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교사들 모임 두번째


갈대        

        신경림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책 사랑방 두번째 모임 / 2008년 4월 3일 나무날 늦은 7시-9시30분
해오름 몸살림방에서   www.heorum.com


위험사회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울리히 벡 Ulrich Beck 지음 / 홍성택옮김 / 새물결

울리히 벡 교수가 2008년 3월 31일 서울대 문화관 중강당에서 ‘위험에 처한 세계: 비판이론의 새로운 과제’를 주제로 공개강연을 하고 있다.

목차  
역자 서문 - 이 위험 가득한 풍요의 시대에!
서문 성찰적 근대화 / 위험의 문제
머리말
제1부 문명의 화산 위에서 살아가기 : 위험사회의 윤곽
제1장 부의 분배논리와 위험의 분배논리
제2장 위험사회와 지식의 정치
제2부 사회적 불평등의 개인주의화 : 생활형태들과 전통의 사망
제3장 지위와 계급을 넘어서?
제4장 '나는 나' : 가족 내부 및 외부의 성별화된(gendered) 공간과 갈등
제5장 개인주의화, 제도화, 그리고 표준화 : 생활상황과 생애
제6장 노동의 탈표준화
제3부 성찰적 근대화 : 과학과 정치의 일반화에 관해
제7장 진리와 계몽을 넘어선 과학?
제8장 정치적인 것의 개막

1. 글쓴이 울리히 벡 교수는

1944년 독일 슈톨프 출생. 위르겐 하버마스, 앤서니 기든스 등과 함께 현대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회학자이다.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사회학·철학·정치학을 수학하였으며 뮌헨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뮌스터 대학과 밤베르크 대학 교수를 거쳐서 현재는 뮌헨 대학의 사회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86년 『위험사회』란 저서를 통해 서구를 중심으로 추구해온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이 실제로는 가공스러운 '위험사회'를 낳는다고 주장하고, 현대사회의 위기화 경향을 비판하는 학설을 내놓아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90년대에 들어와서도 벡이 일관되게 추구해 온 작업은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근대 혹은 그가 말하는 ‘제2의 근대’로 나아가는 돌파구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의 저서로는 『위험사회』이외에도『세계화란 무엇인가』와 『정치의 재해석』 등이 있다. 1992년에 첫 출간된 저서 『위험사회』는 위험에 대한 사회학적 개념에, 그리고 보다 넓게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 리뷰 /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아픈 성찰

1.
과학은 진리다. 과학은 중립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 내면엔 이렇게 신념화되어있다. 법하고 다르며, 정치하고 다르다고, 경제하고 다르다고 한다. 신화에 가깝게 세뇌되어있다. 지독한 성장만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겐 더욱 더. 하지만 과학사를 보면 성공의 역사가 아니라 실수와 실책의 역사이다. 온갖 실수-실패가 역사를 바꾸어놓았고, 진리라고 여긴 것이 어김없이 진리가 되지 않았다. 사고의 범주 안에서만 진리였다. 그런데 거꾸로 왜 자꾸 그런 실패 덩어리를 가치중립적이고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산업과 생산만 품에 넣은 과학은 일정정도만 진리였다. 그것이 태생적 결점을 갖고 있음에도 교조화 되고 그릇된 믿음은 지나치게 분야별로 자가발전하게 되었다. 분야와 분야가 섞이는 부분의 위험, 증명이 되지 않은 진리는 여전히 보유한 채로 말이다.  이런 일차적 과학화는 그 토대인 이론, 방법, 기초, 응용적인 측면에서 검토되지 않았다.
이렇게 그 과정에서 감내된 위험은 자신의 우물을 깊게 파면 팔수록 타분야의 자장에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 회의주의, 실수와 위험의 증폭. 성찰적 과학화가 필요하다.  신화의 뿌리가 어디에서부터 연유했는지? 그 뿌리가 사회 구성적 자양분을 흡수할 때만, 사회적 의제를 함유한 방법, 접근법, 지향에 대한 고민이 뿌리깊이 공유되어야만 인간다워질 수 있고, 새로운 출발과 연구분야가 생겨나게 된다.
증명이 되지 않을 때까지 안전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평가되지 않으면 금기지대를 설정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평가되도록 전문가를 경쟁시키는 시스템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그제서야 과학에 새로운 활동과 영역이 생겨날 수 있다. 일차적 과학화는 너무 비참한 말로를 예견한다. 내분야는 위험하지만 위험저지선 안에 있다는 사고가, 위험한 것이 수평적으로 증폭되면 어이없는 일이 벌어짐에도 지구의 모든 생명을 대상으로 한 투기를 하고 있다. 브레이크 없는 과학이 선봉장을 하면서 말이다.


리뷰 3. 위험사회

위험사회는 근대성의 한계지점에서 시작한다. 근대성은 세계를 인간의 통제 범위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과정이었지만 파편화, 불확실성, 전통의 일소 등 탈근대적 특징들은 개인에게 세계에 대한 통제와 예측이 어려운 일로 느껴지게 한다. 선택적인 전달을 특징으로 하는 매스미디어는 이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감을 확대 재생산하여 실질적인 위험으로 느끼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기존 사회에서 위험 예측과 통제를 맡았던 과학은 이 과정에서 가치를 의심받게 된다. 과학은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예측과 분석을 내놓고 있으며, 다만 개연성의 수준 차이를 포함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문제는 미디어의 속성상 이 다양한 의견들이 수렴, 정리되는 것을 기다리기 보다 이들을 즉각 보도함으로써 과학 역시 혼란스러워 한다는 이미지를 전달해 위기감과 과학에 대한 불신감을 증대시킨다는 점이다. 이들 경향은 과학 기술의 발전 결과에 대한 불안에 불을 지피는데 일조한다.
따라서 과학의 진보와 세계화와 같은 급격한 사회변동을 경험하면서 인간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지만 통제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되고, 점점 더 스스로를 제약하고 수동적으로 변한다. 이는 실질적인 위험의 증가 문제임과 동시에 과장된 공포문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울리히 벡은 사회변동과 위험사회 개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현대사회는 불확실성과 그것이 초래한 위험이 전지구적 환경의 수준에서 작동되는 위험으로 특징 지워진다 라고 말한다. 개인들은 남을 앞서는 성공보다는 이러한 위험을 피해 안전을 추구하는 일에 중점을 두며, 따라서 안전의 추구가 사회의 중요한 목표가 된다. 사회가 마주칠 이 위험은 계급과 무관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사회는 계급적 성격이 줄어든다. 너무나 복잡한 상황 속에서 개인은 사회로부터 제약을 덜 받지만 동시에 사회적 삶은 개인을 심리적 측면에서 상당히 제약한다. 불안감은 과학과 기술을 의심하면서도 의존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개인화 과정과동시에 개인들의 제도에 대한 의존성향이 증대된다는 것이다.
벡이 사회적 정체성에 중점을 둔 것에 비해 앤서니 기든스는 개인의 자아성찰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과학과 기술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사회에서의 감시, 전면전의 출현, 경제변동의 불확실성, 자본주의가 유발하는 생태적 위기 와 같은 잠재적(상당부분은 이미 현실적)인 위험을 준다고 보았다. 사회 변동의 예측 불가능성은 위험을 준다. 개인은 예측불가능성 속에서 스스로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현대에는 고정된 판단준거를 찾기 힘들기 때문에 개인은 끊임없이 기회와 위험에 노출된다. 위험이 과거보다 증가한 것이 아니라 위험이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이 보다 심대해진 것이다. 사회변동에 의한 예측불가능성과 이를 증폭시키는 매스미디어에 의해 위험의 현실에 압도된 개인은 끊임없는 선택과변화의 필요성을 느낀다. 따라서 자아는 하나의 성찰적 기획이 되며 위험은 사회구조와 행위자 사이의 상호 재생간 관계를 조절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구사회로의 전환은 개인을 지역공동체의 구속에서 해방시켰지만 동시에 전통적 형태의 보호와 지원에서도 유리시켰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위험이 어떤 것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할 수는 없게 되었다. 메리 더글러스는 이에 따라 "위험은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태’가 아니라 사회 변동에 대한 모종의 사유방식"이 된다고 말한다. 위험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그 위험에 대한 고찰과 개선노력을 할 수 있다. 또한 위험 담론들은 개인과 개인의 권리보호에 관한 것이 되기 때문에 공동체보다 개인의자유가 정치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데 기여한다.
이런 위험사회 속에서 자라온 젊은이와 자라고 있는 어린이들을 보면 위험사회가 사회적 삶에 미치는 영향을 알기 쉽다. 젊은이들은 고도 근대성의 진행으로 전통적 사회 후원의 형태가 붕괴된 다양한 위험과 기회 속에서 성장해 위험의식이 강하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택항은 너무도 많기 때문에 이들은 무한에 가까운 길 속을 홀로 걷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따라서 자신이 겪는 위기를 개인적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다. 이러한 개인화는 자신의 행위를 비추어 볼 기준을 상실하고 점점 더 세계에 대한 통제감을 잃도록 만들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실질적인 위험은 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지만 위험에 대한 주관적이고 문화적인 인식은 증대된다.
젊은이들은 변형된 노동시장, 지구화된 경제 등 위험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스스로 알아서 하기’라는 성찰적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을 강요 받고, 이런 위험(의 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음주, 약물복용 등의 위험한 행동이나 가상현실로의 도피를 시도한다.
어린이들 역시 똑같이 위험사회의 불확실성에 위협받고 있지만 이것은 조금 다른 차원이다. 어린이들에 대한 과다한 보호담론은 미디어가 과장하는 위험수준에 의지한다. "어린이들의 자율성과 세계에 대처하는데 필요한 기술을 발전시킬 기회를 제약한다"는 점에서 이는 위험사회의 또 다른 결과물이다.


4. 리뷰 / 위험사회, 울리히 벡(Ulrich Beck)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이 책은 산업사회의 '성찰적 근대화'에 대한 저술이다. 고전적 산업사회에서는 '부(富)를 생산하는 논리'가 '위험을 생산하는 논리'를 지배했다면, 위험사회에서는 이 관계가 역전된다는 것이 그 논점이다."(제1부)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현대 산업사회의 특성을 '위험사회(risk society)'라는 너무나도 적절한 용어로 정의하고 있다. 울리히 벡이 이야기하는 위험은 '눈앞의 위험'이라기보다는 '직접 감지되지는 않는 위험'이다. 직접 감지되지 않는 것은 예측하기 어렵고, 이는 불안감을 낳는다. 정말 위험한 것은 이 불안감이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주장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현대 산업사회가 무모한 모험(risk)을 체계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기(前期) 근대에서 모험은 부(富)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부수적 요인이었지만, 후기(後期) 근대로 가면서 '체제 자체가 무모한 모험'인 시대가 되고 말았다. 근대 초기의 무모한 모험은 '용기와 생산성'을 뜻했으나 후기 근대의 모험은 '모든 생명의 자기 파멸의 위협'을 의미한다. 울리히 벡은 이러한 위험은 과학 기술과 이에 기반한 군사-경제력에서 초래된다고 지적한다.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인간 호르몬 체계의 변동 등을 초래한 근대적 전문가체계·과학기술문명은 체계적으로 위험 상황을 생산해내고 있다.

"생산력은 근대화 과정에서 그 순결을 잃었다. “
초기 단계에서 위험은 '잠재적인 부수효과'로 합법화될 수 있다. 위험이 지구화됨에 따라, 그리고 공적인 비판과 과학적 탐구의 주제가 됨에 따라 위험은 말하자면 벽장에서 나와 사회적-정치적 논쟁에서 중심적 중요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위험의 생산과 분배 논리는 이제까지 사회-이론적 사고를 결정했던 부의 분배 논리와 비교하여 (더 빨리) 발전된다. 식물과 동물과 인간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위협임이 밝혀진 근대화의 위험과 결과가 주된 위치를 차지한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공장이나 직업에 관련된 위해와는 달리, 이 위험은 더 이상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한정되지 않으며 국경을 넘어서서 생산 및 재생산 전체에 퍼져가는 지구화의 경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이 위험은 새로운 유형의 사회-정치 동력을 지닌 초국가적이며 비계급 특징적인 지구적 위해를 낳는다."(제1장)
울리히 벡의 주장은 '근대성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사회의 해체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구성해야 한다. 풍요 사회를 향한 근대화 과정이 위험 사회로 귀착한 과정을 되짚어보고, 산업사회 언어의 핵심이었던 '부의 분배'를 '안전과 위험(의 분배)'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적 위험은 경제적 사회적 계급이 높고 낮음과 무관하다. 위험을 생산하는 자와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사람들에게 동시에 타격이 가해진다는 말이다.
울리히 벡의 가장 유명한 명제 중 하나인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는 표현을 잘 생각해 보자. 이 위험은 기존의 계급 및 국가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생태 재해와 원자 낙진이 국경을 무시하듯 근대적인 위험은 기존의 계급 경계도 무시한다.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안전한 장소에서 살기는 어렵다. 위험사회는 그런 의미에서 '전 지구적'이고 부메랑 효과를 지닌다.
계급사회의 동력이 "나는 배고프다!"에서 시작했다면, 위험사회에서는 "나는 두렵다!"는 불안에서 시작한다. 위험사회에서 사람들이 겪는 불안에 대한 공동체험은 계급사회에서 사람들이 겪었던 결핍의 공동체험을 대신한다. 이것은 단순한 '대체'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를 움직이는 내적인 동력에 변화를 일으킬 새로운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불안에서 비롯된 유대가 어떤 행동으로 조직화할 것인지는 아직 잘 보이지 않지만 불안이 위험사회의 변화를 시도할 동력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일국의 국경과 계급의 변경을 넘어선다. 전 지구적 공론과 연대의 장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산업주의에 고유한 전통성의 구성요소들은 산업사회라는 건축물 내에 다양한 방식으로―계급 핵가족 전문직과 같은 유형으로, 또는 과학 진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방식으로―그 이름을 새기지만, 그 기초는 성찰적 근대화 과정에서 무너지고 해체되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 과정에 의해 야기된 시대적 동요는 근대화가 위기에 처한 결과가 아니라 성공한 결과다. 그 자신의 산업적 가정과 한계에 대해서조차 성공적이다. 성찰적 근대화는 근대성의 감퇴가 아니라 증진을, 고전적인 산업적 틀의 경로와 범주에 대항하여 급진화된 근대성을 의미한다."(제6장)
울리히 벡을 포함한 성찰적 근대론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위험사회가 새로운 정치적 잠재력을 생산해낼 가능성이다. 새로운 정치적 잠재력은 위험에 관한 대중적 인식을 통해 비로소 구현된다. 위험에 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서는 위험의 기원 및 확산을 다루는 사회과학적 이론과 현상을 분석하는 자연과학자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비정치적으로 여겨지던 것이 실은 정치적이었음을 밝혀내는 작업도 포함돼야 한다.
이는 근대를 주도해온 과학이 확립한 '위험을 산정하는 방법'을 폐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자와 전문가, 그리고 대중매체 관계자는 새로운 목표와 관계 설정을 통해 이러한 위험 상황을 정의해야 한다. 거대한 풍요를 이룩한 근대 산업사회의 원리와 구조가 파멸적인 재앙의 사회적 근원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들의 협동작업이 필요하다.
반성의 대상은 '오늘날 환경 위기로 대변되는 산업사회적 위기를 낳은 과학(기술주의)적 합리성'이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문제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문제를 풀어가는 도구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성찰적 근대론자들이 제시하는 문제의 해결책은 '그동안 편협한 합리성에 매몰되었던 과학기술을 이제는 사회의 장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적 지식 생산의 과정을 공개하고 공공화 하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과학기술 시대의 재앙은 일부 전문가 집단과 권력집단(국가나 기업 등)이 지식을 은밀하게 생산하고 독점적으로 활용한 데서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이 자신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믿는 데서 비롯되는 정서적 힘에 기반하여 연구에 몰두해왔다. 그동안 객관적이고 비정치적인 연구를 수행한다고 생각해온 과학기술자는 실은 매우 정치적인 상황에서 매우 정치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핵이야말로 가장 분명한 사례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과학기술자들은 진보 또는 객관성이라는 이름 아래 군사력과 정치권력, 그리고 얼굴 없는 자본의 세계와 야합해왔다. 과학기술적 지식 생산의 전 과정이 사회적으로 노출되어 공론화된 적이 없었으며, 이런 제도가 현재의 위기상황을 만들어내는 주 원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울리히 벡은 '사회적 합리성을 간과한 과학적 합리성'이 아니라 '사회적 합리성을 가진 과학적 합리성'이 주도하는 과학기술을 만들어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공중(public)이 과학기술적 지식 생산에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면,다시 말해서 현대 과학기술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그 한계까지도 함께 인식한 상황에서 과학기술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상황은 반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이런 상황을 극복해갈 방안을 갖고 있는가?
후기 근대에 체계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위험성은 일반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전문가집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딱히 위험사회에서 전문가가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위험에 대한 인식은 자연과학과 인문예술의, 전문가집단과 시민사회의, 그리고 이해관계와 현실의 새로운 만남에 의해 결정된다. 위험의 결정에는 학문 분과, 시민집단, 공장, 정부와 정치 사이의 끊임없는 협상과 열린 논쟁의 과정이 따를 것이다.
여기서 가장 시급한 것은 '합리성에 대한 과학의 독점을 깨뜨리는 것'이다.


5. “자유시장의 적은 투기적 시장 그 자체” (최근 신문기사 )
‘위험사회’ 지은이 울리히 벡 교수 서울대 강연 (2008년 3월31일)
  

현대적 재앙 특징은 ‘계산 불가능·배상 불가능’
배제된 지대와 함께 하는 세계시민정치 제시

신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현대 사회이론에 ‘위험’(risk)이라는 요소를 각인시킨 기념비적 저작 <위험사회>로 널리 알려진 울리히 벡(64) 뮌헨대학·런던정치경제대학 교수에 따르면 “자유시장체제 단 하나의 적”은 “민주주의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떨쳐버리고 단기이득의 극대화라는 공리만을 좇아 작동하는 고삐풀린 자유시장체제 그 자체”다.
지난 29일 한국을 처음 방문한 벡 교수는 31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주관한 제17회 ‘서남초청강좌’에서 ‘위험에 처한 신자유주의적 세계-비판이론의 새로운 과제’를 주제로 강의를 했다. 그는 “국가적이고 지구적인 투기장에서 정치학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선택지가 존재한다”며, 그것은 “시민사회를 국가와 연결하는 것이고 이는 국가와 같은 세계시민적 형태(유럽연합과 같은)를 생성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고삐 풀린 투자가 전지구적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시장을 불안정하게 만들지만, 종국에는 자고 있는 소비자 거인이 깨어나 세계화된 자본을 무력화하고 국가와 시민운동의 힘을 키우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벡 교수는 기후변화가 단지 허리케인, 가뭄, 홍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며 “그것은 갑자기 그것 이상의 것이 되었다”고 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모든 인류를 위협하는 하나의 미래가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살아남고 싶다면 우리는 배제당한 사람, 문화, 민족, 종교, 지역 등을 모두 끌어들여야 한다. 기후변화의 정치는 필수적으로 포괄적이고 지구적이다. 그것은 세계시민적인 현실정치다. 국가적 현실정치가 여전히 지배적이지만 그것은 퇴보하고 있으며 효력을 잃어가고 있다.”
벡 교수는 현대사회의 토대를 흔들고 있는 지구적 위험들과 재난들의 세 가지 특징적 요소들로 △탈지역화 △계산 불가능성 △배상 불가능성을 들면서, 환경파괴(기후·생태변화)와, 1929년 대공황 이상의 파국적인 금융실패를 부를 위험에 노출된 세계경제, 테러를 그의 ‘세계 위험사회 비판이론’의 중심에 놓는다. 그는 서구 근대의 성공이 초래한 이런 지구적 위험들이 새로운 대응을 낳고 이는 결국 자유를 위태롭게 만들고 국제정치의 현존 형태들과 동맹들의 기초를 소멸시킨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새로운 정치철학을 요구하고 기존질서 내의 모든 전제들을 재협상하도록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세계시민적 현실정치’다. ‘비판이론의 새로운 과제’란 바로 국가와 지역 차원을 넘어선 이 세계시민적 현실정치(‘코스모폴리탄 정치’)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것이다.
벡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생태자본주의가 탄생 단계에 와 있다”며 위험을 비관적으로 보지 말고 그 위험구조를 들여다보고 선택할 것을 권했다. 그는 또 세계의 미래를 예상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면서도 “재앙에 맞서 모든 노력을 쏟는다면 돌파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부인 엘리자베스 벡-게른샤임 교수(사회학)와 함께 온 그는 1일엔 서울대에서 전국 대학의 교수 10여 명과 함께 발표하고 토론하는 전문가 워크샾(‘위험사회와 성찰적 근대화’)에 참석하고 2일엔 경희대에서 공개강연(‘위험사회를 넘어: 코스모폴리탄 근대성 이론’)과 국제심포지움(‘위험사회를 넘어: 동아시아로부터의 성찰’)을 연다. (출전/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2008년4월1일)


6. 대담 / “대운하 갈등, 한국사회 근대화 성찰의 계기 되길”

사회학자 울리히 벡-박미애 대담

방한 중인 <위험사회>의 저자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는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추진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사회적 갈등이 공개적으로 표출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것을 삶의 질을 높이는 성찰의 계기로 삼으라고 권했다. 그는 물었다. “과연 더 크게 더 빨리 발전하는 것, 경제 성장만이 중요한 것인가?”
벡 교수는 지난 1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박미애 박사(사회학)와 대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벡 교수는 ‘위험’은 기피대상이 아니라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화의 도구, 성찰의 의미를 지닌 것이라며 정치적 행위를 유발하는 위험의 ‘연출’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운하 문제를 그가 말한 위험의 정치화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을까?

시멘트로 압축된 근대화, 충돌하는 가치들, 공존 속 크고 빠른 성장만 부각돼
‘위험’은 정치화의 도구 대운하-식수문제 연결 땐 사회 근본갈등 드러날 것

박미애(이하 박): 한국 방문은 처음인데, 당신을 유명하게 만든 개념으로 말한다면, 당신은 극동지방으로 여행와서 다른 문화와 대면하는 위험을 감수했다. 여기 서울에서 자신이 세계시민인 것처럼 생각되는가, 아니면 문화적 차이를 느끼는가?

울리히 벡(이하 벡): 내가 한국에 온 것은 한국이 해온 근대의 대단한 실험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독일 등 유럽이 150년간 한 일을 한국은 단 30년 만에, 한 세대 만에 이룩했다. 한 마디로, 압축된 근대화다. 한국에 온 지 사흘밖에 안 되는 ‘3일 전문가’이지만, 고도로 근대화된 가운데서도 차이점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유럽에서는 여전히 근대는 연속적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한국에서는 서로 다른 근대화의 단계들, 제1 근대화, 제2 근대화, 독재, 전통 등 가능한 모든 형태의 근대가 짧은 시간 안에 서로 충돌하고 공존하는 사회인 것 같다. 이것이 놀랍고 흥미롭다. 공항에서 나오면서 한국이 큰 건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큰 건물, 고속도로와 마천루들. 한국은 시멘트로 자신의 비전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근대에 대한 한국적 비전의 실현인 것 같다.
독일 뮌헨은 2차대전 후 85% 파괴되었지만, 그 뒤 복원되었다. 뮌헨은 고전적 근대라는 전통의 면모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최신 근대의 강력함과 높은 역동성이 실현되어 있는 것 같고, 이것이 다른 내용과 다른 성격을 부여하는 것 같다.

박: 성찰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인가?

벡: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근대화에는 항상 어두운 측면이 따르기 마련인데 근대화의 부작용들은 지각되지 않고 무시되며, 주민들의 큰 저항을 부르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한국에서 강연하고 토론하면서 특이하게 느낀 것, 그리고 또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위험사회라는 개념이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고 또 한국사회를 서술하는 도구로 사용되지만 정치적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험은 정치화의 도구다. 위험이란 내게 정치화의 의미, 사회를 정의하는 의미, 성찰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박: 당신은 세계화를 찬성하는 쪽이다. 세계화가 좁은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 국제적 상호협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치적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나?

벡: 좀 더 세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종류의 세계화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세계화, 신자유주의는 실수를 했다. 왜냐하면 세계화의 정치적, 문화적 차원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자명하게 생각하는 국민국가적 틀을 뒤흔들었으나 다른 대안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계화와 세계주의(Kosmopolitismus)를 구분해야 한다.

박: 경제적 세계화로 중산층의 수입은 줄어들고 다국적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하고 있다고 당신은 <디 차이트>지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세상이 시간, 공간적으로 축소되면서 전대미문의 새로운 위험이 발생한다. 사회가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을수록, 이런 위험을 꿰뚫어보기는 더 힘들다.

벡: 위험은 재앙 자체가 아니라 재앙을 예견하는 것이다. 이런 재앙에 대한 예견은 우리가 경험하는 구체적 재앙으로 바뀔 수 있다. 예컨대 테러는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나지만, 그것이 파생시키는 테러에 대한 예견은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금융위기도 그렇다. 위기가 지배적 현상이 되면 위험사회라 할 수 있다. 위험의 지배력은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제도들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근대화의 빠른 속도, 성공은 환경문제, 금융위기 등을 만들어내지만, 우리가 발전시킨 제도들만으로는 여기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주민들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불안감이 커진다.

박: 오늘날 우리는 세상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일을 즉각 경험한다. 9·11 테러 영상을 처음 본 이후, 우리는 테러 위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걸 안다. 당신은 새 책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연출’ ‘위험의 연출’이란 개념을 도입한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연출은 무엇이고 어떤 기능을 하는가?

벡: 실제로 ‘연출’이란 개념은 핵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위험은 현재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재앙이다. 이 미래를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주어야만, 즉 연출되어야만 현실성을 얻을 수 있다. 연출이라고 해서 현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 사실이 아니거나 허구라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에 나타나기 위해 구성되어야 한다.

박: 그런데 위험의 연출은 긍정적 결과와 부정적 결과를 동시에 낳지 않는가. 환경문제에선 긍정적이고 테러 위험에선 부정적으로.

벡: 연출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치행위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위험을 운명이라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리스크를 구성하는 일에, 연출하는 일에 여러 행위자들이 참여할 수 있다. 예컨대 기후변화의 경우 언론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그 위험성을 알려줌으로써, 즉 기후변화로 인해 미래에 일어날 재앙을 현재에 연출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행위를 촉발할 수 있다. 특히 글로벌 공간에서의 환경문제, 기후변화 문제에서 세계주의의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를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 대응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중국은 거대한 에너지 소비국가인 동시에 에너지 생산국가다. 이 과정에서 환경을 오염시키고, 국경을 넘어 한국이나 일본에도 그 피해가 돌아간다. 또 한국이 환경기준을 지키지 않으면, 바다가 오염되고 주변 국가들에게 피해를 준다. 여기서 위험 생산자와 피해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테러의 경우, 연출은 원치 않은 비의도적 결과로 나타난다. 테러 장면이 전세계에 방영됨으로써 서구 정부와 언론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한 셈이 된다. 즉 사람들의 머리 속에 테러에 대한 예견을 심어줌으로써. 테러를 기대하고 예견하는 것 자체가 테러범들의 힘이고 권력이다. 이런 사람들의 예견과 기대가 줄어드는 정도에 비례해서 테러범들의 글로벌 권력도 줄어들고 사라질 것이다.

박: 다른 한편 글로벌 위험사회는 세계주의의 요소, 세계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다고 했다.

벡: 세계주의는 보편주의와는 반대로 문화적 타자를 자신이 지각하고 인지하는 세계 안으로 수용해야만 하는 필연성인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기회다. 즉 상상 속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세계주의는 소외된 자들, 세계화의 과정에서 배제된 자들을 토론 속에 끌어들여 발언권을 줌으로써 제1세계와 제2세계 또는 제3세계 간의 대립을 완화시키고자 한다.

박: 세계시민사회를 구축하고, 국민국가의 경계 밖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확산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나?

벡: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칸트의 믿음이었다. 그는 200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 “세계시민사회는,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 것처럼 우리가 행동할 경우, 실현될 수 있다”라고.

박: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대운하 문제에 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벡: ‘3일 전문가’로서 의견을 말해도 된다면, 대 프로젝트에 관한 갈등이 드디어 공개적으로 표출됐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좋은 일이다. 환경운동이 여기서 자연파괴뿐 아니라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식수 문제를 이슈화할 수 있다면, 존재감이 더욱 커질 것이다. 그로 인해 한국에서도 근본적인 갈등이 가시화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과연 더 크게 더 빨리 발전하는 것, 경제 성장만이 중요한 것인가? 환경피해, 우리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와 같은 삶의 질에 대한 성찰, 또 한국의 전통과 철학에 뿌리를 둔 자연과 생물에 대한 책임 등을 다시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토론에 들어 가기 앞서 - 책 깊게 읽기

1.『위험사회』라는 책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나?

“우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보건기구가 홍역의 완전박멸을 선언하는 그 순간 광우병, 조류 독감과 같은 신종 질병이 등장하고, 우리가 갈증을 없애줄 한 바가지의 맑은 물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전기 문명에 도취되고 화려한 소비문화에 빠져드는 순간, 자칫 인류를 멸종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핵발전소들이 도처에 건설된다.『위험사회』는 이러한 현대 사회를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노력이다. 이 위험천만한 풍요의 시대를 안전과 평화의 시대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를 추구한다.” (위험사회, 1986:5)

산업혁명 이후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역사상 유례없는 생산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명실상부한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환경위기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물질풍요의 이면에는 엄청난 대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본래 위험(Risk)이라는 용어는 스페인의 항해술 용어에서 나온 것으로 ‘위협을 감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위험이란 부를 얻기 위해서 당연히 감수해야만 하는 난관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환경이 위기상황에 처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한국을 포함하여 많은 나라가 산업화를 통해 경제적 빈곤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으나, 이러한 성과는 극심한 환경파괴를 댓가로 삼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지금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환경파괴를 막고, 산업화의 과정에서 자연으로부터 빌어 온 막대한 부채를 탕감해야 할 시기이다.
따라서 현 시기는 명백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종래와 같은 성장제일주의의 산업화는 결국 총체적인 파멸로 귀결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는 환경위기 및 현대 사회의 성격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된다. 벡의 『위험사회』는 현재의 환경위기를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근본원리에 비추어서 고찰함으로써, 인식의 전환을 위한 하나의 준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준거는 '위험'의 변화에 대한 고찰을 통해 제시된다.

2. ‘위험사회’란 무엇인가?

  부의 추구와 분배의 문제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등한시 여겨온 산업사회가 정점을 맞이하게 되면서 지금은 구조적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위험사회’이다. 즉 ‘위험사회’란 역사상 유례없이 거대한 풍요를 이룩한 근대 산업사회의 원리와 구조 자체가 파멸적인 재앙의 사회적 근원으로 변모하는 사회를 뜻한다.

"산업사회라는 개념은 '부의 논리'의 지배를 제시하며, 그것과 위험분배가 양립할 수 있다고 확언한다. 반면에 위험사회라는 개념은 부의 분배와 위험의 분배는 양립될 수 없으며, 부의 '논리'와 위험의 '논리'가 서로 경쟁을 벌인다고 확언한다."(Beck, 1986:154) 다시 말해서 고전적 산업사회에서는 부의 생산논리가 위험생산의 논리를 압도했다면, 위험사회에서는 위험생산과 그 분배의 논리가 지배적으로 된다. 또한 생산력은 그 무해 성을 상실하고, 경제적 및 기술적 진보에서 얻는 편익은 위험생산에 의해 압도된다.(Beck, 1986:12)

“오늘날 사람들은 지구적 위험사회의 격동으로 들어서고 있으며, 다양하고 모순적이며, 지구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위험을 동시에 안고 살아갈 것이다. 위험사회란 대기와 물, 생태환경 속에 분해되어 인간 개체에 모세혈관처럼 침투하고 있는 생태학적 오염인자들을 분배하는 파국적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아침과 저녁에 식탁에 오르는 달걀, 야채, 무수히 많은 음식재료들을 먹으며, 또 물과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자신의 몸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환경오염의 불안을 느끼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태아가 태어나자마자 산모도 모르게 모유 속에 오염된 중금속을 먹으며 성장하는 시대,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의 토대가 붕괴 되어버린 시대, 그러한 ‘불안’들이 우리 현대문명 속에 떠돌아다니고 있다.”(서평‘지구적 위험사회의 격동과 문명의 화산에서 살아가기’:195)        


3. 위험사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1986:57)에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추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산업사회의 위험성은 여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위험의 평등화
과거의 위험은 특정한 누군가의 위험이었다. 과거의 위험은 불평등하게 분배된 무엇인가가 부족해서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는 생산력의 증대로 배고픔을 해결하지만 그에 따라 환경오염을 일으킨다. 이 위험은 과잉된 오염물이 원인이면서 모든 이에게 적용되므로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다시 말해 모두에게 평등한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둘째, 위험의 전지구화
산성비를 생각해 보자. 한국에 내리는 산성비는 중국 동부 산업지대의 대기 오염이 원인이다. 한국의 대기오염은 일본의 산성비로 나타난다. 이 문제는 결코 한국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 한국과 중국, 일본 모두의 문제이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는 유럽 전역에 광범위한 피해를 입혔다. 유럽은 원전에 대해 충분한 안전 조치를 취하고 있었지만 옛 소련의 문제에까지 개입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안전할 수 없었다. 개별 국가의 개입으로는 결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위험은 전지구화된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근대화가 낳은 위험들이며 위험은 산업화가 낳은 대량 생산물이다. 산업화는 전 세계에 확산되면서 동시에 위험은 세계적으로 축적되고 강화된다.

셋째, 사회적 불평등의 개인화
근대 사회의 경제 원리인 자본주의 때문에 근대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개의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자본주의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시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호황과 불황의 주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는 실업의 위험에 놓여 있으며 실업은 노동자 모두의 공통된 위험이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고용 안정을 위해 연대했다. 근대 사회의 위험이 노동자 모두의 위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은 노동자를 작업 특성과 능력에 따라 구분하면서 노동자 간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기업은 더 이상 노동자에게 평생직장이 아니다. 언제든 기업의 필요에 따라 고용과 해고를 반복할 수 있고 고용된 노동자들도 같은 대우를 받지 않는다. 과거의 근무 연수에 따른 호봉제는 능력에 따라 보상도 다른 연봉제로 변화했고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누구도 동일한 입장이 아니다. 노동자라고 해도 다른 노동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도 지지할 수도 없다. 이제 동질 의식은 끊임없이 해체되고 노동자들은 개인화 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은 위험 앞에서 의미가 없다.
노동자 집단이 한 사람의 개인으로 해체되어 권리와 의무를 지닌 주체가 됨으로써 자유주의적으로 보자면 그들은 엄청난 가능성을 보장받은 셈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위험은 증가한다. 이제 개인은 과거와 같이 가족, 마을, 공동체 또는 사회 계급이나 특정 집단의 의지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던 위기와 동요를 개인 스스로 혼자서 인지하고 해석하고 처리해야 한다. 수입의 불평등, 분업 구조와 같은 임노동의 기본적인 결정 요소는 결국 변화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사회 계급적 속성은 약화된다. 이제 불평등은 사회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전환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개인주의화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경향은 이제 인간의 삶의 중심에 있던 공동체의 순기능을 사라지게 한다.

넷째, 성 역할의 변화와 소통 방식의 개인화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남녀 관계이다. 유사 이래로 육체적 차이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역할이 달랐다. 농업 사회에서 육체적 차이는 작업 능력의 차이였고 이에 따라 남녀의 차이는 차별로 변질되었다. 이 차별을 체계화한 것이 가부장제이다. 가부장제에서 가족은 공동으로 작업을 한다. 우월한 작업능력이 있는 남자는 작업의 통솔자이면서 권력자이다. 핵심적인 작업자이기 때문에 가족 간의 갈등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여자의 역할들은 남자가 결정하는 대신 남자는 여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삼종지도는 여자의 의무이지만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의 의무이기도 한다. 남자와 여자는 가부장제 안에서 명확한 역할을 가졌던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예전과는 같은 의무를 강요할 수 없다. 가부장제가 그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성은 우월한 작업자가 아니며 권력자는 더욱이 아니다. 가족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도덕적 윤리적 법적 기준의 제정자로서의 남성은 사라졌으며 동시에 남성과 여성에 대한 보편적 역할 구분은 사라졌다.
개인은 자신이 남자 또는 여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선택하고 실천해야 하고 사회적 기준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설정할 수 없으며  개인의 선택이 필요하다. 성 정체성의 동요는 자아 정체성의 동요로 확대됨으로 이제 개인의 삶을 사회적 기준에 따라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고 개인의 생활양식은 누구와도 같지 않다. 타자와의 차이는 점점 커지고 공통점은 줄어들며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더욱 고립되는 것이다. 이제 타자와의 교류 방식은 어떤 제도적 보장도 없이 교류를 원하는 두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다.

다섯째, 진리의 지위를 잃어버린 과학
명확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불안한 환경은 개인에게 어떠한 확실성에 대한 보증도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개인을 더욱더 불안한 위험의 자리로 몰고 간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위험 앞에서 과학은 어떠한 해결책이나 뚜렷한 복안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상반된 주장들을 생산함으로써 준거의 역할을 상실하고, 과학은 판단의 준거이기는커녕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제1의 책임을 지고 있다. 오류 가능한 모든 과학의 전제들은 오늘날 위험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여겨지며, 때문에 ‘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는 모든 해결책은 그 타당성을 상실한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근대화를 통해 이 모든 위험이 생산되었고 이 근대화를 추진한 국가권력이 모든 문제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한, 국가는 신뢰할 만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 과학이나 국가권력과 같이 기존의 기초적인 신뢰를 형성하고 있었던 모든 진리의 영역은 의심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여전히 과학과 국가 권력에 의지하고 있다. 위험의 논리는 현대 사회가 죽음이나 질병과 같은 외부적 위험(Extrinsic Risk)을 방어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안전을 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안전을 수립한 체제 자체가 내부적 위험(Internal Risk)을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평균 수명과 기대 수명의 상승은 긴 노년생활을 일반화하고 이는 늙어간다는 것이 주는 자연적인 위험을 감소시켰지만, 기대수명이 80세를 상회하는 사회에서는 은퇴 후의 삶이 20년에 육박하는 만큼 늙어간다는 것의 문제는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적인 문제로 환원된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과학의 시도는 다시 새로운 문제를 생산하게 됨으로써 그 모든 진리의 권리를 상실한다. 과학은 핵발전소라는 위험을 만들어놓고 그 위험이 우리 삶의 결핍을 해결했다는 것을 끊임없이 선전한다.

여섯째,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
사회법은 민법의 분야가 공법의 영역에서 파악된 것이고 민법은 개인 간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규정이다. 19세기 들어 개인 간의 문제가 집단화했기 때문에 국가는 개인의 문제마저도 일반화시켜야 했다. 사회권, 즉 노동권이나 행복추구권은 개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문제이다. 20세기만 해도 기업의 자유로운 권리였던 폐수 처리 업무는 이제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여론의 통제를 받는 새로운 영역으로 변화한다.
기업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기술이 생태계와 인간생명, 그리고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부작용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다면 궁극적으로 기술의 소유권을 상실할 것이며, 재판과 체면 회복의 과정에서 대량의 추가 비용이 필요해질 것이다. 낙동강에 페놀을 방류한 D기업은 그 사건으로 인해 얻은 치명적인 손실을 회복하는데 자그마치 4년의 세월과 환산할 수 없는 비용을 투자해야 했다.
이제 개인의 권리 영역에 있던 모든 것들이 이처럼 정치화되기 시작한다. 이제 그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유해 성분의 배출이나 핵폐기물 같은 생태적, 기술적 문제마저도 이제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문제로 바뀌어 버렸다. 유해 물질을 생산하고자 하는 기업은 정치적인 로비를 통해서 법적 허용 수치를 높이고자 노력할 것이며, 그 반대의 노력 역시 여론과 시민단체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의 작지만 큰 문제들은 이제 오직 정치적 타협의 수준에서만 결정된다.
이제 기존의 경제정책, 소득분배, 사회보장제도와 같은 영역에서만 정치 수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 생산의 구체적 내용, 에너지의 종류, 폐기물 처리 등과 같은 기업 경영자들의 주권영역에 속하는 문제들이 정치적 수단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제 유권자들의 의식 속에서 이러한 작지만 뜨거운 쟁점들은 대량 실업의 문제와 거의 같은 비중을 접하게 된다.

4. 한국사회도 위험사회인가?

서구와 한국은 발전의 시기와 방식이 다른 만큼 근대성의 위기도 같을 수 없다. 서구가 ‘후기 근대’의 위기라면, 한국은 ‘초기 근대’와 ‘후기 근대’라는 비동시적인 것의 위기이다. 한국사회는 위험과 불신이란 측면에서 볼 때 위험사회이다. 농경사회의 전근대적, 산업사회의 근대적, 정보사회의 후근대적 위난과 재난이 현재라는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위험사회에서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는 정치, 군사. 경제. 환경, 문화. 사회 등 모든 영역에 다차원적으로 걸쳐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서로 중복적이고 침투적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실례로 들어 보자. IMF 체제를 유발한 경제위기나 그로 인해 나타나는 심리공황, 가족파괴, 고용불안, 집단갈등, 기업도산과 같은 사회위기는 위험과 재난이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웅변하여 줄 것이다.


5. 위험사회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위험이 평상적 지각범위를 벗어나고 산업의 논리 속에서 체계적으로 재생산되면서 현대 산업사회는 위험사회로 이행 된다”고 울리히 벡은 주장한다. 경제적 부를 희생할지라도 위험을 사전에 철저히 봉쇄하는 것, 이것이 위험사회에서 인류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발전경로이다.


6. 위험사회에서 성찰적 근대화로 어떻게 변화되는가?

현재의 산업사회가 위험사회라면 어떻게 제2차의 근대, 즉 성찰적 근대화로 변모될 수 있는가? 벡 스스로 인정했든 성찰적 근대화란 마냥 살기 좋은 유토피아적인 세계가 아니다. 울리히 벡에 의하면 성찰적 근대화는 “산업사회의 자체 변화 즉, 최초의 근대가 제2의 근대에 의해서 해체 혹은 교체되고 있으며 산업사회는 매우 급진적으로 이행, 변화, 재구성된다.”(Beck, 성찰적 근대화, 1995:27)
근대사회는 역동적으로 자신의 계급, 계층, 직업, 성역할, 핵가족, 공장, 기업 부문의 구성을 밑에서부터 약화시키고 있으며 또한 자연스러운 기술적 경제적 진보를 위한 전제 조건들과 지속적 형태들의 기반도 약화시키고 있다. 진보가 자기파괴로 전환될 수 있고, 한 종류의 근대화가 다른 근대화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변화시키는 이 새로운 단계가 바로 성찰적 단계이다.(앤소니 기든스, 울리히 벡, 스콧 래쉬, 성찰적 근대화, 1998)  


7. 성찰적 근대화란 무엇인가?

현대사회가 위험사회라는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벡이 주장하는 ‘성찰적 근대화’란 이처럼 풍요사회를 향한 근대화의 과정이 ‘위험사회’로 돌아오는 과정을 되짚고 반전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산업사회의 원리들 자체를 성찰하여 산업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산업사회의 진보이자 해체의 과정, 이것이 성찰적 근대화의 과정이다.
성찰적 근대화가 해체의 대상으로 삼는 산업사회의 원리들 중에서 울리히 벡은 특히 현대 기술-과학을 중시한다. 현대의 기술-과학과 그 합리성이야말로 오늘날의 환경위기로 대변되는 산업사회의 위험을 낳은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부정하고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즉 현대의 과학-기술은 문제의 근원이자 해결책이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결국 ‘성찰적 근대화’란 현대 기술과학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그 한계도 함께 인식함으로써 과학에 대한 사회적 제어력을 높이는 과정이다. (Beck, 1986:8) 이를 울리히 벡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회적 합리성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Beck, 1986:30)
19세기 이래 발전되어 온 근대성 및 근대화에 대한 담론은 발전된 서구 산업사회가 완전히 근대화된 사회로서 근대성의 절정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으며, 산업사회를 계속 연장하면 세계사는 결국 최 정점에 달할 것이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울리히 벡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근대성의 종말이 아니라, 근대성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을 강력이 주장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19세기에 일어난 근대화가 봉건사회를 해소하고 산업사회를 만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근대화는 산업사회를 해소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다른 근대성이 도래하고 있는 중이다. 이 새로운 근대성을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 라고 부른다.(Beck, 1986:10)
  “결국 성찰적 근대화란 산업사회를 지탱하는 여러 가지 원리들 자체를 성찰하여 산업사회를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Beck, 1986:19)

- 반성과 성찰의 차이
성찰은 반성이 아니라 ‘자기 대면’을 의미한다. 반성, 뉘우침이란 과거를 돌아보고 새로운 미래를 기획하려는 생산적인 과정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대면해야 하는 과정이며, 이때의 자아란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나의 의지와는 별개의 독립된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는 불안한 자아이다. 성찰은 바로 이러한 자아에 대한 직접적인 자기 대면의 결과로서 드러난다. 이 과정은 고전적 산업 사회의 기본적 갈등을 해결하던 일련의 제도들이 사실은 우리의 존재 조건을 갉아먹고 있었으며, 또한 우리는 이 제도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성찰에 맞닥뜨리게 되는 자리가 다름 아닌 위험의 자리라는 사실이다. 결국 산업사회의 재화의 분배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위험과 재해의 분배 문제라는 새로운 갈등에 압도되어버린다. 그렇다고 하여 재화의 분배 문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위험은 중첩되고 개인은 끊임없이 가중되는 불안한 운명을 떠안아야 한다. 결국 이 자체가 성찰성이다. 성찰성은 회피하는 것으로서의 반성을 넘어서서,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에 의한 선택 과정이 아니며, 우리에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과제에 가까운 것이다. 이는 모든 문제의 소재와 모든 지구화의 과정, 그리고 모든 계급과 모든 인종이 동시에 격렬하게 부딪치는 자기 대면이다.


8. 고전적 근대화와 성찰적 근대화의 차이는?         

  고전적산업사회에서 위험은 잠재적인 부수효과이며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의 위험은 각종 산업재해나, 사고, 그리고 특히 전 지구적 환경위기에서 잘 알 수 있듯이, 더 이상 산업 활동의 잠재적 부산물도 아니며 예외적인 것도 아니다. 현대 산업사회는 위험이 전면화 되고 정상적인 것으로 된 사회, 즉 위험사회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물론 현재의 전 지구적인 환경위기이다.

"또한 고전적 산업사회는 '근대적 봉건사회'이다. 성별 적대의 논리는 고전적 산업사회 내에서 발생하는 근대성과 반근대성 사이의 모순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Beck, 1986:106) 고전적 근대화의 특징은 근대화와 반근대화가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기로 치닫는 환경문제가 종래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따라서 "근대화의 성찰적 단계, 즉 위험사회에서 추구되는 성찰적 근대화를 통해 산업화과정에서 형성된 새로운 봉건적 조건을 해소했을 때에야, 현재의 환경위기는 비로소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특히 다양한 사회운동의 발전으로 대변되는 비제도적 정치의 성장에서 찾을 수 있다."(Beck, 1986:108)

벡에게 과학이나 산업의 발전은 한 묶음으로 엮인 위험들과 위해들이며, 우리는 이전에 단 한번도 이와 같은 것에 직면해 본 적이 없다. 이러한 위난들은 시간적, 공간적인 제약이 없어 후세에도 영향을 미치며 아무도 ‘위험사회’를 책임질 수 없다. 사회가 실제로 진화하려면 근대화는 반드시 성찰적이어야만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것은 단지 녹색운동 내에서만이 아니라, 폭넓은 일반 대중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과학에 대한 비판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다.

벡은 『위험사회』에서 세 단계로 이루어진 사회변화과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 과정은 첫째로 전근대성, 다음에 단순한 근대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찰적 근대성으로 구성된다. 이 견해에서 단순한 근대성은 논리적으로 산업사회, 그리고 새로운 근대성은 위험사회와 거의 같은 관계이다. 산업사회의 중심적인 원리는 재화(goods)의 분배이지만, 반면에 위험사회의 원리는 해악(bads) 또는 위난(danger)의 분배이다.
나아가 산업사회는 사회계급들로 구성되는 반면에 위험사회는 개인화한다. 하지만 위험사회는 아직, 그리고 동시에 산업사회라고 벡은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위험사회의 위험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과학과 함께 주로 산업이기 때문이다(Beck, 1986:21)
근대화는 구조적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사회적 행위자 사이에서 변화하는 관계와도 연루된다. 근대화가 어떤 수준에 이르면 행위자가 더 개인화하는, 즉 구조에 의해 점점 덜 제한받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근대화가 성공적으로 진척되기 위해서 행위자는 자신을 구조적 제한에서 풀어놓아야 하며 근대화 과정을 능동적으로 구체화해야 한다.(Beck, 1986:20)

  단순 근대화와 성찰적 근대화는 시기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다섯 가지 대조점과 특징군이 그 경계를 보여줄 수 있다.

첫째, 삶의 상태, 삶의 행동, 사회구조와 관련해서이다. 즉 대규모 집단범주와 계급이론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개인화(혹은 심화) 이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둘째, ‘자동화된’ 행위영역의 기능적 분화라는 문제틀은 분화된 하위체계의 기능적 조화. 연줄망 형성, 융합(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의사소통 코드’)이라는 문제틀로 대체된다.
셋째, 선형적인 진보 모델(그리고 통제에 대한 격세유전적 신념),즉 영구적인 근대화로부터 도출된 진보에 대한 신념은 산업 근대화의(권력)중심에서 합리성의 기초와 합리화 형태가 자기수정, 위험자초, 자기해체를 경험할 것이라는, 복합적이고 다단계적인 논증으로 대체 되었다. 어떻게? 자동화된 근대화의 승리로 말미암아 통제할 수 없는(부)작용이 생김으로써 가능하다. 즉 불확실성이 귀환한 것이다.
넷째, 단순 근대화가 궁극적으로는 도구합리성(반성)범주에서 사회변혁의 동력을 찾는데 반해, ‘성찰적’근대화는 부작용(성찰성) 범주에서 사회변동의 원동력을 감지한다. 감지되지도, 반성되지도 않았지만 외부화된 어떤 것들이 산업사회와 위험사회를 구분하고, 그것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새로운’ 근대성을 분리시키는 구조적 단절을 낳는다.
다섯째, 좌파와 우파- 산업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정치적인 것을 정리하는 수단으로 확립되었던 공간적 메타포-를 넘어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이론적 갈등이 시작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잠정적인 단계이지만) 그것은 확실-불확실, 내부-외부, 정치적-비정치적이라는 이분법적 축을 따라 파악할 수 있다.(성찰적 근대화, 1998:253-254)


9.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대한 성찰

지난 1970-80년대가 정치적으로는 권력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모두 결여한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시기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성장제일주의 하에서 노동자와 자연에 대한 무차별적인 착취가 자행되던 시기였다면,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여러모로 이전 시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1990년대는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어느 정도 정당성과 정통성을 회복한 권력을 중심으로 제도정치가 자리를 잡아가는 한편, 노동운동 및 다양한 사회운동의 발전에 힘입어 노동자와 자연에 대한 끝없는 착취에도 역시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리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거시적 변화를 반영하여 지성사적으로도 다양한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사회문제와 운동의 영역에서도 여러 가지 새로운 양상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환경오염의 문제와 환경운동의 활성화는 현재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대한 본격적인 사회과학적 연구는 이제야 비로소 시작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강력히 요구하는 세력과 과거에 여전히 집착하는 세력 간에 심한 불신과 갈등이 빚어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단절도 집착도 결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무언가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더욱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계간 환경과 생명 창간호. 1994. 홍성태)
만일 우리가 울리히 벡의 성찰적 근대화라는 명제에서 무언가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산업 사회의 원리 자체가 커다란 내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지금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선진국 지상주의가 우리 사회를 동물적 생존경쟁과 치밀한 폭력에 놓이게 한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선진화된 근대성에는 부의 사회적 불평등이 지닌 과학 기술적으로 생산된 새로운 위험들이 끊임없이 결합할 것이기에 우리의 미래는 암담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을 이용하거나 인류를 전통적 제약들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기술 경제적 발전 자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도 주의를 모아야 한다. 근대화는 우리를 신세계로 이끄는 해방의 신화가 아니다. 이제 근대화는 자기 자신을 주제로 삼고 있으며, 이 근대화 자체를 성찰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의 도처에 은폐되어 있는 위해와 위험을 발견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 주제를 더 깊이 읽기 위해 참고할 만한 자료
1.『성찰적 근대화』,울리히 벡, 앤소니 기든스, 스콧 래쉬, 1998
2. ‘성찰적 근대화-사회학적 시대 진단의 잠재력과 한계’, 임운택
3. ‘위험사회학-위험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사회이론화’, 노진철
4. ‘성찰적 근대화, 현대 위험사회의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길’, 홍성태
5. ‘지구적 위험사회의 격동과 문명의 화산에서 살아가기’, 김정현


위험사회 요약정리

1. 울리히 벡 사유의 지적배경과 위험사회

울리히 벡이 말하는 위험사회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사회로, 환경 재난과 관련된 파국성을 일상생활에 안고 살아가는 사회다. 그의 독특성은 바로 이 '환경' 재난과 조직화된 무책임성의 원인을 근대 사회이론의 핵심에서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1) 우선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위협과 위험의 결과 및 특성을 개략화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산업사회의 역동성과기본틀(골격)을 변경시키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 이러한 위험사회의 특성과 이 사회가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음은 재귀적 근대화의 과정으로 연결된다. 초기 재귀적 근대화 고정에 대한 벡의 기술은 탈전통화의 과정 그리고 개성화의 과정으로 나뉘지만, 후에 오면 지구화와 개성화로 구성된다.
3) 이 상호 연결되어 있는 두 세트 과정을 과학의 인식론적 위상과 문화적 위상을 변경시키는 방식에 연결시키고, 이를 정치적인 행동 및 그 구성을 변경시키는 방식으로 해석해 낸다.
이런 골격을 가진 위험사회론은 네 가지 학문 분야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이 분야들에 영향을 주고 있다. 우선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울리히 벡의 초기 작업들에서 마주칠 수 있는 산업사회학과 가족사회학이다. 그의 위험사회학이 분석하는 경제 및 사적인 영역에서 위험과 불안(혹은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음)은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두 번째로 근대성, 근대성의 병리적인 현상 그리고 근대성의 변형은 독일 사회학계의 이론적인 작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또 상당한 반향을 주고 있다. 세 번째로 그의 사회학은 합리적인 선택 및 게임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심리학, 경제학 그리고 환경학 내의 위험 연구와 불확실성 연구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이 작업들은 그 자체로 공사(公私) 단체에서 폭발적으로 진행된 상당량의 위험 평가와 위험 연구(비용-편익 분석, 환경영향평가, 환경회계감사)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네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울리히 벡의 세대가 직접 겪었던 독일의 역사적인 상황들이다.
기든스에 따르면, 위험이란 개념은 지극히 근대적인 것으로 17세기 초 스페인 항해술에서 등장했다. 그 당시 이 개념은 우연성이란 개념과 밀접한 상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즉 '예기치 않았던 결과들이... 오히려 우리 스스로의 활동과 결정에 의해 야기된다는 관점에서 등장한 것'이 위험이다. 위험은 '욕구된 결과에 대한 위협'이고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어서 , 그 발생이 예측될 수 있거나 그 가능성이 계산될 수 있는 위협'인 것이다.
울리히 벡의 위험도 이러한 맥락에서 분석을 하고 있다. 위험은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것이지만, 위협은 예측될 수 없고 통제될 수 없다. 위협이 외부에서 인간에게 가해진 그리고 '타자'에게 그 원인이 귀속될 수 있는 '일종의 운명적인 일격'이라면, 위험은 정책 결정 과정에 그 기원을 둠으로써 사회적 책임성이란 물음을 동반하는 사회적 행위의 결과이다.
오늘날과 같은 '제조된 위험'이란 현실에서 결정 과정을 중심으로 하는 위험과 위협의 경계는 자주 무시되고는 한다. 하지만 울리히 벡에게 이를 나눌 수 있는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위험이 계산 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을 전제로 성립하는 개념인 반면, 위협은 파국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란 점이다. 위험 여부를 판단하는데서 양적인 계산과 그에 의거한 평가가 기준으로써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만, 파국은 양적 계산 그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다. 때문에 파국에 대한 인정은 위험에 대한 계산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이를 드러낸다. 이런 맥락에서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은 "무엇이 파국으로 계산되는가"이며, 이는 그 사회체제에 따라 그 부분과 경계가 달라지고 특수하게 형성된다.
전 산업사회에서의 위험은 자연적인 위협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시대의 위험은 인간이 내린 결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한 것도 아니고, 효과적으로 대비되거나 회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전 산업사회 그 자체는 명백히 불안정한 사회였고, 이 사회에서 경험된 위험의 원인은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항상 외적인 힘 또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귀속되었다. 물론 이 위험에서 벗어나는 방법 또한 동일한 힘에 의거하는 것이었다.
산업사회의 초기단계에서 위험은 개인이나 사회 집단들이 결정하고 행동하는 과정에 등장한다. 이 결정 과정은 특정한 위험 계산 방식에 의거해서 그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므로, 위험은 사실 이 계산방식에 의거해서 그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므로, 위험은 사실 이 계산 방식에서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산업사회에서 위험의 원인은 더 이상 인간이 내리는 결정의 외곽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사회는 국지화된 위험과 위협의 충격에 대처하고 이를 완화시키기 위한 제도들을 발전시켜 왔다. 울리히 벡이 드는 대표적인 예가 복지국가이다. 이 국가는 산업사회에선 안전보장국가로 불리지만, 위험사회의 한 모습인 잔여 위험사회에선 사전배려국가로 불려지고 있다. 이 산업사회에서 책임과 과실 추궁은 통계적으로 계산된 가능성에 의거하고, 이 계산 가능성이 위험 부담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제도들을 유지 가능하게 만든다.
이렇듯 산업사회의 위험이 인간이 내린 결정, 계산 및 예측 가능성, 책임 소재의 명확성 그리고 보장 가능성을 특징으로 한 개념이라면, 이러한 특징들은 산업사회의 위험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징, 즉 공간적이고 사회적인 제한성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제2단계, 즉 위험사회로 들어오면서 위험의 유형들이 다라지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산업사회에서 계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간주됐던 위험이 계산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연이 산업사회에 의해 침범되고 전통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유형의 계산 불가능성이 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위험을 울리히 벡과 기든스는 '제조된 위험' 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위험사회가 맞고 있는 위험과 위협은 양적인 크기에서 이미 전지구적이고 질적 측면에선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 되었다. 또한 위험과 위협은 잠재화되어 있는 영향력이란 측면에서 파국성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이의 예로 우리는 체르노빌과 같은 핵발전소 사고, 유전공학으로 야기될 것으로 예측되는 사고 등을 쉽게 상기할 수 있다.
위험사회의 위험과 위협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위험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 그 위험의 시작 지점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위험의 책임 및 과실 추궁의 가능성이란 측면에서 산업사회에서의 제1시기와 비교해본다면, 이 위험사회의 위험은 어느 누구도 책임질 수 없고, 그래서 위험 문제에선 어느 누구도 전문가가 될 수 없다(조직화된 무책임성). 울리히벡은 "위험을 인지하고 결정하는 방식들, 그리고 그 원인을 귀속시키고 보상을 할당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위험사회에서는 붕괴되었다"고 말한다. 이 지적은 곧 구정치의 붕괴를 칭하는 것이다. 이런 시대 진단의 연장선상에서 1988년 발행된 [해독제]의 분석 초점이 위험사회 관료제에 두어져 있었다면, 구정치를 대체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은 [EdP], [vIGzRG], [OM] 등에서 시도되었다.

* 위험, 위험사회에 대한 정교화

  1) 위험에 대한 정의는 사회적인 매개물에 달려 있다.
  2) 위험사회에서의 시간의 화살은 미래에서 현재로 쏘아진다.
  3) 위험 진술은 정치적인 역동성에 의해 결정된다.
  4) 위험 인식에는 두 단계가 있다. (단순 위험, 제조된 위험)
  5) 위험은 무지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며, 위험에서 벗어나려 할 땐 위험의 덫에 빠진다.
  6) 위험사회에서 세계위험사회로
  7) 위험에 대한 인식은 상황에 의존한다.
  8) 오늘의 위험사회는 전통과 자연이 해체된 상황에서 등장한 사회다.

출처 : 정치의 재발견 (위험사회 그 이후 : 재귀적 근대사회) / 울리히 벡 / 거름





오늘 우리는 무엇을 토론할 것인가?


1. 우리는 무엇을 위험이라고 말하는가?
* 위험과 위협의 차이는 무엇인가?
* 재난과 재앙은 위험인가, 위협인가?
* 우리는 위험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는가?

2. ‘위험’과 ‘사회’는 어떤 상관성을 지니는가?
  * 개인에게 있어서의 위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사회에 있어서의 위험은 무엇인가?


3. 현대 위험 사회는 어떻게 생산되고 분배되는가?
  * 위험이 생산되는 주요 요인은 무엇인가?
   -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에서 분석하기
   - 과학기술발달에 의해 형성되는 위험 분석하기
   - 자본주의 체계에서 생산되는 위험 분석하기
   - 근대적 이성과 욕망에 의해 생산되는 위험 분석하기
   -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따라 생산되는 위험 분석하기

  * 인간이 경험하는 위험과 자연이 경험하는 위험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4. 위험 사회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위험을 다양한 관점에서 발견해 보자.

5. 고전적 근대화와 성찰적 근대화란 무엇인가?

6. 위험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