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게바라를 읽고 나서 / 가을햇살 도반 글 모음 /4338년8월14일


<체게바라 REPORT - 1부>  한영외고 2 김완희

1부에서는 체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1928년 6월 14일 에르네스토 게바라라는 이름을 태어난 체는 어릴 때부터 천식을 겪어 몸이 많이 약했다. 그는 그의 아버지나 주변 환경을 통해 일찌감치 인디오 친구들과 나누며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또, 천식으로 인해 학교에 다닐 수 없자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 독서광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그당시 영국에서 들어온 럭비에 흥미를 갖게 되면서 알베르토를 알게 된다. 그 뒤 에르네스토는 알베르토와 함께 아르헨티나 중부의 코르도바에서 출발하여 칠레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여행을 계획하고 떠난다.
그들은 포데로사도스에 짐을 꾸리고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을 하면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행 중의 많은 에피소드들이 전개되면서 우리는 앞으로 나타나게 될 체의 혁명가적 기질을 가늠하게 된다. 광산에서 죽어가는 많은 노동자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던 모습, 모두가 꺼리던 나병환자들을 돌보며 직접 나서 수술까지 해주는 모습, 열심히 일하고도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농부를 보고 분개하던 모습 등을 보며 체의 따뜻한 인간성을 볼 수 있었고, 수중에 돈이 없어 굶던 그들에게 호의를 베푼 페스체 박사의 책을 읽고 그 평을 듣고자 하던 박사에게 거짓으로 꾸미지 못하고 솔직하게 비판적인 감상을 늘어놓는 그의 정직한 인품을 보면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혁명을 꿈꾸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다시 마주했다. 그의 가족은 그의 굳은 얼굴을 보면서 여행을 통해 한층 성숙하여 돌아온 그를 느낄 수 있었고,  여행에서 돌아온 체는 학업에 매진하여 단기간 내에 모든 과목에 합격해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체는 다시 여유를 가지며 그동안의 여행을 되새기며 그의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체게바라 REPORT - 2부> 숙명여고2 임여규

여행에서 돌아온 체게바라는 의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 이후 그는 또다시 알베르토와 여행을 간다. 아메리카의 병사로서. 볼리비아에서는 새로운 계급이 봉기하는 중이었다. 그는 볼리비아에서 부의 차이를 보았고, 페루에서는 쿠바에서의 망명객과 만나 혁명군이 되기를 다짐한다. 리마에서 첫 번째 부인 일다 가데아 코스타를 만나고 그녀를 통해 니코 로페스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체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는 새로 세워진 정부에 의해 불법체류자가 된다. 그리고 페루에는 폭격이 가해진다. 폭격 이후 그는 청혼을 했고, 사복경찰이 나타나는 바람에 떨어져 피신하게 된다. 일가는 과테말라에서 멕시코로 추방되고 둘은 다시 로마에서 재회한다. 이때쯤 m7-26이 태동하고 있었다. 체는 범국가적 체육대회 사진사로 일해 재정을 확보하고 일다와 결혼한다. M7-26에 가입하고 결혼을 한 후 그는 살을 빼고, 훈련장에서 훈련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혁명가로서의 자질을 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후 딸 일디타가 태어난다. 이후 사복경찰의 조사를 받으면서 체는 피델 카스트로가 멕시코에서 중요한 정치적 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 체의 신념은 무엇인가?
그는 빈부의 격차를 해결 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원했고, 그 이론을 마르크스 사회주의에서 추출하여, 아메리카의 대륙 전체를 구제하고자 하였다.

2. 체가 가진 신념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는 어렸을 적부터 인디오들과 함께 지내고, 그들을 돌보면서 빈부의 차이를 극심히 여겼다. 그리고 여행을 다니면서 그들의 실질적인 생활에 스며들게 되면서 그 문제점을 직접 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부한 자의 집에도 머물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회의 문제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 나름의 입장을 내세우게 되고, 해결방법을 찾은 것이다.

3. 체의 신념이 당시 중남미 민중에게 끼친 영향은?
그들에게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것 같다. 보통 게릴라라고 하면 이질적인 이미지도 없잖아 있지만 그 특유의 인간미(?)로 민중과의 거리감을 줄였고, 그들의 이론과 민중의 바람이 일치하였기에 민중은 그들을 자신들의 일종의 구원자로 여겼을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모두가 함께 하는, 혹은 자신도 한 몫 도울 수 있는, 주체적인 혁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4. 내가 평가하는 체
그는 혁명가로서 훌륭한 극찬을 받고 있다. 그는 분명, 민중을 충분히 이해하고, 민중을 위해 싸웠다. 쿠바 혁명에 안주하지 않고 다른 혁명에 또다시 참여한 것은 정말 그의 신념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굳이 예를 들자면 그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공짜로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자신의 이론을 남에게 주입하려는 면이 있다. 사기적이고 어떻게 본다면 자기중심적이다.
내가 그에게 반한 것은 그의 다능한 능력과 그에 따른 노력들이다. 그는 의사이고, 시인이고, 체스 선수이고, 사진작가 이며, 정치가, 고고학자였고 책은 엄청 읽어댔으며, 한 때는 훌륭한 럭비 선수였다. 이 많은 걸 소화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일구어 나갔으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를 한다고 해서 얕게 아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체게바라는 혁명가로서 보다는 하나의 인간 형태로서 더 많은 교훈을 준다.



체 게바라 평전 제 3부 정리 / 대원외고2 윤지환

3부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비롯한 82명의 일행이 요트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로 잠입한 뒤 이어지는 계속되는 투쟁을 다루고 있다. 쿠바에 도착한 뒤 쿠바섬 가운데에 길게 뻗어있는 시에라마스트라에 거점을 잡고 불과 200여명 남짓한 인원으로 쿠바섬 전체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먼저 그들은 게바라의 의학박사지위를 통한 무료의료봉사활동, 그리고 정치교육을 통한 사상확립, 그리고 농부를 비롯한 민중들과의 계속적인 교류를 통한 동질감 획득이다.

먼저 무료의료봉사활동은 의료행위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만 현대적 의료서비스에서 소외된 시에라마스트라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무료진료와 처방을 통해 서로간의 친근감 획득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정치교육에 의한 사상확립은 의료행위 만큼이나 근대 교육에서도 괴리되어 교육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던 주민들에게 그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학구열을 해소하는 것이다.
게다가 일석이조로 교육과 함께 사상까지 주입시켜 농민들에게 자신들의 투쟁의 정당성과 그들에게 돌아올 이득을 주지시키고 게릴라 활동을 하는 군인들에게도 투쟁의 목적과 그들의 희생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마지막 세 번째로 민중들과의 계속적 교류인데 이것 역시 근본 목적은 자신들의 정당성과 투쟁 목표전달에 있다. 단순한 교육을 통한 사상전달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도시의 M 7-26 사람들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그 목적을 역설한다. 또한 같은 목적으로 카스트로는 바티스타가 조장하려는 자신들에 대한 악성 여론을 막기 위해 계속하여 기자 인터뷰, 입장·성명발표나 라디오방송을 실시한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이 포로로 잡은 군인들 역시 민중으로 생각하여 좋은 대우와 게릴라전의 정당성, 바티스타 정권의 폐해를 주지시키고 돌려보낸다. 이 행위들은 나중에 게릴라에 대한 민중의 절대적 지지여론을 확립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며 동시에 정부군의 사기도 떨어뜨려 결국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게 만들게 된다. 이는 게릴라군이 도시들을 해방시킬 때 마다 갈수록 더 많은 수의 군인들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며 그들을 반기는 민중들의 환호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 체의 신념은 무엇인가?
이 경험은 체에게 빈부의 극심한 격차를 통한 자본주의의 폐해를 일깨워 주었고 미국에 예속되어 허덕이는 라틴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심어주었다. 즉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자본의 횡포를 제거하고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중국이나 소련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즉, 그는 사회주의의 두 축인 중국과 소련에 예속되지 않는 순수한 마르크스 주의에 입각한 혁명을 꿈꾸었던 것이다.

2. 체가 가진 신념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체가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아르헨티나에서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 지위를 포기하고 혁명가가 되는데 결정적 신념을 심어준 것은 대학생시절 알베르토와 함께한 남미일주였다. 그 여행 중 체는 빈민들의 힘든 삶과 현대적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산악지역의 주민들의 반복되는 비참한 생활과 외국(주로 미국)의 자본의 횡포(광산)를 목격하는 과정에서 신념은 형성되고 또 굳어졌을 것이다.


3. 체의 신념이 당시 중남미 민중에게 끼친 영향은?
외국의 자본과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죄파 정권의 성립을 힘을 다해 막는 동시에 정치적 상황의 혼란을 원치 않았던 미국의 묵인아래 라틴아메리카 대다수의 민중들은 독재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 때, 체의 신념은 그들에게 그들을 구원할 ‘예수’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한 세상에서 순응하며 살던 민중들에게 그들의 상황은 개선될 여지가 충분히 크며 그 여부는 바로 혁명의 성공에 달렸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전달하여 마르크스와 레닌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사상에 기초한 혁명이 아닌, 그들이 중심이 되는 그들만을 위한 혁명에 대한 자신감과 의지를 심어주었다.

4. 내가 평가하는 체
체는 불과 몇 십 년 전의 혁명가였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고 결국 혁명가로 죽었다. 하지만 그는 소련 공산당을 위해 헌신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는 카스트로와 함께 미국과 소련을 저울질 했다. 민주주의는 무한한 자유를 제공하지만 반면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 지고, 사회주의는 자유에 제한이 따르지만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체는 결국 다수의 행복을 위해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에게 사상은 그의 신념을 받쳐주는 하나의 기둥에 불과했다. 그는 사상의 발전과 성공을 위해 혁명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중남미의 억압받고, 자본에게 유린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부정적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혁명을 한 것이다. 즉, 그는 사회주의를 위해 싸웠지만 그 근본에는 바로 민중이 있었다.

체가 활동하던 바로 그 시절에 우리나라에서도 체와 같은 신념을 가진 혁명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산에 올라가 싸웠으며 당시 세계 최빈국중 하나였던 우리나라의 가난을 타파하고자 사회주의를 위해 싸웠던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왜 그들은 체와는 달리 혁명에서 성공하지 못했던 것일까? 우리나라와 쿠바는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민중들의 의식? 외세의 심각한 간섭? 이것은 좀더 생각해 볼 문제이다.<----------------토론문제~(^^)



체게바라를 읽고 / 영동고2 임형민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계기가 사람을 변하게 한다고 믿는다. 온갖 고민과 번뇌 끝에 어느 한 순간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강한 의지를 얻는 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을 체 게바라평전을 읽고 나서 그가 편안하고 쉬운 삶을 택하지 않고 어렵고 전혀 예측 할 수 없는 인생을 택한 이유를 그의 청년 시절 여행 중 그가 본 빈민의 현실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죽는 순간까지 그가 믿었던 신념의 전부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충격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체와 같은 삶을 택했는가?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 40대를 넘어가면서 위선자가 되어버렸다. 슬프지만 우리들의 현직 대통령까지도 말이다. 나는 이러한 위선자들과 달리 진정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실현했던 체의 여행과 충격은 작은 계기는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그를 존재 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체를 그토록 강하게 해준 것은 무엇일까? 마지막 죽기 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그의 눈빛에서 본 그 강렬한 의지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나는 그것이 체의 실천 속에서 나왔다고 믿는다. 체가 아무리 큰 충격을 받고 거기서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더라고 해도 체가 쿠바 혁명에 지원하지 않았다면 그는 존재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만약 그가 쿠바에 갔어도 쉽게 일을 성공 시켰다면 지금의 체는 물론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볼리비아에서 죽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의 의지와 신념은 완성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쿠바 숲속의 극도의 어려움 속에서 그가 믿을 수 있는 요소는 현실 속에 존재 하지 않았다. 정글은 벌레가 쏟아지고 덥고(체가 아르헨티나 출신이기 때문에 더위에 강했던 것일 수도 있다.) 습했다. 언제 옆에 있는 대원이 작전을 포기하고 적군에게 정보를 넘겨줄지 모르는 상황.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작은 신념 밖에 없었다. 어려운 상황이 올수록 그는 그의 믿음에 매달렸고 그 믿음은 그의 행동으로 그리고 다시 그의 행동은 그의 믿음으로 영향을 주면서 그의 의지 쌓여갔다. 책에서 보면 체는 늘 군복을 입고 다녔다고 말한다. 이미 카스트로 형제는 군복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옷을 입었던 시점에 그 둘의 최측근 이었던 체는 어째서 마지막까지 그의 쪼글쪼글한 군복을 입고 다녔을까? 그것은 체가 그의 의지를 유지하기 위해서(어쩌면 그도 스스로가 변할 수 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택한 그의 많은 삶 중 하나이다. 그가 스스로의 군복과 군화를 내던지고 새하얀 와이셔츠와 깔끔한 양복을 입고 새까만 악어가죽(?) 구두를 신었다면 그는 또 하나의 피델 카스트로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평전의 마지막을 보면서 나는 피델 카스트로가 체를 두려워했다고 느낀다. 그는 이미 스스로의 지위가 체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체 또한 아마 이러한 피델 카스트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체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그 차이는 실천을 포기한 의지와 실천하는 의지의 작은 차이점에서 생겨난 것이다. 어떠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체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체의 신념은 대단하지 않다 / 경기고2 강윤승

체의 신념은 대단 하지 않다
세계의 근 현대사에서 체 게바라의 위치는 상당하다. 그의 인생은 지금 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으며 많은 학자들도 그에 열광을 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위인을 보면 그를 동경하면서 한 편으로 위인을 우리와는 다른 초월적인 존재로 여기며 현실적으로 다수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로 위인과 일반인은 미묘한 차이로 시작된다. 체 게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와 우리의 차이는 한 가지이다. 우리는 시대 현실에 비겁해 졌고 게바라는 신념을 지킨 것이다. 그의 신념을 크게 특출한 것은 아니다. 온 인류의 보편적 가치, 즉 약자를 보호하며 부당한 권력에 투쟁 하는 등 우리들이 교과서에서 흔히 읽는 것들이 그의 신념이었다고 본다. 실천의 힘을 보여준 사람이 바로 체게바라이다. 정확한 삶의 지향점과 실천이 역사가 그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각각의 임무를 가지고 살아간다. 수동적인 사람은 그 임무를 남에게서 명령 받을 것이고 능동적인 사람은 자기 스스로 알아낼 것이다. 한 시대와 사회의 흐름이 요구하는 임무 중 하나를 선택하며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사람은 단편적이며 개인적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역할을 맡으려고 만 한다. 무엇이 옳은지 앎에도 불구하고 지향점 없는 삶을 다수가 살아가는 것이다. 시대가 혁명과 힘없는 나라의 독립이라는 과업을 요구할 때 먼저 나서서 그것을 맡은 사람이 바로 체이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는 전 세계인이 알고 있지만 실천을 한 사람은 바로 체인 것이다. 시대가 요구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과업이 얼마나 신성하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았기에 그는 인생을 투쟁에 기여 할 수 있었다.  글을 모르면 왜 싸우는 지도 모른다 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혁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과 연관이 없는 쿠바의 혁명에 투신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이란 글자 앞에는 모든 인민이 평등함을 그는 알고 실천 했다. 배식을 받을 때 요리사가 아부를 하며 더 주면 즉시 그를 거부하는 것부터 천식에도 불구하고 총을 들며 쿠바 독립을 위해 숲에서 뛰는 모습까지 그는 인생의 모든 부분에 걸쳐 실천을 하였다. 의사로서 큰 돈을 벌며 안락하게 임종을 맞이 할수 있었던 그는 세계사의 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게 죽었을 것이다. 그는 인류의 신념을 지켰기 때문이다.

체가 살았던 시대에 불의에 투항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천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수는 현실적이라며 스스로 만족하며 실천하지 않음을 정당화 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갖자 라는 유명한 체의 말처럼 그는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또 그가 출생이 기이해서 삶의 과정 중 커다란 깨달음이 있어서가 그를 투쟁에 몰아 낸 것이 아니다. 단지 이상을 갖고 실천 했을 뿐이다. 어떤 책에서 너무나 당연한 도덕적 지표를 보거나 누군가가 조언을 해주면 우리는 대게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니냐며 무관심하게 흘려 보낸다. 우리나라 인구의 7분의 1이 극빈층이라는 오늘의 신문을 보며 실천을 하지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과연 나는 있으며 다른 삶도 있을까 생각이 든다.  다른 병사를 위해 끼니를 거르는 체와 기득권의 이득을 위해 서민을 착취하는 오늘날 전 세계적 구조의 대비가 보여 주듯이 지금 우리는 또 다른 게바라가 필요하다. 초등학교 교과서를 읽었다면 신념은 충분하다. 오늘부터 우리 모두가 체 게바라가 되자.



홍석원

1. ‘체’의 신념은 무엇인가?

체는 좁게는 라틴아메리카, 넓게는 전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자본주의(제국주의로 이어지는) 체제 하에서 발생되고 심화되었던 차별과 불평등과 같은 인간답지 못한 대우에 고통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 점차 체념적으로 수용해가는 것을 보고 이들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해방시키겠다는 목표를 지녔다. 그는 인간의 의식 근간에서부터 침투하고 이를 체제하에 순응하도록 결정해버리는 자본주의와 이어 인간파괴를 심화시키는 제국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믿음을 지녔다. 그는 민중들의 해방은 무장투쟁을 앞세워  농민과 노동자 계층을 포함하는 전 국민적인 봉기와 파업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던 게릴라 부대는 그 자체의 성과도 물론 중요했겠지만 체는 게릴라의 의미를 군사적인 성과에 두기보다 제국주의자들의 착취하에 절망과 체념에 빠진 민중들에게 자유와 평등에의 신념을 자각시키는 상징적인 역할에 더 비중을 두었다. 또한 그는 늘 불가능해보이는 이상사회를 머릿속에 두면서도 결코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사고를 했다. 체가 순수성을 잃은 공산주의를 또다른 제국주의라고 비난했던 것은 자신이 그려놓은 순수한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의 표현일 것이다.

2. ‘체’가 가진 신념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생으로 유럽인의 피가 흐르는 부르주아 격 아버지의 신분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베르토와 함께한 긴 여행을 하면서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 특히 인디오들의 피폐하고 절망적인 생활상을 보고 실제로 겪으며 깊은 생각에 빠진다. 실제로 체가 열정을 가지고 연구한 침략 이전 라틴아메리카의 찬란한 문명과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체는 조금씩 그의 피가 조상의 땅인 유럽보다 미래에 인디오를 비롯한 민중들이 행복한 생활을 해야 할 땅 라틴 아메리카를 위해 바쳐져야 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체는 자신이 의사가 되어 신체적 외상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상처를 지닌 남아메리카 전체를 제국주의라는 난치병으로부터 치유해야겠다는 큰 뜻을 깨닫는다. 즉 긴 여행이 그에게 준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핍박받는 인간을 해방시켜야 겠다는 혁명적인 깨달음이었다. 여행을 거듭할 수록 그는 이런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갔고 피델과의 만남으로 그는 구체적인 혁명가의 모습, 즉 게릴라 대원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초라하기만 했던 쿠바 상륙대가 농민들의 희망을 북돋우며 쿠바 전 지역에 혁명의 기운을 뿌리고 다닐 때, 그의 신념은 계속적으로 다듬어졌고 발전하게 되었다. 즉 그의 신념은 알베르토와의 여행을 통해 발견되었고 무장투쟁을 거치면서 더욱 단단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3. ‘체’의 신념이 당시 중남미 민중에게 끼친 영향은?

그는 전사 그리스도라 불리며 쿠바와 이어 볼리비아 그리고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전 중남미 인들에게 해방이라는 희망을 가슴 깊이 심어주었다. 체와 피델, 그리고 카밀로의 게릴라 부대가 쿠바의 요충지를 하나 둘 점거해 갈 때마다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에게 희망의 크기는 그만큼 부풀었으며 결국 그의 죽음은 혁명을 실행해 옮기는 원동력이자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 체는 죽은 뒤에도 그가 마지막 순간에 나무에 새기며 인간이 내려온다고 믿었던 하늘의 세계로 올라간 셈이다. 그는 죽은 후에도 또다른 그리스도가 되어 생전의 삶을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을 위해 살았던 만큼 큰 영향을 중남미 민중에게 주었다.

4. 내가 평가하는 ‘체’

우선 그는 ‘존경할 만한’ 대상이라는 생각과 함께 미약한 지식으로 품은 공산주의가 민주주의의 발전을 방해하는 마르크스 광신도들의 모임이라는 생각을 반성하게 해준 인물이다. 그의 신념하에 펼쳐진 이상국가는 ‘개인이 정치권력에 물러나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며 오히려 그 정치의 주체가 되는’ 민주국가의 모범이었고 모두가 함께 땀 흘리며 웃을 수 있는 공산 사회였으며 자본주의가 야기한 비인간화와 개인주의를 그 근간부터 타파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운영되는 휴머니즘 사회 그 자체였다.
그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모습은 소련의 변질된 사회주의를 비난 하는 대목에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불가능한 이상을 품은 리얼리스트였던 체는 분명 사회주의의 탈을 쓰고 미국과의 힘겨루기에서 승리할 것만을 생각하는 소련의 늙은 지도자들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아침마다 절삭기를 이끌며 노동의 신성함을 민중들에게 호소했던 체는 지나치리만큼 평등한 대우를 의식했다. 쿠바혁명 성공의 원동력이며 정부의 주요요직을 모두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검소한 생활과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씨는 큰 귀감이 되고있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되 쿠바와 같이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환경에 맞게 변형시켜야 한다는 그의 믿음 어디에도 권력에 대한 욕구는 찾아 볼 수 없다. 변질된 좌익과 탐욕스런 우익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순수한 열정을 죽는 순간까지 변치 않고 지녔던 그의 모습을 보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개탄하며 노동혁명을 부르짖은 데에는 체와 같은 따뜻한 감성과 냉철한 이성을 지닌 인간의 본질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른 혁명가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체가 지닌 인류애와 신념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면 지금의 세계는 좀 더 인간적인 곳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따뜻한 진실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고집스럽게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체에게서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체게바라 REPORT - 6부> : 볼리비아의 계략을 정리하기

쿠바 혁명의 성공에 젖어 세상에 안주하지 않고 체 게바라는 다시 해방구를 만들기 위해 게릴라 전투복을 입게 된다. 기후도 주민들도 언어도 모든 것이 쿠바혁명 때와는 다른 조건이고 생소했지만 체는 죽음을 무릅쓰고 중남미의 복판 볼리비아에 도착한다. 6부에서 특이한 점은 많은 부분이 그의 간결하지만 생생한 일기를 통해 전개 된다는 것인데, 일기에서 느낄 수 있는 절망적인 상황과 그런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체가 인간적으로 가깝게 와 닿는다. 볼리비아에서도 쿠바에서처럼 열악한 게릴라들이 신념을 지니고 계속되는 시련과 배신에도 그들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며 민중해방을 위한 게릴라활동을 계속한다. 늪에 빠지고 부종이 나 발은 발대로 신발을 신을 수 없고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기기 힘들 정도로 붓기도 한다. 또 마을 사람들은 쿠바의 바티스타를 몰아낼 때와 같지 않게 무관심했으며 계속되는 전우들의 배신으로 체의 희망은 조금씩 조금씩 사그러든다. 결국 그는 십 수명의 잔류대원들과 엄패물이 전혀 없는 산지에서 2천에 육박하는 정부군에 대응해보지만 결국 생포, 처형되면서 볼리비아의 게릴라 활동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볼리비아 활동 실패를 어느 정도 예감하고 게릴라 활동에 임했다. 하지만 게릴라가 실패로 끝나게 된 것은 정치적인 조건들, 즉 이미 토지개혁의 권리를 갖고 있던 농민들의 무관심, 미국과 소련 어느 쪽의 후원도 받지 못하고 이중 감시를 당한 그의 부대, 쿠바의 산악지대보다 훨씬 더 불리했던 볼리비아의 정글지대와 같은 것들이 원인이 된 것이지, 결코 그의 신념이 한풀 꺽이어 결국 자살이라는 생각을 품고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변질해가는 자신을 의식하고 ‘죽기 위해’ 뛰어든 전투가 결코 아니었음을 그와 피를 나눈 대원들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환자를 배려하며 사지를 뚫고 다시 민중을 위해 투쟁하리라는 믿음을 지녔던 체 게바라의 드라마를 넘어 신화와 같은 이야기는 그가 죽은 후 더욱 유명해져 중남미 민중들의 의식깊이 위치하게 된다. 그 이후에 체를 견제해서 변질해버렸던 아니던 확실히 쿠바혁명의 전우였던 피델은 체와 그의 대원들을 기리기 위한 국경일을 제정하고 진심으로 애도한다. 결국 그는 진실을 깨달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고집스럽도록 혁명전선에 자신의 몸을 바쳤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신념과 사랑이 내재되어 있었다. 생포 직전 나무에 기록한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는 말을 되새기며 다시 볼 때, 체의 소명의식과도 같은 게릴라 활동이 우리에게 각인시켜주는 것은 무엇인가. 게릴라 활동 속에서도 적군 포로를 하나의 인간으로 대우하고 그들과 토론하였으며 다친 동료를 천식이 도진 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업고 가는 그의 끝없는 사랑에서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를 엿볼 수 있다.



체게바라를 읽고 /대원외고2 권중휘 (빛나는 햇살 도반)

오늘날 체 게바라라고 불리는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쿠바 혁명을 이끈 혁명가였다. 어렸을 때부터 천식을 앓던 체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활동을 했다. 독서면 독서, 운동이면 운동 남에게 지지 않을 정도의 노력가였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그는 의과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그는 그의 인생을 뒤바꿀 값진 경험을 하게 된다. 체는 가족이라고 해도 될 만큼 친했던 친구 알베르토와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여행하게 된다. 고대 잉카문명의 유적 및 유물처럼 신비로운 것들도 많이 둘러봤지만 그가 본 것은 대부분 의료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환자, 가난에 시달리는 농민, 그리고 그에 비해 부를 늘려 자신보다 밑에 있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자본가들이었다. 이를 지켜보면서 체는 이러한 사회 모순은 뿌리박혀야 한다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멕시코에 있던 중 장차 쿠바에서 함께 게릴라 작전을 펼칠 카스트로 형제, 첫 부인이 될 일다 가데아를 만나게 된다. 그들과 의기투합하면서 체는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쿠바에서의 혁명에 동참할 뜻을 밝힌다.
물론 혁명의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체와 대원들은 출발하기 전에도 여러 번 붙잡혀 억류되어 있었어야 했고, 상륙하자마자 공격을 당해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고, 매일같이 시에라마에스트라 산지에서 정부군의 추격을 받기도 했다. 그밖에 배고픔을 견디고 행군하는 일, 농민들을 설득하고 계몽하는 일, 산 속에 존재하는 온갖 벌레들과 싸우는 일 등 그들이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 년 간의 노력 끝에 체와 그의 동지들은 쿠바의 농민, 일반 시민, 그리고 체와 같은 색깔의 이념을 가진 당파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게 되자 이미 와해될 분위기에 있었던 정부군을 쉽게 무찌를 수 있었다. 결국 혁명은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쿠바 내에 국한된 것일 뿐이었다. 세상엔 혁명의 기운을 타야할 제 3세계의 국가들이 많이 있었다. 사명감을 느낀 체는 쿠바에서 산업부 장관이자 중앙은행 총재의 역할을 수행하던 중 다시 게릴라 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가지고 있던 이상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이념을 널리 퍼뜨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상황은 예전처럼 좋지는 않았다.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서 그들의 국익을 위해 견제에 나선 것이다. 신출귀몰한 그의 활약도 결국 볼리비아의 어느 작은 학교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활약은 당시 민중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그 영향은 라틴아메리카를 뛰어 넘어 서방 세계에까지 미쳤다. 또한 이미 신격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체의 움직임은 각국의 독재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기엔 충분했었다. 혹시나 자기의 국민들이 그와 힘을 합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전복시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말이다. 심지어 미국의 대통령, 중앙정보국 CIA, 그와 같은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소련의 KGB에서조차도 직접 그의 활동 제지에 나설 정도였으니 당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체는 라틴아메리카를 뛰어 넘은, 전 인류의 위대한 혁명가였다. 당시 미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제 3세계 민중들의 가난, 고통 그리고 무력함을 희망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이기도 했다. 내가 체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훌륭한 군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의사로서의 자질 때문만도 아니다. 나는 그의 의지, 어떤 어려움과 괴로움 속에서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그 의지를 존경한다. 내가 만약 그때 게릴라의 한 일원이었다면 나도 그처럼 무언가를 위해 싸울 수 있었을까? 혁명 이후 백지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그런 개혁을 추진할 의지가 과연 나에게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러한 질문에 나는 확실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체 게바라는 분명히 이상주의자였다. 미국, 그리고 그 밖의 국제 정세는 그 혼자만의 꿈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엔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완벽히 구연된 이상 세계를 위한 열정을 통해 모든 것을 참아냈다. 그랬기 때문에 서른 아홉 해의 짧은 생애 동안 체는 그 누구보다도 밀도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면모를 바라볼수록 나는 점점 더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의 미래에 대한 꿈은 ‘민중의 위대한 혁명가’의 원대한 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발자취를 좇아보며 깨달은 것은 나 혼자만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엔 분명히 나보다 어려운 사람,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그들을 나락에서 구원하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었다. 아직은 꼭 뭐라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나도 체 게바라처럼 만인을 위한 삶을 살 것이고, 또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