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강 : 영화 비평글 읽기와 쓰기

배움 길에 나선 날 : 2008년 2월19일 불날
배움에서 노리는 점 :
* 에세이 글 평가하기
* 칼럼 비교분석하기와 비평하기 방안
* 읽어 오기 과제 : 영화 감상하고 오기
* 쓰기 과제 : 영화 감상문 쓰기


배움에 앞서

Falling slowly

I don't know you
But I want you
All the more for that
Words fall through me
And always fool me
And I can't react
And games that never amount
To more than they're meant
Will play themselves out

Take this sinking boat and point it home
We've still got time
Raise your hopeful voice you have a choice
You've made it now

Falling slowly, eyes that know me
And I can't go back
Moods that take me and erase me
And I'm painted black
You have suffered enough
And warred with yourself
It's time that you won

Take this sinking boat and point it home
We've still got time
Raise your hopeful voice you had a choice
You've made it now

Take this sinking boat and point it home
We've still got time
Raise your hopeful voice you had a choice
You've made it now
Falling slowly sing your melody
I'll sing along

난 당신을 몰라
그러기에 더욱더 난 당신을 원해
이해 못할 말들이
날 바보로 만들기에
난 대꾸할 수가 없어
서로를 속이는
의미 없는 게임은
우릴 지치게 할 뿐이야

가라앉는 이 배를 붙잡아줘
우린 아직 늦지 않았어
희망의 목소릴 높여봐
당신은 선택을 했고 이젠 결정할 시간이야

날 보는 당신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도 난 돌아갈 수 없어
날 사로잡고 날 지워버린 어두운 감정들 난 깊은 절망에 빠져있어
당신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충분히 괴로워했지  
이제 당신이 자유로워질 때가 온 거야

가라앉는 이 배를 붙잡아줘
우린 아직 늦지 않았어
희망의 목소릴 높여봐 당신은 선택을 했고 이젠 결정할 시간이야 가라앉는 이 배를 붙잡아줘

우린 아직 늦지 않았어
희망의 목소릴 높여봐 당신은 선택을 했고 이젠 결정할 시간이야
천천히 당신의 노래를 들려줘
내가 함께 할 테니 내게 전화해줘



원스 ONCE

감독 존 카니 / 출연 글렌 핸사드, 마케타 잉글로바
개봉 2007.09.20 아일랜드, 86분


시놉시스 (synopsis)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나는 너를 노래한다
음악으로 기억될 사랑의 순간 원스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 그의 노래를 들으며 그 노래 속에 숨겨진 사랑의 아픔을 한눈에 알아보는 ‘그녀’와의 만남. 그의 음악을 응원해주는 그녀 덕에 그는 용기를 얻게 되고, 런던에서의 오디션을 위해 앨범을 녹음하기로 결심한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피아노 선율이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가, 그녀가 만드는 음악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음악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앨범이 완성 되는 만큼 서로의 매력에 빠져드는 두 사람. “그녀는 나의 노래를 완성시켜준다. 우리가 함께 하는 선율 속에서 나는, 나의 노래는 점점 그녀의 것이 되어간다.” 한 곡, 한 곡 완성되는 음악처럼 그들의 감정은 점점 깊어져만 간다.



리얼리즘 뮤지컬영화 <원스>  20자 평

이동진 음악이 이야기를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 ★★★★★
유지나 사랑-이미지의 영혼이 꿈틀대는 음악의 힘! ★★★★
박평식 자본과 스타 없어도 크게 멀리 싱싱싱! ★★★
김혜리 판타지의 날개 없이도 날아오르는 뮤지컬 ★★★☆


1. “관객도 보는 내내 우리의 우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글 : 오정연 (씨네21 기자) 2007.10.17  

<원스>의 두 주인공 글렌 한사드, 마르케타 이글로바 서면 인터뷰

선댄스 관객상 수상 이후 올해의 인디영화로 꼽힐 정도의 흥행을 기록한 음악영화 <원스>의 신데렐라 이야기가 지구 반대편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9월20일 국내 개봉하여 3주 만에 6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고, 10개관이었던 개봉관은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 지난 10월11일에는 17개에 이르렀다. 거리의 악사와 그의 음악을 알아본 이민자 소녀의 수줍은 사랑 이야기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불어넣은 것은 바로 음악. 이 성공담의 진짜 주인공을 존 카니 감독이 아닌, 두 주연배우 글렌 한사드(남자)와 마르케타 이글로바(소녀)로 꼽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유명 밴드 ‘더 프레임즈’(The Frames)에 몸담았던 카니 감독은 자신의 초저예산 장편이 성공하기 위해 실제 뮤지션이 배우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밴드의 리더이자 감독의 오랜 친구 글렌 한사드가 합류했고, 한사드는 체코 순회공연 때 만난 마르케타 이글로바를 끌어들였다. 영화보다는 음악을, 대중적 성공보다는 지인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우선시한 이들의 ‘잼 세션’은 현재 진행 중이다. 지난 5월 <원스>의 미국 개봉과 함께 시작한 전세계 프로모션 투어를 여전히 함께하고 있는 두명의 배우에게 서면으로 질문을 전달했다. 영화만큼이나 소박한 태도로 갑작스런 유명세를 즐기는 이들의 답변은 영화 속 그들과 묘하게 겹치고 어긋난다. 음유시인다운 면모로 영화와 인생을 바라보는 한사드는 그 남자보다 현명하고, 소녀다운 설렘과 풋풋함을 간직한 이글로바의 답변은 그 소녀보다 솔직하다. 어느 쪽이 더욱 사랑스러운지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원스>는 현재 한국에서 작은 영화로서 큰 성공을 거두는 중이고, 미국에서도 굉장한 성공을 기록했다. 예상 밖의 유명세가 아직도 낯설지 않을까. 이로 인한 신상의 변화는 어떤 것이 있나.
=마르게타 이글로바: 사실 어릴 때 난 나중에 커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나의 유년기는 완벽했고, 어른이 된 뒤의 내 모습이나 직업에 대해서는 전혀 계획한 바가 없었다.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노래를 불렀는데, 음악을 듣고 뮤지컬을 좋아하면서도 뮤지션이나 배우로서의 꿈은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13살 때 글렌을 만나면서, 나 역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글렌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던 그 시기에야 싱어송라이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이젠 그 꿈을 이루게 됐지만, 여전히 난 이것이 언젠가 끝나게 될 내 삶의 한 장(章)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새로운 뭔가를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물론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현재로서는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 즐길 뿐이다!
=글렌 한사드: 물론 나의 일상이 이 영화로 인해 많이 변했다. 하지만 그저 조금 더 바빠진 정도고 별로 대단하지 않은,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이렇게 주위의 모든 것들이 속도를 내면서 나의 통제를 벗어날 때는 스스로 기본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아마도 다른 모든 물결처럼 이것 역시 잠시 동안 밀려오다가 결국은 속도를 늦추고 지나가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즐기려고 한다. 나와 마르케타, 존, 세 사람은 친구들끼리 모여서 스스로 자랑스럽기 위해 영화를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모두가 개입된 굉장히 사적인 영화였고, 대중이나 매체가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영화가 선댄스에 초청됐다는 말을 듣고, 이처럼 작은 영화가 그런 기회를 얻은 것에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으니까. 음악적으로는, <원스>가 미국에서 성공한 이후 ‘더 프레임즈’의 앨범 판매 역시 엄청나게 증가했다. 영화적으로는, 몇몇 영화에서 캐스팅 제의도 들어오고는 있지만 아직 시나리오를 읽어볼 시간도 없었다. 스스로를 배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영화에 출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의 제안이기만 하다면 기쁜 마음으로 임하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우선이고, 가장 기쁘게 임할 수 있는 건 음악이다. 이 밖에도 나와 마르케타는 현재 새로운 ‘스웰 시즌’의 음반을 내려고 준비 중인데, 내년 4월쯤에는 녹음할 시간이 나지 않을까 싶다.

-남자가 더블린 번화가에서 노래하는 장면은 모두 행인을 통제하지 않은 채 촬영했다던데. 당신이 리더인 밴드 ‘더 프레임즈’가 아일랜드에서는 무척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글렌 한사드: 사실 그 부분이 <원스>를 촬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장면으로, 시간도 제일 많이 걸렸다. 촬영허가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갖가지 장애가 많았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다가와서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극중에서 남자는 완전한 무명가수 아닌가! 경찰이 촬영을 제지한 적도 종종 있었다. 일상적인 문제로는 도시의 각종 소음들. 사이렌 소리며 청소기 소음, 비행기 소리 등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거리에서 게릴라 스타일로 영화를 찍는 것에 어떤 짜릿함을 느낀다. 베르너 헤어초크가 “현대영화의 문제는 영화의 범죄적(criminal) 요소를 점점 잃어간다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는 게릴라 영화의 짜릿함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원스>에 나오는 8, 9곡의 노래 중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는 무엇이며 그 이유는.
=글렌 한사드: <If You Want Me>. 마르케타가 촬영 1시간 전에 완성한 노래다. 나는 이것이 긍지와 강단을 갖춘 훌륭한 여성의 노래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 노래가 나올 때 마르케타의 연기는 굉장히 설득력있어 보인다. 촬영을 할 때나 나중에 스크린에서 볼 때나 그 장면은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마르게타 이글로바: 영화에 포함된 모든 노래를 좋아해서, 제일 좋아하는 걸 고르기가 매우 어려운데, 굳이 답하자면, <Say It to Me Now>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영화의 도입부에 글렌이 거리에서 부른 노래인데, 글렌의 오랜 노래이고, 개인적으로는 항상 좋아했던 노래이기도 하다. 가사가 매우 인상적인데, 글렌이 그런 부분을 매우 잘 살렸다. 영화 속 글렌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도 굉장히 효과적이었던 것 같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다보니, 작사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마르게타 이글로바: 아무래도 모국어가 아니니까 영어로 작사를 하면서 곤란함이 종종 있었다. 그러다보니 내 맘처럼 우아하게 나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글렌이 곁에서 좀더 부드럽고 좋은 가사를 만들수 있는 제안을 해줬다. 글렌과 함께 노래를 만들면서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개인적으로, 노래를 만드는 건 언제나 매우 즐거운 과정이다. 특히 글렌처럼 재능있는 누군가와 함께한다면 더욱.

-영화를 찍기 전 꽤나 밀접하게 감독과 함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안다. 어떤 준비를 했나.
=글렌 한사드: 과연 우리가 연기할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토론했다. 촬영 직전 몇주 동안은 많은 영화를 함께 봤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봤는데, 그 영화가 파리에 대한 애정을 보여줬듯이 <원스>로 더블린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존은 마르케타에게 촬영 전에 몇몇 영화를 보라고 주문해다. 이를테면 존 카사베츠의 <영향 아래 있는 여자>에서 지나 롤렌즈의 연기를 보고,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에서는 두 주인공 사이에 있는 언어로 인한 장벽을, <그녀에게>에서는 카에타노 벨로소가 <쿠쿠루쿠 팔로마>를 부르는 순간을, 다르덴 형제의 <차일드>에서는 어떤 감성을, <쉘부르의 우산>에서는 위대한 뮤지컬의 면모를 중심으로 보라는 식이었다. 결국 <원스>를 촬영하기 직전 우리 모두는 영화에 대해 상당한 애착을 가지게 됐고, 영화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상태가 됐다.

-존 카니 감독이 이 영화에 당신들을 캐스팅한 것은, 개인적으로 잘 아는 비전문 배우들의 개인적인 면모를 영화 속 캐릭터와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신들의 캐릭터가 반영되어, 시나리오가 달라진 장면이 있다면.
=마르게타 이글로바: 내가 연기한 소녀의 캐릭터는 처음부터 잘 구축되어 있었던 편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그녀가 굉장히 맘에 들었다. 애초 시나리오에는 그저 동유럽 소녀라고만 묘사됐다가, 내가 캐스팅되면서 체코 소녀로 바뀌었는데, 그게 굉장히 좋았다. (웃음) 내 생각에 이 영화에 나와 글렌 때문에 변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우리 둘의 우정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관객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그걸 느끼지 않았을까.
=글렌 한사드: 촬영 당시에는 정말이지 너무 바빠서 중대한 불일치가 생길 여유도 없었다. 모든 것은 촬영하기 전에 이미 결정돼 있었다. 현장에선 그저 빨리빨리, 문제를 해결하면서 진행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현장에서 존은 최종 결정권자였고, 그러다보니 모든 논란은 쉽게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마지막에 말하는 건 그였으니까. 남자와 소녀가 버스 안에 나란히 앉아 있다가, 소녀가 남자에게 전 여자친구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이 있었다. 근데 아무래도 대사가 붙지 않고, 정체된 상태에서 존이 말했다. “오케이, 당신들이 비전문 배우니까 이런 약점이 있는 건 당연하고, 별 문제될 것 없다. 그렇다면 글렌, 기타를 꺼내서 (노래로) 여자의 질문에 대답해봐라. 어떻게 되는지 한번 지켜보자.” 당연히 우리는 긴장을 풀 수 있었고, 문제는 해결됐다. <후버 청소기 수리사의 노래>는 그렇게 즉흥적으로 완성됐다.

-그런데, 제목이 <원스>인 이유가 무엇인가.
=글렌 한사드: 내 입장에서 ‘원스’라는 말은 몇 가지 의미가 있다. 가장 중요하게는 그 단어를 사용해서 남자의 상태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음반을 만들기만 한다면(once I make a record) 행복해질 텐데”, “여자친구를 되찾기만 한다면 삶이 나아질 텐데” 처럼 말이다. 또한 이것은 “옛날 옛적에”(once upon a time)로 시작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목의 ‘공식적인’ 유래는 사실, 존이 애초에 시나리오를 쓸 때, 남자와 여자가 단 한번(once)의 키스를 나눈다는 점이었다. 물론 나중에 존이 키스신을 시나리오에서 빼버렸지만.

-나이를 먹었지만 철이 없어 보이는 남자와 달리, 소녀는 강단있고 현명하면서도 천진하다. 소녀의 어떤 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나. 혹시 못마땅한 면은 없었나.
=마르게타 이글로바: 나 역시 그녀의 강인하고 단단하고 용감한 면모가 맘에 든다. 그녀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주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다. 또한 그녀가 남자의 능력을 믿고, 그를 지지하면서, 그에게 영감을 주는 등 완벽하게 이타적인 면도 좋다. 단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너무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짊어지려고 하고, 심지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면서까지 주변 사람들을 완벽하게 돌보려 하는 모습이다. 그런 게 꼭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남자는 런던의 지하철에 앉아 있고, 여자는 돌아온 남편, 아이가 있는 집에서 남자가 선물한 피아노를 친다. 매우 인상적인 엔딩인데, 개인적으로는 그 두 사람이 그 뒤 어떤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하나.
=글렌 한사드: 남자는 결국 여자친구를 찾고, 그녀와 함께 일상을 꾸려갈 거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는 음악을 포기하고 여자친구를 위해 뭔가 현실적인 직업을 얻지 않을까 싶다. 내가 볼 때 그는 매우 단순한 사람이고, 뮤지션으로서 대단한 야망도 없는 것 같다. 그는 단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노래를 만들었을 뿐이다. 일종의 일기처럼.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행복할 때는 일기를 잘 쓰지 않게 되지 않나. 그 역시, 다시 행복해진다면 더이상 노래를 만들 필요는 없겠지.
=마르게타 이글로바: 그녀과 그 남편이 사랑을 되찾고 서로의 과거를 용서했음 한다. 그래서 소녀가 다른 남자를 떠나보낸 걸 후회하지 않도록. 그렇게 그 가족이 아일랜드에서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고, 괜찮은 삶을 꾸릴 만큼 충분한 돈을 벌게 되길 바란다.

-질문이 좀 유치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양해 바란다. 음악과 영화 중 어떤 것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나.
=마르게타 이글로바: 두 종류의 예술 중에서 무엇이 더 훌륭한지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다. 모든 예술이 모든 예술가에게 어울리는 건 아니지만, 모든 예술은 동등하게 가치가 있다. 영화를 보는 것을 음악을 듣는 것만큼이나 좋아하지만, 나에게 음악이 좀더 편안하고 즐기는 일인 건 사실이다. 게다가 음악을 만드는 건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지 않나!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나.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글렌 한사드: 아직도 영화 때문에 매우 바쁜 상태다. 내년 3월에는 뉴욕에 가서 영화연출을 공부하려 한다. ‘스웰 시즌’(The Swell Season, 한사드가 처음으로 만든 솔로 앨범으로 마르케타와 함께 만들었다)의 또 다른 앨범을 곧 내야겠지만, ‘더 프레임즈’의 또 다른 앨범도 만들고도 싶다. 나와 마르케타의 관계는… 우리 둘은 이번 영화를 비롯한 일련의 경험을 통해 매우 가까워졌는데, 우리에게 그건 매우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앞으로는 그저 이 관계가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겠지.
=마르게타 이글로바: <원스>를 홍보하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니는 중이다. 이 여행은 앞으로 6개월간 계속될 텐데, 중간중간 새로운 노래를 만들면서 ‘스웰 시즌’의 새 앨범을 준비 중이다. 이 여행이 끝나면, 개인적으로도 계속 노래를 만들 것 같다. 운이 좋다면, 그 음악들이 또 다른 영화에 사용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언젠가 그 노래들을 모아서 앨범으로 만들고는 싶다. 연기에 대해서는… 또 다른 영화에 출연해도 좋고, 더이상 연기를 하지 않아도 좋다. 개인적인 장래희망은 언어를 공부해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아이를 갖고, 집을 장만하고, 가족이며 친구와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2. 강추! <원스>

글 : 남동철(씨네21 편집장) 2007.10.12  

<원스>를 뮤지컬이라 부르자니 망설여진다. 뮤지컬 하면 화려한 무대에 어우러진 춤과 노래를 떠올리게 되는데 <원스>는 우리가 익히 아는 뮤지컬과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차이. <원스>에는 주인공의 심경을 담은 노래는 있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황홀한 무대도, 근사한 춤도 없다. 공연예술의 양식적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는 이 영화는 뮤지컬의 특징 가운데 오직 노래의 힘을 빌려왔다. 그것도 기타 하나로 충분한 노래. 아마도 <원스>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꼭 악기가 많아야 좋은 음악은 아니라는 생각이 아닐까. 대부분 기타 하나로 충분하고, 피아노로 보완되는 정도면 충분한 영화 속 노래처럼 <원스>는 이것저것 한눈팔지 않고 자신이 잘 아는 것에 충실하다. 기타와 피아노가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으면 된다. 영화 속 배경은 더블린이 아니라 어디여도 상관없다는 듯 풍경에 무심하며 두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도 필요한 대목에만 그럴듯하게 등장한다. 기타와 목소리만으로도 영혼을 울리는 노래가 있다는 것을 <원스>는 알고 있다.

소박한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인 <원스>는 얼핏 거칠고 투박하게 찍은 영화처럼 보이지만 매우 영리하고 정교한 영화다. 많은 이가 지적한 <원스>의 매력을 대변하는 장면을 보자. 여자가 밤거리를 걸으며 CD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노래 부르는 대목. “난 정말 노력했어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당신을 기쁘게 해주려고.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전부이니까. 당신이 하라는 건 난 뭐든 할 거예요. 진정 날 원한다면 내 맘을 알아줘요.” 이 장면은 노래가 아니라 대사라면 성립하기 힘들다. 대사라면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이가 분명할 텐데 여기선 누구를 향한 말인지 불분명하다. 음악을 만든 남자를 향한 것인지 여자의 남편을 향한 것인지. 관객은 뒤늦게 이 노랫말이 자신의 남편을 향한 소원임을 알게 되지만 막상 노래가 나올 때는 그런 생각을 하기 힘들다. 여자에게 남편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은 후반부이다. 여기서 노래는 정서를 먼저 받아들이고 의미를 나중에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한다. 노래가 아니라 대사를 통해서도 비슷한 스타일이 반복된다. 바닷가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그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여자는 체코어로 대답하고 남자는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남자도 관객도 영화가 끝날 때야 그녀의 말을 짐작한다. 정서와 의미 사이의 시차를 통해 <원스>는 즉각적인 감흥 대신 영화가 끝난 뒤 남는 여운을 택한다. 익숙한 이야기에서 빚어지는 낯선 감동은 <원스>의 이런 스타일에 숨어 있다.

<원스> 같은 영화를 보면 영화란 참으로 단순해 보인다. 적절한 대목에 제대로 연주를 하면 된다.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에 집중하거나 그들의 표정에 집중하거나, 적재적소에서 자리를 잡기만 하면 화음은 완성된다. 다양한 악기나 번쩍이는 조명 또는 환호하는 군중이 없어도 말이다. 또한 좋은 노래들이 대부분 그렇듯 의미에 앞서 정서를 사로잡는 것이 중요하다. <원스>가 <카사블랑카> 같은 고전기 할리우드의 로맨티시즘을 부활시킨 느낌을 주는 것도 결말의 유사함만은 아닐 것이다. 로맨티시즘은 음악처럼 은근히 스며들어야 신파의 함정을 피할 수 있다. <원스>는 그런 점에서 올 가을 필요충분한 영화다.



3. “두 사람의 절절한 소통을 눈 앞에서 목격하는 느낌을 줘요.”

글 : 이동진 (이동진닷컴)   글 : 김혜리 | 2007.10.08  

이프 유 원트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음악남녀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음악남녀님의 말(이하 음악): 오늘은 음악영화 <원스>와 곽경택 감독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인베이젼>에 관한 소감을 덧붙이겠습니다. <원스>를 보고 나서 자꾸 머리에 맴도는 노래가 있어요. 양희은씨의 <옛날에 옛날에>라는 곡인데요. “옛날에 옛날에 사랑을 했는데 그 사랑이 사랑일까 내가 몰라 물었더니 사랑이 아니란다.” 이런 노랫말이죠.

이프 유 원트님의 말(이하 이프): “옛날 한 옛날에 얼간이 살았는데…”로 시작하는 노래는 생생히 떠오릅니다만. 제 대화명도 <원스>에서 받은 감동을 그대로 무릎 꿇고 올리는 오마주입니다. 여주인공이 밤거리에서 부르던 노래의 제목이죠. 영화 속 노래들이 다 좋지만 특히 그 곡이 그리도 가슴에 꽂히더이다. 기본적으로 <원스>의 음악과 같은 포크음악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어필하죠. 저는 브라이트 아이스나 데이먼 앤드 나오미의 음악과 느낌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남자가 주 멜로디를 부르고 여자가 코러스를 넣는 화음 방식의 단아함은 모하비 스리랑 흡사했고요. 다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입죠. ^^
음악: 그렇군요! <원스>는 더블린 거리의 가수(글렌 한사드)와 체코에서 이주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마르게타 이글로바)의 만남을 그렸는데, 픽션보다 에세이에 가까운 뮤지컬영화였어요. 사실, 뮤지컬하면 SF, 호러 장르와 더불어 넓은 의미의 판타지영화로 인식하잖아요. 갑자기 식탁 위에 올라가 노래를 부른다거나 하는 관습은 현실의 법칙을 잠깐 정지시킨다는 영화와 관객의 묵계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거니까요. 그런데 <원스>는 판타지가 아닌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희귀한 예외예요.

이프: 정말 놀랍게 사실적이더군요.
음악: 지나가는 행인들이 영화 찍는 줄 몰랐는지 카메라랑 배우 사이에 막 끼어들더라고요.
이프: 두 사람이 절절하게 소통하는 광경을 바로 눈앞에서 관객이 목격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죠.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항상 노래를 부르거나 듣고 있죠. 지나가는 엑스트라조차.^^
음악: <원스>에서 이야기의 핵심은 음악적 성공 스토리도 아니고 짝짓기도 아니에요.
이프: 이건 정말 연애가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안 이뤄지는 것도 아니여.
음악: ^^; 클라이맥스래야 고작 데모 테이프 녹음하는 장면이고요.
이프: 그런데 그 클라이맥스가 정말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거. ^^
음악: 아일랜드가 배경이기도 하지만 <원스>를 보면서 알란 파커 감독의 영화 두편이 그리워지더라고요.
이프: <커미트먼트>, 그리고?
음악: <페임>. 서툴게 출발해 화음을 완성해가는 모습이나 부모의 순박한 후원이 특히 비슷해요.
이프: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다룬 음악영화는 많지만, <원스>처럼 서사와 음악이 어떤 절실하고도 긴밀한 끈으로 만나는 영화는 정말 드물어요.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머물지도 않고, 그렇다고 뮤지컬처럼 장르적으로 과시되지도 않잖아요.

음악: 음악으로 들어가고 빠져나오는 방식이 자연스러워 문턱이 거의 없죠.
이프: 음악과 서사가 서로 부드럽게 손을 잡고 멋진 2인무를 추는 느낌이랄까요.
음악: 그런 자연스러움은 두 인물의 관계 묘사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통상, 연애나 거기 준하는 관계가 성립되기까지 나오게 마련인 탐색전- 애 엄마라거나 남편이 고국에 있다거나 하는 설명- 이 따로 없는데도 어색하지 않았어요.
이프: 사실 이 영화에서 뭐 속시원히 해결되는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의 삶에 위로가 되고 음악은 그 둘의 삶의 이유가 되죠. 이 영화가 보여주는 위로가 딱 현실에서 가능한 정도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삶에서 그 이상 뭐가 더 있겠어요.
음악: 첫 만남에서 여자가 먼저 접근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죠? “아무도 안 듣는 밤에만 자작곡을 부른다”는 남자에게 “내가 듣고 있잖아요?”라고 대뜸 반박하죠.
이프: 남자쪽이 연애는 몰라도 결혼 상대로는 좀 대책없는 편이라면 여자는 양쪽 모두 괜찮을 것 같다는.
음악: 그런데 저는 그처럼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속마음을 열어 보이는 장면이 의외로 현실적인 데가 있다고 생각해요. 가끔 그런 경험을 하거든요. 버스에서 가방을 들어준 아저씨가 이어폰을 끼고 있는 제게 “뭘 듣냐?”고 물어서 한참 음악 이야기를 한 적도 있고 병원 대기실에서 옆 사람에게 갑자기 속내를 털어놓을 때도 있었고.
이프: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원래 가족에겐 깊은 이야기를 더 못하는 법이니까. 그게 단계가 심화되면 비누하고 대화하는 상황이 오죠, “많이 여위었구나.” <중경삼림>처럼. ^^
음악: 스쳐가는 사람은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의미있는’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비밀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거겠죠. 그래서 뜻밖에도 진실의 순간을 공유하는 거고.
맞다. 네비게이터와 대화하는 사람도 많다던데. 앗! 우리 배가 또 산으로 가고 있어요!

이프: 메신저토크호는 헤어초크의 <피츠카랄도>처럼 산으로 갈 때 재밌다는. ^^ 그런데 영화 속 두 사람이 아주 잘 어울려 보이는 것에는 두 사람이 뮤지션을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실제 뮤지션이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거예요.
음악: <입술은 안돼요>의 경우와 달리 실제 음악인을 캐스팅했는데, 말씀하신 대로 그 이유는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라 음악인의 삶을 안다는 점이었겠죠. 원래는 킬리언 머피가 하려고 했다는데, 지금 상상하면 이상하죠?
이프: 머피도 멋진 배우지만, 그가 했다면 이 영화의 신비스러우면서도 생생한 느낌은 결코 얻지 못했을 듯. 어찌 보면 음악다큐멘터리 같은 면마저 있잖아요. 어떤 영화를 보면 감독이든 배우든 그들의 일생에서 딱 한번밖에 만들지 못하는 영화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원스>가 그랬어요. 감독과 두 배우의 재능이 아니라- 물론 재능도 있지만- 그 재능이 마술적 순간에서 신비롭게 만나 기이할 정도로 아름답게 포착된 경우라고 할까요.
음악: 음악을 다룬 영화를 볼 때면 곡 하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퀀스가 가장 짜릿하게 느껴집니다. 예컨대 <아마데우스>에서 죽어가는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악기 파트별로 살리에리에게 채보시키는 장면이 그랬죠. <원스>에서는 CD플레이어에 넣을 건전지를 사러 나온 여주인공이, 밤길을 걸으며 이어폰에서 들리는 음악에 가사를 얹어 부르는 장면이 절창이었어요.
이프: 모든 ‘예술가영화’가 마찬가지죠. 심지어 <바베트의 만찬> 같은 음식영화에서도 요리를 세심하게 만들어 식탁에 올리는 대목이 짜릿하잖아요?
음악: 그런 면에서 글쟁이들이야말로 참으로 비영화적인 피사체들이에요. 생산하는 스펙터클이래야 고작 펜으로 사각사각 아니면 자판으로 또각또각. 수십년 전에는 파지를 구겨 내던지는 박력이라도 있었지.
이프: 진짜, 저는 파지 막 구겨서 던지는 것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는데, 그것도 한번 못해보고…. -.- 대신 컴퓨터 모니터를 내동댕이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그건 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음악: <원스>는 슬프면서도 기쁜 오묘한 ‘음정’으로 끝나서인지, 돌이켜 생각할수록 호감이 갑니다.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만 보면 <사랑>은 거의 <원스>의 반대말이죠. “한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이듯, “초등학생 때 첫사랑은 평생 사랑”이라고 말하니까요.
이프: 그렇죠. <사랑>의 판타지는, 사랑에서는 피학적인 쾌감을 지향하고 폭력에서는 가학적인 쾌감을 지향한다는 점이 참 기묘한 느낌을 줬어요. 조폭이 나오는(<사랑>의 주인공은 조폭은 아니지만 하는 일은 비슷하죠) 한국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폭력을 휘두를 때는 무지막지한데, 사랑에서는 어쩔 줄 모르는 숙맥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예가 많아요. 남자끼리는 거침없는데 여자와의 관계는 한없이 조심스러운 조폭을 로맨틱하게 그리죠. 마초이즘의 양면과 같은 판타지라고 생각해요.
음악: 그런 이야기에서 사랑은 주인공이 폭력을 쓰는 원인이 되고, 그 인과관계는 거의 절대적이죠. 인물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다른 선택의 여지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프: 저는 이 영화의 모티브가 일정 부분 피천득의 수필 <인연>을 떠올리게 한다고 생각해요. 인호와 미주는 모두 세번 만나는데 세 번째 만남은 아니 만나느니만 못했다는 거죠.
음악: 순진한 청년-아름다운 소녀-애달픈 사랑-조직폭력-죽음으로 구성되는 한때 유행한 뮤직비디오를 좀더 높은 수위의 표현과 고급스런 만듦새로 극장에서 2시간 동안 본 것 같다는 소감도 있었습니다. <달콤한 인생>을 상기시키는 전환이 나오고….
이프: 결말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방식으로 흐르죠. 진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려는 한국 남성감독들의 공식이 있어요. (전학 온) 소년은 (혹은 전학 온) 소녀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런데 둘이 어떤 계기로 헤어져 소식이 끊겼다. 세월이 흘러 우연히 다시 만났는데 둘 사이엔 피치 못하게 헤어져야 할 어떤 이유가 다시 생긴다. 대단원으로 가는 과정에서 남자는 과거의 약속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애쓴다….
음악: 사실 그런 식의 남녀관계는 ‘혈연’에 근접하죠. 가족주의가 연상돼요. <사랑>의 인호도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당한 폭력에는 불같이 대항하면서 자기가 모시는 회장에게 따지러 온 여자들에겐 간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해요. <사랑>에는 듣기에 다소 고역스런 대사들이 있어요. “한 그릇 했다”는 둥 “오랜만에 드시는 것 같다”는 둥 여성을 음식에 비유하는 표현이 많죠. 미주를 구하려다 살인미수로 구속된 인호가 재판에서 강간 사실을 증언하겠다는 미주에게 사람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 밝히지 말라면서 “나한테는 그게 문제다” 하는 대사를 할 때는 좀 놀랐어요.
이프: 전 사실 이 영화에서 강간에 대한 폭력적 판타지를 은밀히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있어 위험하다고 봤어요. 치환(김민준)이 미주를 강간하는 장면에선 그가 악마적인 캐릭터임을 드러내야 한다는 필요를 인정한다 해도 촬영이나 대사의 톤에서 은밀하게 그 상황을 즐기게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거죠. 팬티를 벗겨내는 숏이라든지 치환이 자신의 손가락에 침을 묻히는 장면이 그렇죠. 집요하게 강간을 먹는다는 행위에 비교하는 대사들도 그렇고요. 그가 그런 말도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악당이라는 점과 그런 악당이 그런 대사를 극중에서 계속 내뱉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다는 거죠.
음악:사랑의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인호의 삶이 서서히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은 영화의 관심사는 아니었어요.
이프: 배우들의 연기는 대부분 좋았습니다. 부둣가 로케이션도 좋았고요.
음악: 곽경택 감독은 배우를 멋지게 잡아주는 감독이죠. 조명과 앵글에 많은 신경을 써서 배우의 표정과 움직임을 잘 살렸어요. 특히 남자배우들에겐 같이 일하고 싶은 파트너로 꼽힐 것 같아요.
이프: 예를 들어 장동건에게 <친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잖아요. 사실 이 영화에서 주진모의 연기는 <친구>의 장동건을 떠올리게 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상당히 호연했다는 생각입니다.
음악: 곽경택 감독의 대사는 감각적이고 유머도 뛰어나죠. 특히 큰 육체적 고통과 신체의 훼손을 보여준 다음 경상도 남자스럽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무덤덤한 대사를 툭 던지는 방식을 자주 써요. ^^“니 학교 안 가나?” “저번주에 짤맀다”라든가. 사실 머리가 깨지도록 싸우고 서너 음절 정도의 대사를 주고받는 걸 보면 과연 현실일까 싶어요.
이프: 대사가 짧고 무뚝뚝할수록 진심이 담겨 있다고 믿는 쪽이죠. 극 초반 고교 시절 인호가 ‘본드’로 불리는 상우와 싸우다 병에 찔리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 그때 상우는 갑자기 병으로 가슴을 찌르면서, 살의를 그대로 담아 죽으라고 주문처럼 말하죠.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선 화해하는 장면이 생략된 채 병실에서 찔린 일의 뒤처리를 놓고 둘이서 돈 얘기를 친구처럼 나누는 게 나와요. 저는 그런 연결 방식 자체에 남자들의 관계에 대한 감독의 판타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말이 길면 구차하다는 것, 남자끼리 친구끼리는 미안하고 말고 그런 말을 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 왜냐하면 ‘우리는 친구니까’.
음악: 그렇기에 이번 영화가 절절한 멜로드라마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들 궁금해했죠. 여성과의 관계를 쌓아가는 과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이프: 사실 사랑을 과감하게 내세운 이 영화에서조차 생생해 보이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아니라 남자들끼리의 관계잖아요? 남녀관계는 매우 도식적이고 신화적으로만 묘사되고 있고요. <사랑>의 연출은 매끄러워요. 그런데 그 연출력이 아니라 그것으로 그려내는 영상과 이야기가 많이 걸린다는 거죠. 전 사실 곽경택 감독의 홀수 영화를 좋아해요. <억수탕> <친구> <똥개>였죠. <억수탕>에는 한 어린아이가 공중목욕탕에 와서 엎드리면 때밀어주는 아저씨가 아주 힘들게 밀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보다보면 그 아이가 무척 얄미워지죠. 그런데 끝까지 보면 그 아이가 그 아저씨의 아들이거든요. 그 순간 느껴지는 푸근한 인간미 같은 것이 곽경택 감독 영화에 있었는데 <사랑>에서는 그런 장면을 찾아볼 수가 없더군요. 무척 아쉬웠어요.
음악: <인베이젼>은 잭 피니의 소설 <바디 스내처>를 돈 시겔, 필립 카우프먼, 아벨 페라라에 이어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이프: 세편 모두 재미있었는데 <인베이젼>은 어떤가요?

음악: 아쉽지만 네편 중에 가장 처집니다. 니콜 키드먼, 제레미 노섬, 대니얼 크레이그 같은 배우들이 낭비된 셈이에요.
이프: 기본적으로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이야긴데, 왜 그렇게 되어버렸죠?
음악: 공포와 의심, 서스펜스를 살리지 못하고 보통의 스릴러처럼 만들어졌어요. 절정이 자동차 추격전이니까요. 외계 바이러스가 인간의 육체를 탈취하는 <바디 스내처> 이야기의 흥미로운 부분은, 기억이나 생각까지 똑같이 복제되면서도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그 ‘무엇’만 빠진 존재로 인간이 탈바꿈한다는 점이죠. 그런데 <인베이젼>의 신체강탈자들은 그냥 좀비처럼 그려졌어요.
이프: 설정의 뉘앙스를 잘 살리지 못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죠.
음악: <바디 스내처>를 각색한 영화들은 매카시즘, 에이즈 등 당대 사회적 이슈의 은유라는 평을 받았죠. <인베이젼> 역시 이라크 전쟁과 뉴올리언스의 재해를 누차 언급해요. 그런데 문제는 첫째, 오직 대사로 그런다는 것, 둘째 언급은 하되 정작 술어가 빠져 있다는 것. 말하자면 그 문제들에 대한 영화의 의견이 없다는 거죠. “인간은 한심하다”는 정도죠.
이프: 다루긴 다뤄야겠는데, 어떻게 다룰지 몰랐나보다. ^^ 시각적인 측면은 어떤가요? 그 사이 특수효과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니까요.
음악: 피부에 보풀이 일고 CG로 그려진 혈구들이 나오고 바이러스는 구토로 전염됩니다. 긴박감을 주기 위해 빠른 편집을 했는데, 제대로 붙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 그러나 니콜 키드먼은 아주 아름답습니다. 기억할 만한 대사도 분명 있고요.
이프: 아하, 메모했군요. ^^
음악: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물이 저항하는 니콜 키드먼을 이렇게 타일러요. “왜 거부하는 거지? 당신이 언젠가 숲의 나무처럼 살고 싶댔지? 우리처럼 변화하면 ‘타인’은 없어지고 사람들은 완벽하게 서로 연결돼. 정신과 약 처방과 뭐가 달라?”
이프: 허허. 거의 <매트릭스>적 대사군요. <트루먼 쇼>도 생각나고요.
음악: 그러나 전체주의에 대한 보편적 비판에 그치죠. 이런, 명절을 앞두고 오늘은 너무 많은 험담을 했네요.
이프: 음… 악! 소리 나는 남녀인가요.


4. 선댄스영화제 관객상 수상한 올해의 인디영화, <원스>의 매력

글 : 오정연(씨네21 가자) 2007.09.26  

수많은 오해가 겹겹이 쌓이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아픔만 남겼지.
난 이해하지 못했어, 네가 왜 내 손을 잡으려 했는지.
내게 할 말이 있다면 지금 말해줘.
-<Say It to Me> 글렌 한사드 노래

한 남자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분주했던 그 골목에 어둠이 깔린 지 오래. 집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이들 중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정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래서 가슴이 미어지는 독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메라가 그에게로 걸어간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선 거리가 다소 부담스러울 무렵, 카메라가 살짝 물러서면, 소녀의 등이 보인다. 카메라가 곧 그녀의 시선이었던 것. 진심이 담긴 노래를 알아본 소녀가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10센트짜리가 2유로짜리라도 되는 듯 기타 케이스에 집어넣는 소녀에게 남자는 투덜대고, 동그란 눈의 소녀는 남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그 노래의 주인공을 아직도 사랑하냐고 묻는다. 계속해서 핀트가 어긋나는 둘의 대화는 직전 5분의 열창이 쌓아올린 교감을 한순간에 무너트릴 기세다. 그러나 안심하자. 투덜쟁이 거리의 악사와 무례한 참견꾼의 만남은, 전형적인 ‘소년, 소녀를 만나다’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올해 선댄스영화제 관객상 수상작으로 미국 전역에서 여름시장 내내 개봉하여 ‘올해의 인디영화’로 등극한 <원스>(9월20일 국내개봉)의 성공비결은 평범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솔직함에 있다.

선댄스와 미국 관객을 사로잡은 인디영화
“카니 감독은 많은 인디영화들의 짜증나는 방법을 반복했다. 주인공들을 그와 소녀라고 부르며 이름을 붙이지 않았고, 핸드헬드로 촬영했으며, 클라이맥스를 지닌 전통적인 플롯을 따르지 않았다.” <원스>에 대한 호의어린 기사의 한 부분이다. 짜증스런 혹평처럼 보이는 것은, <원스>가 지닌 매력의 상당부분이 실제 음악가인 두명의 비전문배우가 선보인 음악적 교감에 있음을 말하기 위한 기사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영화위원회로부터 지원받은 15만달러의 제작비로, 17일 동안 DV로 촬영한 아일랜드영화 <원스>는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100만달러에 폭스 서치라이트에 팔렸고, 지난 5월 미국 내 2개관에서 개봉한 뒤 서서히 개봉관을 늘려간 끝에 8월 말 현재 760만달러의 수익을 거뒀다. 그러나 1972년생 존 카니 감독은 브라이언 싱어, 케빈 스미스, 폴 토머스 앤더슨 등 비관적인 재기발랄함으로 무장한 선댄스 키드가 아닌, 소박하고 어눌한 유럽형 작가에 가깝다. 20대 초반부터 몇편의 단편과 한두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고, 방송사에서 TV시리즈를 연출한 바 있는 카니 감독은, 잼 세션을 이끄는 밴드 리더처럼 <원스>를 만들었다. 최적의 연주자를 맞춤한 포지션에 위치시키고, 그들이 기꺼이 놀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난 당신을 몰라. 그러기에 더욱더 난 당신을 원해.
이해 못할 말들이 날 바보로 만들기에 난 대꾸할 수가 없어.
서로를 속이는 의미없는 게임은 우릴 지치게 할 뿐이야.
침몰하는 이 배를 붙잡아줘, 우린 아직 늦지 않았어.
-<Falling Slowly> 글랜 한사드, 마르게타 이글로바 노래

청소기 수리가 본업인 더블린 거리의 악사가 데모 음반을 녹음하고 런던으로 떠나기까지, 어머니와 어린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체코의 이민자 소녀가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까지, 두 주인공이 영감을 주고받는 과정을 86분의 러닝타임에 담아낸 <원스>의 마법은 음악에서 비롯된다. 만남이 두 번째에 이르고, 점심식사까지 함께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은 여전하다. 고향인 체코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소녀가 점심시간이면 들러서 피아노를 연습하곤 한다는 악기점에 들르고, 남자가 직접 만든 노래를 둘이 함께 연주한다. 한 소절마다 코드와 가사를 알려주는 남자의 기타, 서툰 반주와 수줍은 화음으로 그를 따라가는 소녀의 피아노, 그리고 이들의 솔직한 목소리가 섞여드는 과정은 사실적이고도 섹시하다. 몇 시간의 대화로도 불가능했던, ‘존재의 교감’이라는 것이 비로소 가능해진 느낌. 노래가 끝나고 일상이 시작되면 그것이 결국 착각으로 밝혀지더라도 교감의 훌륭함은 지속이 아닌, 경험 그 자체에 있다. <원스>에서 흘러나오는 8곡의 노래 중 예닐곱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삽입된 게 아니라 연주된다. 8번의 교감과 그로 인한 마법이 이뤄진다는 뜻이다. 매료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가씨와 건달들> 같은 위대한 뮤지컬영화는, 좋은 노래를 훌륭한 화면과 함께 감상하기 위해 틀어놓는 경우가 있다. 일종의 비주얼 앨범과 같은 느낌의 현대적인 뮤지컬을 만들고 싶었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댄서들의 군무나 천연덕스럽게 흘러나오는 밴드 연주 등 비현실적인 요소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단 한곡을 제외하면 모든 노래가 실제 등장인물이 각각의 상황 속에서 부르는 설정으로, 소박한 기타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등장하는 이 영화는 뮤지컬이라기보다는 MTV 이후 세대를 위한 새로운 뮤직비디오-영화에 가깝다. 고전 뮤지컬의 노래의 빈구석을 채우는 것은 춤이었다. 단 한곡을 제외한 영화 속 모든 음악을 화면 내 사운드로, 실제 현장에서 녹음한 그대로의 버전으로 들려주는 <원스>에서는 전체적인 이야기와 조우하는 이미지의 몽타주가 춤을 대신한다. 단순하고 단조로운 각 시퀀스의 8번의 노래로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이쯤 되면 관객은 이야기의 진행을 기다리는 것인지, 더 좋은 노래를 다시 한번 듣고 싶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음악이 이 영화의 힘
영화 속 남자와 소녀, 그리고 그들을 도와준 밴드 친구들이 1주일에 걸친 데모 음반 녹음을 마친 어느 새벽. 지쳐 널브러진 이들에게 프로듀서가 제안한다. “이제 카 테스트를 해보자고. 허접한 차 스피커로 소릴 들어봐야 제대로 녹음됐나 알 수 있지.” 프로듀서의 소형차의 트렁크에까지 몸을 구겨넣은 일행이 고생한 결과물을 들으며 더블린 근교의 바다로 향하는 장면. 존 카니 감독이 10대 후반, 록밴드 ‘더 프레임스’(The Frames)의 베이시스트로 합류했던 경험이 녹아든, 업계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대목이다. 아일랜드에선 제법 이름을 알린 ‘더 프레임스’는 남자주인공 글렌 한사드가 이끌어왔고, <원스>의 노래 중 상당수는 이미 ‘더 프레임스’에서 만들어 연주한 바 있는 것들이다. “90페이지에 달하는 시나리오를 써내려가는 일에 싫증을 느낀” 카니 감독은 대강의 줄거리를 구상한 채로 한사드에게 “이런 식의 테마가 있는 곡이면 좋겠다”고 제안하고, 이에 한사드는 새로 노래를 만들거나 예전에 만들었던 노래를 들려주곤 했다. 노래에 맞는 장면이 새로 생기기도 했고, 각각의 노래와 장면을 이야기의 골격 안에 넣어보기도 했다. 남자가 작곡한 노래에 가사를 붙이기 위해 소녀가 길거리에서 CD를 듣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처럼 “이 장면은 뭔가 뮤지컬 같은 느낌이 나야 하니까 좀 강렬하고 비트가 있었으면 한다”는 주문도 있었다. 거리의 악사와 이민자가 등장하는 뮤지컬이라는 아이디어는 두 남자가 3, 4일을 함께 빈둥거리면서 피아노를 뚱땅거린 끝에 소박한 시나리오로 완성됐다.

컷 사인도 슬레이트도 없이 리허설이 촬영이고 촬영이 리허설인 현장. 더블린 한복판에서 촬영을 진행하다 경찰이 이를 제지하면 자리를 옮기는, 한마디로 거리의 악사 같은 날들이었다. 크리스마스부터 신년에 걸친, 밥차도, 간식도, 커피도, 메이크업도 없는 촬영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온 뒤, 감독과 두 배우는 기타를 집어들고 노래를 만들고 이를 연습하곤 했다. 카니에게 있어 한사드는, 음악적 성향을 공유한 완벽한 음악감독이자 어떤 순간에 어떤 행동을 하는지 파악하고 있어 완벽에 가까운 통제가 가능한 솔직한 배우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카니에게 소녀 역할을 맡을 만한 인물로 마르게타 이글로바를 추천한 인물이 바로 한사드로, 그는 출중한 캐스팅 디렉터 역할까지 해냈다. 한사드와 이글로바는 ‘더 프레임스’의 체코 공연 당시 스탭이었던 이글로바의 아버지가 집에서 열었던 파티에서 처음 만났고, 이글로바의 피아노 연주 및 노래 실력을 알아본 한사드는 이글로바와 함께 2006년 생애 첫 솔로 앨범을 냈다. <원스>에서도 많은 노래의 작사, 작곡, 노래를 함께 한 두 사람은 가족적인 분위기의 영화 촬영 이후 실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1970년생 글렌 한사드와 영화 촬영 당시 17살이었고 영화의 홍보 투어 기간 중에도 학교 성적을 걱정해야 했던 1988년생 마르게타 이글로바의 나이 차이가 작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음악의 힘은 무한함을 증명하는 계기로 남은 셈이다.

난 정말 노력했어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당신을 기쁘게 해주려고.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전부이니까.
당신이 하라는 건 난 뭐든 할 거예요.
진정 날 원한다면 내 맘을 알아줘요.
-<If you want me> 마르게타 이글로바, 글렌 한사드 노래

한사드는 <원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 “더블린의 진짜 모습을 따뜻하게 담아낸 것”이라고 말한다. 카니의 카메라는, 이민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소녀의 집과 더블린 근교의 풍광까지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감독과 배우가 실제 더블린 토박이들에, 늘 세대의 DV카메라를 동원하여 소규모로 촬영을 진행해 행인들의 눈에 띄지 않고 그들을 엑스트라로 화면에 담을 수 있었던 것도 큰 몫을 했다. 영화의 첫 장면, 돈가방을 들고 튀는 부랑자와 그를 쫓는 남자의 추격전을 찍을 때는, 카메라의 존재를 모르는 행인이 부랑자에게 달려들었을 정도다. 한밤중의 더블린 뒷골목에서 소녀가 CD를 들으며 <If you want me>를 흥얼거릴 때는 카메라를 바라보는 주민의 시선이 그대로 담겨 있다. 희미한 가로등과 간간이 거리를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화면 속 조명의 전부인 탓에 이글로바의 얼굴은 자주 어둠에 잠긴다. 그러나 귀에 꽂은 이어폰 하나로도 일상적인 공간이 순식간에 영화적으로 변하는 법. 그 과정을 있는 대로 치장하지 않고 재현한 것만으로도 훌륭한 뮤직비디오가 완성될 수 있다.

더블린을 그대로 담아낸 소박한 뮤직비디오-영화
미국에서 개봉하는 지난 몇 달간, 미국 전역을 버스로 이동하며 개봉관에서 관객을 만난 <원스>의 감독과 두 배우의 프로모션 방식은 조금 독특했다. 시사 뒤 관객과의 대화를 가진 다음, 두 배우가 본업으로 돌아가 영화 속 노래를 들려주는 공연을 진행했다. 뮤지션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영화의 홍보 일정으로는 다소 낯선 그 기간 동안 영화와 음악이, 존 카니 감독과 밴드 ‘더 프레임스’가, 서로를 도우면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간 것이다. <원스>의 의미심장한 마지막도 그와 같았다. 미래를 내팽개친 순간의 충동에 굴복하지 않고, 비루한 현실에 쉽게 절망하지 않은 두 주인공이 그에 합당한 보답을 받으리라는 확신이 담긴 따뜻한 결말은, 존 카니 감독의 연출적 재능이 엿보이는 몇 장면 중 하나다. 핸드헬드로 가득한 영화 전체를 통틀어 유일한 크레인숏인 마지막 장면은 소녀의 집에서 시작하여 해질녘 더블린의 주택가의 꾸밈없는 얼굴을 비추며 끝난다.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대로 열심히 살아보는 것도 꽤나 근사한 일처럼 여겨진다. 극장 밖을 나선 우리로 하여금 질척거리는 현실을 사랑하게 만드는 뮤지컬영화가 과연 있었던가. 풋풋하고 우직한 속내를 지닌 영화 <원스>는 그걸 해낸다. 이유없이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이 무렵 가을 햇살과 꼭 닮았다.


5.  짧지만 긴 표정

글 : 김애란 (소설가)

작은 웃음, 짧은 탄성의 찰나가 선사하는 삶의 평안 느낄 수 있는 영화 <원스>

여자와 남자가 있다. 여자는 피아노 앞에, 남자는 그 옆 조그만 보조 의자에.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최초의 음악은, 남자가 짚어주고 여자가 알아듣는 이국의 언어는 다음과 같다. 다다다다 다다다다…. 남자의 ‘다’는 다 다른데 여자는 그 ‘다’가 어떤 ‘다’인지 안다. 소리를 좇는 여자의 표정엔 꾸밈이 없다. 그녀가 건반을 짚기 전에 하는 일은 하나다. 남자의 음(音)을 집중해 듣는 것이다. 그녀는 ‘잘 치는’ 사람이지만 그전에 ‘잘 듣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들의 노래가 무사히 끝날 것이라 예감한다. 연주를 듣고 있던 악기점 주인이 박수를 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마음보다 몸이 먼저, 그런 순간에 주어지는 쾌락을 고대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환호’가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없어도 좋을 더 많은 것들 역시 없다. 악기점 주인은 노래하는 남자와 여자를 딱 한번 쳐다본다. 그것도 잠깐, 노인 특유의 완고한 표정으로 흘깃. 나는 악기점 주인이 고개 드는 순간 이 영화가 좋아졌다. 그것은 피아노와 기타의 화음이 겹치는 순간뿐 아니라, 그들의 소리가 지금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사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해란 ‘포옹’이 아닌 그런 ‘눈빛’ 안에서 이뤄지는 건지도 모른다고. 이들의 사랑이 악기에도 일일이 가격이 매겨지는 세속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담담한 찰나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원스>가 표정에 관한 영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노래 부르는 사람이 아닌 듣는 사람들에 관한. 귀 기울임에 대한 이야기. 영화는 ‘그녀는 어딨죠?’라고 묻는 여자를 비롯해 프로듀서, 남자의 생부, 아기, 파티에 모인 청자(聽者)들을 보여준다. 노래는 길고 표정은 짧다. 이들은 작게 웃고 적게 말한다. ‘와우’라고 말할 때조차 이들은 그 말이 붕 뜨지 않게 호흡을 지그시 누른다. 숨을 고르는 노력 때문에, 우리는 노래가 끝난 뒤에도 음악이 그들 몸을 떠나지 않았다는 걸 안다. 조연들의 얼굴에는 구름 낀 아일랜드 하늘과 어울리는 경건함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음악에 대한 존중과 그 노래를 만든 사람에 대한 존중, 그리고 그것을 존중할 줄 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에서 빚어지는 표정이다. 그들은 음악을 설명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다만 ‘네 음악을 좀더 듣고 싶구나’라거나 ‘한번 더 녹음하자’고 말한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출 서류에 승인 도장을 쾅쾅 찍고, 한밤중 CD플레이어의 건전지를 사러 나간다.

남자는 듣는 사람이 없을 때만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즈음,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늘어간다. 열광하는 관중이 아닌 경청하는 소수. 남자를 ‘알아봐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 옆에 여자가 있다. 남자라는 하나의 점은, 자신과 연결된 다른 점들을 만나 이해와 소통의 선(線)을 늘려간다. <원스>는 사랑에 관한 영화지만, 예술가 혹은 개인이라는 한점이 다른 점을 만나 선을 잇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통에 대한 환상을 주지 않으면서 소통을 믿게 하는 힘. 영원이 아닌 순간이지만, 짧기 때문에 더 소중한 한때. 감독은 삶의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다. 노래 듣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얼굴은, 그 표정의 ‘스침’은 주인공의 노래만큼 위안을 준다. 그 ‘얼굴’들 때문에 우리는 ‘지겹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타인을 만나고, 기타를 버리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우리가 겪는 사랑, 감동, 기쁨 역시 마찬가지리라. 영화가 끝난 뒤, ‘데일림플’이란 사람의 글귀가 떠올랐다. 그는 베르메르의 그림 <우유 따르는 하녀>를 보며 우유의 소박한 흐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궤적이 얼마나 우아한지 설명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일부가 ‘일시적’인 것에서 오는 거란 것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삶에서 베르메르적 순간들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간헐적으로라도 평온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뒤 한마디 덧붙인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영화는 여자가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영화관을 나서며 작게 중얼거린다. 삶의 아름다운 순간은 짧고, 쉽게 지나가버린다고. 하지만 그것은 얼마간 존재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6. 할리우드 엔딩이 아니어도 괜찮아

글 : 김은형 (<한겨레> 매거진팀 기자) 2007.10.26  

할리우드적이지도 반할리우드적이지도 않은 작은 뚝심의 영화 <원스>

문득 할리우드라는 단어가 극장보다 일상에 더 밀착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극적인 반전과 해피엔딩이라는 할리우드의 보통명사적 특징을 걸러서 본다면 말이다. 지금은 찌질하지만 언젠간 보란 듯이 성공하겠어라는 순수한(순진한?) 개인적 열망에서부터 최근 부동산 투자, 주식 투자의 광풍에 이르기까지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할리우드 엔딩’을 향한 치열한, 또는 안쓰러운 몸부림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처럼 지적이면서 냉철한 사람들은 할리우드적 욕망이 가진 무모함과 위험성을 익히 알기 때문에 후배나 동료들의 할리우드적 꿈과 희망을 깨는 데 최선을 다한다. “네 여자친구가 진짜 널 좋아한다고 생각해? 월급 통장 보여주면 당장 도망갈걸”이라거나 “어차피 좀 있으면 회사 잘리고 공공근로사업에 나가게 될 텐데 뭘 그렇게 열심히 일해”라는 등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면서 말이다.
그래서 인생의 정답이 할리우드 엔딩에 대한 냉소에 있는가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도 성공하기는 힘들며 원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은 없다거나 가족은 ‘불 쉿’이라거나, 성공은 역겨운 허상일 뿐이라고 단정지으며 방어막 50겹을 쌓는 것도 사는 데 별 도움 안 되긴 마찬가지다.
<원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세상을 너무 할리우드적인 것과 반할리우드적인 것으로 갈라서 고개를 양쪽으로 돌리며 살아온 건 아닐까. 물론 가난한 제작비로만 따지면 <원스>는 반할리우드적인 인디영화다. 하지만 <원스>는 할리우드영화처럼 허장성세를 부리지도 않으면서도 ‘어차피 안 되게 돼 있어’라고 징징거리지도 않는다. 다만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곁에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에 조용히 집중하고 묵묵히 걸어간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원스>를 따라가는 건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동안 할리우드적 세계와 반할리우드적 세계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찌들어 살아온 탓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아름다운 음악에 감동받으며 그 정직하고 순수한 영화적 리듬을 따라가기보다는 내내 할리우드적 기대와 반할리우드적 근심으로 전전긍긍했다. 약에 취한 찌질이가 남자의 기타가방 속 돈을 훔쳐갔을 때 그것이 뭔가 이 영화의 대단한 복선이 될 거라 걱정했고, 여자의 집에 가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게다가 난데없이 건너뛴 것 같은 장면에서 남자가 “정말 결혼했냐”고 말했을 때 둘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을까 불안했고, 대여료가 엄청나게 비싼 녹음 스튜디오에서 태도 불량인 엔지니어가 등장했을 때 주인공 남자가 ‘어차피 녹음, 음반 발매 이딴 건 다 무의미해’라며 스튜디오를 뛰쳐나올까 초조했다. 심지어 스튜디오 녹음을 마치고 녹음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트렁크에까지 꾸역꾸역 밴드를 태우고 낡은 벤츠가 떠났을 때 이 차가 뒤집혀서 모든 게 다 끝나버리는 게 아닐까라는 걱정까지 했더랬다. 시쳇말로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다. 젠장!

하지만 내가 했던 반할리우드적 우려는 영화에서 현실이 되지 않았고 당연히도 할리우드적인 소망- 두 주인공은 사랑으로 맺어지며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결말은 또 아니다. 두 주인공의 삶은 서로를 만나기 전과는 확실하게 달라졌으니까.
누구나 할리우드 엔딩을 바라지만 그런 엔딩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엔딩이 없더라도 인생의 빛나는 순간까지 없는 건 아니다. <원스>에서 피로와 허기와 목마름의 시간을 마치고 달려간 바닷가에서의 짧은 휴식이 아마도 그렇게 빛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그런 순간들이 삶에서 조금 다른 선택,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하게끔 이끄는 용기가 되는 것 같다. 인생의 극적 반전은 이뤄지지 않더라도 삶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하나의 모양새를 갖춰나가는 것이다.
마지막 연재 글을 쓰면서도 어떤 의미에서 ‘할리우드 엔딩’을 기대했던 것 같다. 내 글을 보며 ‘이런 쓰레기가’라고 개탄했던 독자도 눈물을 흘릴 정도로 한방의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역시나 할리우드 엔딩은 없다(그것도 실력이 돼야 한다는 --;;). 하지만 오랫동안 연재를 하면서 빛났던 순간이 짧게나마 있었을 거라고 자위하련다. 모두 건강하시기를.




7. <원스> 일상의 조각들로 짠 기적의 퀼트

글 : 조선희 (한국영상자료원장) 2007.10.25  

사람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안겨주는 소박하지만 잊을 수 없는 영화 <원스>

최근 어떤 자리에서 한 선배가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도 공감했다. 내 자신의 내부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사람에 대한 믿음을 버릴 수밖에 없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배신과 훼절과 변태의 충동들! 다른 사람들의 처지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정말 사람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또 다음 순간, 그 욕망의 도발을 잠재우고 정리하는 힘이 어김없이 작동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라는 게 또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거로구나, 하고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영화관 객석에 앉아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원스> 같은 영화를 볼 때, 욕망과 충동의 지뢰밭 위에서 날밤 새우는 우리의 슈퍼에고가 마치 적진에서 구원병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한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사랑이라는 것, 마르고 닳도록 써먹은 그 진부한 재료를 가지고 여전히 전혀 손을 타지 않은, 그처럼 새뜻한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예전에 빨간 아우디 오픈카를 산 어떤 여인으로부터 “차를 사고 나서 남자들이 프러포즈해오면 헷갈려. 날 좋아하는 건지. 내 차를 좋아하는 건지” 하는 말을 들은 적 있다. 하지만 별로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사이는 이해관계의 덧칠이 없으니 모든 것이 투명하다. 사랑도 투명하다. <원스>의 주인공 남자는 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진공청소기 수리공이다(전자회사들의 A/S시스템이 눈부시게 발달한 우리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직업이다. 그러면 아일랜드에는 냉장고수리공, 세탁기수리공도 있을까).

가난함에서 싹튼 자유로운 상상력의 희망
<원스>가 주는 것은 할리우드 역사에 즐비한 ‘웰 메이드 무비’ 속에 들어 있는 ‘컨벤셔널’한 희망과 감동과는 다른 것이다. <원스>는 <원 나잇 스탠드>의 근육질과는 물론 다르고 <비포 선라이즈>의 발랄상큼함과도 다르다. <원스>에는 기적처럼 반짝이는 뭔가가 있다. 사랑을 기적의 판타지로 끌고 간 극점에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가 있지만 <원스>에서 기적은 일상의 조각들로 퀼트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녀에게>와 다르다.
존 카니 감독은 15만달러의 제작비로 영화를 찍었고 이 영화는 배급사에 100만달러에 팔려서 1천만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제작비는 아일랜드영화위원회에서 지원받았고 17일 동안 디지털 캠코더로 영화를 찍었다. <원스>의 상영관 입구에는 ‘화면상태가 고르지 않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하는 문구가 붙어 있다.
카니 감독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처럼 세트도 없이 전문배우도 없이 거리에서 영화를 찍었다. 1972년생인 카니 감독이 전후 이탈리아 좌파감독들과 정치적 견해 및 영화철학을 공유한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양자 사이의 공통점은 어쩌면 ‘가난하다’는 한 가지였는지 모른다. 할리우드에서도 멀리멀리 떨어진 아일랜드, 아일랜드에서도 비디오 캠코더 달랑 메고 헤매는 게릴라 작가, 그 시스템의 자유지대에서 꿈틀대는 상상력은 이탈리아 좌파감독들의 혁명적인 상상력과 만날 수도 있다. 변방에서 혁명이 싹튼다고.
뮤지컬영화의 역사에 새로운 스타일 하나를 추가하는 이 영화의 입지도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과장된 제스처, 작위적인 연출 등 전통적인 뮤지컬영화의 관습을 가뿐히 젖히고 감독 자신의 표현대로 ‘일종의 비주얼 앨범과 같은 느낌의 현대적인 뮤지컬’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어긋남 사이에 찾아오는 완전한 화음들
이 영화에는 몇번의 완전한 화음이 있다. 삶이 온갖 어긋남들투성인 것처럼 이 영화도 그렇다. 대화가 어긋나고 관계가 어긋나고 기대가 어긋나고 행로가 어긋나고. 런던에 함께 가서 밴드 결성하고 곡을 쓰고 노래 부르고 피아노 치고 앨범 녹음하고… 하던 이들의 약속도 어긋난다. 하지만 그 어긋나고 또 어긋나고 하는 사이사이에 완전함에 가까운 몇번의 화음이 있다. 소리의 완전한 화음, 그리고 사람 사이의 완전한 상태. 거리의 가수가 체코 소녀를 두 번째 만나는 날 피아노 가게에서 기타와 피아노 반주와 함께 화음을 맞추던 바로 그 점심시간. 데모CD 녹음을 마친 날 새벽 너무나 아일랜드다운 황량한 바닷가에서 멤버들이 원반던지기를 하며 놀던 시간. 그 완전한 순간들, 결국 지나가고 마는 것일지라도, 결국 깨어지고 마는 것일지라도, 나는 나중에 그 순간들을 떠올릴 때 아주 잠깐씩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곤 한다. 또한, 소녀가 선물받은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튕기면서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마지막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영화를 잊기 싫어서,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로부터 잊혀지는 것이 싫어서, 나는 영화 속의 소녀 이글로바의 목소리로 <If You Want Me>를 듣는다. 불법다운로드 추방캠페인에 서명도 하고 사진도 찍었지만 O.S.T를 사러나가기 전까지는 하는 수 없다. 후배가 보내준 다운로드 파일을 듣고 또 듣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