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빼로 데이'가 슬픈 까닭


[손석춘 칼럼] 젊은 벗들에게 띄우는 편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당신께 편지를 드립니다.
민망스러움은 쓸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띄우면서도 망설이고 있습니다.
당신과 친구들의 정서를 제가 너무 모르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경쟁만이 살 길이라 부르대는 살풍경의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탈출구'를 찾으려는 젊은 벗들의 몸부림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쓰기로 했습니다. 띄우기로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11월 11일. 그 날을 '빼빼로 데이'로 기억하는 당신께 꼭 들려드릴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미 소중한 이성친구에게 선물할 빼빼로를 이미 포장해놓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빼빼로 데이. 솔직히 중년의 저에겐 아주 낯선 날입니다.
그 과자를 생산하는 제과사는 단언하더군요. "빼빼로는 역사다." 1983년 '탄생'했다며 그 뒤 '누드 빼빼로' 따위의 새상품들이 출시됐다고 홍보합디다. 거기서 그치지 않더군요. 빼빼로는 문화랍니다. 1994년부터 부산에 있는 여고생들이 "키 크고 날씬하게 예뻐지자"며 시작했다지요. 메마른 몸매를 예찬하는 세태를 감안하면, 가히 놀라운 상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본의 논리는 어느새 과자라는 상품에 '사랑과 우정의 메신저'라는 고결한 가치까지 부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랑과 우정의 가치를 담은 과자?

왜 굳이 빼빼로데이만 문제삼느냐는 당신의 힐난이 들려옵니다. 옳습니다. 따지고 보면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지금도 이름을 더하려는 숱한 상혼의 꾀를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11월11일은 한 제과회사가 퍼뜨린 과자의 날일 수 없습니다.

11월11일, 그 날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선 날입니다. 당신께 생뚱없게 다가올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노조간부들의 비리가 곰비임비 터진 마당이기에 저의 편지가 마뜩지 않을 터입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당신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언젠가 학교를 졸업할 때 무엇으로 살아가시렵니까.
착각 없기 바랍니다.
노동자입니다.


민주노총은 힘없는 노동자들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조직으로 출범했습니다.
창립까지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일본 제국주의자들 손에, 때로는 친일파들 손에, 때로는 군부독재의 손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지요.
가장 상징적 노동자가 바로 전태일입니다.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이 출범한 그 날은 전태일의 분신 날과 이어져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이었지요.

군부독재가 물러간 뒤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87년 6월항쟁 뒤 민주노총이 창립할 때까지 8년 동안 2000여명이 구속됐습니다. 해고자는 5000여명에 이르렀지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2003년에도 204명, 2004년엔 337명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찬찬히 돌아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도 이 땅의 곳곳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온갖 차별과 서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뿐인 생명을 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나 당신 친구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대학가에도 '백수와 백조'의 노래가 퍼진지 오래입니다.

젊은 벗, 11월 11일은 동시에 '농업인의 날'이기도 합니다. 11월 11일이 한자어 '土월土일'(十一월十一일)임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밑절미인 흙(土)의 날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유지되는 기초인 농업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 줍니다.

그렇습니다. 노동자들의 장구한 투쟁과 잊혀져 가는 농업을 되새겨보아야 할 날, 그 날이 11월 11일입니다. 바로 그 날 밥을 굶어가며 날씬해져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퍼져간다면, 그것이 어찌 저의 슬픔에 그치겠습니까.

노동과 농업의 중요성을 되새겨보아야 할 날

물론, 당신이 저보다 더 이 땅의 모순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자본의 논리가 마땅히 우리가 진지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삶의 뿌리를 적잖은 벗들에게 잊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자신문과 텔레비전광고가 자본과 더불어 망각을 교묘히 부추기고 있지 않습니까.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몸을 붙태우며 진정한 사랑과 우정을 호소했습니다. 스물 두 살, 눈빛 고운 청년의 마지막 당부를 젊은 벗 당신께 전해드리며 총총 줄입니다.

"내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2005년 11월10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