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요약 정리

 

Chapter1 추억 / 양정고2 이건영

 

문제제기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중산층은 풍요의 시대를 지냈다. 또 가난한 농부와 도시빈민들은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소득이 늘어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었고 이런 계층에 수적으로 밀렸던 기존의 부자들은 경제력이 약화되면서 당시 미국사회는 경제적 공동체 의식이 자리 잡았었다. 여기에 더불어 당시 미국은 정치적으로도 민주당과 공화당이 중도노선을 지키며 갈등 없는 상태가 유지되었다. 평온한 시기의 도래는 당시 학자들에겐 산업화의 과도기가 지나 성숙해지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 중산층사회가 무너져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정치는 진보와 보수의 극단으로 치달아 반목을 거듭해, 평온한 시대는 시간이 만들어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런 불평등한 변화는 정치적 양극화에 따라 움직였는데 특히 공화당이 우파 성향이 강해지면 소득격차가 확대되었다.

 

불평등에 대한 새로운 경제학

정치적 환경이 경제적 불평등을 결정한다는 이유는 다음 네 가지 예다. 첫째, 엄청난 물질주의와 정치부패가 일어났었던 도금시대에서 미국 중산층이 튼튼했던 전후시대로의 변화는 점진적이지 못했다. 이런 현상을 대압축(Great Compression)’이라 부르는데 이 현상은 루스벨트 행정부의 정책이었던 전시 임금통제를 통해 몇 년 안 되어서 일어났다. 따라서 이 예시는 제도와 규범, 정치적 환경이 소득분배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큼을 보여준다. 둘째, 1970년대 중반 우파가 공화당을 차지하면서부터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역사적 사례가 있다. 셋째, 평등을 장려하던 사회 규범과 제도가 침식되고 미국 정치의 보수회귀로 인해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넷째, 다른 선진국과 미국을 비교했을 때 미국이 경제적 불평등 확산 속도가 매우 빠른데 당시 미국보다 우파정치가 갑자기 정계를 지배한 곳은 없었다.

 

불평등의 정치학

반세기전 흑인들의 투표를 막는 남부 주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민주적 정부를 전복시킨 프랑코장군을 시작으로 미국의 보수주의가 시작됐고 보수주의는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아 정치뿐만 아니라 사람과 조직 모두를 묶은 거대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 네트워크의 충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보상받는다고 여겨져 현재 대다수의 정치가는 보수주의자이다. 이 네트워크는 불평등을 억제하는 경제정책을 없앨 것을 최대목적으로 삼고 이를 위해 대기업과 부호들은 재정적으로 보수주의운동을 하는 네트워크를 후원한다. 하지만 보수주의 운동은 이런 반민주적인 목표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문화와 성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고 공산정권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백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새로운 뉴딜정책

공화당은 테러를 이용해 2004년에 대선에 성공하며 보수주의 운동은 모든 권력을 잡았지만 정부를 이끌 능력이 없어 연줄과 부패로 얼룩진 행정부를 탄생시켰고 이라크전쟁, 카트리나 피해복구 등 거듭되는 부시 행정부의 실패는 보수주의 운동의 막이 서서히 내리게 하고 만다. 또 보수주의 운동이 약화되는 이유는 보수주의를 지지하던 백인들의 수가 감소하였고 설사 백인이라고 하더라도 진보적 태도를 갖는 수가 점점 늘고 있다. 결국 민주당이 2008년 대선에 집권 할 것이고 이념적으로 단결된 모습으로 민주당은 국가를 위해 의료조험제도를 시작으로 사회 안전망을 넓히고 불평등을 줄이는 진보주의적 제도를 추구해 새로운 뉴딜정책을 만들어 가야한다.

 

 

 

2< 길었던 도금시대 > 명덕외고2 김 현우

 

문제제기

부시집권기의 정치경제는 뉴딜정책이 시행되기 이전 시기인 도금시대와 매우 유사하다. 명목상으로는 민주정치 국가였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부유한 경제적 엘리트들이 정계를 장악한 공통점이 있다.

 

21세기 초의 미국처럼 뉴딜정책 이전의 미국에는 부와 권력 불평등이 만연했다. 부유한 경제적 엘리트들이 정계를 장악하고, 대다수 국민들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는 노력이 경제적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하는 보수주의의 주장을 비판없이 수용했다. 그 시대는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정치적 성향을 띠었으며, 삶의 질 면에서 불평등은 지금보다 더했다. 어쨌든 그 시대와 현재의 미국은 섬뜩할 정도로 유사하다.

 

구분

상위 10%의 고소득층

상위 1%의 고소득층

1920년대 평균

43.6%

17.3%

2005

44.3%

17.4%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전임 대통령들과 비교해서 금권정치가적인 색채가 훨씬 덜했다. 그는 FDA를 창설하고, 소득세를 부활시키고, 이들 법안에 관해 대법원이 이전처럼 위헌 판정을 내릴 수 없도록 헌법을 개정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들은 실질적인 소득이나 부의 불평등 또는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실시했던 최소한의 역할에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1920년대 미국은 19세기 후반보다 경제적으로 발전했지만, 불평등과 부유한 엘리트 집단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 그리 다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잇다. 이제부터는 재건시대(Reconstruction)가 끝난 1870년대부터 뉴딜정책이 등장한 1930년대까지를 하나로 묶어 길었던 도금시대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 시대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의 지속이다.

 

계속된 도금시대의 불평등

 

1900년 경 극에 달한 미국의 불평등은 192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극에 달한 불평등이 재즈시대(Jazz Age)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을 증명하는 첫 번째 증거다. 중산층이 중심이 되는 사회는 경제가 성숙해진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고, 정치적인 행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 사회를 탄생시키는 데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와 뉴딜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도금시대의 극심한 불평등은 지금도 마찬가지인 노동조합의 약한 입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조 가입률과 노조의 영향력은 1900년 이후부터 높아졌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최고조를 이뤘다. 그러나 고용주들의 반격으로 노동운동은 후퇴했다. 1924년 노동시장의 17%에 달했던 노조가입률이 1920년대 후반에는 현재와 비슷한 11%이하로 떨어졌다. 하지만 불평등이 심각했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발전의 수혜를 누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도시 노동자들은 도금시대를 통해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런 개선이 있다고 해서 실제 지속되었던 빈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920년대 말 미국 노동자들은 뼈저리게 가난했다. 왜냐하면 1930년대 이전에는 복지제도 또는 푸드스탬프제도(Food Stamp, 연방농무부가 관할하는 지원책으로서, 미국에 살고 있는 소득이 낮거나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를 의미한다) 등 소득 재분배에 관한 특별한 정부 정책이 없었고, 어떤 정부기관도 사회보장제도나 의료보험 등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정부기관의 규모도 아주 작아서 매우 큰 부자들을 제외하고 다른 국민들로부터 거둔 세금수입은 극히 미미했다. 예를 들어 1920년대 중반 1만 달러는 지금의 12만 달러와 같은데, 그 시대의 연간 1만 달러를 버는 사람은 소득 분포에서 상위 1%에 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소득세는 소득의 1%도 안 됐으니, 지금 12만 달러를 버는 사람들이 20%의 소득세를 내는 것을 감안하면 부자가 되기에 아주 좋은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반면에 현재 운영되는 소득지원제도는 미국 빈민 소득의 5분의 1을 충당한다. 따라서 아무 지원이 없었던 1920년대의 빈민들은 지금보다 훨씬 혹독한 가난을 겪었을 것이다.

 

금권정치

자유로운 노동자들을 위한 정당의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공화당은 1870년대 들어 대기업과 부자들을 위한 당으로 바뀌었고, 정치적 패권을 차지한 쪽은 주로 공화당이었다. 그런데 민주당의 주류 중 하나였던 이른바 버번 민주당은 공화당만큼이나 부유층의 권익을 지지했고 정부의 빈민 구호정책에 반대했다. 수적으로 보면 당연히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해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는 여론이 들끓을 만도 한데, 어떻게 해서 이런 보수주의자들이 미국을 오래 지배 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첫 째, 다수의 미국 노동자들, 이민자들, 흑인들에게 선거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선거자금의 격차였다. 공화당 후보의 선거자금은 민주당 후보의 자금의 몇 배에 달하기도 했다. 마지막 이유는 선거부정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윌리엄 마시 트위드는 선거 결과는 투표로 결정되지 않고 투표 집계원에 의해 결정된다라고까지 말했다.

 

인민주의의 문제점

1890년대 미국 국민들은 당시의 보수주의적 정부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지만, 민주당원이면서 인민당 후보로도 지명된 제닝스 브라이언은 결국 선거에서 패했다. 선거자금 부족과 부정선거도 한몫 했지만, 브라이언이 불만으로 가득한 미국인들을 효과적으로 단합시키지 못한 것도 큰 이유였다.

뉴딜정책으로 나중에 엄청난 혜택을 누리게 될 도금시대의 경제적 낙오자들은 세 가지 단층선을 따라 구분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도시와 지방의 차이였다. 인민당원들은 시골과 작은 마을 출신이었고, 도시민들과 접촉하는 방법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농민들만 뭉쳐서는 대통령을 당선시킬 수 없었다. 또한 1920년대 지방 농민과 이민자들 간의 상호몰이해는 금주법으로 더 악화되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난한 백인과 흑인 간의 분열이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길었던 도금시대에는 현재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문화적, 그리고 인종적인 분열이 극단적인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효과적인 정치적 도전의 등장을 방해했다. 도금시대와 현대의 차이는, 분열의 정도가 지금보다 과거에 더 심했다는 것이고, 동시에 경제적 불평등을 넘어서려는 비전을 갖춘 사람들이 정치 지도자들을 포함하더라고 극소수였다는 것이다.

 

보수적 지식인들의 지배

러시아 혁명 이후의 도금시대에는 분명히 현대보다 훨씬 더 많은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있었다. 혁명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지만, 보수주의자들을 자극해 개혁을 되돌릴 정도는 됐다. 9.11테러의 충격으로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미국사회처럼,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적색공포(Red Scare,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공포)는 자본자의를 철폐하지 않고 더 공정한 체제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평범한 진보주의자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이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예기치 못한 협박을 결과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기업 자유주의가 여전히 지배적이어서 민주당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1928년 선거에서 알 스미스가 패한 주요 이유는 편협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주등의 인민주의자들이 환멸을 느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스미스가 후보로 지명되자마자 당시 지배적이었던 경제이념에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선거유세를 지휘할 인물로 공화당 산업가였던 존J. 라스콥을 선택했는데, 그가 진보주의자들과 의견을 같이했던 부분은 금주법에 반대한다는 것뿐이었으며, 선거운동 최고의 요직에 4명의 백만장자들을 앉혔다. 사실 스미스는 버번 민주당으로서 대통령 후보에 오른 것이었다. 그는 초기 버번파처럼 자금력 면에서 경쟁력이 있었다. 그러나 특별한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던 스미스는 또 한 번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스미스는 보수주의 이면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민주당 지명을 받기 위한 헛된 노력을 하던 1932년 당시, 이미 그는 산업계의 대변자이자 변화와 개혁의 반대자가 되어있었다.

 

뉴딜정책의 기원

길었던 도금시대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했다. 그러나 대공황으로 모든 상황은 바뀌었고 뉴딜정책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공황이 있기 전부터 노동자보상제도, 노인연금법, 퇴직연금제도, 실업보험제도 등 연방 차원이 아니라 주에서부터, 좀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움직임이 이미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연반정부가 주정부와 비슷한 정책을 내놓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공황이 지속되었는지다. 하버트 후버는 전후 유럽에서 구호활동으로 유명해졌으나, 그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일반 가정에 도움을 주려는 어떤 시도도 강경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마침내 진정한 진보적 제도를 위한 정치적 의지와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 나타났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개혁을 일으킬 수 있는 적절한 인물이었고, 시기도 잘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리더십으로 미국의 사회 분위기는 더 나은 방향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내 생각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라는 말처럼 사회의 기득권층이 행사하는 권력은 이득이 사회에 골고루 퍼지기보다는 현상유지에 기여할 때가 많다. 도금시대 역시 보수주의의 덫에 걸린 미국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그토록 사회적 약자가 힘들었던 도금시대가 길어질 수 밖 이 없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약자들끼리의 단결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득권의 전략과 권력의 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강한 연대가 있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고용현장에서 부인할 수 없는 약자인 청년들 역시 도금시대의 노동자처럼 단결을 하는 모습보다는 기득권층의 이익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둥들이라 말할 수 있는 청년들이 보수주의의 덫에 걸리려 하는 우리사회를 넋 놓고 바라만 보는 모습이 매우 안타깝다.

 

 

3장 대공황시대 /한성고2 최승원

 

- 1953 시사주간지 <타임>은 앨빈 조세피를 시켜 미국의 분위기를 파악하도록 했다. 조 세피가 묘사한 미국은 1929년의 모습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1920년대가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고 다수의 사람들은 힘든 생활을 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1950년 미국은 완전히 바뀌었다. 부자들은 덜 잘 살고 중산층이 크게 성장 했다. 이러한 현상을 가르켜 대압착이라고 불렀다.

 

중산층 국가의 초상

- 1920년대의 비해 1950년대는 중산층의 시대였다. 부유층들의 구매력이 감소하고 중산층 의 구매력이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주거시설의 구조도 바뀌었고, 60%가 넘는 국민의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게되고, 1920년대에 부유층이 소유할 수만 있었던 자동차와 전화기도 50년대에는 70%이상의 국민들이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옷차림에서도 부유층과 중산층의 차이도 많이 줄게 되고, 더 이상 부유층들도 대저택에서 살고 하인을 거느리면서 살 여유를 누리지 못했다. 이러한 변화는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긍지를 심어주었다.

 

부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중산층의 성장과 미국사회에 평등의 원인을 시장의 기능으로 믿어 왔다. 이에 대해 사이먼 쿠즈네츠는 쿠즈네츠 곡선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말한다. ‘쿠즈네츠 곡선에 발전 초기단계에서 부유층에게는 투자기회가 많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이 억제된다. 그래서 자연히 소득격차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점점 자본이 풍부해지면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르고 기업의 수익이 적어지기 때문에 부의 분배가 중산층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제 이러한 변화가 해피 엔딩으로 끝날 줄 알았지만 1980년대 되어서 줄어든 소득격차가 다시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 많은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힘이 아니라 정치적인 힘의 균형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1920년대에 비해 1950년대의 미국은 엄청나게 많은 세금이 부과되었다. 이 때문에 부유층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할 수 없게 되고, 많은 세금을 국가에 납부했다.

 

육체노동자들의 황금기

- 대압착시대의 최대의 수혜자는 육체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육체노동자들의 성장에는 노동 조합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1920년대에는 노동조합이 고용주와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았지만 1930년대 되면서 노동조합이 부활을 했다. 여기에는 2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루즈벨트가 뉴딜정책을 시행하면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권리와 교섭권을 보장하기 시작하면서 노동조합이 부활 했다. 두 번째는 노조운동 자체의 내부 원동력 때문이다. 대공황 이후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면서 이에 대항해 노동조합을 결성 했다는 원인이다. 이 두 가지 원인중 어느 것이 설득력이 있는지는 확실 하지 않지만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유지하고 격차를 줄이는데 공헌하고 권리를 지키는 일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시의 임금

- 미국 정부는 전쟁지원 노력의 일환으로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거의 직접 통제했다. 1918년 월슨은 국가전시노동위원회를 조직해 노사분쟁을 중재하고, 노동자 편에 서서 단결권과 단체교섭관을 보장했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 이후 전시노동위원회는 폐지되고 정부는 다시 고용주의 편에 서는 전통적인 입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다시 전시노동위원회를 구성해서 노사 간의 분쟁 중재와 더불어 민간부문의 임금 상승률까지 통제 하게 되었고 결국 미국을 더 평등한 사회로 만드는데 그 권한을 이용했다.

 

평등과 전후의 경기호황

- 만약 민주당이 지금 대합착을 가져온 정책을 실행하자고하면 어떠한 변화가 생길까?

첫째, 이러한 정책이 불평등에 큰 영향을 줄지는 회의적이다 보통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거스르는 노력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정부가 강한 권한을 통해 정책을 시행한다해도 법령이 끝나게 되면 다시 임금 격차는 심해질 것이다. 둘째, 많은 세금을 부과하게 되면 기업들은 개인의 이윤 추구 동기가 말살 당하게 되고, 대량실업으로 이어지면서 생산성 향상을 저해하게 될 것이다.

 

 

CHPT.4 복지국가의 정치 / 명덕외고2 김동휘

 

미국은 1950~60년대에 들어서면서 2차대전의 종전을 기점으로 복지 정책을 펼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된다. 복지정책이 뒷받침 될 수 있는 풍토는 사회와 정치에서 골고루 나타났다. 30년대에 뉴딜 정책은 부유한 사회계층에 대한 공격으로 사람들에게는 아주 급진적인 제도로 간주되었다. 그렇지만 뉴딜 정책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사회적 제도는 50-60년대에는 보편적인 제도로 받아들여졌다. 한때는 가장 급진적이라고 생각되었던 뉴딜정책이 사람들에게 더 이상 급진적이지 않을뿐더러 꼭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급진주의에서 존중의 대상으로

일단 다수의 유권자들은 보편적으로 보수의 성향을 띤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정책에 있어서 큰 문제가 없는 한 새로운 혁신적인 정책은, 그 혁신적인 측면이 불러올 예기치 못한 결과 때문에 사람들에 의해 기피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러한 보편적 보수주의도 경제 대공황을 맞아 깨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의 정부를 엘리트 집단이자 경제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아는 유일한 집단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경제가 엄청난 침체기에 접어듦에 따라 정부는 무능한 집단으로 전락했고 보수 엘리트집단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완전히 무너졌다. 또한 경제에 대한 정부의 대대적인 간섭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확실해질수록 급진적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퍼졌다. 결국 뉴딜 정책은 사람들의 보수집단에 대한 불신과 시장실패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사람들에 의해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WPA등의 설치로 일찍이 시장의 정부개입이 야기할 것으로 우려되었던 정경유착의 비리가 없었던 것 그리고 2차 대전에 미국의 대한 자원을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것 또한 이 새로운 정부의 유능함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정치적 중심은 복지 정책의 중심인 서민 중심으로 옮겨갔고, 상대적으로 평등한 소득분배를 유지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정치판도가 바뀌었다.

 

-모든 국민에게 부여된 선거할 수 있는 권리

뉴딜정책과 같은 복지정책을 수용하는 풍토는 유권자의 구성원들의 변화에서도 기인한다. 20~30년대에 선거할 수 있었던 성인의 비율은 시민권을 얻지 못한 많은 흑인들과 이주민들을 제외한 80%정도에 불과 했지만, 이민자의 수를 제한하는 정책에 따라 상대적으로 빈곤한 이민자들의 수가 줄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전보다 적은 비율의 성인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이주민들의 대부분이 시민권을 획득함에 따라 성인전체에서 투표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의 비율은 3%정도로 줄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복지 정책을 지지할 수 있는 유권자 계층이 증가해 복지정책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남부의 역할

남부는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적인 곳이다. 예로부터 인종차별을 지지하며 농업이 그 생산의 대부분을 이루었던 곳이기도 했다. 현재 남부는 대표적인 레드 스테이트(대통령 선거에서 다수가 공화당을 지지하는 주)지만 50~60년대에는 그 성향이 달랐다. 즉 선거에서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이는 48년도의 대통령선거에서 대다수가 민주당을 지지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당이 진보당이기는 해도 암묵적으로는 남부의 짐크로우 법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경제적인 불균형 때문이었다. 남부가 대부분 농촌에 의존하기 때문에 북부나 다른 곳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크게 뒤쳐져있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뉴딜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남부는 많은 경제적 이득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실업보험과 같은 제도는 남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저임금노동자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즉 경제적으로 후진적이었던 남부는 뉴딜정책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 때문에 민주당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이득 볼 것만 보자는식의 심산은 민주당의 이념을 확장한 개혁들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경제적 이득을 안겨주더라도 그들의 보수주의에 반하는 인종차별을 없애는 정책들에 대해서는 남부는 여전히 심하게 반대했다.

 

-노동조합

일반적으로는 고소득층이 저소득층보다 정치의식이 높은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또한 선거의 결과가 개개인의 삶에 변화를 크게 주지 못하기 때문에 생계유지에 급급한 중간계급 이하의 사람들은 정치에 무관심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발달은 이들의 이러한 정치의식의 함양을 불러일으켰다. 노동조합은 민주당에게 선거자금의 공급원이었을 뿐 아니라 선거운동의 많은 부분을 도왔던, 민주당에게는 꼭 필요한 집단이었다. 이들의 규모는 매우 컸는데, 이들이 그들의 노조원들에게 투표를 하라고 강요한 것이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이들의 강요는 노조원뿐 아니라 노조원과 연결되어있는 그의 가족들이나 친척들 까지도 그 정치의식을 고취시켰다. 저소득층의 정치참여는 더 늘어났다. 노동조합이 바로 저소득층의 힘을 끌어내어 민주당의 지지율을 크게 상승시켰고, 저소득층에게도 정치의식을 함양시켜 그들의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만든 것이다.

 

살펴보았듯이 1950~60년대 미국의 정치경제는 소득평준화를 위한 경제정책을 추구하기에 훨씬 좋은 풍토였다. 복지국가라는 개념이 더 이상 급진적으로 취급되지 않았고, 유권자들 가운데 투표할 수 없었던 이민자들의 수가 크게 줄어서 많은 이민자들과 흑인들이 투표를 할 수 있었고 또한 보수적 성향의 남부도 그들의 보수적인 이념을 반하지 않는 한 복지정책에는 협조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은 저소득층의 정치의식을 고취시키고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해 민주당의 지지율을 올려놓았다.

 

-평등시대의 정당들

위에서 봤듯이 50~60년대에 미국에서는 정치경제에 있어서 큰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서 정치집단과 좌파지식인이라는 두 요인도 절대 간과할 수 없다. 정치집단은 주로 도시 이민자들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도시에서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곤경에 처한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60년대 까지는 민주당의 승리를 도왔다. 좌파 지식인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성공으로 뉴딜의 여세를 등에 업고 능력 있는 집단으로서의 신뢰와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좌파 지식인들이 항상 쓸모 있는 개혁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주로 좌파에서 나온다는 통념이 민주당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했다. 반면 공화당은 경제대공황 이후로 무능력과 부패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이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계속되는데, 아이젠하워가 당선되었던 이유는 그가 정치중심을 새롭게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의 공화당, 즉 부유한 계층만을 위해 존재하였던 공화당을 새롭게 바꾸었던 것이다. 공화당은 그 당의 전통적인 정치적 이념과 멀어진 것인데, 이를 살펴보려면 하워드 로젠탈의 연구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그는 연방의원들을 정치적으로 좌 우파 성향으로 나누어 체계화 시켰는데, 그들이 제시한 법안과 찬성/반대 하는 법안들의 성향을 모아서 분석하는 것이다. 그는 정치적 양극화를 조사하기 위해 이러한 체계를 만들었는데, 두가지 기준으로 그 지수를 측정했다. 첫째는 소수당 중복도로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했을때에는 가장 좌파적인 공화당보다 오른쪽에 있는 민주당의원의 수를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면 그 반대로 의원들의 수를 재었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얼마나 많은 의원들이 다른 당의 성향에 포함되는 가를 가늠하는 지수로 이 지수가 높으면 중복이 많이 되는 만큼 양극화가 덜 되었다는 뜻이다. 둘째는 다수당을 지지한 소수당원이다. 이는 좌우파간의 중앙값을 잡아서 민주당의 경우에는 중앙값보다 오른쪽에 있는 경우 공화당은 그 반대로 보아서 의원의 수를 세는 것인데, 그 지수가 높으면 위의 지수와 마찬가지로 한 당의 의원이 다른 당의 성향에 중복되기 때문에 그 지수가 높을수록 양극화가 덜하다고 볼 수 있다. 52~72년에는 복지국가가 초당적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소득수준과 당에 대한 선호도 간의 관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그만큼 당파간의 색깔도 옅었다.

 

정리해보자면 50~60년대의 시기에는 뉴딜 정책덕분에 양당의 의견 일치를 이끌어낸 정치 풍토가 정착되었고 사회보장제도와 실업보험은 절대적인 제도로 자리를 잡았는데 이는 모두 앞에서 말한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이 어우러진 결과이다. 강력한 노조도 자연스런 미국사회의 일부로 뿌리내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소득분배의 평등을 지향하는 풍토가 자연스럽게 사회 전반을 지배했던 시기였다.

 

 

 

CHAPTER 05 1960년대 : 혼란 속의 번영 /풍문여고2 주현서

 

1960년대는 최고의 시기이기도, 최악의 시기이기도 했다. 모든 국민들을 위한 일자리가 있는 듯 했고 임금도 높았다. 이로 인해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사회가 평등해졌기 때문에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졌고 경제적으로도 안정했다. 하지만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71%나 되었다. 이것은 꾸준한 경제발전이 가져다 준 만족감보다 미국 사회가 붕괴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훨씬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1966, 공화당에게 의회의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민권운동과 남부의 이탈

트루먼과 많은 민주당원들은 흑인 유권자 표를 확보하면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고, 미국이 흑인을 격리하고 차별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민권에 대한 압력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백인들이 많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많은 미국인들이 인종분리주의라는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골적 분리주의자들도, 분리정책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회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계속되는 민권운동과 그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과 도시의 소요사태가 맞물려 민권운동의 발전에 대한 저항이 합리화되고 거세지고 말았다.

 

도시의 소요사태

인구 구성이 변했고, 도심의 일자리가 줄어 파괴적인 사회분위기가 조장되었고, 범죄율은 급증했다. 범죄율 급증은 사람들에게 법과 질서가 무너지는 광경을 보여주었고, 이것에 대한 염려와 도시 폭동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사회학자들은 폭동이 흑인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일어날 경향이 높음을 밝혀냈다. , 시민소요대책위원회의 보고서는 도시 폭동의 궁극적 원인은 백인들의 인종차별이지만, 민권운동으로 조성된 기대감도 한 몫 한다는 뜻을 보였다. 이는 보수주의 진영에 유리한 내용이었고, 실제로 닉슨은 이 보고서 덕을 톡톡히 봤다.

 

사회복지관련 지출의 폭증

1966년 레이건은 쓸모없는 복지정책에 신물 난 백인 유권자들의 뜻을 전달하는 대표적 인물이었다. 사회복지제도의 수혜자 명단은 2배로 늘어났고, 이 대상자들은 대부분 흑인이었다. 주요 언론은 사회복지관련 지출이 폭증한 이유로 태도의 변화를 꼽았다. 빈곤층이 복지신청을 하는 것, 실업수당을 요구하는 것을 더 이상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섹스와 마약, 그리고 로큰롤

마법 같은 경제(먹고 사는 것이 어렵지 않았음), 풍요에 길들여진 세대가 이전 세대의 성과를 무시하는 풍조, 인구 변화로 인한 문화·가치관 변화, 기술 발전이 대항문화를 만들어냈다. 레이건과 몇몇 사람들은 청년들의 대항문화운동에 실망감을 드러냈지만, 다수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광범해진 문화충돌이 아닌 베트남전 반대시위였다.

 

베트남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사회의 의견은 크게 양분되었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위해 베트남전을 이용하고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자는 주장을 반대한 닉슨과는 반대로 대부분 국민들은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크게 확산된 반전운동은, 징병제가 폐지되고 베트남 미군 대부분이 철수하면서 크게 잦아들었다. 베트남전으로 민주당은 국가안보문제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때문에 민주당이 무너졌다는 잘못된 믿음이 지금까지도 존재하는데, 실제로는 거의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가 남긴 것

1960년대는 히피, 운동권 학생, 강경탄압주의자, 전쟁, 반전주의자들의 시대였지만 정치경제 변화에 아주 조금 직접적 영향을 끼칠 뿐이었고, 장기적으로 정말 중요한 사건은 인종문제로 뉴딜연합이 와해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정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뉴딜정책의 성과를 되돌리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이 대선에서도 승리하게 되었다.

 

 

 

Chapter 06 보수주의 운동 / 여의도여고2 주희진

 

문제제기

아이젠하워가 한층 온건해지고 현대적공화주의의 미덕을 설교하는 동안에도 새로운 보수주의는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매킨리 같은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새로운 보수주의자라고 알려진 이들은 젋고, 무모하며, 언론을 잘 다루었고 초창기부터 자금이 풍부했다. , 그들은 스스로 기준의 틀에 도정하는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새로운 보수주의가 미국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정당의 주도권을 잡고 선거에서 이겨야 했다.

 

대중적인 기반 마련하기

1964년 보수주의자들의 연대는 공화당 전당대회의 주도권을 잡고 골드워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골드워터는 굴욕적인 패배를 맛봤다. 보수주의 운동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세력기반을 넓혀야 했고 레이건이 이에 앞장섰다. 레이건은 가망 없는 골드워터의 선거유세를 위해서 TV에서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은 큰 정부라는 악에 대항해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기보다는 통계자료와 일화들로 국민들을 선동하려 했다. 비록 그의 연설이 훌륭한 연설은 아니었지만,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 레이건은 작은 정부연설을 통해 인종차별 주의자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고서도 백인들의 반발을 이용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를 이용하여 대중적인 기반을 확보했다.

 

경제제계에서 기반 구축하기

1950년대 미국은 노조가 강력하고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국가였다. 노조는 남부 이외 지역에서 민주당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중추역할도 했다. 노조의 정치 및 경제적 정당성에 관한 문제는 1930~1940년대에 절대적인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승리는 두 가지 면에서 불완전했다. 첫 번째 문제는 의료보험에 대한 보장이 없었다. 두 번째 문제는 노조가입률은 높았지만 지역 간 차이가 크다는 것이었다. 많은 지역은 여전히 노조를 적대시했으며, 반노동조합주의 정치인들의 텃밭으로 남아 있었다.

 

보수적 지식인 규합하기

보수주의 운동이 대중의 지지기반과 경제계의 견고한 지지를 얻게 되면서 지식인 계층의 지지도 확보하게 되었다. 보수주의 운동의 지식계층은 새로운 보수주의가 신보수주의라는 상당히 다른 성격의 집단과 합류하면서 틀이 잡혔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사이, 신보수주의 지식인들은 보수주의 이념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투자하도록 부유층과 기업가들을 설득했다. 뿐만 아니라 보수주의 지지기반에는 언론사들도 있었다. , 신보수주의자들은 재단이나 기업들의 자금을 끌어오기 위해 보수주의 이념을 희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닉슨과 대전환

레이건의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유세는 최초로 보수주의 운동진영에 큰 성공을 안겨주었다. 레이건의 성과는 닉슨의 대통령 당선과 1972년 재선에서의 압승에 가려졌다. 그러나 닉슨의 성공을 보수주의 운동의 승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는 보수주의 운동의 정치적 전략을 상당 부분 고안했지만 보수주의 운동과 목표를 공유하지는 않았다. 닉슨은 국내 문제를 온전한 보수파, 심지어 진보주의자들처럼 처리하여 세금을 올리고, 환경에 관한 규제를 늘렸으며, 국민의료보험을 도입하려고까지 했다. 대외 문제에서도 똑같이 실용주의 노선을 선택해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 대화를 시도하면서도 중국과 동맹관계에 있던 북베트남을 상대로 싸웠다.

1970년대 중반, 국외에서는 베트남 붕괴 이후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당시로서는 공산주의가 성공하는 듯했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이어졌으며,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인질구출작전 실패로 미국이 자존심을 구기는 사건이 있었다. 거기에 국내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러한 국내외의 위기를 사용하여, 보수주의 운동은 진보주의의 정책이 모든 문제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면서 더 강력해지게 된다.

 

 

chapter 7 심각한 불균형 /명덕외고2 고범석

 

미국인들은 1인당 평균소득이 상당히 증가하고 1인이 1시간 마다 생산하는 상품의 가치가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생활수준에 오히려 감퇴가 있었다. 즉 미국인들은 예전과 같은 삶의 질을 유지하려면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생산성 향상이 소수에게만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소득은 상류층 위주로 배분 되었고 실제로 상위 10%의 소득 증가율은 평균보다 높고, 하위 10%의 그것은 평균보다 낮다. 이때 일반부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슈퍼 부자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은 그 상위 10%중에서도 훨씬 많은 소득증가를 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이유로는 2가지 주장이 있다.

 

소득 불균형이 심해진 것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숙련된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는 점이다. 즉 단순노동자보다 숙련된 기술공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이들의 월급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대로라면 고학력자와 저학력자의 임금차이는 설명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직종에 따라 소득격차가 벌어지는 경우를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소득이 증가한 사람들은 고학력자이지만 그들 중에서 거액을 받는 소수그룹에게만 소득이 분배되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다. 결국 위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고 규범상에서 일어난 변화로 인해 소득불평등이 생겼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존재했던 사회규범들이 사라지면서 불균형이 도금시대 수준으로 심화되었다는 주장은 다른 선진국들과의 비교를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 만약 숙련된 기술공들에 대한 수요가 증가가 소득불균형의 원인이라면 다른 유럽 선진국들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견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본과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노조가 강력한 힘을 유지하고 있고 소득불평등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회규범들에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우선적으로는 CEO들의 연봉변화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30년대 CEO들의 연봉은 당시 미국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40배 더 많았다. 반면 2000년대 초 CEO들의 연봉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보다 367배 더 많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이유로 2가지 사회규범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예전에는 최고경영인이 너무 많은 연봉을 받으면 조직의 단합을 약화시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겼던 반면, 지금은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 소득세 최고한계세율이 70%에서 35%로 줄어서 CEO들에게 더 유리하게 되었다. 더 많은 소득의 일부를 세금으로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노조를 들 수 있다. 한때 노조는 소득 불균형을 제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기업과 관련 이해집단들이 노조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노조를 지지하는 사람들 20명중 1명은 불법적으로 해고당했다. 이런 분위기는 보수주의 운동의 지지 속에서 이루어 졌는데 보수주의가 힘을 얻게 된 배경은 8장에서 설명되어 있다.

 

 

CHAPTER8. 불평등의 정치 /신목고 2 엄채윤

 

당파성의 회복

- 1960년대, 그리고 1970년대까지 미국에서의 양당은 여러면에서 구분하기 어려웠다. 양당의 당원들은 주요 입법안을 처리한 때에 자신이 속한 당의 노선과 반대되는 안을 지지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는 지금과는 다른 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러한 시대이후, 정치계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가는 '부유층을 겨냥한 세금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화당이었던 레이건은 임기 초반에 개인소득세와 법인세에 대한 세율을 대폭 인하했다. 이런 세제개혁은 이전에 높은 소득세율을 부담해야했던 고소득층 가구에게만 혜택이 편중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반대로 민주당 소속이었던 클린턴은 최고 소득층에 적용되는 소득세율을 높여 레이건인 행한 조세감면의 주요 수혜자들이었던 경제적 엘리트 그룹에게 타격을 주었다. 이후 레이건과 같은 공화당의 부시는 일차적으로 최고소득세율을 대폭 인하하고 양도세를 없애고 후에 배당금과 자본이득에 대한 세금을 인하하여 고소득층에 주로 혜택이 돌아가게하였다. 세제정책에대한 위와같은 예를 통해 양당이 다르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화당은 부유층의 세금을 인하하고 정부의 혜택을 줄이며 복지국가정책을 없애려고 하지만 민주당은 부유층의 세금을 인상하고 정부의 혜택을 확대하여 복지 국가정책을 강화하려한다.

 

급진적으로 변모한 공화당

- 닉슨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 공화당의 성격은 급격히 바뀌었다. 보수주의 운동이 공화당을 장악하였기 때문이었다. 레이건 정권에서는 사회보장제도를 '불필요한 사회주의 제도'로 간주하였고 세금 감면은 궁극적으로 세입을 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공급중시 경제이론 지지자들이 요직을 맡았다. 또한 환경보호국의 예산을 삭감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레이건의 정책 이후 공화당은 텍사스 공화당 강령을 통해 더 극단주의로 빠져들게 되었고 더나아가 상속세 폐지 운동을 펼치기도 하여 급격히 극단적 보수주의적 모습으로 변하였다. 현대의 공화당은 강경우파가 장악했고 이들의 과격한 노선에 대응할 만한 세력이 민주당에 없기 때문에 강경우파의 공화당 장악이 지금 양당이 심각한 양극화를 겪는 원인이 되었다.

 

거대한 음모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의 권력과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서 전략적으로 싱크탱크를 운영한다. 이 싱크탱크를 통해 보수주의자들은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후원금을 지원받는데 이 후원금을 받기 위해서 보수주의자들은 기업들이 원하는 정치적 목표를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와 부합시킨다. 이렇게 유지되는 싱크탱크를 통해서, 그들의 목표를 지지하는 공화당원들을 지지하고 그렇지 않은 당원들은 철저히 배재하여 공화당을 극단적 보수주의적 성격의 당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보수주의 운동의 성장요인

- 공화당이 우경화되고 보수주의 운동이 공화당을 지배하게 되면서 양당의 대립은 더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의문은 '공화당을 지배한 보수주의 운동가들이 어떻게 성장 했는가'이다. 보수주의자들이 공화당원들에게 정부는 문제이지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라는 보수주의 운동가 당사자들의 견해와, 경제적 불균형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기계적 견해가 있다. 이 두가지의 견해 모두 일부 타당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 밖에 다른 무엇인가가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보수주의 운동가들은 극우적 견해를 쓸모없는 불평이나 하면서 낭비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길 수 있는 전략으로 바꾸어 보수주의 운동을 지원하는 조직들을 만들 막대한 자금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거대한 극우 보수주의의 음모'이다.

 

 

Chapter 9 거대한 착란을 일으키는 무기 / 여의도여고2 박하연

 

문제제기

앞서 8장에서 보수주의운동의 성장과 그들의 음모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이렇게 보수주의자들의 음모에 의해서 불평등이 커지면 그에 따라 국민들이 복지정책을 옹호해야 하지만 오히려 공화당은 계속되는 지지를 얻고 있으며, 복지정책을 줄이고 세금을 내리는 정책들이 선거에서 이기고 있다. 그 이유를 알아보는 것이 9장에서 다룰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복지국가는 두 가지의 큰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사회보장의 기능이고, 나머지는 소득재분배의 기능이다. 이러한 특징은 미국의 메디케어나 푸드스탬프 제도에서 잘 나타나 있다. (Medicare: 연방정부가 제공하는 65세 이상을 위한 의료보험 )( Foodstamp: 연방정부가 저소득층의 식품 구입을 돕기 위해 만든 보조금 제도)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불평등해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좌경화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실제로 국민여론조사결과로 공화당은 극우화되고 있지만 국민은 약간 좌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공화당은 선거에서 계속 승리하고 있다. 공화당이 이렇게 승리를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마음 속의 캔자스

복지를 해체하고 세금을 줄이자는 의견은 일반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힘들다. 하지만 토머스 프랭크가 언급한 바와 같이 후보들의 연설에 의해 유권자들이 쉽게 그들의 말에 현혹되기도 한다. 보수주의 운동가들은 감정적 문제에 호소하고, 위선적인 우선순위를 설정하여 노동자계층의 유권자들을 속인다. 따라서 이제부터 이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정책과 관련 없는 문제들을 끌어다가 유권자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는지 알아보겠다.

 

필라델피아

공화당이 미국에서 큰 힘을 가지게 된 계기에는 인종문제의 역할이 크다. 인종구성과 정책사이에는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남부지역에는 대체로 흑인인구가 많고 흑인인구가 많으면 사회복지비 지출은 줄어든다. 이것은 그들의 소득수준이 대체로 낮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 예로 메사추세츠 주와 버지니아주를 비교해보자. 두 주 모두 소득수준이 비슷하지만 메사추세츠주는 진보적인 지역이고 버지니아주는 보수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이유는 남부지역일수록, 흑인이 어 많을수록 더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남부지역 정치인들이 항상 보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뉴딜연합에 가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남부백인과 민주당원사이의 결합은 깨어지게 된다. 결국, 1980년 선거에서 민주당은 민권과 인종차별을 앞세웠지만 레이건은 인종차별주의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승리했다. 이러한 남부민심의 변화는 보수주의 운동이 성공을 거두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화당이 남부지방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 인종문제를 교묘히 이용하고, 이에 남부백인들이 일제히 공화당 쪽으로 기운 것이다.

 

악의 제국들과 악당들

보수주의자들은 9.11테러를 이용하여 공화당이 국가안보에 강하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선거에서 이기는데 도움을 받았다. 특히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패하면서 민주당이 안보적인 면에서 무능하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닌 오히려 조작된 이야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패배를 인정하기 어려웠던 미국인들은 민주당이 군대를 막지만 않았어도 이겼을 것이라고 막연히 믿었고, 또 이에 따라 람보 영화들이 등장하면서 미국사회는 호전적인 분위기에 젖었다. 이것은 보수주의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보수주의자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 그리고 베트남전의 후유증으로부터 회복하려는 국민들의 염원과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레이건이 소련연방을 악이 제국이라고 묘사하고 공화당이 국가안보의 수호자라고 묘사했을 때, 국민들은 이것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9.11사건 이후 이런 공화당이 국가안보 면에서 강하다는 인식은 강한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이때 부시는 9.11테러의 악당들을 잡아들이겠다는 약속으로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국가 안보문제의 이용은 어디까지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부시는 지지율을 높이고 여론의 관심을 돌리는 한 방법으로 이라크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라크전은 군대동원, 세금인상, 부당이득 단속 등 보수주의의 방향과 상충되는 부분이 많았고, 보수주의 내부의 부패와 경직됨으로 인해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국가안보적인 문제가 보수주의 운동이 선거에서 승리하는데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도덕적 소수

보수주의자들은 종교적 도덕적 가치를 피력하여 가치관에 의거하여 투표하는 유권자들을 그들의 반대중적인 경제정책 추구에 동원하였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공화당에 보수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법무부의 요직들은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조직적으로 탄탄하기 때문에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행사한다. 따라서 1992년 이후부터 공화당이 큰 지지를 얻게 된 이유로 기독교인이 많은 남부의 민심변화와 독실한 남부지역 외의 종교적 유권자들의 지지를 동원하면서 판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투표권을 거부당한 노동자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시민에 비하여 투표할 확률이 적고, 미국의 저소득층중 많은 사람들이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부유한 소수에게만 혜택을 주고 다수에게 손해를 입히는 정책이라도 유권자의 구성을 보면 반드시 부결되지 않을 수 있다. 한 가지 예로, 세금 감면 정책은 고소득자에게는 큰 영향이 없지만 소득이 75000달러 이하인 저소득층인 사람들에게는 큰 손실이 된다. 정부가 주는 혜택이 그만큼 줄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전체인구의 75%를 차지한다. 따라서 세금 감면정책은 인기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유권자 중에 연봉이 5만 달러 이하인 사람은 40%미만이다. 세금감면정책이 부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저소득 이민 노동자들에게는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이것은 저소득층 유권자의 비율을 줄임으로서 보수주의 운동에 도움을 주었다.

 

투표를 막아라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의 정치전략이 성공을 거두게 하기 위해서 선거를 둘러싸고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다. 보수주의자들은 민주당에 투표할 유권자, 그중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합법척 투표를 막는 등 투표를 방해전략을 일관적으로 추구해 왔다. 그 예로 무고한 흑인들을 중죄인이라고 하며 선거인 명단에서 제외시킨 유권자들의 대량숙청사건과, 2005년 조지아의 유권자 확인법이 있다. 보수주의는 투표방해를 보수주의운동의 정치전략 중 하나로 삼앗다. 심지어 이것을 넘어서 보수주의는 투표조작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착란의 한계

앞서 보수주의가 선거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들이 나왔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은 인종간의 분열을 이용한 것이다. 종교나 도덕적 가치, 투표방해공작 보다 백인들의 다른 인종에 대한 반발심을 이용하는 것이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제 보수주의가 사용한 여러 가지 방법들의 효과가 미미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제 새롭게 불평등의 정치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10- 새로운 평등의 정치 / 프랑스국제학교 백주은

 

많은 이들의 예견을 깨고 2006년 중산선거에서 민주당은 승리를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미국이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로 변화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불평등의 현주소

GDP가 거의 6년 내내 오르고 실업률이 사상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는 2007년 미국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국이 나가가고 있는 방향성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일해도 돈을 모으기 힘들어 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미국 전체적인 경제성장이 일반적인 미국 국민의 재산과 연계가 단절된 것은 처음이다. 길었던 도금시대에도 경제성장에 따라 생활수준도 꾸준히 개선됨을 많은 노동자들이 느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미국 전체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소수가 막대한 양을 벌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수 엘리트만의 소득이 높아지면서 GDP가 성장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없다. 이렇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커져가는 소득 불균형에 대해 정부가 조치를 취해 모든 국민들이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방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라크와 국가안보에 대한 새로운 정치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를 국민들에게 국가안보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고 이것을 이용해 많은 지지율을 얻었다. 민중의 전쟁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은 국내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오랫동안 끼쳤다. 대량살상무기를 찾는데 실패하고 미군 사상자가 늘어나도 여론조사에서 이라크 침공은 실수라고 미국 국민 대다수가 대답하기 까지 2년이나 걸렸다.

전쟁은 보통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상승하게 만들면서 소득 불균형이 줄어든다. 하지만 부시정부는 전쟁을 이용해 소득 불균형을 확대하려는 정치를, 군사 전문가의 경고를 무시하며, 도입 시도 했다. 그리고 보수주의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는 미숙한 업체들과의 계약도 실폐의 원인이다. 이렇게 이라크 전쟁의 실패는 우연이 아니다. 지금 미국인들은 이라크 전쟁에 신물이 나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라크전쟁에서 교훈을 얻은 국민들이라면 보수주의 운동가들은 사실 미국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이번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라크 전쟁의 실패는 공화당의 큰 타격을 입히고 마이너스로 작용된다.

 

-인종문제가 점점 효력을 잃고 있을까?

미국 내 백인수는 줄어들고 있고 또 백인들 중에서도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많이 줄어들고 있으므로 인종문제가 점점 효력을 잃고 있다. 원래 이론적으로는 이민자들이 늘면 저소득 노동자들의 참정권 행사를 막아 정치 세력이 오른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미국내 새로운 이민자들은 백인이 아니거나 미국에서 태어난 백인이 보기에는 백인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인종문제를 둘러싼 정치와 상호작용을 일으켜 오랫동안 공화당의 강력한 무기를 빼앗은 것이다. 게다가 보수세력을 도와주는 기업들도 싼 노동력 때문에 이민자들을 옹호한다. 인종차별주의 의 쇠퇴가 곧 정치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진보주의에게는 기회이고 또한 다른 서방국가들과 복지정책이 비슷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친다.

 

-캔자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희망

현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이 바뀌고 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미국국민들은 편협한 생각에서 좀 더 관대해지고 있다. 미국 구민들이 점점 너그러워질수록 편협함에 기반을 둔 공화당과 국민들 간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러한 변화의 사례가 캔자스 주에 일어났다. 보수 기독교인들의 캔자스 주 공화당에 대한 지배에 화가 난 몇 공화당원들이 2004년 선거 이후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로 당을 바꾸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해답을 찾아서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역사상 가장 좋은 기회를 가지고 있다. 미국인들의 사고가 전체적으로 너그러워지고 있어, 편협함에 기반을 둔 공화당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기회를 얻었다고 해서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민주당은 미국의 가장 문제이자 강력한 해결방법인 전 국민 의료보험 정책을 이뤄내야 한다.

 

 

Chapter 11. 필수적인 의료보험제도- 백신고2 박주연

 

현재 미국의 의료제도는 정부가 아닌 민간 보험회사가 대부분을 부담하는 제도이다. 정치인들 중 보수주의자들은 정부가 불행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국민의 혈세를 쓰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반발을 고려해 국민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할 경우 비용이 많이 든다거나 이미 혜택을 받고 있는 이들도 곧 수준 떨어지는 진료를 받을 수도 있다는 근거들을 댄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은 소득과 상관없이 의료보험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또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다른 선진국들을 보면 현재 미국의 의료보험제도는 도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현재 의료체계보다 더 공정해질 수 있다. 미국 국민들이 이 문제를 더 주목하게 된 이유도 현재의 의료제도가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순위는 37!

선진국 중에서 미국은 정부에서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나라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3인 민간 보험 회사가 그 역할을 맡으며 미국 국민들 대다수도 민간부문에 의존한다. 미국의 의료비용과 기대수명을 정부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다른 서방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일인당 지출 비용은 최고지만 기대수명은 가장 짧다. 이로써 민간부문이 공공부문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통설이 틀렸지만 일부 정치인이나 경제학자들은 이를 부정한다. 특히 미국인의 생활방식이 의료서비스 비용을 높이는 데에 얼마나 기여 했는가는 심각한 문제이다.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 국민들에 비해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 생활을 하지만 발생률이 높은 질병종류가 달라서 생길 수 있는 비용의 차이는 미국이 매년 의료서비스에 지출하는 비용에 극히 미미한 돈을 추가하는 정도다. 곧 미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의료에 대한 지출을 더 많이 한다고 해서 이것이 더 나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미국이 비효율적인 의료서비스를 갖게 된 것은 그 제도가 진료보다 진료 거부에 많은 돈을 들이기 때문이다.

 

*의료경제학 입문

미국인들 사이에서 기본적인 진료는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어있다. 그러나 민간보험회사는 되도록 의료비를 지불하지 않고 보험료만 거두며 수익을 내려한다. 그래서 의료서비스제공에 대한 지급의무가 생기면의료손실이라고 표기하며 위험선별언더라이팅’-보험 상품을 팔기 전 고객의 위험을 분석하는 것-을 통해 가입신청자에게 평균보다 비싼 의료비가 들 것 같으면 보험을 팔지 않는다. 이 과정을 통과했더라도 보험사들은 어떻게든 의료비 지급을 거부할 명목을 찾아낸다. 의료보험제도 구조상 어쩔 수 없지만 이런 행동은 여러 가지 영향을 가져왔다. 예를 들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들과 병원들은 의료비를 받기 위해 보험사와 맞서는데 많은 비용을 쓰고 있고 그런 단체도 있다. 또한 보험사의 이익을 위해 보험사는 이익을 위해 예방적인 의료서비스 비용을 지급하려하지 않는다. 이렇게 문제점 많아 보이는 제도지만 국민의 85%는 의료보험에 가입되어있고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는다. 미국에서도 정부가 의료서비스 제공에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미국인 대다수가 직장을 통해 민간보험회사의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직장의료보험은 오랫동안 의료보험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러나 이제 이마저도 무너지고 있다.

*천천히 다가오는 위기

대안으로 자리 잡아 온 직장의료보험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보험료가 인상되어 직장의료보험을 제공하는 회사가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험료가 오르는 것은 의료기술의 발전 때문인데 보험회사는 늘어난 치료비를 지급하고 동시에 보험료를 인상한 것이다. 의료비의 상승은 계속 있어왔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의료제도의 개혁을 강력히 요구하는 운동으로 이어지며 클린턴도 이 공약을 실천하려 했지만 결국 둘 다 실패했다.

 

*의료제도 개혁 최대의 걸림돌

클린턴의 개혁 실패 원인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먼저 옛날부터 계속 개혁을 방해해 온 장애물들이고 1993년에만 있었던 특별한 사정 그리고 다시 되풀이되지 말아야하는 실수들이다. 우선 보수주의 운동의 강경한 반대는 줄곧 개혁을 방해했다. 그들은 이 개혁안이 연방정부의 전례 없는 개입을 가져올 것이며 중앙집권적인 복지국가 정책이 다시 나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걱정했다. 보수주의 운동에서 가장 위험한 정부 정책은 복지국가가 국민의 인정을 받게 되도록 만드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보험업계의 반발이 클 것이다. 예전의 해리와 루이스광고(클린턴의 의료개혁안이 가져올 폐해에 대해 절망한다는 내용)같이 국민들을 개혁안이 실행될 때 의료선택권이 사라진다고 믿게 하여 불안하게 했다. 의료제도 개혁안의 성공을 위해서는 보험업계의 관리비 즉 규모를 줄이도록 하는 것과 같다. 당연히 호응을 얻을 수 없다. 제약업계도 반대할 것이다. 미국의 진료비가 비싼 이유 중 하나가 처방의약품이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비싼 값에 들어가기 때문인데 국민의료보험제도가 실행되면 가격인하를 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종합해 보면, 1990년대 초반 의료제도 개혁에 반대하던 주요 집단들은 여전히 거세게 반발할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그때와 달리 오늘날은 개혁에 대한 압력이 높아졌다는 여론이 우세하여 예전같이 단순한 이유로 중단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다.

 

*2008년은 1993년과는 다르다.

1990년대 초 빌 클린턴이 당선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미국의 경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용 없는 경기회복으로 넘어가자 국민들은 직장을 잃어서 의료보험까지 잃어버렸기 때문에 의료제도의 위기가 특히 심각한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의료제도 개혁론자들의 딜레마가 경제가 좋아지면 의료보험을 둘러싼 형편도 개선된다 는 것처럼 1994년부터 새로운 직장을 얻은 사람들이 다시 의료보험에 가입하게 되면서 당시 의료제도에 대한 만족이 올라갔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다시 맞게 된 경기불황과 고용 없는 경기회복에서 의료보험제도는 더 악화되었고 그에 대한 일시적인 개선도 없었다. 1990년대 중반은 HMO(건강관리의료단체)의 황금기였다. 보험회사가 정해진 의료행위에 대해 의사에게 진료비를 지급하는 제도인 각 진료별 지불(fee-for-service)이 성행했다. 이 형태는 원래 HMO 조직안의 의사들이 비용을 고려해 예측 가능한 의료수익을 위해서 비싼 의료행위를 포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체계적으로 기틀이 잡힌 사회화된 의료서비스인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는 예산이 정해져있어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쓰여 진다. 그에 비해 HMO는 민간인이 경영하는 조직으로 1990년대 비용절감효과와 경기호황의 시너지 효과를 통해 의료보험제도가 잠깐이나마 크게 향상되어 보이는 것처럼 했지만 지속적으로 비용을 절감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사람들이 HMO를 믿지 않고 NHS와 달리 HMO는 민간회사로써 자신들의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주목적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진료제한을 그리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요소들까지 겹쳐 보험업계는 비용 줄이기 시도를 못하게 되었고 의료비는 다시 치솟으며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직장도 다시 줄어들었다.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할 실수들

클린턴이 저지른 실수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보면 그가 개혁안을 너무 늦게 추진했고 그 개혁안이 나왔을 때는 그것이 국민들의 의료선택권을 박탈 하는듯한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클린턴이 지체하는 바람에 개혁안을 내놓으려던 1993년 가을에는 클린턴을 당선시켰던 정치적 추진력이 사라져 있었고 사소한 문제들과 스캔들로 난항을 겪고 있었다. 더구나 경기 회복 기간이라 의료제도 개혁에 대한 요구가 줄어들 시기였다.

개혁안은 비싸지만 치료가능성이 희박한 의료비 지출을 제한하여 비용절감효과를 내는 관리의료 지향을 토대로 해서 국민에게 의료보험을 보장하는 한편 모두를 관리된 경쟁이라고 할 수 있는 HMO에 가입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개혁안 반대론자들은 관리의료라는 면을 이용해 해리와 루이스 광고로 국민들에게정부는 관료들이 고안한 몇 안 되는 의료보험제도를 국민에게 강요할 수도 있다는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이런 실수들이 없도록 적극적으로 개혁을 주도해야 하며 따라서 진보적인 대통령과 의회가 정당을 잡으면 국민의료보험제도의 주요 구성요소에 대해 충분히 검토해 결론을 도출해 놓아야만 한다. 또한 새로운 개혁안이 국민들에게 선택권이 있고 좋은 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을 수준 낮은 보험에 가입시키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의료제도 개혁으로 가는 길

WHO가 세계 제일의 제도라고 인정한 프랑스의 국민의료보험제도는 메디케어의 확장 형태와 비슷할 것이며 메디케어가 전 국민에게 확장된다면 비용도 현재의 제도보다 적게 들 것이고 보험 미가입자들의 문제를 종식시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단일지불제도(single-payer-system)전 국민을 위한 메디케어실시를 가로막는 몇 가지의 정치적 장애물이 있다. 가장 흔한 것은 단일지불제도의 숙적인 보험업계와 제약업계의 반발로써 이를 막기는 힘들다. 그러나 세금 인상의 필요성 그리고 선택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국민들의 두려움이라는 두 개의 장애물을 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세금의 경우 메디케어를 위해 필요한 세금이 늘어나 더 많이 내야 한다고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을 매우 어려운 일일뿐더러 개혁 반대론자들의 온갖 방법을 동원한 반대 캠페인까지 있다. 환자들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도 자동적으로 국민이 가입하게 되는 정부보험제도는 국민의 선택권을 박탈한다고 보일 수도 있을 것이고 개혁 반대론자들도 물고 늘어질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경제적 효율성과 정치적 현실성을 고려하여 실행 가능한 절충안이 도출되었다. 지역사회 등급 평가, 저소득층 가정을 위한 보조금, 의료보험 의무가입, 공공-민영부문 경쟁은 이 절충안의 기본 4가지 요소이다. 지역사회 등급평가제도는 보험사가 지병 여부나 다른 위험요소 등을 이유로 보험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고 위험선별을 하는 데에 들어가는 관리비를 줄이기 위함이다. 보조금은 메디케이드에서 지원하며 개혁안이 메디케이드에 가입할 수는 없으나 대상 범위를 다른 보험을 못 드는 저소득노동자계층까지 확대시키는 것으로 한다. 의료보험 의무가입제도는 모두가 의료보험이 있어야 한다는 안이고 보험에 가입할 수 있으나 그러지 않다 사고를 당해 납세자가 대신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경우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 세 가지를 합치면 민간보험회사가 경영하는 국민의료보험제도가 나온다. 이 제도는 실행되는 것에서 정치적으로 유리하지만 단일지불제도의 장점 몇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해결방안이 에드워즈와 오바마의 개혁안에도 담긴 네 번째 제도 이다. 네 번째 제도는 메디케어를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써 국민의 선택을 요하는데 이것이 꾸준히 실행되면 정부제도가 민간보험회사 제도를 능가하고 의료보험은 단일지불제도로 발전할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국민의료보험제도는 경제적, 재정적, 모든 정치적 입장에서 실현가능성이 높다.

 

*의료제도 개혁이 가져올 변화

미국이 의료제도를 개혁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국민 대다수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이것이 성공할 때 중앙집권적인 복지국가 정책의 재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곧 국민의료보험제도가 새로운 뉴딜의 성격을 보여줄 수 있다. 개혁안이 통과되면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의 불평등을 고치는 더 광범위하고 어려운 임무로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Chapter12. 불평등에 맞서기 /이화외고2 최 안나

 

과거 몇 세대를 지나면서 미국은 도금시대 수준의 불평등한 사회로 바뀌었다. 여기서 이 불평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생활수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며 우리사회와 민주주의에 끼칠 악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불평등의 대가

불평등을 합리화하기 위해 제기한 주장 중에는 계층 간의 충돌 없는 소득 불균형이라는 글로 당신이 일등석에 앉으면 옆에 누가 앉게 될지 모른다는 식으로 사회적 불균형 현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소득 불균형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이 현상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소득 불균형이 사회적 불균형을 초래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미국은 그렇데 되었다. 여기에 로버트 프랭크 기자는 부자들의 땅에서 부자들이 자기만의 경제와 사회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극심한 소득 불균형은 극심한 사회 불평등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며 실제로 수백만의 중산층 가정이 자녀를 위해 실제 형편보다 무리하고 있고 파산 증가 현상도 심해지고 있다.

이런 미국의 현실은 기회뿐 아니라 성공에서도 불평등이 극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부모의 지위, 소득, 교육수준에 따른 사회경제적 지위와 학생들 각자의 능력을 구분한 테스트에 의하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계급이 능력에 우성하는 것이 현실에 좀 더 가깝다고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보다 신분상승을 할 가능성을 의미하는 세대간 이동성도 미국에서 제일 낮다. 그 이유는 미국에 국민의료보험이 없기 때문에 부모의 삶이 난관에 빠지면 자녀들에게 악영향을 줄 가능성도 높고 그 밖에도 여러 불평등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극심한 불평등은 우리의 정치를 부패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헤지펀드 매니저의 세금 우대조치를 지지하기 위해 몇몇 민주당의원들이 모인 사건이 있다.

이를 좀 더 확대한다면 극심한 불평등은 우리를 하나의 사회로 묶어주는 결속력을 약화시킨다고 말할 수 있으며 실제로 정부가 모두의 이익을 위해 국정을 운영한다에 대부분은 소수의 이익으로 생각하고 있다.

 

소득 불균형 줄이기: 시장영역 밖에서의 정책

불평등은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시장소득에서의 불평등으로 여기에서 첫 번째 척도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팔아서 얻는 소득의 불평등이다. 하지만 정부는 시장소득의 일부를 세금이란 명목으로 가져가고, 그 일부를 미국 노인의 대부분의 주요 소득원인 사회보장연금처럼 국민들에게 수표나 서비스 형태로 지급한다. 따라서 또 다른 척도는 가처분 소득의 불평등이다. 가처분 소득은 세금과 정부로부터의 이전지출을 제하고 난 후의 소득을 말한다.

이제 미국에서 불평등을 줄이는 한 가지 방법은 이런 부분을 늘리는 것이다. 즉 지금 시장소득의 불평등은 그대로 놔두고 그 여파를 줄이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이것의 모범적인 예로는 프랑스가 있는데 그들은 실직이나 낮은 직업인 경우 혜택이 많고 반대로 잘 사는 경우에는 제해지는 금액이 높다. 즉 시장영역 밖에서의 정책이 광범위하게 적용되어 부유한 사람들을 괴롭혀 가난한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불평등을 줄인다. 이외에도 미국과 프랑스는 비교되는 점이 많고 미국이 본받아야 할 것도 많다.

 

평등의 수학

앞에서 본 것처럼 미국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를 본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조치로는 무엇이 있는 지 알아봐야 한다.

우선 부유층을 위한 감세제도를 폐지해서 의료제도를 개혁하는 데 지원한다면 불평등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적 측면으로 봤을 때에는 세제상 허점을 없애는 것이 있다. 앞에서 말했던 헤지펀드 사례처럼 가장 큰 허점은 수십억 달러나 되는 이익의 회사들을 세금이 낮은 국가에서 발생한 것처럼 기록하도록 놔두는 것이다.

이 두 대책 이상을 강구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꽤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료보험제도를 확립하고 정부가 선한 것을 강요할 수 있다는 뉴딜정신을 되살릴 수 있다면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다.

다른 선진국들은 부유층에게만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중산층에게도 높은 사회보장세와 부가세의 형태로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데 이것은 간접적이면서도 광범위하게 불평등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볼 때 수십 년 동안 세금인하와 정부축소의 장점을 숱하게 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시장영역 안에서의 불평등 줄이기

대압착같이 제 2차 세계대전시 임금통제를 한 방법도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몇 가지 조치가 더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이미 실현되고 있는 최저임금 인상이다. 일반적으로 이 방법에 반대하는 두 가지 주장이 있는 데 하나는 취업률이 낮아지고 실업률이 늘어날 것이라는 것, 또 하나는 임금을 올리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연구결과에 따르면 전체적인 임금인상에 약간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실제로 조정 가능한 최저임금 인상폭 정도로는 실업률이 심각하게 증가하지 않으며 동시에 저소득층 임금에 아주 큰 혜택을 준다.

하지만 최저임금은 주로 저소득층 노동자들의 문제이며 이를 위해서는 노조억압정책을 폐지해야한다. 노조는 주로 임금 분포에서 중간을 차지하는 조합원들의 임금을 올리고 임금을 평준화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진보적인 정책이 시행되도록 노조원들의 투표를 유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조의 부활을 촉진하는 것이 진보적인 정책의 주요 목표여야 한다.

 

대압착이 다시 올까?미국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급격히 감소하던 대압착은 위기의 시기였던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일어났다, 지금의 미국은 그 정도로 어려움을 겪지는 않기 때문에 불평등을 줄이는 것은 대압착이 아니라 대완화라고 봐야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불평등을 줄이고 미국을 중산층 국가로 다시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13장 진보주의자의 양심 / 정신여고 2 문현정

 

기묘한 시간의 연금술은 어떻게 된 일인지 미국의 민주당을 아주 보수적인 당으로 바꿔놓았다. 민주당은 가장 좋은 것을 보존하고 그 기반 위에 견고하고 안정된 제도를 구축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반대로 공화당은 급진적으로 행동한다. 무모하고 심술궂은 이들의 집합 같은 공화당은 미국 사회에 견고하게 자리잡은 제도들을 폐지하는 데 열심이다.” -애들라이 스티븐슨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 초 미국의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들이고,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대부분 급진주의자들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사회보장제도와 강력한 노조운동처럼 중산층 사회를 만들고 지탱해 준 뉴딜제도의 수호자가 된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제도를 민영화하거나 축소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와 진보주의 운동

진보주의와 진보주의 운동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철학을, 후자는 행동을 뜻한다. 진보주의자들은 불평등과 불공정을 막는 제도를 믿는 사람이다. 진보주의 운동가들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그러한 제도를 보호하거나 확대하려는 정치적 집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부시 정권 하에 미국 정치에 일어난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진보주의 운동의 연합체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보수주의 운동처럼 진보주의 운동은 민주당은 아니지만, 민주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조직들의 집합이다. 하지만 진보주의 운동은 민주당 영역을 한참 벗어난 폭넓은 개념이며, 구 뉴딜연합의 일부인 노동조합과 싱크탱크들, 그리고 넷루트(netroots)'라는 블로거들이 모이는 인터넷상의 가상공동체, Daily Kos 같은 진보주의 웹사이트들도 포함한다.

진보주의 운동은 보수주의 운동에 비해 중앙집권적인 면이 훨씬 덜하고, 보수주의 운동처럼 조직적으로 기금을 조성하는 재단이 없다. 따라서 재정후원자들의 강요에 따른 통일된 견해도 없으며 암묵적인 충성도 요구되지 않는다. 진보적인 단체나 조직을 하나의 운동으로 결집시키는 것은 돈이 아니라 불평등을 줄이고 민주주의 원칙을 수호하려는 공동 목표이다.

 

진보주의 운동의 안건

진보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중산층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주된 목표이지만 진보주의 운동가가 된다는 것은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가, 진보주의자들의 전통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이 만들고 추진하는 것이다. 메디케어에 처방약 혜택을 더하여, 메디케어의 원래 목적인 의료비 보장을 달성하는 것이나, 사회보장법이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불안으로 인한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함의 궁극적 목적에 부합할 수 있도록 국민의료보험을 도입하는 것이 예이다. 진보주의 운동의 안건은 공공정책에 더 큰 변화를 요구해야 하지만 급진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책의 목적은 사회보험을 확대하여 뉴딜을 완성하는 것이다.

 

당파성에 관해

진보주의 운동과 상반되는 보수주의 운동이 장악한 공화당의 지배를 받는 것이 현대 미국 정치의 현실이다. 그래서 당을 초월한 의견 일치를 통해 진보를 실현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진보주의 운동의 국내정책인 의료제도개혁안이 국회에 상정되면,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의 다른 안건들을 보호하기 위해 공화당원들에게 개혁안을 반대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고, 그러면 공화당원들은 대부분 개혁을 반대할 것이다. 진보주의 운동의 안건이 입법화되려면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고 민주당에서 대통령이 나와서 공화당의 반대를 극복해내는 길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실천하는 진보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진보주의 운동가가 된다는 것이고, 진보주의 운동가가 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당파성을 띤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주의 운동가로서 당파성을 띤다는 것의 최종 목표는 일당독재가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있는, 자유로운 경쟁에 의한 민주주의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결국 진보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