을 뿐이고, 육체의 힘에는 영혼의 힘으로, 미움에는 사랑으로 맞서라는 간디의 사상은 어린 시절부터 가져온 백인을 미워하는 마음을 씻어주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어 훌륭한 설교를 많이 하였고, 그의 설교의 중심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위엄과 사랑을 가지고 용기 있게 싸운다면 미래의 역사가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사람들이 있었다'고 쓸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렇게 투쟁함으로써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었다'고 평가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몽고메리에서 시작된 흑인들의 민권 운동은 이제 앨라배마 주를 거쳐 미국 남부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어린이들까지 소년 십자군을 만들어 행진에 참가했고, 흑인 민권 운동의 중심에 킹 목사가 있었습니다. 수 차례 감옥에 갇히기도 한 그는 마침내 1963년 워싱턴까지 평화행진을 하며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였고 다음 해 35세의 나이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차별을 넘어서
10년 동안 인종 차별의 벽과 싸워오면서 그는 흑인들의 고통이 단순히 피부색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인종 차별은 미국 남부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었지만, 가난은 미국 전역 어디서나 흑인을 포함한 소수 민족이 공통으로 겪는 아픔이었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별은 배고픔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절망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종종 폭동 사태로 야기되었습니다. 시카고의 빈민가로 직접 이사해 그들과 삶을 함께 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에게 가난이란 구조적으로 풀 수 없는 사회악이었던 것이지요.
시카고 빈민 운동의 경험으로 그는 미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1967년 4월 끊임없이 죽고 죽이는 전쟁,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야만적 행위, 전쟁에 미쳐 돌아가는 미국 사회에 그는 비난의 연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격분하며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연방수사국의 뒷조사를 받기도 하고 수많은 위협을 받았지만 그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동에 옮겼습니다. 그는 자기의 죽음을 예견한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나를 위해 긴 장례를 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긴 조사도 말아 주십시오. 또 내가 노벨상 수상자라는 것과 그 밖의 300여 개의 상을 탄 사람이라는 것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요. 나는 그 날, 마틴 루터 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했으며 전쟁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기 위해 애썼으며 인간다움을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 몸 바쳐 왔음이 기억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는 흑인 청소부들의 파업을 지원하러 멤피스에 갔다가 결국 총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비폭력을 호소하였습니다. 1986년부터 미 의회는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고, 그가 죽음을 당한 멤피스 모텔은 지금 민권박물관(Civil Rights Museum)으로 명명되어 흑인 민권운동의 역사와 사건의 전말에 대한 기록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미국 카톨릭교회 주교들은 2000년 1월, 교황에게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시민운동의 선구자로서 순교자로 천거하고, 교황청은 마틴 루터 킹을 "20세기 신앙의 증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내 안의 차별, 우리 안의 차별
우리가 인물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 인물의 삶에서 나의 삶에 적용할 가치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는 데 그친다면 단지 지식이나 정보의 차원에 머무르고 마는 일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은 그 사람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고, 그 의미가 나에게 어떻게 내면화될 것인지 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불의가 만연해도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 이익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이들의 내면에 정말로 옳은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아이들의 내면에 이런 것들이 가득 차 있을 때, 이다음에 그들이 주역이 되면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의 삶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점이 많습니다. 그의 평전을 보면 그에게도 인간적인 약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간 사람입니다. 내 안의 모순은 무엇입니까? 사회의 모순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모순을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모순의 내면에 차별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옆의 사람을 나보다 못 배웠다고, 좁은 평수에 산다고, 생각이 좀 다르다고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까지 가기엔 너무도 멀지 않은지, 아니면 가슴도 느끼지만 손과 발은 여전히 까딱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아는 대로 산다면, 앎과 삶이 일치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좋은 곳이 될까요? 내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요? 내가 꿈꾸는 세상을 이루려면 지금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모순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속에 숨은 차별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실타래를 풀듯 풀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을 때 안마사의 일자리를 잃은 시각 장애인들은 한강 다리 철탑에 매달려 있었고, 내 땅 지키겠다고 한 대추리 주민들은 경찰 곤봉 앞에 서있었으며, 코시안 아이들은 동네 골목에서 놀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안의 차별을 없애고 차이를 인정할 때, 우리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의 묘비에는 "마침내 자유를, 마침내 자유를, 주여 감사합니다. 마침내 자유를 얻었나이다"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자유란 무엇일까요? 『자유의 길』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자유, 자신과 자신이 살아온 시간에 책임을 지는 일.
자유, 자신을 인정하는 일.
자유,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 되는 일.
자유, 어떻게 지켜 가야 할지 지금도 배워야 하는 일.

『갈매기의 꿈』에서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새로운 배움을 원하는 갈매기들에게 "나는 것은 갈매기의 권리이며 자유는 갈매기의 본질이다. 자유를 방해하는 것은 의식이나 미신, 혹은 한계 등 어떤 형식이든 간에 그것을 파기하라"라고 가르칩니다. 마틴 루터 킹은 자유를 속박하는 모든 것과 맞서 싸우며 마침내는 자유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 내 몫을 다하고 삶을 마감했을 때, 내 묘비에는 어떤 말이 쓰여 있기를 바라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