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유와 언론통제의 교착점


1. 붉은 여왕의 민주주의  

출전 : 창비주간논평. 2008-08-13 오전 9:42:50 Comments (0)
      글쓴이 : 조광희 / 영화제작자

(창비주간논평에 본래 문화칼럼을 쓰기로 했고, 예정된 기고일이 일주일이나 남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도저히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습니다. 우선 KBS의 문제도 넓게 보아 문화의 문제라고 생각하시고 이게 무슨 문화칼럼이냐고 꾸짖지 말아주시기를, 그리고 원고 마감시간을 넘기는 일이 다반사인 이 업계에서 도리어 약속보다 일주일이나 빨리 칼럼을 쓴 초유의 사태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를 독자님들께 부탁드립니다. 특히 그것은 제 잘못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킨 저들의 잘못입니다.)

맑스는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을 이렇게 시작한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모든 세계사적 사건과 인물은 두번 나타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처음엔 비극(悲劇)으로, 그다음에는 소극(笑劇)으로." 나는 두 사상가의 내공은 인정하지만 이 표현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무엇을 사건으로 보고 누구를 인물로 볼 것인가' '두번의 유사성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주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레토릭이지 엄격한 명제는 아니다.

그런데 KBS 정연주 사장의 해임을 둘러싼 사태를 보면서 전에 본 듯한 기시감(deja-vu)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노태우정권 때인 1990년에 이미 같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감사원의 해임요구, 이사회의 해임제청, 고위인사의 압박, 대통령의 해임 그리고 새로운 사장. 그 수순은 18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 차이라면 예전의 사건은 언론말살의 비극이었지만 지금의 사건은 정신나간 소극이라는 것이다. 사건이 반복될 때 뒤의 사건이 소극이 되는 이치는 단순하다. 세월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되풀이되면 시대착오가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국민의 반응이 '분노'에 가까웠다면 지금의 반응은 '실소'에 가깝다. 어차피 유유상종이기 때문에 내 주위의 반응들이 나처럼 하나같이 비판적인 것은 당연하지만, 그 반응들이 '어처구니없다' '황당하다' '어이없다'인 것은 사건의 본질이 시대와 동떨어진 소극임을 보여준다.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과연 그저 웃기고 자빠진 일인가? 주로 성희롱적이거나 성차별적인 유머만을 전문적으로 구사하던 분들이 갑자기 이렇게 수준높은 개그를 할 리가 없다. 이것은 우리의 반응과 달리 대단히 진지한 사건인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은 성인이 된 후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군사독재,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변해가는 흐름 속에서 권력이 '소수에서 다수로' '밀실에서 광장으로' '폭력에서 논리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아왔고, 그것이 사회의 법칙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군사독재에 뿌리를 둔 정치세력이 승리하더라도 사회경제적인 문제야 할 수 없다 치고 민주주의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의 느낌은 20년 전 노태우 후보가 승리했을 때의 비참한 심정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정권이 교체되는 것도 길게 보아서 나라에 도움이 될 거라는 낙관적 견해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반년도 되지 않아 국민들은 분노해야 할지 실소해야 할지 모를 사태들에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붉은 여왕과 함께 미칠 듯이 달리지만 이상하게도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때 붉은 여왕은 깜짝 놀란 앨리스에게 말한다. "여기서는 같은 자리에 계속 있고 싶으면 힘껏 달려야 해.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적어도 그 두배는 빨리 달려야 하지." 그렇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적어도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제자리라도 지키려면 죽을힘을 다해 달려야 한다는 것, 그 노력을 게을리할 때 민주주의는 순식간에 뒤로 처지고 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민주주의의 문제는 너무 시급해져서, 시한폭탄을 장착한 것 같은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조차 사치스러울 지경이다.

민주주의는 죽을힘을 다할 때 지켜지는 것

이제 이명박정부는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고 정치사찰만 하면 군사독재정부와 똑같은 정부가 된다. 앞의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뒤의 것은 장담할 수 없다. 어느 현명한 판사에게 재판과 관련한 전화를 걸었다가 망신당한 국정원 직원의 사례는 어떤 징조를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이 정부의 정체는 무엇일까?

보수인사들이 입만 열면 지키겠다는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몇 가지 원리는 잘 알고 있다. 주권자는 국민이고,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기 곤란한 부분을 대리인들에게 위임했다는 것. 맡겨진 권력은 주권자를 위하여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만들어진 법은 게임의 규칙으로서 누구나 존중해야 한다는 것. 나는 보수적인 견해보다는 진보적인 견해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게임의 규칙'만 준수한다면 어떤 보수적인 견해에 대해서도 함께 토론하고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약자라서 불리할 것 같은 때에만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권력을 쟁취한 후에는 그것을 사유화하는 자들, 국민들에게만 법의 지배를 받으라 하고 막상 자신들은 힘의 지배가 사회의 냉혹한 규칙이라고 믿고 실천하는 자들과는 한 세상에서 살 수 없다. 그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 배를 불리고 공공의 이익을 말하는 척 패거리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공의 적이며, 민주주의의 파괴자다.

그대들에게 '게임의 규칙'을 묻는다

혹시 그대들이 민주주의와 법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가? 한번 따져보자. 뜻을 모아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판사의 조정 아래 분쟁을 합의하여 처리한 것이 왜 사장의 배임인가? 이득은 도대체 누가 보았는가? 그렇다면 판사와 국세청장도 공범이란 뜻인가? 어느 법률가가 그따위 법률해석을 하는가? 도주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을 출국정지하여 괴롭히는 것이 공권력의 집행인가? 공권력은 필요한 경우에 최소한으로 행사하게 되어 있는 것을 그대들이 정녕 모르는가? 해임할 빌미를 찾기 위하여 정해놓고 하는 감사가 '바른 감사'인가? 그대들이야말로 감사대상이다.

나는 KBS가 경영을 어떻게 했는지는 복잡해서 잘 모르겠다. 그러나 경영상의 잘못이 있다 쳐도 그것이 사전적 의미에서 '비위(非違)'라는 표현에 들어맞는가? 그대들은 일상생활에서 '비위'라는 말을 그런 경우에 쓰는가? 그렇다면 쇠고기협상이야말로 엄청난 '비위' 아닌가? 이전의 법에서 '임면권(任免權,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이라고 규정한 것을 '임명권'이라고 고친 것이 해임할 권리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국회가 심심해서 문장을 다듬었다는 뜻인가? 진실을 구부려 권세에 아부하는 그대들의 논리는 '비위'가 상해서 더이상 못 들어주겠다.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은 아무리 적이라도 온당한 법에 따른 절차를 거쳐 배제하라고 말한다. 그게 불가능하면 법을 고치든가, 법을 고칠 수 없으면 참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들은 법과 '게임의 규칙'과 '인간에 대한 예의'와 심지어 '국어의 원칙'을 무시한다. 이기는 것밖에 관심이 없는 무리에게는 더이상 관용이 적용될 수 없다. 그대들은 우리의 신성한 민주주의의 경기장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대들은 승자인 자신들이 올림픽 메달리스트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프로레슬링 시합에서 상대의 눈을 찔러 비만한 배에 챔피언벨트를 찬 반칙왕에 지나지 않는다.

붉은 여왕은 우리가 저들로부터 소중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죽을힘을 다해 뛰어야 하고, 그래야지 제자리나마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저들은 힘과 반칙과 불법과 기만으로 국민을 능멸하지만 국민은 오로지 비폭력, 민주주의, 법치주의, 선거 그리고 단결로써 저들을 심판하자. 저들을 신성한 민주주의의 경기장에서 기필코 퇴장시키자.

2008.8.13 ⓒ 조광희



2.  KBS사태에 중립지대는 없다  

출전 : 창비주간논평. 2008-08-20 오전 9:19:18 Comments (0)
       글쓴이 : 강형철(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이번 KBS 사장 해임사태를 보면서 그간 공영방송에 관심을 두고 공부해온 사람으로서 착잡한 마음이 든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KBS와 MBC 그리고 EBS라는 우수 공영방송을 가진 데에 자긍심을 느꼈던 것이 무색해졌다. 한국의 공영방송은 방송 품질 면에서 서구의 우수 사례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창의력이나 건전성이 서구의 그것들에 크게 뒤지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상대적으로 미약한 공적 재원 규모나 군부독재가 남긴 외상을 고려한다면 지난 20년간의 발전상은 사실 놀라울 정도이다. 한국의 공영방송은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역동적 사회변혁의 중심에 서서 문화적·정치적 진보에 일정부분 기여하며 서구 공영방송의 일반적 모델에 근접하는 길을 걸어왔다. 이는 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정적인 일본 체제를 반영하는 데 그쳐 문화적, 정치적으로 모두 보수적이며 관료적인 색채를 띠어온 것과 대비되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제 필자는 이러한 평가에 대한 회의가 든다. 공영방송 사장이 감사원의 표적감사에 의해 해임권고를 받고, 깨끗하지 못한 과정을 거쳐 임명된 여당측 이사들이 그에 대한 해임을 제청하고, 대통령이 이를 해임하는 한편, 검찰이 그를 잡아다가 조사를 벌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일반적 속성을 생각하면 이러한 일들이 전혀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의 명백한 침탈에 적지 않은 공영방송 종사자들이 침묵하거나 방관, 방조하는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실망스러운 것이다. 이들이 그동안 방송을 통해 보여왔던 다소의 진보적 가치는 지난 노무현정권과 코드를 맞춘 데 불과한 것이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지난 정권 내내 공영방송을 비판해왔던 보수진영의 주장이 옳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는 다시 이들의 주장대로 코드 사장을 해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공영방송을 '관영'방송으로 생각하는 정부

팀제 실시 등 정연주 사장의 성급한 개혁이 KBS의 조직문화를 해치고 복지혜택을 줄인 것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국가의 침탈에 대한 침묵과 방조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서구의 '공영'(public)방송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되는 '공중'(public)의 이해를 대변하는 데 힘써왔으며, 이는 당대 정부의 성향에 휘둘리지는 않는 전문직 문화에 의해 지탱되어왔다. 전문직 문화는 공영방송이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소수자들을 더욱 배려하는 '적절한 공정성'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었다.

실망을 넘어 절망스러운 것은 정권의 전횡에 대해 많은 일반인은 물론이고 관련학자들조차 "잘한 것은 아니지만 뭐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은 이 사태를 '구여권 잔존 인물인 정사장과 현정권의 싸움' 정도로 보고 '중립'에 서기를 원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대통령이 통치를 위해 감사원을 쓰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며 현실론을 펼치기도 한다. 많은 이들은 이 사태를, 한나라당은 대통령의 해임권이 있다고 하고 민주당은 없다고 하는 '논란거리'로 생각한다. 주류 신문들이 나서서 정사장 해임이 옳다고 하고, 정작 KBS 자신과 MBC도 더이상의 '공정성' 시비가 무서워서인지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잘못을 알릴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기대할 것은 사법부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법원이 정사장의 해임이 정당하다고 판결하면 정사장의 해임은 정당한 것인가? 필자는 법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서 현행법을 근거로 정사장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 '그 죄가 해임될 만한 정도의 죄인지' 등에 대해 판단할 능력이 없다. 다만 공영방송을 공부해온 사람으로서 이러한 사안으로 공영방송 사장을 해임해서는 안되며, 만약 이러한 사안으로 공영방송 사장을 해임할 수 있는 법체계가 있다면 반드시 이를 고쳐야 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서구의 공영방송에는 국가방송이나 관영방송이 아닌, 당대의 정부의 관여에서 유리된 독립기구로서의 지위가 부여되어왔다. 물론 사장을 왕이나 대통령이 임명하는 등의 절차가 있고 이에 따라 국가권력이 면직권을 지닐 수도 있겠지만, 새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영방송 사장이 물러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정사장 해임이 코드가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경영상의 배임 등의 '비위' 때문이라고 말하지 말자. 공영방송 사장을 몰아낼 때 '코드가 맞지 않아서'라고 이유를 대는 나라는 없다. 독재국가라면 내 사람이 아니면 이유 불문하고 자르는 것이 '상식'이며, 그나마 절차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라면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다른 이유를 댈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정사장 해임도 이후에 나온 여당 대변인의 논평 등을 보면 '공정성'에 대한 불만, 즉 코드의 문제였던 것이 확실하다.

자본과 정권으로부터 독립적인 공영방송을 위하여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독립성에 바탕을 둔 현대 삼권분립의 정치체계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모습으로 인식된다. 이 체계에서는 코드에 맞지 않는다고 헌법재판소장 등 독립기관장을 행정부 수반이 해임할 수 없다. 공영방송 또한 입법부처럼 독립기관의 지위를 부여받을 때에만 국가씨스템을 감시하는 본연의 역할이 가능한 사회기구이다. 하버마스는 서구 봉건사회 해체기에 신문이 시민사회와 국가를 연결하는 공공영역의 역할을 하면서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한 후 신문은 일반적으로 자본의 도구로서의 역할에 머물며 공공영역으로서 기능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럴 때 현대사회에서 공공영역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바로 공영방송이다. 자유주의시대에 출발한 신문과 달리 방송은 국가개입주의 시대에 태동하여 자본의 영역보다는 공동체의 영역에 자리매김되어왔으며, 이윤추구 동기에서 해방되고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어왔기 때문이다.

정연주 사장의 해임사태는 한국에서 어렵게 건설해온 공공영역의 가능성을 일거에 없애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권력이 쉽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것 자체가 공공영역이며 공영방송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상업방송의 난립상황에서 공영방송이 방송의 표준 향상을 위해 기여하는 기능이 더욱 필요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다.

2008.8.20 ⓒ 강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