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나눔문화에서 열리는 문화포럼 내용이다.

시대를 읽는 다양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박노해 시인이 펼쳐가고 있는 활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나눔문화에 대해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는 폴 발레리(프랑스 시인) 말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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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예의가 사라진 시대, 나는 우정과 환대의 힘을 믿는다  
[95차 나눔문화포럼]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_ 박노해 | 시인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만 같은 봄날의 밤, 나눔문화에는 박노해 시인이 직접 따온 수줍은 산매화 꽃잎들이 포럼실 의자마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실용정부가 집권한 지 불과 40여 일. 살림은 더 어려워지고 한 가닥 희망마저 멀어져 갑니다. 길을 잃어버린 시대, 아픔과 불안의 뿌리를 찾는 나눔문화포럼에서는 지난 10여 년 간 세계의 변화와 고통의 현장을 두 발로 누비며 치열하게 정리하고 성찰해온 박노해 시인이 우리 사회에 대해 정면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가치관과 신념과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살해된 사회에서 희망은 과연 어디에서 피어날 수 있을지, 지금부터 박노해 시인의 길찾기에 함께 합니다.


자신에 대해 생각할 능력마저 소진된 우리  

“봄날의 꽃은 참 짧은 것입니다. 인생도 짧은 것입니다. 그런데 반복되는 일에 매달려 꽃피는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 산매화가 필 때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매달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저는 어느 집을 방문할 때면 그 사람이 누구의 아내, 아버지, 아들, 딸을 넘어서 이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고유의 존재로서 사유와 성찰의 공간으로서 자기만의 작은 처소를 가지고 있는가를 늘 살펴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생각하고 정리하고 성찰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관점을 가질 틈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뉴스와 너무 많은 정보와 소통 때문에 오히려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기도 전에 심신이 지쳐버리고 맙니다. 경쟁에서 밀리면 무시당하고 끝장난다는 생각 때문에 더 많은 네트워크와 더 많은 소유를 향해 달려갑니다. 이렇게 나눔문화에 와서 숨을 고르고 꽃향기를 맡고, 시인을 만나러 가는 것도 대단한 결심과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생각하고 정리할 시간을 살해해버린 것입니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나서도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 온 지구마을을 돌며 고뇌할 수 있도록 저를 여기까지 밀고 온 힘은 바로 정리하며 성찰하는 시간을 갖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정리 없이는 창조도 없고, 매듭짓기가 없이 커오를 수 없고, 성찰없이는 진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예고된 배반
취임 직후 조선일보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52%를 넘었습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38%로 하락했습니다. 한 달도 못 되어 후회할 것을 민심은 왜 이명박 정권을 선택했을까요? 박노해 시인은 변해버린 우리 시대의 민심을 이야기합니다.

“군사독재시절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부정부패와 비리 정도는 저지를 수도 있다는 관대한 의식을 내면화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장사를 하다보면 작은 거짓말이나 부정을 저지를 수 있는데 큰 기업을 경영하던 사람이 그만한 부정이 없겠는가, 나라의 경제를 살려야 하는데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지금까지 노무현 정부나, DJ 정부가 비난을 받아온 것은 민주화가 공기처럼 흘러가서 사람들이 이런 분위기를 당연시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민주화보다는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절박한 경제의 문제, 즉 엄연한 양극화와 800만 비정규직의 한숨, 자영업자의 불안, 농어민과 서민들의 미래 없는 공포감은 절박한 경제 성장과 돈과 성공을 우선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성장신화에 열광하고 ‘딱 한 번만’이라는 마음으로 경제에 영혼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를 선택한 노동자와 서민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밑에서부터 깨뜨린 것입니다. 경제성장제일주의와 효율만능주의는 사회 구석구석에서 ‘탐욕의 열정’을 부채질하며 우리들 인간성과 마음을 황폐화 시키고 공동체의 유대를 깨뜨립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못난 사람도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간사회의 근본적 가치를 급속히 붕괴시킵니다.
성장할수록 양극화는 심해집니다. 지식집약산업이 발전할수록 좋은 일자리는 적어지고, 제조업 육체노동 일자리는 외국이나 이주노동자의 몫이 됩니다. 결국 도덕성과 정의와 가치를 저버리고 자기 양심과 존재기반을 스스로 배반한 민심은 자신이 선출한 이명박 정부에 의해 배반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서로 예고된 배반입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충격적인 용어 “비즈니스 프렌들리”
“천하 민심이 변화하고 천하 권력이 바뀌면서 새로운 어휘가 등장했습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입니다. 이 말을 주목해주십시오. 이것이 시대의 징표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말기에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을 때도 저는 깊은 탄식을 했는데 이번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이 단어를 볼 때 그대의 신경세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영혼과 사회적 상태를 말해줍니다.

우리 사회가 사회주의와 평등과 복지와 사민주의에 치우쳐 있습니까? 이미 세계에서 손꼽히는 시장만능주의 사회입니다. 부자들이 소외당하는 나라입니까? OECD 국가 중 노조조직율 최저의 나라입니다. 에코 프렌들리, 컬쳐 프렌들리, 시(詩)의 프렌들 리가 지나친 것도 아닙니다. 97년 IMF체제 이후 우리 사회는 시장과 자본이 영구집권을 해버렸습니다. 이후부터 시민의 자발적인 동의하에 돈과 경제, 부자가 모든 사회의 최고 가치로 등장하였습니다. 공동체 구성원이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물신의 유일신화로 개종된 경우는 세계사에서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치우친 사회에 균형을 주고 약자에게도 물질이 고르게 돌아가도록 균형을 잡아주며 힘없는 이들의 프렌들리가 되어주는 정치가 중요한데, 이명박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비즈니스에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습니까. 법만 어기지 않으면 무슨짓이든 할 수 있는 것이 비즈니스입니다. 제가 150원짜리 물건을 1500원에 팔더라도 유능하다고 하지 누구 하나 저더러 부도덕하다고 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가 비즈니스입니다.”


“나는 누구의 프렌들리인가. 그것이 나의 정체성입니다.
나는 누구와 애써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가. 부자나 명망가와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우리는 돈이 되는 사람과 돈이 되는 고객을 지치도록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즈니스 프렌들리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가 나의 지표이고 나의 인간성입니다. 돈에 미쳐 질주하는 사회에서 돈이 안 되는 관계를 존중하고 우정과 정의와 평화와 시, 그리고 보살핌의 프렌들리가 진정한 인간성입니다.”

‘쓸모 없는 것’이 사라진 시대
“우리가 지금 무엇에 가장 고통받으며 살고 있을까요? 돈입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돈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사라져 버린 사회에 대해 상처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마트에서 일하는 30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민주화가 아니고 방임화예요. 자유롭게 즐기고 놀고 하는 건 좋은데 남과 공동체엔 피해주지 말아야죠. 민주화 이후 아주 무질서하고 엉망이 됐어요. 우리 같은 서민은 하루에 받는 스트레스 대부분이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예의 없음과 몰상식이에요. 돈 안벌리고 힘든 건 내가 감당해야 할 수고이고, 욕심 줄이면 된다지만 매 순간 부딪치는 사람들의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과 없어 보이는 사람 무시하는 행동과 이 사회에 혼자만 사는듯한 무례함과 뻔뻔함은 정도를 넘었어요. 모른 체 하고 살자니 우리사회가 어찌될까 암담해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사라지자 숭례문이 분신을 했습니다. 긴밤을 지새운 새벽이면 늘 시인을 위로해주던 숭례문이었습니다. 숭례문이 그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며 살았는데, 누구의 눈길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숭례문이 불타 없어지니 그제서야 숭례문이 얼마나 크게 다가옵니까.
태안 바닷가 갯돌들도 밀물 따라 썰물 따라 수만 년 동안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노래를 해왔지만 검은 기름을 뒤집어쓰고 나니 그제야 사람들이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기름을 닦아주겠다고 옵니다. 실용시대에 백만 명이 자기 돈과 시간을 내서 하얀 수건으로 기름을 닦아내는 원시적인 몸짓들...쓸모없는 갯돌 하나가 사라질 때, 모든 성장신화는 파탄되며 생태재앙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 존재감도 없이 그 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그 쓸모없는 것 하나를 잃어버리고 나면 쓸모 있던 것들도 모두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이 바로 무용한 것들의 가치입니다. 지금 당신의 책상 위에 쓸모없는 물건을 몇 개나 가지고 계십니까. 당신이 머무는 장소에 쓸모없는 것이 몇 개나 있습니까. 쓸모없는 것이 자기 생활 주변에 없다는 것은 빡빡한 실용과 이익으로 가득찬 그 사람의 삶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실용은 오직 하나의 용도밖에 갖지 못하지만, 무용한 것은 오히려 멀티 유스입니다. 멀티 유스가 없어진 게 우리 사회의 불행입니다.”

“내 가슴에 시인이 몇이나 살아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원래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시인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시인을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돈도 안 되고 쓸모없고 세상을 바꿀 수도 없다고 그 시인을 굶겨 죽여 버렸습니다. 우리는 시인이 사라져버린 가슴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한 가슴은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시가 결합되지 않은 사랑은 신뢰하지 않습니다. 시가 없는 정치, 시가 없는 법, 시가 없는 진보, 시가 없는 우정은 신뢰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학교다
“문제는 학교입니다. 요즘 학교는 아이들을 구체적인 용도로 만들어 가는 교육을 합니다. 아이들까지 영어 몰이를 하고 일제고사와 사교육으로 밀어 부칩니다. 젊은이들은 영어 연수를 하고 돌아와도 제 밥벌이 하나 못하고 값비싼 골칫거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취직까지 10억이 들어갔다고 칩시다. 요즘같이 일자리가 불안한 시대에 그 젊은이가 취직을 한다 해도 몇 년이나 돈을 벌겠습니까. 과잉투자 때문에 산출이 제대로 나오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인재의 부실 투자입니다.

부모들은 자녀가 30대가 되도록 고급 애완견을 키우듯 자식을 키웁니다. 그래서 몸은 어른인데 정신이나 생활태도는 어린 ‘어른 아이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복잡하고 괴로운 생각은 하기 싫어서 인터넷과 TV만 보고, 휴대폰 문자를 끝없이 보내고, 자기 존엄․ 자율․ 독립․ 자유가 없는 젊은 세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학교 시스템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사귀어 온 친구들 가운데 그 사람이 가진 최고의 빛나는 미덕은 전부가 학교 밖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또 이들의 가장 나쁜 점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나는 명문고․ 서울대 출신이다,라는 못된 아상과 본능적인 기득권을 문득 문득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에게는 ‘그만 배우기, 이제는 생각하기! 그만 생각하기, 이제 자신을 살기!’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똑같은 인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중에서 좀 더 나은 인재가 되려고 자신의 천재성을 짜내어 질주하다가 찬란한 자기 행성의 궤도를 이탈한 채 비루한 유성처럼 추락해 가고 있습니다. 직업을 먼저 찾으면 안 됩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천재성을 찾은 사람 중에 일자리가 없고 사람 구실 못하는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숨은 억압의 삼각 동맹
“진보 쪽에서도 사회의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보는 이제 진부한 보수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더 많은 복지, 더 많은 일자리, 더 넓은 아파트, 첨단의 컴퓨터와 더 좋은 그 무엇을 더 고르게 갖자는 것을 그들 삶의 모델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데도 왜 아무도 행복하지 않고, 왜 우리의 마음은 가난하며, 점점 위험사회로 가는 걸까요? 우리 사회를 파괴하고 우리 삶을 옥죄는 밑바탕에는 ‘숨은 억압의 삼각 동맹’이 있습니다. 이들은 원래는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도구는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억압의 기제로 전환하고 맙니다. 이 삼각동맹은 바로 시장경제 시스템, 국가복지 시스템, 대학자격 시스템입니다.”

시장경제 시스템은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을 상품화시킵니다. 과거에는 공동체가 돌보던 것도 사보험 시장으로 넘어갔습니다. 시장경제 시스템의 가장 큰 수탈 대상자는 가난한 약자들과 자연 생명입니다. 누구도 하기 싫고 하기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 가난한 나라 사람들, 지구 생태계가 시장경제 시스템의 가장 큰 피해자들입니다.
국가복지 시스템은 자율적 삶과 시민사회를 붕괴시키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국가 복지 시스템이 잘 되면 서로 원조하는 마음이 퇴보되고 냉대와 무관심 속에 자살자가 속출합니다. 스웨덴이 그 예입니다. 우리는 만 년 정도 되었다고 착각하지만, 국가 시스템은 고작 70년 역사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장정책을 버리고 소박하게 살고 싶어 해도 국가는 정체성상 옆 나라가 부국강병하면 옆 나라 때문이라도 군산복합과 전쟁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레바논과 쿠르드, 팔레스타인, 이라크에 거대한 억압과 폭격이 쏟아질 때 점령군의 편에서 파병을 해 점령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테러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상시파병법을 제정하려고 합니다.
대학자격 시스템은 온전한 인간성과 자급할 수 있는 노동력을 퇴화시킵니다. 장인정신이 사리지고, 삶의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며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성찰하지 못하고, 살림하는 것과 무관한 돈벌이에 매달리는 지식만을 낳고 있습니다. 자동차는 본래 빠르게 살기 위해 발명된 것이지만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교통 체증 때문에 세상은 오히려 더 느려졌습니다. 환경이 망가지고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들의 수를 생각하면 대량살상 수준입니다.

국가와 시장과 대학의 억압의 삼각동맹이 거대하고 복잡하고 빠르고 첨단인 것으로 상징되면서 인간을 억압하는 근대성의 끝자락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우리는 작고 나직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혁명은 KTX를 타고 초고속으로 이동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간이역을 지나고 다양한 길을 천천히 가는 것이 참된 혁명입니다. 하나뿐인 성공, 하나뿐인 대학학벌 시스템과 하나뿐인 행복 가치에 매달리지 않고 다양한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사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성공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과 물신주의에 대한 투쟁이 필요한 때입니다.”


상처가 희망이다, 저항이 대안이다
“진정한 진보는 권력을 낳기 전에 좋은 삶과 좋은 사람을 낳는 법입니다. 희망이 시작되는 곳이 어디일까. 한 사회의 미래를 보려면 그 사회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어떤 이상과 꿈과 영혼이 살아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젊은 날에 만들어진 가치관과 이상은 나이가 든다고 더 커지거나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 지금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신념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신념이 살해되면 동시에 희망도 사라지고 맙니다.
지구 생태의 위기로 20~30년 내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구의 위기가 아닙니다. 인간이 멸종 1호가 된 위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종은 자기 발밑이 어떻게 허물어지는 줄도 모르고 경제성장을 위해 머리 박고 질주합니다. 64억 지구 인구가 모두 나처럼 먹고 소비하며 한 달에 한 권씩의 책을 읽는다고 상상해봅시다. 지구는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파국은 너무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너무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상처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까칠한 사회에서 우리는 날마다 작은 옮음을 지키기 위해 상처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 정리하고 성찰하며 시대의 징표를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찰은 상처를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내가 상처받는 지점이 내가 가장 욕망하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상처는 진정한 나를 돌아보고 돌이키라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삶의 목적은 돈이 아닙니다. 삶의 목적은 삶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내 삶의 최고 전문가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내게 더 많은 소비를 부추기고, 내 노동력을 빼내려고 하는 사람들, 나를 더 쉽게 통제하고 관리하려고 하는 억압의 삼각동맹 주체들 조차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나를 연구하지 않으면 그들이 내 생명과 자유를 빼앗아 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내 삶의 연구자가 되어 내 안에 신념을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나를 잃어가는 것을 알 수 있는 3가지 징후가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잃어버린 것, 내 가족 내 나라만 잘 살면 된다며 분리장벽을 쌓는 것, 사회현실과 구조악의 실체를 직시하는 지적 긴장을 놓치고 불의에 침묵하고 사회적 저항의 참여를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진 물질보다 상위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물질에 떠밀려 하류로 흘러가는 우리가 되지 맙시다.”


희망이 피어나는 자리 ‘우정과 환대’
“저항이 대안입니다.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악입니다. 수탈과 부당한 전쟁에 저항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의 존재의 의무입니다. 이 꽉 짜인 사회 구조와 일상에서 어떻게 나를 성찰하고 좋은 삶으로 변화시켜 나가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생활문화를 변화시키면서 사회구조도 변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판기 커피 안 마시기, 육식 줄이기, 더 많이 걷기, 손으로 만들어서 쓰고 덜 사서 쓰기, 진실 앞에 가슴을 열고 상처 받기, 돈이 들지 않는 나만의 취미 갖기, 장식은 덜하고 물건의 주인이 되어 행세하기.. 좀 더 단순하게, 간소하게,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기 위한 우리 삶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담배 한대 안피고, 야식 안먹는 것도 얼마나 어렵습니까.(웃음)


그러나 우리의 희망이 달려있는 한가지 단어를 골라야 한다면 그것은 ‘우정’과 ‘환대’라는 말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순수한 시민의 입장으로 진보적인 집회에 참여했다가 어느 단체에서 나온 사람에게 ‘어디서 오셨어요? 참 잘 오셨어요.’라며 따뜻한 말과 환대를 받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여기에 정말 머무르고 싶다, 이곳에 오길 잘 했다, 매화 향기 같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진보운동이 망한다면 이런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 중 진리 중의 진리가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 좋은 벗들과 함께 하는 것은 깨달음의 절반이 아니라 깨달음의 전부입니다. 아무 차별 없이 평등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참된 해방 세상입니다.
진실한 우정과 환대의 관습, 공동체를 부활시키는 데서 희망은 빛은 시작됩니다. 좋은 벗들과 어울리면 키 큰 나무 숲에서 내 키가 커지듯이 진정한 우정은 우리가 혼자서는 하기 힘든 일도 어떤 금기와 두려움도 없이 해낼 수 있게 만듭니다. 진정한 우정은 내가 절망을 이겨내고 진정한 내 자신 쪽으로 걸어가게 해줍니다.이 희망 없는 세계와 일상 속에서도 우리의 깊어가는 우정과 환대 속에 진정한 나를 찾아보고, 좋은 삶이 꽃 피어나고, 용기 있는 사회적 진보의 걸음이 시작되기를.
그리하여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을 살아내고 영적인 메아리를 칠 때, 개인과 긴밀하게 결합된 이 세계는 우리 자신들로부터 비틀거리면서 정의 쪽으로 희망 쪽으로 걸어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정리 _ 전은옥(평화시민연대 활동가, 나눔문화회원)
출전 - 나눔문화 http://www.nanu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