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로서 선과 태도로서 선

                                                   박 이 문 (포항공대, 철학)

 

선은 일종의 ‘좋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좋은 것은 다같이 선이 아니다. 선은 특수한 좋은 것으로서 윤리적인 좋은 것만을 지칭한다.

‘좋은 것’은 ‘가치 있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아마도 좋은 것 혹은 가치란 반드시 상대적인 것 같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가 스스로 좋은 것 혹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욕망과 관계되어서 비로소 가치 있을 수 있다. 돈이 좋다든가, 여자가 좋다든가, 학문이 좋다든가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또는 모든 사람들이 돈을 바라고, 여자를 찾고, 지식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욕망이 없어진다든가 혹은 달라져서 그런 것들을 바라지 않는다면 돈도, 여자도, 학문도 그 자체로서는 좋다든가 가치가 있다든가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그냥 있을 뿐이지 그 자체로서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이와 같이 볼 때 어떤 사물이나 현상 혹은 행동의 가치, 즉 좋고 나쁜 것은 인간의 욕망과 상대적일 뿐, 그 자체로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윤리적 가치, 즉 윤리적으로 좋고 나쁜 것만은 예외이다. 윤리적으로 좋은 나의 삶은 내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객관적으로 좋은 삶이며, 도덕적으로 나쁜 나의 행위는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객관적으로 나쁘다. 윤리 도덕적으로 선은 언제나 선이며 윤리 도덕적 악은 언제나 악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윤리 도덕적 관점에서 가치를 뜻하는 선과 악은 객관적이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선과 악은 무조건적, 즉 절대적인 선이요 절대적인 악이다.

내가 그대로 살든 살지 않든 간에 내가 꼭 살아야 했을 윤리적으로 옳은, 즉 선한 삶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내가 그대로 행동하든 않든 간에 내가 꼭 해야만 했을 윤리적으로 옳은 행동, 즉 선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내가 국가를 위해서 가족을 희생시키는 것보다는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함이 나에게 있어서 윤리적으로 옳은 삶, 즉 선이었다면, 만약 내가 가족을 희생하여 국가를 위해 살아왔다 해도 나에게 있어서 국가보다는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함이 선한 삶이었다는 사실은 영원한 진리로서 존재한다. 내가 친구와 약속을 깨뜨리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악이라면, 만일 내가 약속을 지켰다고 하더라도 약속을 깨뜨리는 행위는 역시 악이다.

언뜻 보아 선과 악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나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직 현상적인 것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 같다. 오직 감각을 통해서 지각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비록 미립자와 같이 직접 눈으로 지각될 수 없는 것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간접적으로 현미경을 사용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오직 물질적인 것만이 지각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오직 물질적인 것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좀더 따지고 보면 물질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이유는 아무 데도 없다. 지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예를 들어 논리적 법칙이 동물이나, 물이나, 나무나, 사람이나 핵과 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거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논리적 법칙이 우리가 그것을 알든 모르든 혹은 우리가 그것을 알고 나서 그 법칙에 따라 사고를 전개하든 않든 간에 변함이 없다면, 그 논리적 법칙은 물질과는 다른 성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은 정말 존재하는 실체는 물질적이기는커녕 관념적인 것, 다시 말해서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했고, 헤겔은 존재가 궁극적으로 정신적인 것, 즉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철학에 의하면 물질적인 것은 사실 비물질적인 궁극적 존재의 복사품과 구상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플라톤이나 헤겔의 주장을 문자 그대로 추종하지 않더라도 비지각적이며 비물질적 존재는 충분히 생각되고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며, 따라서 비가시적 윤리적 가치로서 선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에는 전혀 모순이 없다.

무엇이 존재한다는 말은 그 무엇인가가 형이상학적 우주 혹은 절대적 전체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뜻이다. 마치 한 방에 있는 여러 가구들이 그 방을 채우듯이 우주를 채우는 것들을 존재라고 부를 수 있다. 방을 채우는 것들은 물질로만 될 수 있지만, 우주를 채우는 것들이 반드시 물질로만 되어야 한다는 이유는 없다. 우주는 지각적 현상들을 포함하지만 그 속에는 생각하는 인간, 윤리 도덕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윤리 도덕적 가치인 선과 악도 포함될 수 있다. 선과 악의 객관적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인간의 윤리적 경험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과 악의 객관적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윤리적 선과 악은 마치 사물 현상, 물리학적 입자, 윤리적 법칙과 같이 형이상학적 우주의 일부를 구성하고 물리적 현상의 법칙이 우주의 한 부분의 질서를 나타내듯이 어떤 종류의 형이상학적 질서를 나타낸다고 봐야 한다. 물질이 형이상학적 우주의 한 측면을 구성한다면 윤리적 선과 악은 또 다른 측면을 구성한다.

선이나 악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가치로 볼 때, 맨 처음의 윤리적인 문제는 선이나 악의 존재를 발견하고 인식하는 문제이다.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악인가를 먼저 알지 않고서는 아무리 선한 삶을 살고 선한 행동을 하려고 해도 잘 할 수 없으며, 아무리 악한 삶을 피하고 악한 행위를 피하려고 해도 뜻대로 잘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선과 악을 잘 알지 못하면 삶에 대한 우리의 선택 결정은 결국 불합리한 도박이 될 수밖에 없고, 선한 삶 대신 악한 삶을 잘못 선택하고 선한 행위 대신 악한 행위를 결단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선과 악에 대한 인식적 과오로 악한 삶을 살고 악한 행동을 했다면 나의 삶은 악이 될 것이며 나는 악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악한 삶이 아닌 선한 삶을 산다는 것, 악한 사람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된다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말 어떤 삶이 선한 것이며, 어떤 행동이 악한 것인지를 절대적으로 확실히 발견하고, 인식할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윤리적 입장에서 우리의 삶을 선택하고 우리의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 결정이 잘못되어 우리가 선택한 삶이 선이 아니라 악이 될 수 있고, 우리가 결정한 행동도 악이 될 수 있다. 만일 내가, 아니 우리 모두가 뜻했던 바와는 정반대로 선과 악을 잘못 인식한 결과로 악한 삶을 살고 악한 행위만을 해 왔다면 어쩔 수 없이 나의 인생은 악한 것이며, 나는 악한 인간으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만약 선한 인간이냐 악한 인간이냐에 따라 영원의 차원에서 나의 삶이 심판을 받고 그에 따라 상이나 벌을 받게 된다면, 나는 아마도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다. 만일 내가 나의 진실한 선의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을 올바로 하지 못한 과오 때문에 위와 같이 가혹한 벌을 받게 된다면 과연 나를 윤리적으로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위에서 본 나의 경우와 마찬가지 상황에 놓일 가능성을 누구나 갖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어떤 것이 선인지 악인지를 확신하고 삶을 선택하고 행동을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선과 악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삶은 한결같이 악이요, 우리의 행동도 한결같이 악이 될 수 있다. 객관적인 선과 악의 척도에 맞추어 볼 때 우리는 다같이 악인, 그것도 지독한 악인이 될 수 있고, 따라서 지독한 고통을 저승에서 받게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만일 우리가 객관적으로 악인이 됐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악인으로서 대해야 하는가? 만약 나 아닌 남이 그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에 대한 그릇된 인식 때문에 지독한 악인이라는 판결이 났다고 하자. 과연 나는 그 사람을 악인으로서 대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객관적 존재로서 선이나 악이 아니라 주관적 태도로서 선과 악을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낀다.

어떤 삶이나 행위뿐 아니라 어떤 태도는 선하고 어떤 태도는 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태도를 선하다고 해도 어떤 태도를 악한 태도라고 부를 수 있는가는 쉽게 결정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체로 선한 태도는 나만이 아닌 남을 고려하는 마음씨, 특히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삼고 그것을 덜어 주고 남의 즐거움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씨이다. 그렇다면 악한 태도는 그와 반대로 남을 고려하지 않고 때로 남의 고통에서 오히려 즐거움을 얻는 마음씨, 즉 의도를 가리킨다.

의도와 결과는 동일하지 않다. 아무리 남을 도와주려는 의도를 갖고 한 일일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남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큰 고통이나 해를 더 가져오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거꾸로 남을 해롭게 하려는 의도로 한 일이 오히려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태도로서 선은 행동이나 결정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그 행동의 의도, 즉 동기에서만 본 선을 의미한다. 내 행동의 결과가 예상 밖으로 남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한이 있었다 해도, 내 행동의 동기가 남의 고통을 덜어 주고, 남을 도와주는 데 있었다면 나를 선한 사람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덮어놓고 위와 같은 의미의 선한 태도만 가지면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윤리적 결정을 함에 있어서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윤리적 관점 밖에서 본 객관적 상황과 사실을 냉철히 인식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윤리적 상황의 정확한 인식만으로는 그 자체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선한 의도와 동기 없이 이루어진 결정과 행동은 어떤 결과도 그것만으로 선하다 할 수 없다. 윤리적 문제가 결정과 선택의 문제라면 선한 의도 없이 이루어진 결정과 행동은 그 결과가 객관적으로 선한 것이 될지라도 그 행위나 그 행위 주체자가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 위와 같이 볼 때 윤리적 선과 악은 행위자의 윤리적 태도, 즉 행동의 동기나 의도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존재로서 선과 악에 대한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이 불가능하고, 어떠한 윤리․도덕적 결정을 하든 간에 누구든지 언제나 인식의 과오를 범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는 이상, 우리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윤리적 행동의 근거는 모든 객관적 상황을 고려한 후에 갖추어야 할 태도로서 선이다. 되풀이하거니와 윤리적으로 옳게 살려는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선한 의도, 동기, 태도일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 남을 돕게 되는 행동인지는 몰라도 우선 그리고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남에게 도움이 되려는 태도, 내가 좀 희생이 되더라도 남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이러한 의도야말로 무조건 선한 것이다. 존재로서 선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인간의 구체적인 윤리 생활에서는 태도로서 선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할 뿐만 아니라, 사실 그러한 선을 제외한 다른 선을 따져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거듭 강조한 바와 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선에 대한 우리의 지적 인식 능력은 극히 한계지어져 있기 때문이며, 그런 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자비의 윤리학 >

 

1. 이 글에서 제시한 주된 논의 대상은 무엇인가 ?

2. 이 글의 중심 내용의 전개 과정을 간단하게 나타내 보자.

3. 글쓴이가 무형한 선을 존재하는 것으로 증명한 내용을 찾아서 요약해 보자.

4. 이 글을 제시된 존재로서의 선과 태도로서의 선을 간단하게 구별하여 말해 보자.

⑴ 존재로서 선 :

⑵ 태도로서 선 :

5. 현대 사회에서 적용해야 할 바람직한 선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6. 글쓴이의 선에 대한 견해를 나름대로 비판하여 말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