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세가 만들어낸 블랙 코미디

- 윤고은, 「달콤한 휴가」

 

안효근 | 한성여고 교사 hooan@hanmail.net

 

 

영어로 bedbug라고 불리는 빈대는 사람을 비롯한 온혈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 빈대는 인간에 기생하는 가장 보편적인 외부 기생충으로서, 인가라면 어떤 곳에서나 서식한다. 낮에는 숨고 밤에는 먹이를 찾아다니다가 다시 은신처로 돌아가서 여러 날 동안 먹이를 소화시킨다. 성충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최소한 2년을 견딜 수 있으며, 사람을 물어 성가시게 하지만 사람에게 질병을 옮기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 빈대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라고 한다. 오늘날 덕수궁 주변의 옛 이름이 빈대굴인데, 이는 의주까지 피란 갔던 임금이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국경에서 묻어온 빈대가 궁 주변으로 번졌기 때문에 얻은 지명이라고 한다.

『한비자(韓非子)』에는 '삼슬식체(三蝨食彘)'라는 제목의 우화가 있다. '슬(蝨)'이라는 한자는 보통 이를 가리키지만 빈대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므로 ‘세 마리의 빈대가 돼지를 먹다.’ 정도로 해석될 듯하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돼지에게서 피를 빨아 먹던 세 마리의 빈대가 싸움을 벌인다. 피를 빨기 가장 좋은 부위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다. 싸움의 와중에 현명한 빈대한 마리가 길을 가다가 이 광경을 목격한다. 이 빈대는 "너희들 뭘 가지고서 그렇게 다투느냐"고 묻는다. 싸움에 열중하던 빈대 세 마리는 "그거야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그걸 왜 묻느냐?"고 대꾸한다. 그러자 길을 지나던 빈대는 정색을 하고 다시 묻는다. "조만간에 사람들이 제사 지내는 때가 닥치는 것을 아느냐?"는 질문이다. 생각이 깊어 보이는 이 낯선 빈대는 다시 말을 잇기를 "제사가 닥치면 돼지는 곧 장작에 구워질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경우 빈대들의 편안한 먹잇감은 제물로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정곡을 찌르는 이 빈대의 말에 세 마리 빈대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한다. 이 빈대들은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어 낯선 빈대의 충고대로 서로 다투지 않고 열심히 돼지의 피를 빨아댔다. 빈대에게 피를 많이 빨려 수척해진 이 돼지는 결국 제물을 고르는 사람들의 눈을 비켜갈 수 있었다.

돼지와 세 마리의 빈대는 짐작한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를 상징한다. 세 마리의 빈대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것은, 요즘 유행하고 있다는 승자독식을 위한 무한 경쟁을 의미한다. 이 우화는 공동체가 함께 살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저 혼자 잘 살기 위해 다투기만 하면 결국 함께 멸망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 풍요롭고 위생적이며 안락한 문명 생활을 위해 투철한 사명감으로 빈대를 박멸하는 일에 고귀한 희생정신을 발휘한 한 인간의 이야기가 있다. 이름하여 작전명 ‘달콤한 휴가’다.

달콤한 휴가

 

영화 <화려한 휴가>가 제목과 달리 우리 근대사의 비극을 담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목은 ‘달콤한 휴가’지만 이 소설의 내용 역시 결코 달콤하지 않다. 이 소설의 뼈대는 한 마디로 직장에서 갑자기 쫓겨난 실업자가 도심 한복판에서 벌이는 빈대와의 전쟁이다.

주인공 남자는 7년간 다니던 직장을 잃고, 받은 퇴직금으로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자 커피메이커․DSLR․메모리카드․외장하드․노트북․항공권 두 장을 산다. 교사인 아내와 2주간의 유럽 여행을 꼼꼼히 준비하던 그는, 인터넷 여행 동호회를 통해 자신이 여행하려던 지역에 빈대가 창궐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된다.

 

일주일쯤 지나자 그가 모은 정보는 몇 가지로 압축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빈대였다. 빈대에 대한 정보의 대부분은 빈대로 인한 피해사례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빈대 경험담을 읽었다. 비행기 안에서 빈대에 물린 신혼부부의 이야기부터 야간열차에서 물린 여행객, 그리고 빈대인지 모기인지 구분은 안 가지만 아무튼 뭔가에 물려서 극심한 가려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읽었다. 여행 막바지에 빈대를 만난 후, 돌아와서 반년이 넘도록 지워지지 않는 흉터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빈대를 생소하게 여기지만, 잘 생각해보면 여행에서 빈대와 동행할 확률은 굉장히 컸다. 청결상태가 양호한 숙소에 머문다 해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특급호텔에서도 빈대에 물린 사람들이 가끔 나타났기 때문이다.

- 윤고은, 달콤한 휴가, 『창작과 비평』, 창작과 비평사, 2009년 가을호, 179쪽

 

여행 중 빈대를 피하기 위해 고심하던 주인공은 점차 빈대 강박증에 사로잡힌다. 다행히 관련 사이트를 이 잡듯 뒤지고 유난을 떤 덕분에 운 좋게도 빈대를 만나지 않고 무사히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는데, 여행 이후 같은 동네 오피스텔에 사는 한 뉴욕 방문객에게 묻어 들어온 빈대가 그의 집 가까이로 번식함에 따라 그의 공포심은 도를 더해가고, 그는 빈대를 완벽히 예방내지 퇴치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다 한다. 온갖 종류의 빈대 약을 총동원하고, 하루에도 수차례 청소를 감행하며, 침대 시트를 햇빛에 내다 너는 등 부산을 떨지만 빈대에 대한 공포는 점점 심해져만 간다. 급기야 이 같은 공포심은 주인공 개인에서 그치지 않고 반상회를 통해 그가 사는 빌라 전체로까지 퍼져나간다. 빈대 퇴치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게 된 빌라 주인들은 드디어 빈대 퇴치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모임 이름은 빈사세(빈대가 사라진 세상)였다. 주도적으로 모임을 추진한 사람은 302호였다. 가구마다 한명 이상은 꼭 출석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출석률은 의외로 좋았다. 그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빈대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였다. 그들을 뭉치게 한 힘은 같은 번지수를 가진 사람들, 같은 구조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유대감이었다. 그들은 같은 위치에 냉장고를 두고, 같은 위치에 가스레인지를 두고, 같은 위치에 세탁기를 두고, 같은 위치에서 용변을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 같은 책, 188쪽

 

모임을 통해 빈대와 관련된 생생한 경험담을 접하게 된 주인공을 비롯한 ‘빈사세’ 회원들은 빈대를 막으려고 방역업체를 부르고 매트리스를 소독하는 등 더욱 고군분투하지만, 하루에도 200번이나 생식을 한다는 빈대에게 마침내 항복하게 되고, 결국 B102호 노인의 제안에 따라 빈대 박멸의 최후 수단인 거대숙주를 선발하기로 결정한다.

 

“빈대 퇴치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미끼를 이용한 방법을 쓰기 때문이지. 빈대는 사람 피를 섭취하니까. 그래서 미끼와 인간의 몸을 하나로 합쳐놓는 방법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거대숙주 요법인 게지. 그러니까 거대숙주는 다른 게 아니라, 인간일세. 빈대를 한사람에게 몰아버리는 거지. 인간 끈끈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 같은 책, 197쪽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 남자가 거대숙주로 선발되는데, 주인공은 빈대가 자신의 온 몸을 뜯는 최악의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편안한 안식을 느끼게 된다.

작품 내에서 빈대는 실존하는 문제이지만, 주인공의 아내를 통해 우리는 이들의 정신세계와 일련의 행동들이 강박관념의 산물임을 짐작하게 된다. 일단 주인공과 주변 사람들의 빈대에 대한 공포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문명생활을 위생적으로 즐기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강박관념으로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빈대뿐 아니라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모든 것들이 적이며, 퇴치되어야 할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이 같은 강박관념 혹은 과잉 텃세가 거꾸로 그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공포에 빠뜨린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대단이다진지한 문제가 한발 물러서서 약간의 포용력만 발휘하면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블랙 코미디가 되고 마는 것이다. 더불어 빈대하는 모에 시달리던 인물이 빈대의 공포에 제 몸을 맡기게 되는 불편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되는 점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사람들을 계층이나 이념으로 나누어 공격하는 행태가 만연한 이 하수상한 사회에서 이런 처방은 매우 적절하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소설 속에서 사회적으로 점차 확대되어가는 ‘빈대 문제’가 최근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바람과 겹쳐지면서 더욱 흥미 있게 다가왔다. 경쟁의 물결이 밀려오므로 이에 발 빠르게 대처해야 더욱 행복한 삶이 보장될 거라는 거대한 담론이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구상 동물들 중 특히 텃세가 강한 종족이다. 나와 다른 종교, 나와 다른 문화, 나와 다른 민족, 나와 다른 계층, 나와 다른 성, 나와 다른 학벌, 나와 다른 고향에 따라 그 정도만 다를 뿐, 인간의 문명은 따지고 보면 텃세의 문명이요 텃세의 역사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그 도가 지나쳐 이주노동자들, 여성들, 가난한 이들, 못 배운 이들에 대한 텃세는 이미 사방에서 흔하게 목격되고 있지 않은가?

 

‘슬견설’에서 배운다

 

‘지구 위를 혼자 여행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김남희의 따뜻한 포옹’이라는 부제가 붙은 『외로움이 외로움에게』라는 에세이집에는 필자가 티베트인 ‘잠양’과 나눈 인상적인 대화가 인용되어 있다.

 

“잠양, 한국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게 뭐였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이 이어졌다.

“파리채요.”

“뭐? 파리채? 아니, 파리채가 왜?”

파리채와 파리 잡는 도구인 끈끈이를 본 잠양은 그야말로 경악했다고 한다. 어떻게 생명을 죽이기 위한 도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게다가 끈끈이에 붙어 몸부림치면서 죽어가게 하는 끔찍한 방법을 고안할 수 있는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는 것이다.

“누가 누나를 끈끈이에 붙여놓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어떻겠어요? 너무 끔찍한 일 아니에요?”

내 생명과 파리의 생명을 동등하게 비교하는 잠양에게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잠양, 파리는 더러우니까 죽이는 거야. 인간에게 질병을 옮기잖아.”

“그럼 파리가 꼬이는 더러운 환경을 안 만들면 되잖아요? 그리고 또 파리가 더러우면 얼마나 더러운데요?”

옆에서 듣던 빼마가 끼어들었다.

“잠양은 방에 벌레나 모기가 들어오면 꼭 문을 열어서 내보내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먼지가 들어오기도 하는데, 절대로 죽이지 않고 나갈 때까지 기다린다니까요.”

두 사람이 연애할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잠양과 그의 티베트 친구를 만나 카페에서 차를 마실 때였다. 빼마가 눈앞에서 모기가 윙윙거리기에 늘 하던 대로 손바닥으로 탁 쳐서 죽였다. 그러자 앞 자리의 두 남자가 동시에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지르더란다.

“No mercy!(자비심도 없이!)”

모기가 널 죽이기라도 하느냐고, 어떻게 때려죽일 수 있느냐고 되묻던 두 사람을 보며 빼마는 자라온 문화의 차이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티베트인들은 어려서부터 파리나 모기, 물고기의 생명이 인간의 생명과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고 배운다. 사람에게 할 수 없는 일이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동물과 곤충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고 배워온 잠양.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가장 우월한 종족이고,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살상도 합리화될 수 있다고 배워온 나. 그 사이의 간격은 파리와 인간의 생물학적 차이만큼이나 아득하게 멀었다.

- 김남희,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웅진지식하우스, 2009, 27-28쪽

 

이와 비슷한 인식을 담고 있는 고전 산문도 있다. 바로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쓴 ‘슬견설(虱犬說)’이다. 한 나그네가 말하길 어떤 사람이 거리에서 개를 때려잡는 모습을 보고 다시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단다. 이 말은 들은 거사가, 난 거리에서 한 사람이 화로를 끼고 이를 잡는 것을 보고 다시는 이를 잡지 않겠다고 다짐했노라 대꾸했다. 아마 나그네가 요즘 사람 같으면 이렇게 반응했을 게다.

“헐~, 대박”

헌데 이 거사의 설명이 걸작이다.

 

“무릇 살아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곤충,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는 것을 원하고 죽는 것을 싫어한다네. 어찌 큰 것만 죽음을 싫어하고 작은 것은 싫어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개와 이의 죽음은 같은 것이겠지. 그래서 이를 들어 말한 것이지, 어찌 그대를 놀리려는 뜻이 있었겠는가? 내 말을 믿지 못하거든, 그대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게나.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나머지 손가락은 안 아프겠나? 우리 몸에 있는 것은 크고 작은 마디를 막론하고 그 아픔은 모두 같은 것일세. 더구나 개나 이나 각기 생명을 받아 태어났는데, 어찌 하나는 죽음을 싫어하고 하나는 좋아하겠는가? 그대는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 보게. 그리하여 달팽이의 뿔을 소의 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큰 붕새와 동일하게 보도록 노력하게나. 그런 뒤에야 내가 그대와 더불어 도(道)를 말할 수 있을 걸세.”

 

이 글을 읽다가 문득, 하긴 이에게도 생명이 있다면 죽기 싫어할 거라는 말에 공감이 갔다. 좀 더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결혼하고 애 낳고 열심히 사람의 피를 빨아 가족을 봉양하던 가장 이(虱)의 일대기도 상상해 봤다. 아이들에게 <슬견설>을 가르친 날 밤이면 왠지 ‘딱딱이’라는 전기충격기로 모기를 죽여 가며 통쾌해 하던 내 모습이 좀 야만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잘 알다시피 인간은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를 둘러싼 자연 환경은 그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뿐이라는 자만심에 사로잡혀 개발에 파괴만 일삼다가 결국은 자승자박, 스스로 인간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조만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전 세계 105개국 정상들이 모여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새로운 기후 협약을 마련하기 위해 기후변화회의가 열린다. 협약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인간 중심의 사고, 즉 텃세에서 벗어나는 것을 대전제로 삼아야 쓸 만한 성과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이규보의 <슬견설>을 읽고 시작하는 것은 어떨지.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를 금과옥조로 삼고 성장을 향해 달려가는 마당에 얼마나 성과를 낼지도 지켜볼 일이다.

 

텃세가 만들어 낸 코미디

 

전술했다시피 인간의 텃세는 지구 대표 선수급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사회 기득권들의 텃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국가 권력은 항상 선택받은 소수가 차지했으나, 그들 중 대부분은 개인적 목표 추구에 권력을 사용했다. 게다가 우리나라 관료들에게는 이타적인 봉사의 이념이 현저히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무한 경쟁을 통해서 소수의 인재만 키워내면, 그 인재가 우리 사회를 발전시켜 국민을 먹여 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비단 정부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같은 믿음은 대단히 순진한 착각일 뿐이다. 재벌기업이 수천억의 이익이 생겼다고 해서 국민들이 그 혜택을 누렸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 보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 하청업체들은 점점 더 허덕이고 있고,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점차 더 비정규직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그들의 지갑은 더욱 얇아지고 있다. 과연 우수한 소수의 인재가 나라 전체를 먹여 살린다는 말은 진실이긴 한 건가? 이것 역시 또 다른 텃세의 변형된 모습은 아닌가?

내 주변의 적지 않은 사람들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싹수 있는 한두 명에게 집중해서 지원해야지 나머지 ‘빈대‘들에게까지 제한된 자원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오늘날에는 소수의 천재만 의미 있을 뿐, 나머지는 그저 빈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상식으로 통한다. 고교 평준화 때문에 고등학생들의 성적이 하향 평준화되었다든지,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 안전망 구축 같은 복지정책 때문에 성장 잠재력이 위축된다든지 하는 주장들이 모두 이러한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들 말대로 소수의 능력자를 걸러내는 진짜 공정한 경쟁을 하려면 우선 기회의 균등이라는 형식적 평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한 달에 과외비 천만 원 쓰는 학생과 십만 원 쓰는 학생의 성적 차이가 그들의 능력의 차이, 경쟁력의 차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득권의 텃세에서 비롯된 우리나라의 구조적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권력가의 자식들은 온갖 구실을 만들어서 국민의 의무인 군대로부터도 자유롭다. 돈 많이 버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금을 적게 내고, 심지어 탈세를 일삼아도 처벌받지 않는다. 힘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금방 사면된다. 부도덕한 전직 권력자는 아이들 한 달 용돈도 안 되는 통장 잔고를 갖고도, 여전히 황제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더불어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기본 상식을 믿는 국민은 또 얼마나 될까?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한 죄로 재판받은 기업인에 대한 감형의 사유가 ‘대기업 총수로서 국가 발전과 사회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고 한다면 답은 이미 나온 거나 마찬가지다. 사회 정의의 최후 보루라는 사법부 스스로가 “법 앞에서는 만 명만 평등하다.”는 점을 스스로 시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힘겨웠던 민주화의 과정은 사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불평등의 해소, 최소한의 기본권과 기회 균등을 획득하기 위한 싸움의 과정이었다. 말 한 마디와 글 한 줄, 심지어 머리와 치마 길이에 이르기까지 감시당하고 통제 당하던 때가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우리는 1987년이 되어서야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다시 뽑게 되었고, 파업 중인 노동자가 변호사의 도움을 합법적으로 받게 된 것은 1997년의 일이다. 우리는 한 나라의 국민이었지만 실상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누린 평등한 백성은 아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때 권력의 핵심을 이루던 사람들이 지금 평등의 과잉을 외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런 신분제가 헌법보다 더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고졸 출신이라는 게 비난의 이유가 되고, 그래서 대통령은 번듯한 명문대학을 나와야만 하고, 그런 높으신 분들에 의해 앞길이 막히고 빈대 취급을 당하는 것이 여전히 자연스러운, 이 나라에서 기회 균등과 형식적 평등이 넘쳐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오히려 기회의 균등, 형식적 평등이 아직까지도 전면적으로 실현되지 않아 소수의 기득권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불공정한 경쟁 구도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것이 진짜 문제는 아닌가? 그들은 평등의 과잉을 내세워 경쟁의 부재를 비난하지만 실상은 교묘한 텃세를 통해서 그들만이 기회를 독점함으로써 경쟁에서 스스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경쟁주의의 가장 큰 적은 바로 평등주의를 배격함으로써 진정한 공정 경쟁을 가로막는 그런 사람들이다.

 

평등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 사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정하기만 하다면 경쟁을 반대하지 않는다. 평준화를 고수하는 것은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의 실현을 위함이다. 국가 경쟁력이 추락하는 것은 평준화로 인한 학생들의 실력 저하 때문이 아니라 불공정한 경쟁을 통해 소위 명문 대학에 진입한 ‘기득권‘이 더 이상 경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회를 독점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그로 인한 경쟁력 상실의 책임을 오히려 기회균등의 확대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있다. 고교 등급제와 관련된 논란의 와중에서 한국 교육의 모든 문제를 일선 고등학교의 부실한 내신관리 탓으로, 혹은 교사 탓으로 몰아세운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경쟁주의자들은 항상 이렇게 주장한다.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잘하는 몇몇에게 집중해야 살아남는다.” 또는 ”다소 불공정한 면이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운운. 그러나 그 ‘잘하는 몇몇’이 누구를 위해 잘하는지, 과연 누구나 납득할만한 과정을 거쳐 인정된 몇몇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신분제에 버금가는 자폐적인 기득권과 그들에게 집중된 기회, 그리고 이 구조의 폐쇄적인 재생산은, 선진국의 기본 전제인 투명성 내지 공공성 확보와는 거리가 멀다. 기득권이 모든 기회를 독점하며, 스스로 경쟁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임무를 방기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똑똑함 혹은 유능함의 기준은 명문대 입학 여부에 의해 일차적으로 결정된다. 그것은 곧 명문대가 우리 사회의 법이요, 정의요, 진리라는 말로 확대된다. 대학들은 성적이외의 기준을 만드는 일이 두려운 것이다. 입시 전형이 다양화되면 대학들이 지금까지 성역처럼 지켜온 선발의 기준이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고 명문대가 찾지 못한 새로운 능력 기준이 다른 대학들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것이다. 이것은 기득권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명문대들에게는 일종의 재앙이다.

 

그 동안 명문대들은 노골적인 기득권 봐주기를 통해 우수한 학생들을 싹쓸이 해 놓고서는 이것을 무기로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기회와 재화와 혜택을 독점해 왔다. 명문대일수록 주장한다. 쉬운 수능으로 학생들 간의 경쟁이 없어지고 그 결과로 능력이 저하되고 그런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대학이 곧 죽는다고. 그러나 종말을 맞이하는 것은 대학이 아니라 명문대의 권위이고, 명문대의 독점이며, 우수한 학생 데려 오는 것만으로 자신의 임무를 한정하는 명문대의 안일함, 명문대의 폐쇄성이다. 반대로, 점수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절대 다수의 학생들에게는 더 넓어진 선택의 폭과 기회의 향상,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의미한다.

한편 대학 자율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대학일수록 고교 간 실력차를 운운하면서 강남권 학생들만 가려 뽑으며 “평등주의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위 명문 사립대들은 돈이 없다고 늘 투정하면서도 스포츠스타를 데려 오기 위해 사상 유래 없는 파격적인 조건들로 총력전을 벌일 정도로 가증스럽다. 등록금은 물론 국내 최고 수준인데다, 특히 모 대학은 기여 입학제를 추진한 2001년 한해에만 무려 408억 원이라는 기록적인 기부금을 거둬들였다. 명분이야 학교발전기금이지만 학연을 빌미로 기득권 유지비용을 징수한 것에 불과하다.

명문대일수록 교수들 중 약 70% 이상이 자기 대학 출신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대학들의 실력이 형편없는 것은 이와 같은 근친교배에 의한 열성 유전자의 재생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국 대학은 교수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하고, 일본에서는 같은 대학 내에서는 교수 진급이 허용되지 않는다. 부교수에서 정교수가 되려면 다른 대학으로 가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 조교수 되면 정년까지 편하게 간다. 중간에 잠깐 정계에 입문하여 외도를 했다 해도 정년 보장에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자기 학교 출신이 많으니까 선후배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여전히 자기들만의 상아탑에서 천하를 호령한다.

이는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여서 격무에 시달리는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고 하는 검사들이 더 많은 검사를 뽑는 일에는 반대한다. 의료 분야도 마찬가지다. 의대 정원을 점진적으로 늘려서 인턴이나 레지던트들 고생도 좀 덜어주고 국민 1인당 의사 수도 더 늘어나야 국민 보건에 도움이 될 텐데 그들 역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증원은 반대한다. 정치 분야도 대동소이하다. 참신하고 능력 있는 정치가가 국민들의 주목을 받을라치면 어떻게 해서든지 깎아내려 제거하려 든다. 그래야 자신들의 희소가치가 하락해서 권위도 하락하고 수입도 하락하고 사회적 인기가 하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정책들을 결정한다.

평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진짜 경쟁력 있는 사회다. 천재가 먹여 살리지 못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보통의 능력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단지 몇몇 천재의 등을 치는 ‘빈대’로 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능력과 재능이나마 최대한으로 맘껏 발휘해서 우리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함이다.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일이 ‘기득권, 그들만의 리그’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는 기득권의 텃세가 나머지 대다수를 ‘인간 빈대’로 만드는 일이기에.

 

* 논술꺼리

1. 소설 <달콤한 휴가>에서 주인공은 빈대에 대한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다가 거대숙주로서 그들과의 공존을 택한 순간 달콤한 안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해결 가능한 사회 문제 하나를 제시하고 타당성 있게 설명하시오.

 

2. 다음 예문을 읽고 글쓴이의 관점에서 세 가지 여름 벌레의 속성을 일반화하여 인간 삶의 양태와 관련지어 비교 설명하시오.

 

여름이 가까워졌다. 벼룩. 모기. 파리가 나타날 것이다.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고 하자. 이 세 가지 벌레 중 어느 것을 제일 사랑하느냐고, 답은 반드시 이 셋 중에서 택해야 하고, 답이 없는 백지를 내놓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나는 벼룩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벼룩은 피를 빨아먹는다. 이 점이 가증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 소리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빨아먹는 점은, 솔직하고 시원시원하다.

그런데 모기는 그렇지 않다. 단번에 피부를 쿡 찌르는 면에서는 어느 정도 철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찌르기 전에 웽웽거리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것이 딱 질색이다. 만일 그 웽웽거림이, 사람의 피는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질색이다.

파리는 한참을 웽웽거리다가 내려앉아서는 몸의 기름이나 땀을 조금 핥을 뿐이며, 간혹 상처나 부스럼을 만나면 횡재를 하기도 한다. 파리는 아무리 좋고 아름답고 깨끗한 것일지라도 가리지 않고 파리똥을 갈기길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땀이나 핥아먹을 뿐이거나 오물을 떨어뜨릴 뿐이어서 감각이 마비된 사람들은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대로 내버려두게 된다.

중국인들은 파리가 전염병균을 옮긴다는 것을 아직 잘 모르기에 파리잡기 운동은 아마 그렇게 확대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장구할 것이고 더더욱 번식할 것이다. 그러나 파리는 좋고 아름답고 깨끗한 것에 똥을 싼 후에 득의만만해하며 도리어 그것이 불결하다고 비웃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어쨌든 다소 도덕적이라고 하겠다.

- 루쉰, 여름 벌레 셋,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예문, 2008, 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