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조선 후기

1. 마지막 개혁 군주

 

-영 정조 당시 서유럽 상황

 1500년경부터 시작된 절대왕정 시대를 마감하며 시민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절대왕정을 뒷받침하는 것은 상비군과 관료제도인데 이 또한 자금력이 있는 상인이 있어 가능했다. 영 정조의 목표 또한 절대왕정을 이루는 것이었다. 정조는 노론을 척결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고 유교 이념을 근거로 왕도 정치와 민본 정치를 하고자 했다. 그래서 규장각을 설립하고 장용영을 설치했지만 이러한 제도를 지탱할만한 세력이 만들어지지 못해 개혁이 성공하지 못했다. 조선은 유교 사상이 뿌리 깊어 억상 정책을 펼쳤고 세금을 걷기 힘들어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당쟁과 탕평책

붕당 정치의 변질로 인해 당쟁이 생겨났는데 현종부터 시작된 예송논쟁과  당쟁의 희생양이 된 사도세자가 그 예이다. 숙종때부터 해결책으로 탕평책을 썼지만 효과가 없었다.

-정조는 어떤 인물인가?

12살에 당쟁으로 아버지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과정을 목격해서 트라우마가 있어 화병에 걸리기까지했다. 스스로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무술을 하여 문무를 겸비한 왕이다.

-정조 개혁의 목표

유교 이념에 근거한 왕도 정치를 펼치고자 했다. 왕권 강화 정책으로는 탕평책을 써서 노론의 독주를 막고자 했고 개혁 도시인 수원 화성을 건설했다. 그 곳에서 상업을 하는 것을 계획했고 정약용이 설계해 10년을 계획했는데 노임을 주고 책임공법제도를 실시하며 거중기를 사용하는등의 조치 덕분에 2년여 만에 완성했다. 지지세력을 키우고자 인재풀로서 규장각을 세우고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만들었다. 민생안정정책으로는 통공정책을 펴고 금난전권을 폐지했으며 신분제에 관심이 많아 서얼과 노비를 풀어주고자 했고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아 김홍도에게 백성들의 일반적인 모습을 그림에 담아오라고 했다. 개혁을 위한 재원 확보를 위해 백성들의 삶이 가난해 증세할 수 없으므로 왕실 재정의 씀씀이를 아끼고자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조의 노력과 개혁은 1800년 6월 28일 정조의 죽음으로 개혁이 실패하고 조선시대는 암울해진다.

정조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데 정순왕후가 정조가 서거한 날 아침에 약사발을 들고 갔고 그가 나오니 곡소리가 났다는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근거로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활동- 역사신문 그림 보며 설명쓰기, 정조가 서거하던 날 -역사신문 쓰기

 

2.실학과 정약용

-실학의 등장

성리학(본성과 원리 탐구)의 한계로 인해 반성끝에 등장하게 되었다. 성리학은 1392년부터 1800년대까지 통치이념으로 계속되면서 엄숙주의와 고착화된 신분제, 윤리주의의 모순이 심해졌던것이다. 농업과 상업에 관한 개혁을 담은 책들이 많이 있는데 유형원의 반계수록, 이이의 성호사설,정약용의 여유당전서, 홍대용의 의산문답, 박제가의 북학의,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그것이다. 실학의 사상으로는 실사구시와 민본적 사상, 민족적 자주정신과 사회개혁 정신이 담겨있다.정약용에게는 상업에 눈을 뜨게 해주고 농업 개혁에 관심을 갖게 해준 성호사설과 서학과 평등사상을 알려준 천주실의가 큰 영향을 끼쳤다.

-가장 촉망 받던 관리 정약용

정조와 정약용은 수어지교의 관계였다.1783정약용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대과 시험에서 6년동안 낙방했지만 포기하지 않아 6년째 감독을 바꿔 대과에 합격한다. 그 후 능참봉과 곡성군수 무예감독직에 이어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수원화성 건설에 참여하고 배다리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정약용 가문은 몰락하게 되고 정약용은 18년동안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는 강진에서 500여권을 저술한다. 정약용은 르네상스형 인간으로 촉망받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규장각 초계 문신으로 학문적 깊이가 깊으며 사헌부 관리를 할 때 청렴하고 도덕적이었으며 암행어사를 할만큼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곡성군수로 재직할 때는 실천력이 있었으며 수원화성을 지을때 설계와 거중기를 만들었다는것이다.

-활동-정약용을 유배에서 풀어달라는 상소문 쓰기

 

3. 열하일기

-박지원은 어떤 사람이고 열하일기는 어떤 책인가?

박지원은 노론의 명문가 자손으로 벼슬길에 안 나가 가난한 양반이고 의리를 중시했다. 실학자로서 이용후생 북학파와 친밀했다. 청나라 기행문으로 26권으로 구성된 열하일기를 3년간 집필했다.허생전,양반전,호질같은 풍자소설을 쓰기도 했다. 박지원은 사촌형 덕분에 청나라에 가게 되는데 청은 1612년에 여진족인 누르하치가 건국해서 강희, 옹정, 건륭제까지 200여년간 전성기를 맞았다. 조선은 두 번의 호란을 겪었는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그것이고 청은 1910년 신해혁명으로 멸망을 한다. 박지원은 한양부터 열하

까지 두 달반에 걸쳐 다녀오는데 여정은 한양에서 출발해서 의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는데 비가 많이 와서 10일간 발이 묶여 애를 태운다.중국의 변방인 책문을 지나 안시성인 봉황성, 청나라가 건국된 심양,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관문이 산해관을 지나서 청나라 수도인 북경에 도착했지만 생일 장소가 열하로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어 3일 밤낮을 가고 하룻밤에 강 9개를 건너 청황제의 피서산장인 열하에 도착하게 된다.박지원은 청나라에서 조선은 우물안 개구리라는 걸 절실히 느낀다.

-활동-박지원이 청나라를 다녀온 소감문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