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주체는 너와 내가 만난 우리
서양정신은 자기만을 사랑한 ‘홀로주체성’
주체와 타자의 참된 만남을 사유하지 못했다
반면 우리 역사는 자기상실의 역사
철저히 잃어봤기에 참된 만남이 가능하다

「서로주체성의 이념」

우리 역사는 최소한 지난 100년만 돌아보면, 자기 상실의 역사였다. 자기를 잃어버리기만 했을 뿐, 자기를 자기로서 정립하지 못했다. 자기를 자기로 세우지 못했다는 것은 주체가 아니었다는 뜻이고, 자유인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주체만이 자유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인만이 주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지평 위에서 자유와 주체 문제를 집요하게 물어온 철학자가 김상봉 교수(전남대 철학과)다.

그는 서양에서 빌려운 주체의 개념이 아닌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낸 주체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립하려고 쉼없이 ‘정신의 노동’을 반복했다. 그 고된 노역에서 발견한 개념이 ‘서로주체성’이다. 그의 최신 저작 <서로주체성의 이념-철학의 혁신을 위한 서론>(도서출판 길 펴냄)은 그의 땀이 밴 ‘서로주체성’ 개념을 ‘홀로주체성’ 개념과 명확히 대비시킨 뒤, 그 개념의 근거를 도출하고 확인하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전작 <나르시스의 꿈>에서 서양 정신의 특성으로 제시했던 홀로주체성을 더 과감하고 더 투철하게 규명하고, 그 한계를 넘어 참된 보편적 주체성으로서 서로주체성을 이끌어낸다.
그가 우리의 주체성 개념을 세우는 데 심혈을 다하는 것은 주체란 것이 애초에 자기 힘으로 자기를 해명하고 형성하는 것 위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해명한다는 것은 세계를 해명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세계를 해명할 때 자기를 해명할 수 있고, 자기를 자기 힘으로, 자기 언어로 말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주체,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자유는 오직 자기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형성해가는 활동 속에서만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지난 시절에도 자유인이 아니었고 현재도 자유인이 아니다. 남이 가진 세계지도와 남이 만든 설계도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주하는 곳은 타자의 지도에 의해 구획되고 규정된 남의 세계”일 뿐이다. 남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노예이거나 머슴이거나 기껏해야 손님일 뿐 자유인은 아니다. 남의 언어를, 남의 생각을 빌려쓰며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정신의 빈곤’ 상태가 오늘 이 땅의 모습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서양 정신에 매혹당했고 압도당했을 뿐, 우리의 지도를, 우리의 설계도를, 다시 말해 우리의 정신을 세우지 못했다고 이 책은 이야기한다.

≫ 김상봉 교수는 ‘서로주체성 이념’의 주창자이다. 새 철학 저서 <서로주체성의 이념>에서 그는 서양 정신의 홀로주체성을 규명한 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서로주체성을 찾아낸다. 너와 내가 만나 서로를 정립하고 ‘우리’가 되는 서로주체성은 타자를 알지 못하는 서양의 홀로주체성을 극복한 진정한 보편적 주체성이다.

지은이는 서양 정신을 ‘나르시시즘의 정신’이라고 규정한다.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매혹돼 자기와 사랑에 빠졌듯, 서양 정신은 자기 안에서 자기와 사랑했을 뿐, 한번도 타자를 사랑해본 적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것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에게 자기를 양도하고 그럼으로써 자기를 잃어버리는 경험이다. 자기를 자기 아닌 타자에게 잃어버린 적이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서양 정신의 특성이다. 그것을 가리켜 지은이는 ‘홀로주체성’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우리는 나르키소스에게 반해 사랑에 빠진 에코처럼 끝없이 그가 하는 말의 메아리만을 되풀이했다.
서양 정신이 자기만을 사랑한 건 그만큼 그들의 긍지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 긍지는 그들이 자유의 발견자요 자유의 개척자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자유로운 삶의 방식에 관한 한 서양 문명은 언제나 역사의 개척자였다.” 문제는 그 자유가 홀로 아름답고 홀로 긍지를 느끼는 상태의 자유였다는 사실이다. 홀로주체의 자유는 모든 타자를 배제하고 부정하는 자유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그 홀로주체의 자유를 면면히 드러내 보인다.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은 그 홀로주체의 자기정립을 정점에서 보여준다. 뒷세대 게오르크 헤겔은 타자를 사유함으로써 칸트를 극복해보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자기 안에서 자기를 객관화함으로써 자기를 타자로 삼고, 그 타자를 다시 자기 안에 통합함으로써 더 큰 홀로주체가 됐을 뿐이라는 것이다.
헤겔과 대결했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니체의 권력의지는 내 안의 힘을 발견하고 그 힘으로써 나를 극복하려는 자기 의지여서, 나르시시즘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20세기 새로운 세계관을 열었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타자를 자기 안의 무의식으로 설정했을 뿐이다. 서양 정신의 이런 나르시시즘은 제국주의로 귀결했으며, 거기에 대한 어떤 진지한 철학적 반성도 주체와 타자의 참된 ‘만남’을 사유하지 못했다.

동-서·남-북 ‘서로주체’로 만나야
지은이는 이런 진단 위에서 서로주체성을 선언한다. 진정한 주체는 홀로 서서는 성립할 수 없으며, 오직 너와 나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가 되는 서로주체가 될 때만 주체로서 성립한다. 만남이란 능동적인 것임과 동시에 수동적인 것이다. 내가 의욕하는 만남도 있지만 내게 닥쳐오는 만남도 있다. 닥쳐오는 만남은 자주 수난이 되고 고통이 된다. 우리 역사에서 서양 정신과의 만남은 수난과 상실을 동반하는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 수난과 상실 속에서도 참된 만남이 가능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왜냐하면 만남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상실의 깊이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철저히 잃어본 적 있는 자만이 만남의 뜻깊은 은혜를 안다.
만남은 부름과 응답의 교환이다. 너와 내가 만나 부르고 응답할 때, 그리하여 내가 너를 형성하고 너가 나를 형성할 때, 그리고 다시 그 너와 내가 우리가 될 때 참된 주체가 나타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 참된 주체의 이름이 서로주체다. 주체는 언제나 나인 채로 우리인 주체, 곧 서로주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서로주체를 다만 이념으로, 철학으로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동쪽과 서쪽, 남쪽과 북쪽이 서로주체로 만날 때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현실이 될 것이다.

“우리 속에서 존재의 진리 끌어내자” 첫 자작서 사유의 씨앗
김상봉 교수는 지금까지 모두 일곱 권의 철학적 저서를 냈다. 그 저서들에서 그는 서로주체성이라는 주제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우고 개념의 나무로 키웠다.
첫 철학 저작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한길사, 1998)에서 그는 서양 철학의 근본 문제인 ‘존재’(있음)의 문제를 파고들어 그것을 비판적으로 규명하려 했다. 벌써 이 책에서 그는 서로주체성을 말한다. “존재의 진리는 고립된 홀로주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서로주체성으로서 발생하는 ‘우리’의 자기의식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나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속에서 존재의 진리를 이끌어내야 한다.”
두번째 책 <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의 탄생> (한길사, 1999)에서 그는 서양 윤리학의 역사를 탐색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관심은 우리 역사에 놓여 있다. “어떤 민족도 윤리와 도덕을 포기한 채 오로지 행복과 쾌락만 추구하면서 그들이 바라던 대로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산 예는 일찍이 없었다. (…) 인간의 행복은 우리가 행복에 대해 적당히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울 때에만 우리 곁에 가까이 온다. 다시 말해 내가 나 자신의 행복을 삶의 최고 목표로 삼지 않을 때, 욕망이 아니라 선과 도덕을 행복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숭상할 때, 도리어 행복은 우리 모두에게 더 가까이 오는 것이다.”

세번째 철학 저작 <나르시시즘의 꿈> (한길사 2002)에서 그는 ‘서양 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을 본격화하고 홀로주체성을 면밀히 따지기 시작했다. “서양철학은 한 번도 자기 밖으로 걸어나와 타자적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적이 없는 닫힌 정신만을 보여줄 수 있는 꿈의 파노라마다. 나르시스는 타자적 주체를 알지 못하는 정신이다. 그는 언제나 홀로주체로서 존재한다. 그의 세계에서는 자기만이 주체이며 다른 모든 것은 그의 객체이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2003)는 서양 정신이 홀로주체성에 갇힌 정신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배워야 할 자유의 정신을 시원에서부터 고민하고 발전시킨 정신임을 그리스 비극에 담긴 자유인의 긍지를 살핌으로써 뚜렷하게 보여준다. 서양정신의 극복은 그것을 일거에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배워 넘어설 때 가능함으로 역설하는 책인 셈이다.

이어 출간한 <학벌 사회> (한길사, 2004)에서 그는 서로주체성을 사회철학적 차원에서 탐구하면서 한국 사회의 질병인 ‘학벌’의 문제를 규명했다.

<도덕교육의 파시즘> (길, 2005)은 이 땅의 도덕교육이 어떻게 진정한 도덕을 가르치지 못하고 정신의 노예를 기르는 노예도덕이었는지 성찰하면서 참된 도덕 교육을 길을 찾는다. 그 길은 지은이의 용어로 말하면, 서로주체를 기르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