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여는 논술 수업

아주 특별한 인권 이야기
- 『별별 이야기』로 인권 수업 풀어가기

이해진 | 논술교사

언제나처럼 그릇에다 계란을 가득 담아 가지고 아이들에게 들어갔습니다.
'와 !! 선생님 그거 삶은 계란이에요?'
'저희 주실 거예요?' '맛있겠다.'
먹으라고 가져온 게 아닌 걸 알게 된 순간부터는 아이들의 조그만 생각 주머니가 더욱 복잡해집니다.
'그럼 뭐하실 거예요?' '계란 가지고 게임 하나요?'
'요리 수업 할거죠? 그죠?'
인권 수업 첫 시간이면 항상 벌어지는 풍경입니다. 아이들에게 크기와 무늬가 거의 같은 계란을 하나씩 고르게 한 뒤 딱 10초만 관찰하게 하지요. 그런 뒤 그 계란들을 계란 더미 속에 다시 섞어 놓는 거죠. 그리고 10초 전 자신이 고른 계란을 찾아내게 하는 거예요. 언뜻 보기에 아무런 개성도 없고 똑같아 보이는 계란이라도 딱 10초만 살펴보면 그 계란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실제로 계란을 골랐던 아이들 중 단 한 명도 자신의 것을 찾지 못했던 아이가 없었어요. 아이들은 그저 밥 반찬이나 간식으로만 알았던 계란이 이토록 천차만별의 껍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지요. 세상 모든 만물은 그것이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하나 하나 모두 귀한 거라는 말을 입으로 떠들어대지는 않았어도 계란을 만지작거리던 아이들의 눈망울 속에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을 읽어낼 수는 있었어요.
별 볼 일 없어 보여도 알고 보면 특별한 계란 아니,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게 해서 시작됩니다. 인권 이야기의 시작인 거지요. 다들 자기만의 생명을 부여받은 채 태어난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라는 게 '인권'의 출발점이라는 거구요.
지금부터 소개할 애니메이션 『별별 이야기』 속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사실 우리가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이야기들입니다. 장애인, 여성 차별, 왕따 문제, 외모 지상주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 획일적 학교 교육과 학벌 제일주의의 문제점 등등. 어떻게 해서든 한 번씩은 건드려 보았음직한 주제들이라는 거죠. 아이들도 시들해 할 수 있는 이야기구요. 그런데 여섯 개의 단편을 차근차근 보다 보면 소름이 끼치도록 절실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된 원인은 아이들이나 저나, 모두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언젠가 한 번쯤은 체험해 보았을 일종의 '현실성'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이야기는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인지하는 순간 생생하고도 특별한 이야기가 되는 거죠.
이 글을 통해 소개하려는 단편 애니메이션은 인권이라는 딱딱하고 무거운 주제가 '남의 이야기'가 되지 않고 매번 우려먹는 별 볼일 없는 이야기로 전락하지 않게 하고자 만들어진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풍부하고도 상징성 있는 표현과 재미있는 해석을 통해 하나 하나의 작품 모두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거든요. 그런 재미와 감동을 배가시키면서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발문도 몇 가지 소개해 볼까 합니다. 단편의 소재에 따라서 초등 1학년 이상 고등학생까지도 활용이 가능할 것 같네요. 그래서 각 작품별로 활용하면 좋을 만한 학년을 써넣었습니다.

1. 『낮잠』
유진희 감독 / 13분 / 초등 1학년 이상

◇ 줄거리

푸르고 아름다운 하늘에 펄럭이는 빨래가 보이는 평화로운 집입니다. 손가락과 다리가 없는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낮잠을 자고 있네요. 아버지가 돌아 누우면 딸도 돌아 눕고 아버지가 긁적이면 딸도 그렇게 하는군요. 쌍둥이같이 사랑스러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수영장에 가니 아이의 모습에 놀란 엄마들이 아이를 도깨비 보듯 하는군요. 버스 정류장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를 태워주는 차가 없습니다. 유치원에서는 아이의 등원을 모두 거부하고, 유일하게 오라고 손짓하는 곳으로 가려니 계단이 높아 오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팔아 아이의 의족을 사주지요. 그것을 끼고 걷던 아이의 눈에 쓰레기장에 버려진 작은 강아지가(그 역시 기형인) 눈에 뜨입니다. 아이는 강아지를 데리고 와 함께 낮잠을 자고 새로 이사할 집을 구한 엄마가 돌아와 선풍기를 켜 줍니다.

◇ 내용 이해와 발문

낮잠 자는 부녀의 모습은 가슴 아픈 사랑스러움, 가슴 아픈 평화로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낮잠이 가지는 '휴식'의 의미가 전쟁 같은 일상과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었거든요. 도전과 좌절로 점철된 하루의 삶 속에서 장애를 가진 딸과 아비는 평화와 휴식을 꿈꾸지 않을 수 없었을 테지요. 내내 겪어야 했을 차별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낮잠 자는 그들의 모습이 그토록 평화롭고 안온한 것이 오히려 가슴 아팠던 것도 그래서였지요.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닌 듯 했습니다. '낮잠'이라는 장치를 통해 이 이야기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똑같은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딸의 아픔을 한 몸처럼 나누는 아버지의 존재감도 느껴지게 되었구요. 게다가 낮잠을 통해 이들 부녀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인권을 존중받고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꿈이지요.
세상을 향한 소통이 단절된 아이가 가족 이외의 존재를 처음으로 보듬게 되는 것이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던 강아지입니다. 차별 받던 아이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아이가 자신의 고통에만 연연해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내적 성장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작품 내내 보이지 않던 엄마의 목소리가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엄마는 지친 아버지와 아이의 낮잠에 신선한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마당 넓은 집을 새로 구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지요. 싸움과 휴식, 단절과 소통 속에서 갈등을 반복하던 스토리는 마침내 엄마의 부드럽고 따듯한 목소리로 희망적인 결론을 내고자 합니다. 그 희망이 또 똑같은 고통을 되풀이하게 하는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게 당신들의 할 일이라는 듯이 말입니다.

1. 수영장에서 만난 엄마들은 아이의 모습을 보고 놀라며 자기 아이들을 데려가네요. 엄마들의 마음을 이야기해 볼까요?
2. 자신을 괴물보듯 하는 사람들 속에서 아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3. 아버지와 아이는 낮잠을 자네요. 낮잠은 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나요?
4. 버스랑 택시가 아이를 태워주지 않네요. 자신이 교통부 장관이라고 생각하고 대책을 한 번 말해 볼래요?
5. 유치원에서도 마찬가지네요. 아이의 등원을 거부하는 유치원 원장 선생님을 설득하는 편지를 한 번 써 보는게 어떨까요?
6. 강아지를 본 아이가 '어? 나랑 똑같네.' 그러지요. 하지만 아이랑 강아지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어요. 둘의 상황을 비교해 보세요. 그리고 아이가 강아지를 보듬어주게 된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말해 보세요.

2. 동물농장
권오성 감독 / 15분 / 초등 3학년 이상

◇ 줄거리

농장에는 희고 탐스러운 털을 가진 양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농장 밖에는 염소가 한 마리 살고 있었구요. 털도 없고 까칠한 몰골에 뿔까지 삐죽이 달린 염소는 농장 안을 들여다보며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규칙적인 식사와 따듯한 잠자리가 보장되어 있는 농장 안이 마냥 좋아 보였거든요. 하지만 농장으로 들어가 양들의 음식을 먹으려 하던 염소는 우두머리 양에게 참담하게 폭행을 당해 쫓겨나고 맙니다.
고민하던 염소는 흩어져 있는 양들의 털을 주워 모아서 뜨개질을 하지요. 양들처럼 꾸미기 위해 양털 옷을 만드는 거예요. 게다가 양들과 달리 삐죽 솟아 있는 뿔을 눈물을 흘리며 잘라 내기까지 합니다. 처음에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자리를 내주던 양들이 염소가 가짜 양임을 발견하자마자 다시 쫓아내고 마네요. 낙심한 염소는 나뭇가지에 목을 매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한 대의 차가 도착하고 소, 오리, 닭 돼지 등의 동물들이 내립니다. 동물농장에서 함께 살려고 온 친구들이죠. 염소는 그들과 자연스레 합류하게 되고 어린 양과도 친구가 되어 잘 살게 됩니다.

◇ 내용 이해와 발문

닭장 속에는 암탉이
문간 옆에는 거위가
대나무 밑엔 염소가
외양간에는 송아지

작품 말미에 들려오는 노래의 가사가 여느 때 부르던 노래와 참 많이 다르게 느껴졌던 작품이었습니다. 어쩌면 총 쏘고 피 흘리고 사람을 죽이는 헐리우드 영화보다 훨씬 더 잔인한 영화였던 것도 같았구요. 염소라는 자신의 존재 조건을 스스로 원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닐텐데 그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소외는 너무도 잔인하군요.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당위로 받아들이면서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 암묵적 제약들이 개인에게는 얼마나 끔찍한 소외의 굴레로 다가오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제약이 얼마나 임의적인 것이며 한 순간에 쉽게 깨져 나갈 수 있는 것인지도 말이지요.
우두머리 양의 폭력에 대해 다른 양들은 침묵으로 동조하고 있지요. 그들에게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를 거부할 힘도, 또 그래야만 한다는 의식도 없었던 것입니다. 염소에게 친밀감을 표시했던 어린 양이 한 마리 있었지만 그는 어른들의 제지에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지요. 결국 그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고한 염소 한 마리를 죽음으로 내 모는, 끔찍하도록 잔인한 행동을 하고 있었던 거지요. 작품 속에서는 염소가 죽기 직전 큰 변화가 있어서 목숨을 구하게 되는 행운이 따르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더 많지요. 급우들의 따돌림과 그에 따른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어린 영혼들이 생각나네요. 최근 일어난 프랑스 소요 사태(참고1)나 호주에서의 폭력 사태(참고2)도 이런 문제점들이 노출된 것일 테지요.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권역 안으로 침범하려는 유색인종들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소는 소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돼지는 돼지가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고, 그리고 양이든 염소든 너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편견을 가지지 않는 사회는 과연 불가능한 꿈인 걸까요?

1. 염소가 농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했던 이유들을 생각해 보세요. 제일 절실했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2. 우두머리 양이 염소를 이단옆차기로 쫓아내고 말지요. 쫓아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번호를 붙여서 항목별로 정리해 볼까요?
3. 2번의 답이 몇 가지나 나왔지요?. 이제부터는 그 각각의 항목에다 반론을 달아보세요. 우두머리 양의 논리가 틀렸다는 걸 증명해 보이는 거죠.
4. 차가 도착하고 여러 가지 동물이 농장에 도착하자 이제까지 당연하게 생각되던 일들이 갑자기 모두 바뀌고 말았어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5. 알고 있는 왕따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봐요. 어떤 해결책이 필요할까요?

그 여자네 집
김준·박윤경·이진석·장현윤·정연주 감독 / 11분 / 초등 3학년 이상

◇ 줄거리

맞벌이 부부인 두 사람에게는 어린 아기가 있습니다. 친정 어머니께서 아기를 돌봐 주시지만 어머니가 바쁘시면 아이를 돌보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게다가 똑같이 일을 하는 남편은 집에 오면 온 집안을 어질러 놓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거나 자는 게 전부입니다, 밤중에 깨서 젖 먹이기,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 준비하기, 남편 나간 자리 정리하고 온 집안 청소하기, 아기 맡기기, 직장 다녀와서 저녁밥 짓기, 다시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기, 아이 돌보기, 장보기…. 이 모든 것이 여자만의 할 일입니다. 진공 청소기로 청소를 하던 여자는 집안의 모든 것을 청소기로 빨아들입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변해야 할 일들이라는 듯이. 아무 것도 없는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벽지를 도배하는 그녀는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 내용 이해와 발문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이 밀려드는 일들로 녹초가 되어버린 여자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군요. 남편은 아이와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습니다. 아내에게 뽀뽀도 하고 아이를 얼러 보기도 하는군요. 하지만 아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어떤 도움을 바라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듯 합니다. 이런 작품을 보면서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1. 아줌마가 힘들어 보이네요. 제일 급하게 도와드려야 할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2. 아저씨는 옷 벗어서 쌓아놓는 일만 하네요. 아저씨에게 충고 한 마디만 해 드려 볼까요?
3. 아줌마의 행동에는 문제점이 없나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두 부부가 함께 고쳐 나갈 수 있을까요?

육다골대녀(肉多骨大女)
이애림 감독 / 10분 / 초등 6학년 이상

◇ 줄거리

멀고 먼 옛날 고조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져 내려와 마침내 오달지게 물려받은 막내의 박색은 그녀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암울한 존재 조건이 됩니다, 그녀는 '뼈가 크고 머리 크고, 목이 짧고 거친 곱슬머리는 산발이고, 발목이 어딘지 구별도 안 되는' 자라목 아톰다리의 폭탄, 그 자체입니다.
돈을 벌어오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그녀는 사회에 발을 디디게 되지만 박색의 그녀는 매번 면접에서 떨어지곤 합니다.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숭배로 가득 차 있는 사회에서 그녀는 고통스러운 자의식과 만나게 됩니다. '밥을 굶어 볼까?' '얼굴 성형 수술을 해볼까?' 그녀의 고민은 끝이 없습니다. '정말 이상'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그녀는 '무기(외모, 학벌, 돈 등등) 하나'를 가지기로 결심하지만, 널려 있는 무기들을 보는 순간 '이걸 꼭 골라야 하나'하는 회의에 사로잡힙니다.
그냥 웃고 살기로 결심하는 그녀. 그러나 선조 이래로 항상 간직하고 다니던 그녀의 울화통은 마침내 폭발해 버리고 맙니다. 울화통의 불꽃은 밤하늘의 불꽃놀이처럼 찬란히 터지고 그것을 바라보던 손녀는 예쁘다는 탄성을 지릅니다. '
할머니가 잘 살았냐는 손녀의 질문에 손녀의 어미는 '어땠을 것 같니'라고 대답을 합니다.

◇ 내용 이해와 발문

풍자적이고 날카로우며, 웃음을 자아내지만 씁쓸합니다. 고통스럽고 안쓰럽지만 어찌 보면 또 그게 다가 아닌 것도 같군요. 이 작품은 독특한 그림과 유머러스하고 풍자적인 서술 방식으로 강한 인상을 주고 있었습니다. 근거 없는 낙천주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구원의 여지가 없는 비관주의도 아닌 결론이 작품 내부에 스며들어 흐르고 있었는데 그게 또한 신선한 충격이었구요. 살찌고 통뼈인 여자를 한자 조어로 만든 제목조차도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포드시스템처럼 보이는 얼짱 몸짱 대량 생산 시스템 속에서 우리의 막내가 설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막내가 올라가는 감옥 같은 계단 뒤로는 폭탄, 이른바 얼꽝 몸꽝들이 하늘로 승천하고 있군요. '내가 그렇게 이상한가?'하는 막내의 자문에는 홈쇼핑 쇼 호스트 같은 목소리의 대답이 지체 없이 돌아 옵니다. '네!'
이쯤 되면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최대의 종교를 '육체 숭배교' 라고 해도 크게 틀릴 게 없는 듯 보이는군요. 삶의 모든 가치는 외모로만 평가되는 듯 합니다. 빠져 나갈 길은 보이지 않는군요. 고조, 증조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녀의 유산은 정말로 자랑할 게 못되는 것인가 봅니다.
그러나 명제 자체가 틀렸지요. 그녀가 물려받은 유산과 상관 없이 그녀가 받아 나온 생명은 온 우주를 통틀어 유일하고도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개인이 가진 다른 어떤 의미도 드러내지 못하는 외모지향성의 편협함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예쁜 얼굴, 좋은 학벌, 늘씬한 몸매, 돈과 명예…. 그녀는 무기 하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소유하는 건 불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저돌적 페미니스트가 되어 세상과 맞짱을 떠야 할까요? 혹은 패배주의적 순응주의자가 되어 적당히 섞여 살아야 할까요?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모든 것을 초월한 도사가 되어 세상을 완전히 무시하며 살아야 할까요?
그녀의 울화통이 터져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이 되었다는 건 어쩌면 그녀가 '그냥 웃고 살아야지 뭐'하는 순응주의에서 벗어나 무언가 자신만의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울화이든, 작은 속삭임이든, 그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존재 조건에 의해 억압당하기를 마침내 거부하기 시작했을 것 같아요. 혹은 그랬길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르지만요.
오랜 세월 그녀의 집안에서 대대손손 지니고 살았던 울화통 속에서는 오늘도 꼬물거리는 갓난아이가 기어나오고….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결과가 어땠을 것 같으세요?

1. 이 작품에서는 막내의 박색을 이야기하려고 그녀의 고조 할아버지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굳이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뭘까요?
2. 그녀의 울화통이 터지면서 나오는 불꽃이 어린 손녀에게는 예쁘게 보입니다. 그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3. 외모로 개인의 가치를 판단하는 사회가 부딪힐 수 있는 문제점들을 생각해 보세요. 일등, 이등, 등수를 매겨보아도 좋겠구요.
4. 진부하지만 뒷 이야기를 한 번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의 박색 막내가 이후로 어떻게 살았을까요?
5. '나도 막내 못지 않아' 라고 고민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런 고민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지 함께 토론해 보세요.

자전거 여행
이성강 감독 / 10분 / 초등 5학년 이상

◇ 줄거리

풀밭에 쓰러져 있던 자전거가 타는 사람도 없이 저절로 일어나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동네를 천천히 도는 자전거를 보며 할머니는 '어디 갔다 인제 나타났냐'고 하고, 아이는 숨고, 강아지는 멍멍 짖습니다. 자전거는 버스를 지나쳐 골목을 돌아가서는 예쁜 아가씨를 뒤에 태우고 날 듯이 달립니다. 공장에 들르자 사장이 욕을 합니다. 열 달치 월급을 안 받았다고 하소연하는 주인공을 '빨갱이 짓 한다'고 몰아세우며 발로 차 버립니다. 불법체류자 단속을 나온 경찰에게 쫓기던 주인공은 자전거를 타고 달아나려고 하지만 지나가던 트럭에 부딪혀 목숨을 잃습니다.
꿈 속처럼, 아가씨가 이야기합니다. '너에게 네팔의 하늘을 보여주고 싶어.'

◇ 내용 이해와 발문

아름답고 몽환적인 그림,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섬세한 묘사가 첫 장면부터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아무도 타지 않은 채 움직이는 빈 자전거는 보는 이를 조용히 인도하면서 섬뜩하리만치 고통스러운 체험을 하게 하지요.
자전거 여행은 지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시간 여행입니다. 되돌리고 싶은 시간을 보여주지만 그 시간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지요. 열 달치나 밀린 월급을 돌려받고 싶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싶었지만 모든 것은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 속의 일일 따름인 거지요. '빨갱이, 불법체류자, 머리 나쁜 놈'이라는 언어 폭력과 실제로 행해지는 학대는 외국인 노동자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불행한 연인들이 그리는 '네팔의 하늘'은 차별과 학대가 없는 평등한 하늘이 아니었을까요?
작품 속에서 자전거라는 소재가 가지는 상징성은 만만치 않습니다.
첫째, 자전거에도 표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힘겹게 일어설 때, 신나게 애인을 태우고 달릴때, 공포와 두려움을 느낄 때…. 그럴 때마다 자전거는 마치 사람처럼 자신의 느낌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합니다. 주인공의 영혼이 덧입혀진 자전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전거에 투영된 그의 영혼은 지난 날을 뒤돌아보면서 고통스러운 회한에 잠기고 있는 듯 합니다.
둘째, 자전거는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유일한 도구가 되어줍니다. 그는 자전거 뒤에 연인을 태우고 아름다운 네팔의 하늘을 꿈꾸며 잠시나마 행복에 잠길 수 있었지요. 삶의 의지와 희망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면 그건 바로 자전거 위에서의 행복했던 기억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셋째. 운명을 맡긴 자전거, 탈출에의 의지가 담긴 자전거라는 의미가 중요하게 드러나는군요. 그는 가장 다급한 순간에 자전거에 자신의 운명을 맡깁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전거는 거대한 트럭에 부딪혔을 때 그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길바닥에 쓰러진 그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너무도 선연해서 잠시 무슨 생각을 해야할지 망연자실했습니다. 차라리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아야 하는 건 아닐까요? 도대체 무엇부터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 걸까요?

1. 자전거는 주인공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2. 자전거가 트럭에 치이네요. 트럭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나요?
3.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내용은 『국경 없는 마을』, 『악어 클럽』등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지요. 이런 책들을 읽고 함께 토론해 봐요.
- 외국인 노동자들은 어떻게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을까요?
- 그들을 차별하는 이유는 뭘까요?
-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이 있을 수 있을까요?
4. 주인공에게도 가족이 있었겠지요? 그들의 느낌을 생각해 볼까요?

먼저 사람이 되어라
박재동 감독 / 13분 / 중학생 이상

◇ 줄거리

고등학생인 주인공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학교에 다니는 고릴라 학생이지만 성적은 형편 없어서 항상 아버지의 꾸중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는 곤충을 기르는 것을 너무도 좋아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자신이 기르고 있던 장수풍뎅이를 학교에 가지고 갔다가 복장 검사를 하는 선생님에게 들켜버리고 맙니다. '그런 거 키우는 건 시험에 안 나와' 라는 말과 함께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장수풍뎅이. 그는 다시 성심성의껏 애벌레부터 장수풍뎅이를 키우기 시작합니다.
어느날 장수풍뎅이를 따라 신비한 숲으로 들어가게 된 주인공은 그곳에서 곤충들과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렇게 힘든 학교를 왜 가냐는 질문에 주인공은 '사람이 되려고 학교에 간다'는 대답을 하지만 계속 대화를 하는 도중 자신이 잘못된 게 아니며 이미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짜 사람이 되어 학교에 등교한 주인공을 친구들은 환호하지만 선생님은 오히려 화를 냅니다. '왜 허락도 없이 벌써 사람이 되어버렸냐'는 거지요. '사람은 대학에 가서 되는 거'라는 말에 주인공은 '지금 사람이 되고 싶고 지금 행복하고 싶다'고 답합니다. 숲으로 도망친 그를 잡아가려고 범죄자 소탕작전을 방불케 하는 대대적인 작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아버지가 그에게 호소합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자신도 아직 사람이 아니었노라고, 이 사회에서 대학에 못 가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주인공은 다시 고릴라로 변하고 '먼저 사람이 되어라'라는 팻말이 높이 붙어있는 학교로 걸어 들어갑니다.

◇ 내용 이해와 발문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주인공에게 '아직 사람이 아니다'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있는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요? '사람이 돼라' 라고 말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안된다'고 규정하는 존재는 누구인거지요? 사람은 대학교에 가서 되는 거다 라고 강요하는 주체, 그 주인공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건 이미 차별을 받으며 자라나 그것이 내면화 되어버린 기성세대, 혹은 학벌 중심주의와 대학 만능주의에 물든 이 사회 전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나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주어진 것, 강요된 것, 이미 그렇게 있어서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것일 따름이지요. 맨 얼굴이 아니라 가면이고 진짜 나가 아니라 거짓의 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 속에는 절대로 '나'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거짓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행복하고 싶다는 말, 지금 사람이고 싶다는 외침은 차라리 절규로 들립니다. 대학 나오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아버지의 외침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입니다. 이 두 외침은 영원히 평행선을 그으며 만나지 못할 것처럼 보이네요. 주인공이 다시 고릴라가 되어 학교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한숨을 쉬고 답답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평행선을 만나게 할 수는 없을까요? 방법은 없는 걸까요?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바라보면 혹시 답이 나오지는 않을까요?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답이 아니라면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려야 할까요?

1. '먼저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은 어떤 점에서 옳고 어떤 점에서 틀린가요?
2. 아버지도 아들도 별로 잘못한 게 없어 보이는데 몹시 큰 고통을 받고 있군요. 무엇이 문제인가요?
3. 주인공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열심히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으려면 가장 먼저 무엇이 변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무엇이 변해야 하나요?
4. 담임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참 많네요. 함께 이야기해보고 그 내용을 연극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참고자료

1. 프랑스 파리 소요사태
2005년 10월 27일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경찰을 피하던 10대 소년 2명이 감전사한 사건과 관련해 저소득층 젊은이들의 소요사태가 확산되었다. 시위대들은 화염병을 던지고 쓰레기통과 차량에 불을 질렀으며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맞섰다. 특히 이러한 소요사태는 사건이 발생한 클리시-수-부아에 그치지 않고 이웃 도시인 세브랑과 봉디 등으로 번져 규모가 점차 확산되었다.
이번 사태는 내무장관의 초강경 대응과 맞물려 북아프리카계 무슬림이 몰려 사는 대도시 교외 저소득층 지역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좌파 진영의 사르코지 내무장관은 저소득층 지역의 사람들을 '인간 쓰레기'로 표현하면서 폭동진압 경찰을 증원배치하는 등 초강경 정책을 펴고 있어 정부 내부에서조차 비판이 일고 있다.
소요 사태를 몰고온 근본 원인은 프랑스의 이민정책과 맞물려 쉽게 풀리기 어려운 요인을 안고 있다. 이번 사태는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의 2세인 젊은이들이 주동이 됐으며 이들은 가난을 대물림하면서 학교 졸업 후 취업 등에서 노골적인 차별대우를 받아 오자 그동안 쌓였던 좌절감과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다. 프랑스의 실패한 이민정책을 보여준 것이며 동시에 인종차별이라는 치부마져 드러낸 것이어서 국제사회에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이민자 문제는 비단 프랑스만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 각국의 공통 과제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인접 이탈리아 등에서는 이번 사태가 자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형편이다. 프랑스 소요사태를 일으킨 이민자들이 회교도들이라는 점도 예민하게 받아들여지는 대목이다.
미국의 9.11사태 이후 영국과 인도네시아 등에서 잇따라 터진 테러사건이 회교도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세계는 '테러'라는 새로운 시련에 봉착해 있다. 이번 프랑스 사태가 서방 대 아랍권의 갈등을 자극함으로써 또 다른 테러로 연결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그런만큼 우리는 프랑스 정부와 이민자 공동체가 대화와 타협으로 소요 사태를 조속히 종식시킬 것을 촉구한다. 아울러 유럽 각국이 자국내 이민자 문제에 적극 대응하는 계기가 될 것도 기대한다.
한편 우리 입장에서도 이번 프랑스 사태가 갖는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유럽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한국 내에 거주하는 제3국 인력 또한 이미 숫자 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고 급속한 고령화 저출산 추세를 고려할 때 머지 않은 장래에 외국인 이민까지 허용해야 할지 모른다. 따라서 국내 거주 외국인들이 한국사회와 마찰 없이 융화될 수 있도록 정부 당국은 지금부터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출신 국가에 관계없이 외국인의 인권은 존중되고 그들의 의견은 경청, 수렴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 소요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2. 호주 폭력 사태
2005년 12월 11일 시드니 남부 해안 도시 크로눌라에서 5000여명의 백인 청년들이 인종주의 구호를 외치며 중동계 젊은이들을 폭행하고 자동차 100여대를 부수는 등 유혈 폭동을 일으켰다. 또한 12일 저녁에도 같은 해변에서 폭도들이 야구 방망이 등으로 차량을 박살내는 등 폭력 사태가 번져갔다. 이를 저지하는 경찰들까지도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폭동은 지난 4일 레바논계 갱단이 백인 인명 구조원을 폭행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 지역을 관할하는 뉴사우스 웨일즈 경찰은 11일 폭도들이 술에 취한 채 무전기와 문자 메시지로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조직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고 밝혔다. 이 날 경찰 5명 등 31명이 다쳤고 16명이 체포되었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경찰은 주모자 색출에 나서는 한편 주요 도로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기마 경찰을 파견하는 등 폭동 재발에 대비하고 있다. 최악의 경우 통행금지도 실시할 예정이다. 경찰 당국은 금주 말 코로눌라 해변에서 다시 폭동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문자 메시지가 유포되고 있어서 면밀히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존 하워드 총리는 12일 '인종이나 외모를 보고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야만적 행위라면서 모든 호주인은 그 같은 야만적 행위를 배격한다'고 말했다. 모리스 예마 현지 주지사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이번 폭동을 일으켰다며 맹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