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실천의 도구로서의 시, 박노해

안효근 | 서울 한성여고 교사

노동 시인 박노해의 탄생
한 학교에 오래도록 근무해야 하는 사립학교의 특성 상 가끔 교생 실습을 나온 예전 제자들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졸업한 제자 하나가 국어과 교생으로 왔다. 주로 뒤편에 앉아서 하루 종일 소설을 읽다 조용히 하교했던 학생이라 기억된다. 성격도 밝아지고 많이 쾌활해져서 한편으로 반갑고, 한편으론 그녀의 젊음이 부럽기도 했는데 여전히 그녀의 꿈은 작가가 되는 거란다. 그럼 혹시 습작해놓은 게 있으면 좀 보여 달라고 했더니, 다음 날 박노해 평론을 들고 왔다. '문학이 사회적 실천의 방도가 될 수 있는가'라는 조금은 거창한 제목이 붙은.
필자는 박노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본명이 '기평'이라는 것, '노동 해방'의 약자인 '노해'를 그의 필명으로 삼았다는 것, 한때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으며,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산업 현장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일상적인 노동 체험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해낸 시인이라는 것, 그리고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다는 것. 그리고 시단에서 그는 주류가 아닌 아웃사이더이며, 간혹 지나치게 꼼꼼한 참고서 집필자가 그의 「손무덤」을 책에 싣는다는 것 정도를 안다.
박노해의 시를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시속에 담겨있는 그의 생각이 부러울 정도로 젊다는 것과 그러기에 때로는 시라는 형식보다 사회적 실천이라는 목적에 얽매이는 모습 등이다. '가투'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질주하던 학생 투사들의 모습이 떠오르게 만들고, 밤을 하얗게 새가며 주고받던 숱한 분노의 목소리도 귀에 쟁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또한 그의 시에는 도서관 한 귀퉁이 서가에 그냥 매장해버리기엔 여전히 유효한, 그러면서 가슴 아프고 화가 치미는 현실의 문제들이 잔뜩 들어있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경제 개발의 기반을 '양질의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에 두었기에 우리나라 임금 노동의 특징은 일관되게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투쟁도 격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기업가와 정부의 대응도 무자비하였다. 이렇게 누적된 노동 문제는 1970년대에 들어가면서 폭발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노동조합의 결성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노동쟁의가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열악한 노동 현실과 생활 조건 속에서 전태일의 분신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극한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박노해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1983)은 이런 상황에서 탄생하여, 80년대에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노동문학의 소중한 씨앗이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 「노동의 새벽」

시집 『노동의 새벽』의 표제시인 이 시는 의미상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연은 철야 작업을 끝내고 나서 피곤한 몸을 달래기 위해 소주를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고통스런 생의 반복으로 인해 위기를 느끼는 발단 부분이다.
2·3연은 시적 화자의 갈등이 노출되는 전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2연은 '오래 못가도 /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을, 3연은 '진이 빠진 / 스물 아홉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과, '운명을 어쩔 수 없다'는 좌절이 공존한다.
4연은 '차거운 소주를 붓는' 행동이 '분노와 슬픔을 붓는' 행동으로 바뀌는 전환 부분이다. 슬픔이 앞서 나타났던 갈등의 연속이라면, 분노는 좌절을 넘어서는 힘이 된다.
5연은 절정과 화해를 이루는 부분으로, 4연에서의 분노의 힘이 더욱 커져 '절망의 벽을 /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 거치른 땀방울'로 퍼져나간다. 절망은 사라지고, 그 대신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희망과 단결의 의지를 다지는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제목 「노동의 새벽」에서 '노동'은 현실의 고통과 절망을 의미하며, '새벽'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을 꽃 피우려는 결연한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고통의 인식과 초월이라는 이중감정의 병존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단순한 대립 구조 때문만은 아니다. 박노해 시의 미덕은 '절망의 벽'으로 제시된 노동 현실을 벗어나지 않으며, 그 운명을 감싸 안고 살아가려는 몸부림을 절실히 그려낸다는 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70년대 '동일방직' 사건. 1978년, 대의원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구사대들이 노조사무실에서 여성노동자들에게 똥을 뿌리던 당시 장면>

'현장성'이 돋보이는 현실 참여 시
『노동의 새벽』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지는 시집이다. '현장성', '진실성', '최고 수준의 정치적 의식과 예술적 형상화 능력' 등의 말로 칭송 받았던 이 시집의 작품들은, 노동 현장의 일상적 삶이 노동자의 언어로 형상화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감동을 주었다. 다른 시인들과 차별화되는 박노해 시의 현장성은 「시다의 꿈」같은 시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흘리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 「시다의 꿈」

시 속에서 '시다'로 상징되는 1970년대 서민의 생활은 팍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라에서는 경제 발전을 앞세워 저임금정책을 고수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으며 열악한 노동 현실에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노동자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다. 노동에 대한 편견과 부당한 노예 노동의 희생자로서 처절한 인내와 순종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그러한 비극적 삶의 한 표상이 바로 「시다의 꿈」이다.
공장의 '시다'가 깜박 졸면서 꿈을 꾼다. 수출역군이라는 구호 아래 쉴 새 없이 철야근무를 하느라 몸이 천근만근이다. 각성제 두 알로 버티기에는 그의 눈꺼풀에 내려앉은 피로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깜박 졸면서 온갖 상상을 한다. 자신은 지금 누군가의 보조로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당당히 미싱을 타보는 게 꿈이다. 미싱사가 되고 재단사가 되어 인정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하루하루 삶의 연명조차 어려웠던 시기에 노동자의 어려움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의 일상적 삶이었다.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 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수도 살릴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만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아장 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겠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짖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 「하늘」

권력 혹은 금력을 바탕으로 못 가진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드는 사람들에게 주는 처절한 외침이다. 최근 빗나간 자식 사랑으로 구설수에 오른 모 기업 총수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노력으로 오늘날의 거대 왕국을 이루었다고 자부하고 있는 듯하다. 숱한 노동자가 피눈물을 뿌리며 이룩해놓은 소위 경제대국의 꿈이 자신들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란 듯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노력을 애써 무시하려든다.
노동자들도 가정에서는 어엿한 가장이며, 사랑받는 남편이며, 존경받는 아버지이고 싶어한다는 사실, 평등이나 분배에 관한 담론은 1인당 국민소득 2만 불 시대에나 하라며 무조건 기다리라고 주문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피맺힌 절규이다.

불평등한 세상 속 곧은 목소리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제2항을 보면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외면한 채 기업주나 가진 자만을 위해 조정권을 남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평등은 경제 성장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고, 불평등은 경제 성장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최근 몇 년간 거시경제학 분야의 중요한 연구 성과이다. 우리나라 경제가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음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경제 성장과 아울러 사회 불평등 구조가 심화됐기 때문임도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때문에 「손무덤」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갈등이 아프게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수작이다.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 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을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상가처럼
외국상포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흐르고
프로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이리 많은지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나간 미친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 「손무덤」

기업체 총수의 인간적이고 가정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디즈니랜드나 일본여행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다. 내가 가진 재산 내가 쓰는데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으냐고 외칠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시다. 못 가진 자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그들을 조금은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기에.
박노해의 관심은 여성 노동자에게도 있다. 같은 노동계급으로서의 충실한 연대감을 위한 전제는, 여자 노동자이기에 겪는 이중고에 대한 관심이다. 노동과 가사와 육아를 전담해야 하는 여성 노동자와의 견실한 연대야말로 무엇보다 요구되는 덕목이다.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겆이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가끔 일부 신문들이 노사관계 특집을 마련하면서 내리는 전가의 보도와 같은 결론 중에 '노동자도 사용자도 갈등과 대립에서 벗어나 대화와 타협으로 함께 사는 틀을 찾아야 한다'거나 '노사가 지금처럼 자기 몫 지키기만 고집한다면 화해와 조화의 길은 멀고도 험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언뜻 보면 맞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노사가 서로 대등한 입장일 때 어울리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표현들은 노사관계의 책임이 노사 양쪽에 공히 있을 때에만 할 수 있는 말이다. 갈등과 대립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자기 몫 지키기에만 열심인 편이 어느 쪽인지 위의 표현만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더 나아가 대기업 노조와 영세기업 노조를 차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눈은 경제적 지표이외에 아무런 형평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함께 잘 사는 길을 찾는 것이 진정한 노동운동의 방향이지,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을 끌어내려 평균 임금에 맞추려는 노력은 누구에게 유익한지를 따져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하물며 양성평등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기업이든 구조조정을 할 때 여성 노동자를 우선순위에 두는 경우가 많은데, 노동자끼리의 편가름은 결국 노동자 스스로의 힘을 약화 내지 분열시켜 기업주 쪽에 유리하게 만들려는 의도이다.
박노해는 그 자신이 노동 현장에 있었기에 월급 노동자 모두의 연대만이 그의 꿈을 앞당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
분노처럼 불끈불끈 새싹 돋는구나
부드러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게
오 눈부신 강철 새잎
- 「강철 새잎」

강철은 따로 없다
작은 싸움도 온몸의 열의로 부딪쳐가며
큰 싸움, 빛나는 길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무쇠같은 존재,
강철은 따로 없다
- 「강철은 따로 없다」

그래 좋다 우리들 조업재개
쓰라린 패배의 노동을 한다
억장 터지는 배신의 노동을 한다
그러나 우리들, 임금노예 아니면 투사,
착착 조여드는 이 부끄러움
이 굴욕과 수치의 노동이 있는 한
우리는 결국 또다시 투쟁재개다
착착 조여드는 이 부끄러움
이 굴욕과 수치의 노동이 있는 한
우리는 결국 또다시 투쟁재개다.
- 「조업재개」

투쟁보다 더 큰 힘, 휴머니즘
꺾이고 꺾여도 다시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야말로 노동자를 노동자답게 만드는 힘이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말처럼 그의 시에는 현실적인 좌절을 투쟁의 의지로 전환시키는 힘이 있다. 인간다운 삶을 향한 의지는 그렇기에 깊고 순수하다.
그 어떤 경제학도 휴머니즘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했던가? 박노해의 시가 단순한 투쟁가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의 시 도처에서 발견되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있다. 그의 시  속의 화자들은 아내를, 자식을, 부모를 사랑하는 지극히 평범한 노동자 가장일 뿐이며, 따라서 그들의 외침은 불순하지 않고 오히려 순수하다. 그의 시는 같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강고한 신뢰가 바탕에 있으며, 잔뜩 사용자 쪽으로 달려간 우리 사회의 시각에 균형감각을 찾아준다.
시내버스나 지하철이 파업을 하면 언론은 시민들의 불편을 부각시키고, 파업의 원인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교사가 거리에 나서면 아이들의 학습권을 볼모 삼아 이권을 챙긴다는 이야기는 해도 왜 그들이 거리에 나섰는가는 말하지 않는다. 병원노조가 파업을 하면 왜 환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투쟁을 하느냐고 비난한다. 그럼 대중교통 수단이 서고, 교사가 거리를 헤매고, 간호사가 병원 바닥에 드러눕는 원인은 그들 모두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일까? 아니면 언론의 지적대로 제 밥 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서일까?
박노해의 시는 바로 이런 굳어진 고정관념들에 대해 준엄한 의문을 갖게 한다. 과연 우리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연대의식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

우리는 간다 조국의 품으로
조국이 우리에게 반역의 낙인을 찍어도
우리는 간다

이 땅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 나라의 슬픔과 기쁨 속에 자라나
푸른 하늘 맑은 강 이슬 맺힌 대지 위에
기쁜 노동과 해방의 노래를 불렀다
조국이 우리에게 쇠창살이어도
지하밀실의 깊고 긴 비명이어도
우리는 간다 조국의 품으로

사랑하는 친구여
이제 더이상 봄을 기다리지 말자
우리 함께 역사의 봄을 찾아나서자
우리의 이마 위에 우리의 깃발 위에
반역을 낙인을 찍은 것은 조국이 아니다
조국을 짓밟고 선 총칼들일 뿐이다
조국이 우리에게 죽음이어도
우리는 피어난다 민들레꽃처럼

우리는 간다 어둠에서 어둠속으로
목숨 바쳐 간다, 흐느낌으로 간다
사랑하는 조국의 품, 민중의 가슴팍으로
피로 쓴 '노동해방'
아 ! 아 ! 생명의 깃발로 간다.
- 「우리는 간다 조국의 품으로」

내 제자였던 교생의 박노해 평론 속에 있던 문장으로 글을 마친다. 브라질의 카톨릭 주교였던 '핼다 카마라'의 인용문이다.

"남미에서 누군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면 그를 성자라고 부르지. 그러나 한 번이라도 왜 그들이 그처럼 가난한가에 의문을 가지고 드러내 물어 보라. 그러면 사람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