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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다음 시간 <마음의 미래> 발표순서

[1부 마음과 의식] 
 서문 (전)
 01장 마음 해독하기 (조) 
 02장 의식: 물리학적 관점 (조) 
 
[2부 마음으로 육체를 극복하다] 
 
 03장 텔레파시 :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는가? (황)
 04장 염력 : 마음으로 물체를 조종하다 (송)
 05장 주문 제작된 생각과 기억들 (김)
 06장 아인슈타인의 뇌 : 지능 높이기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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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변형된 의식] 

 07장 꿈속에서 (전)
 08장 마음 조종하기 (황)
 09장 달라진 의식 (김)
 10장 인공정신과 실리콘의식 (송)
 11장 두뇌의 역설계 (신)
 12장 미래 : 물질을 초월한 정신 (조) 
 13장 순수한 에너지로 존재하는 의식 (조) 
 14장 외계인의 마음 (조)
 15장 맺음말 (조) 

[02]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내용 요약

12. 감각의 사회학 : 사회학은 지금까지 최종적으로 완성된 유형만을 기술해왔으나, 생명과학에서와 같이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심리적으로 현미경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상호 작용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감각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서로를 인지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공동체 삶, 공존 관계, 협력 관계 및 적대 관계를 살아가는데 있어 모든 감각들은 그 개별적인 특성에 따라 나름대로 특색 있는 기여를 한다.

13. 감사, 사회학적 접근 : 객관화된 상호작용 속에 있는 사물의 교환과 달리, 감사의 교환은 주관화된 상호작용으로 사회 전체를 결속시킨다. 도덕적 기억이라는 특성으로 감사는 시공간을 초월하게 만들지만, 이질적 상호작용 관계 속에서 개개인들은 내면의 사회학과정을 겪게 되고, 불가의적인 감사를 깨닫게 된다. 그 결과, 보편적인 의무의 분위기가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가서 사회는 결속되게 된다.

14. 신의, 사회심리학적 접근 : 신의는 인간관계가 스스로 유지되도록 하고 이원성을 통합시키는 사회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의와 더불어서 초개인적인 사회적 관계 형식이 지니니 안정성을 획득하며, 또한 삶에 대해서 그 의미와 가치로서 내용을 부여해 준다.

15. 편지, 비밀의 사회학 : 편지는 내용을 객관화시키는 형식이면서, 특정한 개인을 위해 쓰여지며, 편지를 쓰는 자는 자신의 개성과 주체성을 표현한다. 또 말보다 편지는 더 확실하고, 또 더 애매하다. 논리적 의미로는 편지가 말보다 더 구속력을 지니지만, 심층적이고 개인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편지가 말보다 더 자유롭다.

16. 모험 : 어떤 행위가 삶의 전체 맥락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되면서도 내부적으로 삶의 전체적인 강도와 심도를 느끼는 것이 모험이다.

17. 부끄러움의 심리학에 대해서 : 인격체로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주변에 어느 정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남이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을 지니게 되는데, 그 경계는 물론 문화적∙개인적 상황에 따라서 상당히 다르다. 이 영역이 침입을 받게 되면 - 그것이 객관적 법률을 어긴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 침입을 받은 사람은 이를 자신이 순간적으로 처하게 된 상태와 자신의 항구적인 인격적 규범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으로 받아들인다.  

[03] 오늘 얻은 인식의 지평확대 개념들

영적인 것은 미적인 것으로 연결된다.

(1) 종교와 예술

 종교와 예술은 그 발생에서부터 본질, 그리고 용도에 이르기까지 동질성을 갖는다는 주장이 지금까지 동서양의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논의되어왔다. 반대로 기독교의 성상파괴운동이나 이슬람교의 성상 부정, 그리고 중국 선종의 ‘불립문자’ 주장 등 예술적 형상화가 종교에 필수적이지 않거나 더 나아가 부정적이라고 간주했던 경향도 만만치 않게 존재했다. 어떤 입장이건 종교와 예술의 관계에서 종교적인 것은 항상 미적인 것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모더니즘이 등장한 이래 이 관계는 뒤바뀌었다. 더 이상 예술은 종교에 봉사하거나 종교적 내용을 주제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19세기에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는 창조적인 종교예술작품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현대예술가들이 더 이상 종교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관심을 가질 경우조차 고전적인 의미의 종교적 이미지나 상징으로 그들의 종교적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엘리아데가 지적하듯이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은 세속화된 현대예술의 상황에도 해당된다. 

 다른 한편에서 여전히 특정 종교에 봉사하는 종교적 용도의 예술작품들이 제작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창조적인 자기형식을 창출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상징들을 복제 재생산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렇게 현대의 종교예술은 현대예술의 중심에서 벗어나서 관습적이고 이차적인 것으로 격하되어 버렸다.

 종교예술에 관한 이론을 구성할 때 가장 기초적인 문제는 ‘종교적인 것과 미적인 것은 동질적인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사상가들마다 제각기 다른 결론을 제시해 왔다. 헤겔은 양자가 모두 절대정신의 자기표현이지만, 미적인 것은 감각적인 표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종교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헤겔의 입장에서 볼 때, 종교적인 것은 미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래서 미적인 것보다 우월하다. 

(2) 신영복 선생님의 아름다움 [from <강의> 논어편 06.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미(美)는 글자 그대로 양(羊) 자와 대(大) 자의 회의(會意)입니다. 양이 큰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양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생활의 물질적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고기는 먹고, 그 털과 가죽은 입고 신고, 그 기름은 연료로 사용하고, 그 뼈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한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뭇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언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熟知性)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이것은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소위 상품미학의 특징입니다. 오로지 팔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상품이고 팔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상품입니다. 따라서 광고 카피가 약속하는 그 상품의 유용성이 소비 단계에서 허구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허구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고 디자인의 부단한 변화로서의 패션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상품미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아니라 모름다움이 미의 본령이 되어버리는 거꾸로 된 의식이 자리 잡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상품미학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주변부의 종속 문화가 갖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중심부로부터 문화가 이식되는 주변부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미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3) 우리는 왜 아름다움에 이끌리는가? [Baccalaureat, 2004]
 
 모든 사람은 아름다움에 이끌린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종류의 아름다움에만 이끌리는 것일까? 아름다움 앞에서 각자가 느끼는 만족감은 같은 성격의 것일까? 그 차이점이 어떠하건 간에 미에 대한 관심은 보편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바로 이 보편성에 관해 우리는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왜 인간은 모두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것일까? 미와 관련된 경험의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정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미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주 노을과 자연의 아름다움, 혹은 미인이나 귀여운 동물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유명한 예술작품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이 대상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하는가? 미는 어떠한 만족을 인간에게 제공해 주는 것일까? 아름다움이란 단지 감각에만 연관된 것일까? 아니면 감각을 넘어 정신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정신과도 관계한다면 정신의 어떤 면과 연관관계를 맺고 있기에 우리는 아름다움 앞에서 그토록 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일까?
 
아름다움과 힘
 
 미(美)와 추(醜)에 대한 감정은 예술활동에 선행하여 존재한다. 아름다운 그림이나 조각품들이 존재하기 전에, 특별한 예술적 지식을 갖추기 전에 인간은 이미 꽃, 하늘, 바다, 얼굴 등에 대한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힘을 상징하는 젊음에 애착을 보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생물체는 젊음, 건강, 생기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약함, 병, 늙음은 죽음을 상징하므로 사람들에게 거부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순수함, 순결함에 이끌리는 것도 바로 이 생명의 논리에 의해서이다. 현실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대상은 인간에게 완전성으로 다가오며 그 앞에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된다. 또 자연계의 아름다움은 생물의 힘, 기능, 그 적합성과 연관된다. 더 넓은 바다가 더 아름답고 더 푸른 하늘이 더 아름답고 더 세찬 폭풍우가 더 아름답다. 마찬가지로 사자다운 사자, 토끼다운 토끼를 우리는 아름답다고 칭한다. 만약 토끼가 사자의 용맹성을 지녔다면 우리는 그것을 특이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아름다움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경마용 말이라면 가장 유연한 몸과 강건한 다리를 지닌, 즉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말이 사람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미란 세상 만물이 자신에게 부여된 속성을 최대한 발휘할 때, 그리하여 우주의 질서에 부합하는 역량을 과시할 때 발산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 미는 존재론적 의미를 띠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듯이 어떤 대상이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여 자신의 본질적 의무라 할 생명력을 극대화할 때 우리는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랄로(C. Lalo)는 "아름다움은 힘"이라고 정의했다.
 
미와 조화
 
 미를 평가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은 조화와 균형이다. 특히 고대에 이 원리는 매우 중시되었다. 플라톤은 미는 초감각적 존재이며 균형, 절도, 조화 등이 미의 원리라고 보았다. 그는 "적당한 척도와 비례를 유지하는 대상은 항상 아름답다"고 주장했고, "적당한 척도가 결여되면 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화와 균형이 중시되는 미에는 수학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질서와 비례는 아름다운 것이고 적합한 것"이며, "수 때문에 모든 사물은 아름답게 보인다"고 기술했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역시 "미는 완전성과 조화를 갖춘 사물이 거기에 간직된 형상의 빛남을 통해서 인식될 때 비로소 기쁨을 자아낸다"고 말한 바 있다. 미는 곧 조화와 비례라는 사고는 아주 오랫동안 이론과 실천을 통하여 서구인들을 지배해 왔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같은 사고에 영향을 받지 않은 이론은 거의 없다. 음악에서는 음률의 조화, 화음 등이 중시됐고, 건축이나 조각 또는 회화에서는 비례가 중시됐다. 지금도 조화와 균형은 미인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간주된다. 균형과 조화가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름다움은 곧 생명, 힘이라는 논리와도 연관된다. 일반적으로 균형은 생존에 있어 유리한 조건이다. 조화와 규칙성, 일정한 비율은 혼돈을 두려워하는 인간에게 평화를 상징하며 안도감을 안겨준다. 즉, 조화의 아름다움은 우주의 질서와 영원의 상징으로 인간을 매혹한다. 한편 다양한 것을 총체적으로 종합할 수 있는 유기적 성격도 한 사물을 아름답게 보일 수 있게 한다. 칸트에 따르면 다양한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그 나름의 자율적 총체성을 지닐 때 사물 혹은 자연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대자연의 조화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경탄과 감동도 다양성을 종합할 수 있는 자연의 역량과 연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조화미는 고전예술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고전예술은 시의 운율규칙, 미술의 황금률, 음악의 화성 등을 통해 이러한 통일성과 종합성의 미를 잘 보여주었다. 또한 양극성의 체험과 양극의 갈등을 뛰어넘는 초월적 미에 대한 최종적 지향 역시 조화와 통일성에 근거한 그들의 예술관을 보여준다. 고전주의 예술가들에게 있어 미란 '전체와 부분의 조화', '형식과 내용의 이상적인 결합',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의미했기에 그들은 적절한 통제와 자제,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통찰력, 섬세한 기교 등을 통해 미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미적 기준의 변화
 
 그러나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고전적 미의 이론은 낭만주의 운동과 경험주의 철학의 등장과 함께 추방되었다. 낭만파 예술가들은 미를 안정성보다는 생동성, 즉 규칙성의 결여, 박진감, 충만성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고대인들이 추구한 조화의 이상을 버리고, 내면적 부조화 속에서 자아의 열광에 의해 새로운 예술미가 창조된다고 생각했다. 19세기 이후의 예술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예술가들이 기존의 형식적 규칙을 따르는 것을 비판했으며 새로운 형식을 찾아 독창적인 미를 창조하려고 노력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현대예술에 있어 형식과 조화에 대한 강조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보들레르는 "미는 항상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수많은 예술가들은 규범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혼돈과 불균형의 미학을 실현하고 있다. 이 같은 미적 기준의 전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19세기 이후의 사상과 가치관이 우주를 구성하는 아폴론적 논리(질서, 조화, 이성)와 디오니소스적 논리(혼란, 역동성, 욕망) 중 후자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음으로써 미적 관점 역시 전환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앞에서 밝힌 힘의 논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조화나 질서에 의해 안전이 보장된다면 자유에 의해 생명은 보다 더 높은 생산력을 지니게 된다. 현대예술은 에너지의 억제를 강요하는 모든 틀, 규범을 거부하며 파괴나 추함마저도 추구하는 등 새로운 양태의 미를 선보이고 있다.

 미학자 미켈 뒤프렌(Mikel Dufrenne)은 시대를 통해 미의 개념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미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아마도 위험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과연 미는 단 하나인가, 혹은 여러 개인가? 어떤 대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나의 개인적인 판단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의 동의를 요구할 권리가 내게 있는가? 칸트는 실제로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것은 아름답다'라는 말은 얼마간 다른 사람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아름답다'라는 판단은 다른 사람들도 그 대상을 아름답다고 보아야 한다는 보편성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칸트는 감성적 현상으로서의 미의식의 기초를 선험적인 데 두었지만 그가 실제로 관심을 가진 미적 대상은 자신이 살았던 유럽의 것에 국한된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 지역이 제공하는 미의 기준을 보편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다른 시대, 다른 지역, 다른 사회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미적 취향을 연구하면서 미에 대한 정의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신체에 대한 평가를 살펴볼 때 그 미적 기준이 시대에 따라 얼마나 다른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미에 대한 평가가 그것을 평가하는 사람의 문화적 맥락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으로 상징되는 그리스적 코가 보편적 미의 상징이라고 말하거나, 아마존 부족들의 문신이 덜 아름답다고 주장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성을 묘사한 그림 앞에서 중세의 신부가 느끼는 것과 현대인이 느끼는 것도 결코 동일할 수 없다. 즉,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문화적ㆍ주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개인 각자의 취미와 관계가 있고, 시대나 문명에 따라서 달라진다. 낭만주의 작가들이 찬양했던 인적이 없는 깊은 숲은 고전주의 작가인 세비녜 부인(Marquise de Seigne)에게는 "무서운 고독"일 뿐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우리가 속한 문화적 상황뿐 아니라 우리의 주관에 의해서도 큰 영향을 받는다. 흄(D. Hume)은 "미는 사물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다. 미는 오로지 사물을 응시하는 사람의 머릿속에만 존재할 뿐이며, 모든 정신은 미를 서로 다르게 지각한다"라는 정의를 통해 어떤 대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실제로 우리는 대부분 각자의 기호와 취향에 따라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선택하고 거기서 기쁨을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가 동일한 예술작품 앞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작품에 대한 개인의 판단은 그가 속한 문화에 의해서도 특징지어진다. 한 개인의 사회문화적 위치와 그의 예술적 취향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부르디외(P. Bourdieu)는 《구별짓기》란 책에서 상세히 설명한다. 부르디외의 설명에 따르면 엘리트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추상미술이 농부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물건으로 여겨질 수 있다. 반대로 노동자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엘리트들은 천박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시할 것은 미적 관점도 권력의 논리와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엘리트들이 좋아하는 <피아노 평균율>, <푸가의 기법>은 자신들이 속한 세계를 다른 계급과 구분해 주는 기준이 되고 노동자들이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연속극의 스타는 그들이 꿈꾸는 이상을 상징한다. 이처럼 엘리트들과 노동자들이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대상은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 대상들이 모두 힘과 권력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서구여성의 미가 보편적 미로 각광받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근육질의 배우가 흠모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런 문화를 주도한 사회가 현실적인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권력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다시 말해 시대에 따라 미적 관점은 변하며, 그 변화의 중심에는 항상 힘과 권력이 있다.

 그렇다면 주관적인 평가를 보편적인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가? 아무리 미적 평가가 상대적이라고 해도 모나리자가 아름답다고 내가 말할 때 나는 암시적으로 다른 이들도 그렇게 평가할 것임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작품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피카소의 그림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데 반해 내 이웃은 그것을 어린애 장난 같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반대로 내게 전혀 매력이 없게 느껴지는 작품을 그는 훌륭한 것으로 평가하고 거실에 장식할 수도 있다.

 이처럼 단지 자신의 취향에만 익숙한 사람은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모두 이상한 것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감수성은 미를 넓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예상치 못했던 것에 대한 열린 마음은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지평을 넓혀준다. 독창적인 예술작품은 항상 기존의 미 개념을 의문시하는 데서 탄생하였다. 즉, 도전정신과 아름다움에 대한 다채로운 경험을 한 사람일수록 아름다움에 대한 강한 감수성을 지닐 수 있다. 역사적ㆍ문화적으로 다양한 예술작품을 경험함으로써 더 많은 종류의 아름다움에 이끌릴수록 인간은 더욱 자유로워진다. 미란 객관화된 주관성이자 주관적 보편성으로, 다양한 미적 표현의 수용을 통해 주체와 객체는 화해할 수 있다.
  
아름다움과 무목적성
 
 우리는 감수성을 통해 세상과 대화를 한다. 그 세상은 추한 것일 수도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으며, 우리와 세상의 관계는 아주 즉각적인 욕망의 관계일 수도 고차원적인 미적 관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감수성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을 느끼거나 그것과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헤겔은 예술작품이란 욕망과 상관없는 것임을 강조했다. 욕망에 의해 주체는 객체를 완전히 소유하는 데 반해 미적 관계에 있어 주체는 작품을 객체로 소유하지 않고 작품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그 자체로 인정한다. 그리고 바로 이 비물질적인 관계 속에서 정신적 만족감이 발생하게 된다. 즉,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은 우선 감각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첫 번째 단계에 불과하다. 쾌적한 것은 신체의 반응과 관련되는 데 반해 미적인 판단은 사물의 존재에 의해 동요되면 안 된다. 쾌적한 것은 신체적인 감관(感官)에 만족을 주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입과 코가 만족할 때, 이는 쾌적한 것이 된다. 또 바닷가에서 바람이 불어 시원함을 느낄 때 우리는 쾌적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질적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은 이와 다르다. 꽃을 보고서 그 향기에 취해 꽃을 찬양하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보고서 찬양하는 것과 구분되어야 한다.
 
 칸트는 두 종류의 미를 구분했다. 자연(꽃이나 말 등)이나 특수한 목적이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성당 등)에서 발견되는 동의적ㆍ점착적 미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이나 필요성을 지니지 않는 대상 앞에서 체험하는 자유로운 미이다. 이중 사물이 주는 만족감이 실제적 이득과 무관한 데서 발생하는 자유로운 미는 예술작품을 특징짓는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감탄'이란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아름다운 음악이나 멋진 그림을 감상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일상적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는 듯한 초월적 느낌을 갖게 된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그것의 효율성을 따지지 않고 완전히 미적인 측면에서 그 가치를 평가한다. 현대 미술평론가들에 의해 각광받는 신석기 시대의 작은 항아리의 경우 평론가들은 그것이 당시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아리의 미적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미를 위한 미'는 이 세상에 필요성의 논리를 넘어서는 영역이 존재함을 일깨워준다. 본질적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은 불필요한 것, 아무것에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일차적 필요와 연관이 없는 것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태풍을 만난 고대의 뱃사람이 바다를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하늘의 별을 보고 시를 읊기보다는 방향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귀족들에게 심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드넓은 논과 밭도 고대 노예에겐 감당해야 할 노역을 의미할 뿐이다. 내가 어떤 사물로부터 특정한 결과를 얻으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제대로 관찰할 여유가 없다. 기근을 걱정하는 농부는 땅의 색깔, 벌레의 모양,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을 것이다. 즉,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 대상의 실용적 가치에 무관심해졌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아름다움에 눈뜰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한 사물이 아름답게 보이려면 그 사물이 주는 만족감이 실질적 이득과 무관한 것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단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미에 대한 감수성이다. 이러한 감정은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인간만이 현실적 효용성의 논리를 떠나 미적인 판단을 할 수도 아름다움에 이끌릴 수도 있다는 사실은 미적 판단이 고유한 인간성의 영역임을 보여준다.
  
숭고미
 
 한편 평화, 안정감, 만족 등의 감정을 제공하는 미와 달리 충격, 불쾌, 공포 등을 안겨주는 숭고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칸트는 숭고미와 일반적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엄청 큰 나무나 성스러운 숲 속의 외로운 그늘은 숭고하며 꽃이나 자그마한 울타리, 또는 목각인형 등은 아름답다. 밤은 숭고하며 낮은 아름답다. 숭고한 느낌의 감정상태는 한여름 밤의 조용한 정적을 통해, 만약 밤의 푸르른 그늘을 통해 별들의 떨리는 빛이 나타나거나 또는 시야에 외로운 달이 떠 있다면, 점차 높은 감정의 수준으로 이끌어진다. 우정에 의해서나, 이 세상에 대한 멸시 내지는 영원성에 의해서 말이다. 눈부신 낮은 분주한 열망이나 흥미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자극한다. 숭고한 느낌 속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의 행동거지는 진지하고, 때론 놀라움에 굳어 있다. 반면 아름다움의 생생한 느낌은 반짝이는 명랑성을 띤 눈을 통해서, 웃음 짓는 모습이나 때론 떠들썩한 장난스러움을 통해 나타난다."
 
 이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숭고미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거나 정상의 한계를 초월한, 크고 웅장한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다. 일반적으로 미가 안정감과 평화를 선사한다면, 숭고는 경이, 당혹, 공포를 안겨준다. 숭고미는 대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때 유발되는 위압감을 내포하고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고고한 정신적 미의식을 경험하게 해준다. 숭고미는 창조주의 권능이 신앙인을 융합, 압도함으로써 나타나는 미의식이다. 때문에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대상은 우리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능력이 발동되어 자연보다 도덕적인 우리 자신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느낌으로써 우리는 숭고한 존재로 격상된다. 우리가 숭고의 체험 속에서 느끼는 심미적 감동은 현상적으로는 대상에 관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간의 이성,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대상에 대해 느끼는 존경과 전율은 실상 우리의 이성 자신에 대한 것이다. …… 그리하여 자연 속에서 느끼는 숭고의 감정은 우리 자신의 사명에 대한 존경심이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주관 속의 인간성의 이념에 대해 표시해야 할 존경심을 대상에 대한 것으로 뒤바꾸는 일종의 치환(subreption)을 통하여 자연의 객체에다 존경심을 표시할 뿐인 것이다." 칸트의 숭고미에 관한 논지를 따른다면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은 인간 외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이미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대상이 눈앞에 있더라도 그것을 미적 존재로 승화시킬 수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인간은 인간인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 이상의 위대한 자, 보다 위대하고 높은 것을 꿈꾸는데 이러한 초월적 감정을 우리는 숭고미를 통해 경험하게 된다. 요컨대 숭고미가 주는 정신적 고양감은 현실적ㆍ 기계론적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움은 정신적 선을 증명한다
 
 숭고라는 미적 감정이 외부세계에 대한 도덕적 자질과 연관되어 있음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좀더 본질적인 의미에서 미와 선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미는 원래 진, 선, 미의 연관관계에서 고찰되었으며 인간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로 여겨져 왔다. 칸트는 아름다움이란 선을 상징하며 아름다움과 도덕성 사이엔 완벽한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아름다움에 이끌린다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의식이 활기 있게 작용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플라톤은 미(칼로스, kalos)와 선(아가톤, agathon)이 하나가 된 상태로서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아름답고 선한 것)라는 이상을 내세웠다. 나이젤 발리(Nigel Barley)는 미를 악과 연관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하얀 도화지를 앞에 둔 화가의 눈에서 악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정화의 작용을 하며 인간의 정서를 고양시킨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예술은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이상과 자유를 추구하게 한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은 정신적 삶과 선에 대한 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미의 이상은 무한한 생명력에서 발견된다. 형식의 문제를 떠나 우리가 아름답다고 간주하는 것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힘과 창조라는 생명력이다. 창조적 생명력은 자유로운 정신이다. 넓은 바다나 파란 하늘을 보고 경외감을 느끼듯 우리는 현실적 구속을 뛰어넘는 자연이나 예술작품 앞에서 자유로움에 감탄과 희열을 느끼게 되며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기르는 것은 이익, 효율성, 생존경쟁에 기초한 세상의 논리를 넘어 도덕적 영혼을 기르는 작업이 될 것이다. 또 다양한 아름다움에 이끌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여러 세기의 문화와 예술작품을 폭넓게 감상할 필요가 있다.  인간만이 아름다움에 이끌릴 수 있다. 또한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아름답다고 결정할 수 있는 자도 인간뿐이다. 즉, 아름다움에 대한 모든 감수성은 인간성을 증명한다. 우리를 매혹시키는 아름다움들은 인간이 세상에 정신적 고유함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재확인시켜 준다. 진, 선, 미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아름다움 속에서 인간은 자유롭고 무한한 생명력을 경험한다.

(04) 예술적 감정과 종교적 감정의 차이와 공통점은 무엇인가? [Baccalaureat, 1995]
 
 괴테는 바흐의 음악을 들을 때 "마치 영원한 하모니가 스스로를 환대하는 것 같은, 또는 창조 바로 직전에 신의 가슴에 안긴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예술을 감상할 때 성스러운 느낌을 경험한다고 토로한다. 어떤 점에서 예술적 감정과 종교적 감정은 일치할까? 예술과 종교는 둘 모두 인간성을 고양하는 정신활동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과 종교를 성스러움의 영역에 연관시킨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결집시키는 능력이 있다. 역사적으로도 종교적 성향을 띤 예술작품들이 많았고 그러한 작품들은 예술과 종교 사이의 구분을 어렵게 하는 게 사실이다. 그리스 신전이나 성서의 유명한 장면을 재현한 작품들, 신을 묘사한 조각, 종교음악 등은 예술이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두 감정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술과 종교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알아보기로 하자.
  
무목적성의 성스러움
 
 헤겔은 "사람들은 예술 안에 그들의 가장 고양된 생각을 놔두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외에도 수많은 철학자들은 예술에 대한 찬사 어린 글을 남겼다. 특히 예술을 현실과 동떨어진 초월적 감성의 보고로 인지하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예술은 성스러운 것이며 파괴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몇 년 전에 있었던 바그다드 박물관의 약탈사건을 접하면서 사람들이 느낀 상실감만 보더라도 우리가 예술작품을 다른 일반적인 것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그다드의 박물관이 약탈되었을 때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분노했는데 이들의 분노는 종교적 상징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 유산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야기된 것이었다.

 고대 예술가들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 인식되었으며 그들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 것, 종교적 진리를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즉, 일반인들의 눈에 그들은 비밀스런 영역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성스러움을 인간의 기호로 해석하는 사람들로 비춰졌다. 성스럽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세속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성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비밀(비밀은 어원상으로 '그로부터 사람들이 분리된 것'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볼 때, 성스러운 것은 절대적인 존경을 받아야 하는 순수하고 우수한 것이다. 《인간과 성스러운 것》에서 로제 카유아(Roger Caillois)는 "성스러운 것이란 인간이 자신의 모든 행동을 걸고 있는 존재, 사물, 사고이다. 그것은 의심받거나 비판받거나 농담거리가 될 수 없는 것, 절대로 부정당하거나 배반당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중세부터 화가들과 조각가들은 이 비밀스럽고 성스러운 영역을 묘사하는 종교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성서에 묘사된 장면들을 표현했고 그들의 작품으로 인해 일반대중들이 종교적 감정을 갖게 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종교적 주제를 다루지 않은 예술작품일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결코 성스럽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인간이 물질적인 것을 갖고 기술을 통해 창조한 것이 예술작품임에도 왜 우리는 그 앞에서 경탄과 감동을 느끼는 것일까? 예술작품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어 특별한 것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그것이 생물학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가치, 즉 자연성의 극복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술적 감정과 종교적 감정은 모두 무목적성과 동기의 순수성을 지향한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행하는 사심 없는 자선이나 덕이 가치가 있음을 종교는 항상 설파해 왔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실용적 가치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예술가는 기술자, 상업예술가, 기업인과 다르다. 그들은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신비만큼 정의하기 힘든 정신적 영역에 속한 물건을 만들어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노동자의 평범한 일상과 예술가의 비범하고 낭만적인 모습을 대조하고 후자를 신의 영감을 받은 비현실적 존재로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술이 사회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기술이나 과학과 달리 인간의 상상ㆍ욕망ㆍ감정 등을 표현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삶에 이바지한다. 즉, 아무리 필요 없어 보인다 해도 인류의 삶에 이바지한다는 기본적 가치마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목적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의 절실한 표현 욕구나 심원한 정신세계를 작품에 담음으로써 예술은 더욱 소중한 삶의 요소가 될 수 있다. 예술의 이러한 특성을 가리켜서 칸트는 '무관심의 만족(das interesselose Wohlegefallen)'이라 했다. 이때 무관심이란 특정한 실용적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며, 만족이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넉넉하게, 새롭게 하는 심미적 효과를 준다는 뜻이다.

 예술과 종교는 무아(無我)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신에 대한 봉사나 작품에 몰두하여 자아를 잊어버리는 것은 종교와 예술 사이의 유대관계를 입증해 준다. 우리는 자주 예술가나 종교가들이 인생을 자신의 소명에 모두 쏟아버리고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 것을 본다. 바로 이러한 순수한 열정, 순수한 동기가 모든 종교와 예술의 추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초월에의 의지
 
 종교와 예술이 항상 평화로운 동지의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종교가 인간의 삶을 주도하던 중세에 철학과 예술은 종교의 시녀로 머물렀다. 반면 무신론적 사고로부터 영향을 받은 현대의 예술지상주의자들은 의심에 찬 눈으로 종교를 바라본다. 지금도 예술과 종교의 경쟁관계는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성(聖)을 추구하는 종교와 미(美)를 추구하는 예술은 서로에게 무심할 수 없다. 수많은 종교의식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는 형상 없이는 지속될 수 없기에 예술에서 형상을 찾고, 예술은 종교에서 초월적 감성의 근원을 찾는다. 우리는 괴테, 베토벤, 고흐 등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에서 종교적 감동과 성스러움을 경험하며 그에 경의를 표한다.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교와 예술은 마치 자기들의 내면적 관계를 의심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관계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두 친한 친구들과 같이, 서로 나란히 서 있다." 예술과 종교는 둘 다 초월적 이상과 절대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나타낸다. 또한 이 절대성의 개념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과학영역과 구분된다. 이러한 예술관은 특히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옹호되었는데 그들은 예술이 시-공간적 한계를 초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이데거(M. Heidegger)의 경우엔 예술을 존재의 진리가 현현되는 곳으로 정의한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사회형태, 즉 이성적인 사고, 그리고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보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오늘날 유일하게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예술이며 예술은 인간에게 삶의 전환점이 된다. 이처럼 진리와 절대성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도 예술적 감정과 종교적 감정은 공통점을 지닌다.
 
현대예술과 신성의 결별
 
 그러나 성(聖)과 속(俗)이 구분된 현대에 와서도 예술적 감정이 성스러움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헤겔은 예술은 이데아의 감각적인 출현(mainfestation)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 본질적 목적에서 "예술은 그 진실과 생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점점 더 세속화되는 19세기의 예술은 더 이상 성스러움을 띠지 않고 따라서 더 이상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뒤샹(M. Duchamp)의 변기나 병따개, 앤디 워홀의 브릴로ㆍ깡통ㆍ마릴린의 초상 등 일상성을 작품에 옮겨놓은 현대예술 작품들을 보면 신성성은 사라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오늘날에도 예술은 신성한 존재로 평가되는가?

 현대예술 이론가들은 예술은 분명 절대성의 영역을 지니고 있지만 해석되거나 토론되지 못할 만큼 신성한 존재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오히려 예술작품은 단순한 숭앙의 대상이 아니라 여러 의견들이 충돌할 수 있는 거센 논쟁의 장이다. 요컨대 20세기는 예술을 성스러움 그 자체로 보았던 특별한 문화의 끝을 의미한다. 우리는 더 이상 예술에서 신성을 찾으며 그것을 찬양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성스러움을 상징했던 종교적 장소로서의 성당은 이제 건축가의 정신과 독창성이 살아 있는 미적 대상으로 평가받는다. 사원에 들어가기 전 우리는 더 이상 무릎 꿇지 않으며 라스코 동굴에서 발견된 경외감이 우리에겐 낯설다. 조토(Giotto di Bondone)가 예수의 십자가를 그릴 때 성스러운 곳(스크로베니의 성당)에서 그것을 제작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예술과 성스러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제우스나 아테나의 동상을 우리는 더 이상 고대 그리스 사람들처럼 바라보지 않는다. 신 그 자체를 의미했던 동상들이 이제 우리에겐 박물관에 소장된 한 작품일 뿐이다.

 게다가 현대의 기술은 예술품의 복사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선 반드시 박물관이나 콘서트장을 방문해야 했던 우리 선조들과 달리 이제 우리는 복사본이나 CD 등을 통해 그것들을 간접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예술작품 재생술 역시 예술과 인간의 관계를 변형시키고 있다.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필요했던 얼마간의 절차와 노력이 종교의식을 떠오르게 한다면 어느 곳에서나 어떤 형태로든 작품 감상이 가능하다는 현대적 접근은 오늘날의 세속적 예술관을 반영한다. 벤야민(W. Benjamin)은 예술 복사의 시대에 대한 글(《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은 모든 성스러움을 잃고 있으며 더 이상 영원한 가치를 상징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이러한 상황을 그는 아우라(Aura)의 붕괴라고 정의하는데, 여기서 아우라란 종교적 의식에 기원을 둔 예술작품에 깃들인 감히 근접할 수 없게 하는 어떤 분위기를 지칭한다. 말하자면 종교의식에 사용되던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성격은 유일한 원본에서만 나타나므로 현존성을 결여한 사진이나 영화 등 복제된 작품에서는 아우라가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 벤야민의 설명이다.

 예술의 창조적 아름다움 르네상스 이후의 예술에서 과거의 종교적 숭배는 세속적인 미의 숭배로 대체되었다. 현대예술 이론가들은 예술과 종교가 우리를 매혹하고 열광시킨다고 해서 그 느낌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될 것임을 강조한다. 종교적 감정이 일종의 두려움과 경건함을 동반한다면 예술은 보다 신비론적인 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술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왠지 모를 신비감, 혹은 형이상학적인 느낌에 휩싸이며 순간적으로나마 감각적 현실을 잊고 아름다움에 도취된다. 즉, 예술은 우선적으로 미적인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여기서 미라 함은 자연에서 보는 숭고미나 무조건적인 쾌감을 주는 감각적 미가 아니다. 예술에서의 아름다움은 순수한 창조로서의 아름다움이다. 칸딘스키(V. V. Kandinsky)는 예술가를 "미의 사제"라고 불렀다. 요컨대 미를 대하는 예술인들의 자세는 외양적 형식과 미를 경계하며 예술을 부차적이고 세속적인 허영심의 상징으로 이해한 종교인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한편 예술적ㆍ종교적 활동을 하는 개인을 바라보는 관점도 예술과 종교는 서로 확연히 다르다. 예술은 개인의 내면적인 이상이 강조된 활동인 데 반해 종교는 공동체와 보편신앙을 강조한다. 예술가는 끊임없이 자아를 추구하며 그 자신을 위해 세계를 창조하는 데 반해 종교인들은 개성보다는 동질적인 신앙심에서 구원을 찾고자 한다. 또한 예술의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가치와 규범의 영구성을 강조하는 종교적 태도 역시 예술적 감정과 종교적 감정의 차이를 보여준다. 예술은 우리에게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준다. 종교작품을 대함에 있어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표현된 대상이지만 예술작품을 감상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무엇이 표현되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예술작품은 예술가 개개인의 세계관과 개성을 담고 있고 우리는 그 독특한 소우주에서 대우주의 역량을 발견한다. 아름다움의 담론으로서의 예술은 더 이상 종교적 가치와 그 틀 안에 한정되기를 거부한다. 종교가 일자(一者)를 향하고 있다면 예술의 목표는 타자성, 무한성의 추구이다. 우리는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술을 통해서만 나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창조할 수 있다. 이는 주어진 가치관을 따르고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종교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예술만의 특징으로서 왜 예술이 자유의 상징인가를 잘 보여준다.
  
 예술적 감정과 종교적 감정에 대한 비교는 오랫동안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예술을 이해하는 시도가 있었고, 예술가의 입장에서 종교를 이해하는 시도가 있었다. 그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둘 사이의 연관관계에 관심을 표명했다. 이 주제를 둘러싼 무수한 논쟁이 보여주듯이 종교적 감정과 예술적 감정의 유사성과 상이성을 명확히 밝힌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서양 근대에 종교로부터 분리된 예술은 모든 분야에서 세속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현대에 와서 점점 더 종교적 영역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예술은 미를, 종교는 성스러움을 주관하고, 예술은 개인의 실험적 창의성을, 종교는 보편적 신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예술적 감정과 종교적 감정은 분명한 차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예술가와 종교인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이상을 위해 활동한다 해도 둘 모두 행위의 무목적성과 초월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종교적 감정과 예술적 감정의 교차점을 발견할 수 있다.
 
헤겔의 《미학》에 나오는 "예술은 죽었다"라는 표현.
 
 헤겔에 따르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술작품이 성스러움으로 숭앙받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현대에 와서 예술은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유흥의 한 양식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실제로 과거 예술작품을 대할 때 볼 수 있었던 경건함은 많이 사라졌다. 헤겔은 "예술은 진리와 삶을 잃었다" "예술은 우리들에게 그 역할이 주는 의미에 한해서 과거의 것으로 남겨지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도 남겼는데,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된다. 헤겔이 이 말을 한 것은 1820년대였는데 그 이후에도 수많은 걸작들이 나오지 않았는가? 헤겔이 말하는 예술의 죽음은 예술 전체의 죽음이 아니라 예술의 고유한 본질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헤겔의 주장은 자신의 예술관에만 치우친 편협한 결론이 아닐까? 헤겔은 예술이 그 진정한 의미를 잃고 죽어가는 것에 대해 우리들은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예술의 죽음은 인류가 나아가는 과정의 한 부분일 뿐이며 정신적인 세계는 감각적인 것과 예술의 영역을 버리고 절대이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을 배제한 정신적 발전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예술은 죽었다"라는 표현은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포스트모더니즘적 예술관이 보여주듯 예술은 성스럽지 않은 가볍고 유쾌한 소비상품일 수 있는가? 예술은 반드시 진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5) 가우디 -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능률 실용영어 I S02. Building for Life - 고1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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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udi was born into a poor family in 1852 in the Catalonia region of Spain. He was a sickly child, whose poor health kept him from being active. Gaudi spent a lot of time alone looking at nature and became very interested in its shapes, colors and designs. His love of nature was combined with a strong interest in architecture when he visited an ancient church at a historical site in Tarragona. Moved by its greatness, he was inspired to design his own amazing buildings.

 In 1868, Gaudi moved to Barcelona to study architecture at the Escola Superior d'Arquitectura. Later, in order to graduate, he had to complete once final project: creating a design for a hospital. The school's dean, who didn't like Gaudi for once criticizing a building he had designed, failed Gaudi. Fortunately, one of Gaudi's professors gave him another chance, and he successfully completed a project designing a fountain. Signing Gaudi's diploma, the dean said, "Who knows if we have given this diploma to a nut or to a genius? Only time will tell."

 Shortly after graduating, Gaudi was asked to design a display case to show products at the Paris World Fair of 1878. A rich man named Eusebi Güell fell in love with Gaudi's display case design and went to see him in person. Güell praised Gaudi's talent and eventually became Gaudi's close friend and greatest supporter. Thanks to Güell's support, Gaudi was able to start designing buildings the way he wanted.

 When asked about the inspiration for his designs, Gaudi is quoted as saying, "Everything comes from the great book of nature." In 1883, Gaudi was given the job of designing a house for a tile factory owner. Known as Casa Vicens, the building was designed to fit into its natural surroundings, and includes colorful tiles showing yellow flowers and posts covered by plants. Later, Gaudi was asked to design a large summer house known as El Capricho, which was also constructed in such a way as to prevent harm to the natural features around it. Around the turn of the century, Güell asked Gaudi to build him a park that later became known as Park Güell. Gaudi made every effort to keep the natural features of the land it was built on, while creating a park filled with colorful and playful designs. Each of these three amazing projects reflects Gaudi's idea that nature should always come first and architecture should only add to it.

 Gaudi's most famous work, however, has yet to be finished. In 1883, he started working on a church in Barcelona known as the Sagrada Familia. The project combined Gothic and Art Nouveau styles of architecture, and included the construction of eighteen church spires. Gaudi wanted the church to be built only by donations. In this regard, it is said that he was inspired by a 14th century church he had visited when he was a poor student, called lglesia de Santa Maria del Mar, which was built thanks to people's donations. Gaudi also tried to keep the construction site peaceful so that it didn't disturb the community, and he demanded that poor and disabled people be allowed to help with the construction.

 After the construction of the Sagrada Familia began, several of Gaudi's family members and his dearest friend Güell died. Then, Gaudi started having health problems of his own. Believing he didn't have long to live, he said that it would be his final project. To make things worse, serious economic problems in the city of Barcelona and the start of World War I caused the construction to slow down. Despite this, Gaudi was not disturbed, with his mind made up to keep on building his greatest work. "It is impossible to build this church in a hundred years," he said. "If we can't finish it, the next generation will take our place. And if the next generation can't finish it, let the following generation do it."

 After being hit by a tram on June 7, 1926, Gaudi was taken to a hospital for the poor. He had been mistaken as a poor person living on the street because he had stopped caring about his looks, focusing only on architecture. When his friends finally found him the next day and wanted to move him to a better hospital, he turned them down. Gaudi, who did not consider himself better than anyone else, told, them, "I belong here among the poor." He died two days later at the age of 74. In his will, he asked not to have a funeral procession held for him and donated his entire fortune to the church construction, which was still less than one fourth complete. After he passed away, he was laid to rest in the middle of the Sagrada Familia.

 Today, Gaudi is remembered as one of the world's most unique architects. Seven of his buildings have been chosen as UNESCO World Heritage Sites, including the Sagrada Familia, which is expected to be completed in 2026, one hundred years after he died. Only when, the construction is finished will Gaudi's big dream be realized for the whole world to come and see his work.

(6)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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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아렌트

 1960년,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악명 높은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정보부에 붙잡혔다. 그가 이스라엘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아렌트는 [뉴요커]의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 과정을 취재하고 아이히만을 심츰 면접했다. 1961년 12월에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직접 재판정에서 지켜본 그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1963년에 출판되어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먼저 아렌트는 피고석의 아이히만에게서 “실제로 저지른 악행에 비해 너무 평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피에 굶주린 악귀도, 냉혹한 악당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아이히만은 특별한 인간이 아니었다. 어떤 이념에 광분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했을 뿐이었다. 아이히만은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되풀이했다. 그리고 칸트까지 인용하며 명령은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말했다. 비록 그 내용이 수백만의 죄 없는 사람들을 살육하는 것이라도! 자신이 저지른 일과 자신의 책임을 연결 짓지 못한 채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아이히만에게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냈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 그리고 파시즘의 광기로든 뭐든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뿐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독일 태생의 유대계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인터뷰해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내놓는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행을 '악의 평범성'으로 개념화한다. 흔히 '악의 평범성'을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아렌트는 이는 '오독'이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그 사람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기를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85쪽)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이 무능력이에요. 그래요. 그런 무능력."(86쪽) => 그러니까 악은 공감 능력을 상실한 메마른 가슴에 깃드는 것이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악의 참모습인 것이다. 얼마 전 타계한 지그문트 바우만도 "오늘날 악은 누군가의 고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때,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할 때, 말없는 윤리적 시선을 외면하는 눈길과 무감각 속에서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악은 애국심이나 의무감을 지닌 첩보요원이 어느 평범한 시민의 삶을 단호하게 파괴할 때 존재할 수도 있다"고 일갈했다. 아이히만을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은 '애국심'이니 '충성'이니 하는 맹목적 가치들(특히 독재정권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사들)이 악의 자양분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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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히히만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아무 범행 동기가 없었어요. 아이히만은 전형적인 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때 정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신사예요. 여기에 이데올로기는 그다지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봐요."(77쪽)

"망설임은 있었죠. 그들은 망설임을 가진 공무원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의 망설임은 인간이라면 그저 한 사람의 공무원으로 존재하기를 멈춰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명확히 보여줄 정도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어요."(95쪽)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편이 낫다. 나는 통일체니까"라고 했다. '시대와의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숙명을 예견한 말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하나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 전체와의 불일치 대신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를 선택한다.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마저도 '자기합리화' 기제를 통해 무력화시킨다. 아이히만을 비롯해 전범재판에 넘겨진 누구도 잘못을 뉘우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권위있는 조직의 일부일 때 부당함에 대한 인식은 얼마나 많이 증발할까요? 개인에게 주어진 책임은 그저 부분적인 책임일 뿐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의 도덕적 통찰을 얻지 못하게 할까요? 아이히만은 '나는 내 책상에 앉아 나한테 주어진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99쪽)

"관료제가 본질적으로 익명성을 갖는다는 사실 말고도, 무자비한 행위는 무엇이건 책임이 증발되는 것을 허용해요."(100쪽) 자신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내비치지 않았던 아이히만이 심문 과정에서 괴로워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아이히만은 그가 유대인에게 저지른 그 어떤 일에도 괴로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런 그도 한 가지 사소한 사건에 괴로워했어요. 빈에서 유대인 공동체 회장을 심문하다가 그 사람 뺨을 때린 일이죠. 사람 얼굴을 때리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일들이 많은 이들에 일어났다는 걸 세상이 다 아는데요, 하지만 그는 뺨을 때린 자신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그걸 대단히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194쪽)

예루살렘 법정의 판결문은 이랬다.
 
"실제로 피해자를 살해한 사람과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는 책임 범위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오히려 책임의 정도는 자신의 두 손으로 치명적인 살해 도구를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증가한다."(102쪽)

 아이히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 "자존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물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건 기본적으로 사유를 하는 거예요. 전문적인 사유가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유를 말하는 거예요."(98쪽)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180쪽)

 악은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인과 가해자가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는 피해자가 감내한 고통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피해자의 '명예와 품위'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가해자가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가 피해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은 사람의 명예 및 품위와 관련된다고 말했어요. 이건 피해자가 감내한 고통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무엇인가 올바로 세우는 것하고도 전혀 관계가 없고요. 이건 정말로 명예와 품위의 문제예요. 독일인들이 그들 가운데 살인자를 두고서도 추호도 동요하지 않으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유대인의 명예와 품위에 반하는 생각이에요."(104쪽)

(07)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 - 스탠리 밀그램 실험 동영상

(08) 자코모 카사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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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사노바'라는 단어는 바람둥이, 호색가의 대명사처럼 사용된다. 하지만 카사노바가 자신의 이름이 이런 식의 대명사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면 조금 억울하지 않을까. 카사노바라는 인물은 단순한 바람둥이라기에는 꽤나 복잡한 이력을 가지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유럽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여행을 했던 모험가이자, 10대에 법학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이면서 4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저술가이기도 하다. 게다가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했고 화학, 철학, 문학에 박식했으며 펜싱과 도박, 춤을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물론 그는 호색가이기도 했다. 평생 수십 명의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었고, 자신의 자식이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걸 알고 속으로 웃기도 한 인물이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카사노바 만한 바람둥이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 카사노바만 유독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취급받는 걸까?

 그 이유는 아마도 카사노바가 자신의 삶을 돌아본 회고록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카사노바는 말년에 둑스 성의 사서로 일하면서 수십 권의 저서를 썼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내 삶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자서전이다. 

여행가이자 모험가였던, 카사노바

 카사노바는 172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6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10대 시절에 파도바의 대학에서 로마법과 교회법으로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타고난 방랑벽으로 인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않은 채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카사노바는 젊은 시절에 안정적인 직장을 갖지 않았고 고정적인 수입도 없었다. 

 그런데도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카사노바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고, 적당한 때에 대담하게 벌인 사업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업들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카사노바는 사업을 접고 돈이 궁해질 때면 사람들에게서 감언이설로 돈을 얻어내거나, 도박판을 휩쓸고 다니면서 돈을 긁어모으기도 했다.

 카사노바는 여행가이자 모험가이기도 했다. 그는 1755년에 베네치아의 피옴비 감옥에 투옥된다.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위험인물'이라는 것이 그의 죄목이었다. 그는 5년형을 선고받지만, 18개월 후에 탈옥에 성공한다. 그는 탈옥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감옥소장에게 남긴다.

 "사법재판소 재판관들이 죄수를 강력한 권력으로 감옥에 가두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쓰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석방될 수 없는 죄수가 자유를 얻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재판관의 권리는 정의에 입각해야 하고, 죄수의 권리는 자연의 본성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재판관이 죄수를 감옥에 처넣을 때 동의를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수도 탈옥하기 위해 재판관의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는 도시마다 '떠나라'는 명령 받고 추방당한 카사노바

 이때부터 본격적인 방랑이 시작된다. 졸지에 탈옥수의 신분이 된 카사노바는 이후에 오랫동안 베네치아에 돌아가지 못하고 뮌헨과 스트라스부르, 파리, 런던, 페테르부르크를 떠도는 방랑생활을 한다. 물론 가는 도시마다 많은 여자들을 만나서 애정행각을 벌인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나고 러시아에서는 예카테리나 여제와 대화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각 나라에서 받은 인상을 꼼꼼히 회고록에 남긴다.

 카사노바는 파리를 가리켜서 '결함이 많지만 이 세상에서 유일한 진짜 도시'라고 표현하고, 영국인에 대해서는 '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걸 자랑으로 여기고 무례하고 무뚝뚝하다'라고 평한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술주정은 러시아 전체에 만연되어 있는 악습이다' '진정한 독재가 어떤 것인지 보고 싶거든 러시아로 가보라'고 말한다.

 카사노바의 거침없는 모험도 1766년을 기점으로 내리막으로 들어선다. 남자의 액년은 마흔 두 살이라고 한다. 카사노바도 이 나이로 들어설 즈음부터는 더 이상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1766년에 바르샤바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카사노바는 이후에 가는 도시마다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추방당한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파리에서도 추방당한 카사노바는 탈옥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방랑을 계속한다.

 카사노바의 말년은 우울한 나날이었다. 이후에 사면되어서 베네치아로 돌아가지만, 다시 그 곳에서도 추방당한다. 이미 '정치적 망명자이자 사기꾼'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는 카사노바를 반겨줄 도시는 유럽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카사노바는 1785년에 둑스 성의 사서로 자리 잡고 1798년에 죽을 때 까지 그곳에서 많은 저서를 남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카사노바는 성의 하인들에게 경멸당하고 비웃음 받는 존재였다고 한다. 

'진짜' 카사노바와 마주해보자

 카사노바가 회고록을 쓰기로 작정한 것도 이런 배경이었을 것이다. 화려했던 젊은 시절은 가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것은 경멸과 모욕뿐. 카사노바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 하루에 13시간씩 회고록을 저술했다고 한다. 당시의 편지에서 카사노바는 이렇게 말한다.

 "일을 하면 할수록 온몸에 열기가 느껴집니다. 이 일이 내 앞에 있는 한, 나의 삶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즐거운 일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이 어떻게 해서 나한테 즐거움을 주는지 당신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회고록 원본의 운명도 카사노바만큼이나 순탄하지 못했다. 외설적인 표현 때문에 오랫동안 제대로 공개되지 못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야 제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출판되었다. 한길사에서 출간된 <카사노바 나의 편력>은 바로 이 회고록이다. 총 12권의 회고록 중에서 재미있고 중요한 부분한 모아서 3권으로 편역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카사노바의 흥미진진한 일대기이자 프랑스 혁명을 앞둔 유럽사회의 자유로운 풍경을 알려주는 좋은 사료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보면 베네치아의 운하를 달리는 곤돌라와 파리의 오페라 극장, 런던의 어두운 골목이 눈앞에 나타난다. 무엇보다 사기꾼과 호색한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카사노바, 그러면서도 삶과 자유를 사랑했던 카사노바의 인생과 내면을 직접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의미가 있다.

(09) 황우석에게 묻는다 : 과학적 진리는 공익을 위해 은폐되어도 좋은가?

 형이상학과는 달리 주관적 왜곡으로부터 벗어나 엄격한 진리를 발견하는 엄밀성의 학문이라고 알려진 과학의 세계에서도 어쩔 수 없이 오류는 발견된다. 도구가 발전하고 통찰력이 증대되면서 오류는 차츰 극복된다. 과학사는 오류 극복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독일의 수의학 박사이자 인간 유전학 박사인 하인리히 찬클 교수의 저서 <과학의 사기꾼>은 주관적 의도를 배제해야 할 과학에 과학자의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었던 과학사의 수많은 사례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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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의 사기꾼들

 1866년 해켈(Ε. Η. Haeckel)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발생초기 단계에서 아가미 구멍이나 꼬리의 흔적 같은 공통된 특징을 지닌다는 ‘배아의 발생 반복설’을 주장했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 한다."는 유명한 명제로 요약되는 이 생물학 법칙은 다윈의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높이 평가됐다. 또 이 배아의 발생 반복설은 생물학이나 의과 대학 학생들에게 여러 세대 동안 사실로서 제시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낙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낙태 시술자는 낙태 시술을 받고 있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물고기나 원숭이 단계, 즉 아직 인간이 되기 전의 단계라고 주장했다. 

 배아의 발생 반복설을 발표할 당시 헤켈은 그의 견해를 지지해 줄 증거가 없었다. 헤켈은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조작과 위조를 행했다. 그는 인간 배아의 초기 단계 모습이 올챙이처럼 보이도록 꼬리 뼈를 줄이거나 늘리는 방식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조작했다. 심지어 그는 인간과 개의 배아(胚芽) 사이에 유사점은 부각시키고 다른 점은 감추는 방식으로 다른 과학자들이 그려 놓은 그림을 교묘하게 조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헤켈의 법칙은 당시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받아들여졌다가 130년이 지난 1997년, <사이언스> 9월호에 생물학에서 가장 위대한 위조로 최종 판명되었다.

 뉴욕 메모리얼 슬로언 케터링 암 센터의 윌리엄 서머린 박사는 1974년 면역 체계의 이종 조직에 대한 반응 실험의 결과를 위조한 것을 시인한 뒤 연구소를 사직 했다. 서머린 박사는 1971년 흰색 생쥐에 검은색 사인펜 칠을 해 검은색 생쥐의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식한 것처럼 허위 논문을 발표했다. 서머린이 내놓은 생쥐는 그럴 듯했다. 피부가 하얀 생쥐의 일정 부분에 검은 반점이 박힌 생쥐의 피부를 이식한 것이 확연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생쥐 사육사에 의해 검은 반점은 서머린이 사인펜으로 그려 넣은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과학의 사기꾼>의 저자 하인리히 찬클(Heinrich Zankl) 교수는 자연과학과 심리학, 의학과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뒤흔든 50여 명의 지적 사기꾼들을 고발한다. 저자는 객관을 전제로 한 학문인 과학에 얼마나 다양한 위조와 속임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야기한다. 가짜를 만드는 ‘위조(forging)’, 미리 정해 놓은 답에 맞춰 측정값을 조작하는 ‘다듬기(trimming)’, 입맛에 맞는 자료만 선택하는 ‘요리하기(cooking)’, ‘표절’ 등이 사기꾼들의 대표적인 수법이다. 

 학술적 사기 중 가장 심각한 것으로 실험이나 관찰의 결과들을 임의로 만들거나 조작하는 행위인 ‘위조’를 꼽을 수 있다. 위조보다 훨씬 만연되었던 사기 형태가 ‘요리하기’이다. 자신의 가설에 들어맞지 않는 값들을 아예 빼 버려서 ‘입맛에 맞게’ 실험이나 계산의 결과를 조작하는 것이 '요리하기’이다.

 저자는 ‘위조’와 ‘다듬기’를 한 ‘사기꾼’에 대해선 단호히 비판하지만 ‘요리하기’의 경우엔 자료 조작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이나 멘델처럼 과학적으로 중요한 지식을 만드는 경우가 있음을 빼놓지 않는다. 엄청난 자료의 홍수 속에서 쓸모없는 것들을 버리고 어떤 값들이 의미 있는 것인지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천재적인 과학자의 역할이라고 그들을 옹호한다. 

 ‘요리하기’보다 더 위험한 사기 행위는 처음부터 자신이 설정한 값이 나오도록 측정값을 계속해서 조작하는 ‘다듬기’다. 다듬기의 예로 저자는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조작 인수’를 들어 설명한다. 관찰 값이 자신의 이론에 맞지 않으면 이론에 맞는 값이 나올 때까지 다른 변수를 조작하면서 실험을 되풀이하는 것이 다듬기의 수법이다. 천동설을 완성한 2세기 이집트의 천문학자 프톨레 마이오스(K. Ptolemaeos)는 그리스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Hipparchos)의 관찰 결과를 가져다 썼다. 명백히 표절인 셈이다. 

2005년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사건

 CNN 방송은 2006년 1월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혐의가 드러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는 보도를 했다. 황우석 박사의 주도로 2004년과 2005년 사이언스 논문은 조작됐고, 맞춤형 줄기세포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CNN 방송은 보도했다.

 사기 극의 전모가 거의 밝혀졌지 만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던 측에서는 황우석 교수에게 원천 기술이 있다면 황우석 교수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자고 했다. 난자를 매매하였고, 연구원들의 난자를 비윤리적으로 채취하였고, 1,000개가 넘는 천문학적인 난자를 사용했으며, 데이터와 사진을 조작해서 논문을 냈다는 사실을 묻어 두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주장 뒤에는 국익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어떤 근거로 산출된 액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줄기세포 원천 기술이 33조 원을 벌어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번 사태로 불거진 수많은 윤리 문제와 조작을 덮어 두자는 주장이다. 과학적 진실보다는 국가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논리다. 이에 저명한 과학 잡지 <네이처>는 2005년 12월 1일자의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사설을 통해 한국의 ‘황우석 애국주의’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과학사회학을 전공한 이충응의 저서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는 황우석 박사 문제에서 드러난 것처럼, 논리와 성찰을 잃어버리고 애국주의와 결부된 과학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법을 모색한다. 

 광우병 안 걸리는 소에서부터 배아 줄기세포 연구까지 이뤄 낸 황우석 박사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스타였고, 국민들은 그의 신화에 환호했다. 배아 세포가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윤리적인 문제가 있는지 언론은 침묵했다. 다만 언론은 그의 연구가 난치병 환자를 구원하고, 경제를 일으키고, 국위를 선양할 것이라는 무한한 믿음만을 심어 주었다는 것이 이충응의 주장이다.

국익이 진리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의 저자 이충웅은 지난 2003년 ‘황우석 신드롬’의 서막을 알린 광우병 안 걸리는 소가 등장했을 당시 언론은 인체와 환경 안정성에 대한 검증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소가 광우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침묵했다고 말한다. 독자들 또한 세계 축산 시장 장악과 함께 광우병 정복은 생명 공학의 쾌거라는 언론 보도에 열광하느라 바빴다. 당시 황우석 신드롬에는 이성은 없었고, 오직 대한민국의 국익에만 초점이 모아졌다. 

 이충응은 언론이 과학 뉴스를 다룰 때 경제성만을 강조해 희망을 부풀리거나 황우석 교수의 경우에서와 같이 영웅 만들기에 주력 할 뿐이 라고 비판한다. 정작 중요한 과학의 모습과 주요 과정 전달은 빠뜨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황우석 교수의 ‘광우병 안 걸리는 소’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 광우병의 원인이 되는 프리온(prion, 광우병을 유발하는 인자)의 실체조차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은 문제 제기 한 번 없이 광우병이 걸리지 않는 소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는 황 교수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었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언론의 기능은 감시와 견제에 있지만 언론은 제 본연의 임무를 저버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러한 분석을 덧붙인다. 

 배아 줄기세포 연구 지지자들의 주장은 현대 사회에 깊숙이 자리잡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과학,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는 과학의 이미지와 쉽게 결합한다. 그리고 그러한 결합으로부터 지지자들을 확산시키는 데 이미 성공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국가주의적 응원이 덧붙는다. 한국인에게 지난 백 년의 역사는, 스스로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어렵게 만들고야 말았다. 외국에서 대단하다고 평가 받는 일이야말로 지고한 가치를 지니는 일이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 결과가 대한민국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며 불치병을 치료할 것이라는 환상은 대중들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라 언론이 만들어 낸 것이다. 대중들은 언론이 내보내는 과학 기사를 통하여 과학에 대한 의견을 구성한다. ‘광우병 안 걸리는 소’ 연구 결과가 나왔을 때도 신문들은 앞을 다투어 “세계 축산 시장 장악과 함께 광우병 정복이라는 생명 공학의 쾌거”를 말했지만, 황우석 교수의 연구 방법대로 만들어진 소의 ‘인체 및 환경 안정성 검증’의 문제를 차분하게 말하는 신문은 없었다. 

 그렇다면 왜 언론은 과학 기사를 경제적 유용성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저자는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가 지닌 가치와 그 쓰임새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경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홍보해야 연구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 질 것이라는 판단도 여기에 일조한다. 연구비에 대한 압박 때문에 연구자들은 연구 대상의 유용성과 경제성을 홍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언론의 보도 태도와 맞물려 꿈과 희망을 주는 뉴스로 만들어지며,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여러 가지 이득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황우석 교수라는 지적이다. 

 황우석 교수의 성공은 난자를 법적인 문제 없이 얻을 수 있는 국내 환경에 힘입은 것이지만, 난자 기증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외국의 시각에 대해 납득할수 없어 하는 우리의 분위기는 문제가 있다고 필자는 지적한다. ‘남이 하면 스캔들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식의 세태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다. 

 저자의 비판은 계속된다.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논리가, 가톨릭 교회에만 있지 않고 각 분야에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엄청난 치료 효과나 엄청난 경제적 효과라는 찬사에 가려졌으며, 윤리적 논란은 차치하고 치료 효과조차 미지의 가능성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냉정하게 묻는 작업에는 소홀했다. 과학이 범세계적 성격을 띠었다면, 우리의 특정 과학에 대한 연구 성과도 범세계적 차원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의 편협한 가치만 난무한다는 것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의 역사는 전복(顚覆)의 역사였다. 과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모색적인 것이었지 결코 난공불락의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과학적인 태도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독선의 태도가 아니라 늘 열려 있는 겸손한 태도일 수밖에 없다. 과학 자체가 불변의 진리가 아니며, 반박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2005년 여름, 대한민국에 과학은 없었다. 황우석에 대한 열광은 차라리 종교였지 과학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은 저자의 지적을 아프게 새기며 우리 과학이 갈 길을 생각해 보자. 

 황우석 신드롬은 한국 사회가 진실보다는 꿈이 더 필요한 사회임을 가슴 아프게 보여 주고 있다. 황우석 생가를 복원하고 명소로 꾸민다는 보도에 이르러서, 신드롬을 넘어 신화의 탄생을 목격한다. 차라리 그로테스크(grotesque, 괴기한 것이나 극도로 부자연스러운 것 등을 형용하는 말)한 표현이 어울릴 듯한 상황이다. 과학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적었다.

8년만의 고백 “내가 황우석 사기 제보한 이유는…”

 그를 지금의 그로 만든 건 분노였다. 10살 전신마비 소년에게 줄기세포를 주입하려 한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무모한 시도였다. 사실을 알리겠다고 하자 아내는 “사안이 너무 커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만류했다. 망설이던 그는 자신에게 닥칠 불이익과 피해를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왜 나인가”라며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침묵의 대가’로 짊어져야 할 평생의 ‘죄책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소년의 배에서 체세포를 뗀 건 그였다. 그를 대신해 재앙을 막아줄 사람은 없었다.

 절박했다. 2005년 6월1일, 선택의 순간이 왔다. 원자력병원 레지던트 1년차인 그는 한 방송사 게시판에 글을 띄웠다. 이렇게 ‘제보자’가 됐다. 이후 그가 본 것은 대중의 광기였다. 지식인도 정치인도 언론도 그의 말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상식을, 과거를 부정할 수 없었던 이들은 ‘의심의 대상’ 대신 그를 의심했다. “부정한 방법으로 쌓은 명성은 한 줌 바람에 날아가고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MBC < PD수첩 > 게시글 중 일부)는 그의 신념은 결국 실현됐다.

 그 뒤 8년. 그가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나•들>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이제 내 이야기도 들어달라.” 소박한 일성이었다. 그는 황우석 신화를 무너뜨린 ‘류•영•준’(42)이다. ‘닥터K’로 알려진 그는 현재 강원대 의대 병리학 교수이자 줄기세포 연구자다. 8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그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그러던 그의 눈빛이 딱 한 번 흔들렸다. 10살 소년을 얘기할 때였다.

닥터K 8년 만에 커밍아웃

 왜 8년이 지난 지금일까? 좀더 일찍 세상으로 나오거나, 아니면 영원히 가슴에 묻어둬도 될 일이었다. “왜 지금 이냐고 물으면 나도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감정을 추스를 때가 되면 내 이야기를 하려 했다. 내년이면 황우석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이 된다. 이미 그 의미를 되짚어보려는 이런저런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 사건이 생명윤리나 과학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실제 어떤 변화를 이끌어냈는지 객관적으로 성찰해볼 계기다.”

 지난해 교수로 임용돼 안정된 신분을 갖게 된 것도 8년 만의 ‘커밍아웃’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난 12월, 사건 당시부터 그에게 도움을 줬던 생물학 연구자들의 인터넷 학술 커뮤니티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브릭) 게시판에 실명으로 감사 인사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과학잡지 <네이처>와 짧게 인터뷰도 했다.

 황우석의 가면은 벗겨졌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연출한 무대에서 주연배우로 활동 중이다. 그의 일터 수암생명공학연구원은 경기도와 종교단체 등의 지원을 받아 복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류영준은 ‘무학의 통찰’이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황우석에 대한 단죄를 가로막고 있다고 했다. 잘못된 사실관계와 오해 때문에 그의 덫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황우석만 말을 했고 대중은 그의 시각과 프레임으로 사건을 구성했다. 전체를 이해하려면 다른 이야기도 차분하게 들어봐야 한다.”

 황우석은 연구논문 조작을 ‘의대 대 수의대’ ‘미국 대 한국’ ‘불교 대 기독교’의 싸움으로 치환했다고 그는 진단했다. ‘제보자 때문에 국익이 날아갔다. 과학적으로 세계를 호령할 기회를 놓쳤다’와 같은 애국적 과학주의가 그중 하나다. 류영준은 이를 소설일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틀을 바꾸고 싶어 했다. “이 싸움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시작됐다. 아주 간단했다. 한 사람의 목숨 앞에 누가 그런 말들을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느냐. 그러나 황우석에게는 이 문제가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 과학은 사회적 명성과 평판을 얻으려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거짓 결과물로 스토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사회적 권력을 얻는 것이었다. 연구자로서의 순수성이나 호기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황우석 사건은 ‘과학조작 스캔들’이었다. 굵직한 사실관계는 드러났고 과학계의 판단이 내려진 지도 오래다. 그러나 황우석은 과학의 문제를 ‘감성의 법정’으로 이끌고 갔다. “역사를 판단할 때 사실관계 확인이 이뤄지고 그에 따른 해석이 뒤따르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황우석을 둘러싼 대중의 반응에는 수많은 오류가 보인다. 또한 감정적 반응은 논리적이고 건설적인 해석을 불가능하게 한다. 내가 나온 이유는 아직까지 사실관계를 잘 모르거나 한 부분만 보고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배아줄기세포 꿈을 안고 ‘황사단’에

 류영준은 자신의 이런 생각을 <나•들>에 서사로 펼치기 위해 10년이 넘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와 황우석이 인연을 맺은 건 1999년이다. 두 해 전 의대 본과 4학년이던 그는 <네이처>에 실린 영국 복제양 ‘돌리’에 관한 논문을 보게 된다. 이듬해인 1998년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제임스 톰슨 교수가 쓴 ‘인간 배아줄기세포’ 수립 논문은 그를 임상의사가 아닌 기초의학 연구자의 길로 안내했다. 두 논문을 접목하면 환자 치료에 사용할 세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한국엔 배아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실험실이 거의 없었다. 그는 일본 도쿄대 줄기세포연구소 등에 자신의 생각을 적은 전자우편을 보냈다. 황우석만 답을 해왔다. 강연차 부산에 들르니 그곳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황우석은 복제소 ‘영롱이’와 ‘진이’로 명성을 얻고 있던 때였다. “그날 황우석을 처음 보게 됐고 강연은 감동적이었다. 나를 대하는 눈빛도 따뜻했다. 이듬해 결혼을 앞둔 아내 이유진도 함께 인사를 했다. 황 교수는 바로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며 긴 이야기는 서울에서 다시 만나 나누자고 했다.”

 서울로 찾아간 예비부부를 황우석은 ‘의사-간호사 부부’라며 반겼다. 게다가 그때까지 의대생이 수의대 대학원에 진학한 경우는 없었다. “내 계획을 듣고 난 황 교수는 연구팀에 합류하면 진로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류영준과 황우석은 그날 이후 돈독한 사제 관계를 맺었다. 류영준이 실제 황우석의 실험실에서 석사과정을 시작한 건 2년쯤 뒤인 2002년 3월1일이었다. 기초 의학자의 길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어머니가 “최소한 의대 인턴과정은 마쳐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실험실에 들어갔을 때 황 교수는 인간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어떤 준비도 돼 있지 않았다. 그제야 막 돼지 줄기세포를 만들려던 단계였다. 막막했다. 모든 걸 내가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실험실 청소부터 시작한 류영준은 두 달쯤 뒤 연구실의 대표 실적인 ‘영롱이’와 ‘진이’ 논문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소 연구팀장을 맡았던 선배에게 논문을 달라고 요청했다. 한숨과 함께 돌아온 답은 ‘그런 건 없다’였다.” 류영준은 이 사건 이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거짓과 조작의 냄새였다.

 얼마 뒤 류영준은 다른 선배 연구원에게서 더 자세한 내막을 들었다. 황 교수에게 직접 그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가 지금 1등을 뺏기면 끝이다. 나중에 우리가 실력을 쌓아서 진짜로 복제하면 된다’고 답하더라는 것이었다. 당시 복제 연구 경쟁 상대인 축산기술연구원에서 조만간 복제소가 태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황우석이 입수한 것이다. 황우석의 연구실에서 일했던 또 다른 연구원 역시 <나•들>과의 인터뷰에서 “황우석에겐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1등을 하기 위해 거짓말부터 하거나 논문을 조작하는 행동을 했다”고 밝혔다.

 류영준은 그런 사실을 알고도 왜 항의하거나 실험실을 떠나지 않았을까? “내 입장에선 의대 과정을 포기하고 온 만큼 큰 승부수를 던진 거였다. 또한 소 연구 파트와는 팀이 달랐기 때문에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타협하고 외면했던 거다.”

 황우석은 의대 출신에다 자신보다 일찍 실험실에 나와 밤늦게 귀가하는 류영준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보통 4년차 연구원이 맡는 팀장을 3개월 만에 맡겼다. 당시 석사 월급이 40만원이었지만 그는 박사급 대우인 150만원을 받았다. 이런 고속승진과 황우석의 특별대우는 같은 실험실에 있던 동료 연구자들의 미움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팀장이 된 류영준은 황우석의 도움을 받아 외부에서 팀원을 영입했다. 나중에 논문 조작의 실무 책임자로 밝혀진 미즈메디병원 출신의 박종혁과 김선종, 그리고 자신의 아내 이유진을 비롯해 구자민, 박을순 등 모두 6명이었다.

 또 황우석이 줄기세포를 잘 모르는 상황이라 당시 미국 뉴욕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연구소’에 있던 조재진 교수를 지도교수로 영입했다. 연구용 난자는 미즈메디병원과 한양대병원에서 제공받았다. 이 과정에서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여성 연구원들의 난자를 실험에 이용한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이 미리 알려졌다면 <사이언스>에 논문이 실리지 못했을 것이다. 연구원들은 왜 자신의 난자를 제공해야 했을까?

 류영준은 이를 “무언의 압력과 박을순의 야심” 때문이라고 했다. 박을순 연구원은 황우석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몇 달간 성과를 내지 못했고, 이 때문에 황우석은 그녀의 이름을 논문에 넣지 않으려 했다. “박을순은 뭔가를 보여줘야 할 상황이었다. 황 교수가 그녀의 처지를 이용해 난자제공에 무언의 동의를 한 것으로 보고 팀원들이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그러나 황 교수는 ‘하늘을 감동시켜야 성과가 나온다’며 계속 기다렸다.”

“NT-1은 자가생식 산물… 황은 조작 강요”

 결국 박을순 연구원은 난자를 제공했고 자신의 난자로 자신이 핵이식을 하는 ‘윤리적 비극’이 일어났다. 조사 당시 그녀가 동료 연구원에게 보낸 전자우편을 보면 그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셀프 클로닝(자신의 난자로 체세포 복제 실험을 하는 것), 이건 있을 수 없는 일, 자신의 난자를 자신이 복제하고 지독하게 독해요. …선생님께 대적하지 못했던 것, 이런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도록 더 열심히 공부할래요.” <나•들>과 만난 당시 황우석 교수의 연구원들은 한결같이 그때를 “떠올리기조차 싫은 악몽”으로 기억했다. 연구원들 모두 자신과 동료를 ‘황우석의 피해자’라고도 했다. 한 연구원은 황우석의 압력을 ‘날카로운 송곳의 끝’에 비유했다. 논문 조작을 직접 지시하지 않더라도 그 압박을 견뎌내기 힘들어 논문을 조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이 여성 연구원은 자신이 맡은 핵이식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짐을 싸야 할 처지에 내몰렸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연구원이 핵이식 연습을 하던 중에 줄기세포가 만들어졌다. 바로 NT-1이다. 딱한 처지의 박을순 연구원을 위해 그녀의 공으로 돌리기로 했다. 그녀도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문제는 검찰에서도 조사가 이뤄졌지만, 박을순은 끝까지 자신이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떻든 줄기세포의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세포는 있었지만 잘 자라지 못하는 상태였다. 강성근 교수가 주도했던 복제 검증 실험도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았다. 논문을 싣기로 한 <사이언스>에서도 NT-1이 줄기세포임을 확신할 수 없으니 이런 내용을 논문에 넣자고 제안했다. 류영준은 “나는 자가생식만으로도 세계적 업적이 될 수 있고 치료용으로 쓸 수 있다고 했지만, 황우석은 핵이식이 아니면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처음부터 데이터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꾸밀 생각이었다. 결국 논문 초록 끝에 그 가능성을 한 줄 언급하는 정도로 타협이 이뤄졌지만 황우석은 그것조차 기분 나빠했다. 내가 논문 초안을 작성해 보낸 이후 그의 지시로 데이터가 조작됐다는 걸 사건이 터진 뒤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후일 서울대 조사위원회와 학자들은 이 세포가 체세포 복제가 아닌 자가생식의 산물이라고 결론 내렸다.

 황우석은 또 다른 한편에서 2004년 NT-1 <사이언스> 논문의 사진을 중복 게재해 조작한 박종혁과 2005년 줄기세포 전체를 바꿔치기한 김선종에게도 압력을 가했다. “박종혁과 김선종은 박사학위를 받지 못하면 연구자로서 인생이 끝이라는 궁박한 처지에 내몰려 있었다. 그들에게 가해진 황우석의 압력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황우석은 박종혁과 김선종의 박사학위 수여에 깊이 관여했고 이를 압력 수단으로 이용했다.”

 과학은 ‘객관을 전제로 한 정확성’의 학문이다. “믿는다”가 아니라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황우석은 왜 논문이 아닌 언론으로 자신의 연구를 증명하려 했을까? 류영준은 황우석이 “노벨상에 눈이 멀어 있었다”고 했다. 그는 “2003년 <사이언스>에 논문 게재가 받아들여진 뒤 들뜬 황 교수가 나에게 노벨상을 공동수상하자고 했다.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황우석의 노벨상 집착증은 과대망상 수준이다. 사건이 일단락되고도 한참이 지난 2009년 3월, 그가 지지자들 앞에서 모조 노벨상 메달을 꺼내들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유튜브 동영상으로 공개됐다. “노벨상 위원회에서 이미 2년간의 검증을 마치고 갔다. 줄기세포를 재현만 할 수 있다면 언제든 노벨상을 주겠다며 이 메달을 나에게 보냈다. 그런데 정부가 난자 연구 승인을 안 해줘서 못하고 있다.”

진실의 문과 도망자의 삶

 류영준은 그가 맡았던 프로젝트가 끝나고 <사이언스>에 논문 게재 승인이 이뤄지자, 결심했던 대로 아내와 함께 실험실을 떠나, 2005년 3월부터 원자력병원 레지던트로 일하게 됐다. 류영준은 “황우석이 어떤 거짓말을 하든 이제 나와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흔들 만한 순간이 왔다. 2005년 <사이언스> 논문이 발표되기 한 달 전 지인에게서 황우석 팀이 11개의 복제 줄기세포를 만들었고 곧 임상실험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핵심 인력이 모두 황우석을 떠난 상태에서 줄기세포를 만들었다는 걸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곧이어 들은 소식은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황우석이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10살 소년에게 조만간 임상실험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류영준과 그 소년의 관계는 각별했다. 2003년 병원에 찾아가 소년의 체세포를 직접 떼어 온 이가 그였다. 그와 아내는 소년의 줄기세포만은 반드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부모에게 아이의 사진을 부탁해 책상에 붙여둔 채 실험을 했다. 그러나 실험실을 떠나기 전에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잘못하면 그 애가 다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줄기세포를 넣어서 신경을 살린다는 것인데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아무런 검증이 안 된 상태였다. 면역반응이 나타나거나 암에 걸릴 수도 있었다.”

 황우석이 임상실험까지 성공해야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무리수를 두는 것으로 봤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11개는 뻥튀기겠지만 최소한 소년의 체세포로 만든 줄기세포는 있을 것으로 믿었다. “마음이 급했다. 과거 연구팀에서 의사는 나밖에 없었다. 잘못되면 나중에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나 대신 막아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까 고민했다. 문신용 교수나 안규리 교수, 노성일 원장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절박했다.” 그의 눈두덩이 붉어졌다.

 황우석의 행동에 분노한 그가 찾은 곳은 MBC <PD수첩>과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였다. <PD수첩>은 이후 난자윤리, 줄기세포 조작을 확인해 보도했다. 참여연대는 제보자 보호와 지원을 맡았다. 황우석의 애제자였던 류영준은 왜 스승에게 직접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까? 황우석 지지자들은 이를 두고 “2005년 논문에서 자신의 이름이 빠진 데 불만을 품고 스승을 파멸시켰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2005년 논문은 류영준이 이미 실험실을 떠난 뒤 작성된 것이다.

 류영준은 “실험실을 떠난 건 황우석의 실체를 알고 그 사람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전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세 차례에 걸쳐 실험실 지도교수였던 조재진 교수에게 나의 우려를 전했다. 두 번은 중간에서 이병천 교수와 강성근 교수가 전달하지 않았고, 마지막은 황우석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만약 황우석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면 오히려 이를 은폐하려 들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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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보 이후 그의 삶은 180도 바뀌고 말았다. <PD수첩>이 방영되고 얼마 뒤 ‘제보자는 전직 연구원’이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황우석의 광적인 지지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절도, 환자정보 유출 혐의로 고소•고발도 이어졌다. 더 이상 병원 일을 할 수도,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기자들이 집과 병원에 진을 치고 있었다. 돌도 되지 않은 아이는 부산 처가에 맡겼다. 참여연대의 지원을 받아 찜질방, 지인의 집, 서울 신림동 오피스텔을 떠돌아야 했다.

 결국 그는 <PD수첩> 방영 뒤인 2005년 12월6일 원자력병원에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열흘 전쯤인 11월23일부터 한 방송사 카메라가 병원에 들이닥쳤다. 환자를 볼 수 없게 되자 그는 휴가를 내고 잠시 피신해 있었다. 병원을 갈 수 없는 날이 길어졌고, 12월4일 <PD수첩>의 취재윤리 문제가 불거지자 병원 쪽은 “더는 방어해줄 수 없다. 그나마 파면을 시키지 않는 게 경력에 좋다”며 압박했다. 과학기술부 산하 병원인 이곳 원장실에 과기부 고위 공무원과 국가정보원 직원이 다녀갔고, 그 둘이 제보자임을 확인해줬다고도 했다. 압력을 받았느냐는 질문에도 병원 쪽 관계자는 “그렇다”고 시인했다.

 그는 이후 1년 6개월 가량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부부 모두가 사실상 도망을 다녀야 했다. 그나마 빚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브릭과 참여연대 등에서 모금해 전달받은 돈이 수입의 전부였다.” 그사이 류영준은 <PD수첩>의 취재 지원에 나섰다. 과학적으로 황우석의 줄기세포 조작을 입증하는 건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줄기세포와 체세포 제공자의 DNA를 비교하면 되는 것이다. 어렵게 10살 소년의 머리카락을 확보한 <PD수첩>팀의 다음 과제는 황우석 실험실에 있는 줄기세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황우석이 이를 내줄리 만무했다. (황우석은 뒤늦게 < PD수첩 >팀에 검증용 줄기세포를 내주었다.)

제보자로 매국노로 산 8년, 참 쓰다

 류영준은 “하늘이 도왔다”고 했다. 아내가 일하던 서울대 치대 실험실에 2005년 논문의 첫 번째 줄기세포인 NT-2의 배양접시가 분양돼 온 것이다. 황우석의 수의대 제자이자 줄기세포팀을 맡고 있던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황우석은 NT-2가 그 소년의 체세포로 복제한 것이라고 주장한 터였다. “세포를 훔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휴지통을 뒤져 배양된 뒤 버린 접시를 가지고 나와 < PD수첩 >팀에 건넸다.” 나중에 이를 안 황우석 지지자들은 아내를 절도 혐의로 고발했으나, 검찰은 무혐의 처분했다.

 당시 <PD수첩>과 류영준은 진실 규명의 명운이 걸린 최대 고비를 맞고 있었다. 소년의 DNA와 줄기세포 DNA가 일치하면 그들은 파국을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PD수첩>은 양쪽에서 얻은 세포를 여러 기관에 맡겨 DNA 검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줄줄이 판정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보냈다. 황우석이 내준 줄기세포들이었다. 그는 “마지막 한 곳에서 결과가 왔지만 <PD수첩>팀은 검사지를 열어볼 엄두도 못내고 자리를 피했다. 나 혼자 열어봐야 했다. 같은 세포가 아닌 걸로 나왔다. 그걸 본 순간 ‘이제 아무도 안 믿어도 좋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믿어주는 사람이 몇 명이든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다’라고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PD수첩>의 네 차례 방송이 나간 뒤 2006년 1월,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조사와 검찰 수사가 이어졌다. 류영준은 두 기관의 조사 과정에 증인, 참고인 신분으로 참여했다. 서울대 조사위원회는 “핵이식에 의한 체세포 줄기세포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했다는 어떤 과학적 증거도 없다. 따라서 원천기술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9명의 검사를 포함해 50여 명의 수사인력을 동원한 검찰 역시 황우석을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류영준은 처음엔 공범으로 피의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당연히 그에 대한 검증도 가혹했다. 강성근 등과는 대질 심문도 받았다. 그러나 황우석과는 끝내 마주치지 않았다. “황우석이 인정했거나 다른 사람과 나의 진술이 일치하는 게 많으니까 굳이 대질을 시키지 않았던 것 같다.”

 황우석의 과학 사기를 밝혀낸 또 다른 집단은 젊은 연구자 그룹 ‘브릭’이다. 돈과 진실을 바꾸며 침묵했던 과학자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난자윤리와 논문 조작의 구체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사이언스>가 논문을 철회할 때도 이들의 증거가 바탕이 됐다. ‘어나니머스’ ‘아릉’ 등의 닉네임으로 활동한 그들은 정부출연기관•대기업 연구자, 생물학 전공자, 수학과 교수 등이었다. 브릭 운영자 이강수씨는 <나•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연구 부정에 대해서는 그에 따른 제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과학계에선 불문율이다. 법적인 제재보다는 과학계에서의 퇴출을 의미한다. 논문을 조작하면 연구를 검증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과학 전체가 붕괴되는 거다. 황우석 사건은 그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바뀌었을까? 과학은 진실을 발견하는 좀더 나은 방법을 찾는 과정일 뿐이다. 이를 되새기게 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는 류영준에게 빚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에선 여전히 그의 폭로가 앞서나가던 한국의 줄기세포 연구의 발목을 잡고,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의 희망을 꺾었다고 본다.

 그에게 반론을 청했다. 답은 단호했다. “한국이 줄기세포 강국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2004년 황우석이 <사이언스> 논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자 언론은 ‘미국의 심장에 태극기를 꽂고 왔다’는 식으로 부풀렸다. 올해 초 <네이처>는 한국이 줄기세포 분야에서 약간의 성과를 내고 있지만 연구에 강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과학은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과 다르다. 그 자체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언론이 키워온 거품이 대중의 상실감을 키운 것일 뿐이다.”

 줄기세포 분야는 지금도 국가의 많은 지원을 받는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 할 연구 성과는 없다. 줄기세포의 미래 역시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줄기세포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세력과 애국주의적 언론이 대중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줄기세포 연구의 국제적 흐름은 배아줄기세포에서 역분화줄기세포로 넘어간 지 오래다. 배아줄기세포는 인간 난자, 그것도 20대의 젊은 난자를 사용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 실용화가 어렵다. 그런데도 국익론•특허 등을 내세워 복제 줄기세포가 최고라고 하는 건 혹세무민이다”고 했다. 또 “난치병 환자들이 관심을 둘 곳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과학자와 의사들이다. 그리고 과학자라면 거짓 희망보다는 정확한 진단과 치료로 말해야 한다”고도 했다.

“소년의 수술 막은 것만으로도 행복”

 내부고발자로서 지난 8년간 그의 삶은 어땠을까? 그는 자신에 대해 “한 사람이 튀어서 조직을 위험하게 하면 안 된다는 전체주의 교육의 세례자”라면서도 “제보한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10살 소년의 수술을 막은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설사 내가 묻힌다고 해도 그것만 막아내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도 씁쓸했던 경험들까지 가슴에 묻지는 못했다. 2007년 3월, 2년여 공백 끝에 가까스로 고려대 의료원에 들어갔지만 일부 교수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써야 했다. 경계도 심했다. 그가 다가가면 하던말을 멈추기도 했다. 그는 “배신자라는 낙인을 불식시키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인간적인 신뢰를 얻어야 했고 실력으로도 증명받아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나를 보여주고 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고 했다.

 누구나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 상처를 후벼파는 기억이란 참으로 고통스럽다. 아픈 기억을 꺼내 성찰할 수 있어야 경험은 공유되고 보편화된다. 손가락 하나를 펴서 남을 비판할 때 나머지 손가락 가운데 적어도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한다. 그가 전하는 말이다. “황우석 사건은 과거 한국이 정치•경제•사회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생존과 발전’이라는 절대 목표에 복종하면서 벌어진 비윤리적 행태였다. 젊은 과학자들은 기성세대의 잘못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