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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다음시간 발제순서


01.  의식주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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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피로사회 : 프린트 독해 지문 읽어오기 

[01] 본성과 양육 정리 

07. 학습이론의 교훈 : 뇌에서 세계의 규칙성을 배우는 학습 장치로 사용하는 신경망이 발견될 수 있고, 그런 장치들은 연결주의 망과 비슷한 원리를 사용한다.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체계에 비슷한 망들이 나타나서 얼굴을 인식하는 학습에 뱀을 무서워하는 학습과 비슷한 신경 구조가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각기 다른 일을 하는 신경망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그 차이는 진화에 의해 설계된 형태 속에 사전 지식이 얼마나 암호화되어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경험론자들은 유사성을 강조하고 선천론자들은 차이를 강조한다.

08. 문화의 수수께끼 : 유전자는 하늘나라의 신이 아니라 기계 속의 톱니바퀴다. 외부적 사건에 의해서든 내부적 사건에 의해서든 생명체의 온몸에서 켜지고 꺼지면서 유전자가 하는 일은 과거로부터 정보를 전달받는 동시에그에 못지않게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흡수하는 것이다. 유전자는 단지 정보를 전달할 뿐 아니라 경험에 반응하기도 한다.

09. 유전자의 일곱가지 의미 : 유전자의 특성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이고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생존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의미에서), 멘델의 보관소이고 (수백만 년의 적응으로부터 나온 지혜가 새겨져 있다는 의미에서), 왓슨-크릭의 요리법이고 (RNA를 이용한 단백질 생산을 통해 자신의 효과를 달성한다는 점에서), 자콥-모노의 발달 스위치이고 (정확히 지정된 조직에서만 발현한다), 개러드의 건강 수호자이고 (예상된 환경에서는 건강한 발달 과정을 보장한다), 드브리스의 판겐이다 (같은 종뿐 아니라 다른 생물 종의 다양한 발달 프로그램에 재사용된다). 또한, 투비-코스미데스의 정보 수용 장치이다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이끌어내는 장치다). 결국, 유전자 자체는 작고 무자비한 결정인자로, 완전히 예측 가능한 유전 정보를 들려준다. 그러나 그 프로모터들이 외부의 명령에 반응하면서 켜지고 꺼지는 방식 때문에 유전자는 결코 틀에 박힌 행동을 하지 않는다. 대신 유전자는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추출하는 장치다. 우리의 뇌에서 유전자들이 발현되는 패턴은 몸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반응하면서 일분 일초마다 변한다. 따라서 유전자는 경험의 메커니즘이다.

10. 도덕적 모순들 : 유전자는 환경에 반응하는 감수성의 축도라는 것, 생명체를 유연하게 만드는 수단이라는 것, 경험의 하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양육을 통한 본성만이 무병장수를 보장하는 것이다.  

[02] 학생의 성적 = [가정배경 + 사회적 자본]

2-1. 이론적 결론

(1) 가정배경

 가족배경 변인이 학생들의 학업성취에 미치는 결정적인 변인이 된다는 것은 많은 연구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콜만(Coleman,1966)은 미국의 초․중등학생과 교사를 대상으로 하여 학생의 가족 변인,학교 환경 변인, 교사 특성 변인, 학생 집단 변인과 학업성취의 관계에 관한 연구 결과에서 학생의 가족배경이 학생의 학업 성취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콜만(Coleman, 1966)의 연구를 재분석한 젠크스(Jenkes, 1972)는 인지능력의 불평등을 설명해 주는 정도를 가족배경 요인(60%), 유전 요인 (35%-50%), 그리고 학교의 질(4%)의 순이라고 지적했고, 역시 학업성취에 영향을 주는 원인은 가족배경이 가장 크다고 보고하였다.

 사실, 가족환경의 중요성이 사회전체에 알려지게 된 것은, 학업성적의 변화는 학령 전에 75%정도가 이루어지는데,그 대부분이 가족환경에 의해 결정되고 나머지 25%정도가 학교 학습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전체적인 성적 결정에 있어서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콜만(Coleman,1964)의 보고 때문이었다 (이해명, 1998에서 재인용).

 결국 학업성적의 결정은 가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가족환경 변인이 학생들의 학업성취에 미치는 절대적 변인이라는 것은 인간 형성이 무엇보다 가족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고, 특히 가족의 구조와 부모의 태도, 가치관이 학업성취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인이 된다고 한다.

 유영상 (1966)의 학업성적과 가정환경 변인과의 관계연구에서는 가족환경을 지위변인과 작용변인으로 나누어 지위변인은 부의 직업, 교육 정도, 월수입 등으로 그리고 작용변인은 성취압력, 언어모형, 학습지도, 가족의 활동과 습관 등으로 보고 학업성적과의 상관이 .46의 상관 관계가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또, 허형 (1974)은 초등학교 아동을 대상으로 하여 가족환경과 학업성취와의 상관관계를 연구하였는데, 물리적 환경변인(문화시설, 부의 학력, 부의 직업), 심리적 환경변인(친애적, 자율적), 그리고 과정 환경변인(아동에 대한 관심도, 학업지도) 등 가정환경 하위변인들이 학업성취와 모두 유의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하였다.

 또한, 박경숙 (1981)은 가족환경 변인과 학업성취와의 상관연구에서 학업성적은 부모의 교육 정도와는 .25, 물리적 환경과는 .30, 심리적 환경과는 .17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혔는데, 이는 허형 등 (1974)의 연구와 유사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연구에 의하면 학교 학습환경 변인은 학업성적을 16.7%, 가족환경 변인 23.7%를 설명하고 있어, 가족환경이 학교 학습환경에 비해 학업성적을 결정하는데 우세한 변인임을 입증했다 (구병두, 1996에서 재인용).

 한편, 데이브 (Dave,1963)와 울프 (Wolf, 1986)는 가정환경 변인 중에서 학업성적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첫째, 가족의 학습 습관 둘째, 가족의 학습지도 셋째, 가족의 토론이나 탐구 넷째, 가족의 기대수준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피커 (Peaker, 1967)도 부모의 태도 변인과 자녀의 성적은 상관도가 가장 높으며, 부모의 태도 변인 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대화나 설득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쉐네이더 (Schneider, 1993)도 가족환경 변인 중에서 학업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의 학습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해명에서 재인용, 1998). 즉,부모의 자녀와의 토론이나 대화 그리고 자녀에 대한 기대 등이 성적과 관계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부모가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 뚜렷한 태도를 갖고 있고 아동의 학업이나 장래에 대해서 기대를 하고 있는 가족의 자녀들은 그렇지 못한 가족의 자녀보다 학업성적이 높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와 독서하는 시간이나 도서관을 이용하는 시간이 많은 가족의 자녀들은 그렇지 못한 가족의 자녀보다 학업성적이 높다. 부모의 교육에 대한 열의나 자녀에 대한 높은 기대, 그리고 독서나 대화 등의 기회를 자주 갖는 것이 자녀들의 학업성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S.Wiseman,1964; Peaker,1967;JohnD.Keeves,1967;MarjorieE.Ainsworthetal.,1972 : 이해명 (2001)에서 재인용).

 또한, 엔트위즐과 알렉산더(Entwisle& Alexander,1996)는 가족 환경이 초기 학령기 아동의 성취에 미치는 영향을 부모의 경제적 지원 및 부모의 기대 변수의 효과와 관련하여 살펴보았는데 연구결과, 경제적 자원과 부모의 기대교육 수준은 서로 독립되어 있으며, 경제적 변수의 효과가 기대 변수의 효과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에 의해 엔트위즐과 알렉산더(Entwisle &Alexander)는 가족환경에 따른 아동의 성취에 있어서 부모의 기대 변인이 갖는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들에 의하면 가정에서의 부모의 교육 기대는, 아동이 공부를 하도록 격려하는 요소가 되는 동시에 부모로 하여금 아동 교육에 대한 각종 지원을 하게 만드는 동인이 된다고 한다.

(2) 사회적 자본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사회, 정치, 경제 문제의 해결사로서 사회자본의 유용성이 주목 받으면서 사회자본은 사회과학 분야에서 각광을 받는 이론이 되었다. 사회자본은 세계은행과 각국 정부에서도 그 정책적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었는데, 이는 민주주의의 발전, 경제적 성장,교육, 복지, 지역사회 발전 등과 같은 사회의 다양한 현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적 요인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김천기,2004).

 이러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은 집단에 관여하거나 참여하는 것이 개인 또는 지역 사회를 위하여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인식을 배경으로 하여 학문적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은 사회학자들에게 사실은 별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다. 아노미와 자기 파괴에 대한 대책으로서 공동체 생활을 강조했던 뒤르케임 (Durkheim) 혹은 원자화된 즉자적 계급과 효율적으로 동원될 수 있는 대자적 계급을 구분했던 마르크스 (Marx)로 잠시 올라가 보면 집단에 소속되거나 참여하는 것이 개인과 공동체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는 주장은 사회학에서 매우 익숙한 논의로 항상 존재해 왔었다. 이러한 사회자본은 학자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정의된다. 당대에 들어 사회자본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분석은 피에르 브르디외에 의해 이루어졌다. 부르디외는 사회자본을 '지속적인 네트워크 혹은 상호면식이나 인정이 제도화된 관계 즉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획득되는 실제적인 혹은 잠재적인 자원의 총합'이라고 정의한다(Bourdieu,1986;248;1980). 집단에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혜택과 그에 따른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회자본(사회성)을 구축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부르디외의 분석은 도구적이다. 부르디외는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지는 이익은 그런 이익을 발생시키는 연대의 근거'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Bourdieu,1986;249). 부르디외는 모든 형태의 자원이 다른 형태의 자원으로 대체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축적된 인간의 노동이라고 정의되는 경제자본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류석춘 외,2003에서 재인용). 

 콜만(1990)에 따르면, 사회자본의 개념은 그 기능에 의하여 규정된다. 이것은 단일한 실체라기 보다는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진 다양한 실체를 의미한다. 첫째, 사회자본은 공통적으로 모든 사회구조에 존재한다. 둘째, 그 사회 구조 내에 행위자의 특정 행위를 촉진한다. 다른 자본처럼 사회자본은 특정 목적을 성취한다는 점에서 생산적이다. 즉, 특정 행위를 촉진하는 연결망(relational tie)이다. 이 정의로서 우리는 사회자본이 단순히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닌, 사회구조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곧, 사회자본은 사회구조적인 자원으로서 사회를 결속하는 구조에 내재해 있는 신뢰 또는 의무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연결망은 구성원간 사회적 관계의 유대망 (network)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개념의 기본 전제는 '인간의 행동'이 이를 촉진시키기도 하고 구속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연결은 정서적 지지, 정보 및 물적 자원의 교환을 통하여 인간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의 기초를 형성하는 규범, 기대, 그리고 사회적 구조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Lee& Croninger,1996;4:이정선,2002에서 재인용). 

 한편, 퍼트남은 1993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 <The Prosperous Community : Social Capital and Public Life>에서 “사회자본이란 조정화된 행동을 유도함으로써 사회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신뢰, 규범, 네트워크와 같은 사회조직의 특성을 의미한다.”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즉 퍼트남은 사회자본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간의 사회적 행동을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 퍼트남은 사회적 행동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조건으로 구성원간의 신뢰적 관계를 제시하고 있으며, 신뢰적 관계를 통해 사회조직이 형성되며 그러한 사회조직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행동과학적 입장에서 사회자본의 개념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김남선,2001에서 재인용). 또한 퍼트남은 사회자본을 공공재라는 점에 주안을 두고 있는데, 정치발전과 시민사회의 형성 그리고 경제발전에 매우 중요한 조건임을 강조한다.

 다음 표는 위에 언급한 학자들 이외의 여러 다른 학자들이 다양한 관점으로 사회자본 개념을 정의한 것이다. 표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회자본은 사회 연결망 안에서 각 행위자에게 이득을 줄 수 있는 생산적인 자본을 발생하게 하는 서로에 대한 신뢰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사회자본의 핵심을 신뢰와 연결망의 개념 안에서 논의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사회학계에서도 그 동안 사회자본에 대한 논의는 신뢰와 연결망에 중점을 두는 것이 큰 흐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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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이재혁(1998)은 신뢰의 합리적 해석에 기초하여 강한 연결망의 구성이 대인간 신뢰관계의 축적과 밀접한 관계에 대해 논의하였다. 즉, 특정 성격의 연결망의 구성은 소속 행위자들의 신뢰수수를 통한 적극적 선택행위를 통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런 면에서 신뢰의 함의가 논의되며, 강한 연결망을 주축으로 하는 연줄 사회의 구성을 하나의 사회적 균형으로 파악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또한, 박찬웅(1999)은 신뢰가 사회자본의 대표적 예라고 하면서 신뢰가 사회자본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연구에서 그는 사회학적 범주이고 사회자본으로서 신뢰를 연구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서 조직 내 신뢰가 나타나는 사회적 관계, 즉 연결망에 주목하였다. 김용학과 이재열은 사회자본의 특성을 근본적으로 연결망으로 규정하는데, 김용학(1996)은 사회자본을 사람들 사이의 연결망에 물화된 제 3의 생산요소라고 말한다. 사람들 사이의 안정된 연결망이 생산요소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발생시켜 경제학적으로 보았을 때 거래비용을 절감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재열 등(2003)도 벤처기업들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였던 2000년을 배경으로 이들 기업에 대한 가치평가가 어떤 사회적 요인들에 영향을 받았는지 분석하는 연구에서 사회적 요인으로 사회자본, 즉 기업과의 연결망의 크기를 고려하면서 보다 많은 기업들과의 연결망을 통해서 사회자본을 쌓은 기업들이 보다 높은 주가를 보이는 것을 밝힘으로써 사회자본의 개념을 연결망에 집중시켰다. 반면,류석춘(2002a)은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실 폐쇄적인 연결망 및 '포괄적 호혜성'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류석춘의 사회자본 개념을 받아들인 최종렬(2004)은 그 간의 사회 자본에 대한 논의는 사회자본을 측정하기 위한 개념으로 연결망이나 신뢰에 대한 논의만 집중되어 사회자본에서의 기본 요소인 '호혜성'을 간과해온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호혜성이란 도움을 받은 사람이 준 사람에게 이를 되갚아야 한다는 일반적 규범이며, 호혜성의 핵심은 관계에서 느끼는 ‘도덕적 의무감’이다. 사회자본을 논의할 때 호혜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 기저에는, 호혜성이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결코 신뢰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따라서 신뢰의 개념은 호혜성의 규범과 함께 통합되어져야 한다(류석춘,2002a;최종렬,2004). 가족은 1차 집단으로서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신뢰와 호혜성이 풍부한 서로의 관계가 도구적이 아닌,완성적 동기에 근거하고 있다. 완성적 동기의 사회자본은 가족처럼 강한 연대를 바탕으로 폐쇄적 집단의 공동체 규범이 내면화되어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서 형성된다. 한 공동체 안에서 타자에게 자신이 행했던 헌신과 노력에 대해 직접적인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정서적 만족이나 인정으로 보상되는 사회자본인 것이다. 부모와 자식관계, 친척과의 사이가 완성적 관계의 대표적인 예이다. 

 가족 관계에서 유교 가족주의의 기본적인 인륜은 부모가 자신에게 행했던 희생과 헌신에 대한 감사와 그에 대한 도리로서 책임감으로 행하는 ‘효’이다. 이것은 윤리 도덕에 기초한 ‘도덕적 의무감’에서의 호혜성으로 유교 가족주의에서 근본 덕목이며,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자본에 사회자본 제공자의 동기를 포르테스(Portes,1998)는 ‘완성적 동기’와 ‘도구적 동기’로 구분하고 있다. 포르테스가 정의하는 ‘완성적 동기’의 사회자본은 관습이나 규범이 전제된 같은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서 형성되며 정서적, 정의적, 온정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도구적 동기’의 사회자본은 개인의 이해관계를 전제하고 상호성의 교환에 근거해 이득을 위하여 합리적 선택을 하는 계산적이고 물질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한 집단이 완성적 동기에서의 관계인지 도구적 동기에서의 관계인지는 신뢰와 호혜성이 이를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논의되는 바에 따라 가족 관계를 도구적 관계로 보기도 한다. 문숙재 등(2001)은 도구적 관계의 가족주의로서 자녀에 대한 교육열을 언급하면서, 도구적 가족주의에서 부모는 자녀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수단이며 자녀는 부모의 계층 상승의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아낌없는 투자를 통해 자녀를 출세시키는 것이 자녀 뿐 아니라 곧 부모 자신이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가족은 서로에게 도구적 관계라고 정의한다. 

(3) 사회 자본의 구성요소

* 신뢰 : 신뢰는 가족 사회자본의 핵심적 구성요소이다. 신뢰는, 사회질서를 위해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 신뢰란 일상생활의 “자연적 태도”에서 나오는 기대를 하나의 “도덕”으로 보고 그에 동조하는 행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사건이나 사태가 평소와 같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 질서에서 도덕적 압력의 필요성에 관한 견해는 오늘날의 사회 과학에서도 지속적으로 살아남아 있다. 

 인간은 신뢰를 필요로 하는데 신뢰란, 도덕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관점이 그것이다 (Barber1983;Luhmann,1979;Misztal,1996). 미스탈(Misztal,1996)의 주장에 의하면 신뢰는 세 가지 기능을 하는데 첫째는 사회적 안정(관습과 같은), 둘째는 사회적 결속(우정), 셋째는 협력을 증진시킨다. 다시 말해서, 신뢰의 동기는 결국 한 집단이나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것이다(이온죽, 2004에서 재인용). 신뢰를 구성하는 속성 또한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정리하면 신뢰의 구성적 속성으로는 능력, 개방성, 상대배려, 행동의 일관성이다. 마이어는 능력, 진실성, 온정을 그 요인으로 들면서 조직성원들에 대해 능력의 소유임이 증명되고, 정직하며 성실하고, 언행일치에 따른 예측가능성이 존재하며, 관심과 도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신뢰의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Mayer,Davis,and Schoorman 1995 + 김호정 1999 + 박통희 1999 +김현옥, 2001:김왕배 외,2002). 신뢰는 대게 타자가 자신의 기대에 맞도록 행동할 것이라는 주관적 심리상태를 말한다. 여기에 주커(Zucker,1986)는 사회학적 견지에서 신뢰란 교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련의 ‘기대’라고 정의한다. 바버(Barber,1983) 역시 신뢰는 “타인(타 행위자)이 행위를 할 때, 나의 관심을 고려할 것이라는 기대”로 정의한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과정들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타인과 과거에 나누었던 직접․간접의 어떤 교환에 기초한다는 것 
 둘째, 타인의 행위가 나의 이해 관심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반영한다는 것 
 셋째, 나의 인지적 과정 즉, 기대를 포함하는 것이다. 기대는 “신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공통으로 알려진 공동의 기대는 신뢰의 한 요소일 뿐이다. 주커(Zucker,1986:58)는 슈츠를 따라 이를 “배경적 기대”라고 불렀다. 배경적 기대는 집합체의 성원들이 공유하는 상징과 해석 틀을 뜻한다. 이것이 없으면, 행위는 무의미 할 뿐만 아니라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거의 생각도 못할 일이다. 신뢰의 또 다른 요소는 맥락 또는 상황을 정의하는 규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커(Zucker,1986:58)는 이를 구성적 기대라고 불렀다. 구성적 기대는 배경적 기대에 비해 구체적인 부분, 교환, 상호작용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다 구체적이다(최종렬,2004에서 재인용). 배경적 기대가 주로 일반화된 높은 신뢰를 보이는 가족집단에 나타난다면, 구성적 기대는 낮은 신뢰에 기반한 균형 잡힌 교환관계가 형성되는 전체적인 사회집단에 나타난다.

* 연결망 : 사회자본의 두 번째 차원은 사람들 사이의 '유대(ties)'에 기반한 연결망이다. 사회연결망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유형의 관계를 통해 상호 결합되어 있는 다수의 사회적 단위 즉, 개인, 위치, 조직(Pappi,1987:13)등으로 정의된다 (김안나, 2003에서 재인용). 사회연결망은 행위자들 그리고 그들을 묶어주는 관계들의 집합이다.

 한 개인이 태어남과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사회의 기초가 곧 가족이므로 사회연결망은 한 개인이 속해있는 가족, 친척 관계를 시작으로 형성되어 진다. 그라노베터(Granovetter,1973,1974)는 사회연결망을 약한 연결(weaktie)과 강한 연결(strong tie)의 개념으로 개인이 속한 연결망의 특성과 그 연결망 내의 개인의 위치가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분석하였는데, 약한 연결과 강한 연결은 사회적 관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의 강도(relational strength)를 기준으로 구분된다. 약한 연결의 예로는 친구의 친구와 같이 제3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게 되는 관계를 들 수 있고, 강한 연결의 예로는 가족 즉, 부모와 자식관계를 들 수 있다(박찬웅,1999에서 재인용). 

 공동체적 규범에 토대를 둔 “완성적 동기”에 근거한 정서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 가족이라는 폐쇄성이 높은 연결망은 그 수가 한정되어 있는 경향이 있고,성원들이 서로 밀도 높게 연결되어 있어 그 응집력(cohesion)이 강하다. 따라서 그 성격상 확장되기가 매우 어렵다. 연결망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서로 매우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성원의 동질성이 높다(최종렬,2004). 즉, 가입기준이 귀속적이며 자격이 제한적이다. 일반적으로 연결망의 강도를 측정하는 방법으로는 상호작용의 빈도, 친근성, 관계의 지속성 등이 쓰이고 있다.

* 가족 :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자본을 형성하는 동기에 대해서도 포르테스(Portes,1998)가 말한 도구적 동기와 완성적 동기로 설명될 수 있다. 도구적 동기에 의한 사회자본의 형성이란 미래에 보상받을 것이라는 기대 하에서 상대방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완성적 동기에서의 사회자본이란 관습상 그렇게 행동해야 할 의무감으로서, 또는 내면화된 규범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부모로서의 역할 완수라는 도덕적 의무감을 가지고 자녀를 지원하는 것이고, 자녀는 성인이 되면 노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효 규범에서의 도덕적 의무감에 의하여 부모를 지원하는 것이다 (정병은,2007).

* 호혜성 : 호혜성의 규범(norms of reciprocity)이란 무언가를 받으면 그것을 준 사람에게 그만큼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사회의 일반적 규범을 일컫는다. 이러한 호혜성은 도덕적 의무감에 기반하고 있다. 호혜성의 규범에서는, 교환의 각 당사자가 상대방으로부터 얻은 것을 되갚아야 할 “의무”와 자신이 베푼 것을 되돌려 받아야 할 “권리”모두를 가지고 있다(최종렬,2004). 최종렬(2004)은 사회의 분화가 극도로 진행되어 복잡계라 불릴 정도로 얽히고 설킨 사회적 연결망이 구축된다 해도, 도덕적 의무감을 핵심으로 하는 호혜성의 규범은 인간세계에서 그 중요성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본다. 신뢰와 연결망이 인지적인 것이라면, 호혜성의 규범은 가장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서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신뢰를 논의할 때에 반드시 호혜성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호혜성이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결코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뢰라는 개념은 사실 호혜성의 개념이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한준(2007)은 사회자본의 축적에 필요한 것이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면 훗날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리라는”호혜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면서, 호혜성이 존재할 때 우리는 타인에 대한 호의와 선의를 베풀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호혜성이 타인에게까지 확장되어 선의와 협동의 선순환이 생겨나고 그럼으로써 일반화된 신뢰가 높아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고 말한다. 호혜성에 대해 체계적인 고찰을 한 셀린스(Sahlins,1972:185-230)는 타인과의 교환에 있어 호혜성의 정도에 따라서 첫째, 받은 것에 대해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고려해 되도록 빨리 더 많이 되돌려 주려는 일반화된 호혜성 둘째,서로의 이해관계나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을 등가적으로 동일하게 하려는 균형 잡힌 호혜성 셋째, 서로를 배려하지 않아 상호적 교환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부정적 호혜성으로, 호혜성을 유형화하였다.

 가족은 개인적 귀속감과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풍부한 호혜성을 갖춘 일반화 된 호혜성의 특징을 지닌 집단이다. 그 수는 한정되어 구성 밀도가 높게 나타나고 성원들의 동질성은 높다. 특성상 호혜적인 대면적인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 기반하기에 소규모이다. 그리고 정서적 웰빙과 도구적 상부상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동체이다. 가족 사회자본의 호혜적인 관계는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첫째, 서로 자주 상호작용 하면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것을 교환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서로에 대해서 균등한 애정관계를 유지한다. 셋째, 장기간 동안 지속되어온 상호작용이 있다. 가족관계는 당장의 대가가 따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지향하는 것은 서로가 혈연관계이기 때문이다(최종렬,2004).

2-2. 한국에서의 실증적 내용 :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사회자본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부모•자녀간의 사회자본의 상대적인 효과를 살펴보기 위하여 사회자본 변수를 포함하지 않은 모델과 이 변수를 포함한 두 모델을 비교해 보았을 때 사회자본이 통제되지 않은 모델에서 사회경제적 배경의 아버지의 학력이 학업성취에 유의미한 영향을 나타내었고, 여기에 사회자본 변수가 통제된 후에도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통제된 사회자본 변수 중에는 부모•자녀간의 신뢰가 학업성취가 유의미한 정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이는 아버지의 학력과 부모•자녀간의 신뢰가 학업성취에 미치는 영향은 서로 상호보완적이 아닌, 각각 독립적으로 학업성취에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아버지의 교육수준이 높고 부모•자녀간의 신뢰가 깊을수록 자녀의 학업성취가 높아진다는 의미이다.

 아버지의 학력이 자녀의 학업성취 수준에 긍정적 영향력을 미친다는 결과는 김병성 외 (1981), 박정숙 (1981), 김왕근 (1988), 배종웅 (1993), 장상수 (2000), 최시영 (2001),  Colemanetal (1966), Jencksetal (1972), White (1982) ,Lockheadetal (1989)들의 연구, Campbell (1952), Floud (1956), Fraser (1959), Bloom (1964)의 가족의 구조적 변인 연구에서 성적과의 상관관계는 아버지의 교육 정도와 관계가 높다는 연구, 정우현(1984)의 아버지의 학력이 높을수록 대학 진학 희망비율 또한 높아진다는 연구, 방하남•김기헌(2002)의 가족의 사회경제적 계층위치가 자녀의 고등교육기회 획득에 미치는 영향에 있어서 가구 소득과 가정의 경제력 보다는, 부모의 학력과 같은 가족의 문화자본을 나타내는 영향력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연구결과와 일치한다.

 아버지의 학력이 높을 때 자녀의 학업성취가 높아진다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직접적으로 지적 도움을 줄 수 있고, 간접적으로 자녀의 학업성취를 높이는데 정보 면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다음의 인터뷰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선생님으로 계시구요. 어머니는 학원 하시는데요. 공부할 때 가르쳐 주시고 궁금한 점이라든가 모르는 것 물어볼 때 도움을 주시죠... 아버지께서 고등학교 선생님이시기 때문에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중에 대학갈 때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 그런 얘기도 많이 해주세요. (S고등학교,Case5)

 또한, 부모•자녀간 신뢰가 높을수록 자녀의 학업성취가 높아지는 것도 부모가 자녀에게 관대함으로 신뢰를 보일 때, 자녀가 안정적인 상태에서 학업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부모의 신뢰가 학업성취에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음의 인터뷰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저를 믿어주시니까 책임 의식이 생기고 그래요. 그리고 성적이 떨어졌을 때도 혼내고 그러지 않으시니까 죄책감도 들고...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요. 공부는 억지로 시킨다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자율성이 있으니까 책임 의식이 따르죠. (Y고등학교,Case1)

 아무래도 믿어주시면 공부에 활력소가 좀 되죠.그냥 뭐 공부 할 때 부모님이 나를 믿고 계신다 생각하면 힘내서 공부도 하고 그러죠. (Y고등학교,Case2)

 저는 칭찬이 없으면 제가 아무리 잘해도 성취감이 떨어져요. 믿고 칭찬해주면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Y고등학교,Case4)

 자신감을 북돋아 주죠. 자신감을 주세요.(S고등학교,Case5)

 다른 사람이 시키는거 보다 제 스스로 하는게 공부에 더 많이 도움이 되죠. 확실히 제 스스로 하면은 집중력도 더 올라가는거 같고 더 잘되는 거 같고.(S고등학교,Case6)

 가족이 저를 믿어주니까 제가 좀 더 책임감이 생기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어요.(S고등학교,Case7)

 부모의 신뢰에서 연유된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에 자기신뢰의 결과로서 이어진다. 이러한 자기신뢰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정서적 동기상태를 유발하기 때문에, 생활 면에서 부모가 학생을 신뢰하지 않아 불안하다거나 자신감이 없다거나 하는 학생의 태도는 학업을 하는 데에도 역시 미숙한 수행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 부모가 자녀를 믿음으로써 대한다면 자녀는 정서적으로 더 안정된 상태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학업에 성실히 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율성을 신장하는 부모의 비권위적인 태도는 자녀가 자신을 통제하는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고 본다. 또한,학업을 하는데 있어서 내 자신의 결정과 의지로 하는 것과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경우의 결과는 차이가 있다. 학생이 스스로 공부하고자 할 때 학업 동기유발이 뚜렷해지고 그 수행능력도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인터뷰 자료는 학급에서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의 부모가 자녀에게 보내는 학업에 있어서의 신뢰에 관한 것이다. 부모의 신뢰가 자녀의 학업성취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잘 보여준다.

 (저의 부모님께서는) 종교적인 것 때문에 제가 좀 더 솔직하고 약속도 잘 지킨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공부하면서 지칠 때라든지 놀고 싶어할 때나 쉬고 싶을 때,저를 충분히 믿으셔서 쉬게 해주시고 그러세요. (숙제의 경우도) 혼자서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시죠. 저를 믿어주니까 제가 좀 더 책임감이 생기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어요.(S고등학교,Case7) - 학업성취 上

 보통 부모님들은 학원을 보내거나 그럴 때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보내시잖아요. 저의 부모님은 학원가는 것도 저하고 상의해서 하시고 억지로 공부를 시키시지는 않아요. 독서실 가는 것도 자율적으로 제가 가고 싶을 때 가거든요...(숙제 검사의 경우도) 제가 공부를 하기 싫어서나 숙제를 하기 싫어서 요령부리는 것을 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하니까 오버해서 하지 않으세요. 이런 것들도 말씀하실 때 공부 잘되가냐 그냥 간접적으로 말씀하세요... (그렇게) 저를 믿어주시니까 책임의식이 생기고 그래요. 그리고 성적이 떨어졌을 때도 혼내고 그러지 않으시니까 죄책감도 들고...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요. 공부는 억지로 시킨다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자율성이 있으니까 책임의식이 따르죠.(Y고등학교,Case1) - 학업성취 上

 다음은 학급에서 성적이 하위권인 학생의 부모가 자녀에게 갖는 비신뢰에 대한 인터뷰를 기술한 것이다.

우선 이제 제가 고등학생이니까 진로를 정해야 되는데 제가 아직 잘 모르거든요 그런걸. 엄마가 그냥 제 의견을 물어보는거 보다는 엄마가 선택을 해주세요. 그리고 나서 너가 선택해라 그런거구요. 공부 결정에 대해서는 혼자 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시구요 좀 열심히 하라고 제가 그렇게 못한다고 맨날 말하세요...(숙제 검사의 경우는)맨날 하는 것은 아니구요. 가끔씩 갑자기 해요. 공부하고 있는데요. 갑자기 들어오셔서 너 공부하고 있는거 다 봐봐 보여줘봐 그래요.시험 봤던 것도 어느날 갑자기 그래요. 그때는 끝장이에요. 몇 시간동안 계속 엄마랑 얘기해야 되요. 엄마는 공부만 잘하면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고 하세요 공부만 잘하면...그런데 공부하는 것은 제 마음먹기에 따라서 된다고 생각해요. 엄마의 영향이 공부하는데 동기를 준다기 보다는 그냥 제가 뭘 이루고 싶은 데에 대한 보충 정도. 별로 도움은 안되는 거 같은데요. (B여자고등학교,Case10) - 학업성취 下

 위 인터뷰 자료들을 통하여 부모가 자녀를 신뢰하며 자율성을 부여할 때, 자녀의 학업성취가 높음을 인지할 수 있다. 고등학교 때는 사춘기 시기로써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에 부모가 자녀의 학업에 대해 자꾸 통제하며 비신뢰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반발심을 일으키기가 쉽고, 그러한 부모의 행동을 자녀는 일종의 간섭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물론 아직까지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숙되지 않은 고등학생에게 학업에 대한 모든 것을 맡기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녀를 인정해주고 자율성을 주어 자기 공부에 대해서 책임지게 하는 자기결정권을 주는 것이 학업성취를 높이는데 필요하다.

 한편, 부모가 자녀에게 신뢰를 갖는다는 것은 자녀가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그 자녀에 대한 신뢰를 높이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도 많다. 대체로 부모는 자녀가 공부를 충실히 잘할 때 자녀에 대해 만족해하며 더 인정해주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가 평소 자녀의 학업에 관심을 갖고 자녀와의 충분한 대화를 통하여 학업에 관한 것을 서로 같이 의논하고 결정하며, 자녀 스스로 깨닫고 공부하도록 격려하여 주는 것이 학업성취를 높이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성적이 떨어졌을 시에도, 좌절하고 있는 자녀에게 지나치게 압박감을 주기보다는 자녀가 다시 잘할 수 있게 힘든 시기를 잘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용기와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럴 때에 자녀는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내가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며 책임감을 느껴 학업에 더욱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3. 결론

 한국 고등학생의 학업성취에 부모와 친척이 지닌 경제적•사회적 자원과 정서적 지지에 바탕을 둔 부모•자녀, 친척•학생과의 정서적 유대가 학생의 학업성취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학생의 가정배경과 친척배경을 구성하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 및 사회자본, 친척의 사회경제적 배경 및 사회자본이 일정 부분씩 학생의 학업성취에 각각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부모와 친척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사회자본이 학업성취에 미치는 전체 영향력이 총 9.2%(R²=.092)는 비교적 낮은 설명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밖에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은 아마도 아직까지 학업성취에 영향을 미치는 변인들이 상당 부분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가 유교문화라는 것은 가족이나 친척의 전통적 관계를 중요시함에서 기인한다. 본 연구는 한국사회에 유교가치의 가족주의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개인이 이루는 학업성취에 친척의 영향력을 살펴봄으로써 확인하고자 하였다. 한국사회가 급속한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도 그 안에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유교문화의 가족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의 유교적 가치와 관련하여 제작한 호혜성 문항들, 그리고 한국가족주의에 입각하여 가족 관계를 친척까지 연장하여 살펴본 전체적인 사회자본 문항들은, 한국인의 유교 문화가 가족과의 사회자본인 연결망․호혜성에서, 학생의 학업성취에 많은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이것을 재고해 보면,한국의 고등학생의 학업성취가 유교문화의 가족주의에 많은 영향은 받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개인의 학업성취는 유교문화의 공동체적인 관계성과 소원한 개인 지향적인 요소가 지배적일 것이라고 사려된다. 한편, 연구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경로 이외에 본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학생이 맺는 친척과의 유대가 친가보다 외가가 더욱 강하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03] 이러한 학업적 성취를 장려하는 
'능력주의'를 기반한 '엘리트 주의'는 과연 옳은가?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은 이상적인 정치 형태로 스파르타의 엘리트주의를 제시했다. 지금부터는 엘리트주의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우선 엘리트주의의 개념을 정리 해보고, 다음으로 이를 지지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엘리트주의의 한계를 살펴보며 정치 파트는 마무리된다.

 엘리트주의는 사회의 중심이 엘리트라고 보는 견해의 총칭이다. 역사적으로 등장했던 독재, 귀족제, 과두정치, 전제 정지가 모두 여기에 속한다. 그 이름이 어찌 되었건 간에 소수에 의해서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엘리트주의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를 전제한다. 첫 번째는 사회가 권력을 가진 자인 엘리트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 대중으로 구분되는 것이 사실이며, 이들 사이에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렇게 엘리트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대중의 이익에도 부합한다는 것이다.

 엘리트주의에 따르면, 엘리트는 자신의 잠재력과 가치를 전면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개인적 능력과 환경적 여건을 갖춘 존재이고, 이와 대비되는 대중은 개인적 차원에서 잠재적 가치를 갖지 못했거나 이를 펼칠 환경적 여건을 갖추지 못한 존재다. 이러한 개인적, 환경적 잠재성을 가진 엘리트가 사회를 지배할 때, 사회는 유기적으로 작동하고 통제 되어 최선의 사회 형대를 갖춘다. 이렇게 보면 현대 사회도 엘리트주의 사회처럼 보인다. 실제로 사회는 능력 있고 학벌 좋은 소수의 정치, 사회, 경제 엘리트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국회의원들은 정치적 엘리트로서 사회의 모든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측면에서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엘리트주의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정치적 권력의 정당성을 누구로부터 얻는지에 대한 차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에 엘리트가 있거나 없거나, 어쨌든 정치인의 권력의 정당성이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시민에게 그를 대리자로 뽑거나 뽑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반면 엘리트주의는 이론적 측면에서 볼 때, 통치자의 정당성이 시민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엘리트의 정치적 정당성은 엘리트 스스로에게서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엘리트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대중은 무기력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존재여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대리자를 선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손에 대리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다.

 이러한 엘리트주의를 이상적인 정치제도로 생각한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했는지 아주 쉽게 정리하면, 그는 철학이나 정치에서 절대적 진리를 찾 고자 했던 사람이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다양한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하나의 진리를 찾으려 했다. 진리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철학에서는 절대주의로, 정치에서는 엘리트주의로 나타난다. 철학에서의 절대주의나 정치에서의 엘리트 주의는 유사해서, 오류의 가능성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불확실성을 완벽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 하는 듯하다. 어쨌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철학의 완벽한 진리가 있듯, 정치에도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탁월한 엘리트가 존재해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했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기는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를 물리친 이후였다. 대략 그리스는 서양, 페르시아는 동양이 라 할 수 있다. 이후 그리스는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그리스의 주도권을 두고 두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쟁을 벌였다. 쉽게 말하자면, 일제 침략기에 힘을 합쳐 일본을 몰아내었는데, 이후 전성기가 찾아온 한국의 주도권을 두고 서울과 부산이 싸우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아테네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였고,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는 엘리트주의였는데, 아테네는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계속 패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이런 아테네에 살았다. 그는 특별한 직업 없이 아테네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못생겼지만 워낙 말을 잘하고 지적이어서 젊은이들이 그를 따르고 좋아했다. 그의 친구가 델포이 신전에 가서 무녀에게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고, 무녀가 그런 사람은 없다고 말하면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아테네에서 지혜롭기로 소문난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했다. 자기가 잘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가 대화하는 방식을 산파법이라고 한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대답하는 사람 스스로가 진리를 도출하게 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가 묻는다. “경건함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에우티프론이라는 사람이 답한다. “경건함은 신의 사랑을 받는 것." 그러면 소크라테스가 이 대답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서 신들마다 의견의 차이가 있을 테니, 그것은 경건함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아니라고 말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가 질문하고 답변 자가 대답하기를 반복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의미를 깨닫는다. 자신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을 ‘아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 가지를 더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지의 지’라고 한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열을 받았다. 계속된 말장난에 화가 난 것이다. 결국 아테네 사람들은 이 말 많은 70세 노인을 법정에 서게 했다. 죄목은 풍기문란에 국가보안법 위반. 청년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퍼뜨리고 신성을 모욕했다는 것이 죄목이었는데, 실제로는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들이 스파르타의 정치체제인 엘리트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이 모인 법정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 다가 배심원들의 화를 돋우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 자신을 쇠파리로 비유하며, 잠든 거대한 말인 아테네를 깨우는 일을 한 것뿐이라고 변명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 받고도 충분히 도망칠 기회가 있었으나,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사형을 받아들였다.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는 그 슬픈 자리에 그를 열렬하게 따르던 귀족 집안의 제자가 있었으니, 그 사람이 서구 철학의 궁극적 시작으로 불리는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분노에 휩싸였다. 아테네 사람들에게도 물론 화가 났겠지만, 그가 분노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민주주의 체제였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민주주의가 어리석은 사람들에 의해서 얼마나 파행적이 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살아 있는 근거가 되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모여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인물인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이후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중우정치, ‘폭민정치’라 불러 그 한계를 명확히 했다. 폭민정치는 난폭한 민중들이 이끄는 정치를 뜻한다.

 이렇게 파행적인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플라톤이 제시한 정치체제는 ‘철인정치’였다. 철인정치는 지혜와 덕을 갖춘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정치 형태다. 여기서의 철인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철학자를 의미한다. 여기 서의 철학자는 오늘날의 의미처럼 철학과 박사 과정을 나온 사람이라는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넓은 의미를 갖는다. 플라톤은 사회를 농민계급인 생산자, 군인계급인 수호자, 통치자인 철인 왕으로 구분해서 지혜를 사랑하는 덕이 있는 자에 의한 절대적 통치를 꿈꿨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당연히 최선의 정치체제라고 알고 있다. 오늘날 독재나 엘리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며, 단지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으로 보인다. 사실 이는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최선의 가치로 평 가하는 국가에서 탄생한 이유가 크다. 정규 교육은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국가의 이념과 가치를 교육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공산주의를 최선의 가 치로 교육하고, 중세의 기독교 사회에서는 정규 괴목에 성경 공부를 포함시켰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한국의 정규 교육에서는 당연히 자유민주주의를 최선의 가치라고 전제하고 교육이 이루어진다.

 교육을 통해 개인이 민주시민으로 양성되는 것은 잘된 일 이겠지만, 그로 인해 엘리트주의나 독재는 잘못된 체제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수에 의한 정치체제도 어떤 면에 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만약 소수의 권력자가 지혜롭고 뛰어난 까닭에 대중들보다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판단할 수 있다면 말이다. 현대의 예측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결정을 그들에게 맡기는 것이 사회의 성장과 개인들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의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트 독재체재는 명확하게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1) 소수에 의한 정치는 최고 권력자를 쉽게 타락하게 만든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북한의 세습적 독재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2) 독재는 사회 전체의 합의 없이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함으로써, 이익 분배에서 배제된 다른 집단의 불만을 고조시키다. (3) 독재는 스스로의 완전 무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불만을 가진 집단을 억압한다. (4) 이러한 억압을 정당화하거나 은폐하기 위해 권력자는 정보를 왜곡한다. (5) 정보의 왜곡을 숨기기 위해 국민들에게 편향된 교육을 한다. (6) 이러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들은 사회를 위한 합리적 선택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가부장적 독재 체제에서 성장한 국민들은 불의에 대해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며, 자애로운 민주 체제에서 성장한 국민들은 불의에 비판적이며 정의롭게 행동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04] 이런 상황에서 '대안'이 존재한다.

4-1. 기존 자유방임 교육의 문제점
(서머힐 학교 구경가기 : https://blog.naver.com/4eva3030/memo/221197904688)

 기존의 사상가들의 자유방임 교육은 성인의 명령이나 지식이 아동을 억압하고 학교가 직업인으로서의 준비를 강요하며 사회적 관습과 가치관을 아동에게 주입하는 것을 비판하고, 아동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아동의 개성을 중시하고 주체적인 자기 활동을 장려한 교육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교육은 직접 경험을 통한 학습에만 치중하여 부모나 교사의 시정 지도가 지니는 효율성을 무시하는 한편 지식교육이나 직업교육이 지니는 가치는 배척하고 있다. 또한 개인의 성장(자아실현)에만 주력하여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측면은 소홀히 다루었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인간의 자아실현을 돕는 것이 교육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지만 교육이 또한 매우 오랫동안 개인에게 사회의 사고, 습관, 감성을 내면화시키고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생활양식에 따라 행동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를 존속시키기는 기능을 수행해왔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존 학자 중 루소가 주장한 것은 학교 교육 무용론이다. 오늘날 루소는 여기에 대해서 학교 교육의 기능을 지나치게 평가 절하 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본래 학교 교육의 목적은 인간이 풍부한 인간성을 간직하면서 개인적으로 만족스럽고 사회 발전에도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있어 왔다. 학교 교육의 문제점은 교육이 그 목적과 방법을 인간 자체의 자아실현에 두지 않을 경우에 파생되었던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 부정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루소는 학교 교육이 지니는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함으로써 학교 교육이 불필요하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오늘날의 학교 교육은 자율적인 학생의 활동보다는 부모나 교사의 권위와 명령을 중시하고, 학생 개개인의 소질이나 개성은 무시한 채 획일적으로 지식 교육을 주입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루소의 교육 사상은 오늘날의 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시정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으나, 앞서 지적한 몇 가지 문제점들로 인해 오늘날 학교 교육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제로 루소 이후에도 자유로운 학교 환경의 조성을 역설한 교육 사상가가 많았으나 이를 실천에 옮겨 성공을 거둔 사상가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자유로운 자아실현을 위한 교육 사상이 니일(Neil)에 의하여 실현된 것이다. 그 실현의 결과는 영국에 세워진 서머힐(Summerhill) 학교이다. 이 학교는 성선설에 입각한 아동관을 바탕으로, 강요가 없는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고 창의성이 풍부한 아동을 육성할 것을 목표로 한다. 주목되는 점은 이러한 아동의 자유로운 자아실현이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최근 학교 안에서 획일적인 교육 내용이나 교과 과정에서 벗어나 수준별로 교실을 이동하여 수업하거나, 교사는 조언자로서의 역할만 하고 아동이 중심이 되어 자유로운 토론식의 수업을 진행하거나, 다양한 특별 활동 수업을 마련하여 아동이 자신의 소질이나 적성에 맞추어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4-2. 니일의 교육 사상

 철저한 자유교육을 통해 평화롭고 민주적인 이상세계의 가설을 주창한 니일은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교육사상가이자 교육 개혁가이다. 알렉산더 니일은 1883년 스코틀랜드의 독실한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니일은 암기위주의 엄격하던 당시의 학교 공부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14세 때까지 공부를 마친 뒤 공무원 시험에도 응시했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니일의 장래에 대해 크게 낙담하던 부모님의 권유로 인해 당시 시골학교 교장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견습교사로 채용되었다. 이것이 20세기의 위대한 교육개혁자가 처음 교직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경위이다.

니일은 20세기의 진보적 교육 사상가들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의 사상은 독특하고 혁명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니일은 어려서는 당시의 권위주의적이고 엄격한 교육의 피해를 많이 보았다. 청년기에는 쇼와 웰즈 등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문명 비판적 자세와 사회의식, 종교관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는 또 레인과 라이히 같은 프로이드파 정신분석학자들로부터도 영향을 받아 당시의 권위주의적인 교육에 반대하여 철저한 자유교육을 주창했다.

 그리고 니일이 창시한 서머힐 학교에서는 어린이 스스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데 그 주안점을 두고 여러 가지 교육방법을 실천해 가고 있는 데, 이는 어린이 스스로의 만족을 지향하는 것으로 위기지학으로 볼 수 있다. 니일이 이러한 교육목적을 실천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니일이 가졌던 독특한 인간관에서 기인한다. 루소(Rousseau)의 영향을 받은 니일은 인간이 생득적으로 선하다는 입장을 하나의 신념으로 삼았다. 이 신념이 어린이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되었고, 어린이에게 철저한 자유를 보장하는 서머힐 학교 운영의 근본원리가 되었다. 

 니일의 교육 사상은 다음의 5가지 중요한 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어린이의 신성과 생래적 발전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다. 그래서 어린이의 본성에 근거하여 그는 교육을 전개해 갈 것을 강조했다. 이것은 그의 교육의 출발점이다.

 둘째, 자유의 개념을 교육 사상의 가장 기본 원리로 삼고 있다. 그는 ‘자유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며, 자유는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가 있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은 개인적 자유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지만, 남의 권리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자유를 못한다고 했다. 즉 절대적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니일은 자유가 방종과 혼용되고 있으나, 이 두 가지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정한 자유는 서로 주고받는 상호적인 것이어야 하며, 자기통제를 의미한다. 방종은 다른 사람의 자유에 간섭하는 일로 참 자유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참다운 자유 속에서 자아난 아이는 자기의 자유의지에 의해 자신의 행동을 잘 통제할 줄 아는 자율적인 어린이 가된다고 말했다.

 이런 자유관을 지닌 니일은 실험학교에서 학생을 학교에 맞추는 대신, 학생에게 맞는 학교로서 자유의 원칙에 입각하여 창설 운영하였다. 그리고 50년간의 실험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즉 아이들에게 공부할 자유뿐 아니라 공부 안 할 자유까지 주고, 선생이나 어른들이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간섭, 압력을 가하는 일을 배제하고, 스스로의 민주적인 자치생활을 허용했을 때, 선량하고, 자율적, 창의적이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들로 자라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니일은 어린이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참으로 자유를 준다는 것은 종교, 정치, 계급의식을 가르치는 것을 반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유 속에서 자랄 보다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사랑이 주어지는 것이고, 사랑만이 ‘병든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무의식에 대한 견해이다. 그는 인간의 행동이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무의식을 중요시하는 감정교육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을 이드라 부르는 본능과 자아와 초자아의 세 가지로 형성된다고 생각했다. 또 이것이 의식과 무의식의 정신현상을 일으키는데, 인간의 행위는 무의식에 의해 좌우되며, 무의식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비인격적 무의식과 환경으로부터 획득하여 된 것인 인격적 무의식으로 되어있다고 생각했다. 비인격적 무의식은 자기 보존본능, 종족 보존본능으로 근원적 생명력인데 이를 나쁘게 보아 배척함으로써 부자연스러운 억압이 생기고, 인간은 신경증이 된다고 말했다. 니일은 <학교에서는 지식보다도 감정>이라는 책속에서 감정교육을 행할 것을 주장하여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 인정, 자유뿐이며 이런 상태에서 아이들은 관대하고 성실하며 친절하고 개성적이며 창의적인 인간으로 자란다고 주장했다.

 넷째, 행복에 대한 견해이다. 니일은 인생의 목적을 행복을 발견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도 행복이라고 했다. 그가 의미하는 행복은 생에 대한 흥미와 선, 안녕의 내적 감정, 균형감, 생에 대한 만족감 등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자유로울 때만 얻어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어린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길은 권위를 철폐하여 어린이가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또 어린이들의 행복과 안녕은 그들에게 허용되는 사랑과 인정에 비례한다고 했다. 즉, 어린이의 선성(善性)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본래 현명하고 현실적이며 발전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보아 자유를 허용했을 때 아이들은 행복하고 훌륭하게 자라갔다고 했다.

 다섯째, 그의 교육사상에서 중요한 원리로 삼고 있는 것은 사랑의 개념이다. 그가 의미하는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인정해주는 것’ ‘상대방의 편이 되어 주는 것’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들여 주는 것’을 뜻했다. 니일은 따라서 좋은 교사란 오직 주는 교사인데 그것은 사랑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어린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친근감을 느끼게 하고, 그들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그의 사상과 교육실험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사상을 ‘인간을 위한 교육’이며 니일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진보적 교육사상가라고 평하는 긍정적인 면과, 그의 아동관은 시대착오적이고, 자유관은 유토피아적, 자가당착적이며 반지성적이고 쾌락주의적이라는 비판의 입장이 있었다.

[05] 그래도, 학습에는 '최적기'가 존재한다  
(소리와 제2언어 관계 그리고 그 극복 : https://blog.naver.com/4eva3030/memo/221140442729)

 제2언어에 학습자를 ‘언제’ 노출시켜야 언어 습득을 최적화할 수 있을지는 외국어 발달 연구에서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뇌과학, 행동과학, 발달학 연구를 살펴 본 결과 제2언어의 결정적 시기에 대한 네 개의 가설이 존재한다. 

 첫째, 제2언어는 습득 측면에 있어서 제1언어와 동일한 결정적 시기를 갖는다. 둘째, 제2언어 소리 습득에 생애 첫해 경험이 매우 결정적이다. 셋째, 학습자의 연령이 증가함에 따라 언어 학습에서의 가소성(plasticity)을 점차 잃게 된다. 넷째, 하부 언어 학습 영역에 따라 각기 다른 생물학적 발달 시기를 갖는다. 이 중에서 둘째, 소리에 관한 논의들을 동영상을 통해 확인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