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씨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소년 눈에 비친 이웃 사람 좀머씨의 기이한 인생을 담담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그려 나간 한 편의 동화와도 같은 소설이다. 텅 빈 베낭을 짊어지고, 기다랗고 이상한 지팡이를 들고, 항상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잰 걸음으로 묵묵히 걸어다니기만 하던 좀머씨, 그는 이웃 소년의 인생의 여로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만나게 되면서 소년의 마음속 깊이 각인된다.

주요 장면 곱씹어보기

사람들이 좀머 아저씨네에 대해서 특히 <좀머 씨>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지만, 사실은 근방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좀머 씨>를 알고 있으리라는 주장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호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적어도 60킬로미터 내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심지어 개까지도 늘 걸어 다니기만 했던 좀머 아저씨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른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좀머 아저씨는 그 근방을 걸어 다녔다. 걸어 다니지 않고 지나는 날이 1년에 단 하루도 없었다. 눈이 오거나, 진눈깨비가 내리거나, 폭풍이 휘몰아치거나, 비가 억수로 오거나, 햇빛이 너무 뜨겁거나, 태풍이 몰아치더라도 좀머 아저씨는 줄기차게 걸어다녔다. 바다에 쳐놓은 그물을 거두려고 새벽 4시에 배를 타고 일을 나가던 어부들이 해가 뜨기도 전에 집을 나서던 그를 만나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그렇게 나간 그는 달이 하늘 높이 떠 있는 늦은 밤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가 돌아올 때쯤 그가 하루 종일 걸어다닌 길은 엄청난 거리가 되었다.
호수의 주변을 한 바퀴 돌면 약 40킬로미터쯤 되었는데 그 거리를 하루에 걷는 것은 그에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두세 번 군청 소재지까지 갔다 오기도 하였는데 그러면 갈 때 10킬로미터, 올 때 1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가 좀머 아저씨에게는 아무 문젯거리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아침 8시에 여전히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학교에 갈 때면 벌써 몇 시간 전부터 걸어다니고 있는 기운찬 모습의 그와 종종 마주칠 수 있었다. 점심때쯤 지친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갈 때면 어느새 그가 나타나 활발한 걸음으로 우리들을 앞서서 걸어가곤 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창문 밖을 쳐다보면 호숫가에 그의 깡마른 모습이 그림자처럼 나타나 서둘러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는 쉽게 식별이 되는 사람이었다.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다른 사람과 전혀 혼동이 되지 않았다. 겨울이면 그는 검은색에 폭이 지나치게 넓고 길며 이상하게 뻣뻣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너무 큰 무슨 껍질처럼 그의 몸을 감싸던 외투를 입고 지냈다. 그리고 신발은 고무 장화를 신었고, 대머리 위로는 빨간색 털모자를 쓰고 다녔다. 여름에는 -- 좀머 아저씨의 여름은 3월 초부터 10월 말까지여서 1년 가운데 가장 긴 기간이었는데 -- 까만색 천으로 띠를 두른 납작한 밀짚모자를 쓰고 다녔고, 캐러맬색 린네르 셔츠와 캐러맬색 반바지를 입고 다녔다. 그럴 때면 바지 밑으로 힘줄과 울퉁불퉁한 혈관만이 드러나 보이는 억세고 긴 다리가, 우악스러운 등산화 속으로 가려진 부위를 제외하고는, 우스꽝스럽도록 가는 모습을 드러내 보이곤 하였다. 3월에 다리는 눈이 부시도록 흰빛이었고, 울퉁불퉁한 혈관들은 사잇길이 많은 푸른색 강줄기의 모습처럼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불과 몇 주일만 지나면 다리는 꿀과 같은 색으로 변하여 빛을 발하였다. 그리고 가을에는 피부가 햇빛과 바람과 일기 변화로 인해 짙은 밤색으로 변해서 혈관이나 힘줄이나 근육질이 전혀 구별되지 않았고, 다리는 마치 껍질이 벗겨진 호두나무의 울퉁불퉁한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그것들은 11월이 되면 긴 바지와 긴 검은색 외투로 가려져서 사람들의 시선을 멀리한 채 이듬해 봄까지 원래의 색깔인 치즈빛 흰색으로 탈색되어 가곤 했다.--- p.16~

그리고 배낭 속을 뒤적이다가 허겁지겁 버터 빵을 꺼내 들더니 납작한 물병도 꺼내고, 빵을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마치 적이 숲에 깔려 있기라도 하는 듯, 혹은 어떤 포악한 미행자가 있어서 그 사람과 아저씨가 떨어져 있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으며, 그 간격이 점점 좁혀지는 상황이어서 언제라도 그 사람이 그 자리에 나타나기라도 할 듯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사방을 자꾸 살피며 빵을 먹었다. 아니 먹었다기 보다는 마구 구겨서 입 속으로 그것들을 밀어 넣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빵을 다 먹어치운 뒤 물병의 물도 한 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런 다음 몹시 허둥대며 허겁지겁 떠날 채비를 했다.--- pp.97-98


내가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또 그렇게 철저하게 침묵을 지킬 수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나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무위에서 들었던 그 신음 소리와 빗속을 걸어갈 때 떨리던 입술과 간청하는 듯하던 아저씨의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그것은 뭔가 고통스러운 신음에 가까웠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갈망과 절망이 엉켜서 가슴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깊고 참담한 소리였다. 고통으로 괴로워 하는 중환자가 내는 끙끙 앓는 소리 같이 머리카락이 빳빳하게 서도록 만든 그 애절한 신음 소리는 아저씨를 홀가분하게 해준다든가, 아저씨에게 안식을 준다든가, 단 일 초라도 아저씨를 쉬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저씨는 금방 다시 몸을 추스리며 일어났다.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기억은 좀머 아저씨가 물 속에 가라앉던 모습이었다.--- p.120'
처음에 나는 아저씨가 신발을 신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물이 아저씨의 장화 위까지 차 있었다. 둑에서 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등은 나를 향하고, 산 너머에 여전히 남아 있던 마지막 노르스름한 햇빛이 한 줄기 비치고 있는 반대편 둑이 있는 곳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그곳에 박아 놓은 말뚝 같았으며, 약간 구부러진 지팡이는 오른 손에 들고 밀짚모자는 머리에 쓰고 있는 모습이 호수의 환한 수면에 검은색 실루엣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저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발씩 한 발씩 발걸음을 떼어놓으며 세 번째 발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지팡이를 앞으로 옮겨 찍고, 뒤쪽을 단호히 물리치면서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땅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목적지를 향한 아저씨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급함으로 호수 한가운데를 향하여 서쪽으로 반듯하게 걸어 나갔다.--- pp. 111-112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아저씨의 모습은 사라졌다. 밀짚모자만이 동그마니 물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무지하게 길게 느껴지던 30초 혹은 1분이 지난 다음 몇 개의 물방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을 뿐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밀짚모자만이 아주 천천히 남서쪽을 향해 떠내려 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어둑어둑한 원경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오랫동안 그것을 쳐다보았다.--- p.115

<이게 올림바야. 이게 올림 바라고...! >그리고는 선생님이 옷 소매 끝에서 손수건을 꺼내들고 코를 풀었다.
올림 바 건반을 쳐다보던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 건반의 앞쪽 끄트머리에 미스 풍켈 선생님이 재채기를 할 대 콧털에 붙었다가 그 곳을 훔쳐낼 때 둘째 손가락으로 옮겨 붙어 크기가 손톱만하고, 굵기는 거의 연필 굵기만 하며 벌레처럼 휘어진데다가 녹황색으로 영롱하게 빛나기조차 하는 끈적끈적한 코딱지가 붙어 있었던 것이었다.

오래 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아직 나무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내 키는 겨우 1미터를 빠듯이 넘겼고, 내 신발은 28호였으며, 나는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 무렵 정말로 날 수 있었다. 적어도 거의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나니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당시 내가 진짜로 그럴 각오를 하고 제대로 실행에만 옮겼었더라면 실제로 몸을 날릴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 p.7'

그런 것들은 <차를 한 잔 마시세요. 그러는 게 몸에 좋을 거예요>라든가 <의사 선생님, 환자의 상태가 어떤가요? 환자가 이겨낼 수 있을까요?>등의 말들처럼 아무 의미도 없는 쓸데없는 말들이다. 그런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니라, 질 나쁜 소설이나 터무니없는 미국영화에서 생겨난 말들이니까 그런 말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 p.36







지은이 :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
1949년 독일 암바흐에서 태어나, 뮌헨 대학과 엑 상 프로방스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시나리오와 단편들을 썼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여린 얼굴. 가느다란 금발에다 유행에 한참이나 뒤떨어진 낡은 스웨터 차림의 남자. 사람 만나기를 싫어해 상 받는 것도 마다하고, 인터뷰도 거절해 버리는 기이한 은둔자. 이 사람이 바로 전 세계 매스컴의 추적을 받으면서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이다
젊은 시절부터 여러 편의 단편을 썼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34세 되던 해 한 극단의 제의로 쓴 한 예술가 고뇌를 그린 남성 모노드라마 『콘트라베이스』가 〈희곡이자 문학 작품으로서 우리 시대 최고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으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냄새에 관한 천재적인 능력을 타고난 주인공 그르누이가 향기로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향수』, 조나단 노엘이라는 한 경비원의 내면 세계를 심도 있게 묘사한 『비둘기』, 평생을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별난 인물을 그린 『좀머씨 이야기』 등의 중·장편 소설과, 단편집 『깊이에의 강요』 등을 발표하면서 전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대대적인 성공에도 아랑곳없이 쥐스킨트는 모든 문학상 수상도 거부하고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하고 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우울하고 소심한 이 언어의 연금술사도 친구들 사이에 있을 때는 아이러니컬한 유머도 구사하고 적절하게 요점을 지적하는 실력을 발휘하기도 하며, 포도주를 몇 잔 마시거나 하면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한다.

그의 근작인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는 레스토랑 〈로시니〉에서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해프닝을 비극적이고도 코믹하게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독일의 영화 감독 헬무트 디틀과 함께 작업한 시나리오로, 영화화되어 1996년 독일 시나리오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림 그린이 : 장 자끄 상뻬(Jean-Jacques Sempe)
1932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1960년 르네 고시니와 <꼬마 니콜라>를 함께 만들었다. 1961년 첫 화집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를 출간했다.
프랑스「렉스프레스」, 「빠리 마치」 같은 유수한 잡지 뿐 아니라 미국의 「뉴요커」의 가장 중요한 기고자이기도 하다. 프랑스 그래픽 미술대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는 <랑베르 씨>, <얼굴빨개지는 아이>, <가벼운 일탈>, <아침 일찍>, <사치와 평온과 쾌락>, <뉴욕 스케치>, <여름 휴가>, <속 깊은 이성 친구> , <풀리지 않는 몇 개의 신비>,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 <겹겹의 의도>, <파리 스케치>, <겹겹의 의도> 등이 있다.


※ 글 소감

1.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두시오!!"
무언가에 쫓기듯이 항상 잰 걸음으로 정처 없이 떠돌던 좀머 씨.... 그의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사회는 끊임없이 정형화된 인간의 모습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각종 자격증시험, 토익, 토플 등의 시험 등에 치여 산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은 으레 현실과 괴리감이 있는 것들이다. 그것에 몰두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조언을 한다. 덮쳐 오는 압박감이 두려워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나만의 것에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주위 사람들의 질책은 크기가 더해져 집요하게 나를 쫓아온다. 책 속의 피아노 선생님처럼 남을 멋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며 기대하는 것이 우리 사람들이다. 자세히 관여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지레 짐작으로 타인을 자신만의 틀에 맞추려고 한다.
무언가 해야만 하는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어느새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까?...
좀머 씨의 목표는 죽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재촉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던 그의 걸음은 어느 샌가 그 목표를 상실하여 정처 없는 방랑으로 이어졌고, 더 나아가 죽음이라는 종착점에 도달하였을 뿐이다.
오늘도 나는 중얼거린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두어 달라고....


2.
마냥 좋은 어린시절을 지나, 청소년, 청년기, 혹은 장년 혹은 노년기의 어느 순간 한번은 “왜 살지?” 할 때가 오는 것 같다. 이 질문은 사실 누구나 해야만 했던 질문이긴 하다. 하지만 힘든 하루하루가 돌아가고 있을 때는 잘 떠오르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러다 별안간 어느 골목을 돌아서다 마주치는 사람처럼, 우린 이 질문을 맞닿들인다. 카뮈가 말한 침대시트 속의 [페스트]균처럼...항상 거기 있었던 것처럼 불현듯 찾아온다. 사실 먹고사는 일이나 전쟁의 위협도 없을 때, 정말 살만할 때 찾아오기도 한다.

극단적 응답의 하나로 보이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다. 이런 파국은 살아가다 감정적으로 더 이상 감래 할 수 없어(경제적, 실연, 거절, 인격적 모욕) 하는 자살과는 다르다. 이 책의 소년이 피아노 선생님에게 모욕 당하고 나무위에서 뛰어내릴까하는 감정이 치솟은 것과 다른, 선택으로서의 죽음을 좀머씨는 보여준다. 산다는 것의 부조리함에 질려서, 죽지 않기 위해 죽음을 잊어버리려 또 걷고 뛰어도 더 달아날 수 없을 때 스스로 물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게 만드는 절망으로서의 죽음이다.
시지프스의 고난과도 같은 매일 지속되는 무의미, 부조리가 인생이라면 정말 해답은 없다. 죽음만이 해결인 듯 보이고 그런 죽음을 잊고자, 피할 수 있을 만큼 피하여 다니는 삶, 끊임없이 걷거나, 일해야만 잠시 잊어지는 공포와도 같은 삶의 연속이라면...정말 해답은 없다.

작가는 이 사실을 인생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어린아이와 대비시켜 한 고행자 좀머씨의 죽음으로 그려낸다. 피어나는 생명과 시들어갈 일만 남은 [다 살아버린 사람]. 죽음의 무게에 지쳐 한숨 속에 고통이 배어나오던 좀머씨는 끝까지 도망다니지는 못한다.
하늘을 날 수 있었던 아이는, 좀머씨의 죽음이 이유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안다. 이유 없이는 아무도 그렇게 빨리 도망다니듯 걷지도, 성큼성큼 물 속으로 들어가지도, 날 내버려두라고 소리지르지도 않을 테니까... 결국 이 책은 독자에게 이유가 있으니 생각해 보라고 한다. 이 책은 한번 잡으면 단번에 끌어들이는 흡인력으로 끝까지 읽게 한다. 우리의 어린시절 같은 해맑은 아이의 눈에 비친 삶의 어두운 진실이다. 하늘에서 땅으로 다시 물 속으로 마치 가라앉듯 화석처럼 변해가는 육체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우리의 모습과 그 의미가, 너무 경쾌하고 밝은 어린이의 시야 속에서 오히려 더욱 가슴 아프게 시리다. 절망의 끝에는 죽음이 아닌 도약만이 살 길이지만 우리는 이제 우리 힘으론 날지 못한다.


3.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이 좋으나 궂으나 늘 한결같은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들고 거의 텅 빈 가방을 매고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좀머씨. 이 책은 한 소년의 성장과 맞물려, 좀머씨의 기이한 삶과 함께 그의 죽음을 묵묵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이 책을 지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퍽 괴짜같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문학상을 모두 거절하고,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하고 있고, 게다가 자신에 대해 발설한 사람은 누구이던간에 절연을 선언해버리면서 계속하여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그. 좀머씨가 "제발 날 좀 내버려두시오!"라고 하는 모습에서 작가의 모습이 자연스레 오버랩되는 것을 그는 의도한 것일까? 좀머씨의 입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일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맛깔스러운 글뿐만 아니라 장자크 상뻬의 그림까지 느낄 수 있어서 이 책은 더 좋았다. 두께도 별로 안 되고, 책의 본문은 여백이 많아서 내용은 책보다 더 얇은 것 같지만, 좀머씨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도망치듯이 걸어 다녔으며, 대체 뭘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생각 등을 해보면서 자연스레 책의 두께를 늘려갈 수 있었다. 더불어, 좀머씨를 바라보는 주인공 소년의 성장이야기도 풋풋하게 읽어갈 수 있었다. 헌데, 실제로 좀머씨에 대한 이야기보단 주인공 소년의 이야기와 그가 좀머씨를 바라보는 이야기가 더 많이 등장하는데, 왜 책의 제목은 좀머씨 이야기일까? 책 속에서는 그렇게 깊이 있게 다루지도 않았으면서...이런 저런 생각만 남기는 책이다.


4.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공개하는 것은 정말로 제 취미에는 맞지 않는 일입니다만, 이번만은 예외로 좀머씨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좀머씨 삶의 전체를 다루지 않고는 도저히 이야기가 나오질 않아서 말이지요. 양해 바랍니다.

나는 나다. 나는 지구에 살고 있고 수많은 나라 중에 하필 한국에 살고 있고 어쩌다보니 부산에서 태어났고 하다보니 부산에서 계속 살고 있고, 주민등록상으로는 ‘***’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나는 나이고 그런데 나일 뿐이지는 않으며 때로는 어느 바깥 풍경에서 나를 보기도 하고 옆 사람의 독특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성질 더러운 특정한 면에서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나를 알기도 한다. 어떤 때는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기도 하다.

주인공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아예 기재가 되어있지 않던가?) 이 이야기는, 껍데기에 [좀머씨 이야기]라는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모두가 좀머씨라는, 어떤 면에서는 하찮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하찮지만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그래도 결국은 하찮기 만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 좀머씨, 라는 한 남자와 좀머씨를 바라보는 어린 내 모습과 좀머씨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늙어버린 내 모습, 의 이야기다. 시점은 머리카락이 몹시 심하게 엉킨 듯 끊어버리는 것 말고는 해결할 방법조차 없어보이는데 실상 조잡한 면이 없다할 수 없으면서도 꽤나 복잡하지만 또한 명쾌한 면이 있다. 결국 이것은 어느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삶이 외롭지 않고 늙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몸으로 삶과 부딪치는 것은 1:1뿐이다. 1:2로도 맞설 수 없고 영화처럼 17:1로도 맞설 수 없다. 삶은 외로운 시멘트벽으로 홀로 머리를 쳐박아대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도 허용치 않는다. 삶을 깨고 부수고 먹어버리고 그리고 해치워버리는 것은 결국 1:1 나, 그를 버리는 것도 나, 그를 사랑하는 것도 나, 죽는 것도 오로지 나뿐이다. 마음 속에 방이 있다 했던가. 그래, 그것도 아주 여러 개 있지. 여관을 해도 될 정도로 많지. 그렇게 수많은 방 안에서 ‘외로운’ 나는 홀로 벽에 머리를 쳐박아댄다. 시멘트 벽을 깨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홀로 저지르는 사고일 뿐이다.
나는 혼자 사랑해서 슬프고 혼자 산책해서 슬프고 혼자 피아노를 쳐서 슬프고 혼자 숲속을 떠돌아다녀서 슬프고 가지가지. 어린 나는 그 모든 아름다운 유년시절의 기억을 혼자 만들어간다. 여자아이를 혼자 짝사랑했고 그래서 상처받은 것도 나 혼자일 뿐이다. 숲속을 헤매고 있는 어린 눈 속에 미친 듯이 걷고 있는 좀머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하늘 위에 떠있듯이 나무 꼭대기 어느 편안한 가지 위에 비밀 기지를 만들어 앉아 있다. 나는 이런 혼자만의 장소 혼자만의 비밀에 행복해한다. 그런 한편, 나의 아래 땅에서 걷기에 미쳐있는 한 남자가 있다. 두꺼운 외투를 입은 왜소한 남자, 그 사람은 좀머씨다. 하루 종일 무엇을 하는지 왜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왜 사는지 그 무엇도 알 수 없는데 누구도 알고 싶어하지 않은 비밀을 가진 남자 좀머씨. 좀머씨는 지팡이 하나와 배낭 하나를 가지고 하루 종일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여정을 반복하는 걷기를 계속하고 있다. 내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겨 날아오르는 기분을 느낄 때 좀머씨는 지팡이로 땅을 후비며 읍내까지 걸었다가 돌아온다. 누구도 알지 못하고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삶은 가지가지. 나는 피아노 선생의 코딱지에 슬프고 자전거 타기를 배우는 게 슬픈데 좀머씨는 여전히 걷고 있다. 어느 우박이 떨어지던 날, 그를 집까지 태워다주고자 했던 아버지에게 좀머씨는 외친다. ‘제발, 나를 좀 내버려둬요!’라고. 심장이 잠길 때까지 비가 오고, 두개골이 부서질 것마냥 우박이 떨어져도 좀머씨는 홀로 걷기를 원한다. 고집을 넘어선 무언가를 그는 가지고 있다. 우리들 - 감히 우리들이라 칭할 수 있다면 - 이 홀로 생을 박아대는 것마냥.
이런 내가 좀머씨의 최후를 우연히 볼 수 있었던 건, 정말 우연일 뿐이었거나 좀머씨 삶의 어떤 주파수와 내가 일치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가장 큰 건 소설 속 ‘나’와 ‘좀머씨’가 같은 인생의 여관 속에 묵었기 때문은 아닐까. 삶의 언저리를 뱅뱅 돌던 좀머씨가 마침내는 그 심장부 속으로 파고들기로 결심했을 때를 목격한 어린 나를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늙은 나. 누구의 마음의 호수에도 돌을 던지지 못한 좀머씨의 최후는 삶의 끝이 아니라 다시 삶의 시작으로 이어지고, 그 삶의 이어짐이 끝에 다다랐을 때야 비로소 작가는 바라보고 바라봄을 당하는 이 복잡다단하고도 짧은 소설을 쓸 펜을 들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 삶이란 어떠한 짧은 하나의 명쾌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어도 하나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며 어떤 삶이건 그 삶을 지탱하는 마지막 주춧돌은 바로 나라는 것. 감동이나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라 아름다움 뒤의 추함과 삶 뒤의 죽음, 늙음 뒤의 젊음, 결국은 볶음밥 같은 우리네 인생.
이 여관은 무너지려 무너지려 애써도 결국은 초라한 방 한 칸 한 칸에 별 볼 일 없는 인간 하나씩을 가두어놓고 평생을 뱅뱅 돌게 하는 무서운 곳, 살아도 살아도 평온해지지 않으며 평온한 듯 보이지만 죽음을 간직한 곳.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 안의 방에 불을 껐어도 그래도 옆방에는 계속 불이 켜져 있다는 사실. 불은 혼자 켜지고 혼자 꺼지고 말지만 그러나 알고 보니 옆방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는 사실.


5.
가을비가 촐촐하게 내리는 아침. 아파트 입구에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사립초등학교 아이들이 줄을 선대로 분홍빛, 하늘빛, 붉고 노란 빛 우산들이 새초롬하니 비를 맞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난 아직도 그 빛깔들은 내 망막에 아른거린다. 그 빛들은 아마 0.1초 가량 내 망막에 스쳤을 뿐인데...
간혹 이렇게 순간적인 느낌이 오래 남을 수 있다. 아니면 오랜 동안 잊고 살다가 불현듯 떠오르기도 하고. 푸른 바다에 비낀 노을을 보면서 갑자기 생각나는 옛 친구처럼 아련한 기억들.
좀머 씨 이야기를 읽고 싶은 아침이었다. 어린아이들 우산을 보고, 이 책의 삽화들이 생각났나보다. 파트리크 쥐스킨스 자신을 좀머씨에 대입시킨 것일까? 우리는 이 사회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을 맺고 살지만, 그 연관이란 것은 아주 연약한 실과 같은 것이 아닐까. 좀머씨처럼 살아도 - 걷고 중얼거리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 사는 것이고, 죽을똥말똥 아둥바둥 살아도 사는 것인데...
따가운 햇살이 피부에 따끔거리지만, 금세 찬바람에 스러지는 '여름'처럼 'Sommer'씨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물속나라로 조용히 사라진다. 글쎄, 우리는 너무 장렬하게 전사하기를 바라는 거 아닐까.
꼬마가 죽음을 앞두고 친구들과 가족들의 애도, 축복, 집회를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 사회적이지만 '동물'인 인간에게 죽음이란 '향수의 그르누이'와 '좀머'씨처럼 소리없이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런 죽음이 아닐까. 공병우 박사님의 죽음을 떠올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자연스러운 죽음. 마치 사자나 들소들이 죽음을 예감하고 조용히 단식을 청하며 평화로이 잠드는 영면처럼...
어린아이의 파스텔빛 감성과, 평생 짐을 지고 사는 좀머씨의 아픈 정신과, 삶의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이성을 느끼는 쓸쓸하면서도 가득찬 가을비 내리는 아침.


6.
현대인들은 다른 이의 사생활 훔쳐보기에 상당한 관심을 가진다.
연예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우리에게 노출되고 또다른 사회 공동체가 되어 버린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의 급격한 성장이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흥미로웠고 눈 한번 뗄 지루할 틈이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인 것 같다. 마치 누군가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듯한...... 그런 느낌

이 책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이라는 소년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눈으로 동네 아저씨 좀머씨를 관찰한 우스꽝스럽고 투명한 그런 이야기이다. 소년의 눈에 비친 아저씨는 텅 빈 배낭을 짊어지고 길다랗고 이상한 호두나무 지팡이를 쥔 채 끊임없이 걷고 또 걷고 그리고 또 걷는다. 무얼 향해 걷는지 그 목적도 방향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아저씨의 모습이 현대인들에겐 한심하고 가치 없는 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경쟁에서 이기려, 남들보다 더 잘하려 옆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빌딩 숲 속만 걷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좀머씨의 산보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자 어쩌면 세상 가장 부러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비와 우박이 퍼붇던 날 여전히 온 동네를 걷던 좀머씨!
그는 이렇게 외친다.
'날 좀 내버려두시오!'
혼자서 낭만과 고독을 느끼고 싶어했던 것일까?
이 세상은 나 혼자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다함께 어울려 살아가면서 꿈, 사랑, 희망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좀머씨의 '날 좀 내버려두시오!'라는 구절이 '제게 관심을 보여주세요'라는 말보다 더 구슬프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좀머씨는 어쩌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상상에서 나온 그만의 인물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비와 우박이 쏟아지는 어느 날, 좋아하는 소녀와의 약속이 취소되어 슬퍼하고 있던 그 때, 피아노 선생님의 코딱지 사건으로 인해 자살을 하려 했던 그 순간, 이 모든 순간에 좀머씨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앞에 나타났다. 이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함께 해줄 누군가를 찾던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만든 친구가 아닐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걷고 또 걸으며 사색할 줄 알고 자연과 함께 할 줄 아는 친구...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그 친구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어했을 것이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하지만 좀머씨 역시 한참을 그렇게 현실에서 벗어나려 걷고 또 걸었지만 결국은 파트리크 쥐스킨트 눈앞에서 호수 속으로 잔잔히 없어졌을 뿐이다. 그들의 탈출은 그렇게 실패한 것이다.

나도 가끔 일탈을 꿈꾸고는 한다. 나만의 좀머씨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말도 안되는 상상으로 피식 웃음 지어 보기도 하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본다.
하지만 언제나 마지막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로 돌아온 내가 처음과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다른 모습은 아니다. 처음에는 일탈만을 꿈꾸는 소녀였다면 다시 돌아온 나는 이유 없는 일탈을 꿈꾸기보다는 현실에서 하나 하나에 노력하며 재미를 느끼고 꿈을 키워 나가는 .. 언젠간 멋진 모습의 나를 꿈꾸는 그런 아이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와 다정한 문체 그리고 마음을 너그럽게 하는 귀여운 그림.
맑은 하늘의 투명함과 파스텔의 부드러움을 함께 갖춘 기분 좋은 책이다
7.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때때로 그것은 엄청난 압박을 가진 두려움이 될 때도, 삶에 지친 이들에게는 마지막 안식처가 될 때도 있는 그런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곧 죽음의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지금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매진하다보니 결국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죽는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잊어가고 있는 것이다.
좀머씨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 동안 어떠한 것이 안식이며, 어떠한 것이 죽음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쥐스킨트의 책은 동화적이면서도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중에 하나인 이 작품은 어느 작은 마을에사는 '내'가 바라본 좀머씨의 이야기를 다른 작품인데, 좀머씨는 긴 막대기와 들어있는 거라곤 빵과 비옷 뿐인 가방을 메고 하루 종일 걸어다니는 괴짜이다.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되지 않는 그는 화자인 나와 그렇게 친하지도 않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내 앞에 나타나 나에게 어떠한 생각을 심어주고는 떠나곤 한다.
어린 마음에 죽음을 생각하는 내 앞에 나타나 죽음을 잊게 해주는 좀머씨. [그러다가 죽겠어요!]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말에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이야기하는 좀머씨.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라는 말은 그가 세상에 던지고 싶었던 하나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고픈 그에게 일상은, 사람들은 잠시도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않는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죽음을 어떤 식으로 맞이할 것인가? 누구에게도 특별해보이지 않는 좀머씨는 사실 누구보다도 철학적이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8.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장 자크 상페의 그림이 들어있기도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쥐스킨트 이야기>를 읽으려고 보니 이 책을 패러디 한 것이라고 나오기에 먼저 원작을 읽어야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작품 <향수>, <콘트라베이스>를 썼는데, 아주 세밀하게 정교한 짜임으로 써진 책으로 작가의 성격이 보여지는 듯하다. 특히 <향수>는 대학교 강의시간에도 거론될 정도로 인정받았고 연구가치가 있다고 이미 알려진 바이다. 좀머 씨 이야기는 아이의 눈을 통해 서술이 되기에 조금은 무게가 가볍게 느껴지지만 역시나 치밀하고 정교하게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좀머 씨는 늘 바쁘게 걸어다니고 밤이나 낮이나 거의 쉴새없이 걸어다닌 다는 것. 그리고 아내는 집에서 인형 만드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는 것 등 마을 어른들의 입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 사람들 말대로 폐쇄 공포증인지 알지 못한 채 결국 좀머 씨는 물가로 들어가는 모습만을 남긴 채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간다. 읽는 이들이 마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모아 조각조각 이어보며 상상만 해 볼 뿐이다. 그렇게 걸어다닌 것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려고 한 것인지 아님 반대로 뭔가에서 벗어나려고 죽지 못해 막 걸어다닌 것인지는 오직 작가만이 알 것이다.-이러한 궁금증 때문에 <쥐스킨트 이야기>라는 패러디가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좀머 씨의 행동을 우리의 삶에 견주어 보면 동일할 수도 있다. 우리는 멈추면 마치 큰일이 난 듯 늘 도시 생활에 쫒겨 다니고 은퇴한 후에도 남은 인생을 후회 없이 살려고 그나마 남은 기력을 다하여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점은 공감이 가지 않는가. 아니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항상 틀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들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데 좀머 씨는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 제대로 살고 싶어 탈출구를 찾고 있는 중이었을지 모른다. 제발 좀 자기를 놔두라고 하는 절규는 그러한 단서이다. 사람들은 사회 기준이나 관습, 기준 잣대 등에 순응하라고 강요한다. 그럴 때 우리는 날 나답게 살아갈 수 있게 내버려두라고 소리친다. 좀머 씨도 그런 뜻에서 말을 한 것일까. 글 속에서 소년도 그 말이 걸려 좀머 씨의 그 날 밤 행동을 어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도 책장을 덮게 되면 다시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될 것인가...


9.
스무 살 새벽 무렵이면...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전해준 이야기에 잠 못 든 적이 참 많았다. 한 구절의 문장을 읽을 적마다 전해오는 그 만의 문체 마력을 통해 우리는 독특한 향기를 담고 살아가는 그이들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 역시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좀머 씨의 이야기를 소년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무언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좀머 씨의 마지막 말은 나의 마음을 스미듯 스쳐지나 갔다. 그의 애원석인 목소리가 가슴을 울렸고, 머리를 강타한 기분이었다.

‘왜 세상을 향해 그는 도망치듯 쉼 없이 걸어야만 하는 것일까?’
‘왜 그는 잠시의 휴식조차 신음석인 울음을 들려주어야만 했을까?’

좀머 씨의 특이한 삶의 모습을 추측해 보는 것은 쉽다. 보통 사람들처럼 마음 닿는 대로 생각 하면 된다. 하지만 좀머 씨가 걸어야만 하는 이유를... 좀머 씨가 그렇게 힘겨워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아무도 알 수는 없다. 나 역시 그의 삶을 소년의 눈을 통해 들여다봄으로써 잠시 느끼고 생각해 볼 뿐이다. 하지만 좀머 씨를 만남에 있어 그의 애잔한 슬픔에 대해서만큼은 진실로써 느끼고 싶었다.

우선 그는 자유를 갈망하는 소년을 살렸다. 소년은 좋아하던 여자 아이에게 바람맞고, 피아노 선생님에게 오해를 사고, 가족들은 자신을 몰라주었기 때문에 30m의 고목나무 위에서 죽음이라는 의미를 통해 자유를 되찾고자 자살하려 했다. 하지만 좀머 씨가 나무아래에서 조심스레 행동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절망이 만들어 내는 애절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멀어져 가는 지팡이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부족한 행동에 대한 후회와 삶의 희망에 대한 불씨를 타 올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좀머 씨의 기이한 행동들이 일상적인 풍경으로 다가올 쯤, 그는 10월의 호수를 향해 몸을 맡겼다. 소년은 좀머 씨의 모습을 보고 당혹스러워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렇게 아저씨의 모습이 사라지고 밀짚모자만이 동그마니 물위에 떠올라서야 소년은 좀머 씨의 죽음을 느꼈다. 소년은 아저씨의 죽음 앞에 다가온 무성한 소문 사이, 모든 사실을 함구해 버렸다.
‘소년은 왜 좀머 씨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의 마지막까지 전해오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란 말에 대한 좀머 씨와 소년 사이의 약속이 아니었을까... 좀머 씨의 세상을 향한 처음이자 마지막 간청에 대해 소년만이 약속을 지킨 것이 아닐까...

좀머 씨를 평가함에 있어 어떤 이는 세상이 전하는 치열함을 담지 못한 낙오자라 말할지 모른다. 혹은 그를 평가함에 세상을 향해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유를 찾고자한 진정한 순결자라 말할지 모른다. 좀머 씨의 삶에 대해 감히 무어라 말할 순 없다. 다만 그가 부족한 스물 하나의 내게 전해준 무언(無言)의 삶에 대한 도전을 담으라는 말. 그것이 세상을 향한 도전이냐... 자신의 본질에 대한 도전이냐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좀머 씨는 분명 우리에게 순수함을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결국 그 귀결점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나타났지만, 우리는 그가 살고자 한 욕망. 갈망하고 쫓았던 그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좀머 씨와 우리의 약속이며... 좀머 씨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한 마지막 이야기. - 절망과 고통이 나의 생애를 엄습해 올지라도 세상과 나를 향한 삶의 대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함이다.


10.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주인공 좀머씨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뱉은 단 한마디. 솔직히 책 제목으로 내세운 주인공치고는 너무나도 어이없다.(=_=) 요즘 책읽는 재미에 산다.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걸 늦게서야 알았을까 하면서, 이제라도 알게 됐으니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도 해보면서..(^^) 한비야씨가(중국견문록에서..) 1년에 책 100권씩 읽자고 다짐했었던 고등학교 때 일화를 말했다. 나라고 못할게 뭐가 있을까.. 요즘은 정말로 서점에서 재미있는 책을 찾아보고 학교 도서관에서 땀 흘리며 어렵게 보석 찾듯이 책을 찾아서 읽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1년에 100권이라니... 한 달에 10권 이상도 읽을 것 같다. 1년=12달 120권은 흠씬 넘겠다..(^^) 이번달부터 START~!!

아.. 서론이 너무나 길었다..(*-_-*)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고.(이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_=) 아무튼 너무나 황홀하다.. 원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유명한 <향수>를 빌리려고 했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고 더불어 이 얇은 책 한권을 보게 되었다. <좀머씨 이야기> 아무리 책 안 읽었던 나라도 제목쯤은 한번 들어봤었는데, 책이 정말 얇아서 1시간이면 무난하게 읽겠다 싶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읽었다. 웬걸.. 1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중간에 나오는 삽화.(간단하면서도 참 웃음이 자꾸 나오는..^-^)장자끄 상뻬? 이 사람 이름도 여러번 들어봤다..(호호~ 유명한 사람 두 명이나 알게 되었다~>.<)

우선 이 책을 읽고난 소감이라면, 우선 책두께가 얇다. 그리고 내용도 어렵지 않다. 좀머씨라는 이름도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짚으며 하루종일 걷기만 한다. 사람들의 무성한 추측을 낳으며. 그리고 내뱉은 한마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어이없음이로세..) 이렇게 보면 극중 화자인 '나'가 주인공인듯, 그리고 그의 성장소설인듯 싶다. 하지만! 왜 좀머씨 이야기라 이름 붙였을까.. 소년은(사랑을 위해 준비하는 남자의 모습, 꽤 괜찮았다!) 좋아하던 소녀에게 바람맞고, 늙은 피아노 과외강사(?)의 히스테리에 상처를 받아 자살을 결심하지만,ㅋ 웬걸. 좀머씨 때문에(덕분에?!) 미수에 그친다. 그리고 결국 좀머씨가 자살을 한다....(끝까지 알수가 없군.. 작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우울하고 내향적인 성격에 사교를 싫어하는 작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흠..^^)

어찌 보면 황당할 정도로 내용은 끝이다. 하지만, 이 가벼운 책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너무나 예쁘고 어울리는 그림들.(개인적으로 소년이 소녀에게 바람맞고 서로 다른 길로 걸어가는 그림에 좀머씨가 기다란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모습이 멀리 조그맣게 그려진 삽화가 가장 인상적이었고 마음에 들었다.♡) 머지않아 <향수>로 만날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결코 쉽지않은 이 범상치 않은 이름!)와의 가벼운 악수정도였다고나 할까. 반가워요~☆*^ㅡ^*


11.
책을 읽고 난 후, 정말 좀머씨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야 했다. 좀머씨의 특이한 행동과, 좀머씨의 죽음이 나의 가슴 한 구석에서 얕은 파장을 일으켰다. 좀머씨 죽음으로 끝난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도, 어딘가가 채워지지 않아, 좀머씨가 호수로 들어갔던 장면을 다시 읽고, 다시 읽고... 여러번 되새기면서, 좀머씨의 죽음에 생각하다가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제발 나를 가만히 놔두시오!” 이 한마디만이 내가 들은 좀머씨의 유일한 말이다. 좀머씨의 죽음을 바라보는 훌쩍 커버린 소년...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말과 함께 막을 내린다. 솔직히, 지금으로서 내가 딱히 할 말이 없다. 가슴 한 구석이 매워지지 않았다. 궁금증이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난 좀머씨의 죽음이 무얼 뜻하는지 정말 궁금하다. 내가 좀머씨의 죽음에 이렇게 매달리는 건 정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정작 어느 것이 맞는지 고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생각이 100%맞는 것도 아니여서..나는 고작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죽음이란 무서운 단어라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좀머씨의 죽음은 왠지 무서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평화로운 것 같이 느껴진다. 호수에서 찬찬히 사라진 좀머씨의 죽음은 여태껏, 자신을 숨막히게 조여왔던, 밧줄을 풀고,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같이 느껴진다.

반면에, 좀머씨는 숨막힌 세상에 스스로 무릎 꿇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삶을 완성하기도 전에... 애처롭게 인생을 접어야 했던 사람.. 그런 사람들의 대표가 되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좀머씨는 자신에게 쌓여 있었던 세상의 더러운 먼지들을 말끔히 씻어내기 위해서, 하루종일 걸어다녔을지도 모른다. 밀폐공포증이란 꼬리표를 달고 하루종일 걸어다녔던 좀머씨, 다른 사람들에게 정신병자로까지 비춰질 정도로 유별난 행동을 한 좀머씨... 전쟁에서 입은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좀머씨는 하루종일 걸어다녀도 계속 쌓이기만 하는 답답함 때문에, 내면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그토록 끝없이 걷고 또 걸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끝내 세상을 일구지도 못한 채 날개를 접어야만 했던 사람... 이제 보니..좀머씨는 너무 불쌍한 사람과 동시에 자살 생각까지 했던 소년에게 인생에 있어 큰 교훈을 안겨주고 떠난 사람이다. 나아가서는 우리들에게도, 의미 있는 삶을 살라는 작은 외침을 들려주는 것 같다.

비록 주위 사람들에게는 비난받는 삶을 살았지만, 하늘에서는 아내와 함께, 티끌없이 깨끗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소외계층이여서, 억울하기도 했던 좀머씨... 그의 죽음 뒤의 그가 전하는 작은 외침도 마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언젠간 그 마을 사람들도 느끼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작은 소년에 의해서 말이다.

정말 “좀머씨 이야기”는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 깊이 있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하게 해준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좀머씨의 죽음에 내가 이토록 매달릴 줄 누가 알았던가? 그리고, 이 죽음에 대해서, 사뭇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줄은 나 자신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 하면, 이 책이름을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참! 좀머씨를 보는 각기 다른 입장들 중에서, 좀머씨는 지은이인 파트리트 쥐스킨트 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운둔자 생활을 철저히 한 지은이... 정말 자신의 삶을 그려내고자 한건 아닐까? 간접적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고 싶어서 그런건 아닌지...생김새까지도 얼핏 닮은 두 사람... 나에게 오랜 만에 깊이 있는 생각에 잠기게 해준 사람들이다. 지금 다시 지은이의 파리한 얼굴을 떠올리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글을 맺을까 한다.


12.
죽음 앞에서 초연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누구나 세상에 대한 미련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걱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려 하지만 결국은 어쩔 수 없이 죽음과 계속 가까워지는 삶을 살고 있다. 좀머씨..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을까? 아니면 죽음을 향해 계속 달려간 것일까.
한 순수한 소년의 눈에 비친 좀머씨는 이상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걷기 시작하여 밤늦도록 계속 걷는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변하는 건 옷차림뿐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왜 그렇게 걸어야만 하는가.
소년은 그 이유를 자신이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깨닫는다. 세상과 결별을 선언하며 오른 나무위에서 그는 좀머씨의 모습을 보게 된다. 주위를 부산하게 살피며 고양이를 피해온 쥐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그를 보며 소년은 죽음과 좀머씨와의 관계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소년은 다시 나무에서 내려오게 된다. 죽음을 포기한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소년은 다시 좀머씨를 보게 된다. 호수로 점점 빠져드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말이다. 좀머씨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소년은 지켜보고만 있다. 아마도 좀머씨를 붙잡지 말아야겠다고 느꼈으리라. 그만큼 소년은 성장해 있었던 것일까..
참 짧은 이야기의 책이다. 좀머씨의 이야기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난 읽은 시간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음과 삶, 세상과 나, 이 두 관계를 고민할 수 있었다.

난 스스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늘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죽음을 마치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 난 죽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난 죽음에 직면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그런 교만한 생각을 해왔었던 거 같다. 절실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 앞에서도 내가 초연할 수 있을까? 난 그만큼 오늘을 떳떳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한 책이다.


13.
누구나 다 어린 시절을 겪는다. 그것이 즐거운 일이든 슬픈 일이든 우린 그런 일들을 겪으며 성장하거나 아님 멈추어 선다. 그렇지만 이 귀여운 좀머씨 이야기는 성장과 멈춤이라는 절묘한 경계사이에서 우리를 자극시킨다. 성장과 멈춤은 결국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작가는 말하고자 한 것 같다.(적어도 내 생각엔 그렇다.) 그리고 주인공과 내가 거의 동일시된 것 같이 느끼는 것도 역시 작가의 역량이 아닐까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에서 작가의 능력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 확실히 알았다. 사실 그 동안은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어떤 독특한 사람이 창조해낸 상상의 나라를 여행한다는 생각보다는 거의 현실 그 자체로 인식했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 작가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작가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한 장의 사진을 읽으면서도 몇 번씩이나 보았다. 도대체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 갈까? 그런 쓸데 없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파고 들었다.

사실 이 소설은 허구라기보다는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구나 라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소설을 더 풍성하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좀머씨가 마지막 죽는 장면에서는 너무나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정말 죽는 거 맞나 하고 몇 번이나 스스로 반문해 보았다. 실제적으로는 죽은 것이지만 좀머씨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몸이 근질 거려서 도저히 무덤 속에 오래 못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또 어디에서 돌아 다니고 있겠지....

내가 사는 어느 곳에서나 나는 좀머씨를 만날 수 있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무제한 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세계가 모든 것인냥 자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못 벗어나고 결국은 그 테두리 안에서 죽어 간다. 오직 그것이 슬플 뿐이다. 누구나 방황을 할 수는 있다. 그것이 가끔씩은 가장 쓸데없어 보여도 우리의 성장의 소중한 밑거름이 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좀머씨처럼 방황만 하다가는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할 것이다. 결국은 죽기 밖에 더 하겠는가? 우리 항상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따라야 한다. 목표를 정할 시간이나 틈이 없어서 항상 방황만 하는 것처럼 바보 같은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14.
이 책은 한동안 입소문으로 퍼지고 퍼져서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책이다... 중2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는데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고 계속 걸어 다니기만 하는 좀머씨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했던 기억이 난다...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에게는 아무런 볼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고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누구를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서 잠시라도 머무는 일도 없었다. 벤치에 단 몇 분이라도 앉아서 쉬지도 않은 채 그대로 선 자세로 돌아서서 계속 걷기만 하는 그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번 째 읽은 건 고2가 되어서였다. 다시 만난 좀머씨는 아직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처음 읽었을 땐 주인공과 같은 입장에서 좀머씨를 바라보았는데 두 번 째 읽을 땐 좀머씨의 입장에 좀더 다가가서 그를 바라보았다.

주인공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경마장에 간 날에 하늘이 흐려지고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급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폭우 속에서 여전히 걷고 있는 좀머씨를 발견한다. 아버지와 소년은 차에 타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좀머씨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아버지의 '그러다 죽겠어요'라는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장편 소설 [향수]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면서도 굳이 이곳 저곳으로 은둔처를 옮겨다니면서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좀머씨에게 아무런 목소리를 주지 않다가 이부분에서 유일하게 그에게 목소리를 주었다 처음으로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애원했던 좀머씨의 소원은 분명 작가 자신의 바람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전 좀머씨 이야기를 다시 읽었을 때야 비로소 그가 왜 계속 걸어다니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좀머씨가 '밀폐 공포증 환자'라는 사실은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아~ 그래서 그렇게 매일같이 계속 걷고 또 걸었던 거구나.'

소년과 내가 마지막으로 좀머씨를 보게 된 건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가 호수 가장자리에 좀머아저씨가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처음엔 아저씨가 신발을 신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데 자세히 보니 물이 점점 아저씨의 몸 위까지 차기 시작하는걸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된다. 하지만 소년은 그 자리에 그렇게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 지르지도 못한 채 물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아저씨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소년에겐 아저씨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과연 좀머씨 삶은 무엇이고 그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 좀머씨는 그 단 한마디 외에는 아무 말도 않고 그냥 걷기만 계속 걷기만 했다. 그런 그가 나에게 해 준 말은 그가 매일 걸었던 것처럼 그렇게 매일을 살아가라는 거였다.

좀머씨 이야기를 읽으며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다음에 좀머씨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되면 그땐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15.
설날 때 외숙모가 선물로 준 이쁘고 얇은 책이 있어.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이국적이고 발음이 무진장 어려운 작가의 책이었지. 좀머씨 이야기라곤 하지만 사실 좀머씨 이야기는 얼마 안 됐어. 주인공 '나'라는 소년이 마을과 학교를 돌아다니다가 겪는 일이 대부분이고, 우연히 간간이 마주치는 '좀머씨'에 대한 이야기는 그 반의 반 정도밖에 안 되니까. 그런데도 다 읽고 나면 소년보단 좀머씨가 더 기억에 남으니 신기한 노릇이지. 역시 제목의 힘인 것인가? 제목부터 세뇌당한 걸지도 몰라.

'이 책 속의 조연 '좀머씨'에게 초점을 맞춰 읽어라'라고 말이야. 아무튼 좀머씨는 등장한 거에 비해 무척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람이야. 하도 하는 행동이 이상하고 기이해서 그럴거야, 아마. 그 사람은 늘상 걸어다녀. 굵은 나무 지팡이 하나를 짚고 배낭을 메고 목적없이 계속 계속 걷기만 하는 거야. 잠깐 쉬어서 밥을 먹을 때도 우걱우걱 대강 빵을 우겨넣고 주변을 힐끔힐끔 거리면서 그야말로 '에너지 충전'을 위해 먹는 것에 다름 아니지. 그는 처음에는 어떤 무엇가를 위해 걸었을거야.

그런데 걷다보니 걷는 것이 그의 목적이 된 것이지. 너무너무 걷는 데 열중하다 보니 그는 자신이 왜 걸어야 하는지를 잊은거야. 전쟁은 끝났고 그래서 도망칠 필요가 없는데도 그는 그것을 잊어서 계속 걸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이 사람은 어쩌면 초능력자일지도 몰라! 무슨 소리냐구? 우박이 쏟아져 주인공 소년이 타고 있는 자동차 지붕이 우그러질 지경이었는데도 좀머씨는 얇은 모자만 쓰고 있었으면서도 멀쩡했거든.
설마 머리가 철판보다 단단할 리는 없었을테니 방어막(실드)라도 쳤던 걸까? 아니면 투철한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 앞에선 대자연의 방해물도 한낱 먼지만 못한 것이었을까? 아무튼 신기한 사람이야 정말.
그런데 걷고 걷고 또 걷다가 그가 결국 어디로 갔는지 알아?
그는 호수로 들어갔어!!
그래서 죽었냐구?
몰라. 주인공 소년도 흘낏 봤을 뿐이고 그 후로 그 마을에서 그를 본 사람은 없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지. 그는 장소를 옮겨 어딘가에서 또 그렇게 열심히 걷고 있는지도.
그런데 말이야, 계속 땅만 딛던 그가 왜 물을 디뎠을까? 그 물컹하고 차가운 것을.
그는 어쩌면 디뎌지지 않는 액체인 물을 디딤으로써, 걸을 수 없는 곳을 걸음으로써 그의 길고 길었던 걸음을 멈추고 싶었는지도 몰라. 스스로는 도저히 멈출 수 없었던 그 걸음을 차가운 물에 의탁해 끝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이상해, 왜 이렇게 애잔할 걸까. 그냥 이상한 사람이잖아. 계속 걸어다니던 사람. 그런데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왜 나는 지금 눈시울이 화끈댈까. 좀머씨, 당신은 지금 어딘가에서 또다시 걷고 있나요, 아니면 물 속에서 비로소 편히 누워있나요?


16.
이 책은 자신의 어릴적 과거 이야기를 이미 다 커버려 현실을 알아버린 사람이 과거 동심의 세계에서 겪고, 생각했던 것들을 더듬어가며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이 책의 서술자는 꼬마 소년도 '나'이다. 책 속에서 소년 '나'의 특별한 이름도 나이도 분명히 밝히지 않은 것은 어쩜 쥐스킨트 자신의 의도적인 설정이 아니었을까? 좀머씨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던 소년. 쥐스킨트는 그 소년도 좀머씨와 비슷한 설정을 통해 접근시키려 했던 것 같다. 또 좀머씨의 행동을 보면 정신병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어떤 사회로부터의 도피, 두려움으로 인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는 이런 혼란스럽고 더럽혀진 사회가 아닌 순수하고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평화로운 사회를 찾아 끊임없이 걷고 또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은 특별한 줄거리도 클라이막스라고 이름붙일 만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없다. 그저 한 소년의 눈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세상, 그 소년이 겪는 생활 등을 소년의 입을 통해 얘기하고 있다. 소년이 좋아하게 되는 카톨리나라는 소녀이야기, 그 어린시절의 순수한 사랑의 감정, 괴팍한 노처녀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우며 혼날 때 느끼는 어린아이의 자살감정, 옛날 TV가 흔치 않았던 시절 남의 집에서 TV를 보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의 호기심 많고 장난스러운 모습 등 유년시절 우리가 경험했던 사소한 일상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소년의 삶 가운데 가끔씩 스쳐가는 좀머씨 이야기를 소년의 순수한 시각으로 잔잔하게 적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 좀머씨 정체는 좀처럼 알 수 없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한 채 실망감만을 표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안에서 우리는 냉혹한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따스함과 뭔가 목적의식을 갖고 이익을 바라며 사는 우리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그 순수함의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이 책 저자인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좀머씨를 통해 표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좀머씨의 삶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좀머씨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바쁘게 살아가며 이익만을 추구하는 우리들을 더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을까?

철저한 은둔생활을 하는 쥐스킨트는 햇빛을 싫어해 모든 창문을 가리고 사는가 하면 누군가 그의 작품에 대해 무슨 대화라도 하려하면 금방 질색을 하며 사나운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이런 쥐스킨트의 모습이 바로 여름이나 겨울이나 상관없이 항상 오른손에는 길쭉하고 약간 구부러진 지팡이를 쥐고 등에는 텅 빈 배낭을 짊어지고 뭔가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잰 걸음으로 이 마을 저 마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하는 좀머씨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눈에 띄는 말, 쥐스킨트가 꼭 한번 주인공 좀머씨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부여한 부분이 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처음으로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애원했던 좀머씨의 소원은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이 사회에서 쥐스킨트 자신이 자신의 글과 자신이 그런 사회에서 이익을 쫓아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그만의 순수하고 독특한 삶을 살아가고 싶은 바람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좀머씨. 죽음까지도 소리없이 행했던 좀머씨.

소년은 우연히 좀머씨의 죽음을 목격하지만 끝까지 누구에게도 좀머씨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혹시 소년은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며 얘기한 항상 무언가를 두려워 하며 이 세상에 항거하는 듯한 좀머씨 생각을 이해라도 한 것이 아닐까? 끝내 좀머씨는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도 않은 채 조용하게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이 한 마디만을 남긴 채.


17.
섬이 되고 싶을 때 읽고 싶은 책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겠지.
이 지겨운 인간들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혼자가 되서 차라리 쓸쓸해지고 싶다.
섬이 되고 싶다, 나만의 섬에 처박히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으로 또 불안하기도 하다.
내가 사회성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내 인격에 문제가 있나, 나는 사회 부적응자는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 때 읽으면 위로가 되는 책이다.


18.
<좀머 씨 이야기>는 내가 초등학교 때 사서 읽었던 책이다. 이 책을 사기 바로 전에 나는 <까트린 이야기>라는 책을 읽었었다. 그 책의 총 페이지 수는 104쪽 이었고, 104쪽 모두 글자로 빼곡이 매워진 종류의 것이 아니라 종종 아기자기한 삽화가 그려 넣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매우 인상이 깊었다. 그 후 며칠 뒤에 나는 서점에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제목의 어감도 비슷하고 페이지 수 또한 120쪽 이었으며, 장 자크 상페라는 사람의 삽화가 그려 넣어진 소설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책이 바로 <좀머 씨 이야기>다.

내용상의 구조는 주인공이 어렸을 때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돌이켜 보면서 그에 연관되어 좀머 씨의 일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어렸을 때 언덕에서의 어린이의 날개 짓과 좋아하는 소녀를 위해 준비했던 모든 것의 쓸모 없어짐. 그리고 피아노 선생님 댁에서의 기분상하는 일 때문에 자살 충동을 느껴서 자신의 특기인 나무 타기를 시도해서 30m높이의 나무에 올라가는데 성공하지만 좀머 씨의 신음으로 가득찬 휴식을 내려다보고는 자살기도 포기. 우박 속에서 좀머 씨와의 만남에서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라는 외침 뒤의 좀머 씨의 실종으로 요약할 수 있다.
주인공인 ‘나’가 좀머 씨라고 하는 사람에 대하여 바라보며 썼던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로써 이 이야기의 중심 내용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의 유년기에 강한 인상을 남겨 주었던 좀머 씨에 대한 내용이다. 좀머 씨는 밀폐 공포증이라는(정도가 아주 심한)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항상 길다란 호두나무 지팡이와 배낭을 가지고는 걸어 다녔다. 일년 열두 달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 다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방에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온전한 이름조차 모른다. 후에 그가 더 이상 나무를 탈 수 없게 된 주인공이 보는 앞에서 죽음을 향해 걸어 들어간 후에 (호숫 물 속으로 걸어갔으니까 죽었음이 틀림없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온전한 이름을 알게 된다. 막시 밀리 안 에른스트 애기디우스 좀머......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른이 되어버린 주인공의 추억을 회상하는 분위기이다. 항상 그렇듯이 현실은 추하다고 느껴지고, 추억은 항상 아름답게 기억되기 마련이어서 매우 부드럽고 선한 느낌을 지니고 읽을 수 있다. 그 누구도 약한 마음으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종류의 것이고, 그저 순수한 마음만으로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소박함이 배어있다. 하지만 글의 전체적인 내용이 가볍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순수하고 화려한 장식이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좀머 씨의 죽음을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공포와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자에 대한 동정일까? 어쩌면 주인공도 좀머 씨를 동정해서 그가 호수 속으로 걸어갈 때, 침묵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을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를 그리워 하지 않았다. 좀머 씨의 부인인 리들 아주머니는 좀머 씨의 몇가지 물건들을 지하실의 한 구석으로 몰아 놓고, 그 방을 여름 행락객들에게 빌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여름 행랑객’이라고 부르지 않기 위해서 어지간히 노력을 했다. (좀머 Sommer 씨는 독일어로 ‘여름’이라는 뜻)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계산적이며, 비인간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에 슬프다. 같이 마주하며 살던 사람이 사라졌음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단지 ‘눈에 걸리적 거리던 무언가가 어느날 사라졌다’ 뿐인 것이다. 아니, 농담 거리는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런 그들에게 좀머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좀머 씨에게 베푸는 마지막 배려일 것이다.


19.
어릴 적에 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난 그렇게 감상적인 아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참 좋아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치마를 입던 바지를 입던 그냥 나무위의 굵직한 가지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 보며 놀곤했다. 그때는 나도 곁가지가 없는 나무를 잘 타고 올랐었는데.. 주인공 아이의 나무타기가 너무나 그리운 날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아이가 좀머씨를 볼 때 아마도 나무 위에서 가장 오랫동안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무 위에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바라볼 수 있다. 바라보지 말래도 바라볼 수 있다. 누가 어쩔 것인가. 나무 위로 날 잡으러 오지 않는 한..

다른 사고의 폭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시절, 자신의 사고로도 꽉차 삐져나오려는 시절.. 소년은 좀머씨를 알고 있다. 항상 걷는 사람,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가는 사람.. 소년이 그를 알았으나 그를 내버려뒀듯이 나도 그를 그냥 내버려두고자 한다. 그의 그런 모습을 잡아주고 고쳐주고 도와주는 게 옳다고 할 것인가.. 옳음을 넘어서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방식으로 타인을 돕고자 한다. 자신은 성의를 보이지만 그것이 남에게 고역이 될 수도 있다. 비가 오던 날, 아니 비가 우박이 된 날, 소년과 소년의 아버지가 좀머씨에게 보인 동정은 그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소년은 끝까지 그를 바라보기만 한다. 난 그런 소년의 모습이 좋았다. 이 세계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고 서로가 있기에 존재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에 항상 완벽한 답을 내놓을 수는 없다. 이 세상은 그렇게 완벽하지 않다. 그냥 바라보는 게 수 인 경우가 있다. 그냥 바라보고, 응시하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으면서 주제넘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는 것도 일종의 거만이다.

그렇게 좀머씨를 바라다보기만 하면서 난 소년의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에 심취해버렸다. 웬지 소심하고 하나의 사고에 몰두하는 바보같지만 열심인 소년이 좋아져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좀머씨를 잊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20.
앞표지의 그림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던 이 책을 펴는 순간,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글임을 알았다. 나는 경건서적을 제외하고는 동화체 이야기나 대지와 같이 일상생활을 세세히 다룬 소설을 참 좋아한다. 이 책의 주인공이 세세히 묘사하는 그 마을 풍경과, 자신의 삶과 그리고 좀머 아저씨 이야기에서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숲의 축축한 기운과 아저씨한테서 나는 것만 같은 퀘퀘한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기껏해야 2시간이면 읽은 이 동화 같은 책에서 이런 많은 것들, 많은 느낌을 불러내는 것이 쏟아져 나온다는 게 요술 같은 일이었다. 어린 주인공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처럼 말이다.

이제 고2. 다시 펼쳐 본 이 책에서 나는 저번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 왜 좀머아저씨는 그렇게 끊임없이 걸어야 했을까?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는 아무도 상관치 말라고 소리쳐야 했을까? 왜 호수로 걸어 들어가 그의 생을 거기서 끝내야 했을까...
극단적인 이기주의는 극단적인 이타주의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참으로 맞는 말이라 생각했다. 강한 부정을 긍정이란 말이 있듯 극단적인 행동의 원인은 그 반대의 끝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는 너무나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특별한 기술도 없고 너무나 무료하게 시간이 가고 있다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심지어 부인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언제부터인가 끊임없이 걷는 것으로 아주 바빠질 수가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걷기 시작하여 밤 늦게 까지..
그가 중간에 짧은 휴식을 취했을 때 (소년이 나무에서 떨어지려던 그 순간!) 그가 그렇게 괴로와 하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휴식은, 노동으로 오는 참된 보람의 휴식이 아닌 그가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하던 무력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왜 아무도 그에게 상관하지 말라고 목에 핏대를 세웠을까? 외로왔기 때문이다.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잊어보려고 그는 걸었고 때로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도 '다시 잃어 버린다는 두려움-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으로 인해 스스로 고립되는 쪽을 선택했다.
이 책의 동화적인 어투에 비해 얼마나 철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안다 (물론 그 철학적인것에 대해 논쟁할 실력은 없지만). 그러나 나는 사람과 그 심리를 아주 간단한 욕구에서 찾고 싶다. 첫째,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란 느낌, 둘째, 자신이 사랑받고 보살펴지고 있다는 느낌. 결국 인간의 힘으로, 그것도 혼자의 힘으로 풀으려 평생을 버둥거렸던 좀머씨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가 가치 있는 것은 우리의 doing이 아닌 우리의 being이란 말이 있다. 우리가 어떤 대단한 일을 하고 있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결국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 것,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이루고 있다는 확신 아닐까.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혹은 우리가, 이렇게 방향도 없이 뛰고 있을까. 자신이 '무언가' 란 확신을 쫓아서 말이다. 이제 잠시 그루터기에 앉아 쉬어보자. 속도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잡아 그 길에 주어진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음미하며 즐기며 살아가는 멋진 여행이 우리의 삶이 되길 소원한다.


21.
몇 년만에 [좀머 씨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소설의 내용은 변한 것이 없는데, 내가 받은 느낌은 처음과는 또 달랐다. 무엇 때문일까. 처음 읽던 [좀머 씨 이야기]는 그저 단순한 '어른을 위한 동화'였다. 에피소드마다 삽화를 곁들여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맑은 동화 같은 소설이었다. 그 시절 난 소설을 읽으면서 좀머의 죽음에 연민을 가졌을 뿐, 그의 불행한 인생의 의미는 무심코 지나쳤었다.
하지만, 오늘 읽은 [좀머 씨 이야기]는 그땐 느끼지 못했던 깊이가 있었다. 평범한 듯 하면서 평범하지 않은 소설. 소설은 자꾸만 내 마음의 껍질을 파고 들어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것은 바로 무한한 시간의 겉 테두리 위에 얹혀진 우리 삶의 모습 속의 밝은 면이 아니라 그늘에 가려진 어두운 명암이다. 하지만, 이 명암들은 모든 일들의 의미를 알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 소년 시절의 회상을 통해서 말하기에 무겁지 않다.
소설 속 화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돌이킨다. 유년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환상과 현실의 범벅이 된 꿈처럼 몽롱하고 어렴풋한 기억의 조각들이 몇 가지 인상들과 함께 남아서 흔적을 남긴다. [좀머 씨 이야기]는 그런 파편으로 남은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 좀머라는 남자와 관련된 혼자만의 비밀을 조심스레 꺼낸다.

전쟁(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마을로 들어온 좀머는 호두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손에 쥔 채 텅 빈 가방을 등에 메고 '이른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마을 근방을 걸어다녔다. 그러나 마을 사람 중에서 '그가 어디를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다니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걸어다녀야만 했을까? 비와 우박이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마주친 좀머의 말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말에 좀머는 '아주 고집스러우면서도 절망적인 몸짓으로 지팡이를 여러 번 땅에 내려치면서 크고 분명'하게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라고 말한다. 좀머는 쫓아오는 죽음의 꼬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걷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좀머가 걷기만 하는 고립된 인간으로 변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가 원인 중 하나일 거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이 땅의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전쟁의 피해는 사람도 예외일 수 없다. 모든 걸 송두리째 뒤바꿔놓는 전쟁의 잔인함에 좀머 또한 연약한 피해자 중 하나로 남게 된 것이다.
소년은 기억 속에 고여서 아무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좀머 아저씨와의 우연한 만남을 들추어낸다. 첫사랑의 실패와 피아노 레슨 선생님의 꾸중 등 각 사건들마다 소년이 느끼는 삶에 대한 좌절과 고통은 커다란 무게로 소년을 짓누른다. 소년의 엉뚱한 상상들은 어른은 알 수 없는 진지한 고민이다. 실의에 소년에게 모습을 나타내는 좀머는 소년의 마음속에 깊게 새겨지며 정신의 성장에 영향을 준다. 소년의 '나무타기'와 좀머의 '걷기'는 그 행위의 의미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나무타기'와 '걷기' 모두 도피를 목적으로 한 행동이다. 그러하기에 좀머에 대한 소년의 호기심은 단순한 것이 아닌 동질감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죽음과 사람들로부터 도망가는 좀머를 보며 소년은 흐릿하게나마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다.

[좀머 씨 이야기]는 단순한 재미만을 주는 소설이 아닌 인생의 뒷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우리가 찍어온 발자국의 흔적마다 묻어있는 삶의 다양한 얼룩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흐붓한 웃음을 짓거나 이를 깨물고 찡그리게 하는 건, 그 얼룩들을 함께 만든 내 곁의 많은 사람들 때문이다. 내 삶 속의 좀머 아저씨가 그리워진다.


22.
좀머씨 이야기에 나타난 현대인 모습

어떤 이는 이 책이 한 편의 동화 같아서 감동을 준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밋밋해서 재미가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게 감동적이지도 않았고, 아주 재미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책 속의 화자는 소년으로, 그 소년은 성장하는 와중에 종종 신비한 이웃인 좀머씨를 만난다. 그는 말이 없는 사람으로, 배낭을 메고 호두나무 지팡이를 들고 걸어다니기만 한다. 그런 좀머씨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마을에서 극히 드물다. 아주 오래 전부터 언제부터인가 그래왔기 때문에 모두들 '그러려니...'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좀머씨를 이따금씩 보고, 스치고, 멀리서 알아보는 소년은 거의 유일하게 좀머씨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어느 날, 비가 오는데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좀머씨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차에 타라고 하지만, 좀머씨는 뿌리친다. '제발 좀 나를 그냥 놔두시오' 하면서 말이다. 그 때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순수한 호의, 아니 동정이 섞인 친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친절을 냉정하게, 귀찮은 듯이 거절하는 좀머씨. 나는 그 순간 어떤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의 첫 번째 이유는 친절한 좀머씨의 행동에 놀란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그에게서 무언가를 강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도 숨겨져 있는 하나의 모습. 세속적인 헛되고 의미없는 지껄임 속에 동화되지 않으려 하는, 자기의 내면적인 면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이에게 적의를 품는 것. 다른 사람들이 겉으로 볼 때 좀머씨 같은 사람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아웃사이더, 왕따같이 보일 수 있지만, 그는 실제로는 그렇게 외롭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나 걸어다니면서 속으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좀머씨가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려 노력했으나, 의도와는 달리 잘 되지가 않아 결국에는 마음을 닫고, 계속 겉돌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도 쉴 새 없이 걸어다니던 좀머씨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장면, 숲 속에서의 태도 등에서 좀머씨의 고독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좀머씨의 태도를 두 가지의 동기로 해석해보았다. 이것은 실제로 작품을 쓴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태도일지 모른다. 그는 대중 앞에서의 노출을 꺼리고 자연 속에서 글을 쓰며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쇄도하는 초청, 인터뷰 등의 제의를 거절한다는 메시지를 좀머씨의 행동과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의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좀머씨 이야기>의 의도는 그것뿐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작가의 의도가 조금이라도 들어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 그러므로 좀머씨의 행동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소년의 성장과정, 생각, 좀머씨와 마주친 상황 등도 같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아주 기분 좋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수채화도 너무 세밀히 보지 말고 한 발짝 물러나서 그 전체적인 분위기를 음미한다면 이 책을 좀더 좋은 느낌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좀머씨 이야기> 속의 좀머씨의 특이한 행동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체감할만한 모습들을 잘 담아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편으론 어이없었던 좀머씨의 죽음. 그는 죽음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 동기조차, 유언도 남기지 않고 호수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는 것을 택한다. 아무 저항없이 자신의 순수의지로 침전해나가는 것이다. 그 자살조차 미화되는 광경을 보면서, 그때까지 잔잔히 다가왔던 작가의 모습이, 어느 순간엔가 보이지 않는 힘을 지닌 내성적이고 정신지향적인 사람으로 느껴졌다.


23.
내 마음 속의 좀머 아저씨

인간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은 익은 포도이고,
사람들 틈에 끼어 사는 사람은 시퍼런 포도이다.

내 나이 열 세 살에 좀머 아저씨는 그렇게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자전거 타기를 즐기고 카롤리나를 보기만 해도 마음 설레던 소년이었지만 좀머 아저씨는 내 인생의 밑그림에 음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내 몸무게와는 상관없이 하늘을 날아서 우리 동네를 구경하고 싶어하던 꿈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날 호수 안으로 걸어가던 아저씨의 모습이 그 들뜬 꿈의 가장자리로 밀려 들어와서는 좀처럼 떠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일생 어떤 상처나 기억에 매여 살다 스러지는 경우가 있다. 좀머 아저씨는 그런 인간이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은 2차 대전의 고통이 그를 얽어매어 호수 안으로 끌고 들어가 놓아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쟁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본래 아저씨 속에 있던 고독을 좋아하는 기질을 전쟁이 부추긴 것이 아닐까. 어쨌든 좀머 아저씨는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쳤으나 끝내 자유로이 항해할 수 없었던 작은 나뭇잎 배였다.

좀머 아저씨를 잃은 후 내가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으면 곧잘 그 아저씨의 초췌한 몰골이 다가오곤 했다. 잠을 청하려고 하나, 둘, 셋 수를 세면 호수 안으로 한 발씩 걸어 들어가는 아저씨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또 날씨가 잔뜩 흐리기라도 하면 `나 좀 내버려두시오.`라는 평소와는 달리 또렷하고 단호한 아저씨의 음성이 들려오곤 했다.

그러나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나의 소년시절에 좀머 아저씨와 같은 사람은 의외로 주위에 더러 있었다는 것이다. 심부름으로 호수 위쪽 마을에 갔을 때 우연히 마주쳤던 하인리히라는 주정뱅이에게도 그런 냄새를 맡았고 먼 친척 아주머니의 느닷없는 방문에도 그런 기미를 느꼈다. 하인리히는 내가 심부름으로 파인씨 댁에 가져가는 치즈케잌을 나꿔채 가지고는 언덕 위로 종적을 감추어 버려 나는 그날 어머니에게 흠씬 혼이 난 기억이 있다. 잊을만하면 뜬금없이 나타나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빵조각을 얻어가지고는 골목 어귀로 사라지던 그는 내가 고등학교를 마칠 즈음 나귀 등에 몸을 끄덕이며 방울을 울리며 고갯마루를 넘어가더니 영영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또 읍내에 있는 요양원으로 가기까지 우리 집에 들러서는 거의 일 년 가까이 더부살이를 했던 친척 아주머니 마리아테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독특한 버릇은 지금도 떠올리면 연민과 함께 웃음에 배어져 나온다. 마리아테는 낮 두시만 되면 집안의 옷가지를 죄다 끌어내어다가 빨래를 해댔다. 자기가 주워온 동네의 잡동사니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장롱 안의 옷가지나 양말짝에 비누칠을 하였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무척 성가셔했지만 곧 익숙해졌고 나는 `두 시의 빨래쟁이`라는 별칭으로 마리아테를 부르곤 했다.
그처럼 종잡을 수 없는 그녀였지만 자수를 놓는 솜씨는 여느 손길 야무진 규수를 뺨칠 정도로 솜씨가 뛰어났었다. 자작나무 타기를 하다 찢긴 내 바짓가랭이를 여러 색실로 기막힐 정도로 꼼꼼하게 꿰매던 그녀였다. 나는 그들 두 사람이 어떤 경로로 해서 우리 마을에 살게 되었는지는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좀머 아저씨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버릇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거지가 좀머 아저씨를 연상시키기라도 하면 속으로 `저렇게 하는 건 좀머 아저씨가 원조인데.` 하거나 `좀머 아저씨 보다 낫군.`하고 중얼거리곤 하였다.
그렇게 열 세 살의 기억은 내 마음밭에 작은 씨앗을 떨어뜨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길고 가느다란 줄기가 뻗어나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급우들과 장난치기 좋아하고 카롤리나에게 쪽지편지를 쓰는 소년이기도 했다.

내 키가 1미터 70을 웃돌고 몸무게가 50킬로그램을 넘어서면서 나는 좀머 아저씨와 하인리히와 마리아테가 아바스 모세의 말처럼 익은 포도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얼핏 그들은 사람을 피해 달아나거나 얼마간의 거리를 두려고 했으므로 익은 포도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바스 모세의 말이 함축하는 의미로 보자면 익은 포도라기보다는 병든 포도가 아닐까 싶다. 세상과 섞이기를 꺼리는 노랗게 병든 아웃사이더 말이다. 또한 나는 덜익은 포도는 누구인가 하고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지금에사 드는 생각이지만 콜린 윌슨의 말대로 아웃사이더의 문제란 결국 자유의 문제라는 데 공감을 하고 낭만적이라거나 현실적, 감정적, 육체적, 비전의 아웃사이더로의 분류에 함몰시켜 보더라도 그들은 그 어디에도 속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의 아웃사이더 구분법을 만들어 보았다. 이 세상의 보편적 규범과 사고를 멀리하는 아웃사이더는 거칠게 말해 시끄러운 아웃사이더와 조용한 아웃사이더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몸을 사회 속에 담그고 적극적으로 제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이 시끄러운 축에 들 것이고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고 이 사회를 떠나 은둔하는 자들은 조용한 아웃사이더일 것이다. 그중 시끄러운 아웃사이더는 수세적인 쪽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