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러와 릴레이 !로 여러분을 초대하고픈 김선암입니다.

여러분에게 초대에 앞서 한편의 글을 소개할까합니다.

박성준선생님이 쓴 글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

<옥중서한>과 인간 서준식

                                                            

나는 서준식을 1972년 대전교도소에서 만났다. 서울에서 형이 확정되어 대전교도소로로 이송되자마자 당국이 요구하는 전향절차를 순순히 받아들여 전향자로 분류되었던 나는 잡범들과 혼거하는 일반사동에 수용되었고, 나보다 이태 후에 대전교도소로 이송되어 온 서준식은 전향을 거부하였기에 비전향자들을 따로 수용하는 특별사동 독방으로 보내졌다.

이른바 사상전향제도란 것이 문제로서 존재한다는 인식조차 채 갖지 못했던, ‘사상범이기에는 너무나도 철부지였던 나에게는, 일관되게 전향을 거부하면서 그로 인한 온갖 고초를 꿋꿋하게 견뎌내는 20대 초반의 재일한국인 청년 서준식은 경이롭고 이채로운 존재였다.

당시 나는 교무과의 교도관들을 보조하는 일을 하면서 가끔 책 상자를 들고 서적 담당 교도관의 뒤를 따라 특별사동으로 들어가 차입들어온 책을 감방에 넣어주곤 했다. 서준식의 독방에 책을 넣어줄 때 배식구(‘식구통이라불렀다)를 통해 그의 빛나는 눈과 나의 눈이 마주칠 때 내 젊은 심장은 떨리었고 그에 대한 존경심과 안쓰러움으로 가슴이 뻐근했었다.


어느 날 나는 서준식이 교무과로 불려나와 교도관으로부터 매를 맞는 현장을 목격하였는데,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팠고 어떻게든 그를 격려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발각되면 맞아죽을 일이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서준식씨, 존경합니다.”라고 적은 종이쪽지를 그의 책속에 넣어 들여보낸 일도 있었다.


서준식은 이듬해 광주 교도소로 이송되어 더 이상 그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그가 885월 감호소에서 풀려나왔을 때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고 각별한 마음으로 서로 사귐을 갖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그 위험한 쪽지가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우정의 징표가 되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89<서준식 옥중서간집>이 형성사에서 발행되어 나온 이래 20여년이 경과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편지들에 아로새겨진 서준식의 감옥 속의 모습 -서준식은 이를 나의 젊은 날의 자화상이라 부른다- 은 나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거울이 되었다.


재작년에 풀무질이라는 책방에서 우연히 <서준식 옥중서한>이 한권의 책으로 새로 장정되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사들고 와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노동사회과학연구소라는 데서 2008년에 새로 발행한 무려 900여 쪽에 달하는 큰 책인데 나는 읽기 시작하자마자 책 속으로 곤두박질하듯 빨려들게 되었다.

그 동안 나도 나이를 먹었고 남의 글을 분별하는 힘도 생겼고 해서 서준식의 옥중서한이 예사로운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도 모르지는 않았다고 하겠지만,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비로소 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글 솜씨도 모자라고 이제는 체력도 달려서 어디서 글 청탁이 들어오면 대부분 거절하고 만다. 그런데, 이번에 국어교사들을 위한 잡지인 '함께 여는 국어교육'으로부터 독후감 청탁을 받고는 선뜻 응한 까닭은 서준식 선생과 그의 옥중서한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오직 그 일념 때문이다.

나는 서준식의 옥중서한을 현대 한국사회가 낳은 기록물 중 최고봉으로 친다. 서준식의 편지, 어디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건가?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그에게 서준식의 편지를 한두 편만이라도 소리 내어 읽어드리고 싶다.


내가 고른 첫 번째 편지는 80630일 고종 사촌 동생 순자에게 보낸 편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가지고 오빠를 면회 온 동생 영실을 만난 이야기, 그가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어머니에 대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절절하게 가슴 저미는 이야기가 담긴 명문이다. 다음으로 나는 8382일자 편지와 816일자 편지와 831일자 편지를 권하고 싶다. 서준식의 마음씨가 잘 드러난 이 편지들은 한편 한편이 그 자체로 작품이다. 꼭 읽어보시라!

그의 편지는 자상하고 맑고 치열하다.

무엇보다도 너는 자기의 마음 깊은 심연까지 치열한 정직성을 가지고 진지하게 들여다 보아야 한다. 고통스러운 자기 검토와 성찰을 쌓아 너의 삶을 근본적으로 갱신해야 한다.”

그가 87년 동생 영실에게 쓴 편지의 이 한 단락은 서준식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치열한 자기 성찰의 다짐으로 들린다. 그의 편지들을 한 편 또 한 편 읽고 있으면 치열한 내적 싸움을 겪고 있는 자의 참된 정신의 아름다움이 나에게까지 감염되어 와서 나를 정화시켜준다. 내 눈을 맑게 하고 인생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서준식의 친동생으로 한국에서도 필명을 날리는 서경식의 글은 일본어로 쓰여진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교육받은 자신의 모어(母語: ‘모국어가 아니라)가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라는 것을 당당하게 말한다. 이것은 그와 세 살 터울인 서준식에게도 타당할 수 있는 말일 터이다. 그런데 서준식은 반드시 그의 편지를 한국어로만 쓴다. 한글을 읽는 것조차 서투른 여동생 영실에게 조차 한국어로 편지를 써 보낸다.

당시 교도소의 편지는 규격이 정해진 봉함엽서에 써야 하고 방에서 쓰지 못하고 복도에 나와 중학생 책걸상 같은 데 앉아서 교도관이 지켜보는 앞에서 써야 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써내야 하고 한번 틀리게 쓰면 영영 고칠 수도 없는 유일회적 창작행위 같은 것이었다. 그런 편지쓰기를 그는 한국어로 해냈던 것이다.

81428, 그가 청주 감호소로 면회를 다녀가신 고모님에게 쓴 편지를 조금만 읽어보자.

고모님 읽어 보십시오.

다녀가신 뒤에 이러저러한 상념에 시달리다가 문득 고모님에게 편지를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펜을 잡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모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받아보신 것이 처음이 아닐까 합니다. ... 지나간 세월이 애석합니다. 애석하게 생각되는 것은 동생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다는 사실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고모님께 당연히 해 드렸어야 했을 우리 가족들의 일본 생활 이야기를 너무나도 못해 드렸군요. 제가 고모님을 즐겁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란 그런 것밖에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대학에서의 어려운 법률 강의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일단 고모님과 함께 앉아서 가족들 이야기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빈약한 어휘와 표현력 때문에 저는 자꾸만 말이 막혀 버리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때였던가 고모님과 함께 밤 깊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 이제 저의 우리말 실력도 이만하면 별의별 재미난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 ”

1972년 그가 대전교도소로 막 이송되어 온 무렵 나는 서신담당 교도관의 책상 위에 펼쳐진 채 놓여있는 서준식의 편지를 대강 훔쳐보았다. 단정한 글씨가 가지런히 박힌 그의 한글 편지는 그 자체만으로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소년시절 일본에서 자라면서 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그는 편지의 갈피갈피에 감옥에서라도 좋다. 이 땅에서 살고 싶다.”고 절절히 토로하고 있다. 서준식의 한국어 수준과 문장력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난 서준식은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한국으로 유학했다. 19714월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반대운동이 학생과 지식인에 의해 크게 고조되고 있었다. 그 투표일을 일주일 남겨둔 420일 한국 육군보안사령부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4년생이었던 서준식을 형 서 승(마찬가지로 서울대 대학원에 유학 중)과 함께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북의 지령을 받고 박대통령 3선 반대운동을 배후조종했다는 것이었다. 학원침투 간첩사건은 열세에 있던 박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한 조작극이었다. 재판 결과 서준식은 국가보안법’ ‘반공법위반으로 징역 7년의 유죄판결이 확정되었다(서 승은 무기징역).

서준식은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비전향자 특별사동에 격리 수용되어 비전향자에 대한 온갖 차별적 처우를 받게 되었다. 7.4남북공동성명 이후 73년과 74년에 걸쳐 한국 전역의 정치범 수용 교도소에서 비전향장기수에 대한 전향강요와 잔혹한 고문이 조직적으로 행해졌을 때, 폭력에는 굴하지 않겠다는 기개(氣槪)와 사상의 자유를 짓밟는 전향제도에 대한 저항의 정신으로 이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1988525, 서준식은 17년간의 엄혹한 옥중생활을 이겨내고 석방되었다. 한국에서 비전향을 관철한 채 형무소의 문을 나온 최초의 장기수였다. 본래의 형기 7년에 덧붙여 가해진 보안감호 10년의 구속에 의해서 그는 스무 세 살부터 마흔 살까지의 기간을 고문에 의한 육체적 고통, 바깥세상과의 엄중한 격리에 의한 정신을 갉아먹는 고독, 감옥살이의 의미를 둘러싼 회의 등을 싸워 이겨낸 것이었다. ... 서준식의 17년은 조선인으로서의 주체적인 삶을 모색하여 모국으로 건너간 재일조선인 한 청년이 그 모국에서의 엄혹한 고투(苦鬪)를 강요받는 가운데 그 모국의 수난에 찬 역사의 가장 뼈아픈 부분을 온몸으로 살고, 그것을 통해서 스스로 동포와 일체화하고 있던 혼()의 편력의 17년이었다.”

(이 부분은 서준식의 17년 옥살이의 내력을 간결한 명문으로 요약한 일본어판 역자 니시무라 마코토(西村 誠)씨의 후기에서 발췌 인용하였다.)


2007년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새로 펴낸 <서준식 옥중서한>의 머리말 다시 <옥중서한>을 내면서의 첫 문장은 두 딸과 함께 도망치듯 한국을 떠난 지 2년 반, 나는 세상을 잊고 살았다.”로 시작된다. 하지만 지금 그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것은 그가 세상을 잊고 산 세월을 끝냈다는 뜻이리라. 재작년(201011?) 세종문화회관에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 말러 교향곡 1번 연주가 있었을 때 그를 잠시 연주장 입구에서 만났다. 만났다기 보다 내가 먼저 그를 발견했고 그는 나를 피하지 않았을 뿐, 씨익 소리 없이 웃고 손 한번 잡았다 놓고... 그게 전부였다. 어디 사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 뒤 그가 성균관대학 근처 풀무질 책방에 가금 들른다는 서점 주인의 말을 듣고 연락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 두었지만 아직 아무 소식이 없다.


그의 옥중서한을 새로 펴낸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채만수 선생은 서준식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알고 있다. 그를 만나면 서준식의 안부를 꼭 물어보아야겠다. 그 연구소의 젊은 연구원들이 절판된 <옥중서한>을 다시 발간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서준식의 옥중서한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이, 그것도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 뿌듯하다. 전혀 수지가 맞지 않을 이 책을 다시 출판해 준 채만수 선생에게 고마운 마음 그지없다.

더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전의 출판사(야간비행)에서 파일을 넘겨받지 못해 무려 900 쪽에 달하는 방대한 텍스트를 손으로 직접 입력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회원들에게, 그리고 새 시대의 젊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지들에 약 80개 항목에 이르는 주()를 붙인 연구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2007년의 머리말에서 서준식은 말한다. “1989년에 형성사에서 나온 <서준식의 옥중서가집>은 약 2년 만에 절판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2년에 야간비행에서 나온 <서준식 옥중서한> 또한 약 3년 만에 절판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출판 실적 자그만치 2권을 자랑하는 노동사회과학연구소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지금 나는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 대해 감사하다기보다 차라리 송구스럽다. 이 손바닥 만한 규모의 연구소가 감당해 내야할 나의 책의 무모한 두께와 무게가 송구스러운 것이다. <옥중서한>의 기구한 운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세 번째의 이 옥중서한은 대체 얼마나 갈까? 2, 3년 후면 마치 숙명처럼 다시 절판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서준식의 옥중서한의 가치를 알게 되는 시대가 어서 왔으면 좋겠다. 아니, 그 시대를 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책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하겠다고 굳게 마음먹게 되었다. 마침 내가 길담서원이라는 책방을 운영하고 있으니 우선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데서 시작하기로 한다. 그리고 금년에는 가능하면 <서준식 옥중서한 읽기 모임>도 열어볼 생각이다.


독서와 공부, 좋은 책을 분별하고 읽는 방법, 세상을 보는 눈 등을 조언해 주는 좋은 선배를 갖고 싶은 사람은 서준식 선생의 편지를 읽으라. 감옥살이에서만 맛볼 수 있는 깊고 깊은 자연과의 교감! 구름, 바람, 햇볕, 풀꽃, 보름달, 밤하늘, 별빛 등에 대한 시적 표현들은 이 편지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그리고 종교의 문제, 예수와 기독교의 관계 등 신앙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길안내가 되어줄 글들이 수북하다. P여사에게 보낸 15편의 편지들은 고뇌하는 크리스챤들에게 보약같은 명강의록이다. 복음서의 예수와 만난 서준식의 사상적 회의와 일탈(나에게는 사상의 성숙으로 보이는데)은 맑스주의와 기독교의 대화가 현재에도 깊은 차원에서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는 증언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서준식 편지의 백미는 어머니에 대한 아픈 추억들로 아로새겨진 글들이다.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이라면 부디 그의 글을 읽고 눈물 흘리며 위로를 받을 일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선생님들을 통해서 서준식의 옥중서한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입소문을 타서 민들레 씨앗처럼 퍼져가기를 바란다. 이 책을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어나 스테디 셀러가 되어 노동사회과학연구소가 돈을 벌게 되는 시절을 즐겁게 상상해 본다. *

 

 

   

박성준 선생님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릿쿄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 취득.

미국 유니언 신학교와 퀘이커 학교인 펜들 힐(Pendle Hill)에서 3년간 

수학. 성공회대학교 엔지오 대학원에서 평화학을 가르침

현재 길담서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