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2092일 물날

텍스트 : 오래된 미래

주 제 : 독서토론 비판적 현실인식의 힘 키우기, 현대사회는 살만한 사회인가? 우리는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는가?

길잡이 : 박형만 (해오름 으뜸일꾼)

 

황미*

읽으면서 읽고 나서 역시 마음이 부대끼고 그랬습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도,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이 흔들리는 것이, 쓰러지는 것이 마음이 아팠던것 같습니다수업을 1차시 밖에 못 들었는데, 선생님들의 독후후기를 읽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중국 바람따라? 다니신 정선 사시는 선생님의 이야기도 놀라웠고 궁금해졌습니다

진보라는 것이 무엇일지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20살에서 30살정도 까지 인디언들의 글을 찾아 읽으며 감탄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가 어떻게 짓밟혔는지 알기에, 라다크의 안녕과 우리의 안녕이 만나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업을 마쳤습니다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지막거인이라는 동화책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이 책이 너무 슬퍼서 다시 볼 엄두가 안 나는데, 오래된 미래도 저에게 그런 책입니다희망과 대안이 와 닿지 않는것은 작가나 세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저에 대한 불신인 것 같습니다

 

문송*

틱닛한의 시를 읽으며 오래전 보았던 영화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떠올렸습니다.

한 장의 종이를 보며 구름과 햇빛, 나무, 나무꾼과 그가 먹는 빵, 그의 아버지를 떠올리듯 라이언 일병의 얼굴에 겹쳐졌던 그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 안에 깃든 무수한 것들,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다면 살아가는 일이 보다 의미있고 따뜻한 일이 될 것 같았습니다.

수업 시간 선생님께서 몇 번 언급하셨던 진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돌아보면 그 단어는 주로 긍정의 이미지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아주 당연하게요. 하지만 진보라는 말이 순수한 땅 라다크에 가했던 변화의 모습은 충격이었습니다. 개발과 발전 뒤에 오는 전통의 가치에 대한 훼손과 사람들 간 관계의 단절쯤은 기꺼이 수긍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삶을 점검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또한 인간의 본질적 행복을 담보하지 않고도, 환경의 파괴를 감수하지 않고도 가능한 새로운 진보를 물색하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나 또한 그들 중 하나이기를 바라면서.

 

김정*

세상의 이치를 연기법으로 보면 화를 낼 명분도 금새 사라지고 라다크 인들이 말하는 어떤 큰 무언가의 일부인 것 같은 느낌을 알아채게 되는데 요즘 드는 생각에 생채리듬의 속도가 느려진 덕도 있는 것 같아요.^^' 라다크 인들이 말하는 "우린 함께 살아야하니깐" 읇조림 위에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라구요.

요구받는 자라고 하면, 먼저 알아챈 자가 아닐까 했고, 문제는 그 알아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몰라 시행착오로 힘들었었던 것 같아요. 이 책을 읽으면서 자비심과 함께 행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라다크 인들의 극단적인 관용 만나고 그것이 억울한 일이 아니라 순리였구나..하는 신뢰가 생겼어요. 함께 살아야 하니깐.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 참여까지 물리적 환경을 이유로 합리화할 명분들이 점점 사라지게 만드는 수업이었습니다. 배운다는 것 가르친다는 것 희망을 노래하는 것..

 

정연*

생태적 삶을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개념이 두 개 있었습니다. 다양성과 회복탄력성(resilience).

우리가 잡초근성이라 말하는 밟아도 밟아도 끝끝내 다시 일어나는 잡초처럼 절망과 포기를 알지 못하는 힘! 그것이 필요하겠지요. 이처럼 어려운 시대에는요.

오래된 미래 읽으시고 마음이 무거워지신 분들께 시 선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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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극복된 방황이다. / 글 프리드리히 베네쉬(번역 이은경)

 

참다운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극복된 방황이다.

그리고 진정한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

극복된 착각이다.

참다운 순수함은 본래의 순수함이 아니라,

정화된 불순함이다.

진정한 선은 본래의 선이 아니라,

극복된 악이다.

 

이는 온 우주에 유효하다 - 그리고 신들에게도.

 

독후감

라다크는 인도와 중국간 영토분쟁때문에 요근래 계속 뉴스를 탔다. 그전까지 라다크는 오래된 미래의 상징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곳이 인도와 중국간 뜨거운 국경분쟁 지역이란걸 알게 되면서 1974년부터 왜 인도가 이곳을 개발하고 자국의 관리를 파견하고 관광객을 유치하고 식량지원을 해주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라다크의 아름다운 전통사회와 그 안에 살아 숨쉬던 모든 인간적인 삶의 양식이 서구 문명의 유입으로 어떻게 비인간화 되어가는지를 볼 수 있는 책이다, 오래된 미래는.

그리고 짧은 시간 안에 고도로 압축된 경제성장을 해온 대한민국의 변화를 직접 보고 겪어온 나에게 라다크의 변화는 남의 일 같지 않은 아픔을 느끼게 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나야만 했다는 것 또한 이해하고 있다.

 

고대에 인간이 정신적 세계에 대해 지녔던 관계를 서서히, 점차적으로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그 관계를 잃어버려야만 했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로부터 형성할 수 있기 위해서 일단은 인간이 완전한 자유를 향해 발달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15세기 이래로 요구되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특히 20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그것을 진정으로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유산 뿐만 아니라 전통도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아버지들이 아들들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는 "무를 마주 대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제 손이 독자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손이 제게서 잘려 나갔습니다. 손이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잘려 나간 채 썩어 간다고 느낄 것입니다. 더 이상 살아 있다고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와 같이 지난 19세기의 마지막 30년 이래로 영혼이 세계 사건의 보편적인 흐름으로부터 잘려 나간 듯이 느낍니다. 연결고리가 풀린 듯이 느낍니다. 그리고 불안하게 질문합니다. 내가 어떻게 영혼 안에서 다시금 살아날 수 있을까?

 

15세기 이래 주로 서양 문화에서 발달한 사고- 반면에 동양문화는 비록 퇴폐적이 되었다 하더라도 낡은 사고를 보존했습니다 - 그 사고는아주 특이한 성격을 지닙니다. 서쪽으로 이동할수록 동양인들에게는 열등해 보이는 사고가 더 만연합니다. 그런 사고는 동양인들에게 외경심을 불러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경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인들에게 새로운 것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영락 중인 옛것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낡은 직관을 잃어버리고 무를 마주 대하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의식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무 안에서 삼라만상을 찾기!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인간이 노력해서 이루어 내야만 하는 것을 그 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수동적인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 인간의 재량에 맡겨진 가장 강화된 인식력으로만, 순수한 사고의 인식력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수한 사고의 경우에서는 사고가 곧바로 의지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낡은 직관들은 항상 집단에만 주어졌습니다. 원초 계시와 인간 집단 간에 비밀스러운 관계가 존재합니다. 낡은 직관들은 그 관계성에서 보아 항상 인간 집단에만 주어졌습니다. 노력해서 얻어 내어야만 하는 새로운 직관은 오늘날 각자의 무대에서, 즉 개별적 인간 영혼이라는 무대에서 애를 써서 이루어 내야만 합니다. 각기의 개별적 인간이 스스로 윤리성의 원천이 되도록 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 스스로 마주 대하고 있는 그 무로부터 직관 자체를 통해서 윤리성을 건져 올려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편으로는 도덕적 개인주의라는 관조를 얻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는 실현되어야 한 행위의 관조에서 나오는 사랑이 도덕적 개인주의를 떠받쳐 준다는 점 역시 필수적으로 알아 보아야 합니다.

 

인류가 개인주의라는 방향으로 발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도덕적 개인주의로 인해 사회가 파괴되리라는 말은 전혀 수긍할 수 없습니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인류의 지속적인 발달을 가능하게 하는 힘들을 찾는 것입니다. 도덕적 개인주의의 의미에서 인류발달을 위해 그 힘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도덕적 개인주의 하에서 단결되어야 사회가 비로소 진정 생동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슈타이너 <젊은이여, 앎을 삶이 되도록 일깨우라!> 중에서-

 

법칙성(개인의 행위, 민족의 행위, 시대의 행위에서 개념적인 것)을 찾으면, 도덕이 나온다. 그런데 이는 윤리 규범에 대한 학문으로서 도덕이 아니라 윤리의 자연철학으로서 도덕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법칙은, 자연 법칙이 특정 현상과 관계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인간 행위와 관계한다. 하지만 그 법칙은 우리가 행위 근거로 삼는 동인과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행위가 무엇을 통해서 그의 윤리적 의지에서 솟아나는지 파악하고자 한다면, 이 의지가 행위에 대해 지니는 관계를 먼저 보아야 한다. 이 관계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행위를 일단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중에 나 혹은 타인이 그 행위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에 고려되는 윤리 원칙이 드러날 수 있다. 내가 행위를 하는 동안에는, 내 내면에 윤리 원칙이 직관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에서만 나를 움직인다. 이는, 윤리 원칙이 내가 행위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객체에 대한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에 나는 누구에게도, 어떤 법칙에도 제가 이 행위를 해야 할까요?” 하고 묻지 않는다. 나는 그 행위에 대한 관념을 파악한 즉시 실행에 옮긴다. 오로지 그렇게 행하는 것만  행위다. 어떤 사람이 특정 윤리 규범을 인정하기 때문에만 어떤 일을 한다면, 그 행위는 그의 도덕법전에 들어 있는 원칙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그는 그 원칙을 집행하는 자일 뿐이다. 그는 고차적인 자동 기계다. 행위를 위한 계기를 그 사람 의식 속에 집어넣으면, 즉시 그 사람이 알고 있는 도덕 원리의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독교적인 행위나 인도적인 행위를, 혹은 사리사욕이 없어 보이는 행위를, 혹은 문화 역사적 진보를 위한 행위를 완수하기 위해 법칙적인 방식으로 돌아간다. 객체에 대한 사랑을 따를 때에만, 오로지 그렇게 할 때에만 나는 행위를 하는 그 자체다. 이 윤리 단계에서 나는 내 위에 있는 어떤 주인을 인정하기 때문에 행동하는게 아니다. 이 단계에서 나는 어떤 외적인 권위도, 이른바 내적인 소리도 따르지 않는다. 나는 내면에서 행위 근거를, 즉 행위에 대한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에 외적인 원칙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내 행위가 선한지 악한지 이성적으로 검사하지 않는다. 내가 그 행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저 완수할 뿐이다. 사랑으로 적셔진 내 직관이 직관적으로 체험되는 세계 연관성 속 한복판에 올바른 방식으로 들어있다면, 내 행위는 선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악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 위치에 있다면 어떻게 할까?” 하고 묻지도 않는다. 특별한 개인으로서 내가 원하도록 부추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고, 그렇게 알아본 대로 행할 뿐이다. 나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행위로 이끌어가는 것은 일반적인 관습, 일반적인 통례,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원칙, 윤리 규범 등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내 사랑이다. 나는 어떤 강제성도 느끼지 않는다. 본능에 따른 행동에서 처럼 자연적 속박도 느끼지 않는다. 윤리적 계율이 씌우는 굴레도 느끼지 않는다. 내 내면에 놓인 것을 그저 실행하고자 할 뿐이다

 

-슈타이너 <자유의 철학> 중에서-

 

오랫동안 생태적인 삶, 영성으로 충만한 삶을 꿈꾸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생태마을인 핀드혼으로 전환도시인 토트네스로 거기 있는 슈마허 칼리지로 이상을 찾아 헤매던 날들이 내게 있었다.

하지만 이젠 조금은 알 것 같다.

하늘에 있는 별(이상)을 땅으로 가지고 내려와서 신의 세계를 이 땅에 구현하는게 예술이 아니라, 이미 여기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섬세하게 살펴서 관념의 옷을 입혀 더 높은 세계로 고양시키는 것이 예술임을...

김정현 도반님 말씀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냥 날것의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진 자연임을.

그것이 자연에 인간이 아무 손도 대지 않고 자연이 주는 그대로 키워내는 태평농법과, 각종 증폭제와 별들의 움직임을 농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생명역동농법과의 차이라는 것도.

 

숙제를 하지 않아 세 시간 내내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게 힘들다고 느낀 오늘 수업. 담 주엔 숙제도 적으니 열심히 참여해야 겠어요.

마이삭이 올라옵니다. 집 안밖으로 단디 준비하셔요!

담주에 뵐께요~ ^^

 

 

유은*

"종이 안에 당신은 햇빛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틱낫한 스님의 시의 한 구절을 되뇌어 읽어봅니다. 나는 누구의 덕에 의해 살아가고 있고 누구에게 덕을 나누며 살아야한다. 삶의 지혜가 말 속에 녹아들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라다크 사람들의 모습이 시 구절과 함께 포개집니다. 사람과 자연의 교류를 통해 늘 행복했던 사람들.

우리나라도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사람들의 삶은 여유를 잃었고 행복지수는 153개국 중 61.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지금 우리는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유기농 식품을 구입하고 친환경 소재로 집을 짓거나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라다크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그렇다면 오래된 라다크가 우리들의 미래가 아닐까싶습니다.

오늘 수업을 하면서 라다크가 우리가 갈 미래를 열어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행복하지 않은 우리들에게 속도와 욕망을 조절하라는 메시지를 전달받았습니다.

우렁이 말씀을 해주신 선생님이 계셔서 저도 어린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이웃집을 돌며 떡을 돌렸던, 빈 그릇을 빈 채 그대로 보내지 않았던 이웃들이 왠지 그립습니다. 직접 대면하며 끈끈한 정과 유대가 있었기에 말입니다.

 

 

 조문*

먼저 선생님들의 감상문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깊이 있게 읽고, 풀어내신 자료가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사실, 수업하는 날, 동생이 코로나 검사를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른 질환 때문에 응급실을 찾았는데, 열이 나니까 코로나 검사가 먼저라는 이야기를 듣고 코로나 검사를 받은 것인데요.

<오래된 미래>를 읽으면서 계속 코로나 사태가 머리에 맴돌았는데... 타이밍이 놀라웠습니다. 결과는 다행히, 음성이라서 지금 치료를 받고 있는데요. 동생이 코로나 검사를 했다는 순간, 제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 동생에게 가면 안 되겠구나!’ 였습니다.

무조건적인 개발이 불러온 전염병 재난. 자연을 파괴시킨 죄를 인간이 고스란히 받고 있는 상황인데요. 제게 더 다가오는 것은 코로나로 인해 점점 더 개별화되는 사람들. 그리고 서로를 혐오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것은 개인화와 경쟁적 삶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겠지만 코로나로 인해 개별화는 점점 더 극심해지고,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은 점점 더 커질 것 같아요.

무엇이 문제일까? 어떻게 하면 될까? 저는 이 책에서 흙과의 분리라는 말이 마음에 참 많이 와 닿았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땅, 토대와 분리되는 순간 인간의 삶이 참 많이 피폐해지고, 개별화되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장선*

오래된 미래는 [조화로운 삶]을 읽었을 때 느꼈던 놀라움보다 더 컸습니다

라다크인들의 행복한 삶이 잘 느껴졌고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을 긍정하고 자연과 공동체와 하나 되어서 사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라다크인들의 변화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좋은 전통 문화와 생활양식을 지키면서 긍정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다는 움직임에 안도감이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먹을 거리를 우리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직접 했을 때 그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고 지켜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편안함에 길들여지고 있는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생태적인 삶에 대해 고찰 해보게 되어서 감사했습니다.

매번 공부를 더 하고 소감문을 올리겠다는 것이 생활에 치여서 게으름에 빠져서 놓치게 되었습니다

이젠 열심히 듣고 꼬박꼬박 바로 소감문 올리겠습니다

이따가 수업 때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