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에 게 - 정호승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
전투를 치르는 것처럼 논술 수업을 하러 갔었다.
수업을 겨우 한 시간 쯤 남겨 두고
교실에 도착해서
도반들이 보낸 메일을 읽고
도반들이 보낸 과제를 정리하면서
오늘 수업자료를 프린트 하고
복사기에 넣어 복사를 하면서
분주하게 이리도 분주하게 수업을 맞이한다.

아침에 눈 뜨면
뽀얀 햇살이 눈부시게 드는 것을 곁눈질 하면서
내 방 창 너머 노랗게 빨갛게 물드는 나무들의 수줍은 모습을 곁눈질 하면서
아침 신문을 펼쳐들고 겁나게 읽어내려가다가
아침 수업을 하러 방을 나선다.

나보다 더 어렵게 길을 나선 이들과 마주하며
머릿 속이 하얘지도록 토론하고
교실 창 너머로 희끔거리며 지나는 뽀얀 구름을 곁눈질 하며
늦은 점심을 먹는다.

비가 내렸다.
아주 오랫만에.

가을비는 푸석거리며 온다.
느닷없이 오는 것 같지만
은근하게 온다.
가을비는 길바닥에 차갑게 내려앉으면서도
뽀얀 빗살이 눈부시게 다가오지만
나는 곁눈질 하며 비를 맞이한다.

오늘 가을비를 곁눈질만 하다가
정호승 시인의 시를 곁눈질만 하다가
끝내 곁눈질만 하다가
내리는 가을비에
내가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