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오름

뭐라 말할 수 없는 날

조회 수 13458 추천 수 0 2006.06.27 16:45:58
아침 일찍, 한 여섯 시 삼십 분쯤 삼가동 달밭골을 갔다.



어제 새벽에 그곳에 가서 고추밭에 지짓대 박고 있는 아저씨에게 들어서 알게 된 100년이 더 된 신배나무와 밤나무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일반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를 챙겨서 소백산국립공원 삼가매표소를 지나가는데, 어제처럼 오늘도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일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다른 설명 없이 그냥 차를 몰고 지나갈 수 있었다.



달밭골 나무 있는 곳에 갔다가 고개를 넘어서 두 집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그곳에 사는 분한테 100년 넘은 나무 있는지  물어볼 요량으로 고개를 넘었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집이 한 채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아침부터 무슨 일을 하기 위해 나와 서있는 걸 보고 바로 말을 붙였다. 문화재청에서 100년 더 된 과일나무를 찾고 있는데 우리나라 고유 수종이면 아마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수도 있다고 했더니 아주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 것도 좋은데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이었으면 한다고 했다. 나도 마땅히 그런 지정이 되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나무를 보살피도록 하고 일정 정도의 수고값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선한 인상에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주머니께서 당신이 담근 식혜를 들고 가란다. 집으로 들어가더니 식혜 한사발을 들고 나오셔서 앉아서 맛있게 먹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식혜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람! 얘기 나누지 않아도 겪어보지 않아도 어떤 사람일지 마음으로 와 닿는다. 한 삼십 분 정도 그 집 마당에 머물렀는데 어찌난 깊은 얘기들을 나누었는지. 나의 지난 과거와 아주머니의 깨달은 삶 이야기. 아마 하루 왼종일 이야기를 나누어도 싫증나지 않을.



묶여 있지 않은 개들을 보고 마음이 좋았는데 얘기를 나누면 나눌 수록 마음이 푸근했다. 아주머니도 남편분과 함께 이곳에 온 지 한 10년이 되었다고 했는데, 한 깨달음을 품고 살아가는 분이었다. 그런 깨달음에 나 또한 공감을 했다. 행복이란 그 무엇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세 끼 밥 먹을 수 있고 옷 입을 수 있고 좋은 자연에서 거닐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뭐 이런 이야기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밥 시간이 되어서 차로 오르막을 올라가는데 경사가 심해서 한번에 바로 올라갈 수 없었다. 아주머니가 한 번에 쉬지 않고 부웅 하고 올라가야 한다고 했는데 살살 올라가다 보니 중간에서 차가 헛바퀴만 돌았다. 다시 뒤로 물러났다가 기어를 1단에 놓고 부앙 하고 올라갔다. 다행히 두 번째는 바로 올라갈 수 있었다.



100년 넘은 과일나무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100년 넘은 나무만큼이나 맑은 영혼을 지난 한 분과

새로운 인연을 맺고 내려왔다.



밥 시간도 다 되었고, 그 아주머니와의 인연 맺은 것을 기쁘게 간직하기 위해 나무 사진은 찍지 않고 바로 집으로 차를 몰았다. 내일 다시 갈 요량으로. 100년 넘은 나무가 맺어준 인연이니 보통 인연이 아닐 것이다. 내일 다시 가게 되면 신배나무와 밤나무 사진도 찍고 또 그 아주머니 집에 들러서 이야기도 나누고 식혜도 얻어 마실 것이다. 난 내일 무얼 들고 가면 좋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달밭골을 내려오다가 걸어가는 또 다른 아주머니를 만나서 차에 태워드렸다. 그 아주머니 말씀이 당신은 풍기 읍내 아무데나 내려주면 된단다. 내가 제 차에 타신 분들은 바로 앞까지 태워 드립니다. 그래야 제가 다음에 생색을 내죠라고 했더니 아주머니 말씀이 걸을 수 있으면 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서 당신의 자녀들에게도 고향 올 때 차 가지고 오지 말고 버스 타고 오고 서울에서도 지하철 타고 다니라고 말씀하신단다. 그러면서 또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가 만났던 그 아주머니도 잘 안다고 했다. 이야기를 참 잘한다면서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오거리에 내려 드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식구들은 벌써 밥을 다 먹었고 나 혼자 늦은 아침을 먹었다. 아내가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었냐고 하길래 달밝골에서는 손전화가 안 된다고 했다. 물론 어떤 번호의 손전화는 모든 곳에서 잘 터진다. 하지만 내가 쓰고 있는 번호의 손전화는 어떤 곳에서는 터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서 여유가 있다. 가끔씩은 낮에 손전화기를 충전할 때 일부러 꺼둔다. 꺼 두어도 다 사는데 별 불편이 없다. 그런데 한 때는 나도 손전화기가 손에 없으면 무언가 일이 잘 안 될 걸로만 생각을 했다.

사실은 손전화기 없어도 사는데 별 불편이 없는데.



오후에 아이들에게 100원짜리 아이스크림 스무 개 돌리고 부자 노릇 한 번 하고, 친구 인삼가게에서 콩물 빌려서(내일 갚는다고 하고는) 하나 먹고, 읍사무소 700년도 더 된 은행나무에서 놀고 있는 친구들에게 작은나무 알리고 오게 하고.



참 오늘 아주 기쁘고 좋은 일 하나.

작은나무에 늘상 드나드는 6학년 친구 하나가 우리 막내 기정이 생일이 흙날(토)인데 미리 당겨서 오늘 찬치를 치러주었다. 아이비 과자를 바닥에 깔고 무농약 흑미 건빵으로 모양을 내고 그 위에 다시 초코파이와 촛불 하나. 작은 골방에서 기정이와 기웅이, 기훈이 그리고 믿븜과 나, 그리고 그 친구와 또 다른 친구 둘 이렇게 여덟이서 함께 기정이 생일 축하노래를 불렀다. 작은나무 드나드는 누나에게서 생일 축하 선물도 받고 초코파이 케잌도 받는 기정이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사람으로 커갈까, 참 기대된다.



2006. 6. 20. 불날에 차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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