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실을 문학작품 추천하기

                                                     2008년 5월 24일 해님달님별님도반

박지후

한 사회 속에는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간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이가 타인을 돕기도 하고, 인생에 있어 연륜이 깊은 이가 젊은이에게 충고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사회 전체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도움’ 그 자체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덕은 때때로 도움을 주는 이 스스로를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어떤 몰지각한 선생님들은 자신들에게 배정된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 학생 수를 맞추기 위해, 인문계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을 강압적으로 실업계 학교에 진학시킨다. 학생의 성적 등을 고려해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학생의 의지가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매우 크다. 또한 불우이웃, 고아원을 선거철에만 방문하는 국회의원 후보들, 시간을 채우기 위해 의무적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학생들도 모두 이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이처럼, 타인을 위하는 일에서 조차 내가 우선시 되는 우리 사회에서 <당신들의 천국>은 매우 큰 교훈을 준다. 이 소설에서, 과거 일제시대 소록도의 원장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일이라며 섬에 온갖 사업을 추진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환자들에게 고통과 상처만을 안겨주었고, 그들이 애써 일궈낸 일들은 모두 원장 자신의 공을 높이는 데 돌아갔다. 이러한 뿌리 깊은 상처를 지닌 환자들은 진정으로 환자들을 생각하는 새로운 원장이 부임한 이후에도 그를 믿지 못하고 불신한다. 또 다시 소록도가 ‘자신들의 천국’이 아닌 ‘당신들의 천국’이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진정으로 타인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보여준다. 또한 그들을 위한 일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이것이 과연 그들을 위한 일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얘기하고 있다. 진정으로 남을 위한다면, 그들이 가장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귀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들의 천국’은 학생들이 진정으로 사회에 나아가기 전에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학생들은 이 책을 읽으며 진정한 ‘도움’이란 무엇인지, 경청의 중요성 등에 대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박이수

우리사회는 급속한 경제적 발전을 이뤄냈다고 평가된다. 반면 그만큼의 의식 발전은 결여되어 사회문제들이 반복되어 발생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십 년 전의 문학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시사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문학 교과서에 사회문제가 반영되는 작품을 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많은 사회문제들이 문학 교과서에는 다뤄지고 있다. 하지만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문학작품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나는 문학 교과서를 새로이 장식할 작품으로 <이갈리아의 딸들>을 추천하고 싶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여성학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책이다. 개략적으로 설명하자면 이갈이아에서도 여성이 임신을 한다. 하지만 이갈리아에서의 성역할은 현실과는 정반대이다. 예를 들어 가사일로 힘들어하는 것이 이갈리아에서는 남성이다. 하물며 강간의 주 피해자는 남성이다. 이런 식으로 현실 속에서 여성이 받고 있는 억압과 같은 여성문제를 하나하나 꼬집어 성(性)만 바꿔 묘사한 작품이다.
  현재 여성문제가 많이 해소됐다고 생각되어진다. 과연 그럴까? 임신, 양육으로 인해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는 여성들은 아직까지도 부지기수이다. 그들은 법적으로는 충분히 복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는 것은 외적으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여성문제가 내적으로는 아직도 많은 갈등들을 빚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특히 교과서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여성문제에 있어서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노력해야한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문제 극복을 위한 노력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장정연

사회에서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는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이가 진실을 발견하고 그 것을 사회적 압력에 의해 부인했던 상황을 희곡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먼저 지은이가 브레히트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브레히트는 희곡을 주로 지었는데, 그가 작품 활동을 했던 시대 상황과 희곡 분야에서 그가 사용했던 기법들은 문학사적 관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따라서 작품의 이해를 돕는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탐구하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있어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반영론적 시각과 작가론적 시각을 기를 수 있다.
  두 번째로 ‘갈릴레이의 생애’는 갈릴레이가 굴복을 하고 말았던 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한 편, 그가 실천했던 노력들과 불가피했던 상황을 제시하며 옹호하기도 한다. 이 같은 여러 시각은 갈릴레이가 선택한 길은 정당성이 있었는지에 대해 토론이 가능하다. 한 개인으로서 목숨을 부지할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하는지 혹은 전체 과학사적 입장에서 진실을 저버린 갈릴레이에 대한 비판이 정당한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일은 또한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다. 더 나아가 이런 활동을 통해 사회의 지식인으로 나아갈 청소년들에게 자신이 미래 사회에서 취할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일지 생각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또한 ‘갈릴레이의 생애’는 작품 내에서 극적인 요소를 갖출 뿐 아니라 등장인물 각각의 대사가 마치 시의 한 구절과 같아서 감상하는 동안 흥미를 느끼고 서사성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갈릴레이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인물들의 입장에서 대사 하나하나를 해석해 갈 때 작품 내에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이해하고  문학 작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김태우

조지 오웰의『1984』는 1948년에 1984년의 미래를 예측하고 쓰인 소설이다. 이 작품은 세계가 3개의 국가로 통일된 사회를 그려내고 있는데, 각각의 사회는 그들만의 방법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지배한다.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사회는 미국과 영국이 합쳐진 오세아니아로, 이 사회는 당(the Party)에 의해 지배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 동시에 조지 오웰이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이 당의 지배 논리와 체계이다.
당은 기본적으로 ‘텔레스크린’을 통해 모든 개인을 감시한다. 텔레스크린은 보기에는 현재의 TV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내부 당원들 외에는 끌 수 없도록 설계되어 당은 언제든지 개인의 행동을 감시할 수 있다. 거리에는 수 없이 많은 텔레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이는 개인이 군중 속에 묻혀서도 몰래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음을 의미 한다. 즉 개인이 철저히 사회의 감시 아래 생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감시하는 조직은 사상경찰로 마치 나치 시대의 게슈타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즉 조직에 반하는 구성원들을 잘라내는 것이다.
언어 사용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언어의 발전은 사고의 발전을 의미하며, 따라서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 언어는 간단해 져야 한다. 그래서 이 사회의 언어학자들은 과거의 복잡한 언어들을 없애고 현재의 간단한 단어들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언어의 축소는 말을 줄이거나(예를 들어 영국 사회주의(English socialism)을 영사(INGSOC)으로 발음) 비교급을 단순화(더욱 좋다를 better나 excellent로 하지 않고 plusgood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효과적 통제 도구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대형과 그에 반대되는 골드슈타인이다. 대형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다. 그러나 당은 대형을 마치 실존하는 인물로 만들어 그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한다. 또한 골드슈타인이라는 대형과 반대되는 배신자 개념의 인물을 만들어 그에게는 분노와 적대감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의 사고를 둘로 나누어 효율적인 통제를 하는 것이다. 또한 대형을 사회의 규범과 동일시해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이단자로 몰아넣는 것 또한 통제의 일환이다.
이 소설을 문학교과서에 추천하는 이유는 위에서 제시한 것처럼 인간 사회의 통제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소련에 대한 비판으로 여겨지는 이 작품은 단순히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통제 세력의 불합리한 압제 또한 비판 역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와 과거, 미래를 막론하고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피천득 옮김 / 장정인

이 시는 신문에 굳이 실렸을 정도로 유명했고, 외국 시로서는 수능에 유일하게 출제되었을 정도로 인지도와 작품성이 높은 작품이다. 프로스트의 시는 일반적으로 인생살이와 세상일에 관한 논의의 과정 및 그 결과인 어떤 잠정적 결말을 보여주는 데 이 시 역시 그런 양상을 띠고 있다. 더불어 독백체로 진행되는 이 시는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자신의 생각인 양 시를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해준다. 비록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마지막 연에서도 모호함을 드러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여러 번 생각하게 하지만, 이는 뒤집어 말하면 독자들이 이 시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작품 해석 능력과 작품과의 친밀도를 높여야 하는 고등학생들에게 필요한 능력을 길러 줄 수 있는 셈이다.
객관적인 측면 뿐 아니라 독자의 관점에서도 이 시는 도움이 된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그 결과물을 얻게 될 때마다 이 시를 떠올리고는 한다. 만약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 지, 하나의 길을 선택했다면 더욱 노력을 했어야 한건 아닌지 등등 과거를 반성하고 회상하여 나중에는 더 나은 선택을 해야겠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준다. 고등학교 시절은 그 어느 때보다 선택해야 할 것이 많은 때이다. 미래의 진로를 준비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시기를 경험하는 청소년들에게 ‘선택’의 가치를 상기시켜줄 수 있는 작품으로 생각된다. 또한 내가 위안을 받았듯, 힘든 선택을 하는 것이 각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교과서에 제시될 정도로 보편적인 현상임을 알려 고등학생들에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다.
나아가 다른 외국 작품이 출제 된다고 하더라도 미리 외국 작품을 교과서에서 맛볼 수 있어 정작 수능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시험 대비 효과도 있다.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 /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 김만규

  이 책은 지은이가 직접 서부 히말라야 고원의 라다크라는 곳에서 체험한 일들을 서술한 수필집이다. 사람의 접근이 힘든 오지 중의 오지인 라다크에서 비문명화 된 삶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문명화 된 우리의 삶을 되짚어볼 수 있도록 해준다. 식생활이 확연히 다른 것은 물론, 사회도 우리나라의 부계질서가 아닌 모계질서 위주로 돌아간다. 그들은 한정된 자원 속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기 때문에 경쟁과 욕심이 없다. 정말 말 그대로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원시적이지만 정말 평화로운 그런 세상인 것이다. 그러나 책 후반부에는 라다크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이 라다크를 문명화시키게 된다. 라다크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가고, 그 문명화된 사람들이 다시 라다크에 찾아와 라다크는 혼란을 맞게 된다. 경제적 관점마저 돈이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 변해버리는 등, 라다크의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가 문명화 된 것보다 열등하다고 느끼게 된다. 다행히 그 혼란기를 겪고 라다크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며 변화된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실수를 깨닫게 된다.
  어찌보면 뻔한 것일 수 있는 오지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서는 순수했던 사람들이 현대의 우리가 당연시여기는 여러 문명화되고 서구중심적인 것들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있어 이 책은 우리가 라다크에서 변해버린 사람들과 같은 존재는 아닌지, 우리가 너무 우리의 문명에 물들어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책이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요즘 세상에 이런 수필이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실린다면 한창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정리할 때인 고등학생들에게 크나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기에 이 책을 추천한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말과 같이, 학생들에게 돈 중심의 사고가 아닌, 사람 중심의 사고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라의 미래를 책임 질 학생들에게 돈 중심, 경쟁 중심의 개인주의적 입장이 자리 잡게 된다면 라다크에서처럼 큰 혼란이 올지도 모른다. 라다크에서처럼 비문명화 된 삶을 살아가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이 책의 부제처럼 라다크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배워서 물질만능주의라는 사막에서의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전태일 평전  / 박수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은 혹사시키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전태일이 뜨거운 불길 속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내뱉은 말이다. 노동자들의 인권이 마구 짓밟혀지고 있던 70년대, 전태일은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환경의 개선을 위해 노동운동을 펼치다 스물 두 살의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만일 전태일의 죽음 이후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의 환경이 개선이 되었다면 이 책은 그리 의미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사회의 밑바닥에서 기계를 돌리고 있는 노동자들은 아직도 인권을 침해당하며 일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70년대 이후 엄청난 경제성장으로 지금은 거의 선진국들과 비슷한 경제수준까지 이르렀지만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고 오히려 심해졌다. 부자들은 외국의 부자들 못지않게 부를 누리며 살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극빈층은 여전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많은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소외된 노동자 계층에 대하여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에 이 책이 실린다면 학생들이 고통 받는 노동자들에 대해 그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것을 전태일이라는 불운하고 가난한 노동자의 일생 이야기를 읽어보면서 더 자세히 아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안민가 -충담사- / 안마루솔

군은 어비며, 신은 자식을 사랑하는 어미며, 민은 어린아이라고 한다면,
민이 임금의 사랑받음을 알 것이다.
꿈틀거리며 사는 백성들을 먹여 다스리면,
“이땅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라고 백성들이 말할 것이고,
나라가 바로 다스려지고 있음을 알 것이다.
임금은 임금처럼, 신하는 신하처럼, 백성은 백성처럼 직분에 충실한다면,
나라가 태평할 것이다.

위 글은 신라 시대에 지어진 향가인 안민가를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나는 이 향가가 현대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 큰 교훈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학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추천한다.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올바른 방도를 노래한 향가로,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사회 각 계층의 태평성대를 위한 태도를 가르치고 있다. 비록 그 표현이 보편적이고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는 우리사회의 현재 모습에 가장 근본적이고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이 향가의 핵심구절인 ‘군다이 신다이 민다이 하날단’이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사기꾼 같은 대통령은 대통령 본연의 모습으로,자신의 잇속만 챙기기 바쁜 관료들은 관료 본연의 모습으로,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은 민주시민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향가에서 말하듯 나라안이 태평할 것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정수연

이 작품은 국민학교 교실이라는 축소되고 집약된 공간을 통해 ‘엄석대’라는 급장으로 전형화된 권력, 그리고 그의 주변에서 쉽게 달아오르고 무섭게 변절하는 반 아이들의 기회주의 근성을 그려 나가면서, 70년대 독제체재 하에서 권력의 무상함과 거기에 기생하는 변절적 순응주의, 지식인적 허무주의를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 소설은 악을 몰아낸다는 명분하에 자행되는 인간의 비겁한 행동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본질적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데, 권력자인 엄석대 뿐 아니라 그들을 대하는 담임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은 참된 인간성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절대 권력이 지닐 수밖에 없는 허구성과 그 허구성의 형성 배경은 주변의 방조와 묵인에 있다는 사실, 또 새 담임으로 상징되는 참된 지식인의 모습을 제시하면서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더 나아가 일반인들에게도 큰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교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학교 교실을 통해 인간 사회의 질서 형성과 그 유지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우상의 눈물>과 엮어 읽을 수도 있는데, 두 작품에서 권력자의 몰락은 합법적인 폭력에 의한 것으로서 우리 사회의 저급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중심으로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상의 눈물 / 장설희

학교 시험 범위에 이 작품이 필독도서라서 읽었었다.
폭력을 휘두르는 기표라는 인물을 담임선생님과 반장이 위선으로 포장하여 부끄러운 아이로 철저히 변화시킨다. 이는 권력의 무서운 단면을 보여준다. 기표가 휘두르던 물리적 폭력보다, 담임 선생님과 반장의 위선이 더 무서운,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내게 다가왔다. 우리 사회에 적용해 보면 담임 선생님과 반장은 일종의 권력자이다. 천사의 가면으로 위장한 채, 물리적 폭력보다 더 무서운 폭력을 여기저기서 휘두르는 우리 사회의 권력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정부 관료자들이 미국과의 FTA를 멋지게 포장하여 옹호하고 있다. 공공재의 민영화부분도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기득권층의 기득권을 고착화시키는 것일 뿐, 대다수의 서민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나 다름없다. 현재가 아니더라도 과거에도 이런 유사한 사례가 있고 미래에도 이런 사례가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작품이 문학교과서에 실림으로써 많은 학생들이 부조리한 권력의 횡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 비판적인 사고를 기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