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오름

2003/02/17-대중 매체와 우리 아이

조회 수 4722 추천 수 0 2004.07.08 10:00:37
수원 논지사 과정 양락영 선생님의 에세이 입니다.
대중 매체와 함께 사는 우리 아이들과의 전쟁 같은 (?)일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군요. 너무나 공감이 가는 생생한 글이어서 함께 읽고자 합니다.
아이들을 대하시는 선생님의 고민과 진지한 문제 제기를
잠시나마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대중매체와 우리 아이
양 락 영

“엄마는 왜 맨날 엄마 마음대로만 해? 우리 반 애들은 이거 다 본단 말이야. 나만 못 보니까 유치원 가면 얘기도 못하고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알아? 애들은 ‘야인시대’도 다 보는데 나는 이것도 못 봐? 엄마 미워!”

한달 쯤 전 어느 일요일, 밤 아홉 시가 넘었는데 아이는 ‘개그 콘서트’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울면서 이렇게 대들었다. 이제 자야할 시간이고, 그건 어른들이 보는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친구들 집에 전화를 걸어봤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봐야돼요.”라고 했다. 엄마가 져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아이는 여섯 살 때에는 ‘파워 디지몬’과 ‘포켓 몬스터’를 보았고, 작년부터는 ‘그리스 로마신화’를 보아왔다. 아직 너무 어린 탓에 왜 그 프로그램들이 좋지 않은지 이야기 해봐야 통하질 않았다. 아이에게는 오로지 ‘반 아이들이 모두 본다’는 사실만이 중요했고, 그 프로그램은 친구들과 접속시켜 주는 코드일 뿐이었다.
또래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에 눈 뜨기 시작하는 이 어린 아이들에게 대중매체, 특히 텔레비전의 작용은 잔인할 정도로 일방적이다. 아직 옳고 그름을 판단할 이성도, 올바른 선택의 기준도 서 있지 않은 일곱, 여덟 살 아이들에게 텔레비젼은 정의의 이름으로 때리고 부수는 것은 옳다고 가르치며, 어른들의 사랑법은 이러하다고 친절하게도 미리 가르쳐 준다. 또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려거든 맥도날드에 가자고 하거나, 몇 만원씩 하는 장난감을 사달라 졸라보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아이들은 스폰지처럼 이를 받아들일 뿐 거부하지 않는다.
무능하거나 나쁜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또는 자식 마음에 그늘을 지우지 않기 위해 부모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고, 이것은 끝없는 줄다리기의 시작이 된다. 아이들은 그렇게 산 물건에 깊은 애착을 느낄 사이도 없이 또 새로 광고되는 물건에 현혹된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엄마 보다 더 열심히 신문을 뒤적이고, 광고 전단지를 찾아 친구들과 서로 무엇을 갖고 있고, 무엇을 살 것인지를 견주어보고 경쟁한다. 값에 관계없이 원하는 물건들을 손쉽게 얻는데 익숙해진 아이들에게 ‘없어서’ 혹은 ‘못가져서’ 겪는 ‘아픔’이라는 것은 너무 낯설고 불쾌한 개념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 영역의 아이는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배척의 대상이 된다.
이미 무비판적인 텔레비젼 시청에 중독 되어버린 어른들에게도 잘못은 많다.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거나 말거나 생각해볼 여지도 없고, 신경 쓸 겨를도 없는 부모 옆에서 아이는 성인 대상의 드라마와 쇼와 사극과 광고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리하여 아이 친구들은 요즘 모이기만 하면 “얼굴도 못생긴 것들이 잘 난 척 하기는” 같은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으며 즐거워서 깔깔거린다. 사투리 놀이를 한다면서 “끄지랑이 가시나야. 흐흥, 화장빨이구만. 멀미 할라칸다. 얼마주고 했노? 월래? 조명발이여? 허벌나게 좋은 겅게 챙겨. 내 알 나도. 시켜만 주이소.” 등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들을 자랑삼아 주워 섬긴다.
그 뿐 아니라 소위 ‘남녀상열지사’라 할만큼 선정적인 유행가들도 거침없이 불러대며, 이제 여덟 살이 된 이 아이들이 장나라를 알고, 체리필터의 조유진이나 성현아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안재모와 이세은이 서로 어울리니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남자인데 수술해서 여자가 된 하리수는 너무 예뻐서 좋다는 얘기도 한다. 이제, ‘어른들의 영역’은 어른들의 머리 속에서나 불가침의 영역일 뿐 아이들은 아무런 경계 없이 넘나들게 되었고, 아이들다운 생각이나 상상력이 살아 숨쉴 수 있는 공간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다.
이처럼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가치 평가를 하면서 선택할 힘이 없는 어린 아이들에게 아무런 제약 없이 다가오는 또 하나의 위험한 매체는 컴퓨터이다. 아이는 나보다 먼저 ‘마시마로’ 시리즈와 ‘졸라맨’ 시리즈를 알아냈다. 그것이 다소 냉소적인 성인 대상의 내용인걸 우연히 알고 놀란 적이 있다. 아이는 또 엄마의 확인이나 허가를 거치지 않고 수 없이 많은 게임들을 다운 받아 즐겼으며, 친구들이 오면 대접의 의미로 새로운 게임을 시켜주었고 ,서로 별 대화 없이도 한 시간 정도는 거뜬히 놀았다.
아이는 혼자 있을 때도 전처럼 색종이 접기를 하거나 무얼 만들고 놀기보다는 컴퓨터 앞에 앉기를 즐긴다. 컴퓨터가 고장이라도 나면 아이는 못 견뎌하고 짜증을 낸다. 이런 단짝이 아이에게 어느날 갑자기 성인 사이트에 들어와 보라고 유혹하기라도 한다면? 아니, 컴퓨터 화면을 켠 순간에 발가벗은 여자가 전 화면을 차지한 채로 내 아이를 보고 웃고 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더군다나 아직 컴맹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컴퓨터를 잘 다루지도, 즐기지도 못하는 나로서는 더 걱정스러울 뿐이다.
대중매체들이 우리 아이에게 끼치는 이러한 해악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는 해도 그 대책을 생각해보면 막연하기만 하다. 우리 아이가 바깥 놀이보다 텔레비젼 보기와 컴퓨터 게임에 익숙해져갈수록 단순, 무식, 과격해지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여기에 또 다른 영향들이 더 해져서 아이들이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기보다는 질 낮은 것일지라도 함께 공유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아이는 이제 ‘아바타 패션 목걸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동네 또래들한테서 버림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다른 사람을 가차없이 내치는 잔혹성에 대해서는 반성할 줄 모른다. ‘나’를 우선시 하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부족하다. 그리고 어떤 현상에 대해 주체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 아이를 위하여 우리는 거실에서 텔레비젼을 치우고, 아이 방에 있던 컴퓨터는 오히려 거실로 내놓았다. 아이가 이것들에 무제한적으로 방치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그리고 텔레비젼 앞에서 노는 아이보고 시야를 가리지 말라고 소리치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확실히 아이가 텔레비젼을 보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그리고 거실이 훨씬 평화롭고 한가로운 공간으로 변했다.
그러나 안방 문을 열면 사정은 그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그러니 텔레비젼 보는 것이 주요 일상이 되는 가족 문화 자체를 바꿔야 할 것이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대중매체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아이에게도 비판적인 안목을 길러주어 스스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릴지 판단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아이와 함께 어린이 프로그램도 보고, 컴퓨터 게임도 하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하겠지. 그리고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가 밝은 햇살 아래에서 마음껏 뛰어 놀기도 해야 하겠지. 그리하여 아이와 함께 마시는 신선한 공기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된다면 아이도 마음의 문을 더 활짝 열어 제치고 우리의 말을 새겨 들어주겠지. 그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아이에게 설득력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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