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아나키즘의 이론적 과제에 관한 시론
  : 사회적 아나키즘과 생활양식 아나키즘의 통합

                                          김성국(부산대학교 사회학과, 부산경제정의실천 시민연합)


I. 한국형 아나키즘을 기대하며

최근 한국에서도 아나키즘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아나키즘과 관련된 저작물들(김성국, 구승회, 1996; 김성국, 1998, 김경복, 1998; 구승회, 1998; 박연규, 1998; 박홍규, 1998, 방영준, 1998; 오장환, 1998; 조광수, 1998, Boochin, 1995)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아나키즘에 관한 연구들이 대부분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의 아나키즘운동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면 서구 아나키즘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일찍이 조선의 위대한 아나키스트 신채호(1982)선생께서 경고하였듯이, 우리는 서양의 아나키즘을 그대로 직수입해서는 안된다(1). 비판적 수용과 창조적 파괴를 통하여 고유의 한국 아나키즘을 만들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나키즘은 또 하나의 유행성 서구이론처럼 우리들 지적 담론의 세계에서 잠깐 반짝거리다 사라져 버리는 해프닝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 한국의 아나키즘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서구의 아나키즘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몇 가지 고유한 특성들을 간직하고 있다. 아나키스트운동은 민족독립운동의 수단과 목표로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민족주의적 지향성을 가진다. 해방 후에는 좌우익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국가건설 과정에 뛰어드는 정치참여라는 파격적 전통을 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노동자나 농민이 중심이 된 대중운동으로서 보다는 지식인을 중심으로 조직화가 이루어 졌다. 이 같은 한국 특유의 아나키스트운동사는 그 사상적 배경에 있어서도 단군사상, 서화담의 주기론, 정약용의 실학사상, 동학의 사회변혁 사상 등 유불선을 포괄하는 광대무변하고 심원한 뿌리를 갖고 있다(하기락, 1993). 이같은 아나키즘의 한국적 주체성 내지 정체성은 탈오리엔탈리즘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오늘날과 같은 대혼란, 대격변, 대전환의 시대에서는 소중히 간직해야 할 전통이 아닐 수 없다.

찬연한 실패와 좌절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아나키즘은 아직 체계화된 한국적 이론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현대 아나키즘의 논의에 있어서 가장 주목받는 이론가인 머레이 북친(Murray Boochin, 1995)이 제기한 "생활양식 아나키즘이냐 아니면 사회적 아나키즘이냐(Social Anarchism or Lifestyle Anarchism: An Unbridgeable Chasm)"라는 논쟁을, 한국 아나키즘의 독자적 이론구축이라는 원대한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면서 하나의 새로운 통합이론을 모색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각종의 생활양식 아나키즘에 대한 Boochin의 비판을 소개하고(제 2장), 다음에는 이같은 북친의 사회적 아나키즘이 갖는 일면성을 재비판하면서 일종의 통합적 시각을 발굴하여 보고자 한다(제 3장). 결론적으로, 필자는 개인과 사회는 서로 양립불가능한 별개의 대립적인 주체라기 보다는 내포와 외연, 내용과 형식, 혹은 행위와 구조의 관계로서 상호 불가분의 연결고리를 갖는 상호규정적 주체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동태적이며 상호작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생활양식 아나키즘과 사회적 아나키즘은 단일 운동의 상이한 측면으로서 양자는상호보완적 내지 호혜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II. 생활양식 아나키즘에 대한 비판

Boochin(1995: 4)의 적절한 지적처럼, 반권위주의를 표방하는 사상(anti-authoritarian ideas)으로서 아나키즘은 지난 200여년 동안 개인적 자율성을 추구하는 개별주의(a personalistic commitment to individual autonomy)와 사회적 자유를 추구하는 집합주의(a collectivist commitment to social freedom)라는 두 가지의 상호 모순적인 지향성을 동시에 발전시켜 왔다. 불행히도, 이 두 가지의 지적 전통은 국가에 대한 반대 즉 반국가주의라는 최소한의 공통신념을 공유한다는 사실 이외에는 사회변혁의 방법론이나 새로운 사회의 구상에 있어서 어떤 형태의 적극적인 최대공약수도 도출해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지하듯, 개인주의 아나키즘은 스티르너(Max Stirner), 고드윈(William Godwin),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등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다. 의식적인 이기주의자 Stirner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개인주의를 주창하였으며, 질서를 사랑하였던 Godwin도 개인적 자율성과 공동체 간에 존재하는 긴장을 인식하면서 개인의 사적 판단권의 우위성을 지적하였고 (Nursey-Bray, 1996: 99), Marx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에 반대하였던 Pourdhon은 자신을 지배하려는 어떠한 외적 권위도 적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러 바쿠닌(Michael Bakunin),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등이 주도한 아나르코생디칼리즘(Anarchosyndicalism) 및 아나르코코뮤니즘(Anarchocommunism)의 대두와 함께 개인주의 아나키즘은 급격히 쇠퇴하여 집합주의 아나키즘으로 거의 흡수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혁명의 시대, 국가의 시대가 등장함에 따라서 자연히 아나키즘의 투쟁 대상이나 실천 방법도 사회적 성격을 지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나키스트들에게 있어서 개인적 자율성이란 어디까지나 집합적 질서를 보장하는 공동체 내의 자율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Boochin(1995: 7-11)은 최근 일련의 반동적 분위기(Tacherism, Reaganomics, Neo-liberalism 등)와 함께 개인주의 아나키즘이 다시 득세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전통적으로 개인주의적-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미국과 영국에서 1990년대부터 아나키즘이 역사적으로 간직해 온 사회주의적인 특성을 무시하는 대신에 자아의 고유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 아나키즘(Anarchiindividualism) 혹은 생활양식 아나키즘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기존 자본주의와 국가주의 질서에 대한 어떤 조직적이고, 집합적이며, 계획된 저항을 시도하지 않는 대신 뚜렷한 지향성도 없이일상생활의 영역에서 탈선과 반항을 추구할 뿐이다. 이들은 장기적인 사회혁명 보다는 푸코(Michel Foucault)식의 개별적 반란(personal insurrection)에 탐닉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피압박자들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아 주기 보다는 현존하는 그러나 불가항력적으로 불가피한 권력관계에 대한 게릴라적인 혹은 미시적 항거를 전개할 뿐이다.

특히 생활양식 아나키즘은 Stirner의 주체적이고, 포괄적인 자아(I) 개념은 외면하는 반면 자아중심적인 이기주의 입장만을 흡수하면서 실존주의에로의 지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상황주의(situationism), 불교, 도교, 반합리주의(antirationalism), 원시주의(primitivism) 등의 형태를 띄게 된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역사, 문명 그리고 세련된 기술을 앞서는 어떤 원초적이고, 유아기적 (순수성을 간직하는) 자아에로 되돌아 갈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Boochin(1995: 11)의 판단에 의하면 이같은 경향들은 분명히 "반동적인 정치철학"의 한 형태일 뿐이다. Boochin은 생활양식 아나키즘이 왜 진정한 아나키즘이 아니고 반동적인가를 아래의 세가지 차원에서 검토하고 있다.


1. 사회적 자유를 희생하는 개인적 자율성

Boochin에 의하면, 생활양식 아나키스트들은 자유 보다는 자율성을 추구함으로써 자유에 깊이 함축되어 있는 사회적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자율성이 고유한 개인이라는 의미와 연관된 것이라면, 자유는 개인과 집합적인 것을 변증법적으로 결합시키는 개념이다. 그리스어의 eleutheria와 독일어의 Freiheit와 유사한 어의를 지닌 자유는 여전히 공동체적(Gemeinschaftliche 또는 communal) 함의를 간직한다. 따라서, 자유라는 개념에 있어서는 개인의 자아가 집합적인 것과 반대되거나 혹은 그것으로부터 격리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freedom)는 개인의 자유(individual's liberty)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실현을 의미한다.

Boochin(1995: 13)은 최근 브라운(Susan Brown, 1993)이 그녀의 저서 [개인주의의 정치학, The Politics of Individualism]에서 기본적으로 개인주의 아나키즘을 주창하면서 자유와 자율성의 관계를 혼동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Brown의 실존적 개인주의는 개인적 자율성과 자결(self-determination)에 대한 자유주의적 신념을 공유할 뿐 아니라, 나아가 국가사회주의를 포함하여 모든 집합주의적 이념 전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또 Brown은 대부분의 집합주의자들은 개별적 인간들을 현재의 역사 속에서 표류하는 잡동사니 정도로 인식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Brown에 의하면, 개인을 형성하는 것은 집단이 아니다. 그 반대로 집단에 형식과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개인들이라고 주장한다. 집단이란 개인들의 집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개인들만 존재할 뿐이다(There is no such thing as a society but only individuals)"라고 주장하였던 대처(Margaret Thatcher)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를 연상시키는 Brown의 입장을 Boochin은 단호하게 비판한다. 왜냐하면 Brown의 실존적 개인주의는 개인을 무역사적으로 취급하여, 개인에게 하나의 초월적 범주를 부여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역사와 실천으로부터 분리된 초월적이며 도덕적으로 추상화된 존재로서의 개인은 그에게 진정한 의지와 창조성을 부여하는 사회적 요인들로부터 또한 격리되어 버린다. 개인과 공동체를 결합시키려는 Brown의 시도는, 마치 창조론과 진화론을 어설프게 결합시키려는 것 처럼, 도덕적 초월주의와 실증주의를 오락락하는 헛수고에 그치고 잇을 뿐이다. 요컨대, Boochin(1995: 18)에 의하면, 개인은 사회적 발전과정을 통하여 형성되며 또 끊임없이 사회적 발전과 상호작용을 맺는다. 이와 같이, 개인적 자율성은 사회적 자유에 의하여 -다시 말해, 사회적 틀내에서- 그 올바른 자리매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2. 혼란으로서의 아나키즘

Boochin에 의하면, 현대의 생활양식 아나키즘은 포스트모던 허무주의, 반합리주의, 新원시주의, 반기술주의, 신스탈린주의, 문화적 테러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푸코류의 개별적 반란 등의 형태로 창궐하면서 유피(Yuppie) 패션과 결합하고 있다. 이들은 체게적인 사회변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개별적 수준에서의 자아실현에 더욱 관심을 지니며, 진지한 조직적 사회운동이나 정치적 급진주의에는 등을 돌리고 "체험의 정치학(politics of experiences)"에 탐닉하여 내면적 자아로 회귀하려 할 뿐이다.

Boochin(1995: 20-25)은 하킴 베이(Hakim Bey)의 [ T. A. Z.: 일시적 자율지역, 존재론적 아나키즘, 시적 테러리즘, T.A.Z.: The Temporary Autonomous Zone, ontological Anarchism. Poetic Terrorism]을 생활양식 아나키즘의 전형적인 대변서로서 격렬하게 공격한다. Boochin은 Bey가 불교적 열반의 평정성 혹은 보드리아(Baudrillard)의 사이뮬레이션(simulation) 혹은 카스토리아(Castoria)의 상상성(imaginary)을 제공하는 듯한 수사법을 동원하면서, 권력에 대한 어떤 진지한 투쟁도 조롱하고, 사회변혁에 대한 혁명적 열정을 조소하고, 아나키는 혼란이라는 도그마를 설파하면서, 자아(self), 주체(I), 대아(the Big Me) 등의 실현을 통한 자유의 획득을 강조한다.

물론 Boochin이 보기에는 이같은 Bey의 개인주의 아나키스트전략은 기존 사회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욕구해소용 안전 발브로는 작용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떤 유의미한 사회변화를 초래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그것은 아나키즘을 모든 연령층의 쁘띠부르조아지를 유혹하는 유행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3. 신비주의-원시주의 아나키즘

생활양식 아나키즘의 부정적 폐해는 아나키스트 저널인 제 5국가(The Fifth State) 소속의 집단에 의해서도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일종의 쾌락주의적 실천을 통하여 아나키의 실현을 추구하고자 한다. 특히 원시주의적, 전합리주의적, 반기술주의적, 반문명주의적 신앙을 설파하는 이들은 모든 권력을 추방한다는 명분하에 원시부족 사회에서 나타나던 황홀경의 광란과 주술에 빠져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쾌락주의 아나키스트는 자신들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착취와 억압으로 고통받아야만 한다는 지배와 종속의 메카니즘을 철저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현실적으로, 이같은 쾌락주의 아나키즘은 고급스럽고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소비자들의 엘리뜨적 취미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한때 장발, 염주와 구슬목거리, 성적 자유 등을 표방하며 쁘띠부르죠아지들을 경악시켰던 반문화 물결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부르죠아 사업가들에 의해서 새로운 향락문화산업(카페, 미장원, 클럽, 누드촌 등)으로 흡수되었을 뿐이다.

쾌락주의 아나키즘 보다 더 해악스러운 것이 반기술주의이다. 이 입장의 대표자격인 브래드포드(George Bradford, 1990)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 혹은 합리성의 산물인 현대의 대량 기술은 마치 하나의 자율적 생명력을 가진 존재처럼 인간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일종의 전체 환경 혹은 사회체제로 변모하였다. 그러므로, Bradford는 기술지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계류를 즉각 그리고 깡그리 없애 버릴 것을 제안한다. 그래야만이, 인간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였던 모든 세력들의 복합체로서 문명이 파괴될 수 것이므로 인간은 해방될 수 있다.

그러나, Boochin(1995: 29-35)에 의하면, Bradford는 기술의 발전과 관련된 자본주의적 연관성을 외면하므로써 기술의 해방적 잠재력을 과소평가한다. 생활양식 아나키즘은 이처럼 표피적인 현실의 생활양식에 매달리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축적, 생태학적 재난 등의 사회적 문제가 지닌 역사구조적 특성을 간과하여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위기의 원천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즉, Boochin은 서구 유럽문명이 역사적으로 꾸준히 축적하여 온 과학적 지식, 보편주의, 이성과 기술 등이 갖는 유의미성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인간의 역사에는 부정적 측면과 함께 긍정적 측면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되며, 이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은 이성을 포기할 경우 아무런 희망도 대안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Boochin의 입장인 것 같다.

원시주의 아나키즘은 전사시대의 삶이 야만적이고, 혹독하였으며, 피비린내나는 생존투쟁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원초적인 풍요사회로서 동경하고 있다. 반문명주의적 원시주의 아나키스트인 제르젠(John Zerzan, 1994)은 농경정착시기 이전의 인류생활은 인간이 자연과 하나로 일체화된 가운데 감각적 지혜, 성적 평등, 그리고 정신적-육체적 건강 등을 누리는 일종의 여가사회이었던 것으로 파악한다. 그에게는 인류의 역사란 유토피아적 황금시대로부터의 타락의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Boochin은 이들이 자유, 개인성, 자의식의 확대와 같은 긍정적인 인간발달사를 무시한 채, 비합리적 신비주의에 빠져 존재하지도 않았던 허구적 과거를 창안하여 이를 미화한다고 비낭한다. 더욱이 원시에로의 회귀는 불가능한 동경에 불과한 것임을 지적한다.

이와 같이, 생활양식 아나키즘은 성찰성(reflection)을 추구하기 보다는 즉각성(immediacy)에 매료되어 있다(Boochin, 1995: 49-55). 그리하여 인간성에 대한 섬세하고도 사려깊은 고찰 즉 합리적 분석을 기피하면서 자연의 무한영속적 순환이라는 개념에 기초하여 인간성에 대하여 무시간성, 무지역성, 무역사성을 부여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에 개입하는(intervene) 것이 아니라 오직 적응해야(adapt) 하는 존재로 파악된다. 결국, 생활양식 아나키즘은 역사 속에서 그리고 객관적 세계 내에서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좌파 자유해방주의의 사회주의적 특성(the socialist core of a left-libertarian ideology)"을 잠식하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생활양식 아나키즘은 개인적 체험과 당면한 현실을 신비화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허구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개인적 자율성을 성취한다는 명목하에 쁘띠부르죠아적 이기심을 충족시키고 있을 뿐이다.

마침내, Boochin(1995: 54)은 욕망의 충족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 아나르코생디칼리즘과 아나르코코뮤니즘의 사회주의적 전통과 사회적 비효과성을 조장하고 있는 생활양식 아나키즘의 개인주의적 전통 사이에는 메울 길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만약 아나키즘이 사회적 실천과 집합주의적 목표를 상실한 채, 심미주의나 도가적 은둔 혹은 불교적 자아부정의 세계에서 방황하게 된다면, 아나키즘은 사회적 재생과 혁명적 비젼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타락과 이기주의적 반항을 표상할 뿐이라고 경고한다. 탈문명주의 혹은 원시주의에의 동경은 사고와 지성이 미명 속에서 잠든 채 야만성이 횡횡하는 "한같 동물성에로의 복귀(a return to mere animality)로 끝장이 날 것이다.

그리하여, Boochin(1995: 56-61)은 생활양식 아나키즘에 대한 사회적 아나키즘의 정치적인 대안으로서 민주적 공동(체)주의(a democratic communalism)를 제안한다. 그 구체적 내용을 지역적 연합주의(,municipal confedralism), 반국가주의(opposition to statism), 직접민주주의(direct democracy) 그리고 자유해방적 꼬뮤니즘(libertarian communism)으로 구성하면서 아나키즘이 혁명적 사회주의의 전통을 복원할 것을 염원한다. 생활양식 사회주의는 쾌락주의와 동양적 은둔주의를 추구하는 개인주의에 불과한 것이지만, 사회적 아나키즘은 혁명을 구상하는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록 이 양자가 공통적으로 국가를 부정한다 하더라도, 진정한 아나키즘은 오직 사회적 아나키즘일 뿐이다.


III. 북친의 비판에 대한 재비판

생활양식 아나키즘에 대한 북친의 강력한, 때로는 과도하게 감정적, 인신공격적인 비판은 그에 못지 않는 격렬한 반론(예컨대, Black, 1998; Brown, 1996; Watson, 1996)을 야기하였다. 과연, Boochin의 판단처럼, 사회적 아나키즘은 개인주의 아나키즘 혹은 생활양식 아나키즘과 철저히 구별되는 것일 뿐 아니라 상호 양립불가능한 적대적 관계를 갖는 것일까? 혹은, 사회적 아나키즘만이 진정한 아나키즘이며 생활양식 아나키즘은 반동적인 아류 내지 왜곡에 불과한 것일까? 이같은 의문에 대하여, 필자는 Boochin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Boochin은 사회적 아나키즘과 생활양식 아나키즘의 차이를 과장하면서 양자간의 이론적-실천적 연결고리를 자의적으로 그리고 독단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주의와 집합주의는 그 이념적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상호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양자는 오직 가치전제에 있어서, 즉 근본원리의 우선순위 설정에 있어서 견해를 달리 할 뿐이다. 개인과 전체로서의 집합은 인과의 선후관계로서 파악될 것이 아니라 동일 현상의 다른 출발점과 다른 목표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아나키즘에 도달하는 길은 혹은 아나키즘을 실천하는 길은 여러 가지로 나뉘어 질 수 있으며(혹은,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여러 가지 길로 나뉘어 져야만 하며), 어떤 것이 보다나은 길인지는 이론적 엄밀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개별 아나키스트들의 자주적 결단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의 대상이 아닌가 싶다.

아나키즘은 그 근본적 전제로서 타율적 지배와 그로 인한 위계서열을 거부하는 사상체계인 만큼 내부의 이론적 논쟁에 있어서도, 역사구조적 필연성을 상정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어떤 절대적 타당성을 가진 주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수용하기 어렵다. 자유는 그것이 사회적 자유이건 혹은 개인적 자유이건 인간의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며, 현실적으로 인간의 선택은 선택 대상의 다양성 혹은 차이를 필요로 한다. 만약 다양한 선택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선택 즉 인간의 자유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오직 어떤 유일한 진리 그것 한가지 밖에 선택할 수 없다면,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요, 강제요, 복종에 불과할 따름이다. 차이의 선택 혹은 선택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자유에 따른 책임의 원천이며 그것은 바로 관용성에 기초한 공동체적 질서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Boochin은 이상과 같은 아나키스트의 이론적-실천적 자유원칙을 무시하고 권위적 지배자로서 아나키즘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려는 것 같다.

필자는 아래의 네 가지 차원에서 북친의 이분법적 아나키즘관을 비판하고자 한다.


1. 실존적 개인과 공동체는 공존할 수 있다.

Brown(1996)에 의하면, Boochin의 비판은 거의가 부정확한 독해에 기초한 잘못된 것이다. Brown은 자유주의와 아나키즘 간의 이론적 유사성과 차이성을 논의하려는 목적에서 개인주의를 연구한 것이지 개인주의가 아나키즘의 본질임을 밝히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나아가, 개인주의를 옹호하려는 의도로 욕망을 위해 이성을 포기하거나, 황홀경을 위해 정치를 희생하며, 상상력의 이름으로 이론적 일관성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아나키즘과 자유주의는 모두 실존적 개인주의를 지지한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경쟁적, 도구적 개인주의를 추구함으로써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반면, 아나키즘은 자발적 공산주의(voluntary communism)를 통하여 성공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실존적 개인주의는 개인은 권위나 지배관계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을 때 가장 잘 활동할 수 있으며, 또 자신의 삶을 어떻게 영위하는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간을 도구나 수단으로 보는 도구론적 개인주의와는 달리, 개인이란 존재론적으로 자신의 발전을 적절히 결정하는 자유로운 존재인 동시에 그 자유의 결과를 책임지는 존재이기도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내재하는 이중적 자유관, 즉, 시장경쟁에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자유와 개인이 자신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활용할 수 있는 평등하고도 효과적인 자유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은 때로는 아나키스트와 유사한 입장을 취하기도 하나 때로는 아나키즘을 부정하는 비일관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적 소유를 옹호하는 개인주의 아나키즘은 비록 그것이 실존적 개인주의를 공유하고 있기는 하여도, 지배와 복종을 인정하는 도구주의적 지향성을 갖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으로 비판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Brown(1996: 136-137)에 의하면, 아나키즘은 실존적 개인주의를 자발적 코뮤니즘과 결합시킴으로서 공동체 내의 개인이라는 이론적-실천적 정치학을 발전시켰다. Brown은 아래와 같이 이 같은 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1) 어떠한 권위나 권력에 의해서 구속받지 않는 개인적 자유에 대한 아나키즘의 관심은 사유재산에 대한 비판과 자유로운 공동체적 경제관계에 대한 옹호와 결합되어 있다.

2) 아나키스트 정치철학에서는 일관성 있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자유로운 코뮤니즘과 실존적 개인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3) 상호부조, 사회적 협동 그리고 자유로운 코뮤니즘적 연합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어떤 종류의 정부보다도 더욱 실존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에게 적합한 사회조직이다.

4) 실존적 개인주의는 정의의 합리화로서 경쟁과 그것이 초래하는 불가피한 불평등은 불평등한 것의 평등을 요구하는 보상적 윤리를 위해서는 포기 되어야만 한다.

5) 개인이 자결적이며 자율적인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유롭고도 자발적인 결합을 이루는 것이다.

6) 아나키즘은 자발적 공동체 내에서 개인적 자유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7) 아나키즘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적 정치이론의 실존적 개인주의가 도구적 개인주의를 비판하는 자유로운 코뮤니즘과 결합되어 있다.

8) 현대의 아나르코페미니즘은 실존적 개인주의와 자유 코뮤니즘의 융합이다.

9) 임금 및 사유재산체제는 개인들간의 자유롭고도 자발적인 결합을 위해서 포기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북친의 비판과는 달리 Brown(1996: 138)은 결코 사회적 맥락을 벗어난 채 무역사적으로 표류하는 이기적 개인주의를 주창하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왜냐하면 실존주의와 아나키즘은 모두 자유에 내포된 책임성을 필요불가결한 전제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Brown은 개인의 역사성과 사회적 맥락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성이란 인간의 창조물(human creations)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이상과 같은 Brown의 반론에 대하여 Boochin의 제자인 빌(Janet Biehl, 1996)이 스승을 대신하여 재반론을 펼친다. Biehl(1996: 143-144)은 Brown이 비록 공동체주의를 인정하기는 해도, 근본적으로는 공동체 보다는 개인의 중요성을 더욱 핵심적인 것으로 강조한다고 사실을 구체적으로 아래의 문장들을 인용하면서 지적한다:

가. 아나키스트란 개인적 자유의 핵심성을 분명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나. 아나키즘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위한 것이다.

다. 인간의 자유란 오직 개인들의 노력에 의해서만이 성취된다. 자유란 개인에게 존재하는 것이지 집단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 아나키즘은 개인의 존엄성을 위한 철학이다.

나아가, Biehl은 Brown이 논의의 철학적 기반으로 삼고있는 사르트르(Jean-Paul Srtre, 1956)와 보보아르(Simone de Beauvoir, 1967)의 실존주의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점들을 지적하므로써 Brown의 주장이 취약한 근거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요컨대, 개인을 근본원리로 간주하는 실존주의는 코뮤니즘(마르크스주의적 커뮤니즘이든 혹은 아나르코페미니스트 코뮤니즘이건 관계없이)과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상정하는 개인의 자유는 항상 타인의 자유에 의하여 위협받을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Biehl의 평가와 해석에 동의하지 않지만, 설령 Biehl의 Brown에 대한 개인중심주의자라는 평가가 정확한 것이라 해도, 그리고 Sartre와 Beauvoir의 실존주의가 아나키즘과 연결되기 힘들다고 해도, Brown이 공동체와 개인을 결합하는 가운데서 아나키즘의 진수를 찾으려 했다는 사실만은 결코 부정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개인과 사회 혹은 개인과 공동체의 상호 관계에 대한 논의는 이분법적 환원주의/대립주의에 기초한 서구의 사유체계에서 끊임없이 전개되어 왔다. 예컨대, 때로 그것은 개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논쟁으로, 때로는 개인주의와 집합주의간의 노쟁으로, 때로는 실존주의와 구조주의간의 논쟁으로 그 형태를 달리하며 지속되어 왔다. 방법론적으로도 그것은 방법론적 개인주의 대 전체주의/총체주의나 특수주의 대 보편주의 혹은 실증주의 대 역사주의 간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경직된 이분법적 사고는 오늘날 거의 불필요한 논쟁으로 간주되고 있다. 특히 후기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개인과 사회 혹은 주체/행위와 구조의 관계는 상호 규정적이며 상호 연관적(reciprocal)인 것일 뿐 양자의 인과적 선후관계나 가치론적 우열관게를 설정하려는 시도는 상황조건적(contingent)이 아니면, 무익할 분이다. 혹은 주체와 구조는 그 상호작용 (에컨대, 담론) 속에서만 의미를 지닐 뿐이며,그 의미 또한 어떤 불변의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수정되거나 변형되는 것이다.

특히 개인적 자유와 공동체적 자유가 상호 배타적이기 쉽다는 북친의 주장은 경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당위론적인 독단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자유란 구체적 실존적 개인들의 자유를 보장하고 확대하는 한에 있어서만 유의미한 것이고, 마찬가지로 개인적 자유의 보장과 확대는 사회적 자유의 틀 내에서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과 사회, 자유/자율성과 공동체적 질서는 대립적이면서 상호필연성을 갖는 상극상생의 모순적 통합관계이다. 북친이 구상하는 변증법적 자연주의 또한 이같은 모순의 통합과 통합의 모순에 기초하여 그 진보적 운동을 하게 될 뿐이다.


2. 원시주의도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갖는다.

Boochin의 원시주의에 대한 비판은 직접적으로는 반기술주의나 반문명주의와 관련된 것이나 그 근본적인 비판은 이들 사상에 내재되어 있는 반합리주의 혹은 반이성주의를 겨냥한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북친의 이성중심적 역사해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공하는 이성비판, 합리주의 비판에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근대 서구적 합리주의가 도구적 합리성의 지나친 확장에 의하여 그 기술문명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정신문화상으로 엄청난 폐혜(예컨대, 관리지배주의, 기계론적 인과주의, 무한경쟁주의 등)를 초래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북친의 사회생태학이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의 생태위기는 바로 이 기술문명주의가 야기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근대적 의미의 이성/합리성이 갖는 한계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원시주의를 선호하는 일련의 아나키스트들은 현대의 기술문명이 지니는 억압성, 착취성, 허위성, 비인간성 등을 거부하는 것이지 삶의 방편으로서 혹은 삶의 유의미한 축적으로서 기술과 문명을 절대적으로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원시사회는 원시사회 나름의 적정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탁월한 지적처럼 원시사회는 결코 야만적인 사회가 아니다. 그 사회에는 그들 나름의 사유체계와 생존방식이 존재한다. 인간의 합리성이란 근대의 산물이기 이전에 전사시대에도 상이한 논리적 사고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합리성의 기준과 목표가 다를 뿐일 수도 있다. 따라서 원시사회가 현대 문명사회보다 결코 열등한 사회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현대의 고도 기술문명사회로부터 단순사회로 되돌아 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령 가능한 것이라 해도 그 전환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것은 그야말로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원시주의 아나키스트들도 이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현대의 기술문명을 비판하는 가장 효과적인 대항의 수단으로서 반문화의 형식을 빌린 원시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농촌공동체적 삶, 후기절약경제체제, 단순화된 생활, 도덕경제, 근본생태학 등을 추구하는 경향을 감안해 볼 때, 원시주의에 대한 향수는 비록 그것이 복고적이고 낭만주의적인 한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현대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값진 시도임에는 틀림없다. 마르크스가 상정한 공산주의 사회도 어떻게 본다면 고도 기술문명의 기반 위에 설립한 원시공산사회의 재현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우리가 현대의 복합적인 기술문명체계를 유지하면서도 생태유토피아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파괴해야 만이 가능한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원시주의를 기술문명에 대한 부정으로 보기 보다는 창조적 파괴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아나키스트전략이 아니겠는가?


3. 쾌락주의는 혁명의 수단이요 목표가 될 수 있다

욕망의 충족 문제는 개인주의 아나키즘에 있어서는 가장 주요한 관심사의 하나이다. 그렇지만 사회적 아나키즘이 개인의 욕망 충족을 부정하거나 도외시한 것도 결코 아니다. 다만 현실적 조건으로 인하여, 개인적 욕망의 충족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당면한 사회혁명의 과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지니도록 요구하던 사회적 아나키즘으로서는 당연히 쾌락주의 아나키즘을 이기심에 찌든 개인주의의 표출로서 평가절하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혁명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자본주의는 오늘날 생산양식으로서 보다는 생활양식 혹은 소비자본주의로서 우리들을 현혹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역사의 변혁주체로서 노동자계급을 각성시켜서, 계급투쟁과 계급해방의 깃발아래 폭동이나 반란을 일으켜 국가체제를 전복한다는 것은 현대판 동키호테의 희극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아나키스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 Boochin처럼 자유해방주의적 지역운동(libertarian municipal movement)을 장단기적 관점을 가지고 전개할 수도 있다. 혹은 이미 Giddens(1992)가 적절히 제안하였듯이 해방의 정치로부터 생활정치로 과감히 전환할 수도 있다. 생활정치는 생활양식의 차원에서 전개되는 권력투쟁이다. 푸코의 지적처럼 권력관계는 도처에 존재하며 우리의 저항 또한 도처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아울러 저항이나 투쟁의 방식에 있어서도 과거의 혁명투사들이 보여 주었던 금욕주의적이고 일사불란하며 때로는 영웅적으로 개인적 희생을 감내하던 방식을 무조건 답습할 필요도 없다. 혁명과 축제가 어우러지고, 투쟁의 즐거움 혹은 즐거운 투쟁이 가능한 새로운 운동방식이 필요하다. 이미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이같은 운동방식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성공을 거두지 않았는가? 최근 도로건설반대운동(anti-roads movements)을 비롯한 각종의 환경운동을 시도하는 영국의 아나키스트들은 비폭력 직접행동(non-violent direct action)을 통하여 집단적 투쟁과 개인적 정체성의 확보 그리고 투쟁의 생활양식화 내지 생활양식의 투쟁화를 성공적으로 결합하고 있다(Hart, 1997).

이점에 있어서 쾌락주의 아나키즘은 하나의 운동방식으로서 진지하게 개발해 볼 가치가 있다. 어차피 인간을 욕망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인간을 구속하는 욕망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나키즘의 목표라면 목표와 수단을 일치시키는 쾌락주의 아나키즘은, 그것이 쾌락을 위한 쾌락추구라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는 한, 아나키즘의 대중적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적극적인 수단으로 고려될 수 있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희구하는 아나키스트사회가 성립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즉, 필요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에서 그 필요란 인간의 욕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혁명후의 사회가 즐거운 사회이고, 혁명의 과정이 즐겁다면 그리고 혁명의 수단이 즐거울 수 있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혁명의 대열에 동참할 것이다. 반쾌락주의는 언제나 인간을 억압하는 지배집단의 위선적 도덕강령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욕구의 해방을 추구하는 쾌락주의는 분명히 인간해방과 사회해방에 필요한 주요한 이념적 무기이다(Greenway, 1997). 아나키즘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고통 보다는 쾌락의 증진을 요구하며, 이를 위하여 적합한 기술과 수단을 충분히 활용한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쾌락주의적 측면을 보유한다(Purkis and Bowen, 1997: 2). 물론 이 쾌락주의는 개인적 행위에 있어서 투철한 책임의식에 의해서 인도되지 않으면 안된다. "사적인 것도 정치적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페미니스트의 구호는 성적 해방과 성적 평등의 정치학이 개인적 수준에서도 구현될 수 있음을 웅변으로 지적하고 있다.


4. 동양적 초월주의(Asian transcendentalism)를 동양주의(Orientalism)로 보아서는 안된다.

Boochin의 사상 중에서 아마도 가장 취약한 혹은 가장 불미스러운 부분은 그가 동양사상(특히 불교나 도교)을 근거없이 폄하하고 왜곡하는 부분이다. Boochin은 동양적 세계관에 의존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적 실천에 있어서 보수적이 되어 버릴 수 있다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현 시점에서 사회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동양적인 세계관 속으로 무분별하게 도피하는 것은 과거 동양의 전제정치를 다시 불러 오거나 현재의 삶의 양식을 과거 농업시대의 수준으로 돌리자는 발상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Boochin은 아나키스트 담론을 동양적 신비주의와 결합시키려는 시도들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점에 관한 한 Boochin은 그야말로 사이드(Edward W. Said)의 오리엔탈리즘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서구중심의 보편주의에 빠져있는 것 같다. 아래의 인용문들은 Boochin의 편견 혹은 절반의 진실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1) 두 번째의 잘못된 오해 또는 공통된 질문은 생태담론이동양적인 사유체계에서 비롯된다는 발상이다. 동양사상의 자연관(천도, 이기)이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조화를 전제로 하며 세계에 대한 인식이 근대적 이성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는데 명상과 같은 수양론의 상이한 방법론, 즉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절대적 관점 보다는 상대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 등에 있을 것이다(Boochin, 1995: 239).

2) 우리는 미국의 히피집단과 태평양 연안의 종교사원을 통해 다시 재등장하고 있는 이교도나 도가, 불교의 신비주의와 같은 아시아 종교의 철학과 감성으로 숨어들어선 안 된다. 이보다 인간은 생물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합리적인 주체로 재인식되어야만 한다(Boochin, 1995:131).

3)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서구의 (정적-분석적-실증주의적 논리에 대비되는) 유기체적 전통이 동양의 전통보다 오늘의 상황에 보다 더 건강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공허하고 비늘로 덮힌 동양의 심장...서구전통에서 오랫 동안 진행되어 온 논쟁들은 철학자들을 동양이 한번도 충분히 대처해 보지 못한 중요한 문제들에 관여하도록 하였다(Boochin, 1995: 138).

4) 서구의 유기체론적 전통은 동양보다 충격에 더 잘 버틸 수 있다. 일원론, 이원론, 환원주의, 변증법 때로는 이들간의 적대적 관계의 문제들이 동양 보다 더 명료하게 서구에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피노자와 헤겔에게서 표출되었고, 대결되었다. 오히려 동양에서는 이러한 생각들이 덧없는 공허함이나 신비주의적인 외형을 가지는 경향이 있었다. 만일 나의 접근법이 너무 지나치게 유럽중심적인 것처럼 보인다면, 나는 독자들에게 아시아의 중심성은 더 큰 고통과 해악을 줄 수 있음을 경고하고자 한다(Boochin, 1995: 140).

5) 동양의 현인들이 심오하게 사유하고 느꼈다는 사실이 '그들의 저서가 모호하다'는 비판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주진 못한다. 노자의 도덕경은 농민들이 자연의 곡물들을 다루는 길로서 읽혔을 뿐 아니라 엘리뜨들이 농민을 통제하는 안내서로도 읽혔을 수 있다....사회적으로 도덕경은 전제주의에 대해 농민들이 전혀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사적 분위기를 제공하였다. 도가의 우주관은 중국사회를 파편화하여 이에 위계질서를 부여하였으며 나아가 이 질서를 변화 없는 상태로 유지시켜 주었다...도가도 역시 농민집단을 선택과 이주의 자유가 없고 빈곤 극복의 방법도 알지 못하며 이 죽음의 소굴에서 벗어 나겠다는 희망조차 갖지 못한 사회집단으로 간주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Boochin, 1995: 144-145).

6) 자연이데올로기의 사회적 기원을 연구하고 그 논리를 탐구하는 사회생태론의 관점에서 보면, 도교가 장려하는 자연에 대한 수동적 자세는 마치 서구 자연철학이 엘리뜨들의 현상 유지에 기여하거나, 혁명세력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것처럼 쉽게 사회로 전이될 수 있다(Boochin, 1995: 146).

이상과 같이, Boochin의 동양사상에 관한 논의는 아나키스트로서는 예외적이라 할 만큼 무지한 동시에 가혹하다. 우선 동양사상은 Boochin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니요, 수동적인 것도 아니며, 현실 도피주의나 현실 합리화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다. 도가나 불가의 교리는 혁명운동의 이념적 기초가 될 수도 있으며, 일반 민중이 정치적-사회적으로 각성하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도 있으며, 적극적인 사회개혁의 지침서가 될 수도 있다. 나아가 도가가 상정하는 이상사회는 바로 아나키스트가 추구하는 이상사회의 원형을 제공하는 것이며, 불가의 자연친화적인 우주관은 현대 생태주의적 세계관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다만, Boochin이 주창하는 변증법적 이성을 신뢰하고 변증법적 자연주의에 입각하여 인간/인본중심주의를 주창하는 그의 생태주의와는 상이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는 Boochin에게는 동양적 조화는 동양적 정체성으로 간주되고, 동양적 지혜는 전제주의의 길잡이로만 여겨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숱한 서구의 성현들은 서구적 야만, 빈곤, 억압과 차별, 제국주의를 방관하지 않고 혁명이념을 전파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역설적으로, Boochin은 그 자신이 인정하듯 오늘날 생태파괴의 주범인 서구중심적 보편적-환원적 분석논리에 얽매어 있을 뿐이다. 자유를 시대별로 구분하고(자연적인 내용을 갖는 신화시대의 자유, 사회적인 내용을 갖는 계몽과 이성시대의 자유, 윤리적 해방적인 내용을 갖는 혁명시대의 자유), 자연을 몇가지(1차자연, 2차자연, 자유자연)로 쪼개고, 이성을 좋고 나쁜 것(도구적 이성과 변증법적 이성)으로 가르는 식의 분석적 환원주의는 생태적 유기체성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한 인과논리인 것 같다.

Boochin이 주창하는 참여적 진화로서의 자연 개념이나 유기체적이고 발전적이고 변증법적인 진화과정의 개념은 이미 동양사상에서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세계, 모든 것이 가능하면서도 불가능한 세계가 바로 동양의 세계관이다. 다만 동양의 자연은, Boochin의 생각과는 달리, 반드시 발전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발전이란 어떤 인위성을 가정하기 때문에 너무나 비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Boochin은 동양과 서양사상의 섯부른 절충주의를 경계한다. 그러나, 두 개의 사상이 어떤 의미에서건 절대적 우월성이나 타당성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면 양자의 관련성을 통합적으로 인식해 보려는 시도는 충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북친의 자유 개념이 선택과 윤리를 그 핵심적 원리로 간주하는 것이라면,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차이는 주어진 선택의 문제인 동시에 세계사상의 모색이라는 윤리적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IV. 사회적 생활양식 아나키즘(Social Lifestylist Anarchism)을 위하여.

세상은 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나키즘도 과거의 탈을 벗고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구의 아나키즘은 한국의 토양에 적합도록 창조적 파괴를 통하여 수용되어야 한다. 사실, 현대 아나키즘은 오래 전부터 새로운 이론적-실천적 전기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 혼돈이론, 생태주의, 페미니스트운동, 후기구조주의 등의 조류에 민감하게 대처하고, 신속하게 적응함으로써 새로운 이념적 지평을 개척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아나키스트들간의 이론적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유발될 것이다. 이 경쟁이 상호파괴가 아니라 각자의 자기발전의 전기가 된다면 아나키즘은 더욱 풍부하고 다양하게 성숙할 것이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보다 자유롭고, 보다 나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원한다. 우리들은 다만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에 관해서 의견을 달리할 뿐이다. 이같은 차이점들은 창조적 종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격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아나키스트는 다양성 가운데서도 통일을 추구하면서 미래를 개척해야 할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하여 필자는 생활양식 아나키즘과 사회적 아나키즘은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나아가 모순적 통합을 이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Boochin의 이분법적 단죄론은 지나치게 일면적이요, 결정론적 경직성을 갖는다고 비판하였다. Boochin의 이 같은 편향성은 그가 여전히 서구중심적이요 인간중심적인 이성/합리주의에 근거하여 우주와 세계 그리고 생명과 사물을 분석적 차원에서만 해석하려는데서 연유한다고 본다. 이 같은 접근 방식은 오직 일면의 진실만을 가질 뿐이다.

서구적 분석주의는 동양적 전체주의 혹은 통합주의에 의해서 균형을 잡아야만 한다. 어쩌면 동양적 직관의 논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현대 한국의 위대한 아나키스트였던 하기락(1993: 174-179)에 의하면, 우리 한국의 시조 檀君은 우주현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한 결과 태양의 양기(천)와 지구의 음기(지), 이 양자의 상호작용에서 만물이 발생하는데 이 천지간의 중화력을 대표하는데서 인간의 정신력(인)이 생겨난다는 天一地一人一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天 經에서도 人中天地一(사람 속에서 천지가 합일한다)며, 一始無始一(일은 시직이 없는 일에서 시작한다)요, 一終無終一(일은 끝이 없는 일에서 끝난다)라는 현현묘묘한 우주의 존재론적 생멸법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는 신채호 선생이 발굴한 상고시대 조선의 사상으로부터 면면히 흐르는 弘益人間의 정신을 주체적으로 구현하는 한국아나키즘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서구의 분석주의가 해체한 개인과 사회를 다시 통합시키는 것이 우리의 우선 과제가 아닐까?

(1) 신채호(1982: 26)는 우리나라의 지식인사회가 사상적으로 주체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크게 통탄하였다: "우리 조선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외래사조에 대한 비판적, 창조적, 그리고 주체적 수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2) 문순홍(241)은 북친의 사상이 아래와 같은 점에서 아나키즘과 유사함을 인정한다: (1) 국가와 종교의 권위와 위계질서를 강력히 거부한다; (2) 사회는 국가에 의해서 위로부터 조직되어서는 안 되고 개인과 지역의 다양한 필요에 상응하여 밑으로부터 조직되어야 한다; (3)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거부한다; (4) 시장경쟁에 필요한 개인주의적인 경제적 자유만이 아니라 사회적 자유를 추구한다; (5) 직접민주주의를 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순홍(242-243)은 북친의 사회생태학을 에코생태론(242)으로 호칭하기를 주저한다. 왜냐하면 북친을 무정부주의자로 규정하는데 따르는 불필요한 비판을 회피하고, 이미 퇴색한 무정부의주의로써 그의 새로운 사회생태론을 담을 수 없다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친 자신이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춰 볼 때 문순홍의 자상한 배려(?)는 아나키즘에 대한 편견과 무지의 소치가 아닌가 싶다.

(3) 아나키즘의 이론사에 있어서 개인주의와 집합주의의 전개와 관련된 보다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Marshall(1993)을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