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신라의 멸망과 호족시대

--역사의 기로에 선 인물의 고뇌와 패자의 역사에 대해서도 배운다

 

강숙인의 역사동화 <마지악 왕자>를 중심으로

 

*마지막 왕자와 관련된 경주의 주요 유적

-반월성: 신라의 왕궁,정궁 / 반월이어야만 만월이 되면서 신라가 발전한다는 의미에서 반월로 지었다

-안압지(월지): 동생과 마지막 뱃놀이를 함. 달이 뜨는 연못이라는 이름처럼 달이 뜨는 밤에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포석정: 경애왕이 슬프게 죽은 곳 /  신라가 마지막 제사를 지낸곳 / 술취해 놀다 죽었다는 이야기는 패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포석정의 굴곡은 잔을 흘려 보낼 때 쏟아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과학적 설계였다

-남산: 마지막 왕자와 가장 관련이 깊은 곳  / 태자가 군사훈련을 하던곳 -  신라의 저항정신을 보여줌

            태자 일이 늘 남산에 올라가 경주를 내려다 보았다

            남산에서 보국검을 추웠다

 

 

*신라말 정치 상황은  중앙 권력의 힘은 경주로 한정되어 있었고 지방호족들이 강성하게 되었다. 강성했던 신라는 사

  사치와 향락에 빠지며 왕권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멸망에 이르렀다

*왕건이 다른 호족들과 달랐던 점은 민심을 얻으며 세력을 확대해 간 것이었다. 경순왕을 사위로 삼고 견훤을 왕으로  

  앉힘으로 민심을 얻고 신라를 항복시켰다

*경순왕과 태자 일은 같은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경순왕- 자진해서 신라를 왕건에게 헌납하여 백성과 신라의 천년 유산을 지키려고 했다

  태자 일 - 고려에 끝까지 저항하며 신라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다

 >>세자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따라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 훌륭하였으며 안락한 삶을 버리고 고생길을 스스로 선택

     하여 후세에게 정신의 숭고함을 보여주었다

 

 

2.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적 특징은 호족의 자유로움과 불교가 어우러진 것이다. 호족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불상을 세웠고 불상은 각각 개성이 넘쳐 일관된 불상이 없었다. 고려시대의 최대 고민은 호족의 발달로 인해 왕권이 약한 것이었다

*왕건의 호족정책

  -호족의 딸들과 결혼

  -호족의 아들들을 개경에 한명씩 인질로 잡아둔다

  -서경을 왕권 직영지로 만듦 -- 서경을 왕실이 직접 다스리며 호족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왕건은 죽을 때까지  호족을 통제하지 못했다

 >>>혜종, 정종, 광종 때까지 근친혼을 했다 .호족이 무서워서 왕실이 똘똘 뭉쳐야 했다

 

*광종

노비안검법: 호족의 사병을 없애기 위해 호족의 노비들을 해방시키려는 법>>호족의 군사력을 빼앗음

과거제도 : 과거제를 통해 왕에게 충성할 수 있는 관리를 뽑음, 관복을 품계대로 구별하여 입히며 관료를 장악함

음서제도 : 실력으로만 뽑으면 관료가 계속 바뀌므로 관료자녀들을 등욜시켜 자기들의 문벌을 유지하고자 함

                  >>문벌세상이 열림

 

 

*문벌 세력 장악 후 국제정세는 거란의 득세

-거란1차 침입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6주를 얻음

-거란2차 침입 :양규의 흥화진 전투에서 거란을 물리침

-거란3차 침입 : 강감찬의 청야전법(들판을 청소하여 거란이 배고파서 싸움을 할 수 없었다)

                                            귀주대첩

 -여진의 침입 : 윤관의 별무반 설치

>>>서희,강감찬,윤관 모두 문벌이었다

 

*이자겸의 난 : 문벌이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끈 후 왕의 자리까지 노리며 난이 일어남

                          >>척준경이 이자겸을 죽임

*묘청의 난 : 서경천도 주장, 금과의 관계에서 자주권을 주장

                         >>김부식이 제압

                             김부식은 묘청의 난 진압 후 1145년 삼국사기 저술, 신라 귀족으로부터 고려가 왔다고 주장

 

 

*정중부의 난 : 문벌을 무너뜨리고 무신정권의 시대를 열었다. >>>>>백성들의 환호를 받음

                                                                                                                       그러나 무신시대의 백성들은 더 피폐해 짐

*경대승 : 정중부 죽임

*이의민

*최충헌 : 무신정권의 안정기

                 -만적의 난 :"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새로운 신분제도를 꿈꾸었다

 

 

*몽골의 침입

 -무신정권은 백성을 버리고 개경사람만 데리고 강화도로 피신 --40년간 생활

 -처인성 전투 : 김윤후와 일반 백성이 몽골을 막아냄

 -무인들의 수탈이 몽고 보다 더 무서웠다

 -삼별초 : 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갈 때 개경으로 옮기게 되면 기득권을 잃게 될까봐 항쟁 --삼별초 항쟁

                  삼별초 항쟁은 민족항쟁의 의미가 아니다.

 

 

*공민왕의 개혁 정책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정치 ,권문세족을 제거하려 함 (권문세족 --친원파 )

  -신돈 등용 : 친원파 제거하기 위한 개혁, 쌍선총관부 빼앗고 개혁실시

 

 

 

3. 문화의 나라 (고려청자와 팔만 대장경을 중심으로)

-고려청자의 종류 : *순청자--문벌사회

                                  *상감청자--무신집권기

                                                       무신의 상징은 호랑이지만 학을 새겨넣었다

-만드는 과정

 

-향,소,부곡 : 고려시대의 특별 행정구역으로 조정에서 쓰이는 물건들을 만들어 바치는 기술자들이 주로 살았고 이

                       곳에서 고려의 예술이 태어났지만 기술자들에 대한 심한 신분차별 때문에 기술이전이 안되었다,

-고려청자의 탄생은 신라말기 선종의 도입과 관계가 있다. 선종은 하루 종일 눈을 감고 도를 닦으며 해탈에 이르는 종파인데, 졸음을 쫓기 위해 승려들은 주로 차를 마셨고 차의 색을 살리기 위해 비취색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청자의 발생이다

 

-본토를 몽골의 말발굽아래 방치한 채 지배세력만 강화도로 옮긴 무신정권은 강화도에서 그들의 화려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결국 상감청자는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도 강화도에 피신하여 자신들만의 안일한 삶을 추구했던 집권세력의 여유로운 생활도구였다. .

 

*팔만대장경

 고려의 몽고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부처의 도움을 구하고자 온 정성을 바쳐 팔만대장경을 새겼다.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70년에 걸쳐 초조대장경을 새겼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팔만 대장경은 16년만에 완성할수 있었다

--대장경판 전체에 쓰인 글자 수는 5천2백만자

--대장경판은 산벗나무로 만들었다 (나무성질이 조금 물러서 새기기가 편했다)

--나무를3년간 뻘밭에 묻어 두어 뒤틀림을 방지

--글씨체의 서체는 구양순체였다--새기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훈련시켜 서체를 통일했다

--옻칠을 하여 대장경판의 방수,방충,방수 효과를 얻었다

--장경각 바닥에는 습기를 막기 위해 횟가루,숯,소금을 뿌렸다

--팔만대장경이 훌륭한 점은 *5천만자가 넘는데도 오자,탈자가 없다

                                                  *700년 이상 됐음에도 상태가 양호하다

 

***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팔만대장경이 아니라 그것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