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 Ulrich Beck(울리히 벡) ‘현대 사회학’

 

< 차 례 >

  서 언

1. 학자 소개

2. 시대배경 -『위험사회』라는 책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나?

 

Ⅱ. 본 론

1. ‘위험사회’란 무엇인가?
2. 위험사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3. 한국사회도 위험사회인가?
4. 위험사회에 대한 대안은?
5. 위험사회에서 성찰적 근대화로 어떻게 변화되는가?
6. 성찰적 근대화란 무엇인가?
7. 전통적 근대화와 성찰적 근대화의 차이는?

Ⅲ. 결 언

1.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대한 성찰

  Ⅳ. 참고문헌

  

 

1. 학자소개

 

울리히 벡 [Ulrich Beck]

위르겐 하버마스, 앤서니 기든스 등과 함께 현대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학자이다.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사회학·철학·정치학을 수학하였으며 뮌헨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뮌스터 대학과 밤베르크 대학 교수를 거쳐서 현재는 뮌헨 대학의 사회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86년 『위험사회』란 저서를 통해 서구를 중심으로 추구해온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이 실제로는 가공스러운 '위험사회'를 낳는다고 주장하고, 현대사회의 위기화 경향을 비판하는 학설을 내놓아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90년대에 들어와서도 벡이 일관되게 추구해 온 작업은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근대 혹은 그가 말하는 ‘제2의 근대’로 나아가는 돌파구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의 저서로는 『위험사회』이외에도『세계화란 무엇인가』와 『정치의 재해석』 등이 있다. 1992년에 첫 출간된 저서 『위험사회』는 위험에 대한 사회학적 개념에, 그리고 보다 넓게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 시대배경 -『위험사회』라는 책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나?

 

“우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보건기구가 홍역의 완전박멸을 선언하는 그 순간 광우병, 조류 독감과 같은 신종 질병이 등장하고, 우리가 갈증을 없애줄 한 바가지의 맑은 물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전기 문명에 도취되고 화려한 소비문화에 빠져드는 순간, 자칫 인류를 멸종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핵발전소들이 도처에 건설된다.『위험사회』는 이러한 현대 사회를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노력이다. 이 위험천만한 풍요의 시대를 안전과 평화의 시대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를 추구한다.” (위험사회, 1986:5)

산업혁명 이후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역사상 유례없는 생산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명실상부한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환경위기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물질풍요의 이면에는 엄청난 대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본래 위험(Risk)이라는 용어는 스페인의 항해술 용어에서 나온 것으로 ‘위협을 감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위험이란 부를 얻기 위해서 당연히 감수해야만 하는 난관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환경이 위기상황에 처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한국을 포함하여 많은 나라가 산업화를 통해 경제적 빈곤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으나, 이러한 성과는 극심한 환경파괴를 댓가로 삼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지금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환경파괴를 막고, 산업화의 과정에서 자연으로부터 빌어온 막대한 부채를 탕감해야 할 시기이다.

따라서 현 시기는 명백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종래와 같은 성장제일주의의 산업화는 결국 총체적인 파멸로 귀결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는 환경위기 및 현대 사회의 성격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된다. 벡의 『위험사회』는 현재의 환경위기를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근본원리에 비추어서 고찰함으로써, 인식의 전환을 위한 하나의 준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준거는 '위험'의 변화에 대한 고찰을 통해 제시된다.

 

Ⅱ. 본 론

 

1. ‘위험사회’란 무엇인가?

 

부의 추구와 분배의 문제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등한시 여겨온 산업사회가 정점을 맞이하게 되면서 지금은 구조적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위험사회’이다. 즉 ‘위험사회’란 역사상 유례없이 거대한 풍요를 이룩한 근대 산업사회의 원리와 구조 자체가 파멸적인 재앙의 사회적 근원으로 변모하는 사회를 뜻한다.

 

"산업사회라는 개념은 '부의 논리'의 지배를 제시하며, 그것과 위험분배가 양립할 수 있다고 확언한다. 반면에 위험사회라는 개념은 부의 분배와 위험의 분배는 양립될 수 없으며, 부의 '논리'와 위험의 '논리'가 서로 경쟁을 벌인다고 확언한다."(Beck, 1986:154) 다시 말해서 고전적 산업사회에서는 부의 생산논리가 위험생산의 논리를 압도했다면, 위험사회에서는 위험생산과 그 분배의 논리가 지배적으로 된다. 또한 생산력은 그 무해 성을 상실하고, 경제적 및 기술적 진보에서 얻는 편익은 위험생산에 의해 압도된다.(Beck, 1986:12)

 

“오늘날 사람들은 지구적 위험사회의 격동으로 들어서고 있으며, 다양하고 모순적이며, 지구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위험을 동시에 안고 살아갈 것이다. 위험사회란 대기와 물, 생태환경 속에 분해되어 인간 개체에 모세혈관처럼 침투하고 있는 생태학적 오염인자들을 분배하는 파국적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아침과 저녁에 식탁에 오르는 달걀, 야채, 무수히 많은 음식재료들을 먹으며, 또 물과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자신의 몸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환경오염의 불안을 느끼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태아가 태어나자마자 산모도 모르게 모유 속에 오염된 중금속을 먹으며 성장하는 시대,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의 토대가 붕괴 되어버린 시대, 그러한 ‘불안’들이 우리 현대문명 속에 떠돌아다니고 있다.”(서평‘지구적 위험사회의 격동과 문명의 화산에서 살아가기’:195)

 

2. 위험사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1986:57)에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추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산업사회의 위험성은여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위험의 평등화

  과거의 위험은 특정한 누군가의 위험이었다. 과거의 위험은 불평등하게 분배된 무엇인가가 부족해서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는 생산력의 증대로 배고픔을 해결하지만 그에 따라 환경오염을 일으킨다. 이 위험은 과잉된 오염물이 원인이면서 모든 이에게 적용되므로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다시 말해 모두에게 평등한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둘째, 위험의 전지구화

 

산성비를 생각해 보자. 한국에 내리는 산성비는 중국 동부 산업지대의 대기 오염이 원인이다. 한국의 대기오염은 일본의 산성비로 나타난다. 이 문제는 결코 한국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 한국과 중국, 일본 모두의 문제이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는 유럽 전역에 광범위한 피해를 입혔다. 유럽은 원전에 대해 충분한 안전 조치를 취하고 있었지만 옛 소련의 문제에까지 개입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안전할 수 없었다. 개별 국가의 개입으로는 결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위험은 전지구화된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근대화가 낳은 위험들이며 위험은 산업화가 낳은 대량 생산물이다. 산업화는 전 세계에 확산되면서 동시에 위험은 세계적으로 축적되고 강화된다.

 

셋째, 사회적 불평등의 개인화

 

근대 사회의 경제 원리인 자본주의 때문에 근대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개의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자본주의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시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호황과 불황의 주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는 실업의 위험에 놓여 있으며 실업은 노동자 모두의 공통된 위험이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고용 안정을 위해 연대했다. 근대 사회의 위험이 노동자 모두의 위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은 노동자를 작업 특성과 능력에 따라 구분하면서 노동자 간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기업은 더 이상 노동자에게 평생직장이 아니다. 언제든 기업의 필요에 따라 고용과 해고를 반복할 수 있고 고용된 노동자들도 같은 대우를 받지 않는다. 과거의 근무 연수에 따른 호봉제는 능력에 따라 보상도 다른 연봉제로 변화했고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누구도 동일한 입장이 아니다. 노동자라고 해도 다른 노동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도 지지할 수도 없다. 이제 동질 의식은 끊임없이 해체되고 노동자들은 개인화 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은 위험 앞에서 의미가 없다.

 

노동자 집단이 한 사람의 개인으로 해체되어 권리와 의무를 지닌 주체가 됨으로써 자유주의적으로 보자면 그들은 엄청난 가능성을 보장받은 셈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위험은 증가한다. 이제 개인은 과거와 같이 가족, 마을, 공동체 또는 사회 계급이나 특정 집단의 의지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던 위기와 동요를 개인 스스로 혼자서 인지하고 해석하고 처리해야 한다. 수입의 불평등, 분업 구조와 같은 임노동의 기본적인 결정 요소는 결국 변화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사회 계급적 속성은 약화된다. 이제 불평등은 사회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전환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개인주의화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경향은 이제 인간의 삶의 중심에 있던 공동체의 순기능을 사라지게 한다.

 

넷째, 성 역할의 변화와 소통 방식의 개인화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남녀 관계이다. 유사 이래로 육체적 차이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역할이 달랐다. 농업 사회에서 육체적 차이는 작업 능력의 차이였고 이에 따라 남녀의 차이는 차별로 변질되었다. 이 차별을 체계화한 것이 가부장제이다. 가부장제에서 가족은 공동으로 작업을 한다. 우월한 작업능력이 있는 남자는 작업의 통솔자이면서 권력자이다. 핵심적인 작업자이기 때문에 가족 간의 갈등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여자의 역할들은 남자가 결정하는 대신 남자는 여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삼종지도는 여자의 의무이지만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의 의무이기도 한다. 남자와 여자는 가부장제 안에서 명확한 역할을 가졌던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예전과는 같은 의무를 강요할 수 없다. 가부장제가 그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성은 우월한 작업자가 아니며 권력자는 더욱이 아니다. 가족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도덕적 윤리적 법적 기준의 제정자로서의 남성은 사라졌으며 동시에 남성과 여성에 대한 보편적 역할 구분은 사라졌다.

 

개인은 자신이 남자 또는 여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선택하고 실천해야 하고 사회적 기준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설정할 수 없으며 개인의 선택이 필요하다. 성 정체성의 동요는 자아 정체성의 동요로 확대됨으로 이제 개인의 삶을 사회적 기준에 따라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고 개인의 생활양식은 누구와도 같지 않다. 타자와의 차이는 점점 커지고 공통점은 줄어들며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더욱 고립되는 것이다. 이제 타자와의 교류 방식은 어떤 제도적 보장도 없이 교류를 원하는 두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다.

 

다섯째, 진리의 지위를 잃어버린 과학

 

명확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불안한 환경은 개인에게 어떠한 확실성에 대한 보증도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개인을 더욱더 불안한 위험의 자리로 몰고 간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위험 앞에서 과학은 어떠한 해결책이나 뚜렷한 복안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상반된 주장들을 생산함으로써 준거의 역할을 상실하고, 과학은 판단의 준거이기는커녕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제1의 책임을 지고 있다. 오류 가능한 모든 과학의 전제들은 오늘날 위험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여겨지며, 때문에 ‘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는 모든 해결책은 그 타당성을 상실한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근대화를 통해 이 모든 위험이 생산되었고 이 근대화를 추진한 국가권력이 모든 문제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한, 국가는 신뢰할 만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 과학이나 국가권력과 같이 기존의 기초적인 신뢰를 형성하고 있었던 모든 진리의 영역은 의심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여전히 과학과 국가 권력에 의지하고 있다. 위험의 논리는 현대 사회가 죽음이나 질병과 같은 외부적 위험(Extrinsic Risk)을 방어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안전을 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안전을 수립한 체제 자체가 내부적 위험(Internal Risk)을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평균 수명과 기대 수명의 상승은 긴 노년생활을 일반화하고 이는 늙어간다는 것이 주는 자연적인 위험을 감소시켰지만, 기대수명이 80세를 상회하는 사회에서는 은퇴 후의 삶이 20년에 육박하는 만큼 늙어간다는 것의 문제는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적인 문제로 환원된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과학의 시도는 다시 새로운 문제를 생산하게 됨으로써 그 모든 진리의 권리를 상실한다. 과학은 핵발전소라는 위험을 만들어놓고 그 위험이 우리 삶의 결핍을 해결했다는 것을 끊임없이 선전한다.

 

여섯째,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

 

사회법은 민법의 분야가 공법의 영역에서 파악된 것이고 민법은 개인 간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규정이다. 19세기 들어 개인 간의 문제가 집단화했기 때문에 국가는 개인의 문제마저도 일반화시켜야 했다. 사회권, 즉 노동권이나 행복추구권은 개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문제이다. 20세기만 해도 기업의 자유로운 권리였던 폐수 처리 업무는 이제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여론의 통제를 받는 새로운 영역으로 변화한다.

 

기업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기술이 생태계와 인간생명, 그리고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부작용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다면 궁극적으로 기술의 소유권을 상실할 것이며, 재판과 체면 회복의 과정에서 대량의 추가 비용이 필요해질 것이다. 낙동강에 페놀을 방류한 D기업은 그 사건으로 인해 얻은 치명적인 손실을 회복하는데 자그마치 4년의 세월과 환산할 수 없는 비용을 투자해야 했다.

 

이제 개인의 권리 영역에 있던 모든 것들이 이처럼 정치화되기 시작한다. 이제 그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유해 성분의 배출이나 핵폐기물 같은 생태적, 기술적 문제마저도 이제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문제로 바뀌어 버렸다. 유해 물질을 생산하고자 하는 기업은 정치적인 로비를 통해서 법적 허용 수치를 높이고자 노력할 것이며, 그 반대의 노력 역시 여론과 시민단체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의 작지만 큰 문제들은 이제 오직 정치적 타협의 수준에서만 결정된다.

 

이제 기존의 경제정책, 소득분배, 사회보장제도와 같은 영역에서만 정치 수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 생산의 구체적 내용, 에너지의 종류, 폐기물 처리 등과 같은 기업 경영자들의 주권영역에 속하는 문제들이 정치적 수단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제 유권자들의 의식 속에서 이러한 작지만 뜨거운 쟁점들은 대량 실업의 문제와 거의 같은 비중을 접하게 된다.

 

3. 한국사회도 위험사회인가?

 

서구와 한국은 발전의 시기와 방식이 다른 만큼 근대성의 위기도 같을 수 없다. 서구가‘후기 근대’의 위기라면, 한국은 ‘초기근대’와 ‘후기근대’라는 비동시적인 것의 위기이다. 한국사회는 위험과 불신이란 측면에서 볼 때 위험사회이다. 농경사회의 전근대적, 산업사회의 근대적, 정보사회의 후근대적 위난과 재난이 현재라는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위험사회에서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는 정치, 군사. 경제. 환경, 문화. 사회 등 모든 영역에 다차원적으로 걸쳐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서로 중복적이고 침투적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실례로 들어 보자. IMF 체제를 유발한 경제위기나 그로 인해 나타나는 심리공황, 가족파괴, 고용불안, 집단갈등, 기업도산과 같은 사회위기는 위험과 재난이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웅변하여 줄 것이다.

 

4. 위험사회에 대한 대안은?

 

“위험이 평상적 지각범위를 벗어나고 산업의 논리 속에서 체계적으로 재생산되면서 현대 산업사회는 위험사회로 이행 된다”고 울리히 벡은 주장한다. 경제적 부를 희생할지라도 위험을 사전에 철저히 봉쇄하는 것, 이것이 위험사회에서 인류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발전경로이다.

 

5. 위험사회에서 성찰적 근대화로 어떻게 변화되는가?

 

현재의 산업사회가 위험사회라면 어떻게 제2차의 근대, 즉 성찰적 근대화로 변모될 수 있는가? 벡 스스로 인정했든 성찰적 근대화란 마냥 살기 좋은 유토피아적인 세계가 아니다. 울리히 벡에 의하면 성찰적 근대화는 “산업사회의 자체 변화 즉, 최초의 근대가 제2의 근대에 의해서 해체 혹은 교체되고 있으며 산업사회는 매우 급진적으로 이행, 변화, 재구성된다.”(Beck, 성찰적 근대화, 1995:27)

근대사회는 역동적으로 자신의 계급, 계층, 직업, 성역할, 핵가족, 공장, 기업 부문의 구성을 밑에서부터 약화시키고 있으며 또한 자연스러운 기술적 경제적 진보를 위한 전제 조건들과 지속적 형태들의 기반도 약화시키고 있다. 진보가 자기파괴로 전환될 수 있고, 한 종류의 근대화가 다른 근대화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변화시키는 이 새로운 단계가 바로 성찰적 단계이다.(앤소니 기든스, 울리히 벡, 스콧 래쉬, 성찰적 근대화, 1998)

6. 성찰적 근대화란 무엇인가?

 

현대사회가 위험사회라는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벡이 주장하는 ‘성찰적 근대화’란 이처럼 풍요사회를 향한 근대화의 과정이 ‘위험사회’로 돌아오는 과정을 되짚고 반전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산업사회의 원리들 자체를 성찰하여 산업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산업사회의 진보이자 해체의 과정, 이것이 성찰적 근대화의 과정이다.

 

성찰적 근대화가 해체의 대상으로 삼는 산업사회의 원리들 중에서 울리히 벡은 특히 현대 기술-과학을 중시한다. 현대의 기술-과학과 그 합리성이야말로 오늘날의 환경위기로 대변되는 산업사회의 위험을 낳은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부정하고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즉 현대의 과학-기술은 문제의 근원이자 해결책이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결국 ‘성찰적 근대화’란 현대 기술과학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그 한계도 함께 인식함으로써 과학에 대한 사회적 제어력을 높이는 과정이다. (Beck, 1986:8) 이를 울리히 벡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회적 합리성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Beck, 1986:30)

 

19세기 이래 발전되어 온 근대성 및 근대화에 대한 담론은 발전된 서구 산업사회가 완전히 근대화된 사회로서 근대성의 절정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으며, 산업사회를 계속 연장하면 세계사는 결국 최 정점에 달할 것이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울리히 벡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근대성의 종말이 아니라, 근대성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을 강력이 주장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19세기에 일어난 근대화가 봉건사회를 해소하고 산업사회를 만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근대화는 산업사회를 해소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다른 근대성이 도래하고 있는 중이다. 이 새로운 근대성을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 라고 부른다.(Beck, 1986:10)

“결국 성찰적 근대화란 산업사회를 지탱하는 여러 가지 원리들 자체를 성찰하여 산업사회를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Beck, 1986:19)

 

- 반성과 성찰의 차이

성찰은 반성이 아니라 ‘자기 대면’을 의미한다. 반성, 뉘우침이란 과거를 돌아보고 새로운 미래를 기획하려는 생산적인 과정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대면해야 하는 과정이며, 이때의 자아란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나의 의지와는 별개의 독립된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는 불안한 자아이다. 성찰은 바로 이러한 자아에 대한 직접적인 자기 대면의 결과로서 드러난다. 이 과정은 고전적 산업 사회의 기본적 갈등을 해결하던 일련의 제도들이 사실은 우리의 존재 조건을 갉아먹고 있었으며, 또한 우리는 이 제도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성찰에 맞닥뜨리게 되는 자리가 다름 아닌 위험의 자리라는 사실이다. 결국 산업사회의 재화의 분배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위험과 재해의 분배 문제라는 새로운 갈등에 압도되어버린다. 그렇다고 하여 재화의 분배 문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위험은 중첩되고 개인은 끊임없이 가중되는 불안한 운명을 떠안아야 한다. 결국 이 자체가 성찰성이다. 성찰성은 회피하는 것으로서의 반성을 넘어서서,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에 의한 선택 과정이 아니며, 우리에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과제에 가까운 것이다. 이는 모든 문제의 소재와 모든 지구화의 과정, 그리고 모든 계급과 모든 인종이 동시에 격렬하게 부딪치는 자기 대면이다.

 

7. 고전적 근대화와 성찰적 근대화의 차이는?

고전적산업사회에서 위험은 잠재적인 부수효과이며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의 위험은 각종 산업재해나, 사고, 그리고 특히 전 지구적 환경위기에서 잘 알 수 있듯이, 더 이상 산업 활동의 잠재적 부산물도 아니며 예외적인 것도 아니다. 현대 산업사회는 위험이 전면화 되고 정상적인 것으로 된 사회, 즉 위험사회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물론 현재의 전 지구적인 환경위기이다.

 

"또한 고전적 산업사회는 '근대적 봉건사회'이다. 성별 적대의 논리는 고전적 산업사회 내에서 발생하는 근대성과 반근대성 사이의 모순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Beck, 1986:106) 고전적 근대화의 특징은 근대화와 반근대화가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기로 치닫는 환경문제가 종래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따라서 "근대화의 성찰적 단계, 즉 위험사회에서 추구되는 성찰적 근대화를 통해 산업화과정에서 형성된 새로운 봉건적 조건을 해소했을 때에야, 현재의 환경위기는 비로소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특히 다양한 사회운동의 발전으로 대변되는 비제도적 정치의 성장에서 찾을 수 있다."(Beck, 1986:108)

 

벡에게 과학이나 산업의 발전은 한 묶음으로 엮인 위험들과 위해들이며, 우리는 이전에 단 한번도 이와 같은 것에 직면해 본 적이 없다. 이러한 위난들은 시간적, 공간적인 제약이 없어 후세에도 영향을 미치며 아무도 ‘위험사회’를 책임질 수 없다. 사회가 실제로 진화하려면 근대화는 반드시 성찰적이어야만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것은 단지 녹색운동 내에서만이 아니라, 폭넓은 일반 대중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과학에 대한 비판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다.

벡은 『위험사회』에서 세 단계로 이루어진 사회변화과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 과정은 첫째로 전근대성, 다음에 단순한 근대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찰적 근대성으로 구성된다. 이 견해에서 단순한 근대성은 논리적으로 산업사회, 그리고 새로운 근대성은 위험사회와 거의 같은 관계이다. 산업사회의 중심적인 원리는 재화(goods)의 분배이지만, 반면에 위험사회의 원리는 해악(bads) 또는 위난(danger)의 분배이다.

나아가 산업사회는 사회계급들로 구성되는 반면에 위험사회는 개인화한다. 하지만 위험사회는 아직, 그리고 동시에 산업사회라고 벡은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위험사회의 위험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과학과 함께 주로 산업이기 때문이다(Beck, 1986:21)

근대화는 구조적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사회적 행위자 사이에서 변화하는 관계와도 연루된다. 근대화가 어떤 수준에 이르면 행위자가 더 개인화하는, 즉 구조에 의해 점점 덜 제한받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근대화가 성공적으로 진척되기 위해서 행위자는 자신을 구조적 제한에서 풀어놓아야 하며 근대화 과정을 능동적으로 구체화해야 한다.(Beck, 1986:20)

단순 근대화와 성찰적 근대화는 시기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다섯가지 대조점과 특징군이 그 경계를 보여줄 수 있다.

 

첫째, 삶의 상태, 삶의 행동, 사회구조와 관련해서이다. 즉 대규모 집단범주와 계급이론은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개인화(혹은 심화) 이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둘째, ‘자동화된’ 행위영역의 기능적 분화라는 문제틀은 분화된 하위체계의 기능적 조화. 연줄망 형성, 융합(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의사소통 코드’)이라는 문제틀로 대체된다.

셋째, 선형적인 진보 모델(그리고 통제에 대한 격세유전적 신념),즉 영구적인 근대화로부터 도출된 진보에 대한 신념은 산업 근대화의(권력)중심에서 합리성의 기초와 합리화 형태가 자기수정, 위험자초, 자기해체를 경험할 것이라는, 복합적이고 다단계적인 논증으로 대체 되었다. 어떻게? 자동화된 근대화의 승리로 말미암아 통제할 수 없는(부)작용이 생김으로써 가능하다. 즉 불확실성이 귀환한 것이다.

넷째, 단순 근대화가 궁극적으로는 도구합리성(반성)범주에서 사회변혁의 동력을 찾는데 반해, ‘성찰적’근대화는 부작용(성찰성) 범주에서 사회변동의 원동력을 감지한다. 감지되지도, 반성되지도 않았지만 외부화된 어떤 것들이 산업사회와 위험사회를 구분하고, 그것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새로운’ 근대성을 분리시키는 구조적 단절을 낳는다.

다섯째, 좌파와 우파- 산업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정치적인 것을 정리하는 수단으로 확립되었던 공간적 메타포-를 넘어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이론적 갈등이 시작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잠정적인 단계이지만) 그것은 확실-불확실, 내부-외부, 정치적-비정치적이라는 이분법적 축을 따라 파악할 수 있다.(성찰적 근대화, 1998:253-254)

 

Ⅲ. 결 언

 

1.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대한 성찰

 

지난 30여년이 정치적으로는 권력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모두 결여한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시기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성장제일주의 하에서 노동자와 자연에 대한 무차별적인 착취가 자행되던 시기였다면, 1990년대의 한국사회는 여러모로 이전 시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1990년대는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어느 정도 정당성과 정통성을 회복한 권력을 중심으로 제도정치가 자리를 잡아가는 한편, 노동운동 및 다양한 사회운동의 발전에 힘입어 노동자와 자연에 대한 끝없는 착취에도 역시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리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거시적 변화를 반영하여 지성사적으로도 다양한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사회문제와 운동의 영역에서도 여러 가지 새로운 양상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환경오염의 문제와 환경운동의 활성화는 현재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대한 본격적인 사회과학적 연구는 이제야 비로소 시작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강력히 요구하는 세력과 과거에 여전히 집착하는 세력 간에 심한 불신과 갈등이 빚어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단절도 집착도 결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무언가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더욱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계간 환경과 생명 창간호. 1994. 홍성태)

만일 우리가 울리히 벡의 성찰적 근대화라는 명제에서 무언가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산업 사회의 원리 자체가 커다란 내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지금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선진국 지상주의가 우리 사회를 동물적 생존경쟁과 치밀한 폭력에 놓이게 한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선진화된 근대성에는 부의 사회적 불평등이 지닌 과학 기술적으로 생산된 새로운 위험들이 끊임없이 결합할 것이기에 우리의 미래는 암담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을 이용하거나 인류를 전통적 제약들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기술 경제적 발전 자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도 주의를 모아야 한다. 근대화는 우리를 신세계로 이끄는 해방의 신화가 아니다. 이제 근대화는 자기 자신을 주제로 삼고 있으며, 이 근대화 자체를 성찰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의 도처에 은폐되어 있는 위해와 위험을 발견하지도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