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그 영원한 들어섬
-  세상과 사람의 이야기

이선희 | 해오름 평생교육원 전임강사


다시
해가  
떠오릅니다.

어제의 해는 오늘의 해가 아니고
오늘의 해는 내일의 해가 아닙니다.
어제의 해는 이미 지나가버려 잡을 수 없고
내일의 해는 아직 오지 않아 잡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해가 있는 동안
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를 이루어준 일
나를 이루고 있는 일
나를 이루게 될 일
나는 내가 하는 일 속에 오롯이 있습니다.


모든
일들이 나를 축복해주며
그 안에서 나는 또 다시 새로이 시작합니다.


신화, 세상이 시작되는 새벽의 신비

사람은 계속 ‘오늘’을 사는 존재입니다. 현시적인 존재로 ‘지금,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이루어가며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와 더불어 사람은 통시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미래, 이곳과 저곳, 하늘과 땅, 상상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 삶과 죽음을 역동적으로 오가며 자기 삶을 총체적으로 구성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사람이라는 자기 존재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유를 해왔습니다. 사람을 유한한 육체를 지닌 물질적 존재로 볼 것인가, 영혼을 가진 정신적 존재를 볼 것인가, 조물주가 창조한 것으로 볼 것인가, 원형적 세포에서 진화한 존재로 볼 것인가 등등 다양한 해석은 다양한 현대 철학과 과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사람이 자기보다 초월한 존재에 신비를 느끼며 자기 존재에 의문을 가질 때부터 신화는 시작되었습니다. 문자를 발명하여 역사시대를 열기 훨씬 전부터 이미 사람들에게는 신비스러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신화(Myth)는 그리스의 “뮤토스”란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뮤토스는 이야기를 뜻하는 말인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뮤토스와 로고스를 나누어서, 뮤토스를 ‘지어낸 이야기’나 ‘거짓된 이야기’, 로고스를 ‘진실한 이야기’의 의미로 사용한 것을 보면, 그 당시 사람들도 신화가 실제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믿었던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사실의 진위와 상관없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말과 글로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신화는 원초적인 물음에서 시작하여 현세적인 답으로 끝납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렇다면 사람을 만든 존재가 따로 있을까? 자연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것들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사람은 꼭 죽어야만 할까? 죽지 않고 사는 방법은 없을까? 사람들이 도저히 자기네 힘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신화는 자연스럽게 발생하였습니다.
신화는 우리의 과거로부터 온 모든 존재 의식의 총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화는 오늘날과 같은 세계가 존재하게 된 근거를 제시하고, 사람들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규범을 알려줍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 최고의 철학으로서의 신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신화에 대해 감각의 논리를 구사해 우주 안에서의 인간 삶의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류의 대담한 철학 행위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혼돈에서 질서로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엔 어떤 상태였을까요? 여러 신화에서 공통으로 묘사되는 세상의 첫 모습은 혼돈 상태였습니다. 혼돈 상태는 이 세상의 질서가 자리 잡기 전의 상태입니다. 하늘과 땅이 붙어있고 한 덩어리로 섞여 있는 상태는 우리의 의식이 깨어나기 전의 상태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혼돈의 상태에서 서서히 세상은 질서의 상태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신화의 시작은 마치 인간의 시작과 같습니다.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고 말도 못하던 혼돈의 상태에서 사람도 서서히 이 세상의 질서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창세 신화의 이야기는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이야기해줍니다. 또 옛날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도 보여줍니다. 하늘과 땅이 열리고, 해와 달과 별이 제 자리를 잡고, 세상 만물이 근원을 이루며 질서를 잡으면, 다음 단계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창세 신화 속의 사람은 여러 방식으로 생겨납니다.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 창세 신화와 중국 창세 신화, 또 기독교 창세 신화를 통해 세상이 시작되는 과정과 사람이 생겨나는 과정을 비교하며 이야기해보고 아울러 길가메쉬 서사시를 통해 신이 만든 세상에서 사람이 세상에 맞서 어떻게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가려고 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우리나라 창세 신화

천지가 혼합이었던 시절 하늘과 땅이 구분이 되지 않아
한 덩어리로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천지가 개벽하니
하늘이 먼저 열리고 땅이 열리고 인간세상이 열렸다.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하늘과 땅 사이에
시루떡같이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새날이 시작되니 하늘에서는 파란 이슬
땅에서는 까만 이슬
그 사이에서는 누런 이슬이 생겨 서로 만나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동쪽 하늘에는 파란 구름
서쪽 하늘에는 하얀 구름
남쪽 하늘에는 빨간 구름
북쪽 하늘에는 검은 구름
가운데에는 누런 구름이 뜨고
흘러내린 물은 바다가 되었다.

이 노래는 제주도 큰굿의 첫째 거리인 ‘베포도업침’ 노래입니다.  ‘베포도업침’은 천지개벽에 관련된 많은 신들을 모시는 초감제에서 부르는 노래인데, 굿할 때 맨 먼저 세상이 생겨나게 된 근원을 아뢰기 위해 무녀가 부르는 무가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태초의 세상은 혼돈 상태입니다.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는 어둠의 혼돈에서 어느 날 홀연히 하늘과 땅이 갈라지며 세상이 저절로 만들어지기 시작됩니다. 하늘과 땅은 음양의 조화를 일으키고, 사방에는 오행을 가리키는 오방색 구름을 일으켜 물이라는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고 바다가 됩니다.  

창세가  

1. 하늘과 땅이 생길 때에
   미륵님이 탄생하니,
   하늘과 땅이 서로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여
   하늘은 가마솥의 뚜껑처럼 돋우고,
   땅은 네 귀퉁이에 구리 기둥을 세웠네.

2. 그때는 해도 둘이요, 달도 둘이었으니
   달 하나 떼어서 북두칠성, 남두칠성 만들고
   해 하나 떼어서 큰 별들을 만든 후,
   잔별들은 백성의 직성으로 삼고
   큰 별들은 임금별과 대신별로 삼았네.

3. 미륵님이 옷이 없어, 옷을 만드는데 옷감이 없어,
   이 산 저 산 너머로 뻗어가는
   칡을 파서, 껍질을 벗겨내고 서로 꼬아 잇고 익혀,
   하늘 아래에 베틀 놓고
   구름 속에 잉아대 걸고
   들고 짤깍, 놓고 짤깍 짜서
   칡장삼을 만드니
   전필이 길이요, 반 필이 소매더라.
   다섯 자는 섶이요, 세 자는 깃이더라.
   머리 고깔을 짓는데,
   한 자 세 치를 잘라 지으니
   눈 근처에도 안 내려오고,
   두 자 세 치를 잘라 지으니
   귀 근처에도 안 내려와,
   석 자 세 치를 잘라 지으니
   턱 근처에 내려왔네.

4. 미륵님 탄생했던
   미륵님 시절에는 생식을 하니
   불 안 때고 생낟알을 먹었네.
   미륵님은 섬들이로 먹고
   말들이로 먹다가 말씀하기를,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나 이렇게 탄생하였으니, 물의 근본, 불의 근본,
   나 밖에 없으니, 내어야 하겠다."
   메뚜기를 잡아서
   형틀에 올려놓고
   무릎을 때리며 묻기를,
   "여봐라, 메뚜기야, 물의 근본, 불의 근본 아느냐?"
   메뚜기가 대답하기를,
   "밤이면 이슬 받아먹고
   낮이면 햇빛 받아먹고
   사는 짐승이 어찌 아나.
   나보다 한 번 더 먼저 본
   개구리를 불러 물어 보시오."
   개구리를 잡아다가
   무릎을 때리며 묻기를,
   "물의 근본, 불의 근본 아느냐?"
   개구리가 대답하기를,
   "밤이면 이슬 받아먹고
   낮이면 햇빛 받아먹고
   사는 짐승이 어찌 아나.
   나보다 두 번 세 번 더 먼저 본
   생쥐를 잡아다 물어 보시오."
   생쥐를 잡아다가
   무릎을 때리며 묻기를,
   "물의 근본, 불의 근본 아느냐?"
   생쥐가 말하기를, "내게 무슨 상을 주시겠습니까?"
  미륵님이 말씀하기를, "너는 온 세상의 뒤주를 차지하라."
  그제서야 생쥐가 대답하기를,
"금정산 들어가서 한 손에 차돌 들고,
  다른 손에 시우쇠 들고
  탁탁 치니 불이 났습니다.
  소하산 들어가니
  샘물이 솔솔 나와 물의 근본 됐습니다."
  미륵님이 말씀하기를, "물과 불의 근본 알았으니
  사람에 대해 말해보자."

5. 옛날 옛날에
   미륵님이 한 손에 은쟁반 들고
   다른 손에 금쟁반 들고
   하늘에 축사하니,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져
   금쟁반에 다섯이요,
   은쟁반에도 다섯이라.
   금벌레는 사내 되고
   은벌레는 계집 되었는데,
   은벌레, 금벌레 장성하여
   부부되니
   세상 사람들이 태어났네.
(이후 생략 / 한국의 창세신화 / 손진태 「조선신가유편」에 실려 있다고 함)

이 창세가는 함경남도 함흥 지방에서 불리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보면 하늘은 가마솥 뚜껑 같고 땅은 네모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커감에 따라 세상의 모습을 궁금해합니다. 이 세상은 언제부터 시작하였는지,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하는 모습은 마치 원시 상태의 인간이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듯이 옛날 사람들도 세상에 대해 자기네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도입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태초의 세상의 모습, 우주를 구성하는 것들, 문화의 발달, 만물의 근원, 사람의 탄생, 이후 세상의 갖가지 변화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궁금한 것을 자기네들이 풀어 노래로 부르고 있습니다.
흔히 창세 신화를 보면 사람이 진흙으로 빚어졌거나 아니면 돌멩이에서 나왔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의 창세가를 보면 사람은 특이하게 벌레에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벌레라고 하면 하찮은 존재로 보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미륵님이 하늘에 축사하여 사람이 태어났다고 함은 역시 신의 기원(祈願)에 인간의 기원(起源)을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 금쟁반 은쟁반은 각기 해와 달을 상징하고, 금벌레와 은벌레는 해의 정기와 달의 정기를 상징합니다. 이는 사람이 해와 달의 정기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 벌레가 장성하여 부부가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일시에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된 존재이며, 똑같은 다섯 쌍의 부부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사상을 엿볼 수 있다고도 합니다. 벌레가 장성하였다는 것은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듯 존재가 탈바꿈되었다는 이야기도 될 것입니다. 인간이 처음부터 생명을 가진 존재에서 시작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을 존중한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미륵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보살이 아니라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이라고 보면 됩니다.)

2) 중국의 창세 신화  

태초에 이 세상은 알처럼 생겼고, 그 안에는 혼돈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거기서 거신 반고가 태어나 오랫동안 잠을 자다가 세상의 껍질을 도끼로 깨뜨렸고, 세상은 하늘과 땅으로 나눠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무거운 기운은 가라앉아 땅이 되었고, 가벼운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이 갈라졌지만 하늘과 땅이 다시 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반고는 하늘을 떠받쳤다. 이렇게 18,000년 동안 반고는 하늘을 떠받치며 성장했다. 이러는 동안 하늘은 더욱 올라갔으며, 땅은 굳어져 마침내 둘 사이가 멀어졌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반고는 지쳐 버렸고 쓰러져 죽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몸은 세계를 이루는 데 필요한 많은 것들은 만들었다.
반고의 두 눈은 각각 해와 달이 되었으며, 숨결은 바람, 구름, 안개가 되었고, 그의 목소리는 천둥이 되었다. 반고의 몸뚱이는 산이 되고, 피는 강물과 바다가 되었다. 살과 지방은 기름진 논과 밭이 되었다. 솜털은 세상의 초목이 되었고 뼈와 이빨은 광물과 보석이 되었다. 이렇게 반고는 온몸을 바쳐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여와는 얼굴이 사람이고 몸은 뱀과 비슷한 모습을 한 여신이다. 세상에 아무 것도 없어서 심심했기 때문에 여와는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만들기로 하였다. 진흙으로 자신과 같은 모습을 빚어내고는 그것에게 생명과 인간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하지만 드넓은 천지에 인간을 하나하나 빚어서 만들어 채우는 것은 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와는 흙탕물에 새끼줄을 담갔다가 휘두르는 방식으로 많은 인간들을 만들어 내었는데, 손으로 빚은 인간들은 고귀한 신분이 되었고, 새끼줄을 휘둘러 만든 인간들은 천한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인간이 계속 뒤를 잇게 하기 위해 남녀 성별과 그것으로 후손을 잇게 하는 능력을 부여했다.

중국의 창세신화인 반고신화에서도 세상은 혼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신화에서는 처음 세상이 알처럼 생겼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한 거신이 잠에서 깨어나 세상의 껍질을 깨뜨리고 나와 세상을 엽니다. 하늘과 땅이 서로가 붙으려고 하는 것을 반고가 힘을 다하여 손으로 받쳐 들고, 무거운 것을 발로 밟으면서 자기의 키를 1만 8천년 동안 늘려 천지간의 거리가 9만 리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반고가 하늘과 땅을 고정시킬 때, 용과 봉황, 거북이가 어디선가 날아와 반고의 벗이 되어주었다고도 합니다. 반고는 영원한 잠 속에 들어서도 세상을 위해 계속 일을 해, 마침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이 세상을 완성시킵니다.
반고가 잠든 뒤 여와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진흙으로 사람을 빚기 시작합니다. 중국 신화는 인도 신화처럼 사람의 계급 차이를 설명합니다. 손으로 직접 빚은 사람과 흙탕물에 담갔다가 만들어진 사람에는 신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치 고구려 신화의 주몽이 알에서 태어나듯 신분이 다르게 태어나는 것은 중국같이 넓은 대륙을 다스리려면 높은 신분의  사람이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데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것입니다. 미륵님이 만든 사람들이 저절로 장성하여 결혼하는 것과 달리 여와는 자기가 만든 사람들에게 직접 결혼이 무엇인지 설명해줍니다. 이후 복희씨가 누이동생 여와가 창조한 사람들을 보고 마음이 흐믓하여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잡는 법이며 어망을 짜는 법, 악기를 타는 법과 불을 내는 방법, 마지막으로 글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어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유익한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3) 기독교 창세 신화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그 빛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첫날이 밤, 낮 하루가 지났다.
하느님께서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창공을 만들어 창공 아래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을 갈라 놓으셨다. 하느님께서 그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이튿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있는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나거라!”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마른 땅을 뭍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느님께서 “땅에서 푸른 움이 돋아나거라! 땅 위에 낟알을 내는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 나무가 돋아나거라!”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땅에는 푸른 움이 돋아났다. 낟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났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이렇게 사흗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하느님께서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 밤과 낮을 갈라놓고 절기와 나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또 하늘 창공에서 땅을 환히 비추어라!”하시자 그래도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드신 두 큰 빛 가운데서 더 큰 빛은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은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들도 만드셨다. 하느님께서는 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 창공에 걸어놓고 땅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이렇게 나흗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하느님께서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 다녀라!”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 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지어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이것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새끼를 많이 낳아 바닷물 속에 가득히 번성하여라. 새도 땅 위에 번성하여라!” 이렇게 닷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하느님께서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을 내어라!”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온갖 들짐승과 집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길짐승을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하느님께서 다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도 온갖 푸른 풀을 먹이고 준다.”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이렇게 엿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이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순서는 위와 같았다.
      
구약성서 창세기의 맨 앞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지금도 기독교 사상은 서양의 정신적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하느님이 세상을 만든 이야기는 다 알고 있겠지만, 그야말로 대충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세기의 천지 창조 사상은 사람을 제일 위대한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또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은 참으로 안정적이고 완벽합니다. 오로지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하고,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은 참으로 끌리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잘못 해석하여 사람이 세상을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는 논리가 생겨났습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세상 역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을 까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란 어떤 세상일까요? 사람들이 자기네 논리나 이익에 따라 세상을 마구 지배하는 것이 좋은 세상일까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세상이 될까요? 지금이라도 모든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며 더불어 살기를 배운다면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질서 잡힌 세상에 사람이 만들어져
  
야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 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던 것이다. 마침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시자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
(같은 이야기에 앞에는 하느님께서 엿새째 사람을 만들고, 뒤에는 진흙으로 직접 사람을 빚었다고 나옵니다. 이는 두 이야기가 다른 전승에 의해 전해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성서를 가지고 논란을 벌이고자 함이 아니라 창조의 이야기를 보고자 함이니 그 부분은 서술을 생략하겠습니다.)

열 살 이전의 어린 아이들에게 내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신성을 일깨워줍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만드시고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것은 그저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동물적 존재에서 뭔가 다른 영적인 존재로 격상시켜줍니다. 에덴은 완전한 평화, 삶의 충족이 있는 곳입니다. 부모님 안에서 완전한 보호와 평화를 누리고 사는 아이들의 상태가 바로 에덴의 상태입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종교적 심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을 모아 기도하는 아이들을 보면 하늘의 천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고, 그 세상 안에서 자기들이 사는 것이 매우 만족스럽고 행복합니다. 하지만 이런 낙원에도 간교한 뱀이 있어 유혹에 빠지게 합니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었다.

뱀은 기독교에서는 유혹의 상징이지만, 동양에서는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뱀은 여자에게 열매를 따먹으라고 하고, 여자는 열매를 따서 자기가 먹고 남자에게도 권합니다. 하느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한 것이 원죄가 되어 낙원에서 추방당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고통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 발달 과정에서도 스스로를 낙원에서 추방시키는 시기가 있습니다. 사춘기의 시기가 되면 자기는 이제 선과 악을 구별하는 힘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더 이상 하느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세상을 개척해 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아이들은 두려움 없이 세상에 나아가지만 소극적이거나 우울질적인 성격을 가진 아이들은 세상이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상과 자아를 분리시키기 시작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내쫓기기 전에 하느님은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험난해도 우리에게도 가죽옷이 있을 것입니다.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것, 무엇일까요?
  
삶과 죽음을 넘어서 ; 길가메쉬 서사시

길가메쉬 서사시는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국가 우룩을 다스린 위대한 왕 길가메쉬의 이야기입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보다 약 천오백년 앞선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인간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지금부터 길가메쉬의 행적을 알리노라. 그는 모든 것을 알았고, 세상 모든 나라를 알았던 왕이다. 슬기로왔으며, 신비로운 사실을 보았고, 신들만 알던 비밀을 알아내었고, 홍수 전에 있었던 세상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었도다. 그는 긴 여행 끝에 피곤하고 힘든 일에 지쳐 돌아와 쉬는 중에 이 모든 이야기를 돌 위에 새겼노라.
신들은 길가메쉬를 창조할 때 그에게 완전한 육체를 주었으니, 즉 위대한 태양의 신 샤마시는 그에게 아름다움을 주었고, 폭풍의 신 아닷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그 외의 많은 신들이 그에게 거대한 들소처럼 강한 힘을 주어 보통 사람들을 능가하게 하였도다. 3분의 2는 신이요, 3분의 1은 인간으로 만들었도다.  
(『길가메쉬 서사시』 프롤로그 11-13쪽 / 이현주 / 범우사 중에서)

길가메쉬는 완전한 육체를 가진 인간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미덕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교만하였고 그를 제어하기 위해 신들은 엔키두를 창조합니다.

이제 그의 짝을 만들라.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그의 두 번 째 자아가 되게 하라. 폭풍 같은 가슴엔 폭풍 같은 가슴으로 맞서게 하라. 그들이 서로 만족하여 우룩을 조용하게 두도록.  
(같은 책 18쪽)

두 번째 자아란 무엇일까요? 첫 번째 모습이 완벽한데 왜 두 번째 자아가 필요한 것일까요?
엔키두는 문명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인간이었습니다. 숲 속에서 천둥벌거숭이같이 지내던 그에게 길가메쉬는 신전의 여자를 보내 함께 하게 하였습니다. 엔키두의 머릿속엔 지혜가 자리잡고 가슴에는 인간의 생각이 자리잡게 되자 그는 친구를 바라게 됩니다. ‘옛 것을 부수고 새 것을 세우러 온’ 엔키두와 만나게 된 길가메쉬는 그날부터 새롭게 눈 뜨게 되고 모든 것을 둘이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신들의 아버지, 산악의 엔릴은 길가메쉬의 운명을 정해놓았습니다. 그는 길가메쉬에게 거인 훔바바가 살고 있는 생명의 숲으로 향하게 하고, 길가메쉬로 하여금 훔바바를 죽이게 합니다. 그리고 나선 저주를 내립니다. 길가메쉬가 여신 이시타르의 유혹을 물리치자 모욕감에 여신은 황소를 보내 죽이려고 하는데 엔키두가 그 황소를 죽입니다. 엔릴과 이시타르의 저주를 받고 엔키두가 죽게 되자 길가메쉬는 변하고 말았습니다.
길가메쉬의 뺨은 야위고 얼굴은 어두워졌습니다. 가슴에는 절망을 품고 긴 여행을 마친 자의 피곤한 얼굴을 하고 바람을 찾아 방황하며 들판을 헤맸습니다. 그는 죽음이 무서워졌고, 그래서 죽지 않고 신들과 함께 살고 있는 우트나피시팀의 뱃사공 우르샤나비를 찾아 우트나피시팀을 만납니다.
그는 길가메쉬에게 신들이 벌로 내린 홍수 속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이야기를 해줍니다.

“길가메쉬여, 그대가 찾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누가 신들을 모이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꼭 원한다면 한번 해보라. 다만  여섯 날과 일곱 밤을 잠자지 않고 견뎌내야 한다.”
그러나 길가메쉬가 허리를 기대고 쉬는 동안 잠의 안개가 실뭉치에서 풀리는 보드라운 실처럼 그를 덮쳤다. (같은 책 103쪽)

그토록 힘들게 우트나피시킴을 만났건만 길가메쉬는 신들을 모이게 하지 못하고, 그만 잠이 들고 맙니다. 잠이란 무엇인가요? 잠은 매일매일의 죽음이 아니던가요?
길가메쉬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 우트나피시팀의 아내의 배려로 그는 가시에 찔려가며 바다 밑바닥에서 자라는 젊음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꽃을 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쉬는 순간 뱀이 나타나 그 꽃을 빼앗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젊음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조차 놓쳐버린 길가메쉬에게 신이 정해준 운명이 다가왔습니다.

“오, 길가메쉬여. 비록 왕이 되었으나 영원한 생명은 얻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너의 운명이었다. 그렇다고 마음 아파하거나 슬퍼하거나 위축되지는 말지니, 네 운명으로 인하여 너는 사람들을 모이게도 하고 흩어지게도 하며, 빛이 될 수도 있고 어둠이 될 수도 있게 하였다. 운명은 네게 어떤 자도 당해낼 수 없는 능력을 주었으며 싸움터에선 어느 누구도 도망치지 못하는 완전한 승리를, 살육과 약탈에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는 완전한 성공을 네게 주었다. 그러나 이 힘을 악용하지는 말지니 궁전에 있는 네 종들을 관대하게 대해주고 태양 앞에서 떳떳하게 행동할지라.” (같은 책 111쪽)

길가메쉬 서사시는 영웅적인 인간의 삶과 죽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의 욕망과 인간의 운명 사이의 갈등은 결국 유한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그렇지만 길가메쉬는 순순히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들은 인간에게 삶과 죽음을 주었으나 죽음의 날짜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길가메쉬가 아무리 노력한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이 지녀야할 어쩌지 못하는 숙명입니다. 비록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실패하였지만, 그는 자기 삶에 도전할 줄 아는 영웅이었습니다.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할 때 그는 진정한 친구를 얻었고 그와 함께 모험을 하였으며,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였고, 용기 있고 용감한 삶을 살아 후대의 칭송을 받습니다.
길가메쉬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의 『바리데기』신화에는 길가메쉬가 그토록 얻고자 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많은 신화들이 무녀들의 노래라고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아주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이어온 데에는 따로 힘이 있다는 것을 우리 신화를 공부할 때마다 느낍니다.

신화 속에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

신이 만든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은 신의 손에 있을까? 신화의 답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입니다. 길가메쉬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후대로 이은 신화 속의 용감한 주인공들은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갑니다.
신이 만든 세상과 자기 삶에 안주하는 사람은 신화 속의 영웅이 되지 못했습니다.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1학년 아이들에게는 신비한 존재가 나오는 옛이야기, 2학년 아이들에게 신화나 전설 속의 영웅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3학년 아이들에게는 창조에 관한 성서 이야기를 포함하여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동화처럼 들려준다고 합니다. 구약 성서는 역사 이전부터 선사 시대까지 신성하게 창조된 세상의 묘사부터 물리적인 세상에서 고난과 시련을 받는 것, 마지막에는 구세주의 강림까지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서의 내용은 아이들의 내면적인 성장을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4학년 이후가 되면 아이들에게는 역사적인 것에 대한 분별력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신과 직접 접촉하며 신에게 의존하던 시기에서 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아의식을 갖는 시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아이들은 북유럽 신화를 접하게 되는데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로키신의 모습이 이때 아이들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합니다. 5학년이 되면 그리스 신화를 접하게 되는데 그리스 신화에서의 신은 대부분 인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때의 아이들에게는 철학과 생각하는 능력이 나타나고 정신적인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의 다양한 인격신을 통해 자기의 모습을 찾고자 합니다. 6학년이 되면 이제 신화에서 역사로 넘어가 인류가 발달해온 과정을 직접 살피게 됩니다.

“신화를 읽는 것은 인류의 새벽을 읽는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화는 어슴프레한 면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야기처럼 딱 맞아 떨어지지도 않고, 언제 만들어졌는지 그 시대의 사고방식을 다 이해할 수도 없는 게 사실입니다. 신화는 어떤 논리성을 가지고 일정하게 전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튈지 모르는 비약적이고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신화를 읽는 일은 내 안의 원시성, 근원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신화는 흥미 있지만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주제는 아닙니다. 신화를 머리로 이해하려 들거나 혹은 어린 아이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아이들과 신화 수업을 계획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고학년 아이들이라면 신화를 통해 옛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며 신화 속의 인물들의 신성과 인간성을 비교해보고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대입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현대 사회를 읽어내는 코드의 하나로 신화를 활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화는 구비 전승되어 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신화는 읽기 전에 먼저 이야기로 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먼저 살아온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들으며 아이들은 세상을 나름대로 인식합니다. 그 세상이 비록 원초적이고 원형적이더라도 아이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과 견주어보며 살펴볼 것입니다.
신화는 이야기의 원형들이 넘실대는 바다입니다. 우리는 그 바다에서 그저 헤엄치면 됩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이 생겨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세상이 자리 잡아 나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생겨났나, 어떻게 자기 운명을 개척하며 살았나를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면 아이들은 각기 자기 가슴속에 신화의 씨앗들을 심어놓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아이들이 자기 삶을 살아가는 동안 각기 자기 신화의 주인공이 되어 자기 삶을 멋지게 살 것입니다.  
신화는 이야기입니다. 신비스럽고 위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황당무계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진위를 따지기보다 신화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가며 삶의 과정 속에서 나는 내 신화를 찾아야 합니다. 바리데기가 병든 아버지의 약을 구하러 서천 서역 지나 저승 깊은 곳을 마다 않고 가듯, 자청비가 문도령을 찾아 하늘나라 옥황궁을 찾듯, 오늘이가 부모님을 찾아 원천강을 넘듯, 우리도 제각기 자기 신화의 주인공이 되어 자기 인생의 길을 떠나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