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열패 신호를 향한 헌시

- 드라마 <공부의 신>

 

홍성희 | 논술교사 assilence@yahoo.co.kr

 

특목고 입시 전문학원 강사인 친구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한다. 이유가 비장하다. 이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단다. 피식, 웃으며 ‘니가 저기 가는 저 많은 사람들 마음에 들어갔다 나왔냐’라고 물을 수밖에. 일언지하에 타인의 행불행을 말하는 유아기적인 발언이 딱했을 게다. 피로에 찌든 얼굴로 친구가 되받는다.

“너, 매스컴에서 사교육이 어떠니 저떠니 하면, 애들 힘들겠구나, 부모들은 등골 빠지겠구나 할 정도지? 그런데 말이야, 한복판에서 보면 막연히 느끼는 것보다 훨씬 심각해. 사교육 현장이 딱 우리 사회 축소판이거든. 강한 놈만 살아남아. 강한 놈이야 짐작하겠지만 재력 있는 부모 밑에 태어난 애들이지. 물론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도 머리 좋거나 성실한 애들도 있지. 그런데 이놈의 입시구조란 괴물은 재물에 입맛이 길들여져서 그걸 가진 애들만 편식하도록 지금 이 순간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거든. 입시제도가 계속 복잡해지는 이유가 뭐겠니? 요즘 애들 시험지 봐봐. 손도 못 댈걸. 시험 문제들은 머리나 성실만으로는 따라잡기 힘들게 줄행랑치기에 바빠. 머리 좋거나 성실한 애들이 간혹 선택을 받는다면 그건 구색 맞추기 정도나 될까.”

약육강식이야 인류 역사의 본성 아니냐는 말에 친구는 말을 잇는다.

“글쎄다. 지금처럼 다른 것 모두 제치고 자본이 약과 강의 유일한 기준이 된 적은 없었을걸. 자본의 속성은 자기증식이야. 낡은 말이지만 부모의 재력에 따라 열다섯 명 한반의 아이들 출발선이 순차적으로 그어져. 예전에는 그 출발선 차이가 그리 크지 않거나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은 폭이 너무 크고 확연하다는 거야. 그리고 그 선에 따라 관심 받고, 관리 받고, 통제되지. 아이들은 더 이상 차별을 차별로 받아들이지 않아. 당연한 거라 여겨. 특권 또한 마찬가지구. 요즘 애들 얼마나 황폐한지 몰라. 개네 사람 아니다. 좀비나 기계지. 하루 15시간 이상 정해진 정답 찾기에 지쳐 눈이 멍해진 아이에게 선생이 뭐라고 하는 줄 아니. ‘야, 재 사탕 물려. 지금이 어느 땐데, 너 무뇌아지? 그냥 너 집에 가라. 그렇게 정신줄 놓고 있는 것도 같은 반 친구들 학습권 침해하는 거니까.’ 아이들이 그런 폭력적인 구조에서 기계적으로 생존해가는 게 끔찍해.”

 

대안교육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니 교육방법이야 신중히 선택하면 된다는 말에 친구가 쐐기를 박는다.

“난, 아이들의 입시 그 이후의 시간들이 더 절망스러운 거야. 자본과 경쟁의 구조에 유년기와 청년기를 철저히 착취당한 아이들은 고스란히 역할만 바뀐 채 자본을 떠받는데 순응해야 될 걸. 경쟁의 한복판에서 이미 자기 한 몸 추스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온몸으로 체득한 아이들은 자기밖에 몰라. 그 애들 탓하면 절대 안 돼. 사회가 그렇게 만든 거니까. 자기 외에는 눈 돌릴 여유도 없는 애들이 답답한 사회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겠니? 교육과 대중문화 시장에서 아이들을 상술로 철저히 착취하고 그 후엔 아이들에게 변혁을 요구하는 것도 후안무치지.”

그래도 ‘아직, 너는 모른다’라는 표정으로 친구는 장광설을 맺었다. '요즘 많이 피곤하구나’ 라고 생각했다. 친구는 사교육 입시현장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으니까. ‘너나 어서 탈출해라’라는 많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너도 니가 폭력적 구조라고 부르는 그곳에서 역할을 담당하고 이윤을 얻잖아.’라는 말도 할 뻔했다. ‘야, 그래도 애들은 애들만의 세상이 따로 있는 거야. 니가 매일 접하는 애들이야말로 소수지. 그렇게 조건을 겸비한 애들이 몇이나 되겠니? 대부분 평범한 아이들은 우리 때처럼 투덜거리면서도 건강하게 자란다니까. 비약 좀 하지마라.’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어느 때는 애들 키우기 최적의 조건이라 아이들 낳아 키웠니? 야, 엄설 좀 고만 떨고, 제발 너나 좀 잘 챙겨라.’라고도 말하고 싶었지만 친구의 얼굴이 어둡다.

 

드라마 <공부의 신>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재미 혹은 감동,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둘 중의 하나일텐데. 저 드라마는 어찌하여 일관되게 스트레스만 줄까, 그것도 고압의. 하지만 ‘놀라서’ 보고야 만다. 거의 수습불가, 대략난감, 참담개그인 우리 교육 현실을 살짝 꼬아 저리도 멋들어진 성찬으로 미화(드라마는 올곧게 사교육만이 대안이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복잡한 설정으로 그 의심과 혐의로부터 아슬아슬하게, 종횡무진 빗겨간다.)하는 화술이 수준 이상이니까. 그리고 ‘분노’ 때문에 보고야 만다. 오, 놀라워라. 드라마는 끊임없이 시민들을 ‘계도’하고 있었다. 가난하고, 능력 없고, 의지박약인 시민들은 모두 TV 앞에 모이시라. 당신들이 ‘별 볼일’ 없는 ‘찌질이’로 사는 이유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드라마가 명쾌히 족집게로 집어 드릴테니. 그리고 ‘결말’이 궁금해서 본다. 드라마가 결국 인생 한방, 명문대입학, 인생 볕듦, 그리고 그 길로 안내하는 사교육 만만세로 끝날 것인지 궁금해서 본다. 그리고 반성하며 보고 있다. 까르르 웃으며 걸어가는 여학생들을 보며 속편하게 ‘좋을 때다’를 연발한, 해괴한 패션으로 상스런 욕을 해대는 아이들을 보며 ‘요즘 애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라고 연발한 무신경과 무관심을 반성하며 보고 있다.

 

공교육, 사망을 선고받다

 

‘공부의 신’의 배경이 되는 병문 고등학교는 ‘찌질이’들이 다니는 학교다. ‘찌질이’ 학생들과 ‘찌질이’ 선생들이 모여 별 볼일 없는 하루를 보내다 흩어진다. 찌질이 학생들이야 물론 공부 못하는 애들이다. 아이들의 수업 광경은 가관이다. 엎어져 자고, 춤추고 노래하고, 화장하고. 가끔 뉴스에서 ‘무너진 교실’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교실 풍경과 비슷하다. 그런데 정말 그 정도일까? 드라마는 찌질이 선생들의 묘사에 특히 공을 들인 듯싶다. 선생들의 모습(생김새, 의상으로 나타나는 스타일, 말투 등)은 하나하나 독특한 개성을 가졌다. 그런데 그 개성이란 것들이 하나같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이다. 몇몇 선생은 특정 동물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일단 간단하게 외향으로 공교육 선생들을 폄하하기로 한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그럼 선생들의 내향은? 무사안일, 오합지졸, 부화뇌동 정도로도 설명은 충분할 듯. 아이들에게 애정을 가진 이는 특별반 부담임 한수정 한명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캐릭터도 착한 것 외엔 분명치 않다. 그 많은 선생들 중 그저 평범한 교사로서의 소양을 가진 이가 한 사람뿐이라니. 드라마틱한 전개를 위한 거라고 넘기기에는 설정이 너무 과하다. 드라마는 실적(대학 입학률)이 안 나오는 학교 선생들을 도매금으로 매도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함량 미달 학교에는 함량 미달 교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시청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저러니 학교를 안 따질 수가 없다고. 저러니 사교육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월요일, 화요일 공교육 불신은 깊어만 간다.

 

사교육, 학교를 점령하다

 

한때 잘 나갔으나 시류에 편승하지 못하는 정의감 때문에 뒷골목을 전전하는 변호사 강석호가 학교를 접수한다. ‘접수한다’라는 점잖지 못한 말이 똑 어울릴 만큼 그의 등장은 학교라는 공동체의 전후 맥락은 물론 구성원들의 의견과 무관하다. 강석호는 독단으로 학교 공동체에 진단을 내리고, 대수술을 감행한다. 스스로 메시아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교육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유능한 설계자의 처방으로 완결될 수 있다는 최근의 세태가 드러난다. 교육 당사자들(교사, 학생, 학부모)의 고민, 대화, 토론은 무용하다. 왜? 비효율적이니까. 입시 전문가 한명이면 만사 해결이라는 정서가 강석호를 탄생시켰다.

강석호라는 캐릭터는 입학사정관제로 등장한 입시컨설팅 붐과 무관하지 않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구원했던 은사에 대한 보은의 마음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빼닮은 아이들에 대한 측은지심, 학교를 삼키려는 대자본에 대한 전의가 강석호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포장된다. 물론 혼자 그 대사업을 완수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내부수혈은 꿈도 못 꿀 일이다. 학교 선생들은 정신도 썩었지만 실력도 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부 수혈을 받는다. 나태해 빠진 학교에 생명을 불어넣을 살아 꿈틀거리는 싱싱한 수혈 말이다. 국영수과, 그 세계에서 전설이 된 강사들을 학교로 불러들인다.

외부 강사의 영입은 공교육 몰락 선언이다. 영입된 외부 강사들을 아무리 각자의 절절한 사연으로 위장한다 해도 그들이 사교육 강사들을 상징한다는 걸 시청자가 모를 리 없다. 드라마 속에서 억울하게 영어 강사 양춘삼이 천하대 특별반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설정 당해’ 뭇매를 맞는다. 하지만 그는 희생양일 뿐. (사회적 논란을 피해가는 전략 면에서 이 드라마는 매우 지능적이다). ‘천하대 특별반’ 강사들은 입시 유형과 문제 풀이 방식, 학습 노하우, 입시에서 살아남는 정신 상태까지 입시와 관련된 모든 것을 기능적으로 마스터한 사교육 스타 강사의 완벽한 재현이다.

 

샘테이너의 탄생 - 선생님, 예능인으로 거듭나다

 

선생. 먼저 산 사람들이란 의미일 것이다. ‘먼저 산 사람’이란 의미는 삶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다. 드라마는 꾸짖는다. ‘선생’이라는 과거 아우라에 갇혀 아이들을 걱정하는 척 하면서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선생’도 아닌 선생들의 위선을 말이다. 그러니 고린내 나는 그 ‘선생’이라는 타이틀 먼저 벗어 던지고 아이들에게 정말 ‘긴요한’ 것들을 아이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주라고 꾸짖는다. 아이들에게 정말 긴요한 것은 입시에 나오는 문제들을 족집게로 콕콕 집어주는 것.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옵션이다. 옵션은 아이들이 원할 때만 알려주면 된다. 아이들이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참교육을 실현하겠다고 문제풀이 과정을 구구절절이 나열하는 것은 월권행위이다. 비효율을 참아낼 인내력과 시간이 아이들에겐 없다.

명심할 것 또 한가지. 수요자들을 지루하게 하지 말라. 매력 덩어리가 되어야 함은 21세기 교육 서비스인의 새로운 사명. 투입된 강사들의 면면들을 보라. 도사를 연상케 하는 기인, 현란한 가무로 온 몸을 던져 주입시키는 예능인(순간 고3 아이들은 코흘리개가 된다), 아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카리스마형, 거기에 자폐적 천재형까지. 얼마나 각자의 개성들로 똘똘 뭉쳐졌는가. 은근하거나 담백한 강의는 직무태만이다. 학습 노동에 지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탄산수처럼 톡 쏘는 강의다. 수험료를 내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강의를 들을 권리가 있다. 그러니 교사들은 아이들의 취향 변화를 부지런히 연구해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드라마를 본 아이들은 말한다고 한다. ‘선생님은 왜 그렇게 재미있게 못 가르쳐요?’, ‘드라마에서는 그냥 외우라고 하던데, 그 설명 꼭 들어야 해요?’, ‘선생님은 극약처분 같은 거 없어요? ‘공부의 신’ 선생님들은 족집게 문제집 가지고 있던데’. 심지어 사회 교사에게는 ‘공부의 신에는 사회 선생님은 안 나오던데, 사회가 중요하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요?’라고도 묻는단다. 사교육 시장은 소수의 스타강사가 점령한지 이미 오래라 한다. 현장 강의로, 그보다는 대부분 인터넷 강의로 아이들은 스타강사를 접한다. 대한민국의 아이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강사의 강의를 듣는다고 상상해보라. 사회의 다양성이란 다양한 경험을 가진 구성원들로 유지된다.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은 사회란 전체주의 사회다. 드라마는 말한다. 교육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시장을 움직이는 건 고객의 선택일 뿐이라고. 사회의 다양성? 획일화? 그게 뭔데? 라고.

 

현실에선 없는 얘기 - 낙오자들 시해를 입다

 

이 드라마가 기만적인 이유는 약자(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불우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삼아 사교육의 효과를 역설한다는 점이다. 단기간에 대한민국 최고 대학 입학을 장담하는 것은 최고의 사교육만이 가질 수 있는 뱃심이다. (그 뱃심은 시험지 유출도 서슴지 않는 정보력이 바탕이 된다). 그런 최고 등급의 사교육을 소외 계층 아이들이 접한다?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일. 사회의 상위 2%만 접근할 수 있는 정보들은 절대로 그 외의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정보의 배타성이야말로 시장에서 환전 가능한 최고의 가치이니 말이다. 사교육의 효과를 공중파로 홍보해야겠는데, 그것이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고가의 서비스임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는 일. (드라마의 원작인 일본 만화는 읽지 못했으나, 이 드라마는 사교육 자본과 무관하지 않다) 시청자들의 정서를 배반하지 않고 사교육 홍보의 효과를 배가 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서 불우한 문제아들이야말로 적격이다. 하지만 역시 본성은 숨기기 어려운 것. 주인공인 강백현은 강석호의 설득에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강석호가 강백현의 단칸방을 구해주는 것으로 굴복한다. 방에 대한 이자로 ‘천하대 입시반’에 들어온 것. 불우한 아이를 이중으로(생계 지원과 학습지원) 돕는 강석호의 열의에 코끝이 찡할 만도 하지만 영 불편하다. 드라마에서 홍보하는 것이 사교육임을 숨기기 위해 소외 청소년의 생존 문제까지 끌어들인 설정은 비겁하다. 드라마 속 천하대 특별반은 사교육일 뿐이다. 사교육은 거래의 대상이다. 최고 학벌을 보장하는 단기반은 최고의 액수로 거래될 것이 뻔하다. 그런데 드라마 속에서는 넉넉하지 않은 아이들이 현금의 거래 없이 그 안에 안착해 있다. 사교육 효과도 홍보하고, 이미지 홍보도 하고. 꿩도 먹고 싶고 알도 먹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찔해라. 현실의 사교육은 벌어들인 돈을 유흥사업에 쏟아 부을망정 절대 형편 어려운 아이들에게 최고 학벌을 보장하는 입시반을 무료로 열어주지는 않는다. 왜? 사교육은 잘 가르치는 것도 실력이지만, ‘배타성’이야말로 진정한 실력이기 때문이다. 잘 가르치는 선생보다는 비싼 선생이 더 잘 팔리는 이유다.

 

냉혹한, 너무도 냉혹한 - 당하지 않으려면 공부밖에 없다

 

 

아이들은 왜 공부할까? (한참 열공 중인 당사자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필자는 어쩌면 조금 무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1번, 대한민국에서 주민등록증상 18세 언저리 나이까지는 대부분 학교에 다니니까 그냥 한다. 2번, 어쩔 수 없이 다녀야 할 학교라면 열심히 하는 것이 좋으니까. 3번, 안하면 부모님에게 혼나니까. 부모님 눈 밖에 나면 생존에 위협이 가해지니까. 4번, 대한민국에서는 학벌이 곧 자격증이니까. 졸업해서 어디든 취직해 밥벌이 하려면 당연히 공부해야지. 5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그 과정들이 꼭 필요하니까. 아이들은 어떻게 하루 15시간 이상의 학습 노동을 견뎌낼까. 아니, 나는 어떻게 그 시간들을 견뎌냈을까. 광고 문구처럼 공부가 제일 쉽거나 재미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필자는 저 위에 이유 중 몇 가지 사이를 오락가락 하며 동기부여도, 게으름에 대한 합리화도 했던 것 같다. 아이들도 필자처럼 자신들의 고행의 동기에 대해 선뜻 대답하지 못 할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혼란은 안 될 말씀. 그런 흐려빠진 정신 상태로는 절대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없다고 공부의 신 강석호님이 예언하지 않으셨냔 말이다.

강석호님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말씀하셨다. 세상은 정글이며, 전쟁이라고. 선혈 낭자한 전장에서 살아남을 무기가 너희에게 있냐고. 그 무기란 다름 아닌 천 갈래 인맥을 가진 집안 배경이나 삼대 정도는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재력이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공부의 신은 구원을 위해 오신 분이니 말이다. 맨몸으로 전장에 던져진 막장 인생들이 ‘안 당하고’ 살 수 길을 그분은 온 몸을 던져 열어 주셨다. 그 길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학벌에 오르는 것. 그것 외에는 살아남을 수 없다며 그분은 눈물까지 흘리셨던 것이다. 그러니 공부하는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다. 증오와 오기. 활화산 같은 에너지를 내뿜는 증오와 오기만 있으면 어떤 험난함도 견딜 수 있다. 혹, 독기로 가득해야 할 마음에 훈풍이라도 잠입한다면? 그 해결도 강석호님이 준비해 두셨다. 몸을 학대하는 것이다. 물구나무 서기, 오리걸음, 강당 백번 돌기, 외발로 책상 위에 서 있기. 냉동고에 머리 넣기. 썩어빠진 정신에는 육체적 학대가 약! 그런 고행 뒤에도 마음에 독기가 품어지지 않는다면 영원히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어 마땅하다.

드라마는 매회 ‘쉼 없이’ 시청자들을 계도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오늘은 전쟁터라고, 그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명문대 졸업장을 따는 거라고. 실패하면 별 볼일 없는 찌질한 인생으로 뒹굴다 가는 거라고. 드라마는 숨 찰 정도로 경쟁과 학벌 지상주의를 주입 혹은 재생산한다. 하지만 우린 기억이 없다. 우리 삶을 규정할 권한까지 공영방송에 넘겨준 기억이 없다. 핏대 선 눈으로 경쟁과 학벌을 일갈하는 공영방송의 탈을 쓴 당신, 당신이야말로 누구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리멸렬한 폭력의 일상성과 집요함이다. (루저 발언으로 후끈했던 언론과 네티즌들은 이번에는 왜 이리도 잠잠한가. 모욕의 빈도와 강도로 보자면 비교도 어려울 정도로 이 드라마는 매회 강펀치를 날리는데도 말이다.)

 

공교육에는 없다. 사교육에는 있다. - 공영방송, 사교육의 첨병이 되다

 

드라마는 방영중이다. 이제 결말은 궁금하지 않다. 각색의 묘에 감탄(?)할 정도로 드라마는 스스로 파놓은 지뢰를 살살 피해가며 초반에 이미 목적에 도달했으니까. 사교육이 베푸는 화려하고 푸짐한 시해에 대한 눈물겨운 헌사. 백번 양보해 ‘천하대 특별반’ 전원이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그간의 특별반 고행을 인생의 밑거름으로 삼아 각자의 길을 내딛는다는 훈훈한 미담으로 종결된다 해도 드라마는 사교육 자본들이 조금도 억울할 일 없이 넘칠 정도로 사교육 파워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드라마는 반복해 최고 학벌로 안내할 ‘비법’이 명백히 있다고 천명한다. 학교 교사 누구도 그 비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유일한 학교 교사인 특별반 부담임 한수정은 실력이 없어 특별반 영어 교사 자리에서 쫓겨나기까지 한다. 그렇담 그 비법은 어디에? ‘천하대 특별반’으로 둔갑한 ‘사교육’안에 모든 비법은 있었다.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설정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각 과목 외부 영입 강사들의 카리스마 넘치는 강의 묘사는 그 의도가 궁금할 만큼 세부적으로 공을 들였다. 자신감 백배, 의욕 백배, 거기에 고득점 비법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강사들을 보며 학부모들이나 학생들이 혹하는 것 또한 당연지사. 드라마 홈페이지를 가보았다. 혹시라도 모를까 기획의도를 자상히 써놓았다. ‘……이 드라마는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드라마이다. 학부모와 수험생에게 공부에 대한 명쾌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런데 묻지 않을 수 없다. 공교육 활성화를 목 놓아 외쳐도 부족할 공영 방송에서 그 ‘해법’을 하필 공교육 교사들이 아닌 사교육 강사들 손에 슬쩍 쥐어준 이유를 말이다.

 

교육 서비스의 객체로 박제된 아이들 - 아이들에게 꿈을 묻지 않다

 

드라마 속 아이들은 ‘꿈’이 없다. (예외적으로 홍찬두가 춤과 노래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 역시도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지는 않는다.) 아니, 드라마는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는다’.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아이들을 가슴에 사회에 대한 증오나 무기력함만을 담고 있는 수동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다. 마치 가난과 불화를 극복할 ‘꿈’이란 없다는 듯이 아이들 각자의 희망사항에 대해서 침묵한다. 도대체한다.이 불행한 이들은 꿈 꿀 자유마저 없다고 얘기하는 그는 누굴까. 다.이 고된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는다.에 들어가 ‘당하지’ 말고 사는 것만이 수라고 말하는 그는 누굴까. 굜까.석호는 그 무서운 각자의 지금이라도 네가 하고 싶은 뉼, 찾으라고는 말하지 않을까. ‘천하대 특별반’에 쏟아 붓는 열정이라호는다른 뉼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중반을 넘었지만, 아이들은 망중한이라도 지망학과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전공은 상관고 싶것이다. 천하대면 되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꿈을 가져서는 안 된다. 열여덟 살 그 또래가 갖는 진로에 대한 고민도 가져서는 안 된다. (드라마 속 아이들은 또래보다 많이 순진하다) 왜? 포식자에게 가장 유리한 희생물은 방향감각조차 갖지 못한 갓 태어난 새끼들이니까. 제작진은 드라마의 의도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려 함이라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담. 어렵더라도 자기 꿈을 그려가고 있는 아이들을 왜 투명인간으로 만들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실현 가능성을 떠나 아이들은 꿈을 꾸고, 그것 때문에 아파하기도 한다. 한편의 드라마에 모든 걸 담을 수는 없다고 말하지 말라. 그러기에는 아이들 캐릭터 묘사에 있어서 단순화가 너무 심하다. 단기간에 천하대에 갈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아이들이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며, 아무 과나 천하대만 우선 가면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이들이 무분별하지도 않다. (거의 유일하게 자기 의사를 가졌던 강백현의 반항은 너무 폼에 치우쳐져 현실감이 없다). 드라마 속 아이들은 꿈도, 열정도 없는 그저 사교육의 객체로만 박제되어 있다. 이야기의 맛을 위해 혹은 다른 목적을 위해 아이들에게 꿈조차 빼앗아 버린 설정은 너무 야비하지 않은가.

 

친구가 토로한 답답함이 목에 걸린다. 친구가 말한 사교육 현장과 드라마 속 현실이 겹쳐진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저 드라마가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라고. 그렇지 않다. 이 드라마는 삶의 여러 방편 중 하나를 제시할 뿐이다, 아니 들이밀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불쾌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김새만큼이나 천차만별인 저마다의 삶의 다양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학벌대로 어서 줄서라는 노골적인 강요에 기가 질리기 때문이다. 서슬 퍼런 그 자신감에 아연실색한 뿐이다. 이제는 공중파까지 타고 너무도 당당히 내 방안까지 학벌 지상주의와 우승열패의 독소를 내뿜는 자본과 시장의 논리 앞에 눈앞이 희끄무레하다. 아이들은 아니 우리들은 정말 사방이 막힌 유리 공간에서 자리만 옮겨가며 모래성 쌓기를 하고 있는 걸까. 말간 얼굴로 희망을 말하기에는 현실의 벽은 너무 완고하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너무 쉽게 그 완고한 벽을 넘어설 묘책을 숨기고 있다고 유혹해댄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는 자기만의 작은 꿈들이 꿈틀꿈틀, 스멀스멀 자라고 있다는 걸 말이다. 어떻게 아냐고? 누군가의 가슴에 어떤 꿈이 방금 막 눈 떠 기지개를 펴는 걸 살짝 엿봤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가 누구냐고? 물론 비밀이다. 하지만 당신도 아는 바로 그다. 철옹 같은 현실의 벽은 ‘넘어서’ 해결된 일이 아니다. 균열을 내야 한다. 개미처럼 물고 늘어져 각개격파로 균열을 내 무너트려야 한다. 그나저나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이라도 펴고 볼 일이다. 공중파로까지 살포되는 저 초강력 제초제가 소중한 싹들을 괴사시킬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저건 또 뭔가. TV 앞에 붙은 저 빨간 딱지는? ‘주의! 위험물’. 바야흐로 어딜 가나 주의가 요! 되는 시절이다.