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오름

아침저녁의 서늘함과 한낮의 뜨거움이 가을을 영글게 합니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실
미하엘 데부스 선생님이 올해도 저희 학교를 방문하십니다.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올해에는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으로 많은 분들을 만나시고자 합니다.


모든 강연은 관심있는 모든 분들께 열려있으며
 9.25(목),26(금),27(토) 강연에 이어  9월29(월),30(화)에도
부모님들과 좀더 의미있는 시간을 가지시려고 하니,
이번주까지 강의 주제와 관련하여 개인적인 다양한 질문들을 답글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올해에도 선생님의 강연에 작은 성의를 표하고자 합니다.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강연 일정**

<학부모 강연>
-9월25일(목) 9:30 ~ 11:30 인간의식의 발달 

-9월26일(금) 9:30 ~ 11:30 삶에서의 동력찾기


<대중강연>
-9월27일(토) 2:30 ~ 6:30 삼중구조론의 이해와 현대사회 이기주의의 극복

학부모,대중강연 장소: 과천 갈현동한마음센터(과천정보과학도서관 맞은편갈현문화센터4층강당)

<간담회>
9월29(월),30(화) 오전
구체적 시간과 내용,장소는 추후 공지합니다.


**미하엘 데부스 선생님 약력**
  -독일 슈투트가르트 사제대학 대표교수 역임(학교명:Freie Hochschule der Christengemeinschaft)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발도르프학교 졸업
  -독일 튀빙엔과 에어랑엔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철학 전공
  -슈투트가르트 사제대학 졸업 후 사제서품.
  -그리스도교 공동체 교회(Christengemeinschaft) 사제
   ※ 저 서: 마리아 소피아, 운명 속에 존재하는 부활의 힘 그 외 다수의 강연집


참가비: 매회 오천원

과천자유학교 www.gcfreeschool.kr/

댓글 '1'

이경옥

2008.09.17 18:29:19
*.131.191.38

미하엘 데부스

동행

죽음이후 겪게 되는 의식의 변화 단계

지구의 삶의 끝으로서의 죽음 Der Tod als Ende der iridischen Existenz
죽어감과 죽음 - 변형의 과정 Sterben und Tod - Prozess der Verwandlung
어떻게 죽은 이와 동행할 것인가? Wie die Verstorbenen begleiten?



지구의 삶의 끝으로서의 죽음 Der Tod als Ende der iridischen Existenz

대체로 사람들은 죽음을 달갑지 않은 사건으로 경험 한다. 왜냐하면 죽음이 마지못해 받아들여야 하는 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죽음은 우선 기꺼운 마음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극한적인 도전이 되는 특별한 죽음의 상황은 찾아온다. 어떻게 지구적인 삶의 끝을 잘 맞이 할 수 있을 것인가? 가까운 친척의 상실은 나에게 죽음을 깊이 인식시킨다. 지구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을 느낀다. 우리가 체(Leib)를 잃었다고 해서, 우리가 무엇을 정말 잃은 것일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일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잃은 것일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해야 한다.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이제 완전히 다른 면으로 시선을 돌려서 질문해 볼 수 있다.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빼앗아 간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다른 반면에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것이 있다면, 간단히 말해서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을 앗아 간다고 표현할 수 있다. 죽음이란 생명의 반대 극의 존재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생명의 반대 극 Vom Gegenpol zum Leben

하지만 생명의 다른 극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자문해본다면, 바로 죽음이다 라고 말할 수 만은 없다.

사람의 유기체을 보면 강한 생명력(Leben), 생기(Vitalitaet)가 지배하는 영역과 생명력이 약한 영역이 존재한다. 뇌세포는 특별히 생기가 강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뇌에 손상을 입으면, 재생이 보통 불가능한 죽음이나 마찬가지이다. 뇌세포에 대해서 대체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피가 물론 통하고 있지만, 대체로 낮은 생명력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차가운 머리를 보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차가운 배를 보전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배의 온도는 따뜻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는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어떤 의식도 없다. 한 사람이 배를 근거로 판단했다고 한다면, 명석한 사고를 근거로 판단했다고 볼 수 없다. 사람의 유기체 안에는 두 가지 영역이 존재한다. 하나는 "배"로서 단순화하여 표현할 수 있는 영역, 즉 강한 생명력을 가진  무의식의 영역과, 다른 하나는 머리와 관계된 영역으로, 약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사람의 의식이 존재하는 반대의 영역이다. 따라서 생명(Leben)의 반대 극에 의식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의식은 생명력이 약한 곳에 존재하고
     생명력은 의식이 약한 곳에 존재한다.

이것의 예시를 그리스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는 만용을 저질러 제우스의 처벌로 코카서스의 바위에 매달린다. 이것으로 부족하여, 독수리 한 마리가 나타나 간을 쪼아 먹으면, 간은 다시 자라나고 다시 독수리에게 쪼아 먹히면 다시 자라나는 고통이 반복된다.

이것은 의학적인 상 보다 강한 신화적인 상을 보여 준다. 간은 생명력의 중심부, 간단히 말해 생명력의 중심(Lebensorgan)이며 일반적인 새의 상징인 독수리는 신화나 동화에서 의식, 사고력을 나타낸다. "날개를 단 생각" "정신적인 비상" 과 같은 말을 오늘날에도 자주 사용된다. 독수리의 등장은, 신화적으로 보면 사고력, 의식의 출현이다.

하루의 피곤함은 우리가 낮에 열심히 일을 해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일로 인해 더 빨리 피곤해 지기는 한다. 단순히 깨어 있다는 자체가 생명력을 소비한다. 아주 편안하게 낮을 보냈을 때 역시 밤이 되면 피곤하다. 독수리가 간을 쪼아대는 것을 의미한다. 밤이면 우리는 지치고 의식이 떠나면 생명력이 활발해지고 에너지가 다시 충전된다. 낮이면 의식이 지배하고 밤이면 생명력이 지배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양극성으로서 생명과 의식을 가진다.

살면서 역시 이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인생의 초반부엔 많은 생명력과 약한 의식이 흐른다. 젖먹이는 잠을 많이 자고 조금 깨어 있다. 노인들에 비해 강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뼈가 쉽게 부러지지 않고 오히려 뼈가 탄력이 있어 강한 힘에 부러지기 보다 아주 탄력있게 반응한다. 온전히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나이가 들면서 의식이 지배하고 사람이 그려낼 수 있는 상(vorstellung)이 많아 진다. 대부분 노인들은 살아 오면서 그려 왔던 아주 많은 상을 갖는다. 심지어 부담스러울 지경이 되어 지금까지 본인이 그려 왔던 것 이외에는 어떤 다른 것도 거의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손자들이 어떤 새로운 일들을 할아버지 할머니께 설명할라 치면 늘상 듣는 대답은 "그래, 너도 알겠지만 우리시대에도 말이야...." 그러면 손자들은 아주 지루해 진다. 왜냐하면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완전히 자기의 생각의 세계에 빠져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 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이지만 젊은이처럼 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젊음이란 생물학이나 나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즉각적으로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갖게 된다. 집에 계신 할머니가 "테크노 파티에 가서 뭘 했는지 말해주련?" 하고 물어 보면서 진정으로 관심을 보여 준다면, 젊은이들은 할머니와 말이 통하는 구나, 할머니는 나의 세계에 열려 있구나 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흥미를 끄는 일들이 모두 의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이 몰두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손자가 없어도 젊게 살기 위한 일이다. 이렇게 한다면 지금까지 만들어 온 상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게 될 것이다.

살면서 생명력으로부터 의식으로 향하는 길이 또한 존재한다. 거기에 탄생과 죽음의 양극성이 존재하고, 생명력과 의식의 양극성이 존재한다.        


죽음과 의식 - 관계?

사람이 죽으면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의식 없는 상태가 된다. 그렇다면 죽음과 의식 사이에 관계가 있는가?

죽음이 우리로 부터 의식 자체를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토대를 가져간다는 사실을 우선 분명히 하자. 예를 들어 당신이 피아니스트로부터 피아노를 빼앗아 간다면, 더 이상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없다. 하지만 피아노 연주하는 법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구만을 상실할 뿐이다. 따라서 죽음은 사람에게서 무엇보다 의식의 도구만을 빼앗아 가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체(Leib)이며 우리의 뇌이다. 그래서 사람은 의식의 지구적인 형태를 더 이상 바르게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죽음은 의식을 가지고 아주 많은 일을 한다.

생명체(Lebewesen)가 발달하면서, 진화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생명체가 높이 진화하고 의식을 더 가질수록, 더 많은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예를 들어 지렁이를 두 동강 내보면 각 부분은 간단히 다시 살아난다. 여기서 지렁이의 강한 생명력을 볼 수 있다. 말을 두 동강 내면, 당연히 죽는다. 고등 동물로 갈 수 록 생명력이 약해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의식이 높을수록 생명력은 약하다.

그림 형제의 아주 재미있는 동화가 있다. 한 남자가 있었는데, 막내아들의 대부를 서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에게 이미 열두 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이제 더 이상 대부를 서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거리로 나가 대부를 찾았다. 그 때 사랑스런 주님께서 그의 곁을 지나시며 그의 열망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그 남자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들으시고 사랑스런 주님 자신이 대부가 되어 주겠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거절 했다. 왜냐하면 그가 일평생동안 착한 사람으로만 살아야 한다 것이 너무 편향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악마가 다가 와서 역시, 자신이 대부가 되어주겠노라고 말했다. 그 남자는 다시 거절했다. 왜냐하면 제안된 악마의 재주가 역시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죽음이 세 번째로 다가와서, 아이를 위대한 의사로 만들어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이것을 받아들였다. 아이가 청년으로 성장했을 때, 죽음이 다가와 그를 교육시켰다. 죽음이 말했다, " 만약 네가 병실에 들어오면, 내가 환자의 침대 옆에 언제나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만약 내가 환자의 머리맡에 있으면, 환자가 회복될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리고 너는 너의 의술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고 환자는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만약 내가 환자의 발끝에 서 있으면, 모든 의술이 무용지물이 군요 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환자는 죽을 것이다."

모든 일이 그대로 이루어 졌고 이 의사는 정말 유명해졌다. 어느 날 그 나라의 왕이 죽을 병에 걸린 공주를 구해 줄 사람을 찾는 다는 포고문을 냈을 때, 이 남자가 지원 했다. 그가 공주의 방에 들어서서 공주를 보니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런데 죽음이 공주의 발끝에 서 있는게 아닌가. 그는 죽음과의 약속을 어기고 건장한 하인 두 명을 불러 오게 하여 침대를 돌려놓도록 명령을 내렸다. 공주도 다시 건강해 졌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죽음이 의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의사에게 경고했다. "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네가 죽어야 한다."

얼마 후 공주는 다시 병에 걸렸다. 이번에 왕은 훌륭한 의사를 찾지 않고 이렇게 약속을 했다. " 공주를 치료한 사람은 공주와 결혼할 수 있다." 라고. 그러자 그 의사가 와서, 또 다시 건장한 하인 두 명이 침대를 돌려놓도록 했고 공주는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마침내 죽음이 찾아와 의사를 데려가 버렸다.

이 이야기는 해피 앤딩으로 끝나지 않는 그림형제의 몇 안 되는 동화 중 하나이다.  
죽음이 머리 영역에 속해 있는 것처럼, 이 동화는 지혜로 가득 차 있다.

죽음이 머리맡에 서 있다면 죽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음이 머리 속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생명력이 적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나고 의식할 수 있다. 하지만 하부 영역인 발, 즉 신진 대사 영역에, 죽음은 속하지 않는다. 죽음이 그곳에서 발견된다면, 그것은 생물학적이고 물질적으로 죽은 것이다.


의식과 양심 Bewusstsein und Gewissen            
          
그런데 의식은 단순한 의식 그 이상이다. 내가 의식하고 있다면 나는 깨어 있고 세상에 존재하는 물건을 인식할 수 있고, 존재물에 질서를 세울 수 있고, 존재물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은 훨씬 더 멀리 뻗어 나간다. 역시 양심이 된다. 이것이 언뜻 분리되어 있는 듯 보인다. 나는 나의 도덕성을 행할 필요 없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흡연자들은 흡연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 행위의 결과(*금연)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만약 사람이 진정으로 무엇을 안다면
의지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도덕성 또한 움직여서
앎 Wissen이 양심 Gewissen이 된다.
      
영어로 의식은 consciousness 이고 양심은 conscience이다. 이것은 동일한 단어이다. 독일어로 앎 Wissen과 양심 Gewissen은 매우 비슷하다. 내가 진정으로 의식한다면, 나는 그것에 따라 행위 한다.

그러면 죽음이 양심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소위 말해 죽음은 양심의 토대가 된다. 죽음이 없으면 의식도 없고, 양심도 없고 도덕성 Moralitaet도 없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의식이 자아의식 Selbstbewusstsein 으로 까지 발달하지 못해 양심도 도덕성도 없다. 자연은 절대적으로 도덕이 없다. 탈 도덕이란 비도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도 악도 없다는 것이다. 착한 동물도 악한 동물도 없다. 사랑스런 어린 양도 악한 뱀도 없고 오히려 양과 뱀은 조직되어진 데로 행동할 뿐이다. 뱀은 "뱀답게" 행하지 악하게 행하지 않으며, 양은 "양답게" 행하지 착하게 행하지 않는다. 동물은 절대로 다르게 행동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 단지 사람만이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괴테의 말을 인용해 보자. 동물은 자신의 몸의 기관의 안내를 받으며 그것으로 표현한다. 다람쥐는 꼬리의 안내를 받아 이 나무 저 나무를 날아다닐 수 있고, 이빨의 안내를 받아 갈가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손이나 발의 안내를 받지 않는다. 이것들은 그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이것을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물은 몸의 기관에 의해 안내(*교육) 받고
사람은 몸의 기관을 안내(교육) 해야 한다.



사람이 몸의 기관과 욕구에 따라 생각하고 그것에 따라야 한다면 엄청난 속임수에 빠질 수 있다. 몸의 기관과 요구가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안내하도록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리가 몸의 기관과 욕구를 안내해야 한다. 이것들이 필요하지만 사람됨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어야 하지 주객이 전도 되서는 안 된다. 욕구에 따른 것은 마치 마부가 말에게 마차를 원하는 데로 끌고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같은 일이다.

사람은 몸의 기관을 교육해야 한다. 내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나의 손을 바라본다고 해서, 손은 무엇인가 해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손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게 묻는다. 이것이 도덕성이다. 도덕성은 완전히 자유롭게 세상으로 나오며 결코 외부의 자연의 필연법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양심의 내적인 움직임에 따른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외부에서 나에게 무엇을 말하게 하지 말고, 나 스스로 알아야 한다.

잘 교육된 양심

양심이 우리를 작동시키면 무슨 일이 일어나나?
우선 뚜렷이 구분되는 두 가지 양심의 종류가 있다. 이것은 관습적인 분류는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나의 주변의 경우에 따라 생각한다. 이것은 가정, 학교 등에서 하는 처신으로 나타난다. 한 일본인이 유럽에서 살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병환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즉각 일본으로 가지 못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일본에 사는 대부분의 독일인은  만약 독일에 계신 부모님이 아프신데 바로 귀국하지 못했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도덕의식(*양심)은 독일과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서 아주 양심적인 규범도 저곳에서는 아닐 수도 있다. 양심의 발로 역시 문화적으로 다르다. 이슬람교도는 카톨릭교도 또는 불교도와 아주 다른 양심의 내용을 가질 것이다.

양심은 정신적인 교육자처럼 활동한다. 양심은 사람은 이래야 하고 저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교육을 통해 허용되는 것을 정확하게 결정한다. 그들이 있을 때는 특별히 잘 지키지만, 없을 때는 억압이 약간 느슨해진다. 하지만 이것이 주입되면 부모님이 없을 때도 잘 지킨다. 사람이 잘못을 하면, 바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귀가하게 되면 그렇게 느낀다. 이것이 양심의 형태인데, 두려움 때문에 작용한다. 이것이 외적이거나 내적인 처벌 또는 죽음 이후 처벌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다. 수 백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으려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 왔다. 이것이 교회가 작업해 왔던 결정적인 교화의 내용이었다.

이런 양심은 개별적이지 않고 온전히 개개의 사회 환경에 달려 있다. 이것은 중요한 사회적인 임무를 갖는다. 어른이 되어 규범으로부터 다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어린 시절에 정해진 규범(Form)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린 아이가  규범을 배우지 못했다면 어른이 되어 스스로 규범을 만들어야 하는 데 어려움에 빠진다. 그 규범(Form)은 삶의 중요한 조력자이다. 단지 규범이 사람에게 족쇄를 채우지 않는다면 만약 이렇지 않을 경우 사람은 일평생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양심은 거침없이 활동하기 때문이다. 양심의 가책 또는 양심의 찔림을 느끼게 한다.


개별적인 양심

그런데 아주 다른 양심 역시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가 밤에 하루를 되돌아 볼 때(이것은 영혼의 건강을 위해 아주 추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수련(Uebung)이다.) 감정에 빠지지 않고 거리를 두고 하루의 일들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다. 잠이 들기 전에 상황을 조금 정리한다면 아주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예를 들어 낮에 다른 사람들과 심하게 다투었다. 오랜 동안 이것을 피해 왔지만, 상대가 기분 나쁜 말을 했는데 너무 지나쳤다. 매우 화가 나서 마침내 진실을 말해 버렸다. 담즙질인 경우 이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가 즉각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우울질이나 점액질의 경우 오래 걸린다. 일단 화가 머리 끝까지 차게 되면 그들은 반응한다. 아주 인상적이다. 유럽인들 안에서도 이 차이가 존재한다. 영국인들은 항상 냉정하다. 하지만 마침내 화가 나면 차분한 예의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아주 단호해진다. 이태리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우울질인 경우 아주 화가 나면, 아주 인상적인데, 평소 수줍움 많던 사람의 볼이 발개지고 손에 열이 나며 목소리가 커진다. 밤이 되어 되돌아본다. 일단 화를 낸 게 아마도 우선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잘한 일이었다. 오래 전에 벌써 말했어야만 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마음속으로 자문 해본다. "정말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잠시 후, "정말 잘했니?", "근데, 죄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어. 아주 멍청한 사람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그것만 빼고 잘했어."

처음 일어나는 양심의 성찰에 따르면 모두 잘못 했다고 하기보다 오히려 "....를 확신하니?"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자문자답을 하게 되고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뭔가 잘못된 게 있다. 내가 뭔가 말을 해야 했다. 그것은 반드시 필요했지만, 형식이 좋지 않았다.

"내가 다 잘못했다"는 신랄한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인가 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의 행위가 한 쪽으로 기울었으니, 이제  보충이 필요하다"는 자극을 받게 된다.  "보충"이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느냐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전화를 해서 사과의 말을 할 수 있고 아주 다른 것이 될 수 도 있다. 언제나 개별적인 양심의 성찰을 통해 창조적인 충동이 일어나서, 일방적인 시작이 긍정적인 결말로 끝난다.

여기서 두 가지 종류의 양심의 발로(Gewissenregung)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언제나 판단한다. 반면 다른 하나는 하나의 과정을 겪으며 충동으로 향하고, 시작했던 것을 창조적으로 바꾼다.

개별적인 양심의 발로의 단계

양심의 발로의 과정은 세 단계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1 단계 : 밤에 낮을 회상할 때 일어났던 사건의 진행으로부터 나를 천천히 풀어 놓는다. 사건과 나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게 되면 지난 상황을 새롭게 보게 될 것이다. 첫 번째 단계에 거리를 둔다.

2 단계: 거리를 두고 상황을 실제적으로 새롭게 보는 것이다. 나는 나를 변형시킨다. 나는 나를 바꾼다. 나는 동일한 상황을 새롭게 바라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을 미쳐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제 나는 완전히 다르게 볼 수 있다."

3 단계: 이 단계에서 일을 다시 새롭게 바라보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난다. 나는 다른 사람, 변화된 사람으로서 그에게 다가가 완전히 새롭게 이야기 나눌 수 있다.

이것이 세단계이다. 참된 양심의 성찰이 일 때 사람의 영혼의 원초적인 움직임으로서 재차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즉시 반응하여 가책과 찔림으로 나타나는 교육된 양심으로 언제나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개별적인 양심의 작용이다. 대화(*자문자답)를 통해 풀림, 변형, 관계 맺음이라는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죽어감과 죽음 - 변형의 과정 Sterben und Tod-Prozess der Verwandlung

이 세 단계를 상으로 그려 볼 수 있다. 이 상은 죽어감과 죽음과  관계된 것이다.
죽음과 의식, 의식과 양심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양심의 발로와 죽음 역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풀림, 변형, 새로운 관계 맺음은 죽어감과 죽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풀림(loesen, 내려 놓음)
죽어 갈 때(sterben) 첫 번째의 행위는 풀림이라고 부른다. 풀림은 생을 마감할 때 오는 죽음 뿐만 아니라  살면서 겪는 죽음의 과정에서도 적용된다. 우리는 살면서 재난, 상실, 결핍과 같은 죽음의 경험을 한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완전히 혼자가 된다. 이때 내려놓음과 관계한다.  즉, 기대, 희망, 실망, 공포, 두려움, 안심과 같이 버팀목으로 작용하던 모든 것을 내려 놓는다. 사람이 부여잡고 있는 안전과 건강 뿐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병과 두려움도 버팀목으로 작용하며 정체성을 부여해 줄 수 있다. 모든 것들이 내려놓을 것들이다.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나는 여전히 존재하게 될까? 내려 놓기 전에 이런 질문을 언제나 하게 된다. 내려놓은 후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진다.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내려놓은 후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진다. 하지만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10m  높이의 뜀판 위에 서서 기꺼이 뛰어 내리려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노련한 사람"이, 뛰어 내린다고 해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해 준다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낙하하기 전에는  미지의 일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 이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공기 중에 떠 있을 때 이미 생각한 것과 달리 모든 것이 달라진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심지어 재밌다. 아직 뛰어 내리지 않은 누군가에게 뛰어 내린 후 기분이 어떠할 지 설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한 면만을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조차 지구적인 관점에서 알 뿐 다른 관점에서 알 수 없다. 내려놓을 때, 지금과 완전히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내려놓지 않는다면 새로운 것에 다가갈 수 없다.

새로운 것을 원하는 사람은 있지만 내려놓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의 상이 캠핑카가 될 수 있다. 캠핑카를 타고 그리스로 가면서, 집에 있던 익숙한 물건들로 차를 채운다. 그리고 낯선 곳에 있지만, 낡은 것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살림살이에 속한 것이라면, 주변에 점점 더 많은 물건을 모은다. 집은 점점 더 가득차서 사람이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낡은 가구를 골라 버리지 않는다면, 집에 새로운 가구를 들여 놓을 수 없다. 인생도 그와 같다. 어떻게 보이게 될지 모른다고 해도, 사람은 내려놓아야 한다. 가구가 없는 집은 엉망이다. 벽의 얼룩이며 이곳저곳 수리 할 곳이 많다. 결코 매력적인 일은 아니지만 필요한 단계이다. 내려 놓을 수 있는 용기만이 전망을 세울 수 있다. 이런 전망을 가지고 새롭게 앞을 내다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전망은 죽은 이후에 중요하다. 죽은 이후 자신이 살아왔던 생애 전체를 새롭게 보게 된다.

변형
우리는 죽음의 과정에서 풀림을 상대적으로 실감 있게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삶을 통해 이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풀림이 사후 존재의 변화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내가 완전히 변화한다면, 나는 여전히 동일한 존재인가?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번 육화에서 어업에 흥미를 느꼈다면, 다음 육화에서 선장이나 수영강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모든 것이 그렇게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사성이 존재 하는가? 이와 정반대이다. 동일한 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는 극히 적다. 이번 육화와 같이 유사한 것을 행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완전히 다르게 행하게 되어 자기 자신을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분명히 다시 알아보지 못 할게 확실할 것이다.

사람이 여전히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는가? 완전히 변형을 겪은 사람이 여전히 그 사람인가? 현대의 학자들은 이것을 부인한다.

독일 남서지방 라디오 방송국에서 최근에, 사람의 동일을 확인할 수 없다 는 뇌의 연구 결과를 방송했다. 즉 의회 처럼 언제나 새로운 결정을 내려서 그 결정을 언제나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정된 정체성이 존재할 수 없다." 것을 의미한다. "개별이 본질"을, 의지를, 책임을 받아들이는 일은 비실제적이다."

하지만 법률학자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시속 80 Km를 어기고 130 Km로 자동차를 몰았기 때문에 법정에 섰지만 운전면허증을 잃고 싶지 않아서 판사에게, 그 앞에는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서있으며, 130 Km로 차를 몰았던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 대신 신중하게 운전하는 사람이 서 있는데, 그는 과속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판사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당신이 이 일로부터 아주 많은 것을 배우게 되어 기쁘군요, 그렇지만 운전면허증을 접수하겠습니다." 그의 주장은 단순하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가 옳은가? 판사인가 나인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가?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인가?

이 지점에서 변형에 관해 자문해 본다. 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 생각이 옳다면, 33 가지의 다른 생각은 더 이상 옳지 않기 때문에 치워 버려야 한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야 한다 것은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아주 안전한 생각을 해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 안정성을 잃을까 두려워 한다. 그래서  새로운 생각은 진실이 아니고 거짓이며 그럴 수 없다고 오히려 말한다. 변화를 기꺼워 하지 않고, 변화가 있을 때 이를 통해 자신으로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 때문에, 결코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 죽음이 후 여전히 나로 존재할 것인가 라는 불확실성 때문에 죽음에 직면하면 이러한 두려움이 아주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관계 맺음(Verbinden)
이제 세 번째 행위가 온다. 내가 변화된 후, 지구의 삶과 다시 관계를 맺고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염원이 내안에서 일어난다. 나는 끈을 다시 잡고 계속 나가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일들을 이제 새롭게 보기 때문이다. 다시 몸을 입고자 하는 생각은 지구 상에서 가장 자연스런 것이다. 사람은 지구에 와서 다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연속되는 과정을 밟는다는 것은 아주 유기적이다. es ist einfach organisch.

다시 몸을 입고자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물론 커다란 민폐를 끼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의미 있게 다루며,  "내가 어떻게 살든지 다음 육화에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 라고 삶을 너무 느슨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영혼의 성숙이 요구된다. 우리는 2000년 동안 기독교가 재육화에 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실행해 왔던 것이 분명 의식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 육화를 일회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적용된다. 실제로 이런 형태로 결코 다시 육화할 수 있는 기회가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실제로 한 번의 육화의 기회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육화가 전체 대우주적인 생애에서 보면 마지막 점이 아니라 오히려 일들을 새로이 바라보고 적당한 시기에 새롭게 하나의 육화과정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우주적인 생애로부터 자신을 풀어 놓게 되는 일도 역시 진실이다.

죽음은 커다란 우주적인 양심의 발로와 같으며
풀림, 변형, 새로운 관계 맺음이라는 단계를 갖는다.

죽음 이후 일어나는 변형 Verwandlung im Nachttodlichen
죽음이후 변형이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때 기억의 변형이 일어난다. 기억은 우리의 의식에게 단지 정체성을 전해 줄 뿐이다. 기억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지구적인 삶에 작용하는 정체성
쟝 아누이가 쓴 희곡 "짐 없는 여행자"를 보면, 한 남자가 전쟁을 겪은 후 기억력을 잃는다. 그가 알지 못하는 어느 마을에 왔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이 그의 고향이라고 주장하고, 한 여인이 그를 보고 자기 남편이 돌아 왔다고 기뻐한다. 그는 자기 부인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 남자는 정체성을 모두 상실하고 있고 무에서 새로운 정체성 를 만들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보증하는 것이 바로 기억력이다. 우선 우리는 지구에서 정상적으로 축적된 기억력을 가지고 우리 삶 안에 존재하는 충분히 많은 장면들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을 자신과 동일하다고 느낄 수 있다.

사망 직 후
죽으면, 정체성을 부여하는 능력인 기억력은 사라진다. 대신 다른 것이 들어온다. 이것은  오늘날 유사 체험에 관한 수없이 많은 보고를 통해 잘 알려진 것들이다. 이것은 루돌프 슈타이너가 20세기 초에 공개한 내용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내용이다. 죽은 후 새로운 의식, 완전히 새로운 기억이 다가 온다. 이 기억은, 여기 지구에 거주할 때처럼 시간의 흐름 안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리차드 바그너가 파시팔 오페라에서, "시간이 공간이 되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전 생애를 동시적으로 회상하게 된다. 유사 체험에서 이것을 경험하고 현대 의학 덕분에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생애 전부를 동시에 경험한 바를 설명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는다. 여하튼 행복한 경험이라고 말한다.

이 의식은 죽은 후 약 3일 동안 지속 된다. 잠자지 않고 깨어서 의식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다. 이어서 영혼이 풀려나고 동시성의 의식이 사라지는 때가 온다. 이 때 사람은 그의 자아로부터, 그의 정체성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느낀다.

첫 번째로 오는 육체의 죽음은 의식으로부터 그렇게 극적으로 분리되지 않다. 타블로 방식으로 펼쳐지는 의식이 풀려나는, 대략 사후 3일 후의 일들이 훨씬 더 적극적이다. 사람의 정체성과 관계되는 것들이 풀려 나갈 때는, 다 어두워진다.

변화된 조건에서 깨어남  Erwachen unter Voraussetzung
첫 단계를 지난 후, 다음 상태가 찾아온다. 이 때 완전히 달라진 조건에서 깨어나기가 아주 어렵다. 양심을 느끼는 때와 유사하다. 죽은 삶을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우리가 외부적으로 경험한 것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의미 있는 본질적인 것을 의식한다.

결정하는 능력 Faehigkeit zur Gewichtung
이제 사람은 비본질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을 분리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예외 없이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위기에 빠지게 한다. 만약 당신이 30년 동안 특정한 직업이상을 따랐는데 50세가 되어 보니, 당신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30년 동안 진실을 행하지 않았으니 당장 직업을 바꾸길 원한다면, 아주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된다. 이것은 감당하기에 너무 심각해서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환상 속에서 삶을 계속 이어간다. 예를 들어 사실 한 편의 파트너가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수년 동안 환상을 만들어 온 관계가 존재하기도 한다. 환상을 포기하는 것이 유지하는 것 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살면서 언제가 올바르게 바라보고 진실을 받아 들이라는 위협을 받을 때 까지 이것은 계속된다. 본질적인 진실성의 인식은 친숙해져버린 환상으로부터 고통스러운 분리를 의미한다. 자신을 바라보고 비본질로부터 본질을 구분하기를 배우고 그로부터 결론을 끌어 내야만 한다면, 특별히 감당하기 힘들다.

금광석을 불에 녹인다면, 위로 떠오르는 불순물을 걷어 낼 수 있다. 그러면 순수한 금을 얻는다. 즉 불순물과 부산물이 없다.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해진 금을 얻는 것은 비본질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의 모든 정련과정은 본질로부터 비본질을 분리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정련 과정을 겪으며 본질에서 비본질을 분리해 내는 법을 배우며, 불속으로 들어가 타는 듯 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 육체적인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고통이든 삶의 본질을 깨어나게 한다.

이것은 영혼의 고통에도 적용된다. 카톨릭 교회에서 연옥으로 묘사하려는 것은 어쩌면 단순한 신비적인 상이지만, 판결을 언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옥을 정말 외적인 불로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환상을 불 태우고 생의 본질을 비본질에서 분리하는 정련의 과정이 진행 되는 동안 느끼는 내적인 체험으로 생각해도 좋겠다.

책임 능력 Faehigkeit zur Verantwortung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종료된 삶을, 우리로부터 매일 매일 펼쳐 나간 모든 생각, 말, 행동을 바라보며, 한 걸음 한걸음 삶에 대해 책임을 지는 법을 조금씩 배운다. 이것 역시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사후에는 퇴직도 해직도 해약도 되돌림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행했던 것과 피했던 것과 함께 나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지구에 살면서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다른 사람이 나의 어떤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하지 않도록, 훈련한 사람은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이 기억의 세 번째 형태이다.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고 책임을 넘겨 받게 된다. 하지만 이때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다른 존재와 엮여 있다. 이 존재와 함께 지난 생을 바라본다. 이것은 고통일 뿐만 아니라 역시 만족도 준다. 마지막으로 각자 가장 깊은 내면에서, 계속 발달하기 위해, 본질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Wer bin ich eigentlich?
그리고 기억의 마지막 변형이 일어난다. 이제 나의 행동뿐만 아니라,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지구 육화에서 답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나를 알기 때문이다.

거기서 내가 나를 남성으로서만 알고 있다면, 나는 내가 만약 여성으로 육화되었다면 하고 역시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한다. 즉, 나는 나를 완전히 다른 외적인 관계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을 사람이 생각하기 아주 어렵다.

지구적인 모든 것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면,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루돌프 슈타이너는 여러모로 말했다. "사람은 거기서 정신적으로 벗겨진 채 서 있다" 전에 우리를 싸고 있었던, 모든 껍질은 없고 앙상해 졌다. 우리는 되어지는 존재가 되고 이 상태에서, 물속에 빠져 따뜻한 수건으로 감싸줄 엄마가 필요한 아이이다. 이렇게 정신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우리는 발가 벗겨지고 앙상하게 거기 서 있다. 이 때 우리는 숨김없이 온전히 현실적인 자신을 경험하며, 도대체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따뜻한 정신적인 존재는 우리가 육화의 끈을 다시 부여 잡으려는 바램이 우리 안에서 깨어날 때 까지 정신적으로 발달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이제 새로운 조건, 새로운 육화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며, 대부분 육화 이론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변형이 있을 때, 기억력이 변화할 때, 죽음 이후 경험되는, 최초의 상이 형성된다. 먼저 지구적인 기억이 공간의 동시성이 되고 나서, 이번엔 내부에서 밖으로 나가는 의식(von innen ausgehende Bewusstsein)은 잃어 버리고, 밖으로부터 변화되어 우리에게 온다.(kommt uns veraendert von aussen entgegen) 우리는 자신을 더 이상 경험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행위, 느낌, 생각이 우리의 주변에 미친 결과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다른 존재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밖으로 부터 오는 기억이다.

지구의 사회적인 삶을 살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듯이, 정체성의 대부분을 그 안에서 찾는다. 이상적인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 알아야 하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에 종속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 후 다른 영적인 존재가 우리를 경험하는 것은 아주 본질적이다. 그 안에 우리의 정체성이 있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부여된 정체성이다. 이런 정체성을 완전히 이해할 때, 우리는 새로운 육화를 준비한다.

어떻게 죽은 이들과 관계를 잘 맺을 수 있을까?
죽은 이들과 관계를 잘 맺는 일은 죽은 이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더나가 우리 문명의 중심을 위해 아주 큰 의미를 갖는다. 한 사회가 피상적인가("우리는 죽을 정도로 흥 겨웠다" 닐 포스트만 1985) 깊이를 갖는가는, 죽음과 죽은 이를 어떤 문화적인 방식으로 돌보는 가와 본질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죽은 이의 세계는 문지방 너머 저편의 세계이다.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와 깊이가 있는 가를 질문할 때, 우리의 시선은 근본적으로 그 세상을 향하고 있다.

우리가 죽은 이들과 동반하길 원한다면, 사회생활을 할 때와 마찬가지가지로 가장 최선의 방법은, 죽은 이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 그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죽은 이들이 겪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왜냐하면 슬픔과 상실의 고통은 우리에게만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슬퍼할 때 죽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슬픈 기간을 거쳐야 하지만, 우리가 그를 이해하고 커다란 변형의 모든 과정에 동행하는 것이 죽은 이에게 중요할 뿐이다. 지구의 육화로부터 풀려나고, 지구에서 만들어진 조건을 바꾸는 과정, 더 이상 여자도 남자도 아니며 형도 엄마도 아이도 아닌 본질적인 존재와 동행하는 일이 중요하다.

죽은 이들을 돕기
우리가 죽은 이들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아주 근본적이다.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생애를 아직 평가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보아 그는 새로운 일을 창조할 수 있고, 삶의 사건에 변화된 의미(Beteutung)를 부여 할 수 있으며 아마도 완전히 새롭게 이해(Sinn)할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다. 화가가 작업을 하는 동안에 그림을 최종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붓 칠하면, 특별히 강한 색채가 이제 분명한 의미를 나타낸다. 사람의 인생에서 이 마지막  붓놀림은 죽음과 함께 행해지며, 이제 생애를 볼 수 있다. 이제야 비로소 무엇이 완전해 보이고 어디가 불완전하게 인식되는 지에 관해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변형, 보충, 의미 부여가 전기 작가를 통해 더 이상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의 시선은 자신의 고유한 전기 위에 그렇게 머문다. 즉 이제 전기는 완성되어 바꿀 수 없으며 그를 통해 더 이상 변화될 수 없으며 더 계속될 수 없다. 우리가 보통 지구에 살면서도, 우리에 의해 만들어진 현실이 불변하게 확고하게 고정된 사실로 보고 아주 큰 고통을 느낀다. 죽음이 후에도 이와 유사하다. 다만 더 큰 차원에서 이루어 진다.

죽은 사람이 남긴 미완성의 작업은
살아 있는 사람의 과제가 될 수 있다.

형상(Gestaltung)의 자유는 지구 위에만 존재한다. 이렇게 죽은 이는 살아 있는 이에게 시선을 보낸다. 살아 있는 이만이 죽은 이의 전기에 좀 더 무언가를 보충할 수 있으며 그의 행위를 통해 정해진 사실에 다른 의미, 심지어 가능하다면 의식(Sinn)을 부여할 수 있다. 미국 작가인 Thornton Wilder는 희곡 "Die Alkestiade"에서 아주 인상적인 상황을 묘사했다. 아기스 Agis의 잔혹한 왕의 열두 살 난 딸인, 래오데미어는 페스트로 죽어가며 필사적으로 소리친다. "아버지, 절 도와주세요!" 라고. 알케스티스는 그에게 이 말의 의미(Sinn)를  설명한다.., 래오데미어는 절망에 빠져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아다시피, 이것은 그녀를 위한 죽음, 절망입니다. 당신이 그 죽음에 의미(Sinn)를 부여해 줄 때까지 그녀의 삶은 공허하고 헛되게 남겨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죽은 사람이 남긴 미완성의 작업은 살아 있는 사람의 과제가 될 수 있다.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 우리는, 의무가 되어버린 동료의 미완성의 과제를 부담으로 심지어 어쩌면 수용할 수 없다고 느낄 것이다. 죽은 이와의 관계에서 이것은 다르다. 죽은 이가 보충하고 완성을 원하는 것은, 산 이의 편에서 보면 도움을 주고 싶은 바램과 죽음의 세계로부터 오는 영감이 된다. 죽은 후 지구 위에서 개인적인 집착과 바램이었던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고 죽은 이가 지구에서 품었던 목표들 중에서 지구문화의 객관적인 발달에 봉사할 수 있는 것만이 죽은 이의 염원으로 남아 있다. 이런 바램으로 산 이와 접촉을 추구한다. 살아 있는  이도 역시 가장 고상한 이상들 안에서 인류 문화 발달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한다. 따라서  죽은 이의 염원과 산 이의 참된 이상이 만난다. 죽은 이의 염원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지혜의 힘이다. 산 이가 사심 없는 이상의 의미(Sinn)를 가지고 길을 가고자 애쓸 때, 죽음의 세계로부터 진정한 도움이 주어진다. 동시에 죽은 이의 도움과 방향성을 주는 영감에 자기를 열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지구에 존재할 때, 죽은 이의 운명 또한 선한 의미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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