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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다음시간 발제순서


01. 의식주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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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본성과 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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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본성과 양육 정리 


03. 편리한 어구 : “본성은 신체적 능력만큼이나 마음의 능력도 결정적으로 제한한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사상가보다 ‘골턴의’ 견해가 우세하다." 마음은 백지 상태이고 경험이 그 위에 자신의 기록을 남긴다고 봤던 존 로크, 데이비드 훔, 존 스튜어트 밀의 경험론은 개인의 유전적 운명이라는 신칼뱅주의적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이 발전 과정을 바라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편리한 어구’ 에 이끌려 잘못된 이분법을 만들어낸 죄로 골턴을 저주하는 것이다. 아니면, 보다 관대한 눈으로 보면 골턴은 시대를 앞서 비범한 진리 즉. 인간 행동의 많은 측면이 어떤 식으로든 마음속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사회가 주무르는 대로 빚어지는 찰흙덩어리도 아니고 환경의 희생자도 아니라는 진리를 발견한 사람일 수 있다.


 행동유전학의 주요한 결론은 우리의 직관과 정반대로 대립한다. 행동유전학에서는 본성이 성격, 지능, 건강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즉, 유전자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때문에 양육이 희생된다고 얘기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을 확인하는 데는 어쩔 수 없이 양육이 덜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란성 및 이란성 쌍둥이를 대상으로 환경 실험을 할 수는 없다. 양육도 유전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한다. 본성은 양육을 압도하지 않고, 양육과 경쟁하지도 않는다. 둘은 본성 대 양육의 경쟁을 벌이는 라이벌이 아니다.


[02] 병은 자기 자신이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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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성 의학이란 무엇인가?


 전체성 의학(holistic medicine)이란 총체적 의학/전일 의학/전인 의학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며, 현대 서양의학과 같은 기계론적 생의학(biomedicine)에 대응하는 용어이다. 사상적 배경에서 볼 때 근간에 세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대체/보완 의학도 전체성 의학에서 출발하고 있다. 


 과학주의적 현대의학의 중심사상은 분석주의적 기계론이다. 현대의학에서는 사람의 몸을 마치 기계부속품처럼 분해하여 과학적인 방법으로 측정, 측량하고 인간을 분절화/객관화하여 관찰한다. 생체와 환경을 둘로 나누고 몸과 의식을 이분화함으로써 여기서 얻은 실증적 정보들을 집적, 환원하여 사람의 생명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기계론적인 의학은 특정병인설(特定病因設)의 관점에서 질병을 바라본다. 특정병인설이란 모든 질병에는 특정한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을 찾아내서 제거하면 병이 낫는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세균성 질환의 경우, 그 병을 일으키는 원인균을 찾아내서 그 균을 죽일 수 있는 화학약품을 써야 병이 낫는다는 식이다. 현대의학의 이런 발상은 암에 대응하는 데 있어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암의 병소를 수술로 제거하고, 제거할 수 없는 암세포는 화학약품이나 방사선치료 같은 방법으로 소멸시키겠다는 전략이다.


 기계론적 의학에서 질병이란 곧 몸의 생물학적 기능의 이상이며 건강은 병이 없는 상태로 정의한다. 따라서 건강과 질병을 규정할 때 일직선을 그어놓고 한쪽 끝은 건강이고, 그 반대쪽 끝은 질병이라는 식으로 일차원적이고 단선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정체성의학은 자연과 인체를 기계와 같은 고정된 실체로 여기지 않고 한순간도 머무름이 없이 변화해가는 역동적인 흐름으로 이해한다. 자연과 인체는 수많은 요소가 통합된 그 자체가 분해할 수 없는 하나의 생명단위이므로 전체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나무+나무+ ............. = 숲'이 아니듯 '뇌+심장+위+신장+ ............= 사람'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으며, 인체 역시 요소와 요소를 연결하는 마음/정보/자연치유력/기(氣) 등을 매개로 하여 하나로 어우러진 전일적 에너지체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전체론적인 의학의 경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랜 의학의 역사 속에서 전체론은 의학의 중심사상 가운데 하나였고 그러한 사상적 경향은 현대 서양의학 중에도 어느정도 남아있다.


 근대 의학의 성립과 발전과정에서 줄곧 지속되어온 기계론(mechanism) 대 생기론(vitalism)의 논쟁이 기계론의 절대우위로 완결된 것처럼 보였을 때도 신생기론(neovitalism)과 같은 전체론적 생명관은 여전히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전체론(holism)이라는 용어는 20세기초 스머츠 (J.C. Smuts, 1870~1950) 같은 신생기론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쓰였다. 


 생체는 단지 세포 하나하나가 모여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체 그 자체가 하나의 단위이며, 그것을 분해, 분석하자마자 생체로서의 특질을 상실하기 때문에 항상 전체로서 관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분석된 생물학적/화학적 작용이 아무리 명확하더라도 그러한 실증과학적인 정보를 통해서 전체로서의 생명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전체론의 요체이다. 따라서 전체론적 의학의 관점에서는 건강이든 질병이든 생리와 심리, 생활양식/자연환경/사회환경/문명구조/대중의식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차원과 요인이 그물처럼 연결되어 나타나는 다차원적 현상으로 이해한다. 전체론은 각각의 생체란 통일적 전체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개체이기도 하다는 점, 전체 자연계와의 일체감 속에서 다시 개체의 자리로 돌아가 새로운 개체를 자기재생(재생)한다는 관점이다. 


 의학의 사상적 경향을 기계론 대 생기론, 근대의학 대 전통의학, 서양의학 대 동양의학, 물질문명 대 생태주의적 패러다임으로 거칠게 대비해볼 때 전체성의학은 생기론/전통의학/동양의학/생태주의와 맥을 같이한다고 하겠다. 건강과 질병에 대한 전체성의학의 관점은 대체로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생명의 실체는 단지 현상적인 몸만이 아니고, 몸을 포함한 마음과 생명 에너지, 영성(영성) 등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유기체이다. 마치 양파처럼 육체 너머에 몇 겹으로 중층화되어 있는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인 통일체인 것이다. 정신과 육체, 심리와 생리, 각 기관과 각 조직은 상호작용하고 상호제약하는 불가분의 통일체로서 전체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그 개체와 환경을 융화하고 통일적인 평형상태로 유지시키는 것이 건강에 이르는 최선의 길이다.


 둘째, 질병의 병증만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건강을 전체적으로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현대의학의 의사들은 대체로 질병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면서도 건강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학은 진정한 치유의 열쇠인 자연치유시스템(spontaneous healing system)을 도리어 파괴하는 치료 행위도 서슴지 않고 감행하는 경향이 있다. 질병을 치유하고 진정으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치유 시스템을 치료의 중심고리로 보고 이를 활용하여 자연치유력을 증대하는 일을 치료의 최대 목표로 삼아야 한다. 


 셋째, 환자 스스로가 자신의 질병을 치유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치료의 주체가 되고 의사는 이를 도와주는 입장에 서야 한다. 종래의 의학은 환자를 기계적 대상으로 객체화함으로써 정작 환자 자신은 철저히 소외시키고 있다. 치유효과를 높이고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치료의 중심에 서서 자신의 병은 자신이 치료한다는 관점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만이 진정으로 환자의 인간성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다양하고도 다차원적인 치료방법들을 총체적으로 조화시킨다. 심리요법, 식이/영양요업, 운동요법 기타 자연요법 등 도움될 수 있는 모든 치료법들을 통합, 활용한다. 필요하다면 기계론적 의학방법까지도 동원하여 함께 활용한다.


 다섯째, 환자는 질병을 자기실현 과정의 일부로 간주하고 환자로서의 체험을 통해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한다. 질병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왜 이런 병이 생겼을까를 성찰하면서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기회로 삼는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질병이란 자신의 영성과 삶의 질을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켜주는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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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성 의학은 암치료에 어떻게 접근하는가


 모든 만성퇴행성 질환과 마찬가지로 암치료에 있어 전체성 의학이 추구하는 바는 앞에서 보인 전체성의학의 특성을 환자의 구체적 사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기계론적 의학이 암의 국소 부위를 주로 물리적 수단으로 공격하는 데 반해 전체성의학에서는 암을 직접 공격하는 방식은 가급적 피하고 암환자의 육체/마음/영성/생활양식/주변환경과의 관계 등을 총체적으로 변환시키려고 한다. 암의 병변만을 보고 그것을 고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보고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인을 변화시키겠다는 관점이다.


 물론 수술/화학약품/방사선 치료와 같은 기계적 방법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우선적으로는 암환자의 자연치유 시스템을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암의 진행 정도와 관계없이 암의 발병 자체가 이미 면역체계 곧 자연치유 시스템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계론적 의학에서처럼 환자가 객관화/대상화되어 치료의 주체로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자연치유 시스템의 재활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환자가 치료의 능동적 주체로 나설 때 비로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삶 전반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 붕괴된 자연치유 시스템의 회복 가능성이 커지고 생체가 암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 힘을 자연치유력 또는 면역력이라고 부른다.


 과학적 서양의학은 이제까지 1백년 이상 전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왔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이러한 기계론적 생의학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서 전체성의학을 추구하는 의사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전체성의학의 사회적 영향력도 확대되어가는 중이다. 세계적으로 많은 의과대학에서 전체성의학을 교과목으로 채택하여 가르치기 시작하고, '대체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전체성의학에 대한 사회적 논의 역시 활발해지고 있다. 이제 여러 전체성의학자들 가운데 두드러지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의사들의 암치료에 대한 관점과 접근방식의 공통점을 살펴보자. 이들은 대체로 마음의 치유, 몸의 치유, 영성의 치유라는 세 개의 차원을 상호조화시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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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이완과 시각화 체험하기 : https://blog.naver.com/4eva3030/memo/221185909227 ]


마음의 치유


 여기서 마음이란 한 개인의 의식이 지닌바 다양한 관점/신념/생각/감정/의지 등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마음의 치유'에서 제시하는 명제는 '몸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먼저 마음을 변화시켜라'이다. 기계론적 생의학의 한계 가운데 하나는 인체 내에서 진행되는 질병 또는 그에 대한 치유는 그 사람의 의식과는 별 상관 없다는 전제이다. 서양의학은 아직도 인체를 마치 마음이 없는 기계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환자의 의지/신념/상상/기대 같은 의식상태가 환자의 건강상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암을 절망적으로 낫지 않는 병으로 생각하는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환자보다 삶에 대한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진 환자 쪽이 훨씬 경과가 좋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녹 탈머(Hanock Talmor)가 지난 10여년간의 임상경험을 통해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첫째 그룹은 '암은 낫기 어렵다'는 보편적인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인 나머지 자신의 병에 대해서도 그러한 인식을 바꾸지 못하는 환자들이다. 이 환자들은 생존율이 제일 낮을 뿐 아니라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경험한다.


 둘째 그룹은 그러한 집단신념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 자기만은 꼭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 환자들이다. 이들은 어느정도 정신적/감정적 개선을 경험하게 되고 임종 때까지 비교적 덜한 육체적 고통을 겪는다.


 셋째 그룹은 암이 난치병이라고 믿는 대중들의 집단신념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환자들이다. 이들은 암을 만들어낸 자기의식 속의 신념들을 근본적으로 바꾸며 자신의 병과 삶 전반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이런 환자들 가운데서 암이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가 제일 많다. 따라서 환자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치유를 향한 가장 중요한 디딤돌이다.


 마음의 치유에 있어 가장 많이 사용되는 테크닉의 하나는 싸이먼트 암연구소에서 개발한 '긴장이완과 시각화 (relaxation and visualization)이다. 일종의 상상법인데, 편안한 환경에서 심신의 긴장을 이완시킨 후 암세포들이 소멸해가는 구체적 모습이나 완쾌된 자신의 영상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자기 전에 아픈 자신의 몸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것이 효과가 있겠습니다.]


 디팍 초프라(Deepak Chopra)는 이런 방법을 통해 놀라운 체험을 한 두 명의 암환자를 소개하고 있다. 첫번째는 폐암으로 항암제 투여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으니 경과가 좋지 않아 '긴장이완과 시각화' 방법을 시행한 뒤 경이로운 반응을 보인 중년 여성환자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앉아서 한번에 약 10분씩 일종의 자기암시를 하였다. '나는 낫는다, 반드시 완쾌한다.'라고 진심으로 믿으며 자신의 암이 마치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 사라지는 것을 하루에 수차례씩 상상하였다. 약 3년 후 암의 임상적 흔적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다른 환자들에게 주는 충고는 이 방법을 실천할 때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고 비밀리에 하라는 것이다. 의사나 가족들의 부정적인 신념이 치유효과를 경감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다른 경우는 비(非) 호지킨림프종이라는 진단을 받은 20대의 젊은 여성이었다. 한때 그녀는 암이 제4단계 B까지 진행되고 골수에까지 전이되어 절망적이었다. 그때 항암제 치료의 부작용으로 전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나머지 좌절하여 모든 치료를 중단하려고까지 했으나 다시 도전의지를 회복하여 실행한 방법이 이 시각화였다. 그녀는 유럽의 한 조용한 마을에 머물면서 오로지 이 방법에만 열중하였다. 약 1년 후 처음 진료를 받은 병원에서 진찰을 했는데 암이 흔적조차 없어져서 담당 의사도 의아해할 정도였다.


 어떻게 이같은 치유가 가능한가? 이는 결국 암이란 단순히 발암물질 같은 물리적 요인이 생물학적 매커니즘에 작용하여 발병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다시 말하면 물리적/사회적/문화적 제조건에 가득찬 부조화와 불균형이 배경이 되고, 이러한 혼란스런 환경에 대응하는 개인의 심리 상태가 핵심적 발병원인이 되는 것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신체의 면역 체계를 약화시키고 내분비계의 균형을 파괴함으로써 암세포가 발생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암에 대한 통념은 암세포는 그 힘이 매우 강하고 무섭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사실과 다르며 암세포란 매우 약하고 혼란스런 세포일 뿐이다. 침략하고 공격하고 파괴하는 세포가 아니라 다만 세포분열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미숙한 세포를 과다생산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암은 잘못된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한다. 유전자 차원에서 볼 때 암은 혼란된 정보와 비뚤어진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성숙한 세포분열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이다. 이런 혼란스런 정보와 지성은 암환자 자신의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로 볼 수 있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멘털 테크닉(mental technique)을 통해서 환자가 자신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나아가 상실한 지성을 회복한다면 유전자가 담고 있는 정보와 지성도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정신적 테크닉으로 치유되는 배경이다.


 발암물질을 똑같이 투여한 쥐라도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준 쥐와 그렇지 않은 쥐의 암 발생률을 비교해보면 전자의 경우에 훨씬 많이 발병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스트레스가 발암 유전자와 이를 차단하는 억제 유전자 간의 균형을 파괴하는 방아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멘털 테크닉은 스트레스가 암을 일으키고 진행시키는 메커니즘을 역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싸이먼트 암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이러한 멘털 테크닉을 활용한 암환자의 평균 생존기간은 최첨단 의학기술로 치료받은 암환자의 2배이며, 미국 전체 암환자의 평균 생존기간의 3배에 이른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치료 불능으로 판정받은 환자들이 이 방법을 통해 남은 생을 훨씬 풍요롭게 보냄으로써 삶의 질이 향상되고 덜 고통스럽게 임종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암은 곧 죽음과 동의어이다. 그러나 암환자가 두려움분노절망에서 벗어나 관용과 희망과 용기를 회복할 때 치유의 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 마음의 치유란 한마디로 '암은 절망적이다'라는 비관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암은 반드시 낫는다'는 의지를 가지고 암이 치유된 상태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 방식에 동의한다면 환자이건 치료자이건 누구라도 자신에게 맞는 효율적인 방법들을 개발하여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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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치유


 몸의 치유가 추구하는 목표는 인체 내에 독성의 유입을 예방하는 일과 이를 제거하는 일, 호르몬계의 기능과 각 기관의 대사작용을 원활히 하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면역력의 증강에 두고 있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바른 섭생과 균형잡힌 영양의 유지, 운동과 휴식, 기타 자연요법 등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음식과 영양


 전체성의학에서 몸을 치유하는 방법 가운데 식이요법의 중요성이 가장 크게 강조되고 있다. <의사들이여, 네 자신의 병부터 고쳐라 (Physicians heal yourself)>라는 책을 쓴 앤써니 스테이틀리어 (Anthony Statelier)는 자신의 전립선암이 현대의학으로 낫지 않자 식이요법을 통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나 가리지 말고 많이 먹어라'라고 무책임하게 가르치고 있는 의사들을 비판하고 있다. 많은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체중이 줄지 않게끔 무엇이든 잘 먹도록 권하고 있다. 또 더러는 정맥주사를 통해서 영양을 공급하기까지 하지만 이런 방식이 암환자의 생존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이다.


 무엇이나 맘껏 먹도록 허용한 쥐들과 굶주림만 면할 정도로 적은 양의 곡류만을 섭취한 쥐들을 비교했을 때 전자의 암 발병률이 현저하게 높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지방질이 적고 섬유질이 풍부한 음식 곧 곡류/야채/과일류의 음식을 주식으로 할 때 암 발명이 크게 줄어든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동물성 지방 섭취를 줄이고, 섬유질이 많은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면 발암물질이 세포의 DNA에 입히는 손상을 줄여 변이된 유전자가 암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를 암치료에 응용한 것이 바로 식이요법이며,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 섭취하는 총칼로리를 줄인다. 경우에 따라서 절식(fasting)이나 생식(wheatgrass diet) 같은 적극적인 방법을 활용한다.

- 동물성 지방 섭취를 피하고 필요할 때는 식물성 지방을 섭취한다.

- 모든 종류의 단백질 섭취량을 줄인다. 필요하다면 콩과 같은 식물성 단백질을 섭취한다.

- 흡연/음주/약물/소금에 절인 것, 화학 조미료, 기타 화학물질로 오염된 음식을 일체 금한다.

- 정백하지 않는 곡류와 야채/해조류/과일 등 섬유질이 풍부한 음식을 주식으로 섭취하며 천연 유기농산물이면 더욱 좋다.

- 흰 설탕과 정제된 흰 소금을 피하고 천일염을 사용한다. 화학물질로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물을 음용한다.

- 필요한 만큼의 천연약초나 건강보조식품을 쓸 수 있다.   


(2) 운동과 휴식


 적당한 운동과 충분한 휴식이 자연치유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육체적 운동은 호흡기가 정상적으로 작용하도록 해주고 혈액순환을 좋게 한다. 따라서 체내의 독소가 제거되고 혈중 산소량이 높아지며 각 장기의 대사활동이 활발해진다. 운동은 근육뿐 아니라 내장의 활동도 증가시키고 땀을 흘리게 함으로써 체내의 노폐물 배설을 촉진한다. 또한 엔도르핀(endorphine) 같은 호르몬 분비를 증가시켜 스트레스 해소해줌으로써 깊은 수면과 휴식이 가능하도록 이끌어준다.


 운동은 반드시 휴식과 균형을 이루며 해야 한다.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할 때는 신체의 에너지체계 조절과 대사활동에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다. 균형잡힌 운동과 휴식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낮에 충분히 걷고 밤에 숙면을 취하라'는 것이다. 자연환경이 좋은 산길이나 숲속을 택해서 걷는 것이 가장 권할 만하며 규칙적으로 일광욕을 겸하면 더욱 좋다.


 요가/기공/호흡법 등을 통해 몸의 각 부위를 자극하고 이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런 방법들 역시 호흡과 에너지 체계를 고르게 하고 마음의 평화와 자연 치유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3) 기타 자연요법


 과거의 생활환경과 낡은 생활습관에서 벗어나 오염이 없는 청정한 생활환경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생활방법을 실행한다. 척추 교정법/장세척과 관장법/목욕요법/반사요법/찜질법/동종요법/향기요법/온열요법 등 많은 종류의 자연요법들이 쓰이고 있다. 이들 중에서 자신에게 도움될 만한 치료법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치료법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치유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자기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가장 알맞는 방법이란 누가 뭐라 해도 그 방법에 믿음이 가고 그것을 실행할 때 즐겁고 행복감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어떤 방법도 모든 사람에게 만능일 수는 없으며 모든 방법들은 각자에게 도움이 되고 유용한 만큼만 가치가 있다.


 몸의 치유에 있어서 많은 치료사례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의사라면 단연 코오다 미쯔오를 들 수 있다. 그는 절식과 생채식의 저칼로리 요법 그리고 독특한 운동과 자연요법을 결합한 일종의 생활요법을 체계화했다. 이러한 요법은 암환자들의 생존율과 삶의 질을 현저히 개선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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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치유


 여기서 말하는 영성(sprituality)이란 공상소설 같은 데서 흔히 접하는 죽은 자의 떠돌아다니는 영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와 정신을 넘어선 생명 창조의 총체적인 배경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으로 한정 지을 수 없으며, 물질도 에너지도 어떤 차원도 아닌, 그래서 실증과학으로 측량하거나 측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개별 생명체들 속에 고루 스며 있는 생명에너지의 무한한 근원이다. 모든 이가 마음 깊숙한 곳에 공유하고 있는 '의식의 통일장(unified field of consciousness) 또는 '순수한 의식(pure awareness)'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 정의를 내리거나 한정짓기 힘든 묘사 불가능한 힘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성이 바로 모든 생명력, 자연치유력의 생성배경이다. 누구나 영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을 바로 자각할 때 경이로운 치유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자각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면 그동안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해온 것은 다만 하나의 생각일 뿐임을 깨닫게 되고 따라서 육체적 질병에 대한 불안감, 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평화를 회복할 수 있다. 이런 영성의 자각상태에서는 몸이 실존적 존재라기보다는 하나의 생각이나 인상, 신념에 불과하므로 육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게 된다.


 영성의 자각상태에 이르는 방법들로는 여러가지 명상법, 호흡관찰법, 의식개발프로그램 등이 있는데 이들은 마치 종교적/영적인 수련법들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실제로 관련 있는 것도 있다.      


 후지나미 죠오지는 현대의학이 눈에 보이는 육체만을 다루는 것은 넌센스이며 의학이 육체 너머의 마음이나 정신, 영성까지를 모두 포괄하여 다룰 때 치유의 효율성이 극대화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미래의 의학은 꼭 이러한 모습으로 그 영역이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하녹 탈머는 자신이 운영하는 영성개발프로그램의 '몸 다루기(body handling)' 연습을 통해 암환자가 자신과 몸을 동일시해온 끈질긴 신념에서 벗어나 자신이 물질적 존재 너머의 죽음이 없는 영성적 존재임을 자각하게 될 때 놀라운 치유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싸이먼튼이 개발한 긴장이완과 시각화요법의 하나인 '죽음 예행연습'은 자신이 죽어가는 과정, 장례절차, 그 후 천상에 안주하거나 지상에 재래하는 모습들을 반복해서 상상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경감시키는 것이다. 내가 이대로 죽어도 좋고 암에서 회복되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생사에 대한 집착이 없을 때 놀라운 치유가 일어나고 나아가 남은 생의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된다. 삶의 질만이 아니라 죽음의 질도 향상된다.


 자연치유력의 근원인 영성의 존재를 한정된 실증과학의 잣대로 확인하려 하거나 객관적으로 입증하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영성과 자연치유 시스템은 실증과학의 한계 너머에 있으며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머리로 알기'를 통해서는 알 수 없으며 오직 '직접 경험하기'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전체성의학이 암 치료에 있어 이같이 마음과 몸과 영성의 치유라는 전일적 접근을 강조한다고 해서 수술/화학요법/방사선 치료와 같은 기계적 방법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학요법과 방사선 치료법은 어느정도 치료효과가 인정되는 몇가지 종류의 종양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 두가지는 DNA에 손상을 입혀 면역체계를 포함한 정상적인 세포분열에 악영향을 미쳐 결국 암환자의 삶의 질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요법은 머지않아 사라질 원시적인 요법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전체성의학자들이 수술 같은 기계적 방법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일반 의사들과 다른 점은 수술에 앞서 자연치유법을 먼저 실행한다는 점이다. 수술이 틀림없이 도움된다고 판단되는 경우일지라도 전체성요법을 먼저 실행하여 자연치유 시스템을 재활시킨 다음, 수술을 하고 이어서 전체성요법을 계속해가는 방식을 취한다. 이렇게 할 때 기계적 방법이 입힐 수 있는 자연치유 시스템에 대한 손상을 최소화하고 면역력을 높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총체적 접근방법은 단순한 기계적 대응방법보다는 암환자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고, 더욱 중요하게는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03] 역사적 관점으로 바라본 [영국의 경험론 vs 독일의 관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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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C - 영국과 프랑스의 경험세계 재발견과 계몽주의  


 18세기 서유럽, 특히 영국에서는 개인이 겪는 경험 세계의 자질구레하고 구체적인 현실 이야기를 산문으로 쓰는 관행이 생겨났다. 이것이 이른바 근대 소설이다. 소설을 쓰는 이들은 대개 장사에 재능이 있고 사회경험이 풍부해 이야기를 꾸밀 때 자연스럽게 자기 체험을 포함시킬 수 있었다. 글감의 원천이 '선배들의 책(고전)’에서 '자신의 체험'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이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 예고되었다. 예컨대 대니얼 디포(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는 국제 무역과 항해의 산물이며, 새뮤얼 리처드슨(1689~1761)의 <파멜라>는 인쇄업자가 편지 교본을 만들다가 서간체 소설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 시기 근대소설의 걸작으로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의 <걸리버 여행기>를 다룬다. 당대의 정치 상황과 인간성에 대한 위대한 풍자문학으로서 근대 소설이라고 간주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독자들의 시각을 교정하고 통념에 도전하기 위해 소개한다.


 프랑스의 18세기는 계몽주의의 시대였고 저술의 시대였다. 샤를 몽테스키외(1689~1755)는 <법의 정신>에서 영국을 모델로 삼아 아직 프랑스에 탄생하지도 않은 민주주의 국가의 구성 원리를 설명했고, 절대왕정과 교회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다. 성격이 모났던 볼테르(1694~1778)는 젊은 시절부터 귀족에게 맞섰다가 영국으로 추방을 당했는데, 이 때문에 프랑스어 못지않게 영어를 잘했다.그는 영국의 뛰어난 정치제도와 문학, 종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직접 보고 익힌 뒤 그것을 프랑스에 소개하고 조국의 후진성을 비난했다. 고전에 익숙한 사람이 교양이 풍부하다고 존경 받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비난 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는 유럽 현실에 대한 신랄한 르포문학이라 할 <캉디드>에서 중세의 관행과 기독교 철학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루소(1712~1778)의 삶은 더욱 흥미롭다. 그는 10세 이후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고, 귀족들이 받는 교육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귀부인의 서재에서 책을 빌려 읽었고, 대부분의 공부를 혼자서 했다.젊은 시절에는 악보를 필사해서 생계를 해결하는,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젊은이였다. 그러한 젊은이가 쓴 <에밀>이라는 책이 서유럽을 뒤흔들고 교회의 금서 처분까지 받았다는 것이야말로 당대 계몽주의의 힘이다. 그는 문제가 많긴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였고, 친구 디드로(1713~1784)와 함께 당대 귀족들의 위선을 놀라울 정도로 가혹하게 비판했다. 디드로 역시 영국 문화를 수입하는 번역자로 활동을 시작한 계몽주의의 자식이고, 그가 쓴 <라모의 조카>는 ’위선을 공격하는 문서’로는 인류가 낳은 최상의 걸작이다.

 

 이 시기에 브리튼 섬 북부의 스코틀랜드에서 위대한 학자 둘이 태어났다. 한 사람은 경험주의 철학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데이비드 흄(1711~1776)이고, 또 한 사람은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 (1723~1790)다. 흄은 모난 성격 탓에 대학 교수직을 얻지 못하고 은둔 생활을 했지만, 진정으로 철두철미한 학자요 문필가의 전형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새로운 시대의 경험적 철학'에 쏟은 그는, 플라톤 이래로 이어져 온 서유럽 관념실재론의 전통을 완전히 끊고, ”인간의 지식은 오직 감각적 경험에서만 생기며, 그 경험은 법칙화할 수 없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관철해 중세 철학을 무위로 만들었다. 스미스는 비교적 평탄한 생활을 한 듯하지만, 내적으로는 대단한 지적 소용돌이를 겪었다. 전공을 바꾸고 새로운 학문 체계(경제학)을 수립하는 창조의 고통을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스미스가 창조한 경제학은, 영국의 학문이었고, 자본주의의 학문이었고, 근대의 학문이었다. 프랑스에도 중농주의 사상가가 있어 그들을 경제학자로 분류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자본주의 경제학의 주류에서 밀려났다. 자본주의 경제학을 비판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은 유대계 독일인인 마르크스(1818~1883)가 수립했다. 이 시기에 영국에서 경제학이 생겨난 근본적 원인은, 16세기 이후 지리상 발견과 서유럽의 제국주의로 인해 유럽 여러 나라들 사이의 경제적 경쟁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자국의 부유함을 측정해 다른 나라와 비교하고, 자국의 부를 증강하는 방법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부를 축적하기 어려웠던 농업 사회에서 경제학과 같은 학문은 발전하기 어려웠다.


 흄과 스미스는 모두 근대적 개인주의를 바탕에 깔고, 전자는 개인의 감각적 경험과 인상을, 후자는 개인의 이기심을 자기 학문의 대전제로 삼았다. 그러나 본래 인문학자, 도덕철학자로 시작했던 스미스는 이후의 경제학자들에 비해 사회 전체의 흐름에 민감했고, 이기심을 조절하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배 경제학자들, 예컨대 제러미 벤담(1748- 1832)은 "삶은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며, 삶의 목표는 쾌락을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단순화한 뒤, 경제학을 욕망과 쾌락을 수량화하는 이론으로 변질시켰다. 이후 윌리엄 제번스(1835~1882)는 벤담의 쾌 락주의를 '효용'이라는 경제학 개념으로 탈바꿈하고, 거기에 수학의 옷을 입혀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수시로 공황으로 몰아넣는 금융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마련된 것도 제번스 시대의 영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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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C ~ 19C - 과학적 엄밀성을 갖춘 독일의 인식론과 반이성주의 

 

 전통적으로 내륙 국가의 성격이 강했던 독일은 약소국은 아니었지만, 19세기 이전에는 통일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분열돼 있었다. 마르틴 루터를 제외한다면 이때까지 세계사에서 문화적으로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람은 거의 없었고, 루터조차 촌티를 벗지 못한 고집 센 독일인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독일이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흐름을 수용하면서 철학과 문학에서 급격한 발달을 보인다. 괴테(1749~1832)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이 시기의 독일인들은, 철학 영역에서 다른 서유럽 국가들이 해내지 못한 독특한 과업을 기꺼이 떠맡았다.이와 거의 동시에 독일은 통일제국을 이룩하고, 20세기에 세계전쟁을 두 번이나 일으키게 될 국력을 비축하기 시작한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독일이 이룬 문학 운동과 철학의 업적은, 분명히 무시할 수 없는 인류의 독특한 유산이 되었다.


 철학의 세계사적 과업을 떠맡아 전 유럽에 영향력 있는 독일어 저술을 최초로 남긴 사람은 칸트(1724~1804)다. 근대 초기는 철학이 분과 학문으로 정립해 있지 않았으므로, 칸트도 초반에는 수 학과 물리학, 천문학을 연구했다. 영국의 회의주의 철학자 흄의 영향을 받았고, 철학에서도 과학처럼 확실한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다. 전통적인 철학, 즉 형이상학에 자연과학적 엄밀성 을 부여하고 싶었지만, 성격이 조심스러웠던 탓에 인식의 한계를 긋는 데서 머무르고 ’사물 자체’는 인간이 알 수 없다고 포기하고 말았다. 칸트 철학은 철학자의 과학 옹호론으로 잘못 이해되기도 하 지만, 그가 추구했던 것은 과학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식의 한계만 긋고 죽은 칸트에게 후배들이 불만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피히테(1762 ~1814)는 칸트의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정신(의식)이 절대적 진리를 구성할 수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폈다. 물론 그의 관심사는 인식론보다는 윤리학에 있었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가 너무 강해 희망사항을 해답으로 강변한 측면이 있었다(이 점을 쇼펜하우어가 강력하게 비판한다). 피히테의 후배인 헤겔(1770~1831)은, 정신이 (피히테가 말한) 절대적 능력을 갖게 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려고 했고, 진정으로 우람하고 깊이 있는 체계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그러나 그의 체계는 사상적 설득력은 있지만 엄밀한 과학적 근거를 갖는 것은 아니었고, 일종의 신학적 통찰에 가까운 것이었다. 베를린 대학에서 그와 경쟁했던 쇼펜하우어(1788~1860)가 헤겔을 사기꾼이라고 비판한 이유다.

 

 헤겔 철학은 논리나 방법 면에서 분명히 우수한 점이 있고, 특히 사회과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서유럽 역사의 변방에 있으면서 뒤처졌던 독일이 세계사의 흐름에서 앞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엿보이고, 그 때문에 거창한 결론을 무리하게 도출한 혐의도 있다. 20세기 영국의 분석철학자들은 헤겔을 공공연히 조롱하지만, 19세기의 독일인 쇼펜하우어도 헤겔의 약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천성적으로 시대적 사명이나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웠던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존재 조건을 실존적으로 분석해 칸트 철학을 완성하고 싶어 했다. 그는 칸트가 인식의 한계선으로 설정한 '사물 자체' 같은 것은 없고, 인간이 인식하는 삼라만상이 의지에 지배되는 지성의 표상(관념으로 번역할 수도 있음), 즉 인간의 관점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인식론에 바탕을 두고, 기독교를 포함한 서양의 형이상학 전체를 파괴한 사람이 프리드리히 니체(1844- 1900)다.


 고전문헌학을 무기로 삼았던 니체는, 20세기 이전의 유럽인 가운데서 유일하게 유럽 문명 전체를 상대주의적 시야에 놓고 비판한 사람이다(헤겔만 하더라도 동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우월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독일은 유럽의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중추였기 때문에, 희랍/로마 고전 문명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것이 유리했다. 19세기 독일에서 희랍 고전문헌학이 눈부 시게 발달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니체는 그 흐름에서 나온 두드러진 별이었다. 그는 괴테가 내세운 희랍 문명에 입각한 고전주의를 존중했으며, 이를 더욱 과감하게 밀고 나가, 유럽인과 뗄 수 없게 된 기독교 문명을 철저하게 공격했다. 칸트에서 시작해서 니체에서 완결되는 독일 철학의 흐름은, 독일인의 상대적 후진성과 정신주의 성향, 그를 상쇄하는 놀라운 근면성, 그리고 그들의 내면에 잠재한 반이성주의(쇼펜하우어, 니체)를 현란하게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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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C - 영국과 독일의 정면충돌과 상처의 회복 


 현대인의 삶은 20세기의 세계 변화가 규정한 결과라고 해야 한다.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시기였다. 보통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이 시기를 대략 거대한 흐름으로 파악해 다음 두 사건을 표 나게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19세기부El 일어난 경제 혁명인 '산업 자본주의'의 확산, 전제군주의 지배를 극복한 정치 혁명인 '의회 민주주의'의 점진적 도입. 그러나 역사 자체에 주목해 볼 때 자본주의화와 민주주의화는 결코 정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각각 최선의 경제 체제와 정치 체제인 것도 아니다. 영토와 식민지라는 이권 을 둘러싼 열강의 맹목적 지배 의지가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충돌을 일으키고, 그로부터 절멸의 위협이라는 교훈을 얻은 인류는 이성에 호소하는 세계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꼈다. 이 절박감이 현 세계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산업 자본주의가 가장 일찍 발달한 국가는 서유럽의 가장 외곽에 있는 섬나라 영국이다. 19세기 이후 면직 공업, 기계 공업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영국은, 탁월한 항해술과 과학 지식을 이용해 아시아로 진출하는 항로를 지배하면서 식민지를 이룩해 갔다. 영국은 19세기 내내,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 아프리카 최남단 케이프타운(1815년 영국령화), 페르시아 일대(1856~1857년 앵글로-페르시아 전쟁), 인도(1818년부터 동인도회사를 통한 간접 통치.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에는 직접 통치), 이집트(1876년 보호령화, 싱가포르(1819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항구로 건설), 홍콩 (1841년 아편전쟁 승전으로 중국으로부터 획득), 심지어 조선의 거문도(1885~1887년 영국 함대가 러시아 남하 저지를 명분으로 일시 점령)에까지 크고 작은 군사충돌을 일으키며 진출했고, 대서 양, 인도양, 태평양 동부에 이르는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전역의 해안지대를 세력권으로 삼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대영제국이다.


 나폴레옹 통치 시기(1804~1814)의 프랑스를 제외하면, 19세기 말엽까지 서유럽에서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나라는 없었다. 영국의 세계 전략에 실제로 위협을 가한 나라는 동유럽의 러시아였 다. 러시아는 본디 유럽의 동쪽 변방에 있는 소국이었는데, 17세기부터 발트 해 깊숙한 곳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러시아 제국을 성립시킨 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 진출하는 이른바 동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영국이 유라시아 대륙 남쪽의 해안선을 따라 동진정책을 추구했다면, 러시아는 북쪽의 광활한 시베리아를 관통하며 나아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와 영국은 크림 전 쟁(1853~1856년),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9세기 내내), 러일 전쟁(1904~1905년) 등으로 충돌했다. 러시아와 영국의 충돌은, 양국의 직접 전쟁보다는 대부분 영국의 동맹국이 러시아와 싸우는 대리전 형태로 벌어졌다. 크림 전쟁 때는 투르크가, 러일전쟁 때는 일본이 그런 역할을 했다. 모두 영국에 상비군이 적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회고해 보건대, 영국은 막대한 식민지를 가지긴 했지만 군사력 면에서 결코 최강일 수 없는 나라였다. 식민지를 제외한 영국의 영토는 브리튼 섬과 주변 지역에 한정되며, 해군력을 제외한 육군의 상비군 수는 매우 적었다. 오직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인한 풍부한 물자, 과학 기술의 힘으로 뒷받침되는 식민지 경영 능력 및 상업 수완이 대영제국을 지탱하는 실질적 힘이었다. 이러한 힘만으로 19 세기 내내 영국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나 독일의 힘이 아직 미약했기 때문이다. 영국이 식민지를 경영하던 19세기 내내, 미국은 내전을 거치며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골몰했고, 독일은 중세부터 이어진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 에도 힘이 부쳤다. 영국만이 식민지를 경영할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정세에 변화가 일어났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큰 손실을 입자, 영국은 러시아 견제에 관해서는 한숨 돌리게 됐다. 영국은 외교적으로 독일을 고립시키기 위해 나섰고, 1902년에는 일본과 동맹을, 1904년에는 프랑스와 우호 협상을 체결했다. 해군 확장에 박차를 가하던 신흥 제국 독일을 저지하기 위한 협상에도 나섰다. 영국은 대체로 가상 적국 2개 국의 해군력을 합친 정도의 해군력 보유를 기본 방침으로 하고 있었지만, 1898년 이후 독일 해군의 증강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영국은 필사적으로 독일에게 군축협정을 제의했지만, 독일은 미온적이었다.


 20세기는 세계사에서 한국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를 기억할 것이다. 1905년에 이른바 을사조약을 일본의 압박에 못 이겨 강제 체결당 한 고종 황제가, 일본의 침략성을 알리고 조선의 위기를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이준/이상설/이위종 세 밀사를 헤이그로 특파했다. 그러나 그들은 회의장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쫓겨났고, 분을 이기지 못한 이준 열사는 그곳에서 순국했다. 하지만 실상 만국평화 회의라는 이름의 이 회의는, 주로 육전과 관련된 국제 법규나 포로 관련 규정을 다루기 위한 회의였을 뿐, 식민지가 될 위기에 처한 극동의 약소국을 돕기 위한 회의가 결코 아니었다. 또 하나, 이 회의에서 영국과 독일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영국은 해군 군축협정을 체결하자고 요구했고, 독일은 이를 거부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협의가 결렬되고 두어 달 만인 1907년 8월, 영국이 러시아와 영러협상을 맺고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20세기 초 10년간의 세계사는, 영국과 러시아의 오랜 갈등이 봉합되고, 영국과 독일의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영러협상 성립 후 독일은 유럽 전역에서 사실상 고립되었고, 자기를 지킬 힘은 자기가 길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게 되었다. 세계지도를 펴보면 독일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나라가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감행해야 하고, 프랑스만 해도 서쪽은 바다가 있을 뿐 적국이 없다. 그러나 독일은,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잠재적 적국에 둘러싸여 있어 늘 양면전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나중 이야기이지만, 히틀러가 1939년 8월 23일 철천지원 수였던 공산주의자 스탈린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이유도, 전쟁이 일어날 경우 서부전선의 전투에 집중하고 양면전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달리, 독일은 모순되는 것들을 안고 가야 하는 숙명을 지닌 나라였던 것이다.


 1908년 이후 독일에 남은 유일한 동맹은, 쓰러져 가는 중세적 지배 체제를 상징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뿐이었다. 이후 20세기 역사에서 민주주의 정치제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제국들이 모두 흔적 없이 사라졌고, (독일, 이탈리아의 예에서 보듯) 전통적으로 모래알처럼 권력이 분열돼 있던 땅덩어리들이, 19세기 말부터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정치적 개념 아래 통합되면서 공화주의적 통일 국가를 수립했다는 사실을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정치 체제였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소속 신민들을 단합시킬 구심점도, 징병이나 징세를 실행할 행정력도 없었다. 당시 동유럽 남부의 발칸 지역은 명목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지만, 실제 그곳은 제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은 발칸 소수민족 중 하나인 세르비아의 청년에게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를 치기 위해 독일에 지원을 요청했고, 독 일이 총동원령을 내리자 적대국인 러시아도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이 러시아의 동맹국 프랑스를 치기 위해 벨기에로 진군하자,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영국과 독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이것이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이다.


 독일의 비극은, 당시 어느 나라보다도 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지정학적으로 양면전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고, 강력한 동맹도 갖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독일의 책임이라 할 부 분도 없지 않다. 독일은 영국이 지닌 국제정치적 기득권을 인정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영국과 그 정치 체제를 폄하하고 있었다. 영국은 실력 이상으로 많은 것을 갖고 있고, 내면의 교류를 무시한 채 실리만 추구하는 얄팍한 장사꾼들의 국가라고 인식했다. 이 점은 영-독 군축협상이 진행되는 방식에서도 드러났다. 영국은 독일의 해군력을 저지하기 위해 군함의 수를 제한하는 해군협정 체결에 목을 맨 반면, 독일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해군협정은 소용없다며, 상호 적대 관계 해소를 명시하는 정치협정부터 맺자고 주장했다. 물론 영국은 자국의 자유를 제한하는 이러한 협정에 응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최종 책임에 대한 국제 외교사학계의 견해는 오늘날까지도 엇갈린다. 영국 측은 독일의 팽창정책을, 독일은 영국의 위선적이고 탐욕적인 외교를 전쟁의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기득권을 유지하는 세계 질서를 유지하려 한 영국과, 실력으로 영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변형시키려 한 독일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독일이 영국을 미워한 이유는, 영국이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속 보이는 짓을 하면서도, 보편적 자유 경쟁 원리에 입각해 행동한다고 자처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강경파는 영국의 이러한 태도를 실력으로 제압하려고 했고, 이것이 제1차 세계 대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강조했듯이, 영국과 독일의 1:1 전쟁이었다면 독일에 승산이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영국은 프랑스/러시아/미국의 지원 을 받은 데 반해 독일 편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밖에 없었다. 결국 1918년 독일은 패전했고, 그것도 모자라 막대한 배상금 지불까지 강요당했다. 막스 베버(1864~1920)와 같은 영향력 있는 독일인들이 1919년 베르사유의 연합국 대표단에게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배상 거부는 전쟁 재개’라는 협박뿐이었다.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서 사태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결코 질 수 없는 전쟁에 져서 억울하게 배상금까지 물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경제적 곤궁을 겪으면서 급속하게 서유럽 세계로부터 이탈했다. 독일의 극단 주의 세력은 다시 한 번 독일의 영광과 독일 중심의 세계 지배라는 낭만주의적 꿈을 꾸기 시작했고, 1920년대 내내 영국식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실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히틀러와 나치당은 그러한 움직임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들은 배상금 지급을 거부하고 재군비에 나서면서 주변 지역을 차례로 병합했다. 토마스 만(1875- 1955)은 이 시대 독일 극우파의 성지나 다름없던 뮌헨에 살면서, 영국식 합리주의를 무조건 받아들일 수도 없고 비합리주의의 광기에 몸을 맡길 수도 없는, 독일의 분열된 운명을 통찰했다.


 만에 따르면, 영국식 의회 민주주의는 당리당략과 얄팍한 사익 추구로 흘러 인간성을 세속화하는 나쁜 정치 체제였다. 나치즘을 신봉하는 극단주의자들이 아니더라도, 만을 포함한 상당수의 독일인들은 자유의사의 존중이나 다수결과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사회를 움직이는 진정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들은 역사적 사건을 일으키는 궁극적인 힘을 내적인 결의나 정신의 고양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정신현상학>). 막스 베버의 동료였던 경제사학자 베르너 좀바르트(1863~1941)는, '‘영국은 장사꾼이고, 독일은 영웅”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게다가 사색적이었던 독일인들은, 자기들의 성향을 영국인의 특질과 대비 하는 기준을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발견했다. 이를 실제 역사의 전개에 맞춰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은 대비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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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사태를 이렇게 단순하게만 볼 수는 없다. 히틀러가 독일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없고, 모든 영국인이 개별화를 지향하고 자본주의를 옹호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다루는 영국 작가 세 명은 모두 영국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버나드 쇼(1856~1950)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니체의 초인적 세계관으로 극복하려 했고, 섬세한 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인간을 개별화하고 파편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잔혹성을 고발했다. 한편 거친 남성성과 섬세한 낭만성을 겸비한 로런스(1885~1930)는 영국의 물질주의적 세속성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기본 성향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 성향을 끝까지 유지했다. 반면 많은 독일인들은 영국적 자본주의의 위선을 산발적으로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와 정반대되는 극단적 힘을 현실화했다. 그들은 전체주의적 야수성에 의해 조직되는 사회 체제(나치즘)를 실현했고, 조국에 패전국이라는 불명예를 입힌 영국과 프랑스에 복수했다.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이 일어난 진정한 이유는 이것이다.


[04] 2차 세계대전까지 갈 필요 없이, 통합했으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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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타이너는 인간의 참된 본질을 의식하도록 이끌어 주는 연구라는 뜻에서 자신의 연구에 인지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에 의하면 정신/영혼/육체의 통일체로서의 인간이 자기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이 바로 인지학적 노력의 초석이다. 인지학에 대한 슈타이너의 이런 자기 이해에 기초하여 먼저 슈타이너가 인지학체계를 성립시켜 가는 과정을 당시 시대의 전반적 분위기와 함께 그의 사유의 흐름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시대의 사상적 분위기


 슈타이너의 인지학에서 우리는 슈타이너가 생존하였던 시대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시대와 사회 문화적인 배경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곧 슈타이너의 인지학은 슈타이너 개인의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의 소산인 것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사람들은 세기말의 불안감 속에서 새로운 시대와 더불어 새로운 인간,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상(像)이 도래하기를 기대했다(Wehr 2001, 263).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은 서구에서의 기독교의 보편적 지배의 약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간행된 <서구의 몰락>이라는 슈펭글러(O. Spengler)의 저서는 서양 문명 속의 그 무언가가 썩어가고 있다는 일반적 불안을 날카롭고도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세기말의 불안이 안겨주는 시대 의식을 자신의 예술 분야에서 구현하였다. 예를 들어 세기말적 불안을 반영하듯 요즘 들어 다시 심취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음악가인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당시의 불확실성을 음악으로 나타내었으며, 화가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절망과 불안과 탄식을 핏빛 화폭에 담아내었으며, 작가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는 수형자(受刑子)처럼 느껴지는, 국외자로 겉도는 듯한, 본래성을 잃고 그저 기능인으로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독한 잿빛 삶을 묘사하였다. 세기의 전환기를 맞아 의미를 찾고자 하는 강한 요구는 영성주의, 심령학, 신지학(神智學: Theosophie)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분출되었다.


[신지학 : 일반적으로 신지학이란 인간적인 모든 인식능력을 넘어서서 신비적인 계시와 직관에 의해 신과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그 깊은 뜻을 파헤치려는 것을 뜻한다. 신지학은 힌두교, 불교, 동/서양의 신비주의적 전통, 영적 진화론 등이 결합된 독특한 세계관으로서 영혼 혹은 아트만, 신, 업보(Karma)의 법칙, 해탈, 세계의 진화를 전제로 한다. 신지학의 기본 원리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멸의 정신적인 실체로서 정신적 실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에 우주-정신적인 것을 직접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신지학에 의하면 인간의 자아 혹은 영혼은 불멸하며 환생을 거듭하며 지고한 신적 존재로 진화해 간다. 신지학의 원리로부터 반영과 위축이라는 두 가지 메타포가 나온다. 반영의 메타포란, 경험적인 육체와 개인의 일반 의식에 있어서 육신은 다만 그의 자아의 참된 정신성의 반영 도구일 뿐이며, 자아는 육신 밖에서 정신 및 영적으로 자유로이 운신하고 있음을 뜻한다. 위축(Ablähmung)의 메타포는 같은 견해를 다른 관점으로 표현한다. 자아는 시공간적 세계 외에도 초감각-정신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본원적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능력은 사람의 육신 안에 존재함으로 인해 “그 힘이 저하되어(herabgelahmt)” 보통의 감각 지각에 머무른다. 곧 몸은 영혼의 감옥이다. 신지학이 학회로 성립된 것은 1875년 블라바츠키(Helena P. Blavatssky, 1831-1891)에 의해서이다. 블라바츠키는 올콧(Henry Steel Olcott, 1832-1907)과 함께 1875년 11월 17일 뉴욕에서 처음 신지학 협회를 설립하였다. 빈에서는 신지학 협회 비밀 결사대가 결성되고 에크슈타인(Friedrich Eckstein, 1861-1939)이 지도자가 되었다. 반영과 위축의 메타포는 Ullrich 1984 참조]


 20세기 초에는 독일 운동(괴테 시대, 질풍노도 운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적인 것, 비합리적, 무의식적인 것이 재발견되었다. 이 시기에 기계주의에서 생명주의로, 합리주의에서 비합리성을 인정하는 시대적 전환이 분명히 일어났으며 알 수 없는 신비함 역시 과학 및 철학으로 표현되었다(Reble 2002, 345). 당시 새로운 분야였던 심리학이 비약적 발전을 이룬 것 역시 인간의 내면의 차원을 탐색하고자 하는 당시 사람들의 강한 바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다른 한편에 19세기의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적 사고에 대항하여 일어난 하나의 철학운동인 ‘삶의 철학(Lebensphilosophie)’이 있다. 20세기 초에 ‘삶의 철학’은 교육의 역사에서 개혁 교육 운동뿐만 아니라 정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삶의 철학’은 직접적인 체험에서 나오는, 이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직관과 개인적 체험을 논리적․개념적 인식보다 우위에 두고 철학을 예술 영역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Reble 2002, 347). ‘삶의 철학’에서는 형이상학적, 종교적 문제들이 철학의 중심 내용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문학사에서의 질풍노도 시기를 각인했던 범신론적 특성과 만물을 지배하는 영성에 대한 각성은 ‘삶의 철학’의 세계관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나타났다(Bollnow 1978, 22).


 생물학과 심리학 연구에서도 유기체적 삶과 더불어 정신 및 영혼의 삶을 하나의 전체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인간을 전체로 보고 통일체로 연구하고자 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성격학과 유형학이 꽃을 피웠다(Reble 2002, 346 => 전체주의 의학). 또한 사상가들은 전인(全人)을 공통적으로 주제화하였다. 20세기 초의 이런 모든 노력은 시대의 특별한 관심이 인간, 구체적으로 인간 존재의 내면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신사적으로 살펴보면 슈타이너의 인지학적 ‘정신과학’은 신지학의 변종으로서 ‘과학적 세계관’으로 이해되는 통속-철학의 범주에 속한다(Ullrich 1984, 467). 과학적 세계관은 ‘삶의 철학’의 항로를 따라 기독교로부터 전향을 꾀하는 가운데 동시에 독일 관념론이라는 거대한 형이상학 체계의 몰락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발생하였다. 이 세계관은 역사주의에 반대해서 그리고 전문화되어 가는 개별과학에 반대하여 세계에 대한 하나의 ‘전체적’ 시각을 되찾으려 시도했다. 자신의 학설의 성격에 관해 밝힌 슈타이너의 진술에서 이러한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다. 


 “우리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최후의 승리에 이르기까지 발달한 종교, 예술 그리고 과학의 분리를 체험하였다. 그러나 탐색되어야 하는 것 그리고 동서간 의사소통이 먼저 발견하게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조화, 즉 종교, 예술 그리고 과학의 내적 통일이다. 그리고 이런 내적 통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여기서의 화두가 되었고 계속 더 말하게 될 세계 이해와 삶의 관점이다”(Kugler 1991, 17 재인용).


 철학의 변종으로서의 ‘세계관’은 단일한 어떤 것을 통해서는 결코 반박될 수 없는 보편적인 해석틀(Deutungsmuster)로서 관념론 이후 전통적인 철학 체계의 역할을 넘겨받는다(Ullrich 1984, 467). 그것은 이론이나 규범에 있어서 전체성에 대한 필요를 세계 전체를 유일한 관점으로 ‘봄(Schau)’으로써 충족시키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세계관의 철학자는 자주 세계관에 기초한 공동체의 창설자 및 이데올로기적 지도자가 된다.


 슈타이너는 신지학에서 인지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는데, 슈타이너의 인지학은 동양인이 추구하는 정신 세계와 서구인들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 주체로서의 자아와 과학의 세계가 절충적으로 혼융되어 있는 체계이다. 슈타이너의 인지학은 새로운 지성 종교를 찾고 있던 당시 사람들의 열망과 맞물리면서 종교적 세계관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과학적 사고에 기초하여 “초자연적인 것을 배척하면서도 초자연적인 것만이 줄 수 있는 전지(全知)의 확신에 대한 욕구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Brinton 1984, 507) 시대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슈타이너 개인의 사유의 형성 과정 안에서


 슈타이너는 사회적 아웃사이더로서의 삶을 살면서 중심부로의 진입을 꾀하였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크랄예백(Kraljevec)인데 그의 민족적 정체감은 뼈 속 깊이 아리아인이었다. 철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Johann Steiner, 1829-1910)의 계속되는 전근으로 슈타이너는 친구 없이 외톨이로 지냈으며 마을의 공동체를 겉도는 이방인이었다. 인간의 영혼에, 현상보다는 본질을 추구하는 슈타이너의 성향은 이런 측면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슈타이너의 인지학 구상의 시발점은 7살 때 경험한 신비 체험이었다. 그는 먼 곳에 살던 이모의 자살을 역 대합실에서 환상을 통해 생생히 본 경험으로, 자연 속에 영혼들이 작용하고 있고 초감각적 세계가 실재함을 의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부터 자신에게 “영혼 속의 삶”이 시작되었다고 슈타이너는 보고한다. 그리고 9살 때부터 슈타이너는 기하학의 세계에서 정신적으로 확고한 기초를 발견하게 되었고 초자연적 현상들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슈타이너는 정신경험을 어떻게 자연인식으로써 전달하는가에 관심이 있었는데 대학 시절 슈뢰어(Karl Julius Schröer, 1825-1900) 교수와 접하면서 괴테의 자연과학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슈타이너는 자신의 인지학 이론의 선구자로 주저 없이 괴테를 말한다. 슈타이너는 슈뢰어 교수의 추천으로 1883년 <독일 국민문학> (Deutsche Nationalliteratur) 대전집의 출판이라는 기념비적 사업에 괴테의 자연과학 관련 분야에 협력하게 되었고 그 성과가 <독일 국민문학 전집>에 실리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슈타이너는 본격적으로 괴테를 연구하게 되어 괴테의 자연과학적 연구 방법에 통달하게 되었다.


 괴테의 인식방법을 철학적으로 연구한 결과이자, 근대적 사유와 정신적 관조(Anschauung)의 간극을 극복하기 위한 슈타이너 자신의 철학적-방법론적 노력의 결과 탄생한 것이 <괴테적 세계관의 인식이론 개요> (Grundlinien einer Erkenntnistheorie der Goetheschen Weltanschauung mit besonderer Rücksicht auf Schiller)(1886)이다. 슈타이너의 눈에 비친 괴테는 자연 스스로가 말하게 하고, 어디에서도 자연을 휘두르려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 그런 연구가였다. 괴테는 대상을 진정으로 주시하면 대상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정신적으로 사고하는 자아가 자연 현상들의 세계로 가는 길을 어떻게 찾는가 하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도움과 길잡이를 괴테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 슈타이너는 말하고 있다(Lindenberg 1992, 37). 


 슈타이너가 대학 시절 몰두했던 또 다른 문제인 물질의 문제를 슈타이너는 괴테 연구의 결과로써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뚜렷한 세계상이라 하더라도 그 기반을 이루는 어떤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세계상은 스스로 변화하며 감지된 것들의 총체일 뿐이다”(Lindenberg 1992, 39 재인용).


 슈타이너는 사실로 드러나는 세상 뒤에 존재하는 실재가 영원히 지속되는 물질이라고 생각하는 유물론적 사유를 거부한다(Lindenberg 1992, 39). 


 한편 슈타이너는 대학 시절 빈(Wien)에서 여러 가지 서클 활동을 통해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 스콜라 철학, 중세의 신비주의적 기독교 전통과 만나게 되었다. 슈타이너는 자신 안의 신비적 요소로 한참 동안 방황하다가 결국 빈의 신지학(Theosophie) 협회에서 마음의 문을 열었다.


 슈타이너는 1890년부터 바이마르의 괴테-쉴러 문서 보관소에서 5권 짜리 방대한 괴테-소피엔-판(Goethe-Sophien-Ausgabe)을 편집하고 간행하는 일을 맡아 하면서 <진리와 학문> (Wahrheit und Wissenschaft)과 <자유의 철학> (Die Philosophie der Freiheit)을 출판하였다. <진리와 학문>은 그의 박사학위논문을 확대한 것으로 인식론을 다루고 있는데 1891년에 출간되었다. <자유의 철학>은 1893년 10월에 완성, 1894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슈타이너 자신의 체험에 기초한 것으로서 “자연과학적 방법에 따른 관찰의 결과”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이 부제가 말해 주듯이 여기서 그는 엄격한 자연과학의 방법을 사용하는 하나의 정신과학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자유의 철학>은 그 주제와 내용 면에서 인간의 창조적 자유를 인간 고유의 것으로 증명하려는 철학적 인간학이다. 바이마르에서 마지막으로 집필한 <괴테의 세계관> (Goethes Weltanschauung)(1897)에서 슈타이너는 세상의 본질이 인간 안에 나타나 있다고 설명한다.


 베를린으로 이주한 다음 해인 1898년부터 슈타이너는 신지학회와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00년 9월 슈타이너는 브로크도르프 백작 부부(Sophie und Cay Lorenz von Brockdorff)가 운영하는 신지학 도서관에서 니체에 관한 강연을 청탁 받았다. 1900년 9월 22일 신지학 도서관에서 강연할 때 슈타이너 자신은 아무런 기대감도 없었으나 청중들의 호응은 높았다. 두 번째 강연을 요청 받고 그는 ‘괴테의 은밀한 계시’를 제안하였고, 이 강연 후 바로 그 다음 주부터 신비학에 관한 연속 강연회를 청탁 받았다.


 1901/02년 겨울학기 동안 신지학회 도서관의 주관 하에서 슈타이너는 다시 강연을 가졌다. <고대의 신비와 신비적 사실로서의 기독교>라는 책은 1902년 강연 내용을 요약하여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슈타이너는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밀교(密敎)의 신비적 과정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도록 고대의 신화와 종교적 비의(秘儀)에서 출발한다. 슈타이너는 이 책에서,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는 하나의 사실에 수렴시킨 고대의 비의 제식(秘儀 祭式)이며 이런 십자가는 맨 먼저 고대의 세계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고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의 신비적 사실이 이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1902년 그는 회원으로 속해 있던 조르다노 브루노 협회(Giordano Bruno Bund)에서 자신의 장래의 필생의 과업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그것은 “학문의 기초 위에서 영혼 연구의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었다(Carlgren 1972, 12). 그때부터 슈타이너는 “신지학자(神智學者)”로 이해되기 시작하였고, 그의 강연 활동들도 실제로 1902년 10월 이후부터는 형식적으로는 신지학회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졌다. 거기서 영적인 연구를 이해해줄 수 있는 서로 통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곧이어 독일의 신지학 운동을 지도해달라는 브로크도르프 백작 부부의 요청을 받고 슈타이너는 1902년 독일 지회를 설립하는 일에 들어간다. 그는 신지학회 독일 지회 사무총장을 맡아 활동하는 한편, 잡지를 발간하고 독일 국내외에서 이와 관련된 분야의 집중적인 강연활동을 전개한다.


 슈타이너는 신지학자들 모임을 통해 인도철학, 불교의 윤회설 등을 자신의 사상 체계 안에 수용하였다고 본다. 슈타이너는 블라바츠키와 비산트(Annie Besant)등 신지학자들이 추구하였던 인도 정신, 유럽적이고 기독교적인 전승, 그리고 자신의 전공이었던 현대 과학이 모든 것을 수용하여 인지학이라는 절충주의적 체계를 완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 비산트는 슈타이너의 길이 인도의 도(道)를 추구하는 자신의 길과는 상이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슈타이너는 자신이 대변하는 수련의 길 및 그 정신 수련의 결과들을 특히 <인간은 어떻게 고차원 세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는가>(Wie erlangt man Erkenntnisse der höheren Welten, 1904/05)를 비롯하여 <신지학> (Theosophie, 1904), <비학 개요> (Die Geheimwissenschaft im Umriß, 1910),  <영혼의 수수께끼에 대하여> (Von Seelenrätseln, 1917) 등 그의 저작들과 많은 강연들에서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 그는 본질적으로 인지학의 기초를 닦는다.


 슈타이너의 ‘인지학’의 주된 관심사는 학문의 기초 위에서 영혼 연구의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세계를 넘어서 초감각적인 세계를 파악하는 인식의 기관들을 개발함으로써 고차원적 세계의 인식과 현존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는 노력이다(Skiera 1990, 15). 그는 당시에 주도적이었던 경험적 연구 방법들이 인식에 한계를 두기 때문에 인간 영혼의 주관적인 체험안의 의미 있는 것들을 모두 배제시킨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영적인 관찰 결과를 학문적으로 근거 짓고자 하였다. 그는 철학의 영역에서 인간인식의 한계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학문이 윤리적인 것을 논할 수 없는 것은 초감각적인 것의 경계 앞에 멈추어서 초감각적 영역을 신비주의자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Kugler 1991, 15). 그는 이러한 현상을 정신적 문맹이라고 보았으며, 초감각적인 힘들의 작용도 물리적 자연력과 똑같은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인식의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마치 물리적인 것들이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되듯 초감각적 고차원 세계도 인식될 수 있다고 보았다. 감각적인 현상의 인지로부터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세계 질서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은 현존하는 인식의 경계가 극복되기만 하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즉 방법이었다. 슈타이너는 당대를 풍미하던 유물론적 사고방법에 반대하여 직관의 방법을 내놓았다. 직관의 방법은 인간 내부에서 생동적으로 활동하는 정신을 발현시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Demisch, et al. 1989, 12). 이를테면 “인간의 삶 또는 초인적 세계를 계시하는 것에 아무런 선입견을 갖지 않고 주저 없이 몰두하는 것”(TH, 176), “사람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판단력의 형성과 느낌이 하나의 인지적 기관으로 될 만큼 자신의 느낌을 관찰하고 조절하는 것”(TH, 181)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위에서 “임의성을 포기 하는 것”(TH, 186)이 중요한 것이다. 초감각적 인식으로 차츰 끌어올리는 명상 연습을 바탕으로 비로소 자기 변신이 시작된다. 여기서 인간의식의 확장과 심화를 위해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지고의 세계에 대한 인식능력을 훈련시키는 인지학적 훈련, 즉 ‘영혼수련(Seelenübung)’이 필요하게 된다.


 신비적인 내용들이 전경으로 깔려 있는 <신지학>을 저술함으로써 슈타이너는 인지학을 발전시키는 첫 걸음을 내딛는다. 슈타이너는 <신지학>에서 환생에 의한 윤회와 업(業: Karma)을 통해서 고차원적 차원으로 접근하는 통찰을 다루고 있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환생과 업이 인간을 정신계로 이끄는 두 개의 출입문이 된다. 이것은 포괄적인 법칙성으로 향한 내적․외적 문이며, 각 개인은 그 법칙성 안에서 성장한다. ‘현재까지 내게 운명적으로 밀어닥친 바로 그것으로 인해 내가 무엇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주지하면서 쫓아가면, 사람이 운명과 도전을 통해 얼마나 많이 지금의 ‘나’라는 인물이 되며, 또한 외부에서부터 생기는 요인들이 어떻게 내적 소질과 연결되어 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사람은 “내면에서 오는 발전의 충격뿐 아니라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요인들 안에서”(TH, 83) 자신의 자아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인간을 그렇게 “기억”하게 하는 그 운명을 산스크리트어(梵語)로 “카르마”(Karma: 業)라고 한다. 


 슈타이너는 신지학회의 독일지회 사무국장을 맡아 운영하는 동안 신지학회 회원뿐만 아니라 일반 청중도 대상으로 강연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에게 인류의 정신적 진화에 대해 강연하면서 강연 제목을 인지학이라고 하였다. 힌두 소년 크리슈나무르티(Krishnamurti)에 대한 견해가 슈타이너와 블라바츠키, 비산트 등 신지학회 지도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사상의 근본적인 차이를 표면화시켜, 결국 슈타이너는 신지학회와 결별하게 되었다. 1913년 초 비산트 여사가 독일 지회의 재단 문서를 반려함으로써 독일 지회는 사실상 신지학 협회의 조직에서 제외되었다. 


 1912년 12월말 경 쾰른(Köln)에서 인지학 협회가 비공식적으로 조직되었고 슈타이너는 ‘바가바기타와 바울의 서한문’이라는 주제로 새로운 협회의 구성원들을 위한 첫 번째 강좌를 준비했다. 이 연속 강연회는 인지학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슈타이너는 인지학이 ‘인간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 본질에 대한 인식’이 라고 말하였다. 인지학이 보여 주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감각 세계의 감각적 인지뿐만 아니라, 전생의 존재와 전생의 영향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지학 운동은 발도르프 학교의 설립을 통한 교육분야에서 가장 알찬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슈타이너가 1907년 독일 여러 곳에서 행한 강연인 “정신과학의 관점에서 본 어린이 교육”이 하나의 씨앗처럼 발도르프 교육학을 배태하고 있었다(Carlgren 1972, 12). 슈타이너의 인지학은 슈타이너 자신의 정신세계로부터 완결된 형태로 제시된 것이 아니며, 그의 내면 세계의 발달과정과 끊임없는 연구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슈타이너의 인지학은 인식론, 우주론, 인간론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체계이다. 인지학적 인식론은 인지학이라는 거대 체계의 뿌리이고 우주론과 인간론은 그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이며 발도르프 교육학 또는 발도르프 학교는 그 열매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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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의 인지학과 발도르프 교육


 슈타이너의 초기 인식론은 인식의 절대 기점으로 직접 주어진 세계상을 전제하고 사고와 지각의 종합에 의해 인식이 성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사고와 지각의 종합에 의한 인식의 성립이라는 칸트의 구성적 인식론을 따라가는 듯 하지만, 슈타이너는 칸트와 달리 사고의 내용과 형식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아 결국 사고된 것은 모두 실재한다는 입장으로 나가게 된다. 비학적(秘學的) 인식론이라 할 수 있는 슈타이너의 후기 인식론은 감각적 오성으로 탐구할 수 없는 연구들과 인식들이 있다는 전제 아래서 고차원 세계의 직관적 인식 방법을 체계화하려 한다. 초감각적 인식, 비밀 수련과 전수, 슈타이너 개인의 주관적 직관의 원리가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슈타이너의 후기 인식론의 기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슈타이너는 자신의 신비주의적 사유와 과학적 사유를 함께 논하고 함께 짜 넣으려 노력하였으며 본질 직관에 의한 자신의 신비주의 경험들을 정신과학이라 칭하였다. 


 형이상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 슈타이너의 우주론은 진화론적 사유 안에서 우주의 진화와 인간의 진화를 함께 논하지만 우주의 시원에 대한 물음은 외면한다. 시원에 대한 물음의 최종 종착점은 창조의 궁극적 근거로 신을 고백해야 하기 때문에 신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슈타이너의 주장과 배치된다. 슈타이너는 그리스와 오리엔트의 신화 내용과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교차시켜 해석한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하나님으로서 지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페르시아의 태양신인 미트라와 그리스의 주신인 디오니소스와의 융합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인식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슈타이너는 주장하였다. 슈타이너는 인지학적 정신과학을 기독교를 이해하는 도구로 내세우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구원의 해석에 있어서 인지학은 기독교와는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인간을 이루는 네 가지 본질 지체들(즉 물리적 신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자아), 발달론과 기질론이 인지학적 인간론의 핵심을 이룬다. 인간의 발달은 인간의 본질 지체인 물리적 신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자아가 매 7년의 리듬을 타고 이루어지는 탄생으로 설명된다. 물리적 신체의 탄생만 눈으로 볼 수 있고 나머지 지체들의 탄생은 정신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이 네 가지 본질 지체들은 각각 보호막에 싸여 있어서 완전히 성숙되기까지는 그 속에서 보호받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인지학적 발달론의 요청이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정신 세계에서 개인적으로 가지고 온 것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소인이 결합이나 조정의 과정을 거치며 인간의 우주적인 4개 본질 지체들, 즉 자아, 아스트랄체, 에테르체, 그리고 물리적 신체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우울질, 점액질, 다혈질, 담즙질 등의 기질이 생겨난다. 슈타이너의 인간학의 핵심인 카르마 개념과 윤회설에 따를 때 인간은 우주적 차원에서 이미 결정된 존재로 현생에 오며 인간은 이 세상에서 우주적 차원의 기획(즉 카르마)에 따라 자기 삶을 맞추어 살아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슈타이너는 인지학 내용들을 자신의 특수한 본질 직관에서 얻었다고 주장한다. 무엇을 보았느냐는 물음 외에도 어떻게 그리고 왜 보았느냐는 물음도 중요하지만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슈타이너에게 기대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정신과학의 내용에 언제나 선입견 없이 귀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여기서 그의 후기 인식론 구조와 통하는 완벽한 순환 논증이 전개된다. 즉 슈타이너가 주장하는 진리에 대한 비판의 싹은 초감각적 인식을 끌어들임으로써 사전에 차단된다. 초감각적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 이는 도덕적 성숙에 이르지 못하여 그 접근 통로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비판이나 선입견 없이 이미 초감각적 인식에 이른 이(특히 슈타이너)의 진리 내용에 귀기울여야 한다.


 인지학적 교육론은 예술로서의 교육 또는 교육예술이라는 슈타이너의 말 속에 압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교육 예술론의 핵심은 성장하는 인간에 대한 인지학적 지식에 기초한 교육이다. 전체적이고 통합적 인간에 대한 이해가 교육의 기초로 중요하다고 하지만 이는 인지학이라는 프리즘으로 바라보는 인간 이해일 뿐이다. 물리적 신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자아라는 네 지체들의 탄생에 따른 발달 단계가 일종의 교육적 요청으로 자리잡는다. 인지학적 교육론은 본질적으로 카르마라는 우주적 법칙 아래서 전개되고 결정되는 교육론이다. 이러한 인지학적 세계관의 연관 속에서 발도르프 학교의 수업 구성과 수업 내용이 결정된다. 발도르프 교수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방법론에서 볼 때는 발생학적 교수 원리이고, 도야 이론에서 볼 때는 괴테적 세계 고찰이다.


 우리의 반성을 담아내는 주된 형식인 근대성에 대한 회의 속에서 탄력을 얻어 가고 있는 포스트 모던 논의의 흐름 속에서 인지학이나 발도르프 교육학은 힘을 얻고 있다. 인지학은 신화로 회귀하여 과학적 합리성과 신화를 연결하려 시도하는 사유라고 볼 수 있다. 발도르프 교육학은 종교적 세계관으로서의 인지학의 열매이다. 따라서 발도르프 교육학은 어떤 형식으로든 인지학이라는 종교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인지학적 인식론의 구조적 특징들이 발도르프 교육론으로 이어져 인지학이나 슈타이너에 대한 수용은 이해로, 비판이나 반박은 몰이해로 처리된다. 인간의 믿음 차원은 언제나 결단에 따른 선택이며 추종이기 때문에 발도르프 교육학에 대한 평가 역시 자신이 서 있는 믿음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즉 인지학의 논리를 수용하는 사람에게 발도르프 교육학은 교육을 구원할 수 있는 예술론이고 인지학의 논리를 수용하지 못한 사람에게 발도르프 교육학은 과학과 종교 사이의 색채가 모호한 교육 논의로 비쳐진다. 여기에 발도르프 교육학의 역설이 있다. 한편에서는 발도르프 교육학의 이론적 기초들을 문제삼고 극단적 비판에 내맡김으로써 발도르프 학교의 의미 있는 교육실천에 대해 공평한 시선을 잃어버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발도르프 학교의 의미 있는 교육 실천만 보고 그 배후에 깔린 비논리적인 인지학을 애써 외면한다.


장애인에 대한 관점


 루돌프 슈타이너는 장애인과 관련된 사람들, 즉, 장애아동을 낳아 기르는 부모, 그리고 학교의 교사, 보육사 등, 장애인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전생, 혹은 후생에 어떤 경로로든 장애인과 인연,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일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이들 장애인이 죽어서 신이 해야 하는 일을 대신 하는 것이라 한다. '지상에서 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사람' 그들이 바로 부모, 특수교사, 사회복지사, 보육사들이다. 이러한 의식을 마음 속에 품고 장애인들을 만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05] 국물, 토핑, 면이 통일체로서 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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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라멘이 맛있는 이유


 바로 간수의 차이와 육수 그리고 소스입니다. 중국과 한국의 면 차이는 간수입니다. 일본은 밀가루 반죽에서 간수를 사용해서 더 감칠맛이 면발을 더 맛있게 만들죠. 이런 차이가 라멘의 차이를 줍니다. 진한국물에는 면이 직면인 스토레이토면을 사용하고 간장소스로 맛을 낸 라멘에는 꼬불거리는 스토레이토면을 사용하여 라멘의 맛을 더욱 맛있게 합니다. 특히 꼬불거리는 면은 완전히 익히지 않는 상태에 나오는데 그 맛이 더 꼬들거려 식감이 좋습니다. 또한 육수에서는 닭이나 돼지뼈를 이용하여 육수를 만듭니다. 닭고기에는 아미노산. 돼지 뼈에서는 이노산계통의 지미(좋은 맛)가 숨어 있어 육수가 맛이 있어요. 닭발에는 젤라틴이 있어 더욱 진한 맛이 나죠. 그래서 닭과 돼지뼈를 같이 끓여 육수를 만드는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닭 또는 돼지 뼈만 고집적으로 만드는 육수가 더 맛있습니다. 라멘의 국물을 먹어보면 진한 맛이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스의 맛이 라멘을 결정합니다. 소스 종류로는 된장,간장,소금으로 라멘의 다양한 맛을 만들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