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온 지가 언제인데 이제 와서 후기 쓰겠다고 달려왔습니다. 죄송해유.
우선 인사부터 드릴게요. 안녕하세요. 현재 초등논술 과정 32기! 출석만 열심인 '민영'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동안의 배움이 채 여물지도 않았는데 덜컥 여름학교 교사 모집에 신청을 했구요, 1박 2일 연수
까지 아무런 걱정없이 다녀왔습니다. 거기까지면 좋은데 제가 어쩌다 신입대표로 후기를 쓰게 됐죠?
문양공책에 문양을 그리다 얻은 최종 깨달음이 '인생은 삽질이다' 이후 정리란 게 통 하기 싫어진 저
인데 콩주머니를 돌릴 때 지쳐서 그랬는지 다른 신입 샘들에게 후기 쓸 권한을 넘겨주지 못했습니다.


01 종합운동장역으로 향하는 길
이미 지난 4월에  횡성 살림학교에 다녀온 저는 그때 그 길, 그 분위기만 믿고 있다가 봉사가 지팡이
를 짚고 더듬거리는 형국을 연출합니다. 그저 다 안다고 생각했거든요. '어, 그래...4월에 갔던 길이야.'
그런데 잘 모르겠는 거에요. 나누어준 프리트물을 봐도 몇 번 출구라고 쓰여 있지도 않고 말이죠.
겨우 출구를 찾아서 지상으로 올라오니까 몇 분 얼굴이 익은 선생님들이 커다란 여행가방을 부여잡고,
끌고 갈 곳을 몰라하고 있네요. 해오름을 출발한 관광버스를 기다리느라 목을 빼고서...

02 횡성으로
모르는 얼굴도 보이고, 해오름 교실에서 뵜던 얼굴도 보이고. 관광버스 안에서의 대면은 참말로 숨바꼭질
같아요. 앞을 보면 의자 사이로 뒷모습이 보일 둥, 말 둥... 뒤를 보면 건장한 청년이 소를 잡을 듯, 길다랗
고 핸섬한 꽃미남은 머리가 관광버스 지붕을 뚫을 듯. 어리둥절할 새도 없이 중간을 차지하고 계신 선배님
들의 웃음소리가 공기를 마구 간지럽힙니다. 누군가 갑자기 몸뻬를 꺼내들고 "이거 입고 유리드미할그야~"
하고 소리를 지를 땐 경악할 뻔했어요. 물론 다녀와서는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요.

03 야호! 횡성 살림학교다
도시의 높디높은 빌딩만 보다가 자신을 한껏 낮춘 작고 아담한 공간을 만나니 우리는 저절로 짐을 놓고
마음을 풀게 됩니다. 그리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는 주변을 휘휘 돌며 푹신한 털을 가진 개가 우아하게
돌아다니는 광경을 지켜보고 꽃향기, 풀냄새를 맡으며 점심 먹기를 고대합니다.

04 유리드미의 세계로
박스 안에 담긴 파랑, 보라, 검정 치마를 입고 둥글게 모였어요. 그리곤 엄청 땀띠 나게 뭔가 했던 것 같은데
후기를 쓰려니 막막하고 깜깜해서 읽는 이의 상상력에 맡기려고 합니다.(어쩌죠? 본 연수과정의 핵심이자
피크같은데 김경주 샘의 노고를 이렇게 보답해서. 흐흐) 그래도 지금 잠시 기억에 떠오르는 건 중간 중간 힘들
때마다 마셨던 꿀맛 같은 물하고 우리가 휘둘렀던 치맛바람의 침전물, 바닥에 놓인 프린트물 위로 수북이 쌓
인 먼지랍니다. 그땐 그래도 먼지가 징글맞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눈이 쌓였구나...

05 꿈나라로 가는 관문
새콤달콤한 오징어 무침이랑 오징어포와 땅콩, 목넘김이 시원한 맥주, 목을 빼고 얌전히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국화주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죠. (유리드미를 할 때) 넓게 퍼져서 둥글게 자리 잡았던
원시인들이 이제서야 네모난 집을 찾은 것 같습니다. 30여 명의 선생님들이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자리를 잡은
꼴이 꼭 이와 같았거든요. 비록 집이 좁아서 빼곡히 앉아 뻐근했던 하루의 소감을 나누게 되었지만 제겐 꼭 알
맞은 술안주가 되어 주었답니다. 곧 술의 힘을 빌어 이쪽저쪽 이야기가 펼쳐지는가 하면 한 명, 두 명 주무실 분
들이 종적을 감춥니다. 밤은 깊어만 가고...
그 이후 끝까지 남아서 아무도 모를 역사를 쓰는 자 누구인가.
-한낮의 몸운동으로도 부족해 혀를 유연하게 놀려 주신 현석 샘, 혜숙 샘.;;;
-대담을 펼친 예술가 박형필 샘, 뻘건 옷 입은 찍사(?), 추워서 유리드미할 때 입은 치마를 돌돌 감고서까지 자리
를 지킨 민영

그 외 김경주 샘도 밤늦게 샤워를 하고 털푸하게 머리를 털면서 역사를 쓰는 자들 앞에 잠시 모습을 비췄다가
잠을 청하러 가고 저도 5시쯤 젖은 머리로 잠자리를 찾아듭니다. 그런데 뒤늦게 깜깜한 모둠방을 더듬으며 잠자리
를 찾던 제게 텅 빈 한가운데 자리가 배정된 것입니다. 이상하단 생각도 없이 잠을 잘 자고 일어났더만 아침에
이연희 샘 말씀이 "그 자리 너무 추워서 원래 비워두거나 두툼한 침낭 쌓아놓고 자." 웬뇰입니까...ㅠㅠ 둔하고 둔한 민영.

06 자연의 선물 - 새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자연의 선물이 고마워서 잠을 깨워주는 새소리에 놀라서
라면 감동 그 자체였겠지만 그게 아니라 냉한 지대에서 잠을 자고 있는 저만 빼고 방이 텅 비어 버린 것입니다.
멍하니. 그래도 잠을 더 자고 싶어서 바닥을 몇 번 비비적대다가 어슬렁어슬렁 일어나서 다른 모둠방을 훔쳐
보았더니 다른 샘들은 아직도 잠의 삼매경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아후...어찌하여 저희 모둠 샘들만 너무도 부지런하셔서... 제게 풀 뽑는 일을 할 혜택을 어김없이 주시는지.'
뻘건 피칠이 된 목장갑을 끼고 왼손에 호미를 들고는 풀이 제멋대로 자란 곳으로 가서 무작정 호미질을 합니다.
한재용 샘이 등장하시기 전까지 자연공부가 하나도 안 된 제가 호미질을 하니 위험천만하게도 제가 제 손을 후려
치는가 하면 엄한 풀을 뽑곤 얼른 미봉책을 찾아 그 자리에 다시 심으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풀은 한번 뽑히고나
면 다시 심어지지가 않더라고요. 정말 끈질기고 독한 잡초만 호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뽑히지도 않을 뿐만 아니
라 뽑는 사람의 손목을 막 휘어감으려고까지 하는 겁니다...
자연에서 배우는 세상살이는 바로 이런 것일까요? 독한 잡종을 조심하자.

07 하늘과 땅과 사람
사람이 높은 하늘과 깊은 땅에 닿으려면 비행기를 타고 미친듯이 올라가서 추락하면 된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는
7월에 꽃 피우는 아이들을 만나야하니 그때까진 이 방법을 미루고 리코더와 밤벨, 피아노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아침 먹은 힘을 다 토해내면서 소리가 하늘과 땅에 닿도록 미친듯이 리코더를 불어 젖히니까 이연희 샘이 중간에
조절을 해 주십니다. 악쓰지 말라고... 여리고 강한 음을 달리 표현해야 한다고...
신기하기도 하지요. 유리드미를 할 땐 몸이 내 말을 안 듣더니 악기를 연주할 땐 악기가 저를 거부합니다. ㅎㅎ

08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지금까지 연습한 극의 조각들 -혼돈, 거신과 세상의 탄생, 사람의 출현- 을 연속해서 펼쳐보이기로 합니다.
한 모둠은 보여지고 한 모둠은 보기. 보여지는 쪽이었을 때 느낌은 자신이 뭘 하는지 잘 모르겠기도 하고 과정의
일부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신경 쓰면서 몸소 극을 체험하므로 힘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구경꾼이
되면 참말로 좋아요. 다리를 펼치든 오므리든 맘대로 자세를 취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 그렇구나, 저렇구나'
한눈에 펼쳐지는 극이 재미나고 신비롭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아마도 이미 극을 체험해 보지 않았다면 구경꾼이
되어도 아무 느낌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어딘가에 신이 있어서 그들을 만나면 그들의 표정만 보고도
하급 신과 상급 신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표정한 신은 하급 신이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은 인간이
신으로 상승한 것이니 최고의 신이 아닐까 하고요.

09 나-세상
연수과정을 통해 저희는 손을 쓰고 몸을 움직이고 기구(악기, 호미)를 이용하여 '내'가 세상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동안은 세상이 나한테 적당히, 편하게 다가와 주기만 바랬지 직접 다가갈 생각을 못한 저였던 것 같아요.
비록 그 과정이 무척 어설퍼서 따로 노는 손과 발을, 몸과 마음을 자책하기도 했지만 넓은 마음그릇을 가진 여러 선생
님들 덕분에 못해도 못한 줄도 모르고 마냥 좋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곤한 잠에 빠져서
연수과정을 버무리고 발효시켜 작지만 대단한 저력을 담아 먹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이름하여 "자뻑!" 하하하.

※ 마지막 웃음은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를 보신 분만 알겠는데 배우 박용우가 웃는 모습을 따라한 것입니다.

10 고마움을 전함
제 입맛에 꼭 맞는 음식을 만들어주신 윤귀섭 샘 + ?
캡숑 신나는 놀이기구를 태워준 무면허 종훈 샘
함께 횡성땅에 지진을 일으킨 줌마렐라 샘들 ('줌마렐라'는 아줌마와 신데렐라의 합성어로 신종용어라고 하네요.)
항시 눈앞을 어지럽혀 정신을 잃지 않게 해준 파리떼들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유리드미의 세계에 입문시켜 주신 김경주 샘을 비롯 이연희 샘, 이하나 샘, 이은나래 샘, 최현석 샘, 피아니스트(?)...<-해오름 빼밀리.
다는 아니지만 대체로 몸치인 32기 샘들-박수진, 김수림, 강은영, 홍혜숙 샘! 위안이 되었네요.^^


은혜를 모르는 둔녀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느낄 스크롤의 압박을 고려하여 이만 키보드를 던져
버릴까 합니다. 엇! 노트북이라서 키보드 못 던져요. ㅋㅋㅋ 모두 유쾌한 하루 보내시길...
내일 빨아놓은 치마를 안 가져가면 몸치로선 큰일나는데 혹시 여유되시는 분은 제게 문자로 "치마 가져와!" 이 다섯 글자
좀 보내주시길... '바람(wish)'둥이 글쓴이: 민영 010-6808-9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