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을 읽고 나서…….> 유진희

난 처음에 이 글을 읽고 “지극히 평범한 외판원이었던 그레고르가 왜 갑자기 흉측한 벌레로 변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레고르는 분명히 집안에서 돈을 버는 유일한 사내였다. 그는 자기 방에 들어가면 문을 잠그고 휴일에도 외출하는 법이 없었던 무기력한 사내였으며 가족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불쌍한 사람이었다.

나는 이러한 변신 전의 태도와 변신 후의 태도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변신 후에 가족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싶어하지만 가족들이 거부한다. 물론 직장도 잃는다. 나는 이것으로 보아 그레고르가 가족들에게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닌 ‘그레고르’라는 존재로 다가가고 싶어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인간인 한 그는 돈을 벌어야 했고 ‘그’라는 존재만으로 다가가기는 어려웠다. 그가 벌레로 변신했던 것은 그의 잠재적 의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에게 돌아온 것은 혐오감과 단절이었다. 경제적 능력이 사라지고 흉측한 모습만 남은 그레고르에게 어머니는 기절을 하고 아버지는 사과를 던져 위협하고 상처 입힌다. 여동생은 처음에는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그의 기호를 존중해 주는 듯 했지만 결국은 그녀가 그를 오빠로서가 아닌 하나의 흉측한 벌레로만 본다는 것을 나타낸다. 나는 이러한 그레고르의 가족들의 태도에서 비정함을 느꼈고 그레고르의 처지를 보고 현대 사회의 개인의 이기심으로 인해 상처받은 영혼의 절대적 고독감을 어느 센가 공감하게 되었다.

그레고르는 가족의 부양자로서의 의무를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는 변신을 이루고 싶은 욕망으로 갑충으로 변신한다. 변신하여 온 결과와 상관없이 그는 단지 변하고 싶었을 뿐이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고 말이다. 현재 우리 사회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그에 걸맞는 변신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사회 발전의 측면에서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을 요구한다. 또한 그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며 응용력을 필요로 한다. 또한 사회 안정의 측면에서는 순종적이고 성실한 사람으로 변하기를 요구한다. 이밖에도 사회는 다양한 모습을 요구하고 우리에게 변하기를 바란다.

나는 그레고르처럼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있다면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이 아닌 내 개인의 욕망에 따라 새로 변해보고 싶다. 아무런 장치도 없이 하늘을 날게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 자연에도 먹이사슬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유지하는 새가 부럽다. 새 한(!)마리가 자연의 순리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생각 하더라도 그것은 사회가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행복과 자유도 누리기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변신’을 읽고 광남고1 곽영란

자고 일어나 보니 벌레가 되어 있었다.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받은 어머니가 나를 부르시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보니 1교시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사고 지각이 3번이면 학생부 감점인데 오늘은 무리겠지만, 내일도 이렇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된다. 게다가 학교 수업을 빠지다니 내신관리에 치명타다. 필기 잘해놓은 교과서를 내게 친절하게 빌려줄 애가 누구 있나 하고 머리를 굴려본다. 그러다가 일단 일어나야할 것 같아서 침대 스프링의 반동으로 옆의 벽에 달라붙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무의식적으로 벽을 활보하고 있는데,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 닫혔다. 잠시 후 다시 열린 문틈에는 공포영화에서 나올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어머니가 계셨다.

만약 내가, 아니 내 또래 아이들이 ‘변신’을 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가족부양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돈버는 존재로 도구화되었던 사회인인 그레고리와 그저 학생일 뿐인 나는, 스트레스의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프고 괴로운 것에는 나이와 상관이 없다. 학생들의 주고민인 성적(내신), 이성, 진로에 대한 스트레스로 괴롭고, 도피하고 싶고, 존재감에 대한 회의가 들어 그레고리처럼 똑같이 ‘변신’을 했다. 혹은 ‘변신’이 되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그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사람들이 당연하게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에 자괴감을 느껴 변신을 한다. 정신병이 있는 아이로, 비행 청소년으로, 멸시받는 벌레로 말이다.  

가수 자우림의 노래 중에 ‘벌레’라는 노래가 있다. ‘나의 맘속엔 나를 먹는 벌레가 살아. 녀석은 나의 뇌 속에 처음 둥지를 틀고, 이제는 나의세포 모두에 자리를 잡아가. 그래서 말이지만 내가 벌렌지, 벌레가 난지.’ 라는 가사가 왠지 마음에 와 닿았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그레고리는 예전부터 벌레를 마음속에 키우고 있었던 것 이였을지도 모른다. 그 벌레는 스트레스와 괴로움을 먹고, 사람을 돈버는 존재로 도구화 시키는 사회의 힘을 받아 ‘그레고리=벌레’의 관계가 성립할 정도로 그 세력이 확장된 것이다. 이것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해당한다. 엄마 몸속에도 벌레가 자라고 있다. 아이에 대한 고민을 먹고, 엄마를 가정부, 아이의 전용 운전사로 만드는 사회의 힘을 받아 그 벌레는 점점 커지고 있다. 아빠, 오빠,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의 몸속에 벌레가 자라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벌레가 아닌 인간인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 중에서 단 하나 날아가지 않은 것, 바로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희망은 앞으로도 벌레가 되려는 사람들을 막아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설사 벌레가 되었다고 쳐도, 그대로 죽지 않고 훌륭한 성충으로 탈바꿈하게 도와주어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을 하게 도와 줄 것이다.



“변신을 읽고“김유정

변신. 이 책은 오랫동안 오빠방 책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책이었다. 재미 없고 지루한 책이니 구석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매우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았다. 또한 작가 소개 글을 보니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분면 평범한 작가는 아닐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 날 갑자기 아침에 일어나자 벌레, 끔찍한 해충으로 변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가 아끼던 누이동생까지 그런 그의 모습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벌레로 변해있는 이상, 집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는 그의 방에만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누이동생은 그런 그를 보고도 매일 식사를 가져다주고 어김없이 들어와 그의 방을 청소도 해주었다. 그것도 잠시 그레고르는 자신이 아끼는 그림을 지키려고 한 것이 화가 되어 어머니를 기절시켜 버렸다. 그의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그레고르가 무슨 폭력이라도 휘둘러 저지른 줄 알고 사과를 던져 그를 위협하였다. 그 사과에 그레고르는 무려 한 달 동안 심한 부상에 시달려 움직일 수 없었다. 그 후 그는 누이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식구들에게 더 이상 자신을 벌레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힘겹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날이 밝아지는 것을 보며 그렇게 주인공 그레고르는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뒤, 식구들은 그 집을 떠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나는 이 이야기가 끝나기 직전까지 그레고르가 인간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처참하고 외롭게 죽는다.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희생한 그가 어떻게 그리 비참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으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사과로 던져 상처를 입히고도 아들이 죽자마자 아무런 죄책감 없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냐고 생각했다. 그의 가족은 정말로 무지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그레고르에게 무의적으로 가족에 대한 부양강박 관념을 심어 준 것 같다. 그를 가족 구성원 중의 한사람이 아닌 돈을 버는 도구로 삼아왔음에 틀림없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짓밟은 것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어쩌면 그레고르는 변신을 당하게 아니라 그 스스로 변신을 한 것일 수도 있다. 회사내에서 셀러리맨에 대한 차별,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떠맡기는 가족, 존재감에 대한 회의,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적인 지겨운 삶을 벗어나고 싶어 변신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부당하게 권력을 쥔 이가 이끌어가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적한다. 힘의 논리로 폭력, 부정부패 등 권력을 유지하는 부정한 방법이 더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그레고르로 표현하여 현실을 고발하고 싶어 한 것 같다.  학력 차별로 성적이 우수하거나 유명 대학에 다니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을 천시하는 사회구조를 예로 들 수 있다. 성적이 우수하지 않으면 인격적으로 무시해도 되며 존재 가치가 떨어지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관념들이 자살을 시도하는 학생들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반드시 올바르게 고쳐져야 한다.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거나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를 혼돈하는 일들이 더 이상 만연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소외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며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하는 사고 방식을 길러야 한다.

내가 만약 변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벌레가 아닌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되고 싶다.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춥다 하면서도 정작 눈이 오면 아이가 된 듯이 기뻐한다. 함박눈이 되어 그레고르처럼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괴로움과 존재감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이들에게 내려 그들 자신에 대한 존재를 잊지 않도록 말이다 또한 하나의 눈송이 보다는 여러 눈송이들이 뭉쳐 내리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우리’를 소중히 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에게 있어 많은 교훈을 준 것 같다. 우리 가족을 더욱 아끼게 해준 계기가 되었으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란츠 카프카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 간직할 수 있어 내게는 너무나도 보람 있고 뜻 깊은 책이었던 것 같다.



-프란츠카프카 ‘변신’을 읽고-  박우진


판타지 소설에서나 들어봤을 법한 제목, 변신을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이게 무슨 책일까 하는 궁금증에 휩싸였다. 인터넷에서 미리 무슨 내용인지 파악해보려 노력도 해보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별 수 없이 그냥 읽는 방법 뿐 만이 내게 남은 것이다.
‘변신’에서 주인공인 그레고리는 잠에서 깨고 나니 등껍질이 느껴지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6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그 생각도 잠시 보통 때면 지금 쯤 나가서 교통편을 기다리고 있을 땐데 하면서 자신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다, 지배인이 찾아와서는 그레고리를 재촉한다. 그레고리는 결국 자신의 변신한 모습을 가족에게 보인다. 그 후로는 여동생의 애정 없는, 어쩔 수 없는 도움으로 밥을 먹고 살아가다가 결국 아버지의 사과에 등껍질의 파손으로 인해 죽어버린다. 그리고 가족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외출한다.
‘변신’은 작가가 의도한 바를 파악하여 읽으려 노력하다보면, 사회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레고리가 자기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는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레고리의 가족이 그레고리를 돈버는 기계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황금만능주의가 생겨나고 이로 인해 돈이 최고다 라는 의식이 그레고리와 같이 돈버는 기계, 비인간화가 되어 가는 요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그레고리가 아침마다 시간에 쫓겨 매일 일찍 일어나 교통편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매우 반복적이고 틀에 박혀 유동적이지 못한 비인간적인 면모가 나타난다.
‘변신’에서 그레고리가 변신한 이유를 찾아보면, 자신의 존재감이 돈을 번다 라는 것으로 생겨나는 이러한 사회적 부조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의 마음일 것이다. 이렇게 개인을 변신할 수밖에 없게 만든 사회적 부조리에는 벌레라는 것에 잘 표현 되어 있다. 벌레란 보통 매우 징그럽고, 보기 싫고, 짜증나는 존재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벌레 즉 곤충 등 따위가 우리에게 몰래 이익을 주고 있을지 누가 알까? 지렁이와 같이 우리에게 남몰래 도움을 주는 행위이지만, 비가 와서 밖에 꿈틀꿈틀 기어다니면, 대부분 밟혀 처참하게 죽어간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한 개인이 사회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다. 그러나, 그 사회는 개인을 짓밟고는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개인은 이런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나 역시 우리나라 사회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으로 당당히 학교를 다니고 있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어떠한 면으로든 국가는 이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학교 생활을 살펴보면, 학생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학교의 방침은 간데 없고, 매일 판치는 선생님들의 욕에, 축제 전에 두발 검사하는 이런 개념 없는 학교와 같이 우리 사회는 나를 철저히 무시하고 짓밟고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나의 마음을 가졌었던 프란츠카프카가 일부로 그레고리를 벌레로 변신시켰을지는 몰라도 나는 적어도 벌레로 변신하기 보다는 그냥 자유로운 한 마리 새가 되고 싶다.
이렇게 내가 나름대로 나의 사회에 대해 생각해보고, 어떠한 문제가 있었나, 그 때난 어떻게 하였는가, 이런 질문을 내게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변신’의 작가 프란츠카스카가 고맙게 느껴진다.  



변신을 읽고  성남고 1 김정훈

;변신‘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혹독한 경제전선의 최전방에서 홀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가던 평범한 샐러리맨이 잠에서 깨어보니 징글징글한 벌레로 변신했다. 어떠한 설명도 복선도 없이 그냥 아침에 눈떠보니 벌레가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이 엽기적이고 약간은 어이없는 설정이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눈물짓게 되는 예민한 열여섯 소년의 감수성에 강력한 데미지를 입혔다. 이 벌레는 쓸때없이 사이즈만 클 뿐 누에처럼 실도 못 뽑고 번데기처럼 먹을 수도 없었기에 가족들에게 외면 받고, 결국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변신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열심히 살아봤자 다 부질없는 짓이니 그냥 오늘을 즐기며 살라는 것인가? 
변신을 읽으면 충격과 함께 분노가 치민다. 그레고리는 우리 사회의 서민층 부모님을 닮았다.
뼈 빠지게 일해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키워놓으니 나중에 나이가 들면 서로 안모시겠다고 발악을 한다. 그레고리는 자신만의 생활을 거의 포기하고 일에 매달린다. 왜? 가족들 입에 풀칠해줘야 되니까. 그런데 막상 그레고리 자신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자 가족들은 그를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그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조차 걸지 않는다. 그레고리의 심정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을 것이다. 사과에 맞지 않았다면 아마 스스로 혀라도 깨물고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러나 치료비를 견디지 못하고 뇌사상태에 빠진 가족의 호흡기를 때는 사람들을 무조건 욕할 수 없듯이 그레고리를 죽인 그의 가족들을 한번쯤 이해해 보려는 시도도 필요하지 않을까.


변신을 읽고 나서   이은주


'변신'은 나에게 흥미로운 소재로 다가왔다. 프란츠 카프카가 말하는 변신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나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책의 분량 또한 길지 않아 쉽게 책장을 펼 수 있었다. 이 책은 시작부터 나를 압도해 단 한 순간도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변신의 이야기였다.

그레고리는 어느 날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 후 벌레로서의 그레고리는 비참한 생활을 한다. 가족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주변 모든 사람들도 그레고리를 무시하며 그는 골칫덩어리가 되고 만다. 그레고리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철저하게 가족들은 그를 감금시킨다. 그리고 그레고리는 죽는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었던 중심 인물인 그레고리가 한 순간에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의 삶은 변신하기 전과 후의 모습이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여기에서 변신은 벌레라는 상징적 객관물을 통해 의사소통이 단절된 인간 소외를 철저하게 암시한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레고리의 변신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드러내었다. 자신의 이해와 상황을 고려해 상대방을 대하는 일상 생활에서의 사람들의 관계는 오히려 비인간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레고리의 변신을 보며 나에게 있어 가장 큰 물음은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보는 것은 어떠할까 하는 점이다. 나에게도 분명 사람들의 이해 관계 속에서 알게 모르게 쌓여있던 현실 도피적 경향이 있었을지 모른다. 고등학생인 나는 치열한 입시 경쟁 속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내게 강요된 기대감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압박감과 함께 변신의 욕망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변신되지 않는 이유는 현실의 불안함을 이기는 자신의 발전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을 버리고 벗어버리는 것보다 지금의 현실을 이겨내는 인간의 특유한 근성이 있지 않은가?

그레고리가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린 채 죽음을 맞아 안타까웠을 뿐 아니라 변신을 다시 변신시킬 수 있는 잠재되어 있는 내면의 힘은 없는지 다시 한번 묻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현대 문명을 살아가면서 숨어 있는 능력을 마음껏 발산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