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타자 이론


Ⅰ.
서구의 형이상학에서 타자의 문제는 데카르트(R. Descartes)에 의해 확립된 의식 철학의 한계를 폭로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주관화하여버린 의식 철학의 대안을 강구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코기토(Cogito)가 중심이 된 의식 철학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의 문제를 철학의 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 결코 회의할 수 없는, 생각하는 나의 의식이 인식의 정초로서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고, 나의 의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는 인식의 대상이 되었다. 의식 철학에서 주체와 객체의 대립은 실상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으로서 객체의 대립이며, 인식을 넘어선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칸트(I. Kant)에 의하면 인간은 오성의 선험적 범주에 따라 종합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인식할 뿐이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후설(E. Husserl)은 순수의식 밖의 물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의식은 지향적 의식이라는 노에시스-노에마(Noesis-Noema) 구도로 주체와 객체의 합일을 입증하지만, 그 구도에서 객체는 절대적 존재인 의식에 대해 상대적일 뿐이다. 타자의 문제는 이러한 구도 즉, 객체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주체의 의식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구도를 파열하면서 등장하였다. 주체의 인식의 대상이 아닌 타자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주체의 의식을 거치지 않고 타자를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근대 철학에서 객체가 주체의 인식의 대상으로 환원됨으로써 주관화되었다면, 탈근대 철학의 타자 의제는 주체로 환원되지 않고 동화되지 않는 타자의 타자성을 탐구한다.
한편 주체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타자의 타자성을 사유하는 일은 근대 역사에서 억압되고 배제되었던 타자들의 위치를 복원하는 일과 밀접하게 엮여있다. 서구 백인 남성이 인간을 대표하는 인간중심주의의 근대 담론에서 여성, 원주민, 광인, 동성애자, 소수 민족 등으로 나타났던 타자의 공간을 찾아주는 일은 이 담론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의 담론을 생산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주체의 정체성의 일부로 포섭한 근대 담론에서 진정한 타자의 위치는 찾을 수 없다. 근대 담론이 인정하는 타자의 위치는 주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배경과 배제의 위치이거나, 혹은 주체에 포섭되어 주체의 증식을 이루는 동화의 위치이다. 그리하여 근대 담론 안에서 피식민지인과 유색인과 여성의 지위를 복원하는 일은 결국 서구 백인 남성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주변에서 벗어나 중심화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피식민지인과 유색인과 여성이라는 타자 안에 주체와 타자, 중심과 주변, 식민과 피식민의 이분법을 증식하는 일이고 동시에 근대 담론의 억압적 구조를 증식하는 일이다. 따라서 근대 담론으로 환원되지 않고 동화되지 않는 타자의 담론의 생산이 탈근대 비평의 주요 의제로 떠오른 것이다.
본 논문은 타자의 담론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이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다른 이론가들에 비해 들뢰즈가 타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저작은 양적으로 미소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이 가지는 급진적인 탈근대성으로 인해 들뢰즈의 이론 전체가 타자의 담론으로 여겨진다. 들뢰즈의 타자(Autrui)는 단적으로 말하여 ‘가능 세계의 표현인 구조-타자’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채우는 겹주름이며, 언어를 통해 실현되는 가능성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타자는 인간이 사물과 직접 마주했을 때의 생경함과 가혹한 추상성을 완화시켜주는 윤활유 같은 것, 즉 이 세계에 사는 인간의 일상적 삶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타자 이론은 타자를 가능성의 표현으로 규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들뢰즈는 가능성의 표현 너머 이념(Ideas)의 장인 표면으로 나감으로써 타자 저편에 있는 ‘타자의 타자’에 이른다. 이것이 우리가 들뢰즈의 타자 이론을 통해 살펴보아야 할 점이다.
들뢰즈가 타자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한 저작은 “의미의 논리”(The Logic of Sense)의 부록으로 실린 “미셸 투르니에와 타자 없는 세계”(“Michel Tournier and the World without Others”)이다. 이 책을 중심으로 본 논문은 들뢰즈의 타자 이론을 살피면서 그의 타자 개념이 다른 중요한 개념들―탈영토화, 기관 없는 몸, 배치 등―과의 연계 속에서 어떻게 생성의 정치학을 창출하는지 고찰한다. 우선 들뢰즈의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셸 투르니에의 소설의 내용을 살펴보고, 그 다음 이 소설에 대한 들뢰즈의 분석을 상세히 고찰한 후, 전반적인 들뢰즈의 이론틀 안에서 타자 개념을 다루면서 탈근대 타자 담론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이다.


Ⅱ.
인간이 타인들과 고립되어 홀로 무인도에 살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가정은 영원히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문제이다. 디포우(D. Defoe)의 ‘로빈슨 크루소’(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가 전형을 이룩한 후, 그 같은 의제는 다양한 매체와 무수한 판본을 거듭하면서 끝없는 서사를 만들어 내었다. 투르니에의 소설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 역시 그 같은 가정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서사를 생성한다. 디포우의 로빈슨처럼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무인도에 난파되어 28년 동안 세상과 고립된 삶을 산다. 그러나 전자의 로빈슨이 다시 타인들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반면, 후자의 로빈슨은 끝까지 무인도에 남는다. 디포우의 로빈슨에게 무인도는 거쳐야 하는 여행 중의 과정이라면, 투르니에의 로빈슨에게 타인들 없는 세계인 무인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투르니에는 이 소설에서 전형적인 로빈슨 이야기를 뛰어넘어 새로운 로빈슨을 창조한다. 전형적인 로빈슨 이야기가 귀향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투르니에의 로빈슨 이야기는 고향 상실의 외상(外傷)에서 벗어나 고향을 망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고향이 타인들과 함께 사는 세계라고 한다면 로빈슨은 타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 없는 세계로 진입한다. 그 과정 속에 타자에 대한 로빈슨의 철학적 사색이 이 소설에 스며들어 있다.
타인들의 세계는 인간들의 세계이며 타인에 대한 고찰은 인간에 대한 고찰이다. 달리 말하면 타인들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타인들과 공유하는 삶의 가치들, 판단 척도들, 민족 감정, 언어 등 우리의 내부를 채우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지만 부지불식간에 나를 채우는 타인들의 세계는 그 속에 있을 때에는 나와 분리가 되지 않는 나의 내부의 세계이다. 어쩌면 그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투르니에는 무인도의 고립이라는 사고 실험을 하였는지 모른다. 투르니에가 절대 고독의 상황을 창조하기 위하여 로빈슨에게 마련한 무인도 스페란자는 처음에는 단지 타인들이 없는 세계로 출발하지만, 로빈슨이 타인과 공유했던 모든 인간적 가치에 물음표를 붙이고 벗어났을 때 그것은 인간 세계의 근본을 뒤흔드는 타자 없는 세계가 된다. 따라서 로빈슨이 내부에 있는 타자의 흔적을 지워내고 타자 없는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은 타인들과 함께한 인간 세계를 벗어나는 탈인간화로 나타난다.
“방드르디”에서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로빈슨이 시도한 첫 번째 일은 배를 만들어 섬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변변한 연장 하나 없이 각고의 노력 끝에 뭍에서 만든 배를 물에 진수시킬 방법이 없어 포기한 후, 로빈슨은 완전한 절망과 고독 속에서 타자 없는 세계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는 엎드린 채 변을 보았고 자기 자신의 따뜻하고 물렁물렁한 배설물 속에서 몸을 딩굴었다. 그는 점점 자리를 옮기는 일이 적었고 몸을 움직였다하면 곧 진창 속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곳에서 그는 육체를 잊어버렸고 진창의 물기 있고 따뜻한 속에 싸인 채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한편 고여서 썩는 물에서 발산하는 독 때문에 그의 정신은 몽롱해졌다. 오직 눈과 코와 입만이 고여 있는 수면과 두꺼비알들 밖으로 나와있었다. 지상의 모든 애착으로부터 벗어난 그는 혼수상태와 같은 몽상 속에 빠진 채 그의 과거를 거슬러 요동도 하지 않는 나뭇잎새들 사이의 하늘에 춤추고 있는 추억의 편린들을 좇아가고 있었다. (“방드르디” 263)

나락의 끝 진창 속에서 광기와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 로빈슨은 이제 살아 남기 위해 섬을 개척하고자 한다. 마치 디포우의 로빈슨처럼 그는 무인도 스페란자(Speranza)를 인간의 섬으로 만들고자 한다. 한동안 그는 타인들 없는 섬에서 타인들의 척도와 가치에 관습에 따르며 생활한다. 그는 개간을 하고 씨를 뿌리고 양어장을 만들고 저장창고를 만들고 성벽을 쌓는다. 또한 그는 스페란자 섬을 모국의 식민지로 바치고 헌장을 작성하여 스스로 총독이 되고 신민이 되고 사제가 된다. 부의 법칙과 식민지의 확장을 통해, 또 건축하고 조직하고 입법함으로써, 섬을 문명화시키는 일은 “타인이 부재한다는 그 파괴적인 영향에 대항하는”(295) 최고의 약이었다. 이와 더불어 로빈슨은 시간을 지배하는 일이 타인들과 함께 호흡하는 길임을 깨닫는다. “내가 그날 그날 목적 없이 살고 되는 대로 버려둠에 따라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고 나는 나의 시간을 잃는다”(280). 로빈슨에게 시간을 잃는 것은 자신을 잃는 것이다. 그래서 로빈슨은 시간을 포로로 만들고 동시에 자신을 되찾는 시도로서 물시계를 만든다. 물시계는 섬과 더불어 시간이 “오로지 한 인간의 정신력에 의하여 길들여지게 된다는”(285) 위안을 로빈슨에게 준다. 로빈슨은 언제나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규칙적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서 “이해할 길 없고 헤아릴 길 없으며 무엇인가 속에서 부글거리며 끓고 해로운 소용돌이로 가득한” 스페란자가 “추상적이고 투명하며 뼛속 깊이까지 들여다보이는 구조로 변모”(285)하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아무리 로빈슨이 스스로 관습과 규제를 만들고 지키기를 강요하여도, “풀포기 하나하나에 꼬리표를 붙이고 새 한 마리마다 발고리를 끼우고 젖먹이 동물 한 마리마다 불로 지져 도장을 찍어”(285) 주위 세계를 측정, 증명, 확인되고 수학적으로 합리적으로 되기를 요구하여도, 그는 야성적이고 다스릴 수 없는 열대의 섬 스페란자가 주는 고독의 파괴력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점점 고독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서 타인들의 세계와 멀어져간다. 그리고 어느 날 물시계의 물방울 소리가 멈췄을 때, 그는 시간이 정지하면서 스페란자가 눈부시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치 사물 하나 하나가 본래의 관습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기를 그치고 그의 본질로 되돌아와서 모든 속성들을 마음껏 개화시키며, 그들 자체의 완성 이외의 다른 어떠한 이유도 찾지 아니하며, 순진하게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307) 그 순간을 로빈슨은 ‘무죄의 순간’(moment of innocence)이라고 명명한다.
절망과 죽음의 나락인 진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일과표와 의식의 빈틈없는 규율 속에서 타인들의 세계를 모방하고 있던 로빈슨에게 이제 스페란자는 “관리해야 할 영토가 아니라,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 분명한 하나의 <인격체>”(314)로 나타난다. 그는 스페란자의 은밀한 내면 속으로 들어갈 결심을 하고 동굴 속을 탐사한다. 수직으로 난 작은 구멍을 발견한 그는 옷을 벗고 우유로 온몸을 문지른 후 머리부터 밀어 넣어 마치 깊은 창자 속으로 기어 들어가듯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렇게 들어간 좁은 공간 속에서 로빈슨은 웅크린 자신의 몸과 똑같은 형태와 크기의 구멍을 발견하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거대한 돌상자 속에 영원히 몸을 붙이고 들어앉은 한 마리 유충”(318)처럼, 로빈슨은 섬의 내밀한 동굴 속에서 스페란자의 모성을 느낀다. 푸근하고 굳건한 대지의 자궁 속에서 그는 어머니의 고귀하고 엄격한 모습을 추체험하고, 따사로운 어둠의 평화와 무덤의 평화를 느낀다. 이제 그의 생활은 물시계가 작동하는 시간과 정지한 시간을 왕래한다. 물시계가 작동할 때 그는 스페란자를 개간하고 경작하고 통치한다. 물시계가 멈추면 그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대지의 어머니인 스페란자 속에 싸여 묵상에 잠긴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탈인간화되어 간다.
로빈슨이 탈인간화되어 가는 징후는 그가 인식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찰할 때 뚜렷하다. 그는 인식에 대한 기존 이론이 사실 ‘타자에 의한 인식’이라고 비판한다. 전통적인 인식 이론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을 어둠 속 물체를 밝히는 촛불의 이미지에 비유한다. 즉, “어두운 방안에서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떤 물체는 밝게 비추고 다른 물체들은 어둠 속에 남겨두는” “촛불은 인식 주체이고, 빛을 받는 물체들은 인식에 의하여 알려진 대상을 나타내는”(308) 것이다. 여기서 어두운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는 촛불의 위치와 “나의 집 안에 들어와서 어떤 물건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관찰한 다음 관심을 옮겨 다른 것에 주목하는 어떤 이방인”(308)인 타자가 일치하기 때문에 이는 타자에 의한 인식이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인식할 때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마치 빛을 비추어 사물을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 우리 자신에 의한 인식이 아니라 촛불을 위치를 차지한 타자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인식 이론과 결별한 로빈슨은 촛불의 신화 대신에 스스로 빛나는 인광 물체를 인식의 이미지로 제시한다. 반사적인 인식에 앞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상은 “외부의 그 어떤 것이 빛을 비추지 않아도 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인광 물체”(310)이다. 내가 인식하건 하지 않건 사물들은 그 자체로 빛난다. 그러나 이는 나와 상관없이 물질세계가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를 주체에 부여되었던 빛을 대상들이 탈취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즉 빛이 주체에서 대상으로 이동하였다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빛 중심의 인식 이론, 즉 타자에 의한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반면 로빈슨이 제시하는 것은 스페란자와 그가 하나가 된 상태, “태양이 한줌의 화살을 날려보내고 있는 저 도금양 잎사귀들을 통해서만” 그리고 “금빛 모래 위로 미끄러지는 파도의 거품 속에서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상태이다. 그때 “로빈슨은 곧 스페란자<이다>”(310).
이러한 존재 양식 속에서 모든 것은 자체 내에 내밀한 본질적인 속성인 양 색채와 냄새와 맛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세계에는 빛과 소리와 냄새가 거주한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면서 세계의 빛과 소리와 냄새는 주체의 눈과 귀와 코의 작용으로 격하된다.

그런데 갑자기, 클릭하면서 격발장치가 당겨지는 듯한 현상이 일어난다. 대상의 색채와 무게의 일부가 분리되면서,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세계 속에서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사물의 어느 한 자락이 통째로 무너지면서 <나>로 변해버린다. 하나하나의 대상(객체)은 질적으로 격하되어서 그에 해당하는 주체가 된다. 빛은 눈으로 변해서 이제는 전과 같은 모양이 아니다. 즉 빛은 망막의 자극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냄새는 코가 된다―따라서 세계 그 자체는 아무 냄새도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붉은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는 그 존재를 거부당한다. 그것은 한낱 고막의 진동에 불과하다. 결국 세계 전체는 스페란자의 영혼이었으나 이제는 섬에서 떨어져 나온 나의 영혼 속에 흡수되고, 그때의 섬은 나의 회의에 찬 시선을 받으며 사멸한다. (310)

“클릭하는” 경련의 순간에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대상의 모든 색과 소리와 냄새는 주체의 감각 기관으로 환원된다. 세계를 가득 채웠던 색과 소리는 망막과 고막의 자료로 축소되고, 세계는 주체의 인식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가 된다. 섬과 하나이던 로빈슨은 섬과 분리되어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고, 스페란자는 주체의 시선 아래서 빛을 거두고 만다. 스스로 빛나던 사물들은 색과 소리와 냄새를 잃고 주체의 인식의 대상이 된다. 주체의 의식이 주인이 되는 인식 행위에서 눈은 “빛과 색채의 시체”이며 코는 “냄새의 찌꺼기”(311)이다. 타자에 의한 인식은 이처럼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낳는다.
타자에 대한 로빈슨의 사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타자는 존재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이다. 존재(existence)란 무엇인가? 로빈슨은 다음과 같이 존재에 대해 사색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밖에 있다 sistere ex>라는 뜻이다. 밖에 있는 것이 존재한다. 안에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 나의 이미지, 나의 몽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스페란자가 하나의 감각, 혹은 감각들의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 역시 나 자신으로부터 타자 쪽으로 도망쳐나감으로서만 존재한다. 모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그 반대인 척하는데 열중한다는 사실이다. 존재를 향한 비존재의 거대하고 공통된 열망이 있다. 그것은 이미지, 몽상, 계획, 환영, 욕망, 망상 등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밖으로 떠밀어내는 원심력 같은 것이다. 밖에 존재하지(ex-siste) 않는 것은 안에 존재한다(in-siste). 존재하려고 고집한다(Insiste pour exister). 그 모든 작은 세계가 큰 세계, 진정한 세계의 문으로 밀려든다. 그런데 그 문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은 타자이다. (336)

존재한다는 것이 말 그대로 밖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타자의 세계에 속한 것이다. 타자는 존재를 보증하고 무엇이 존재이고 비존재인지 판별한다. 예컨대 책상 위의 컵은 존재의 위상을 부여받지만, 내가 품는 환상은 존재의 위상을 부여받지 못한다. 우리는 환상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환상은 타자에 의해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존재는 사실과 환상, 참과 거짓, 현실과 꿈을 구별하는 잣대를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타자가 부재한다면 이 모든 이분법은 그 경계를 상실하게 된다. 로빈슨이 스페란자에 난파된 후 초기에 시달렸던 환각과 환청은 타자의 부재에 대한 그의 정신적 반응이었다. 그는 “시각적 환상, 허깨비, 착란, 눈 뜨고 꾸는 꿈, 몽환, 광기, 청각의 교란 등에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성벽은 우리들의 형제, 우리들의 이웃, 우리들의 친구 혹은 원수, 하여간 그 누구, 제발 하느님, 그 누구인 것이다”(276)라고 고통스럽게 토로한다. 누구이든 간에 심지어 하느님일지라도 타자가 있어야 존재가 보증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이다.
한편 로빈슨의 탈인간화를 가속시킨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방드르디(Vendredi)의 등장이다. 로빈슨은 우연한 기회에 아로캉 족의 야만인을 구해주게 되고 “완전한 인간이 아닌” 야만인에게 “사람의 이름도 물건의 이름도 아닌, 두 가지의 중간쯤 되는, 반쯤은 생명이 있고 반쯤은 추상적인 이름으로, 시간적이고 우연적이며 마치 일화적인 성격이 강렬하게 깃들어 있는”(351) 방드르디(금요일)란 이름을 붙여준다. 방드르디의 출현으로 로빈슨은 타인과 함께 하는 생활을 맛본다. 그는 방드르디에게 논일과 가축일과 집안일을 시키고 하인의 복장을 하고 총독의 시중을 들게 한다. 로빈슨은 비로소 총독의 지위에서 하인에게 급료를 지불하고 지시를 내리고 훈시를 한다.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정립된다. 그러나 방드르디에게는 로빈슨이 어찌할 수 없는 완전한 타자의 면모가 있다. 가끔씩 방드르디는 “총독과 그가 통치하는 섬의 겉모습을 장식하고 있는 거짓된 심각성의 가면을 벗겨 뒤죽박죽으로 만드는”(352) 폭소를 터트리곤 한다. 그는 로빈슨이 이루어 놓은 업적에 말없이 봉사하는 한편, 그 업적의 정당성을 근본부터 흔들어버린다. 로빈슨은 방드르디가 “기존 질서 속에 들어가 조화되기는커녕 체계를 파괴하는 위협인”(366)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마침내 로빈슨의 탈인간화가 완성된 것은 방드르디가 무심코 파이프를 화약고에 던져 폭발로 모든 거주지가 폐허가 되고 나서이다. 어쩌면 자신이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 엄청난 재난 후에 로빈슨은 타인들의 세계와 연결된 최후의 매듭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새로운 로빈슨으로 태어난다. 그는 “오로지 땅에만 집요하게 매달려 사는 인간의 마음에 쏠려진 <대지적> 매혹”(396)에서 벗어나 하늘로 솟아올라 태양적 존재가 된다. 그는 태양에게 자신을 중력으로부터 풀어달라고 기원하며, “향지성 잔뿌리들처럼 땅 속으로만 자라던 내 수염은 없어져버렸고 반면 내 머리털은 하늘을 향하여 치솟는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머리카락을 뒤틀고 있다”(412)고 고백한다. 타인들의 세계인 대지에서 풀려난 로빈슨은 방드르디가 늙은 숫염소의 가죽으로 만들어 하늘에 띄웠던 바람의 하프가 자신임을 깨닫는다. 늙은 숫염소가 바람이 타는 악기로 변모하듯 로빈슨은 바람과 공기와 태양의 존재로 변신한다. 방드르디가 금요일을 뜻하는 비너스라면 태양적 존재로 변모한 로빈슨은 우라노스가 된다. 로빈슨은 우라노스적 사랑 속에서 하늘의 신부가 되어 태양을 잉태한다. 이렇게 성을 초월하여 탈인간화한 로빈슨은 28년만에 무인도에 상륙한 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할 때 스페란자에 남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가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방드르디가 타인들의 배를 타고 떠나고, 그를 대신하여 남게 된 어린 수부에게 하늘의 신인 쥬피터의 날인 죄디(목요일)라고 이름 붙여주면서 로빈슨은 스페란자의 ‘무죄의 순간’에 영원히 정박한다.


Ⅲ.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에서 타자를 “가능한 세계의 표현”(the expression of a possible world)(261)라고 정의한다. 이 때 “표현”은 “표현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이 비틀린 관계에 있기 때문에 표현되는 것이 표현하는 것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관계”(260)를 말하고, “가능한” 것은 “감싸는 것과 아주 이질적으로 존재하는 감싸인 것, 혹은 함축된 것의 상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두려워하는 얼굴이 있다고 하자. 이 얼굴은 두려운 세계라는 가능한 세계의 표현이다. 두려워하는 얼굴은 두려운 세계를 표현한다. 두려워하는 얼굴은 미리 두려운 세계를 상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두려운 세계가 두려워하는 얼굴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는 없다. 가능한 세계로서 두려운 세계는 두려워하는 얼굴이라는 표현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려워하는 얼굴과 두려운 세계의 관계는 직접 대칭되는 유사성(resemblance)의 관계가 아니라 전자가 후자를 감싸는 비대칭, 비동등의 관계이다. 표현은 감싸는 것(enveloping)과 동시에 펼치는 것(developing)이다. 두려워하는 얼굴이 두려운 세계를 감싸면, 그 세계를 펼치고 설명하는 것은 “나 혹은 자아”(the I and the Self)(260)이다. 나는 두려운 세계의 실제성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하여 타자의 두려워하는 얼굴을 해결한다. 사랑 또한 “그것[가능한 세계]을 표현하는 타자 안에 감겨들어가 있는 가능한 세계의 드러남으로”(261) 시작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마르셀(Marcel)의 사랑은 알베르틴(Albertine)에 의해 표현된 가능한 세계들의 긴 설명 혹은 펼침이다. 나[마르셀]는 “알베르틴”이라는 이름의 가능한 세계를 때로는 매혹적인 주체로 때로는 믿을 수 없는 대상으로 펼치면서 사랑과 질투에 사로잡힌다. 이처럼 감싸고 함축된(implicated) 가능한 세계가 펼치고 설명되면서(explicated), 주름이 안으로 접히고(im-plicated) 밖으로 펼쳐지는(ex-plicated) 겹주름(replication) 운동을 감싸는 존재가 타자이다.
따라서 들뢰즈의 타자는 다른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키는 구체적인 타자가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타자들이 현실화하는 조건인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구조이다. 우리가 개별적인 타자를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세계의 표현인 타자가 지각장이라는 선험적인 구조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구체적인 타자를 지각하는 것은 그 타자가 나타날 수 있는 선험적 장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A라는 사물을 지각하고 난 뒤 A의 배경에서 B를 지각하는 것은, A가 지니는 충분한 여백 속에 앞으로 나타날 B의 존재를 미리 느끼기 때문이다. 즉, B가 현실화될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 가능성의 전체 세계가 선험적 구조로서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B라는 개별적 타자의 지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아가 아니라 타자이다.
가능한 세계의 표현이자 선험적 구조인 타자 개념에서 주목할 점은 주름을 펼치는 것보다 감싸는 것에, 구체적인 타자들의 지각보다 선험적 구조에 우선성이 놓인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지각 세계의 펼쳐진 질과 외연들 가운데서 타자는 표현 바깥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가능한 세계들을 감싸고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타자는 지각의 재현된 세계에 본질적 기능을 부여하는 함축의 끈덕진 가치를 입증한다”(281)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경험하는 펼쳐진 지각 세계를 본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힘이 바로 감싸인 안주름(함축)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주름이 펼쳐지는 설명(explication)은 안주름(implication)이 재현 세계의 질들과 외연들 속에서 개별적인 타자들로 현실화되는 개체화의 과정을 말한다.
이 개체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재현되고 분화된 구체적 개별자들이라기보다 그 개별자 안에 현실화된 잠재성(virtuality), 강도(intensity), 특이성(singularities), 이념(Idea)이다. 들뢰즈가 타자에 개체화하는 요인(individuating factors)을 대리하는 위상을 부여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우리가 개별적인 대상들과 주체들을 지각하고, 그들을 확인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개체들로 형성하는 것은 타자가 개체화(individuation)의 장을 조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체화는 단순히 종별화나 개별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개체화는 내부에 주름 접힌 강도와 특이성을 담지하고 있다.
따라서 들뢰즈는 타자의 작용을 “대상과 주체의 한계 내에서 개체화하는 요인들과 전(前) 개체적 특이성들을 통합하고, 그 다음 지각하는 주체들이나 지각되는 대상들의 재현으로 넘겨주는 것”(281-82)이라고 요약한다. 다시 말해 강도와 특이성이 함축된 주름이 펼쳐지면서 재현 세계에서 지각을 통해 개별적 주체와 대상들로 분화되는 과정 가운데 타자가 있다.
타자 개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타자가 재현 세계에서 강도와 특이성을 감싸고 있는 개체화하는 요인을 대리한다고 정의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타자 이론은 정의와 분석을 주된 작업으로 하는 설명(explication)의 이론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타자 이론은 안으로 감싸면서 함축된 강도와 이념으로 상승한다. 들뢰즈는 타자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이념의 특이성들이 재현 세계의 구체적 타자들로 현실화한 과정을 역전시키는 것, 즉 구체적 타자들 속에서 개체화하는 요인의 강도와 이념의 전 개체적 특이성들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강도의 계열 안에 있는 개체화하는 요인들과 더불어 이념 안에 있는 전 개체적 특이성들을 다시 발견하기 위하여, 이 길을 역으로 따라가야 한다. 즉, 타자-구조를 실행하는 주체들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이 구조 그 자체까지, 타자를 아무도 아닌 자로 파악하는 데까지 돌아가고, 계속해서 충족 이유의 굴곡을 따라가면서 타자-구조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지점까지, 즉 타자-구조가 조건짓는 대상들과 주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특이성들이 순수 이념들 안에서 자유로이 전개되고 개체화하는 요인들이 순수 강도 속에서 분배되는 곳까지 도달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상가가 필연적으로 고독하고 유이론적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282)
여기에 들뢰즈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를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방드르디”는 한 인간이 타인과의 접촉 없이 절대 고독 속에 버려졌을 때 타인들의 세계의 흔적을 점점 잃어버려 탈인간화하는 일탈의 이야기이다. 들뢰즈는 이 소설에서 로빈슨의 모험을 가능한 세계와 선험적 구조를 상실하고 이념의 세계로 상승하는 도착자의 모험으로 변모시킨다. 타인들 없는 섬에 인간이 홀로 남겨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투르니에의 실험은 로빈슨이 타인과 더불어 가능했던 인간적인 특징을 잃어가고 그 대신 섬과 바람과 공기와 태양의 원초적 순수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종결된다. 들뢰즈는 이러한 로빈슨의 탈인간화 과정을 “강도의 계열 안에 있는 개체화하는 요인들과 더불어 이념 안에 있는 전 개체적 특이성을 다시 발견하는” 모험으로 읽는다.
들뢰즈는 ‘미셸 투르니에와 타자 없는 세계’에서 우선 타자를 특정한 대상이나 다른 주체로 환원하는 기존 철학의 오류를 지적한다. 즉, 나 아닌 다른 주체 혹은 나의 외부에 있는 대상을 타자라고 설정하는 경우이다. 한 예로 타자의 응시에 의한 주체 형성을 언급한 사르트르(J-P Sartre)의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에서 보듯, 타자는 나의 시선의 대상이고 나는 타자의 시선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들뢰즈에 의하면 타자는 내가 지각하는 대상이나 나를 지각하는 어떤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지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각장의 구조이다. 타자는 이런저런 구체적인 타자라기보다 하나의 완전하고 통일되고 조직된 지각장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구조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들뢰즈는 이를 구조-타자(structure-Other)라고 부른다. 구조-타자는 개별적인 타자들이 각각의 장에서 현실화하는 절대적 구조로서, 구체적 타자들의 상대성을 확립하고, 나의 의식과 대상을 구별하고, 언어가 표현하는 가능한 세계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선험적 타자’이다(307).
들뢰즈는 나의 인식 작용과 시간 감각과 욕망이 타자의 효과라고 설명한다. 타자는 나의 의식과 대상을 구분하고, 일상적인 공간 감각과 시간 감각을 부여하고, 나의 욕망의 근거로 작용한다. 들뢰즈는 타자의 “기본적인 효과가 나의 의식과 대상의 구분”(310)이라고 말한다. 의식과 대상의 분리를 가져오는 타자의 작용으로 우리에게 공간과 시간은 연속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세계를 연속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타자와 함께 세계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온전하다고 믿는 것은 내가 지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타자가 지각하고 있음을 알고 있고, 또 내가 앞으로 지각할 부분인 가능성의 세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305). 가능한 타자로 인하여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 따라 부드럽게 연속적으로 이행된다. “그것[타자]의 현존의 첫째 효과는 공간과 범주의 분배와 관련이 있고, 보다 심오한 둘째 효과는 시간과 차원의 분배, 즉 시간상 먼저 오는 것과 나중에 오는 것과 관련있다”(311)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배경과 전경의 공간상의 연속이 가능한 것도, 과거와 미래의 시간상의 연속이 가능한 것도 구조-타자의 효과이다. 시간은 타자가 지나갔고, 지나가고, 지나갈 연속성을 보유한다. 타자가 나의 지각과 공간과 시간을 정초하기 때문에, 나의 욕망 역시 타자를 통해 대상을 얻는다. 타자는 나의 욕망과 대상을 연결한다. 나는 가능한 타자가 볼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소유할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욕망할 수 없다. 타자는 나의 욕망의 근거가 된다(306).
그렇다면 구조-타자가 붕괴된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차이와 반복”에서 언급했던 ‘타자-구조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지점’을 드러내기 위해 들뢰즈는 로빈슨의 탈인간화의 모험을 통해 타자 부재의 효과를 탐구한다. 그것은 의식과 대상이 하나가 되고, 욕망과 시간이 곧게 서며, 로빈슨의 이중체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세계이다. 여기서 ‘특이성들은 순수 이념들 안에서 자유로이 전개되고 개체화하는 요인들은 순수 강도 속에서 분배되는’ 표면이 형성될 것이다.
구조-타자가 없는 세계의 일차적 효과는 의식과 대상이 하나가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로빈슨은 타자에 의한 인식을 촛불에 비유하면서 이것이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클릭’하고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는 순간, 세계의 모든 빛과 냄새와 소리는 주체의 인식의 대상으로 격하된다. 스스로 빛나던 세상은 주체의 감각의 자료로 전락하여 어둠 속에 잠긴다. 주체의 의식은 빛이 되어 어둠 속의 사물을 밝힌다. 이것이 타자에 의한 인식이었다. 그러나 구조-타자가 부재한 세계에서 의식과 대상은 하나이다. “의식은 사물들에 던져진 빛이기를 멈추고 그 자체로 사물들의 순수한 인광이 된다. 로빈슨은 섬의 의식일 뿐이고, 섬의 의식은 섬이 스스로에 대해 가진 의식이다. 그것은 섬 그자체이다”(“Michel Tournier” 311). 로빈슨은 섬의 의식, 섬 그자체이다. 로빈슨의 의식과 무인도 스페란자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아니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빛이 어둠을 정복하듯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의 주인이 되어서 상대방을 노예로 복종시키는 관계이다. 반면에 타자가 부재한 세계에서 의식과 대상은 순수한 빛으로서 영원한 일순간에 서로 부닥치고 동시에 일어난다. 사물들은 주체의 빛을 기다림이 없이 스스로 일어서서 빛난다.
타자 부재의 효과는 스스로 서는 사물뿐이 아니다. 시간과 욕망 역시 곧게 선다. 타자 없는 세계에서 시간은 어제-오늘-내일과 같은 연속도 아니며, 한시-두시-세시와 같이 서로의 뒤를 따라 기울어진 시간도 아니다. 그것은 각각 곧게 선 시간, 서로에게 독립하여 수직으로 선 시간이다. 들뢰즈는 로빈슨이 시간에 대해 진술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따라서 나의 날들은 다시 똑바로 선 것 같았다. 더 이상 날들은 서로의 뒤를 따라서 밀치며 나아가지 않는다. 각각의 날은 독립해서 수직으로 서서 자랑스럽게 자신만의 가치를 확인한다. 날들은 더 이상 실천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어떤 계획의 순서에 따른 단계들로는 서로 구분되지 않으므로, 그들 서로가 비슷비슷해져서 나의 기억 속에 포개지고, 나는 끊임없이 같은 날을 다시 사는 것 같다. (311)

“서로의 뒤를 따라서 밀치며 나아가는” 시간은 우리가 과거-현재-미래라는 연속적인 흐름으로 이해하는 시간이다. 들뢰즈는 구조-타자가 나의 의식을 과거의 나로 기울게 한다고 주장한다. 타자가 출현하기 전에 나의 의식과 세계는 하나이다. 그러나 타자가 출현하면서, 즉 시간의 차원이 분배되면서 “나는 나의 과거의 사물들에 다름 아니고, 나의 자아는 타자가 지나간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310). 그러므로 구조-타자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지나간 세계인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 없는 세계에서 과거-현재-미래의 범주는 와해되고 나의 의식과 대상은 영원한 일순간마다 함께 존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욕망도 대상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한다. 구조-타자의 세계에서 욕망은 타자를 통하여 지나가고 또 타자를 통하여 대상을 얻기 때문에, 욕망은 타자를 욕망하거나 또는 타자가 감싸는 가능성의 세계에 향한 것이었다. “나의 욕망과 대상을 연결하는 것은 언제나 타자”(306)인 것이다. 로빈슨은 타인들 없는 세계에 적응하면서 그의 욕망이 타인들이 마련한 관습과 규범에서 이탈하는 것을 느낀다. “욕망으로 하여금 일정한 형태를 갖추게 하고 여성적 육체와 결합하게 해주는 제도와 신화의 틀이 사라져버린”(“방드르디” 327) 후, “이제 심지어 어떤 대상을 향하여 달려들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하는” 로빈슨의 욕망은 “여자, 젖가슴, 허벅지”라고 발음 해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렇다고 로빈슨의 욕망이 죽은 것은 아니다. 그는 내부에서 생생한 생명의 샘물 소리를 듣는다. 다만 “사회에 의해 미리 마련된 잠자리 속으로 고분고분하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은 사방으로 넘쳐나고 흐르면서 더듬더듬 어떤 길을, 한데 모여 하나의 대상을 향해 송두리째 흘러갈 수 있는 좋은 길을 찾고 있다”(328). 이제 로빈슨의 욕망은 타자를 통해 대상에 얽매어 있지 않다. 그의 욕망은 시간이 그러하듯 대상에 기울지 않고 스스로 곧게 선다.
또 한편 들뢰즈가 타자 부재의 효과로 내세우는 것은 수직의 이중체(erect double)이다. 이중체는 ‘무죄의 순간’에 로빈슨이 잠시 스쳐보았던 ‘다른 섬’(another island)과 같은 ‘다른 존재’(something else)이다. 로빈슨은 “오로지 땅에만 집요하게 매달려 사는 인간의 마음에 쏠려진 <대지적> 매혹”(396)에서 벗어나 태양적인 이중체로 거듭난다. 들뢰즈는 대지/하늘을 타자 현존/타자 부재의 특징으로 대립시킨다. 타인들이 거주하는 대지는 모든 원소들을 신체들 안에 가두어 놓고 모든 신체들을 사물들 속에 가두어 놓는다. 그러나 하늘로 솟아오른 천체적 존재는 원소들을 해방시키고 하늘과 공기의 수직적 이중체가 된다. 하늘의 이중체는 대지에 있는 물체의 복제(replica)가 아니다. 우리는 이중체라고 하면 나의 분신 혹은 이중적 자아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때의 이중체는 대지에 속한 나의 다른 자아로서 둘 다 대지에 근거하기 때문에 복제일 뿐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이중체는 타인들의 세계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다른 나’라는 점에서 복제와 다르다. 이 둘의 차이는 대지의 감금된 원소들이 해방되어 탈주하는가 아니면 그대로 감금되어 있는가의 차이이다.
‘다른 스페란자,’ ‘다른 방드르디,’ ‘새로운 로빈슨’은 타자의 세계인 대지에서 해방된 자이다. “한 사람의 타인이 아니라 타자와는 완전히 다른 무엇”(“Michel Tournier” 317)으로 나타난 방드르디와 타자의 차이점은 명백하다. 타자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눕게 만든다. 그것은 원소들을 대지로 끌어당기고, 대지를 신체들 속으로 끌어당기고, 신체들을 사물들 속에 끌어당긴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사물과 신체들을 다시 서게 만들고, 대지를 하늘로 옮기고, 원소들을 해방시킨다. 타자는 사물과 욕망과 시간이 스스로 서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처럼, 이중체가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타자가 붕괴할 때 우리는 다른 존재, 하늘의 이중체를 발견한다. “구조-타자의 붕괴는 세계의 조직 해체로 이르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 조직과 반대되는 곧게 선 조직이 된다. 그것은 새롭게 곧게 섬이고, 수직적이고 두께 없는 이미지의 분리이며, 마침내 해방된 순수 원소들의 분리이다”(313)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구조-타자가 지각장의 구조이고, 우리의 삶이 타자에 의해 표현된 가능성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때, 타자의 붕괴는 일차적으로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고 삶의 기반이 해체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들뢰즈에 따르면 구조-타자의 붕괴는 우리의 세계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숨겨두었던 새로운 세계의 발견에 이른다. 그 세계는 타자 부재로 인하여 의식과 대상이 하나가 되고, 사물과 욕망과 시간이 곧게 서며, 원소들이 대지로부터 해방되어 하늘로 솟아오르는 세계이다. 그러나 로빈슨이 무인도에 표류하면서 처음부터 타자 없는 세계로 진입한 것은 아니다. 로빈슨의 모험은 오히려 그 진입이 얼마나 어려우며, 구조-타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보여준다. 들뢰즈는 로빈슨의 모험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우선 로빈슨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근거인 구조-타자가 무너졌을 때 ‘세계의 조직 해체’(disorganization of the world)에서 비롯한 공황을 경험한다. 그 다음 그는 구조-타자를 복원하려고 노력한다. 로빈슨이 해체된 질서를 물질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복원한 조직은 ‘누워있는 조직’(recumbent organization)이다. 들뢰즈는 누워있는 조직과 해체된 조직은 동일한 구조-타자의 양면이라고 주장한다. 구조-타자의 반대는 해체된 조직도, 누워있는 조직도 아니다. 로빈슨은 ‘곧게 선 조직’(upright organization)을 발견함으로써 진정한 타자 없는 세계로 진입한다.
해체된 조직과 누워있는 조직은 로빈슨이 방드르디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경험을 대변한다. 우선 해체된 조직은 로빈슨이 무인도에 남게 된 후 보인 첫 번째 반응으로서 공황과 절망 상태를 말한다. 로빈슨은 섬을 탈출하고자 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절망에 빠져 진창 속으로 떨어진다. 들뢰즈는 이 상태를 구조-타자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신경증(neurosis)에 비유한다. 신경증을 이루는 억압은 진창 속의 로빈슨에게 몽상과 환각의 고통으로 돌아온다. 로빈슨이 처음에 위협적이고 해로운 것으로 경험하는 타자 없는 세계의 고통은 그의 입장에서는 타인들과 공유한 세계가 해체되는 고통이지만, 그렇다고 구조-타자가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구체적인 타인으로 현실화되지 못하는 구조-타자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엄격하게 작동한다”(313).
로빈슨이 마침내 진창에서 빠져나와 섬을 개간하는 장면은 두 번째 단계인 ‘누워있는 조직’에 해당한다. 로빈슨은 흔들리기 시작한 구조-타자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질서와 노동에서 찾는다. 그는 물시계를 만들고 땅을 경작하고 법을 제정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부재하는 구조-타자가 현존하는 것처럼 타자 현존의 효과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들뢰즈는 이 단계를 정신병(psychosis)이라고 명명한다. 왜냐하면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디포우의 로빈슨과 달리,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지 않고 소비할 수 있는 정도를 초과하여 ‘광기적인’ 생산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소비할 수 있을 만큼만 생산하는 것이 타인들의 세계의 경제 법칙이라면, 로빈슨의 노동과 생산은 정상 궤도를 이탈하여 분열적인 것으로 된다. 한편 이러한 노동 활동의 결과로 로빈슨에게 휴식과 성에 대한 이상한 열정이 솟구친다. 로빈슨은 물시계를 정지시키고 원초적인 어머니인 대지-어머니 속으로 퇴행한다. 이 두 가지 너무나 다른 행위에 ‘광기’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정신병의 상보적인 양상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한편으로는 “분열자의 우주적 계보학”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할 수 없는 분열적인 사물들의 생산”이 있다. 구조-타자가 해체되는 지점에서 정신병자는 “인간의 흔적들의 질서를 세움으로써 실재 타인들의 부재를 보상하고 초인간적인 모자관계를 구성함으로써 구조의 해체를 보상하려고 한다”(314-15).
마지막 단계인 ‘곧게 선 조직’은 로빈슨의 탈인간화의 모험의 완성을 말한다. 방드르디의 영향으로 로빈슨은 대지적 존재에서 천상적 존재로, 존재의 범주 양상을 바꾸는 것뿐 아니라 존재의 차원마저 바꾸어 버린다. 이 변화는 단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의 위치의 이동이 아니다. 들뢰즈는 이를 깊이와 표면의 이원론으로 정립한다. 대지가 깊이의 표현이라면 하늘은 표면의 표현이다. 새로운 로빈슨의 변신은 깊이에서 높이로의 변신이 아니라 깊이에서 표면으로의 변신이다.

순수한 표면은 타자가 우리들에게서 숨기는 것이다. 사물들의 미지의 이미지가 해방되고 대지로부터 새로운 표면의 에너지가 가능한 타자 없이 나타나는 것은 아마도 수증기와 같은 표면에서이다. 왜냐하면 하늘은 깊이의 역(逆) 이미지에 지나지 않을 높이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깊은 대지에 대립하여 공기와 하늘은 순수한 표면과 이 표면 영역을 나는 비행을 묘사한다. 유아론자의 하늘은 결코 깊이가 아니다: “넓이보다 깊이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이상한 편견이 있다. ‘표면적’(superficial)이란 말은 ‘넓은 정도’가 아니라 ‘얕은 깊이’를 의미하는 반면 ‘깊은’은 ‘심원한 깊이’를 의미하지 ‘적은 표면’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같은 감정이 측정된다면 깊이의 정도보다 표면의 정도에 의해서 더 잘 측정될 것처럼 보인다.” 이중체와 공기의 이미지가 처음 솟아오른 것은 표면에서이다. 그런 다음 순수하고 자유로운 원소들은 날아올라 표면의 영역을 비행한다. 보편화된 격상은 타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표면들의 격상이며 직선으로 올라간다. 섬의 표면과 하늘에서 시뮬라크라는 올라가 <환상>이 된다. 닮음이 아닌 이중체와 제약이 없는 원소들―이것이 환상의 두 가지 양상이다. 이렇게 재구조된 세계가 로빈슨의 위대한 건강을 이룬다. 위대한 건강의 정복이 ‘타자 상실’의 세 번째 의미이다. (315)

깊이는 구조-타자의 관할에 속한다. 구조-타자는 신과 닮은 순서로 존재들의 위계질서를 구축하며 높이와 낮음의 이분법을 수행한다. 이와 반대로 표면은 구조-타자가 부재할 때 나타난다. 높이와 낮음의 척도에 따라 세워진 세계가 무너질 때 표면의 세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표면의 세계는 깊이의 해체이지, 모든 세계의 해체는 아니다. 깊이가 무너질 때 세계의 무질서와 바닥없는 심연을 느끼는 것은 구조-타자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증거이다. 로빈슨이 처음에 경험했던 신경증과 정신병적 징후들은 깊이가 해체되는, 즉 구조-타자가 와해되는 현상이었다. 이제 로빈슨은 타자 없는 세계인 표면으로 진입한다. 들뢰즈는 이를 신경증이나 정신병과 대비하여 도착증(perversion)이라고 이름 붙인다. 도착증은 흔히 관음증이나 노출증과 같은 성도착적인 행위를 지칭하는 정신분석학적 용어로서 사용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도착증을 타인들과 관련된 구체적인 행위들이 아니라 구조-타자와 관련하여 정의한다. 도착자는 도착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조-타자 자체를 도착적으로 바꾸어 놓는 사람이다. 그는 타자의 구조 위에서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욕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욕망을 전혀 다른 체계인 ‘도착된 구조’(perverse structure) 속에 도입하는 사람이다(319). 신경증 환자가 타자의 그림자 속에서 억압의 징후에 시달리고 정신병자가 타자 부재 속에서 타자의 흔적을 복원하려고 몸부림친다면, 도착자는 구조-타자에서 분리되어 도착된 구조인 표면으로 솟아오른다.
이처럼 투르니에의 소설은 들뢰즈의 독해를 통해 구조-타자의 체계를 대신하는 새로운 세계를 실험한 예술로 거듭난다. 들뢰즈는 이 소설을 통해 타자 없는 세계가 모든 세계의 해체나 무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조-타자가 숨기고 있던 다른 세계 즉 표면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타자 없는 세계는 표면이고 도착된 구조이다. “이것이 로빈슨의 발견이다. 즉, 표면과 원소들의 저편의 세계와 타자의 타자(otherwise-Other)를 발견”(319)한 것이라고 들뢰즈는 쓰고 있다. ‘타자 저편’(beyond the Other) 혹은 ‘타자의 타자’는 자기 동일성으로 환원하지 않는 타자의 타자성을 가리킨다. 들뢰즈는 모든 도착증은 ‘타자 살해’(Other-cide)이며 가능성의 살해라고 말한다(320). 타자가 살해된 곳에 주체도 살해된다. 구조-타자와 가능성이 제거된 후 드러나는 것은 타자 저편의 표면 또는 도착된 탈주체화, 즉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다시 발견해야 한다고 말했던 강도와 전 개체적 특이성들이 함축된 이념의 세계이다.
요약하면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타자를 가능한 세계의 표현이자 지각의 선험적 구조라고 정의하였다. 타자는 재현 세계에서 지각을 통해 구체적인 주체들과 대상들로 분화되는 과정과 관련되며, 이는 다시 말해 강도와 특이성의 주름이 펼쳐지는 과정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그 강도와 특이성을 발견하는 일이고, 들뢰즈는 이것을 투르니에의 로빈슨의 모험을 통해 재구성하였다. ‘미셸 투르니에와 타자 없는 세계’에서 들뢰즈는 타자의 효과를 지각, 시간, 욕망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타자 없는 세계로 진입하는 로빈슨의 탈인간화 과정을 신경증, 정신병, 도착증의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마침내 로빈슨이 도달한 곳은 구조-타자의 세계와 대비되는 도착된 세계, 즉 타자 저편의 표면이다. 들뢰즈의 타자 이론은 구조-타자 너머 타자의 타자의 이론인 것이다.

Ⅳ.
이상에서 우리는 투르니에의 소설과 그 소설에 대한 들뢰즈의 독법을 통하여 들뢰즈의 타자 이론을 일별하였다. 그는 타자를 구조-타자로 정의하고, 로빈슨의 모험을 통해 타자의 현존과 부재의 효과를 탐구하였다. 그러나 앞장에서 충분히 암시되었듯이 그의 타자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구조-타자가 아니라 타자 없는 세계이다. 지각장을 정초하며 가능성의 세계를 보증하는 구조-타자가 아니라 타자 저편 타자의 타자가 들뢰즈의 타자 이론의 핵심이다. 로빈슨이 발견한 타자 없는 세계는 들뢰즈의 다른 개념들―기관 없는 몸, 생성, 배치, 탈영토화, 일관성의 구도 등―과 연결되어 끊임없이 다시 마주치게 된다. 이 만남을 통하여 들뢰즈는 우리에게 로빈슨이 발견한 표면을 발견하라고 초대한다.
들뢰즈와 가타리(F. Guattari)의 “천 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에서 로빈슨의 탈주체화 모험은 기관 없는 몸되기로 나타난다. 기관 없는 몸(body without organs)은 말 그대로 기관들이 없는 비어있는 몸을 의미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앙토넹 아르토(Antonin Artaud)에서 빌린 이 용어를 기관이 아니라 유기체(organism)에 대립시키고 있다. “기관 없는 몸은 기관들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라고 불리는 기관들의 조직에 대립한다”(158)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작동하기 위해 토대가 되는 지층(strata)이 세 가지 있는데, 유기체는 의미화(signifiance), 주체화(subjectification)와 함께 우리를 직접 구속하는 “세 가지 거대한 지층”(159) 중 하나이다. 지층의 구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약 나의 몸이 유기체가 아니라면, 내가 하는 말이 의미 있는 말이 아니라면, 나라는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당신이 조직화된 유기체가 아니라면 그냥 박탈당할 것이고, 당신이 기표와 기의, 해석자와 해석 대상이 아니라면 일탈자가 될 것이고, 당신이 하나로 고정된 발화의 주체가 아니라면 떠돌이가 될 것이다”(159). 유기체가 기관 없는 몸에 층위를 가한 지층이라면, 유기체를 해체하고 기관 없는 몸이 되는 것은 지층을 벗어나는 탈지층화(destratification)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유기체이기를 멈추고 기관 없는 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타자 없는 세계에서 제기되었던 문제, 즉 지각장을 구성하는 절대적인 구조인 타자가 부재한 세계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들뢰즈는 타자 없는 세계를 세 단계로 나누어 해체된 조직, 누워있는 조직, 곧게 선 조직으로 명명하였다. 이들을 기관 없는 몸에 적용시키면, 텅빈(emptied) 기관 없는 몸, 암적인(cancerous) 기관 없는 몸, 충만한(full) 기관 없는 몸이 된다.
우선 텅빈 기관 없는 몸은 우리가 일차적으로 기관 없는 몸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이다. 기관들이 파괴되어 없다고 믿거나 기관들 없이 살고 있다고 믿는 마약중독자의 몸, 건강염려자의 몸, 편집증 환자의 몸은 기관 없는 몸이기는 하지만, 자기 파괴적인 죽음으로 돌진하는 텅빈 몸이다. 텅빈 몸은 죽음 충동과 거짓, 환각, 환상으로 특징 지워지며, 탈지층화가 너무 갑작스럽게 폭력적으로 이행된 결과로 나타난다. 이들은 지층을 파괴하기는 하지만 생산으로 이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탈지층화 이전보다 더 나쁘다. “지층화 되어 있는 것이, 즉 유기체로 의미화 되고 주체화되어 있는 것이 최악의 경우는 아니다. 최악의 경우는 지층을 광기나 자살의 붕괴로 내던질 때, 그리하여 지층이 더욱 무겁게 우리에게 돌아올 때 일어난다”(161)라고 들뢰즈는 경고한다. 다시 말해 지층과 탈지층의 이분법을 잘못 이해하여 지층을 제거하는 것이 탈지층이라고 성급하게 생각할 때,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다. 유기체가 지층이고, 지층이 삶을 지탱하여주는 토대라고 믿는 몸에게 유기체를 벗어나는 탈지층화는 죽음이나 광기를 의미할 뿐이다. 텅빈 기관 없는 몸은 지층/탈지층화를 유/무의 이분법으로 환원하여, 지층을 벗어나면 허무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비관적인 몸이다. 텅빈 몸은 지층과 탈지층의 이분법에 갇혀 탈지층이 무가 아니라 다른 유로 열려있음을 보지 못한다.
또 하나의 부정적인 기관 없는 몸은 암적인 몸이다. 이것은 지층에 속한 유기체가 암조직처럼 끝없이 증식하는 것이다. 지층으로서 유기체는 생존을 위하여 형식, 기능, 규율, 위계적 조직을 스스로 가한다. 그런데 이 지층 가운데 유기체의 일부가 본연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매 순간, 매초, 세포가 암처럼 되어 미쳐서 증식하고 형상을 상실하고 모든 것을 접수한다”면(163), 그것은 암적인 몸이 된다. 암적인 조직은 모든 지층에서 볼 수 있다. 의미화의 지층에서 그것은 어떠한 기호의 순환도 차단하여 버리는 전제군주의 몸이며, 주체화의 지층에서는 주체들 사이의 구별을 금지하는 동질화의 숨막히는 몸이다. 사회구성체에서 암적인 조직은 돈의 기관 없는 몸인 인플레이션과 국가, 군대, 공장, 도시, 정당 등의 기관 없는 몸에 도사리고 있다. 예를 들어 지역감정이나 민족주의는 모든 주체들을 동질화하고 다른 기호의 가능성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암적인 기관 없는 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기관 없는 몸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이라는 점에서 기관 없는 몸의 특징을 띠지만, 지층이 낳은 기관 없는 몸이기 때문에 탈지층화와는 관계없이 증식된다.
마지막으로 충만한 기관 없는 몸은 진정한 탈지층화를 수행하는 기관 없는 몸이다. 들뢰즈는 충만한 기관 없는 몸의 예로 “단순한 물(Thing), 실체, 충만한 몸, 가만 있는 여행, 거식증, 피부로 보는 비전, 요가, 크리슈나, 사랑, 실험”(151)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충만한 기관 없는 몸을 텅빈 혹은 암적인 기관 없는 몸과 구별하는 것은 ‘일관성의 구도’(plane of consistency)와 접목해 있는가라는 점이다. 들뢰즈의 이론에서 일관성의 구도는 기관 없는 몸, ‘추상기계’(abstract machine), ‘절대적 탈영토화’(absolute deterritorialization), ‘절대적 탈주선’(absolute line of flight) 등과 경우에 따라서는 바꿔 쓸 수 있는 핵심적 개념이다. 이 개념들은 모두 지층의 탈지층화에 관련된다. 따라서 충만한 기관 없는 몸을 살펴보기 위하여 지층화와 탈지층화를 우선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관 없는 몸의 대표적 예인 살아있는 수정란은 지층이 형성되기 이전 강도의 에너지의 분포를 보여준다. 그것은 “무지층, 무형태의 강렬한 물질로서 강도가 0인 강도의 모체이다”(153). 마이너스와 플러스가 깊이와 높이를 대변한다면 강도가 0인 알은 깊이와 높이를 떠난 표면인 일관성의 구도를 지칭한다. 그것은 균질한 공간이 아니라 축, 벡터, 기울기, 문턱에 따라 집약적으로 움직이는 잠재적이고 실재적인 힘의 장이다. 지층화가 일어나기 전의 지구 역시 기관 없는 몸이라고 할 수 있다. “탈영토화, 대빙하, 거대한 분자”인 지구는 “형태가 없고 불안정한 물질에 의해, 모든 방향으로 흐르는 흐름에 의해, 자유로운 강도와 노마드적 특이성에 의해, 미치광이 같은 일시적인 입자들에 의해 속속들이 배여든”(40) 기관 없는 몸이다. 여기에 동시적으로 지층화가 일어난다. 지층은 지구 위에 코드화와 영토화로써 작용한다.
그러나 지층은 단지 영토화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층은 수없이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반복되면서 형성된다. 그 이유는 지층 자체 내에 탈영토화의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유기적 지층 즉 유기체의 경우를 들어 이를 중첩지층(epistrata)과 이웃지층(parastrata), 그리고 사이지층(interstratum)과 메타지층(metastratum)으로 설명한다.

각각의 지층은 다른 지층에 대해 하위지층의 역할을 한다. 각 지층은 그것의 장소와 질료적 요소들과 형태적 특성들로 규정된 구성의 통일체(에큐메논)를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는 형태들과 주변의 결합된 환경에 따라 이웃지층으로 분할되며, 형태 지워진 질료의 층들과 중간매개적 환경에 따라 중첩지층으로 분할된다. 중첩지층과 이웃지층은 그 자체 지층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기계적 배치는 지층간의 관계들을 규제한다는 의미에서 사이지층인데, 각 지층의 내용과 표현의 관계 또한 앞서 진행된 분할에 따라 규제한다. 하나의 배치는 다양한 지층들로부터 일정 정도의 무질서와 함께 차용되고, 역으로 지층이나 지층의 요소는 다양한 배치 속에서 활동하는 다른 것들과 합류한다. 마침내 기계적 배치는 메타지층이 되는데, 그것이 일관성의 구도와 접촉하고 그에 따라 추상기계를 현실화하기 때문이다. 추상기계는 각각의 지층 속에 감싸인 채로 그 지층의 에큐메논 혹은 구성의 통일체를 규정하거나, 일관성의 구도 위에 전개하여 탈지층(플라노메논)을 수행한다. (73)

지층 속에는 중첩지층과 이웃지층과 같은 지층화의 과정뿐 아니라 사이지층과 메타지층과 같은 탈지층화 과정이 공존한다. 메타지층은 절대적 탈영토화인 일관성의 구도이고 사이지층은 상대적 탈영토화인 기계적 배치(machinic assemblage)이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반복하여 지층이 형성된다고 할 때 구체적인 지층에 작용하는 것이 상대적 탈영토화이고, 그것을 이끄는 잠재적이면서 실재적 힘이 절대적 탈영토화이다. 앞서 지구는 지층화되기 전에 기관 없는 몸이고, 그와 동시에 지층화가 지구에 작용한다고 하였다. 지층화와 기관 없는 몸이 공존한다면, 이는 기관 없는 몸 속에 지층화가 있고, 또 지층화 속에 기관 없는 몸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기관 없는 몸은 지층화 이전과 탈지층화 과정을 모두 가리키게 된다. 이는 탈지층화가 지층화 이전과 이후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층화와 탈지층화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바뀐다. 수정란을 기관 없는 몸이라고 할 때 쉽게 떠오르는 도식은 기관 없는 몸→영토화→탈영토화→재영토화이다. 이러한 도식은 마치 기관 없는 몸이 유기체로 발전한다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탈영토화가 처음부터 있고 이것이 지층화와 공존한다면 도식은 탈영토화→영토화→탈영토화→재영토화→탈영토화가 될 것이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결코 시간상의 순서가 아닌) 처음에 존재하고 상대적인 탈영토화를 이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기관 없는 몸에서 유기체로 지층화되는 과정이 아니라, 지층화에서 탈영토화의 운동을 파악하는 것이다.
지층에서 탈영토화의 잠재성을 감지하는 것이 충만한 기관 없는 몸이다. 텅빈 기관 없는 몸이 섣불리 지층을 제거하려고 함으로써 더 무거운 지층에 눌리고, 암적인 기관 없는 몸이 지층 속에서 지층보다 단단한 종양을 무한대로 증식시킨다면, 충만한 기관 없는 몸은 지층에서 탈영토화의 잠재성을 해방시킴으로써 진정한 기관 없는 몸이 된다. 들뢰즈는 기관 없는 몸이 되는 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해야할 일이다. 지층 위에 자리잡고, 그것이 주는 기회를 실험하며, 유리한 장소를 찾아서, 탈영토화의 잠재적인 운동과 가능한 탈주선을 발견하여, 경험하고, 여기저기에 흐름의 통접을 생산하고, 선분마다 연속적인 강도를 충분히 살피며, 언제나 새로운 땅의 작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라. 탈주선을 해방시키고, 결합된 흐름을 통과하고 도피시키며, 기관 없는 몸을 위한 연속된 강도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는 것은 지층과의 꼼꼼한 관계를 통해서이다. 연결하고 결합하고 지속하라. 이것이 전체적인 ‘다이어그램’으로서, 의미화와 주체화의 프로그램에 대립하는 것이다. 사회구성체 속에 있을 때는 이렇게 하라. 우리와 대자적으로 또는 즉자적으로 또 우리가 있는 장소에서 얼마나 지층화되어 있는지 살펴보라. 그리고 지층으로부터 우리가 포함된 더 깊은 배치로 내려오라. 가볍게 배치를 뒤집어서 일관성의 구도 쪽으로 넘어가게 하라. 그러면 기관 없는 몸이 연결된 욕망으로, 결합된 흐름들로, 연속된 강도로 스스로 드러난다. 이렇게 너의 작은 기계를 만들어서 다른 집합적인 기계들에 접속할 때를 대비하라. (161)

결국 충만한 기관 없는 몸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지층에서 “탈영토화의 잠재적인 운동과 가능한 탈주선을 발견하여” 실험하고 해방시킨다. 유기적 지층이건, 의미화의 지층이건, 주체화의 지층이건, 기관 없는 몸이 되는 것은 지층을 배치(assemblage)로 바꿈으로써 탈지층화하는 것이다. 유기체는 더 이상 유기적 기관이나 기능이 아니라 환경과 다른 몸들과의 배치 속에서 어떻게 몸이 다른 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작용하고 작용을 받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의미는 더 이상 의미작용에, 나아가 기표의 제국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무의미의 강렬함으로 탈주한다. 발화의 주체는 주어와 동사를 주종관계로 다루지 않고 배치로 봄으로써 주체라는 허구성에서 빠져나온다. 배치는 지층과 일관성의 구도 사이에 있는 사이지층이다. 한쪽은 지층에, 다른 한쪽은 일관성의 구도에 연결되어 있는 배치는 지층의 몰적(molar) 고정성 속에 갇힌 분자적 흐름을 해방시켜 일관성의 구도에 이르게 한다.
그렇다면 로빈슨이 발견한 타자 없는 세계의 표면은 기관 없는 몸이요 일관성의 구도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표면을 발견할 수 있는가? 로빈슨처럼 무인도의 절대 고독 속에 버려지지 않는 이상, 도착된 구조를 살지 않는 이상, 그가 발견한 표면을 발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배치를 통하여 일관성의 구도에 이를 수 있다. 표면은 우리가 발견하기를 기다리는 선(先) 존재가 아니다. 표면을 발견하거나 도달해야하는 지고의 영역으로 간주한다면, 그 순간 표면은 깊이의 다른 이름인 높이로 전락한다. 표면 혹은 일관성의 구도는 그것을 현실화하고 실행하는 배치를 통하여 이를 수 있다. 배치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개별적인 몸에서 무리와 분자와 집합을 보고, 내적인 강도를 감지함으로써, 지층은 배치로 바뀐다. 들뢰즈는 전자를 ‘경도’(longitude), 후자를 ‘위도’(latitude)라는 지리학적 용어로써 명명한다. 몸의 경도는 “주어진 관계 속에서 몸에 속한 입자의 집합”이며 몸의 위도는 “주어진 힘의 정도에서, 혹은 오히려 그 정도의 극한에서 가능한 감응이다”(256). 이 때 몸은 유기적인 몸일 수도 있고 사회구성체일 수도 있다. 하나의 몸이나 현상을 몰적 전체로 보지 않고 분자적 흐름으로 보고, 또 힘들 간의 관계 속에서 탈영토화하는 힘의 정도인 감응(affect)의 강도들 파악할 때 우리는 지층에서 벗어나 일관성의 구도를 발견할 것이다.


Ⅴ.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요약해보면, 들뢰즈에게 타자는 지각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타자이며, 타자 없는 세계는 타자 저편, 타자의 타자이다. 들뢰즈의 전반적인 이론틀 안에서 볼 때 타자는 지층에, 타자 없는 세계는 일관성의 구도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들뢰즈의 타자 이론이 탈근대의 담론을 이루는 타자 이론들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 그 다음 문제로 부각된다. 서론에서 언급했듯, 탈근대 담론의 비판적 성과 중 한 가지는 인간중심주의의 근대 담론에서 희생된 여성, 피식민지, 동성애자, 소수민족과 같은 타자의 복원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타자 이론에서 여성, 피식민지, 동성애자, 소수민족과 같은 타자들은 어디에 위치하며, 어떤 위상이 부여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즉, 들뢰즈의 타자 이론이 이들 타자들에게 어떤 이론적 토대와 지침을 줄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현상적인 결론부터 말한다면 타자의 목소리를 복원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게 들뢰즈의 이론은 동반자가 아니라 의혹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 진영에서 들뢰즈에게 우호적인 페미니스트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타자들의 진영에서는 들뢰즈에 대한 언급 자체가 희귀하다. 이러한 현상은 들뢰즈의 타자 이론을 고려해보면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앞서 “미셸 투르니에의 타자 없는 세계”를 살피면서 로빈슨의 도착적 모험은 타자 살해라고 하였다. 타자는 주체의 세계를 이루는 구조이므로 타자의 죽음은 주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타자가 죽은 곳에 드러나는 타자 저편은 타자도 주체도 없는 탈주체화의 세계이다. 따라서 들뢰즈의 타자 이론은 탈주체의 이론이 된다. 그런데 타자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문제는 대안적인 주체를 찾는 노력은 환영하지만 주체 자체를 탈지층화하는 탈주체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대개의 실천적인 타자 담론은 근대 담론과 탈근대 담론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기 때문에 주체의 탈근대적 대안이란 용어에는 호의적이지만 타자와 주체의 동반 살해라는 급진적 사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즉 기존의 타자 담론은 어떻게든 주체의 개념을 살려주고자 하는 반면 들뢰즈는 주체 부재의 담론을 펼친다. 여기에 들뢰즈 이론의 급진성이 있는 것이다.
들뢰즈의 탈주체 이론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분자-되기(becoming-molecular)이다. 앞서 지층화는 유기체, 의미화, 주체화의 세 가지 중요한 지층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중 주체화의 지층의 산물을 들뢰즈는 몰적인 주체라고 부른다. 분자-되기는 몰적인 주체화를 탈지층화하는 탈주선이다. 몰적인 주체화를 해체하는 분자-되기의 개념에서 피해야할 것은 거대한 몰과 작은 분자와의 대립이다. 탈주체화로서 분자-되기는 통일되고 안정된 나라는 몰적 주체를 작은 입자들의 주체로 잘게 나눈다는 뜻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은 보편적인 주체와 대립하는 개별적인 주체의 개념도 아니며, 대문자 주체에 대립하는 소문자 주체들의 개념도 아니다. 몰과 분자는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양식(mode)의 문제이다. ‘몰적’이라는 말이 전체가 하나를 중심으로 통합되는 고정성을 보여준다면, ‘분자적’이란 말은 분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영향을 주고 움직이는 양상을 말한다. ‘분자적’의 함의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수성(multiplicity)이다. 들뢰즈는 되기의 또 다른 예인 동물-되기(becoming-animal)에서, 프로이트(S. Freud)의 피분석자인 울프맨(Wolfman)이 끌렸던 것은 그를 쳐다보고 있던 여러 마리의 늑대이지 한 마리가 아니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우리가 동물-되기를 실행하는 것은 무리 곧 다수성에 대한 매료 때문이라고 말한다(Thousand Plateaus 239).
어쩌면 우리를 매료시키는 다수성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다수성과 연관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인류가 계보학, 유전학, 발생학 등을 통해 끊임없이 조상과 후손의 단선성을 확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나 동물은 무리로서 친자관계, 유전, 성적 재생산이 아니라 전염, 유행병, 감염에 의한 증식으로 번식하기 때문에 단일한 조상 없는 다수성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몰적인 주체를 탈지층화하는 분자-되기 역시 이러한 다수성을 실행한다. 자아는 다수성과 다수성 사이의 문지방, 문, 생성일 뿐이다. 동물-되기에서 동물은 무리, 곧 집단으로 작용하듯이, 분자-되기의 분자 역시 집단으로 활동한다. 그러므로 분자-되기에서 중요한 것은 개개의 분자로 흩어진 개별성이 아니라, 집단적인 흐름의 이동과 변화이다.
되기 혹은 생성의 정치학이 가장 오해를 많이 받는 부분은 몰적 주체성의 해체란 점이다. 몰적 주체를 지지하는 진영의 관점에서 본다면, 몰적 주체의 해체는 의미있는 주체 활동을 접고 사회 변혁의 과제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그 대안인 분자-되기는 말 그대로 파편화된 분자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는 몰적인 여성의 분자적 여성-되기를 주장하는데, 이는 여성에게서 역사적 주체로서의 자리를 박탈함으로써 여성의 투쟁을 봉쇄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들뢰즈가 곳곳에 언급하듯이, 분자-되기가 인격의 해체나 사회 변혁의 힘의 상실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인격이 해체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될 정도의 정신분열자가 나온다면, 그것은 들뢰즈가 표방하는 정신분열분석 때문이 아니라, 다른 힘들--예컨대 죽음에 이르는 자기파괴적 욕망과 정신병원의 억압적인 권력--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를 텅빈 기관 없는 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또한 분자-되기는 몰적 주체의 힘을 와해시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움직임도 아니다. 오히려 분자적 정치학은 몰적 정치학이 정체성의 견고함으로 인해 보지 못하는 힘들의 움직임과 흐름을 포착한다.
생성의 정치학은 배치를 통해 탈영토화의 힘을 이끌어낼 때 이루어진다.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몰적 정체성에서 분자적 흐름을 읽어내고 탈지층화의 잠재성을 감지할 때 우리는 끊임없는 탈영토화의 리듬 위에 있게 된다. 탈영토화는 지층화의 대립물이 아니다. 지층이 통일성과 자기 동일성으로 층을 증식하여갈 때 그 지층의 동일성을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탈영토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탈영토화는 지층과 지층 사이의, 동일성과 동일성 사이의 차이가 아니다. 탈영토화의 차이는 동일성 다음의 차이가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는 차이이며, 동일성을 차이의 유희로 만드는 차이이다. 그 차이는 지층을 차이의 반복으로 만든다. 따라서 들뢰즈의 이론에서 주체의 동일성에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타자성은 지층에 이미 내재한 탈지층의 운동을 읽어내고 동일성 속에서 차이를 생산하는 절대적 탈영토화로 사유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서동욱. “차이와 타자”.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0.
투르니에, 미셸.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 김화영 역. “오늘의 세계문학 6”. 서울: 중앙일보사,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