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문득 뇌리를 스치며,
보고 보고 싶은 해오름 가족들에게.


여기는 빠리에요.
오늘까지 12일 째 머물고 있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요.
이렇게 몇 시간 동안 비 내리는 하늘을 빠리에서는 처음 봐요.
지난 주는 하늘이 낮고 넓으며 구름이 크게 크게 움직였어요. 꼭 손에 잡힐 것 같았는데..
이번 주는 하늘이 부시시하고  남회색 빛에 구름이 무겁게 눌려있어요.
지난 주는 따뜻하더니 이번 주는 추워요.
여기 사시는 분 말로는 빠리는 가을이 시작된 거래요.
그래서 긴 바지도 장만했어요.

여기서 즐거웠던 것들.
무단횡단하는 것,
골목골목 발 가는 대로 누비는 것,
예술가 다리에서 미쉘 아저씨와 프랑스식 인사한 것,
센 강을 따라 하늘을 보며 산책하는 것,
공원에서 산책하다 책 읽는 것, 그러다 지루해지면 그림 그리는 것,
냄새나는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것,
빠리 사람이랑 안되는 불어로 이야기 해봤던 것,
중고서점에 가서 이것저것 살피고 구경하는 것.

여행을 떠나기 전에 모든 것을 계획해야 한다는 마음에 숙제를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막상 여기에 와보니, 정말 좋네요.
계획은 증발하고 발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니
대학 와서 가장 자유로운 시간을 지내고 있어요.

다른 공간에 다른 시간 속에 제 자신이 놓이니,
서울 하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게 되고,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하게 되요.

책을 읽고 싶어도 한국에서 두 권의 책만 가져갔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고,
텔레비전이나 신문 같은 매체를 접할 수 없으며,
친구도 만날 수 없어요.
그럼에도 이런 제약이 싫지는 않아요.
이국 땅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주니까요.

한국에 돌아가면 내 생활의 이것 저것을 바꿔봐야지
생각도, 생활 패턴도 방향을 틀어봐야지
좀 더 여유를 가지며 넓게 봐야지
이런 결심을 천천히 마음에 새기고 있는데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히히히
내일은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요.
저가 항공이라 새벽에 나가야 하는데 비행기를 놓치지는 않을런지..
베를린도 기대가 되요.

또 글 올릴께요.
열흘 뒤에 서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