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론(高句麗論)

  고구려가 망한 까닭

이 글은 고구려가 망한 까닭에 대해 자세히 논한 글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흥망에 국한시키지 않고, 한 국가의 흥망성쇠가 어떻게 결정되는가, 특히 한 나라가 어떻게 해서 망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였다. 한 국가의 흥망에 대해 어떠한 관점에서 논의를 이끌어 가고 있는가에 유념하며 읽는다.

정약용

 

고구려는 졸본(卒本)에 도읍을 정한 지 40년만에 불이성(不而城)으로 도읍을 옮기고 거기에서 425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이때에는 군사와 병마가 굳세어 영토를 넓게 개척하였다. 한나라와 위나라가 여러 차례 쳐들어왔으나 번번이 물리쳤다. 그 후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어 거기에서 239년간 나라를 다스리다 망하였다. 평양은 백성과 물자가 풍부하고 성곽이 굳건하였는데, 이것이 오랫동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압록강 북쪽은 일찍 추워지고 땅이 몽고와 닿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씩씩하고 용감했다. 또 강성한 오랑캐와 섞여 있어 사방에서 적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방어력이 견고하였는데, 이것이 오랫동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평양은 두 강 남쪽에 위치하여, 산천이 수려하고 풍속이 유순하였다. 또 견고한 성과 거대한 진이 겹겹으로 평양을 보호하고 있었다. 백암성(白岩城), 개모성(盖牟城), 황성(黃城), 은성(銀城), 안시성(安市城) 등 여러 성이 앞뒤로 서로 연결되어 머리와 꼬리가 이어져 있는 듯하였다. 평양 사람들은 이를 믿고 평양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연수와 혜진이 성을 가지고 적에게 항복하여도 문책을 하지 않았고, 연개소문이 군사를 일으켜 난을 꾸며도 금하지 않았으며, 안시성주가 총알처럼 작은 성으로 당나라의 백만 대군을 막았으나 상주지 않았다. 이것은 평양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아아! 그러나 평양은 충분히 믿을 만한 곳인가? 요동성이 함락되면 백암성이 위태롭고, 백암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이 위태로울 것이고, 안시성이 함락되면 애주(愛州)가 위태롭고, 애주가 함락되면 살수(薩水)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살수는 평양의 울타리이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고 가죽이 벗겨지면 뼈가 드러나는 법! 그런데도 평양은 충분히 믿을 만한 곳인가?

진(晉)나라와 송나라가 남쪽으로 양자강을 건넜다가 천하를 잃었으니, 이것은 중국 역사에서 거울삼을 만한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도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나라를 잃었으니, 이것은 우리 나라의 실패한 자취이다.

경전에 “적국과 외환이 없는 나라는 망한다.”고 하였고, 병법에 “죽을 땅에 놓인 다음에라야 살수가 있다.”고 하였다.

<여유당전서> 1집 권12

 

이 글은 정약용의 많은 ‘논(論)’ 가운데 하나인데, ‘비교하여 읽기’에 수록한 <백제가 망한 까닭>, 나머지 <신라론>과 더불어 특이한 위치에 있다. 정약용은 수많은 저작을 통해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의 터전인 영토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글에서는 단순히 영토의 변화만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영토의 변화에 따른 민족 정신의 성쇠를 보여 주고 있다.

정약용은 <지리책(地理策)>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우리 나라의 영역이 어떤 경로를 밟아 확장되고 축소되었으며, 그 복잡한 과정들을 거쳐 최초의 국가로 어떤 왕조가 나타났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리책>의 내용은 주로 영토의 변천을 설명한 것인데, 이 글에서는 고구려가 망한 까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구려가 졸본성에서 불이성으로, 불이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결국 영토의 축소로 연결되었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도읍을 옮김으로써 멸망을 자초하였다고 보는 관점이다. 졸본성이나 불이성보다 평양이 훨씬 살기 좋고 기름진 곳이기 때문에 도리어 고구려가 망했다며,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서 쉽게 망했다고 진단한 것은, 나라의 흥망이 지리적 환경이 아니라 민족의 정신적 응집력에 달려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졸본성에 있을 때에는 주변의 강국과 경쟁하면서 철저하게 무(武)를 숭상하는 정신[尙武精神]으로 무장해야 했고, 이런 정신이 고구려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평양으로 옮기면서 상무정신이 해이해지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온 나라를 몽땅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은 역사를 통해 국가의 흥망을 확인하고, 국가의 흥망이 외부적 요인보다는 민족의 정신적 역량에 달려 있다고 함으로써,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 생 각 거 리 ◑

1. 고구려가 불이성에 도읍한 뒤 42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중국과 바로 이웃하여 그들의 침략을 여러 번 받았으나 멸망하지 않았던 까닭은?

2. 고구려가 망한 까닭은 무엇인가?

3.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고 가죽이 벗겨지면 뼈가 드러난다.”는 비유를 참고하여 안시성과 평양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말해 보시오.

 

4. <고구려가 망한 까닭>에는 “죽을 땅에 놓인 다음에라야 살수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다음 글을 참조하여 그 말을 풀이하시오.

「한나라 고조 3년 시월, 한신(韓信)과 장이(張耳)는 군사 수만을 이끌고 동으로 조나라를 쳤다.……한신은 먼저 군사 만 명을 내보내어 배수진을 치게 했다. 이를 바라본 조나라 진영에서는 크게 비웃었다.……한나라 군사들은 배수진이어서 더 쫓겨갈 수가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한나라 군은 성의 안팎에서 조나라 군을 협공하여 대파하고, 진여(陳餘)는 저수(泜水) 위에서 목을 베고 조나라 왕 헐(歇)을 사로잡았다.

장수들이 한신에게 “병법에 오른편과 뒤에는 산을 지고 앞과 왼편에는 물을 끼라고 했는데, 이번에 장수께서는 소장들에게 이와는 반대로 물을 등지고 진을 치게 하셨는데도 이긴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하고 물었다. 한신이 “이것 또한 병법에 있다. 다만 그대들이 잘 살펴보지 않았을 뿐이다. 병법에 죽을 곳에 빠진 뒤에 살고, 망할 곳에 처한 뒤에 흥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또한 내가 본래 사대부와 같이 훈련이 잘되고 순리대로 움직이는 군대를 얻은 것도 아니다. 그저 오합지졸 같은 시정배를 몰아다가 싸우는 것이니 그러고도 그들을 병사라고 마음놓고 쓸 수가 있겠는가?”라고 대답하니 여러 장수가 모두 탄복했다.」

<통감절요>권 4

 

5. 다음 글은 정약용의 <백제가 망한 까닭>이다. 백제가 망한 까닭과 고구려가 망한 까닭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말해 보시오.

 

백제가 망한 까닭

 

「백제는 삼국 중에서 가장 강하였는데도 가장 먼저 망했다. 어떤 사람은, “신라는 남쪽으로 간사한 왜국과 이웃했고, 고구려는 서쪽으로 요동의 연(燕)과 경계가 닿았으므로 방어가 항상 엄중하였으나, 백제는 그 사이에 끼여 있어, 외적의 침입을 직접 받지 않았으므로 쉽게 망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 풍속이 교만하고 간사해서, 이웃나라와 화목하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망했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 백제의 단점이기는 하나 망하게 된 까닭은 아니다. 국운이 오래 가는 것은 도읍을 정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반드시 요충지대를 점거하고 적에게 위압감을 주는 성을 쌓아, 민심이 흔들리지 않게 해주면 갑자기 환란을 당하더라도 명령이 잘 시행되어서 힘이 모이게 된다.

백제는 처음에 위례(慰禮)에다 도읍을 정하였는데, 위례는 지금 한양의 동북쪽이다. 이른바 하남(河南) 위례라는 곳은 지금 광주의 옛 읍이다. 북쪽은 도봉산과 삼각산이 막아 주고, 남쪽은 열수(列水)가 가로지르며, 기름진 들판이 천 리이고, 이익이 남쪽 바다에까지 뻗쳤으니, 이것이 이른바 하늘나라의 금성탕지(金城湯池)와 같은 지역이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서 494년이나 나라를 다스렸고, 북쪽으로 대방군을 복속시키고, 동쪽으로 예맥을 회유하니, 고구려와 신라 사람이 겁이 나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문주왕 때에 도읍을 웅천(熊川)으로 옮겼다가, 잇달아 다시 부여로 옮겨서 겨우 185년만에 망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어찌 지리적 이점을 소홀히 여길 것인가?

부여는 넓은 들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백 리 안쪽에는 의지할 만한 성벽이 없고 가릴 만한 울타리도 없다. 의자왕은 음탕하고 방종하여 경계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큰 적군이 쳐들어왔다. 그런데 사방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았으며, 여러 고을에서도 머뭇거리고 진격하지 않았다. 마침내 의자왕은 도성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고, 신라는 백제의 뒤통수를 쳐서 이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라를 세울 때 지세를 살펴서 도읍을 정한 뒤에 옮기지 않았다면, 외적이 이처럼 함부로 쳐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은나라는 도읍을 자주 옮겨서 국운이 장구하였다.”하나 이것은 옛말이다.」

《여유당전서》1집 권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