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토 답사(윤동주를 생각하며)에서 윤동주가 걷던 교토의 가모강을 걸으며

윤동주의 아픔, 고뇌를 생각해보았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서준식의 옥중 편지로 이 여행이 내 마음에 커다란 자국을 남기게 되었다,

윤동주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 새겨본다.


 

서준식 옥중 편지(19855P여사님께 보내는 편지 중에서....)

 

중략~


윤동주 많이 좋아하시지요? 하지만 또 돼지에 진주가 아닌지 모르겠군요.(히히) 그의 시 좋아한다는 많고 많은 사람들 중 과연 몇 %정도가 진정 그의 진면목에 제대로 감동받으면서 좋다고 하는 걸까 생각해봅니다.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가슴에 전해 받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절실한 삶의 경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리라 믿는 까닭입니다.

한마디로 그의 진면목은 치열한 내적 갈등의 성실성, 진지성, 순수성입니다.

그 내적 갈등은 (초기의 동시에 나타난 것 같은)아름답고 온화하고 화해의 정신이 넘치는 순수세계에의 동경과, 그리고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암담하고도 가혹한 현실세계에서의 당위의 틈바구니에서 맑은 양심을 소유한 인간이라면 무시무시한 아픔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그런 갈등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수세계에서의 동경마저 버리고 호락호락 공해에 오염된 옹달샘이 되었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사회의 현실로부터 자신을 떼어내어 자기의 개인적 세계 속에서 순수의 꿈을 먹고 살면서, 그런 가짜 순수를 진짜 순수인 것처럼 자기 기만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순수했고 뛰어난 양심의 소유자였던 윤동주에게 허용된 길은, 암담하고 가혹한 현실세계를 아름답고 온화한 순수세계로 만들려는 험난한 길 뿐이었고 그 당시 상황에서 그것은 음모적 반항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윤동주에 비해 김형석씨의 헤르만헤세에 심취했던 일제 말 시절이 얼마나 나약하고(학문적) 이기주의의 삶이었는지를 실감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남달리 순수세계에의 동경이 강렬했을 윤동주가 겪었던 내적 갈등의 치열함이란 보통사람의 상상의 한계를 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시대적 양심으로 말미암은 소명 그리고 아름다운 순수세계에의 미련, 그런 자신의 나약함에 가하는 채찍질, 그래도 뭉게뭉게 피어나는 회의와 두려움, 또 채찍질, 다시 미련... 그 갈등은 그것이 맺혀서 시가 될 만큼 순수하고도 치열한 갈등이었던가 봅니다. (“자화상” “또 태초의 아침” “또 다른 고향등등...)미련이 생기고 회의가 생기는 한에 있어서 윤동주에게도 가혹한 운명에 대한 원망이라는 불순물이 없을 순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험난한 인생에의 원망을 완전히 청산할 수 있었는지 여부는 알길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틀림없이 가혹한 역사 사회적 현실 한 가운데서 시대적 양심에 충실한 삶 그 자체가 바로 자기 회복과 자기완성의 삶이고 따라서 개인적 기쁨이기도 하다는 뚜렷한 자각에 이르렀을 것이고, 그리고 그러한 자각의 성장은 그가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 집단적 삶의 영역으로 자기의 의식을 넓혀가는 끝내역사를 확고히 딛고 서게 되어가는 과정과 완전히 대응했을 것임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서시” “별 헤는 밤” “쉽게 쓰여 진 시등등의 아름다움은 한낱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무시무시한 갈등을 뚫고 난 뒤에 도달할 수 있었던 순수세계와 현실세계의 감동적인 만남의 아름다움이었을 것을 전제할 때, 윤동주 시를 순수 시즐기듯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돼지에게 던져주는 진주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P여사님, 인간이 몸담고 살아가는 역사적 사회의 현실이 언제나 크게 불완전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 불완전함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시대적 양심이 언제나 요구되고 있다는 조건에서, 우리가 윤동주 적 성실함과 치열한 내적 갈등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면, 윤동주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그럴 수 밖에 없었듯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길은 하나밖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순수 세계에의 동경을 가슴 깊이 간직하면서 당대의 현실 한가운데 온 몸으로 뛰어드는 삶입니다...

 

현실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려는 의지가순수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할 때 그 삶은 얄팍한 거친 것이 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당대의 현실과 밀착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순수이고자 하는 배부른 사람들의 이기주의보다는 훨씬 건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윤동주 적 갈등을 겪지도 않으면서 쉽게 온유하고 고요하게 그리고 순수한 예술과순수한 종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흔히 윤동주 적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온유함과 고요함, 그리고순수가 얼마나 고귀한가를 가소롭게 설교하려 들곤 합니다. 그들에 대한 저의 인간적 혐오는 찻집에서 세상에서 가장 예쁜 그녀꿈나라에 얼른 다시 들어가기 위하여 껌팔이 계집아이에게 10원을 주며 , 빨리 가라. !“했을 때 김이 팍 새고 갑자기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그녀로 변했을 때의 그 혐오감과 어쩌면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략~

 

서준식드림

  (서준식의 목사님 사모라는 p여사와 한동안 서신을 주고받았다.그중의 윤동주에관한글을 발췌한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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