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사회는 유교 문명이 주도한다.

 

정보화 세계화의 진행으로 근대 문명의 해체가 불가피하리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오늘날, 근대 문명 이후의 새로운 문명을 연구하고 준비하는 데 모든 것을 다 바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양재역 사거리와 뱅뱅 사거리 사이 주택은행 골목으로 들어서면 변호사 사무실이 하나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초동이지만 법원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 주변에 동업자들도 없이 변호사 사무실로는 좋은 위치가 아니다. 그러나 상관없다. 이 사무실 본연의 임무는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입구에 변호사 사무실 간판과 함께 걸려 있는 사단법인 ‘신문명 아카데미’ 간판이 이 곳의 진짜 임무를 말해 준다. ‘희망의 문명 새로운 연대’를 슬로건으로 하는 신문명 아카데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문명’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전파하는 활동을 한다. 올 들어 변호사 업무는 거의 수임 받지 않았지만, 아카데미관련 업무는 정보통신부 산하 정보통신 연구관리단으로부터 ‘21세기 시민정보사회 추진을 위한 종합 프로젝트’를 위탁받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신문명 아카데미의 원장은 송희식 변호사(44)다. 그는 ‘철학자가 된 변호사’라는 점에서도 독특하지만, 연구영역에서도 공자, 석가에서 칼 폴라니, 레스터 서로우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하며 인류정신사를 관통하는 열정적 연구자다. 신문명 아카데미에는 송 변호사 외에도 권영선 기획실장을 비롯, 2명의 상근간사와 1명의 비상근간사가 일하고 있으며, 도서출판 모색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3년간 원시정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인류정신사를 비롯해 한반도 통일, 정보 통신 및 교육 개혁, 21세기 국가사회개혁전략 등을 주제로 매주 각계 전문가를 초청해 연구세미나를 진행해 왔으며, 제천 자작분교에 수련장도 마련해 놓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송희석 변호사는, 21세기의 인류는 지금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라 믿는다. 무슨 공상과학소설 이야기가 아니다. 이 세상에 영구 불변한 것은 없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영고성쇠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찬란했던 그리스도문명도 로마문명도 그 정점에서 쇠퇴와 해체의 길을 걸었다. 근대 서구문명도 마찬가지다. 비전을 상실한 근대 서구문명은 지금 해체의 길을 걷고 있다. 다수의 인간에게 삶을 바쳐 얻어야 할 건전한 가치를 상실한 문명은 해체될 수밖에 없다.

 

21세기의 신문명은 어떤 특징을 가질 것으로 봅니까?.

“인류역사를 되돌아보면 근대문명처럼 물질적 욕구로만 삶을 규정한 사회는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근대문명은 지극히 예외적인 문명입니다.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대한 문제의식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의 삶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에 비하면 정신적인 가치였습니다. 이에 비하면 지금은 뒤집어진 사회, 거꾸로 선 사회라고 봅니다. 새로운 문명은 이걸 정상화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많이 소비하고 소유하는 것을 삶의 전부인양 생각하는 시대는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문명은 경제를 대신하여 교육과 문화가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며, 정치권력보다도 지적, 도덕적 권위가 더 큰 역할을 하리라고 봅니다.”

 

진보의 척도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두 가지 기준이 있겠죠. 하나는 그 시점의 역사적 단계에 당면한 현실문제를 해결하고 넘어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원한 관점에서 인간의 고양이라고 봅니다. 근대문명을 제외하고는 인류의 관심은 대개 인간의 고양에, 욕망으로부터의 해탈에, 어진 마음에, 사랑에 있었습니다. 물질적 풍요는 인간의 고양을 위한 조건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만, 그 자체가 과연 진보에 의미가 있겠느냐라는 겁니다.”

 

물질적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고 하면 정신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질적 발전을 근대 초기 서구역사에서 위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의 물질적 삶을 이렇게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리라고는 공자도 예수도 예상 못했습니다. 그 경로에 대단히 부도덕한 면도 있었으나, 진정한 진보를 위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진보의 내용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 중에는 물질적 욕구 외에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지욕구나 자아실현욕구처럼 강력한 욕구들이 많이 있다는 겁니다.”

송 변호사가 보기에 근대문명의 결정적 한계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의심하지 않았던 근대 서구 문명의 전제, 즉 물질적 풍요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며, 물질적 풍요가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들 것이며,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가 이상적 사회라는 전제 자체에 있다. 물질적 풍요 그 자체는 가치나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나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어떤 이상주의적 주장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이미 너무나 명백하고 보편화된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유교 문명과 정보화 사회의 결합

송 변호사는 신문명 형성에서 동북아시아 유교 문명의 역할에 크게 기대를 건다. 그는 문명 전환이 정치가나 소수 지식인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까지 묻혀 있던 가사상태의 문명이 새롭게 조명 받고 부활하는 과정일 것으로 예상한다.

 

유교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을 무엇으로 봅니까.

“문인(文人)문명이라는 게 가장 큰 특징이죠. 달리 표현하면 지식기반 문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지배계층이 전사나 상인 계층이 아니라 문인 계층, 즉 학습하고 수양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특한 것입니다. 물론 경제적 기반을 보면 동양이건 서양이건 전근대사회의 지배계층은 다 지주라는 공통점이 있었죠. 문제는, 지주는 지준데, 그 성격이 무엇이냐라는 겁니다. 이것이 서양 봉건사회에서는 전사, 기사, 칼잡이였고, 로마의 경우는 전사적 성격과 상인적 성격의 결합이었고, 오직 중국, 한국, 베트남에서만 학습하고 자기 수양하는 문인들이 지배계층이었어요. 과거제도는 그 구체화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서구 문명이 동양 문명을 지배한지 이미 오래인데, 21세기의 신문명을 동양 문명이 주도하여 형성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도덕 측면에서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유교 문명이 결국 서구 문명에게 지배당했다는 것은 현실적 측면에서는 서구 문명이 더 유효함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게르만이 로마를 군사력으로 정복했지만 게르만 문명이 로마 문명보다 뛰어났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폭력으로 정복했다는 것이 문명의 뛰어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죠, 화약은 중국에서 일찍이 발명됐으나 그 사용이 의도적으로 억제되었습니다. 중국이나 조선은 사회유지에 군사력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문명이었고, 또 분열된 시기가 길지 않아 전쟁이 사라졌던 때도 많았어요. 반면 서양은 굉장히 분열되어 있는 상태도 아니었고, 군사력의 발달을 막는 문명도 아니었어요. 결국 서양의 동양 지배는 문명의 우열 문제가 아니라, 해외침략에는 분열이 더 좋더라는 결론 정도를 의미하는 겁니다.”

 

신문명 창조에서 동양의 유교 문명이 특별한 역할을 하리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지금은 정보혁명의 시대입니다. 정보화 사회는 지식기반 사회입니다 그런데 지식기반 문명에 대한 인류의 경험은 동양 문명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동양 문명은 물질적 욕구를 중시하기보다는 정신과 절제를 중시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상업과 시장의 역할도 일부러 한정시켰어요. 중국의 경우 송-명-청 대에 해외무역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지만 국가권력이 이를 억압했기에 세계를 제패하지 못한 겁니다. 반면 서양 봉건체제에선 이걸 억압할 중앙권력이 없어서 모두 다 뛰쳐나가 상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동양 중세의 상업 억제정책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그 부정적 측면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사농공상의 신분질서와 결합된 지극히 봉건적인 정책이자, 동양의 발전을 가로막은 정체성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 변호사의 견해는 봉건 천하에도 오늘에 되살릴 긍정적 측면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모든 진보는 과거 역사와의 진지한 대화 속에서만 태동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이 복고주의로 비판받을 소지도 있지 않겠습니까.

“동양 문명의 단점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나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할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가령 양반계급이 백성들을 착취했다는 것은 다 아는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그렇지 않은 지배계급이 어디 있었냐는 겁니다. 당신이 그때 태어났더라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겠느냐, 다른 시스템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느냐는 겁니다. 내 관점에선 다른 측면을 봅니다. 사대부 계층은 정신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 도덕과 정치를 연결하려 노력한 독특한 계급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새 문명에서 절대 필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미래사회에는 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신뢰나 도덕을 기본으로 하여 질서가 유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대부 계층을 잘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는 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계에 대한 연구로 의미가 있습니다. 복고주의로 가자는 얘기가 아니라 과거 문명의 긍정적 측면도 충분히 살려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송 변호사는 정보화 사회의 도래 역시 근대 서구 문명의 해체에 결정적인 조건을 조성하고 있다고 본다.

 

권력보다는 도덕적 권위 중시

“정보화 혁명이 근대체제를 퇴색시키고 있습니다. 본래 근대체제의 본질은 하나의 시장, 하나의 국가입니다. 시장과 국가 영역일치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장의 세계화로 인해 국가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고 있어요. 예전처럼 국가가 자국 경제를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국가가 유효 수효를 창출해도 국내시장에 침투한 외국자본에게 빼앗길 우려가 많아 경제를 살릴 수 없습니다. 경제조절도 불가능해졌습니다. 경제조절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는 복지도 책임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고, 더 이상 국가가 국민을 책임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보혁명은 전세계 국가와 모든 인간들을 시장 속으로 내던져 버린 겁니다. 그러나 시장만으론 사회를 유지할 수 없고 국민의 삶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송 변호사의 논리는 동구 사회주의 붕괴 이후 의기양양해 하고 있는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국가권력으로 시장을 대체하려는 사회도 유지될 수 없지만, 시장만으로 유지되는 사회 역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해법은 우리보다 약한 국민을 무찌르고 전세계에 대해 상류계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별 가능성이 없죠. 미국이 이런 것을 쓰고 있지만 오래 못 갈 겁니다. 로마도 이 해법을 쓰다가 ‘우리’의 범위가 자꾸 줄어들면서 결국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또 하나의 해법은 새로운 문명, 새로운 정신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물질을 좇아 밤새 고민하는 데서 벗어나, 권력보다는 지적-도덕적 권위가 중시되는 문명의 창조가 현실적인 해결책입니다.”

송희식 변호사와 신문명 아카데미의 생각으로는 이 새로운 문명은 동북아시아 유교문명에서 태동될 가능성이 높다. 서구나 미국은 근대 문명의 반성에서 우리보다 앞서 있지만 성공의 신화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서구에서 문명(civilization)의 어원은 라틴어CIVICS(시민)에서 유래했듯이 도시화라는 의미를 가지지만, 한자 군에서 문명(文明)은 문(文)이 밝게 빛나는 상태, 인간과 사회가 문덕(文德)에 의해 고양된 세상을 뜻한다고 한다. 서구 문명의 세례로 물질적 안정을 이룬 근대 사회가 이제 동양 문명의 세례 속에 인간의 고양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두고봐야 알 일이겠지만, 우리 사회 어딘가에 문명 전환의 거대한 변화를 준비하며 모든 것을 다 바쳐 살아가는, 이상에 불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해 둘 가치가 있겠다.

 

 

1. 필자의 의견에 따라, 인류의 문명사를 물질 문명과 정신 문명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자.

2. 필자는 변치 않는 인류의 지향은 결국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시대와 권력(동양과 서양)에 따라 어떻게 구현되었으며, 또 어떻게 굴절되어 나타났는가? 필자의 해석을 정리해 보자.

3. 필자는 다가올 미래의 정보화 사회는 유교적 가치나 규범이 주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미래 정보화 사회를 지탱할 가치 규범에 대해 토론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